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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면산의 겨울 3 ; 한양 성벽길을 거닐다 1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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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면산의 겨울 3 ; 한양 성벽길을 거닐다 1

두바퀴인생 2012. 11. 19. 09:57

 

 

 

우면산의 겨울 3 ; 한양 성벽길을 거닐다 1

 

 

                                      

 

 

 

 

서울의 역사

 

서울의 역사는 선사 시대부터 시작한다. 위례, 한산, 한양, 한성 등의 여러가지 명칭을 가지고 있으며, 대한민국의 건국과 함께 서울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선사시대는 암사동 선사주거지 등 유적지가 산재하고 있으며,

 

삼국시대에는 시대에 따라 백제, 고구려, 신라 모두가 한강 유역을 서로 차지하였다. 한강 유역과 서울을 차지한 국가는 전성기가 되었으며, 백제는 서울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가운데 기원전 18년, 온조가 하북위례성을 수도로 삼았고 기원전 5년에는 하남위례성으로 천도를 했다. 위례성은 475년 고구려의 장수왕이 점령할 때까지 백제의 수도였다. 위례성과 관련된 유적으로는 풍납토성, 아차산성, 몽촌토성, 석촌동 백제고분군 등이 있다.

 

475년에는 고구려 장수왕이 위례성을 점령하고 이름을 남평양(南平壤)으로 바뀌었다. 551년 백제가 다시 점령하였으나 553년 신라가 백제를 공격하여 위례성을 점령하여 신주(新州)로 개칭하였으나 4년 후인 557년에는 북한산주(北漢山州)라 했고, 또 11년 뒤인 568년에는 남천주(南川州)로 바꾸었다. 614년에는 다시 북한산주(北漢山州)로 바뀌었다.

 

남북국시대에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 한후 687년에는 한산주(漢山州)로 편입되었고 757년에는 한양군(漢陽郡)으로 개칭하였다.

 

고려시대에는 918년 고려 태조때 양주로 이름이 바뀌었고 983년 고려 성종은 12목의 하나인 양주목(楊州牧)이 되었으며 1067년 고려 문종남경으로 승격되어서 이 때부터 다시 서울이 큰 도시로 발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308년 고려 충렬왕은 남경을 한양부(漢陽府)로 격하 시켰다. 공민왕은 1356년 한양부를 다시 남경으로 다시 격상 시켰으나 이후 남경 천도 작업을 진행하였으나 중단되었고, 천도 논의는 우왕, 공양왕 또한 진행했었으나 모두 기각되었다. 1362년에는 다시 한양부(漢陽府)로 격하되었다.

 

조선시대에는 태조 이성계가 1392년 개경(개성)에서 조선을 건국하고 1394년 한양부(漢陽府)로 수도를 천도해서 1395년 이름을 한성부(漢城府)로 바꾸었다. 천도 이후 한양에는 각종 공사가 잇따라 시행되어 수도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1910년 〈조선총독부 지방관관제〉에 따라 한성부는 경성부로 개칭되고 경기도의 하부 조직의 하나가 되었다.

 

대한 민국이 광복 후 건국되자1945년 다시 경성을 서울로 고치고 1949년에는 서울특별시로 개칭되었으며 이후 경기도 주변으로 서울의 행정구역은 점차 넓어졌고 1963년의 대대적인 시역 확장은 오늘날 시역(市域)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1973년를 거쳐 1995년에 현재의 시계(市界)가 완성되었다. 1988년에는 서울올림픽을 개최하였고, 2002년에는 한 일 월드컵을 개최하였다.

 

 

유적

 

백제의 유적

기원전 18년경부터는 백제(百濟)의 세력이 서울 지방에 미치게 되면서 백제의 시조 온조대왕이 처음 도읍지로 삼은 곳은 하북위례성(河北慰禮城)으로, 현재 중랑천 일대 혹은 강북구 미아동 부근으로 비정된다.  이곳은 백제의 발상지가 되었다. 기원전 5년에 백제는 도읍을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으로 옮겼으며, 일반적으로 몽촌토성에 비정한다. 이후 왕도조직을 갖추면서 한성 (백제)으로 발전하는데, 한성의 왕성으로는 남북의 두 성이 있었는데 각각 몽촌토성풍납토성으로 비정된다. 백제는 678년의 역사 가운데 475년간 이 한강 유역에서 번성했다. 그 후 삼국시대에는 서울이 군사적 요충지가 되어 삼국이 모두 서울을 차지하려고 하여, 세력의 충돌 중심지가 되기도 하였다.

  • 풍납토성
  • 몽촌토성
  • 백제 적석총

 

 

고구려의 유적

392년에 고구려의 광개토왕은 백제를 공격하여 한때 서울을 점령하였고, 475년에 장수왕은 또 다시 백제를 공격하여 서울을 점령하여 위례성을 남평양(南平壤)이라고 하였다. 서울은 551년 백제가 점령 할때까지 76년 동안 고구려의 지배를 받았다.

  • 아차산성

 

신라의 유적

신라는 국력을 신장하여 영토 확장에 힘을 써오다 백제와 연합하여 551년에 고구려의 세력을 한강 유역에서 물리쳤고 553년에는 백제를 공격해서 서울을 차지하였다. 서울의 이름을 신주(新州)로 개칭하였으나 4년 후인 557년에는 북한산주(北漢山州)라 했고, 또 11년 뒤인 568년에는 남천주(南川州)로 바꾸었다. 614년에는 다시 북한산주(北漢山州)로 바뀌었다. 경덕왕때는 한주라 개칭하고, 서울은 한양군(漢陽郡)이라고 하였다. 이 명칭은 고려 건국까지 계속 사용되었다.

  • 이성산성 - 백제, 고구려, 신라 중 어느 나라의 유적인지는 아직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한성부의 역사

 

고려시대

서울은 918년 고려 태조때 양주로 이름이 바뀌었고 983년 고려 성종 때 12목의 하나인 양주목(楊州牧)으로 승격되어 지방행정구역의 중요한 단위가 되면서 정치적 비중이 높아지게 되었다.

 

1067년 고려 문종 때에는 양주목에 소속시켰던 것을 3소경의 하나인 남경(南京)으로 승격시켰다. 남경의 규모는 동쪽이 대봉(大峰, 현 낙산), 서쪽이 기봉(岐峰, 현 안산), 북쪽이 면악(面嶽, 현 북악산), 남쪽이 사리(沙里, 현 용산 남단)까지로, 서울은 더욱 지방제도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서울에 궁궐이 처음으로 창건되었고, 인근의 백성들을 이주시켜 생활하게 함으로써 도시로서 발전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숙종 때에는 현재의 경복궁(景福宮) 부근에 남경 이궁(離宮)을 짓는 등 건설사업이 추진되었다. 1231년 이래 몽골이 침입하던 때에는 몽골군의 주둔지가 되기도 하였다.

 

1308년 충렬왕은 원나라의 간섭으로 3경제도가 없어지자, 남경은 지방단위의 하나인 한양부(漢陽府)로 격하되었다. 그러나 공민왕은 1356년에 다시 3경 제도를 부활시켜 남경으로 승격하여 궁궐을 중수하였다. 1362년에는 다시 한양부(漢陽府)로 격하되었다. 그리고 원나라의 간섭을 벗어나 국권을 회복하자는 정책인 한양천도론은 우왕 때에 고조되어, 마침내 1382년 9월에 한양으로 천도를 단행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2월에 다시 개경으로 돌아가게 되어 천도기간은 6개월에 불과하였다. 그 후 공양왕 때에 다시 한양으로 천도하였으나 또 6개월 만에 개경으로 돌아갔다.

 

최초로 남경을 세운 것은 고려 문종 23년(1068년)으로 보인다. 이에 관한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약 30년 뒤인 숙종대 1099년에도 건도 논의가 있었고, 1101년에는 실제로 집행된 것으로 보인다. 같은 곳에는 일관인 최사추 등의 상주가 수록되어 있다.

 


서울 600년사에 따르면 대봉은 낙산이며 기봉은 안산이고 사리는 신용산·이촌 일대라고 한다. 즉 남경은 조선조의 도읍보다 더 넓은 지역을 차지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천도의 논리를 제공한 것은 김위제라는 일관으로 보인다. 김위제는 도선의 비기·답산가, 그리고 저자가 불명확한 신지비사(神誌秘詞)를 근거로 개성의 지덕이 그의 시기에 쇠하였음을 이야기했다. “건국한 후 1백 60여 년에 목멱벌에 도읍한다”고 하며, 그 근거로는 앞선 도참서들 말고도 오행설, 즉 존재자들에게 부여되는 속성들의 상응 체계 역시 그 뒷부분에서 인용되었다. 비기의 내용으로 인용된 문장가운데는 “11, 12, 1, 2월을 중경에서 지내고 3, 4, 5, 6월을 남경에서 지내며 7, 8, 9, 10월을 서경에서 지내면 36개국이 와서 조공할 것이다.”가 포함되어 있고, 이는 묘청의 난과 같은 고려조의 여러 사건들에서 여러 차례 근거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공민왕1356년 이후 남경 천도 작업을 진행하고 이 과정을 주도했는데, 고려사에 의하면 국왕의 천도 의지가 분명했다. 그러나 지속적인 전쟁과 기근으로 인해 그 실행이 힘들었던 것 같다. 명확한 중단 기사는 없으나 공민왕 즉위 10년을 넘기면서 적극적인 천도 진행 기사를 찾아볼 수는 없게 된다. 또한 유학자들이 공민왕을 제지했다는 점 또한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천도 논의는 우왕, 공양왕 또한 진행했었으나 공민왕대와 동일한 이유로 인해 모두 기각되었다.

 

 

 

조선시대

 

한성부(漢城府)는 조선 시대 서울특별시의 이름이자, 그 지역을 담당하여 관할하는 관청이다. 조선이 개국하면서 조선 태조는 풍수 도참설에 따라 1394년 조선의 수도를 이곳으로 정하였다. 이 당시 한성부의 영역은 현재의 종로구, 중구보다 좁은 지역이다. 이어 조선 태종 때, 궁궐을 확장하고 상가를 짓는 등 도시가 확장되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도시는 많이 파괴되었다가 19세기에 많이 복구되었다. 19세기말, 각종 근대 문물이 들어왔고, 1910년 일본 제국에 의하여 경성부로 개칭되었다. 한성부는 정2품인 한성판윤이 최고 책임자였다. 하부 행정구역은 오부와 방(坊)과 계(契)·동(洞)으로 구성되었다. 15세기 초 인구는 10만명 정도였다.

 

 

 

 

경복궁

 

 

 

 

 

경복궁 어좌의 모습

 

 

 

천도의 배경

1392년에 개경(개성)에서 조선왕조를 세운 태조 이성계는 조선왕조의 면목과 인심을 새롭게 할 목적으로 도읍지를 옮기기로 결심을 하였다. 수도를 옮기는 것을 결정하는 데에는 군주인 이성계의 의지가 결정적이었다. 태조는 한시라도 빨리 옛 왕조로부터 벗어나고 새 왕조의 권위를 높이기 위하여 새 왕조가 하늘의 명을 받고 백성들의 지지를 받아 정당하게 세워졌음을 세상에 널리 강조하였다. 태조가 천도를 한 이유로는 기존 세력의 근거지인 개경에 대한 정치적 불안과 심리적 갈등, 그리고 풍수 지리설의 영향, 민심의 쇄신 등을 들 수 있다.  새 도읍지를 물색하던 중 무학국사와 하륜(河崙) 등 중신들의 의견에 따라 1393년에 도읍지를 한양으로 정하고 1394년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설치하여 새 수도의 도시 계획을 구상하였다. 1394년 11월 26일(음력 10월)에 한양으로 천도(遷都)를 하였다. 천도의 기준은 풍수·도참설에 따르면서, 남쪽에 한강이 있어 교통상 조운(漕運)이 편리할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정도전을 비롯한 유학자들은 이러한 논거에 반대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성계의 의지가 굳건했기 때문에 천도는 기정사실이 되었다.

 

한편 풍수·도참설에 능했던 하륜에 따르면 오늘날의 연세대학교 자리인 무악 일대가 명당이었고, 이로 인해 수도의 위치에 대해 크게 논의가 일기도 했다. 실록에 따르면 이성계는 이러한 논거로 수도의 입지를 정하였다고 한다.

“우리나라 경내에서는 송경이 제일 좋고 여기가 다음가나, 한되는 바는 건방(乾方, 북쪽)이 낮아서 물과 샘물이 마른 것 뿐입니다.”
임금이 기뻐하면서 말하였다.
“송경인들 어찌 부족한 점이 없겠는가? 이제 이곳의 형세를 보니, 왕도가 될 만한 곳이다. 더욱이 조운하는 배가 통하고 [사방의] 이수도 고르니, 백성들에게도 편리할 것이다.”

– 《태조실록》, 3년 8월 13일조

따라서 풍수·도참설에 기반한 논의가 국왕의 결정에 결정적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왕사 자초(무학)가 인왕산에서 출발한 축을 따라 하여 도읍의 터를 잡자고 주장했다는 설은 야사로 16세기 말~17세기 초에 간행된 《오산설림》에 수록되어 있는 이야기다. 실록에는 전혀 전하지 않는 이야기로, 신뢰할 수 없다.

 

1395년(태조 4년) 6월 6일에 한양부(漢陽府)의 명칭을 한성부(漢城府)로 고쳤다. 한양 천도 당시에 궁궐과 관청이 세워진 지역에 살던 백성들을 현주(見州)로 옮기고 양주군(楊州郡)이라 고친 바 있다.

 

 

 

한성의 건설

 

 

  

1894년 한성의 모습

 

 

태조(太祖)는 궁궐을 중심으로 ‘좌묘우사, 전조후시(左廟右社, 前朝後市)’라는 동양 고래의 수도 배치 원칙에 따라서 도읍을 건설하였다. 천도 이후 한양에는 각종 공사가 잇따라 시행되어 수도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조정과 시장 또한 비슷한 시기에 건설되었다. 성곽은 궁궐과 종묘가 완공된 이후에 건설되었다. 가장 먼저 서쪽에 사직(社稷)을 완공하고, 궁궐을 세운 뒤, 그 동쪽에 종묘(宗廟)가 완성되었다. 그리고 광화문 앞에 육조관서(六曹官暑)를 배치하여 관아가(官衙街)로 하고, 북쪽 신무문(神武門) 밖에는 시장을 두었다. 이때부터 서울은 조선의 정치도시로서의 기능을 갖추어 나가기 시작하였다. 그 다음으로 태조는 한양의 방위를 튼튼히 하기 위하여 북악산과 낙산(駱山)·남산(南山)·인왕산(仁旺山)을 잇는 약 17km의 성벽을 쌓기 시작하였다. 1395년에 한양을 한성(漢城)으로 개칭하고 1395년에는 한성의 행정구역을 설정하였다. 그 행정구역은 도성(都城)과 성저(城底)로 구성되었는데, 조선시대의 500년 동안을 사용하여 왔던 것이다. 도성은 성 안의 땅으로 모두 국유지이며, 궁궐·관청·도로·하수도·시장 등의 위치가 정해져 있었다. 성저(성저십리)는 성벽으로부터 사방 10리 되는 한계선까지를 가리키는데, 북쪽은 북한산, 남쪽은 한강 노도(露渡), 동쪽은 양주 송계원·대현(大峴)[6]·중랑포(中浪浦)·장안평, 서쪽은 양화도(楊花渡)·고양덕수원(高揚德水院), 모래내(沙川)를 따라 난지도(蘭芝島) 부근까지였다. 이 지역내는 산림과 풍치의 보호를 목적으로 암장과 벌목·채석이 금지되었다.이 도성은 동·서·남·북·중부의 오부(五部)를 두고 그 밑에 52방(坊)을 두었다. 같은 해 9월에 성벽과 문루(門樓)가 완성되어 왕성은 주위에 견고한 성벽이 쌓여진 성곽도시가 되었다. 1398년 왕자의 난이 일어나고, 정종이 즉위하면서 2년동안 수도를 개성으로 옮긴 일이 있었으나, 태종(太宗)이 즉위하자 곧 한성으로 다시 환도하였다.  태종대에는 태종의 즉위를 도와 강력한 권세를 지니고 있던 하륜이 다시금 무악천도론을 주장하였고, 여기에 개성까지 더해 세 개의 후보지가 다시금 조선조 수도가 입지할만한 곳으로서 놓이게 되었다. 여기서 태종은 동전을 던져 길흉을 점치는 척전(擲錢)으로 도읍을 결정하기로 했다. 척전의 결과는 "신도(新都)는 2길(吉) 1흉(凶)이었고, 송경(松京)과 무악(毋岳)은 모두 2흉(凶) 1길(吉)이었다"고 한다. 물론 태종은 태조의 결정으로 지어진 수도를 버리는 데 대한 부담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고, 새로이 토목공사를 일으키는 데 대한 부담감 역시 컸을 것으로 보인다.

 

환도한 다음 해부터 궁궐을 수축하면서 도읍지로서의 여러 시설을 갖추어갔다. 노폭 56척(尺)의 (운종가(雲從街))를 비롯하여 노폭 16척, 11척의 각종 도로를 만들고, 그 양쪽에는 가가(假家)라고 부르는 상점을 만들어 번화하게 하였는데 상점이 들어서 있는 토지는 10년을 한도로 대여하여 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간선도로변에는 2척의 구거(溝渠)를 만들어 배수가 잘 되게 하였다. 또한 개천(開川)을 준공하여 배수가 잘 되게 하였고, 도읍지의 미관과 화재예방을 위하여 초가(草家)의 건축은 억제하였다.

 

1394년 - 1398년과 1400년 - 현재까지 두 시기로 한양의 수도시기를 나눠 볼 수 있다. 1394년부터 4년 동안 수도였다가 1400년부터 다시 수도가 된 것인데 맨 처음 한양이 수도로 정해진 때까지 합치면 610년이 넘고, 태종 즉위부터 따지면 600년 가량 된다. 조선이 개국하면서 조선 태조는 풍수 도참설에 따라 1394년 조선의 수도를 이곳으로 정하였다. 이 당시 한성부의 영역은 현재의 종로구, 중구보다 좁은 지역이다. 이어 조선 태종 때, 궁궐을 확장하고 상가를 짓는 등 도시가 확장되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도시는 많이 파괴되었다가 19세기에 많이 복구되었다. 19세기말, 각종 근대 문물이 들어왔고, 1910년 일제에 의하여 경성부로 개칭되었다. 한성부는 정2품인 한성판윤이 최고 책임자였다. 하부 행정구역은 오부와 방(坊)과 계(契)·동(洞)으로 구성되었다. 15세기 초 인구는 10만명 정도였다.

 

 

 

 

한성부 18세기 무렵 지도

 

 

 

조선 중기, 후기

 

 

 

1905년의 한성

 

 

1592년 선조 때의 임진왜란과 1624년 인조 때의 병자호란으로 입은 피해는 흥선대원군 때에 와서 많이 복구가 되었다.1876년 개항 이래 외국인에게 문호를 개방하고 한성에는 새로운 문명시설이 갖추어져 가는 등, 현대화하기 시작하였다. 서울은 동아시아에서 전기, 전차, 수도, 전화, 전신 체계를 모두 동시에 갖춘 최초의 도시가 되었다.그 중 상당수는 미국과의 교역에 따른 것이었다. 근대적인 병원·학교·교회·신문사 등이 세워졌고, 1898년에는 서대문과 홍릉(洪陵) 사이에 전차가 부설되고, 1899년에는 경인선의 개통과 전화의 가설, 1900년에는 한강가교가 준공되었다. 그러나 계속하여 근대적인 상공업 발달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1895년 5월 26일 고종이 전국을 23부로 나누면서 한성부를 하나의 지방행정구역으로 개편하였고 1910년 총독부령에 따라 경성부로 개칭되었다.

 

조선 시대의 한성부의 구역은 오늘날의 서울보다 훨씬 협소하였다. 동쪽의 낙타산, 서쪽의 인왕산, 남쪽의 목멱산, 북쪽의 백악산으로 둘러싸인 분지가 그 터전으로서, 성 밖의 일부 지역도 관할했지만, 원칙적으로 성 안의 구역만을 한양이라 하였다.

 

일정한 지역을 담당하는 점에서는 일반적인 지방 기관과 같지만, 수도라는 점에서 중앙관청으로 인정하였으며 육조와 같은 격의 관청으로 대우하였다. 형조·사헌부와 함께 삼법사(三法司)라고도 불렸다. 서울의 호구, 시장 및 점포와 가옥 및 토지, 산, 도로, 교량, 하천 등의 관리와 재정 및 사법, 검시, 고실 등의 일을 담당했다. 한성부의 관할 영역은 한양과 성저십리였다.

 

 

 

행정 구역

 

오부

동·서·남·북·중(中)의 오부로 구성되었으며, 이 아래에는 방(坊)과 계(契)·동(洞)을 두었다. 한성부 설치 당시에는 52방을 두었다.

 

52방은 세종 때 서부의 3방을 폐지하여 49방이 되고, 영조(英祖) 때는 동부 6방, 남부 11방, 서부 9방, 북부 12방, 중부 8방으로 5부 46방이었으며, 그 밑에 328계(契)를 두었다. 그후 1865년(고종 2) 동부에 경모궁방(景慕宮坊)이 신설되어 47방이 되고, 계도 11개가 증가되어 339계가 되었다.

 

조선 초기의 한성부 관할구역은 도성으로부터 사방 10리까지로 하였으나, 대부분의 인구가 도성 내에 집중되어 1428년(세종 10) 한성부 인구 10만 3328명 가운데 도성 밖 10리까지의 인구는 불과 6,044명 뿐으로, 도성 밖에는 서대문·서소문 밖에 2방, 동대문 밖에 2방, 남부의 2방 등 6방이 있을 정도였다.

 

 

 

 

경성부(京城府, 1910년~1946년)

 

 

1900년대의 서울

 

조선대한제국의 수도였던 한성부1910년한일 합방과 함께, 같은 해 9월 30일에 시행된 조선총독부지방관관제에 의하여 ‘경성부’로 개칭되어 경기도의 도청소재지가 되었다. 경성부라는 이름은 수도가 있는 서울이라는 성곽을 가리킨 뜻이지만, 그 의미의 약화를 위해서 대개 일본식 발음인‘게이조’발음으로 불렀다. 1936년에 도시화가 진행됨에 따라 주변 지역을 병합하여 4배로 확장되었고, 1943년에는 인구 증가에 따라 가 설치되었다. 이때 7구가 설치되고, 1944년에 주변 지역을 병합해 마포구를 추가로 설치하였다.

 

 

 

서울특별시

 

광복 후 및 한국 전쟁

1945년 8월 15일 광복으로 서울은 한때 미군정 관할하에 있기도 하였으나, 그 해 10월 행정의 책임자가 우리나라 사람으로 바뀌었다.1946년 8월 16일 경기도에서 독립하여 서울자유특별시가 되면서 행정상의 직능과 권한이 도단위와 같게 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 1일에는 종래에 써 오던 가로명과 동명의 일본식 명칭을 없애고, 선조들의 아호와 고유명칭으로 바꾸었다. 이때부터 서울의 인구는 해마다 증가하였고, 주변 지역은 크게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 1945년 8월 15일 8.15 광복, 일본의 무조건 항복, 서울은 미군정 관할하에 있게 되었다. 그 해 10월 행정의 책임자가 한국 사람으로 바뀌었다. [1]
  • 1946년 8월 15일 경기도 경성부를 서울시로 개칭
  • 1946년 9월 28일 서울시가 경기도 관할에서 분리되어 서울특별자유시로 승격되었고 행정상의 직능과 권한이 도(道)단위와 같게 되었다. [1] 관할 구역은 종전과 같이 8개의 구(종로구, 중구, 마포구, 성동구, 서대문구, 동대문구, 용산구, 영등포구)로 하였다.  이에 따라 서울특별자유시는 직능과 권한이 도와 동등하게 되었다.
  • 1946년 10월 9일에는 서울특별자유시의 행정기구를 개편하여 종래에 1실 4부였던 것을 8개국으로 하는 동시에 서울특별자유시 헌장 제1조에 의하여 행정구역의 명칭을 변경하였는데 구제도는 종전과 같이 8구제를 실시하였고 여기에 속한 동(洞)은 모두 267개 동이었다. 동명은 종래에 써 오던 가로명(街路名)과 동명(洞名)의 일본식 명칭을 바꿔 한성부 때부터 내려오는 유서깊은 동명 또는 위인이나 선철(先哲)들의 이름, 선현(先贅)들의 아호(雅號)와 고유명칭을 따서 새로 제정하였는데 정목(丁目)은 가(街)로, 통(通)은 로(路)로, 정(町)은 동으로 변경하였다.
  • 1948년 8월 1일 서울시내 자동차 4,706대 등록
  •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대한민국의 수도가 되었다. 이 시기에 가로를 확장하여 대로변에 있는 일본식 상점 건물은 철거하고 새로운 양식의 건물을 세우기도 하였다. [1]
  • 1949년 8월 15일 서울의 명칭을 서울특별시로 결정하고, 고양군의 숭인면·뚝도면·은평면·연희면 일부와 시흥군의 신동면 중 구로리, 도림리, 번대방리를 서울에 편입시켜 면적이 268.3㎢로 확장되고 인구는 141만 8천 명이 되었다.  숭인면과 동대문구 일부에 성북구를 설치하여 9개 구가 되었다. [12] 새로 편입된 지역을 관할하기 위하여 같은 날 서대문구은평출장소, 성동구뚝도출장소, 성북구숭인출장소가 설치되었다.
  • 1949년 8월 15일 제1회 서울시 문화상 시상식
  • 1949년 8월 15일 서울특별자유시에서 서울특별시로 개칭
  • 1950년 3월 15일 서울특별시에 속한 (里)가 모두 (洞)으로 변경됨
  • 1950년 6월 25일 6·25 전쟁 발발, 정부는 부산으로 일시 옮겨 갔다.
  • 1950년 6월 28일 대한민국 국군한강 인도교를 폭파함. 서울시가 조선인민군에게 점령당함
  • 1950년 9월 15일 유엔군의 인천 상륙 작전이 성공함.
  • 1950년 9월 28일 대한민국 국군이 서울을 수복함.
  • 1951년 1월 4일 조선 인민군이 다시 승기를 잡으면서, 서울을 점령(1.4 후퇴)부산에 서울특별시 행정청 설치를 피난하다.
  • 1951년 3월 14일 대한민국 국군이 서울을 수복하였다. 그러나 한국전쟁으로 시가(市街)는 심한 전재(戰災)를 입었다. 즉 정부기관·공공시설·공장·학교·주택 등의 도시의 기본적인 시설이 일시에 파괴되어 많은 피해를 입게 되었다.
  • 1952년 7월 20일 한강철교 복구 개통

 

 

서울의 확장과 현대화

휴전(休戰) 후 전국 곳곳에 피난갔던 시민들이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따라서 서울은 전후(戰後) 복구사업에 착수하였고, 시민들의 생활도 활기를 띠게 되었다. 서울은 계속 발전하여 1960년 말에는 244만 5천 명의 인구가 생활하고 있는 대도시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리고 1960년경 이후부터 도심지에는 많은 회사와 금융기관이 집중하게 되면서 사무실이 부족하게 되고, 지가(地價)가 급속하게 상승되면서 도심지의 토지이용에 큰 변화가 생겼다. 그래서 1960년경부터 소공동(小公洞)·명동(明洞)·서소문·퇴계로·충무로 1가·회현동 등지에는 10∼20층 내외의 고층건물이 들어서서 도심지의 스카이 라인(skyline)은 높아져 갔다. 즉 서울도 근대적인 거대 도시(巨大都市-metropolitan)로서의 경관을 보이게 되었다. 그 반면 도심지에 있었던 주택지는 점점 줄어들어 공동화 현상이 나타남으로써, 청계·종로·수송·방산·일신·서대문 초등학교가 폐교되었다. 한편 강남의 영동지구에는 신흥주택 단지, 여의도와 반포지구에는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1975년에는 강남구, 1977년에는 강서구, 1979년에는 은평구·강동구, 1980년에는 구로구·동작구가 신설되어 총 17개 구가 되었다. 이어 1988년까지 양천구·서초구·송파구·중랑구·노원구가 신설되었고 1996년 광진구·강북구·금천구가 신설됨으로써 서울특별시의 행정구역은 총 25개 구로 늘어났다.

  • 1953년 9월 23일 서울시내버스 운수조합 창립
  • 1954년 1월 7일 서울시내 택시조합 창립
  • 1955년 4월 18일 : 행정동제가 실시됨.
  • 1955년 5월 31일 : 서울시내 무허가 건물 철거시작
  • 1956년 8월 13일 : 초대 서울특별시의회 의원선거 실시 - 9월 5일 의회 구성
  • 1956년 8월 16일 : 서울특별시 교육위원회 발족으로 교육자치제 실시
  • 1958년 5월 15일 : 한강인도교 개통
  • 청계천 복개공사 완공(1958년1961년, 12월 3일)
  • 1960년 4월 19일 : 4·19 혁명이 서울에 일어났다.
  • 1961년 5·16군사정변 이후 서울은 또다시 새로운 발전을 하게 되었다. 수도 서울의 건전한 발전을 도모할 목적으로 서울특별시는 행정상 내무부장관의 감독권을 벗어나, 국무총리에 직속되게 되었다. 따라서 서울특별시장은 소관사무에 관하며 국무회의에 출석하여 발언을 할 수 있게 되었다. [1]
  • 1961년 12월 4일 : 최초 단지아파트(마포아파트) 건설
  • 1962년 1월 1일 : 서울시민헌장 발표
  • 1962년 5월 16일 : 남산케이블카가 등장했다.
  • 인구의 증가로 시가지의 확대가 불가피하게 되어 1963년 1월 1일 경기도 양주군의 구리면·노해면, 광주군의 구천면·언주면·중대면·대왕면, 김포군의 진동면·진서면, 부천군의 오정면·소사면, 시흥군의 신동면의 전부 또는 일부가 성동구·동대문구·성북구·영등포구에 각각 편입되었다.  이상의 지역이 서울특별시로 편입됨으로써 시역(市域)은 강남지구와 북동부쪽으로 크게 확대되었고 서울특별시의 총면적은 613.04㎢에 달하였으며 서울특별시민은 3,094,022명이 되었고 행정기구는 9개구, 13개 출장소, 341개의 행정동이 설치되었다. 따라서 도심부에 있는 주택·학교·공장의 일부가 천호동·불광동·남가좌동·월곡동·장위동·화계동·공항동 등의 주변지역으로 이전하게 되었다.
  • 1966년 5월 3일 : 광화문 지하보도 공사
  • 1966년 1월 31일 ~ 1969년 12월 31일 : 제3한강교(현 한남대교)착공됨
  • 1967년 6월 15일 : 세운상가 개관
  • 1967년 6월 17일 : 태평로 지하도 개통
  • 1967년 8월 13일 : 3·1고가도로(청계고가도로) 완성(2003년에 철거되었다.)
  • 1968년 4월 1일 : 서울 세종로 충무공 동상 제막
  • 1968년 11월 30일 : 서울시내에 전차운행이 중지되었다.
  • 1969년 3월 31일 ~ 1970년 8월 31일 남산 1·2호터널 개통

서울특별시는 판자촌과 도시빈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신도시(성남)를 개발하여 빈민들을 이주시키는 정책을 세웠다. 그리하여 서울의 청계천 일대를 비롯한 판자촌을 대거 철거하면서 주민들을 강제 이주시킬 계획을 마련하였다. 서울특별시는 1968년 5월 7일 건설부로부터 개발인가를 받아 1969년 4월 1일 "중부면 성남지구 일단의 주택단지 경영사업" 조성공사에 착수하였으며, 1969년 5월 2일부터 경기도 광주(지금의 성남시 지역)로 서울시의 철거민을 집단 강제 이주시켰다. 그렇게 해서 모인 빈민들의 수는 14만5천여 명에 이르렀다.  1970년 3월 17일 조선호텔은 지하 2층, 지상 18층 규모의 최신식 호텔을 새로 지어 개관하였다.

  • 1970년 4월 26일 : 마포구에 와우시민아파트 붕괴
  • 1970년 7월 17일 : 경부고속도로가 완공되었다.
  • 1971년 4월 12일 : 서울 지하철 서울역앞 - 청량리 구간 기공 1971년 10월 18일부터 서울 시청 광장과 맞닿아 있는 화교 상가가 철거됐다. 한국화약이 소공동 땅을 화교로부터 매입하여 호텔부지를 확보하였다. 소공동 일대 도심 재개발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 1971년 12월 25일 : 대연각 호텔이 화재로 소실
  • 1972년 7월 14일 : 잠실대교 개통
  • 1972년 5월 5일 : 서울어린이대공원(능동) 개관
  • 1973년 7월 1일 : 도봉구관악구가 신설되어 11개 구가 되고, 경기도 고양군 신도면 구파발리, 진관내리 및 진관외리가 서울시 서대문구로 편입되었다. 이로써, 면적은 627.06㎢ 가 되었다.  1973년 한국화약은 소공동 부지 지하 3층, 지상 22층짜리 호텔을 짓기 시작해 1976년 9월에 준공했다. 서울 도심부 재개발 사업 제1호 사업으로 플라자호텔이 탄생한 것이었다.
  • 1974년 8월 15일 : 서울 지하철 1호선(종로선) 서울역앞 - 청량리 구간 개통
    • 이와 동시에 수도권 전철 1호선 서울역앞 - 수원, 구로 - 인천, 청량리 - 성북 구간이 개통하여, 서울 지하철 1호선과 직결 운행
  • 1975년 10월 1일 : 강남가 신설됨
  • 1976년 5월 1일 ~ 1978년 5월 21일 : 남산 3호터널 개통
  • 1977년 10월 1일 : 강서구가 신설됨
  • 1978년 4월 14일 : 세종문화회관 개관
  • 1980년 9월 10일 : 성수대교 개통
  • 1979년 10월 1일 : 강동구은평구가 신설됨
  • 1980년 7월 1일 : 동작구구로구가 신설됨
  • 1984년 5월 1일 : 경기도 과천시에 서울대공원 개장
  • 1984년 5월 22일 : 서울 지하철 2호선 전체 개통
  • 1985년 4월 20일 : 4호선 1차 개통
  • 1985년 10월 1일 : 서울 지하철 3호선, 4호선 전체 개통
  • 1985년 5월 16일 : 88올림픽대로가 개통
  • 1986년 9월 17일 : 제10회 아시안게임대한민국서울에서 개최
  • 1986년 9월 17일 : 한강유람선 운행 개시
  • 1988년 1월 1일 강동구, 동대문구, 도봉구, 강남구, 강서구로부터 각각 송파구, 중랑구, 노원구, 서초구, 양천구가 분리 설치[19].
  • 1988년 9월 17일 제24회 하계 올림픽, 대한민국서울에서 개막
  • 1988년 9월 19일 미국의 맥도날드 햄버거가 압구정동에 상륙
  • 1988년 10월 2일 올림픽 종료
  • 1990년 6월 14일 서울지하철 5,6,7,8 호선이 기공식이 열리고
  • 1991년 2월 15일 승용차 10부제 실시
  • 1994년 10월 21일 성수대교 붕괴
  • 1994년 11월 29일 서울이 수도가 정해진지 600년이 됨, 한옥마을에 타임캡슐 매장
  • 1995년 1월 1일 성동구, 도봉구, 구로구 중 일부를 관할로 각각 광진구, 강북구, 금천구가 설치되었다.
  • 1995년 1월 18일 쓰레기 종량제가 실시하였다.
  • 1995년 2월 20일 버스전용차선제 실시
  • 1995년 3월 1일 서울특별시경기도 광명시 간의 경계 조정이 이루어짐으로써 현재의 서울 시계가 형성되었다. 광명시 소속이었던 철산교의 서울방향 인근 부지가 서울로 편입되었다.
  • 1995년 6월 29일 삼풍백화점 붕괴
  • 1996년 지하철5,7,8호선 개통
  • 1997년 여의도광장에 서울공원을 착공
  • 1998년 상암동에 월드컵경기장을 착공
  • 1999년 7월 2일 지하철 8호선 전구간 개통
  • 2000년 지하철 7호선 개통
  • 2000년 미디어시티 2000 개최
  • 2000년 서울에 아시아 유럽 정상회의가 개최
  • 2000년 서울시티투어버스 개통
  • 2000년 제1회 서울세계불꽃축제 개최
  • 2000년 4대문안 역사문화탐방로 인사동길 조성
  • 2000년 서울드럼페스티발 2000 개최
  • 2000년 지하철 5호선 광화문갤러리 오픈
  • 2000년 지하철 6호선 개통
  • 2001년 지하철 6호선 전구간 개통
  • 2001년 서울 상암동 월드컵 경기장 개장
  • 2001년 지하철 9호선 착공
  • 2002년 한·일 FIFA 월드컵을 개최
  • 2003년 제1회 하이서울 페스티벌를 개최
  • 2004년 하이서울 퍼포먼트 페스티벌를 개최
  • 2005년 서울숲 개장
  • 2003년 7월 1일부터 2005년 9월 30일까지 청계천 위의 고가도로를 철거하고 복개를 걷어내고 청계천 주변 공간을 정비하였다.
  • 2007년 동대문운동장 철거
  • 2008년 동대문디자인플라자를 착공
  • 2008년 서울디자인풀라자 2008 개최
  • 2010년 G20 정상회의 서울 개최
  • 2011년 서울특별시 주민투표 투표율 저조 인한 오세훈 시장이 사퇴 및 보궐선거로 현재의 서울시장인 35대 박원순 시장이 취임을 하였다.
  • 2012년 핵안보 정상회의 서울 개최

 

 

 

 

 

서울 성곽

 

 

 

 

 

 서울의 성곽(城郭),

수도 서울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도성(都城)이며, 조선의 역사이자 서울의 상징이다.

 

성곽은 높이가 12m, 둘레가 약 18㎞에 이르며 서울을 구성하는 내사산(內四山:북악산, 낙산, 남산, 인왕산)의 능선을 잇고 있는데 그 모양은 타원형에 가깝다.


세종 4년(1422)에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하였으며, 숙종 30년(1704)에는 개축을 하며 쌓는 등 서울 성곽은 여러 번에 걸친 수리과정을 거치며 쌓은 시기를 구분할 수 있는 면모를 보여주기도 한다.


일제시대에는 도시계획이라는 구실로 성문과 성벽을 무너뜨렸고, 해방과 한국전쟁으로 인해 더욱 많이 파괴되었으며, 현재 삼청동· 장충동 일대의 성벽 일부와 남대문 ·동대문 ·숙정문 ·홍예문이 남아있다.


조선 건국 초에 태조가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기 위하여 궁궐과 종묘를 먼저 지은 후, 태조 4년(1395) 궁궐,종묘사직,궐외각사가 있는 한양을 방어하고 보호하기 위해 만든 도성(都城)으로 성곽에는 4대문과 4소문을 두었다.


4대문흥인지문(동대문), 돈의문(서대문), 숭례문(남대문), 숙정문(북대문)이고,

4소문홍화문(동소문), 소의문(서소문), 광희문(남소문), 창의문(북소문)을 말한다.


 

흥인지문(興仁之門)은 성곽 8개의 문 가운데 동쪽에 있는 큰 문이며 조선 태조 7년(1398)에 완성했다가 단종 원년(1453)에 고쳐지고, 현 흥인지문은 고조 6년(1869)에 새로 지은 것이다. 앞면 5칸·옆면 2칸 규모의 2층 건물로, 지붕은 다포양식의 우진각 지붕이고 그 형태가 가늘고 약하며 지나치게 장식한 부분이 많아 조선 후기의 특징을 잘 나타내주고 있고 바깥쪽으로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반원 모양의 옹성(甕城)을 쌓았는데, 흥인지문은 도성의 8개 성문 중 유일하게 옹성이 있다.

돈의문(敦義門)은 서울 성곽의 4대문 가운데 서쪽 큰 문으로 서대문(西大門) ·새문 신문(新門)이라고도 하며 1396년(태조 5) 한양 도성(都城)의 2차 공사가 끝나고 8문이 완성되던 때 처음 세워졌는데 석축 한 가운데에 무지개문을 크게 내고 축대 위에는 단층 우진각지붕집의 초루(譙樓)를 세우고 둘레에 낮은 담을 설치했다. 1413년(태종 13) 폐쇄되고 그 대신 그 북쪽에 서전문(西箭門)을 새로 지어 출입케 했다.1422년(세종 4) 다시 서전문을 헐고 돈의문을 수리했다. 그 뒤 보수하여 1711년(숙종 37)에 다시 지었으나, 1915년 일제 총독부의 도시계획에 따른 도로확장 공사로 철거됐다.

숭례문(崇禮門)은 도성의 남쪽 정문이라 남대문(南大門)이라고 불리며 1395년(태조 4)에 짓기 시작하여 1398년(태조 7)에 완성되고, 1447년(세종 29)에 개축하였으며 1479년(성종 10)에도 대규모의 보수공사를 했다. 숭례문은 중앙부에 홍예문(虹蜺門)을 낸 거대한 석축기단 위에 섰으며, 정면 5칸, 측면 2칸, 중층(重層)의 다포(多包)양식의 우진각지붕 건물이다. 석축 윗면에는 벽돌로 된 여장(女墻)을 돌려 동·서 양쪽에 협문(夾門)을 열었고, 지붕은 위·아래층이 모두 겹처마로 사래 끝에는 토수(吐首)를 달고 추녀마루에는 잡상(雜像)과 용두(龍頭), 그리고 용마루 양가에는 독수리머리를 올렸다.

숙정문(肅靖門)은 서울 성곽의 다른 문과 같이 태조 5년(1396)에 창건되었다. 연산군 10년(1504)에 원래의 위치에서 약간 동쪽으로 이건하였는데 홍예(虹霓)로 된 석문(石門)만 세우고 문루(門樓)는 세우지 않았다. 풍수설과 음양설에 따라 숙정문을 닫아 두었거나 열어 놓기도 하는데 태종 13년(1413) 6월에 숙정문을 폐쇄하고 길에 소나무를 심어 사람의 통행을 금지하고 태종 16년(1416)에는 기우절목(祈雨節目)을 만들어 가뭄이 심하면 숙정문을 열고, 비가 많이 내리면 숙정문을 닫았으며 현 숙정문은 1976년 북악산 일대의 성곽을 복원하면서 문루를 복원한 뒤 '숙정문'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원래 이름은 숙청문(肅淸門)으로, 도성 북쪽에 있는 대문이라 하여 북대문· 북문 등으로도 부른다. ‘엄숙하게 다스린다.’ 는 뜻으로 지어졌으며 풍수지리학적으로 지맥을 손상시킨다하여 문을 폐쇄하고 통행을 금지하였으며 음양오행 가운데 물을 상징하는 음(陰)에 해당하는 까닭에 나라에 가뭄이 들 때에는 기우(祈雨)를 위해 열고, 비가 많이 내리면 닫았다고 한다. 대신 숙정문 서북쪽으로 세검정이 있는 홍제천 위쪽에 홍지문(弘智門)을 내고 그쪽을 통해 다닐 수 있었다. 1968년 1·21사태 이후 통행을 금지하다가, 2007년 4월에서야 일반에 개방되었다.

 

혜화문(惠化門)은 태조 5년 도성을 축조할 때 문 이름을 홍화문(弘化門)이라 하였으나, 성종 15년(1484)에 창경궁을 건축하고, 그 정문을 홍화문(弘化門)이라 하여 문 이름의 혼동이 일어나므로, 중종 6년(1511)에 이르러 동소문을 혜화문(惠化門)으로 개칭했다. 동소문은 문종 원년에 경기 충청 · 전라도의 당령 수군을 동원하여 도성을 수축할 때 약간 수리하고, 그 이후 동소문은 순조 16년에 중수하고, 고조 6년에 보수하였다. 1928년 문루가 크게 퇴락하였으므로 문루를 헐어 버리고 홍예만 남았었는데 1994년 복원했다.

소의문(昭義門)은 서대문과 남대문 사이 서소문동에 위치하던 서남간문(西南間門)으로 창건 당시 문 이름을 소덕문(昭德門)이라 하고,지대가 낮기 때문에 태조 때 토성을 쌓았던 곳이며, 세종 4년에 이것은 석성으로 개축하고 영조 14년(1738)에 소덕문의 석문 즉 홍예(虹霓)를 개축하고, 20년(1744)에 문루를 건축한 뒤 문 이름을 소의문(昭義門)으로 고쳤다.소덕문은 영조 20년에 재건함과 동시에 문 이름을 소의문으로 고쳐 대한제국에 이르렀으나, 1914년 일제의 도시계획에 의하여 성곽과 함께 완전히 철거됐다.

광희문(光熙門)은 태조 때에 도성을 창축하면서 홍예(虹霓)와 문루(門樓)를 건설하는데 지대가 낮기 때문에 태조 때 토성을 쌓았던 곳이며 세종 때 석성으로 개축하였다. 광희문(光熙門)은 숙종 37년(1711) 도성을 수축(修築)할 때 새로 홍예(虹霓)를 건축하고 9년 후인 45년에 문루를 건축하고 광희문(光熙門)이란 현판을 걸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후 이 문은 언제 무너졌는지 알 수 없으나, 석문만 남아 있었는데, 1975년 도성 복원공사로 석문을 수리하고 문루를 재건했다.

창의문(彰義門)은 태종 13년 이곳의 통행이 왕조에 악영향을 준다는 풍수학자 최양선의 주장으로 폐쇄하고 사람의 통행을 금하였으나, 세종 28년 왕명을 받아서 출입하는 외에는 닫으라 하고, 1506년 9월 2일 중종반정(中宗反正)이 일어나던 날 혜화문과 창의문을 닫으라는 명령을 내려 창의문은 닫지 아니하고 열어서 사람을 통행시킨 듯 하고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있던 날 즉 1623년 3월 13일 밤 홍제원에 집결한 의군(義軍)이 창의문을 부수고 서울에 들어와 혁명에 성공하였기 때문에, 영조 17년(1741)에 이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창의문의 성문과 초루(廊樓)를 개건하고, 인조반정 공신인 정사공신(靖社功臣)의 성명을 새겨서 문루에 걸었다.


사소문(四小門) 중 북소문(北小門)에 해당되며 이곳 계곡의 이름을 빌어 자하문(紫霞門)으로도 불린다. ‘올바른 것을 드러나게 하다’ 는 뜻으로 현재의 문루는 1741년 (영조17년)에 세운 것으로 사소문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 있다.

 

창의문에서 숙정문 구간은 1968년 1.21사태로 인하여 오랜 기간 일반인에게 개방되지 않고 그간 군사보호시설로 묶여 있다가 2007년 4월에야 일반에게 개방된 구간이다. 창의문 등산로 입구에서 인적상황을 기록한 후 표찰을 지급 받고 북악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성곽 계단 길을 오를 수 있다.  


 

서울 성곽(城郭)

역사 유적지로서의 가치도 귀중하지만 도시경관적 측면에서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고 있다. 자연 친화적인 장소로 탈바꿈 시키면서 역사와 삶이 어우러지는 공간을 제공하고 혜화문이 복원되고 숙청문ㆍ광희문의 문루가 복원되는 등 변해가는 모습에서 서울 성곽은 본래의 모습을 찾아가고 있다.


우선 혜화문(동소문)을 기점으로 출발하여 동쪽의 좌청룡(左靑龍)인 낙산(125m)에 이르고, 남쪽의 주작(朱雀)인 목력산(남산, 262m)을 거쳐 서쪽의 우백호(右白虎)인 인왕산(338m)에 오른 후, 북쪽의 현무(玄武)인 북악산(342m)을 돌아 혜화문으로 원점 회귀한다.



서울의 좌청룡(左靑龍) - 낙산(駱山, 125m)

낙산(駱山)은 수도 서울을 구성하는 내사산(內四山)의 하나로 주산(主山)인 북악산의 좌청룡(左靑龍)에 해당하며 그 산세가 낙타를 닮았다고 해서 낙타산(駱駝山)이라고 불렸는데 이를 줄여서 낙산(駱山)이라고 부르던 것이 오늘에 이르렀다. 아파트 단지로 훼손된 낙산의 자연환경을 복원하고 역사적 문화 환경을 제공키 위해 공원녹지 확충계획을 통하여 2000년부터 낙산공원이 조성되었다.


낙산의 노을,

인평대군이 석양루(夕陽樓)를 지었다는 사실처럼 낙산공원은 노을이 아름답기로 유명한데 대학로에서 오르는 길은 예술의 길로 각광을 받고 있다. 마로니에 공원의 낙산 기슭에는 8·15광복 직후 미국에서 귀국한 이승만 박사가 살았고 지금은 ‘이승만 기념관’으로 보존되고 있는 이화장(梨花莊)도 있다.




국립 극장(현 해오름 극장)

남산공원 길로 접어들면 곧 이어 만나는 삼거리 갈림길에서 좌측으로 이어지는 순환도로를 따르면 잠시 후 ‘남산산악회’ 표식이 있는 곳에서 성곽 옆을 따라 가파른 계단 길이 이어지고 10여 분 후 각종 체육시설도 있고 쉼터공간도 있는 곳(남산 산악회)에 이르는데 약수터도 있어 잠시 갈증을 해소할 수 있다.


정자 뒤로 나 있는 등로로 진행한 후 순환도로에 내려서며 도로 따라 진행하면 매점을 지나 N타워와 팔각정이 있는 남산 정상에 다다른다.


서울의 남주작(南朱雀) - 남산(南山, 262m)

본래 이름은 목멱산(木覓山)인데, 옛말의 '마뫼'로 곧 남산이란 뜻이며 서울을 둘러싼 내사산(內四山) 중의 하나이다. 시민공원으로 개발된 것은 1910년으로 산꼭대기에는 조선시대 이래 국사당(國祠堂)· 봉수대(烽燧臺)가 있었고, 8·15광복 전까지 광장 주변에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인 경성신사(京城神社)·조선신궁(朝鮮神宮) 등이 있었다. 조선 태조(太祖) 때 쌓은 성곽은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되고 있다.


애국가의 가사처럼 남산은 소나무를 비롯한 각종 수목이 어우러져 있고 정상부에 이르면 탑골공원의 정자를 본뜬 팔각정(八角亭)과 1975년에 세운 서울 N타워가 있으며, 우리나라 봉수대의 최종 집결지이며 조선 500여 년 동안 사용되었다는 남산 봉수대를 볼 수 있다


외사산(外四山) 

조선 태조는 서울을 도읍으로 정할 때 내사산과 더불어 외사산을 두었는데. 외사산(外四山)은 북쪽의 북한산, 남쪽의 관악산, 동쪽의 용마산, 서쪽의 덕양산(행주산성)으로 멀리서 서울 도성을 감싸 앉고 있는 외곽의 산들인데, 이중 북한산성은 서울 외곽 방어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역사의 향기 가득한 정동거리

구 러시아 공사관 옆 배재공원,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간직한 정동제일교회, 유서 깊은 정동극장, 유관순의 정신이 흐르는 이화여고를 나와 신문로 사거리에 이르러 서대문이었던 ‘돈의문 터’의 표식을 확인할 수 있다.



서울의 우백호(右白虎) - 인왕산(仁王山, 삿갓바위, 338m)

산 전체가 화강암으로 구성된 서울의 진산(鎭山) 중 하나이며 동쪽 산허리로 북악산을 주산으로 하는 서울의 성곽이 능선을 따라 자하문· 명륜동· 동대문으로 이어지고, 남쪽으로는 사직동· 홍제동까지 이어진다.


조선 초에 도성(都城)을 세울 때, 북악산을 주산(主山), 남산(南山)을 안산(案山), 낙산(駱山)을 좌청룡(左靑龍), 인왕산(仁王山)을 우백호(右白虎)로 삼았다. 산의 서쪽 기슭(선불각)에 있는, 스님이 장삼을 입은 듯한 선(禪)바위(祈子岩)는 예로부터 이곳에서 소원을 빌면 그 소원이 잘 이루어졌다고 하여 유명하며 일제강점기에 남산에 있던 무신당인 국사당을 선바위 옆으로 옮긴 뒤부터 무속신앙과 더욱 밀착되었으며, 주위에 많은 무신당이 생겨 지금도 굿이 성행하고 있다. 1995년 ‘仁王’으로 옛 지명이 환원되었으며 군사적인 이유로 통제되었다가 1993년부터 개방되었다.


홍지문(弘智門)과 탕춘대성(蕩春臺城)

탕춘대성(蕩春臺城)은 서울 도성(都城)과 북한산성을 연결하기 위하여 쌓았으며, 인왕산 동북쪽에서 시작하여 북쪽 능선을 따라 내려가면서 사천(현재 홍제천)을 지나 북한산 서남쪽 비봉 아래까지 연결하여 축성한 산성으로 약 4㎞에 이른다.


‘탕춘대성’ 이라 불린 것은 이 산성이 지나는 세검정에 연산군때 지은 탕춘대(蕩春臺)가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성의 서쪽에 쌓은 성이라 서성(西城)이라고도 불리며, 이 성의 출입문인 홍지문(弘智門, 漢北門)과 오간대수문(五間大水門) 좌우에 있는 인왕산과 북한산에 날개처럼 쌓은 성이라 하여 익성(翼城)이라고도 한다.



서울의 주산(主山) - 북악산(北岳山, 342m)

‘백악마루’라 불리는 곳으로 백악산(白岳山)이라고도 한다. 서울의 내사산(內四山)을 형성하며 이들 산줄기를 연결한 서울의 성곽은 이 산을 기점으로 축조되었다. 경복궁 뒤쪽에 위치하고 모습이 탐스럽고 날씬하여 죽순처럼 벌어지기 직전의 모란꽃 봉우리에 비유되기도 하였다.


산 능선에는 옛 성곽이 원형대로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고, 서울시내 전체를 조망할 수 있어 현대의 서울과 조선의 서울이 공존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창의문에서부터 정릉(貞陵) 입구에 이르는 북악스카이웨이가 북악산 주봉 북쪽 사면을 끼고 돌면서 북동쪽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따라 달리고, 남동쪽 산기슭에는 삼청(三淸) 공원이 자리하고 있다.


청운대(靑雲臺, 293m)

에 이르면 조망이 멋진 청운대를 지나 곡장(曲墻)이 설치된 곳에 이르면, 인왕산에서 이어져 온 능선이 한 눈에 드러난다. 촛대바위에는 삼각점이 설치되어 있고 일제강점기 민족말살정책 일환으로 쇠말뚝을 박았다고 하며 주변의 소나무 숲과 어우러져 경복궁을 비롯한 서울 도심을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가 설치되어 있다. 성곽 일주의 마지막 대문인 숙정문에 다가가면 삼청각이 한층 가까이 모습을 드러낸다.


삼청공원

1940년 도시계획공원 1호로 지정된 공원으로, 북악산 동남쪽 깊은 골짜기에 위치해 있으며, ‘삼청’은 신선이 사는 세 궁전인 태천, 상천, 옥천에서 유래된 이름으로 삼청동의 어원이기도 하다. 봄에는 벚꽃 군락, 가을에는 색색의 단풍이 장관을 연출한다. 경치 좋고 호젓한 산책로가 있어 오랫동안 시민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곡장(曲墻) : 성벽에 기어오르는 적을 방어하기 위한 시설로 성곽 중 일부를 자연지세에 맞추어 돌출시킨 반원형으로 굽은 것으로 북악산과 인왕산의 성곽이 한눈에 보인다.



성곽 일주의 날머리 혜화문(惠化門, 동소문)

이곳 혜화문에서 낙산방향으로 진행하면서 동대문을 거쳐 남산을 돌아 남대문→인왕산→북악산으로 이어지던 서울의 內四山(북악산, 낙산, 남산, 인왕산)성곽 일주의 흐름도 다시금 이곳 혜화문으로 원점회귀 하면서 마무리 짓게 된다. 거리는 22.44㎞, 8시간 35분 소요


 

서울 성벽 길을 걷다.

 

                                                                                         윤동주 시 '서시'가 새겨진 시비 

 

지난 11월 첯 주 주말에는 딸 부부와 같이 한양 성벽길을 다녀왔다. 안국역에서 버스를 타고 고개길을 올라 버스에서 내리니 좌측 언덕 위에 윤동주 시비가 있는 조그만한 공원이 있어 올라갔다. 서시라는 시비가 있고 입구에는 조그만한 기념관도 있었다. 시비를 보면서 그에 대한 많은 생각이 지나갔다. 정말 아까운 시인이며 그가 남긴 몇 편의 시가 오늘날 우리 젊은이들에게 많은 감동을 주고 아름다운 서정을 불러오게 만드는 주옥같은 시들이기에 그에 대한 아쉬움은 더욱 처절하기만 하다.

 

그에 대한 단편적인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시 몇 편 외에는 기억에 남는 게 별로 없는지라 그의 별빛같은 삶이 불꽃처럼 사라져간 발지취를 다시 한번 뒤새겨 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 민족 시인이며 독립투사였던 그가 남긴 수정같은 1백여 편의 시와 일제의 탄압으로 젊은 나이에 숨져간 그의 짧은 생을 아쉬워하며 일제에 대한 분노를 다시 한번 기억하시기 바란다.    

 

 

 

민족의 영원한 별, 시인 윤동주, 그는 누구인가?

 

윤동주(尹東柱, 1917년 12월 30일 ~ 1945년 2월 16일)는 한국독립운동가, 시인, 작가이다. 아명은 윤해환(尹海煥),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중화민국 지린 성에서 출생,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였으며, 숭실중학교 때 처음 시작을 발표하였고, 1939년 연희전문 2학년 재학 중 소년(少年) 지에 시를 발표하며 정식으로 문단에 데뷔했다.

 

일본 유학 후 도시샤 대학 재학 중, 1943년 항일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후쿠오카 형무소(福岡刑務所)에 투옥, 100여 편의 시를 남기고 27세의 나이에 고문 후유증으로 요절하였다. 그의 사후 일본군에 의한 마루타, 생체실험설이 제기되었으나 불확실하다. 사후에 그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출간되었다. 일본식 창씨개명은 히라누마 도오슈(平沼東柱)이다.

 

일제 강점기 후반의 양심적 지식인의 한사람으로 인정받았으며, 그의 시는 일제조선총독부에 대한 비판과 자아성찰 등을 소재로 하였다. 그의 친구이자 사촌인 송몽규 역시 독립운동에 가담하려다가 체포되어 일제의 생체 실험 대상자로 분류되어 처형당하였다. 1990년대 후반 이후 그의 창씨개명 '히라누마'가 알려져 논란이 일기도 했다. 송몽규는 고종 사촌이었고, 가수 윤형주는 6촌 재종형제간이기도 하다.

 

 

 

생애

 

윤동주
윤동주 (1941년)
출생 1917년 12월 30일
중화민국 중화민국 지린 성 화룡현
사망 1945년 2월 16일 오전 3시 36분
일본 일본 후쿠오카 현 후쿠오카 형무소
사인 옥사(고문 후유증)
거주지 만주일제 강점기 경성부일본 도쿄만주후쿠오카 현 후쿠오카 형무소
별칭 윤해환(아명)
히라누마 도오슈(일본식 이름)
학력 일본 도시샤 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제적
직업 시인, 독립운동가
종교 개신교(장로교)
부모 윤영석(부), 김용(모)
친척 독립운동가 김약연(외숙부)
독립운동가 송몽규(고종사촌)
시인 윤영춘(5촌 당숙)
가수 윤형주(6촌 동생)
웹사이트 연세대학교 윤동주 기념사업회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당시 북간도 간도성 화룡현 명동촌(明東村, 지금의 지린 성 옌볜 조선족 자치주 룽징시 지산진)에서 아버지 윤영석과 어머니 김용 사이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파평으로 간도 이주민 3세였다.

 

19세기 말, 함경도와 평안도 일대에 기근이 심해지자 조선 사람들은 국경을 넘어 간도연해주 등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윤동주의 증조부인 윤재옥도 집안을 이끌고 1886년경 함경도에서 만주로 이주하였다. 윤동주의 증조부인 윤재옥은 함경북도 종서군 동풍면 상장포에 살다가 1886년 북간도 자동으로 이주하였으며 할아버지 윤하현은 밍둥춘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아버지 윤영석은 1910년 독립지사인 김약연의 누이동생 김용과 결혼하여 명동촌에 정착하게 된다.

 

 

 

 

윤동주의 연희전문학교 시절 기숙사인 핀슨홀

 

 

 

 

친구들과 함께
(뒷줄 왼쪽은 장준하, 가운데는 문익환, 오른쪽은 윤동주

 

 

그는 어려서 기독교인인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다 한다. 그의 고모 윤씨는 송신영에게 시집갔는데, 고모의 아들이 독립운동가이자 그의 친구였던 송몽규였다. 당숙은 윤영춘으로 후일 가수가 되는 윤형주는 그의 6촌 재종이었다.

 

 

중학 시절

1931년 14세에 명동소학교(明東小學敎)를 졸업하고, 중국인 관립학교인 대랍자학교(大拉子學敎)에 다니다 가족이 용정으로 이사하여, 용정 은진중학교(恩眞中學敎)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1935년 평양숭실중학교로 전학하였다. 그해 10월, 숭실중학교 학생회가 간행한 학우지 숭실활천(崇實活泉) 제15호에 시 공상(空想)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신사참배 거부로 숭실중학교가 폐교되어, 용정에 있는 광명중학교로 편입하였다. 광명중에서 그는 문익환정일권 등을 만나게 된다.

 

 

연희전문 시절

1937년 광명중학교 졸업반일 무렵, 상급학교 진학문제를 놓고 부친(의학과 진학 희망)과 갈등하나, 조부의 개입으로 연전 문과 진학을 결정한다. 1938년 2월 17일 광명중학교를 졸업한 후 경성(京城)으로 유학, 그해 4월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하숙생활을 하며 그는 저녁밤 하숙집 근처를 산책하며 시상을 떠올리고 시를 짓거나 담론을 하였다.

 

1939년 연희전문 2학년 재학 중 기숙사를 나와 북아현동, 서소문 등지에서 하숙생활을 했다. 이때 그는 친구 라사행과 함께 정지용 등을 방문, 시에 관한 토론을 하며 의견을 주고받았다. 그 해 소년(少年) 지에 시를 발표하며 처음으로 원고료를 받기도 했다.

 

1941년 12월 27일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였다. 이 때에 틈틈이 썼던 시들 중 19편을 골라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내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일본 유학

 

창씨개명

 

 

서시 육필 원고 (1942년)

 

 

 

 

윤동주의 원고 원본

 

 

윤동주 집안은 1941년 말 '히라누마'(平沼)로 창씨한 것으로 돼 있다. 일본 유학에 뜻을 둔 윤동주의 도일을 위해선 성씨를 히라누마로 창씨를 개명하게 되었다.

 

윤동주의 창씨개명은 본인의 의사와는 관계 없는 것이었다. 그의 연보에 의하면 윤동주가 전시의 학제 단축으로 3개월 앞당겨 연희전문학교 4학년을 졸업하면서 1941년 연말에 "고향 집에서 일제의 탄압과 동주의 도일 수속을 위해 성씨를 '히라누마'로 창씨했다는 것이다. 개명 후 윤동주는 매우 괴로워했다 한다.

 

창씨개명계를 내기 닷새 전에 그는 창씨개명에 따른 고통과 참담한 비애를 그린 시 참회록을 썼다.

 

윤동주의 창씨개명설은 해방 이후에는 알려지지 않았다가 1990년대에 와서 알려지게 되었다.

 

 

일본 유학생활과 체포

 

 

 

친구이자 고종사촌인 송몽규 등과 함께
(앞줄 가운데가 송몽규, 뒷줄 오른쪽 맨 끝이 윤동주

 

 

1942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릿쿄 대학(立教大学) 영문과에 입학하였고, 6개월 후에 중퇴하여 교토 시 도시샤 대학 문학부로 전학하였다. 그러나 그는 불령선인으로 지목되어 일본경찰의 감시를 당하고 있었다.

 

 

 

 

연세대학교 신촌 캠퍼스 경내에 있는 윤동주 시비

 

 

1943년 7월 14일, 귀향길에 오르기 전 사상범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교토의 카모가와 경찰서에 구금되었다. 이듬해 교토 지방 재판소에서 2년형을 언도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44년 3월 31일 교토지방재판소 제1 형사부 이시이 히라오 재판장 명의로 된 판결문은 징역 2년형을 선고하면서 “윤동주는 어릴 적부터 민족학교 교육을 받고 사상적 문화적으로 심독했으며 친구 감화 등에 의해 대단한 민족의식을 갖고 내선(일본과 조선)의 차별 문제에 대하여 깊은 원망의 뜻을 품고 있었고, 조선 독립의 야망을 실현시키려 하는 망동을 했다.”라고 적혀 있다. 교토지방 재판소에서 송몽규와 함께 치안유지법 제5조 위반죄로 징역 2년을 선고받은 뒤 후쿠오카 형무소로 이송되었다.

 

 

투옥과 최후

1945년 2월 16일 오전 3시 36분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 시신은 가족들에게 인도되어 그 해 3월 장례식을 치룬 후 간도 용정에 유해가 묻혔다. 당시 그의 나이 27세였다.

 

그가 죽고 10일 뒤 '2월 16일 동주 사망, 시체 가지러오라' 는 전보가 고향집에 배달되었다. 부친 윤영석과 당숙 윤영춘이 시신을 인수, 수습하러 일본으로 건너간 후, 그런데 뒤늦게 '동주 위독하니 보석할 수 있음. 만일 사망시에는 시체를 가져가거나 아니면 큐슈제대(九州帝大) 의학부에 해부용으로 제공할 것임. 속답 바람' 이라는 우편 통지서가 고향집에 배달되었다. 후일 윤동주의 동생 윤일주는 이를 두고 "사망 전보보다 10일이나 늦게 온 이것을 본 집안 사람들의 원통함은 이를 갈고도 남음이 있었다."고 회고하였다.

 

옥중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주사를 맞았다는 주장 등, 그의 죽음은 일제말의 생체실험에 의한 것이라는 의문이 수차례 제기되었다.

 

 

사후

1947년 2월 정지용의 소개로 경향신문에 유작이 처음 소개되고 함께 추도회가 거행된다.

 

1948년 1월, 윤동주의 유작 31편과 정지용의 서문으로 이루어진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정음사에서 간행하였다. 이후 1962년 3월부터 독립유공자를 대량으로 발굴 포상할 때, 그에게도 건국공로훈장 서훈이 신청되었으나 유족들이 사양하였다. 1990년 8월 15일에야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작품

윤동주의 시집은 사후에 출간되어 큰 반향을 일으켰다.

  • 《서시(序詩)》
  • 《또 다른 고향》
  • 《별 헤는 밤》
  •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 그의 대부분의 작품은 이 유고시집에 실려 있다. 1948년의 초간본은 31편이 수록되었으나, 유족들이 보관하고 있던 시를 추가하여 1976년 3판에서는 모두 116편이 실리게 되었다.

 

경향 및 평가

생활에서 우러나오는 내용을 서정적으로 표현하였다. 그의 작품은 인간과 우주에 대한 깊은 사색, 식민지 지식인의 고뇌와 진실한 자기성찰의 의식이 담겨 있다고 평가된다.

 

 

학력

  • 만주 북간도 밍둥 소학교(명동소학교) 졸업
  • 만주 지린 다라쯔 중학교 수료
  • 만주 북간도 언전 중학교(은진중학교) 수료
  • 평안남도 평양 숭실고등보통학교 수료
  • 만주 지린 광밍 중학교(광명중학교) 졸업
  • 경성 연희전문학교 졸업
  • 일본 릿쿄 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중퇴
  • 일본 도시샤 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제적

 

 

상훈 경력

  • 서울 숭실고등학교 명예 졸업장 추서
  • 1990년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독립장
  • 국민훈장
  • 1999년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선정 20세기를 빛낸 한국의 예술인

 

 

가족 관계

  • 증조부 : 윤재옥(尹在玉, 1844 ~ 1906)
  • 조부 : 윤하현(尹夏鉉, 1875 ~ 1947)
  • 조모 : 강씨부인
    • 고모 : 윤신영(尹信永)
    • 고모부 : 송창희
      • 고종사촌 : 독립운동가 송몽규(宋夢奎, 1917.9.28 ~ 1945.3.7)
        • 내종조카 (송몽규의 조카) : 소설가 송우혜(宋友惠, 1947.12.5 ~ )
  • 부 : 윤영석(尹永錫, 1895 ~ 1962)
  • 모 : 김용(金龍, 1891 ~ 1948)
    • 누이 : (요절)
    • 누이 : (요절)
    • 누이 : 윤혜원(尹惠媛, 1924 ~ 2011.12.11 )
    • 매제 : 오형범 (1924 ~ )
      • 조카 : 오철주
    • 남동생 : 윤일주(尹一柱, 아명 윤달환, 1927 ~ 1985 前 성균관대 교수)
    • 제수 : 정덕희
      • 조카 : 윤인석(尹仁石, 1960 ~ 現 성균관대 교수)
    • 남동생 : 윤범환 (요절)
    • 남동생 : 윤광주 (尹光柱, 아명 윤성주, 1933.4. ~ 1965 시인)
  • 외삼촌 : 독립운동가 김약연(金躍淵, 1868 ~ 1942)
  • 당숙 : 윤영춘(尹永春, 1912 ~ 1978)
    • 재종형제(윤영춘의 아들) : 가수 윤형주(尹亨柱, 1947 ~ )
  • 사돈 : 정병욱(鄭炳昱, 1922 ~ 1982 국문학자)

 

 

평가

민족적 저항시인, 강인한 의지와 부드러운 서정을 지닌 시인으로 평가되며, 1986년에는 20대 젊은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으로 선정되었다. 북한에서는 ‘일제말기 독립의식을 고취한 애국적 시인’으로 평가되고 있다.

 

기타

윤동주의 창씨개명은 1990년대 이후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의 창씨개명설을 지적받게 되자 윤동주를 연구하던 한 교수는 이를 언급하기를 꽤 난처해했다 한다. 윤동주의 창씨개명설은 2005년 이후에 공식적으로 언급 인정되었다.

 

 

 

 

                                                                                        최규식 경무관 동상

 

성벽 올라가는 입구에는 과거 1.21사태시 북한 무장공비들에게 살해당한 종로 경찰서장이던 최규식 경무관의 동상이 서 있었다. 그는 무장 공비가 나타났다는 급보를 받고 경찰을 이끌고 이곳에서 검문과 작전을 벌이다가 적의 총탄을 맞고 순직한 곳이기도 하다.

 

최규식(崔圭植, 1932년 9월 9일 ~ 1968년 1월 21일)은 대한민국의 경찰관으로 1968년 김신조(金新朝)를 비롯한 무장 공비들에 의한 1·21 사태 때 사망했다.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강원도 춘천 출생으로 동아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부산대학교 대학원에서 정치학 석사 학위를 받은 뒤 1961년 경찰에 투신해 1967년 10월부터 서울 로경찰서장으로 재직하였다.

 

1968년 1월 21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특수부대인 124군 부대 소속 김신조 및 31명의 무장 공비들이 당시 청와대를 습격해 정부 요인을 암살하려고 남파되자 청와대 바로 옆에서 이를 검문하다가 총격전이 벌어졌고 정종수 경사와 함께 총에 맞아 죽었다.

 

사후 경무관으로 특진되고 태극무공훈장이 추서되었으며 그 근처에 동상도 건립되었다.

 

 

                                성벽 입구에서는 신청서를 작성하고 신분증을 제시하고 표찰을 받아야 올라갈 수 있다.

 

 

서울 한양도성(-漢陽都城)은 조선 시대 서울을 둘러쌌던 도성(都城)이며, 조선 시대에는 한성(漢城)으로 불렸다.

 

1395년(태조 4) 한양(지금의 서울)을 방위하기 위한 도성을 쌓으려고 도성축조도감(都城築造都監)을 설치하고 정도전에게 명하여 성터의 조사 측정을 실시하였다.

 

1396년(태조 5) 음력 1월 9일 기공식을 올리고 춘추 2회에 걸쳐 전국에서 징발한 장정 19만 7천 4백여 명을 동원, 전후 98일 만에 북악산·낙산·남산·인왕산을 따라 성의 축조를 완료하였다. 성의 길이는 9천 9백 70보(步 : 1보는 6자)이며 높이는 40자 2치로서 성을 97구(區)로 나누어 구마다 천자문에 따른 번호를 하늘 천(天) 자부터 조상할 조(弔) 자까지 붙였다.

 

성이 낙성된 후에는 배수지(排水地)로 5칸 수문(五間水門)·2칸 수문 등을 만드는 한편 성곽의 관문(關門)으로 숙청문(肅淸門 : 북대문)·흥인문(興仁門 : 동대문)·돈의문(敦義門 : 서대문)·숭례문(崇禮文 : 남대문)의 4대문과 홍화문(弘化門 : 동소문)·광희문(光熙門 : 수구문)·창의문(彰義門)·소덕문(昭德門 : 서소문) 4소문을 합해 8문을 완성하였다.

 

1422년(세종 4년)에 흙으로 쌓은 곳을 모두 돌로 다시 쌓는 등 봉족(奉足)과 잡색(雜色) 32만 2천 4백 명을 동원하여 38일 만에 대대적으로 성곽을 고쳤다.

 

1451년(문종 1년)에도 성을 고쳤지만 임진왜란 때 일부가 부서졌다. 1616년(광해군 8년)에 개수하였으나 병자호란 때 다시 부서졌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와 맺은 약조중에 성벽을 쌓지 않고 보수도 하지 않는다는 조항이 있어 부서진 채로 방치되다가, 1704년(숙종 30년) 이조판서 이유(李儒)의 주장으로 5군문(五軍門)의 장정을 동원하여 1711년(숙종 37)까지 수축하였으며, 1743년(영조 19년)에 다시 고쳤다. 그밖에도 효종·현종·영조·순조 시대에 부분적인 개수를 행했으나 현재 남아 있는 서울의 성곽은 대체로 태조·세조·숙종 때의 것이다.

 

한편 일제 강점기의 도시계획과 한국 전쟁으로 성문과 성벽이 많이 부서졌다. 지금은 삼청동·성북동·장충동 일대에 성벽이 남아 있고, 흥인지문·숭례문·숙정문·홍화문이 남아 있다.

 

서대문과 청량리 사이의 전차를 부설하면서 서대문과 동대문의 일부를 헐어내었고, 광화문과 용산 사이의 전차를 부설하면서 숭례문 부근을 역시 헐어내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산성을 제외한 평지에 있던 성곽은 모두 헐리어 현재의 모습과 같이 되었다.

 

정식으로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4코스로 나눈다. 북악산 코스(혜화문~창의문), 인왕산 코스(창의문~숭례문), 남산 코스(숭례문~장충체육관), 마지막으로 낙산 코스(장충체육관~혜화문)

 

북악산 코스

혜화문-와룡공원-숙정문-청운대-백악마루-창의문으로 이루어져 있는 코스다. 지난 40여년 동안 폐쇄되었다. 2007년 일반인에게 개방되었기에 네 코스 중 자연이 잘 보존되어 가장 인기가 많다. 그러나 와룡공원~창의문은 아직까지 제한이 있어 하절기(4월~9월) 오전 9시 부터 오후 5시, 동절기(10월~3월) 오전 10시 부터 오후 5시 까지만 탐방이 가능하다. 월요일은 이 길이 통제된다.

 

인왕산 코스

창의문-윤동주 시인의 언덕-인왕산 정상-경교장-돈의문 터-정동길-서울시립미술관-숭례문으로 이루어진다. 등산 코스 입구에 있는 '윤동주 시인의 언덕'은 윤동주가 이곳을 걸으며 시상을 생각했다고 한 걸 기리며 이 언덕 부근을 공원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목멱 코스

숭례문-백범 광장-잠두봉 포토아일랜드-N서울타워-남측 포토아일랜드-국립중앙극장-우수조망소-장충체육관로 이어진다. 조선시대 태종이 쌓은 성벽이 비교적 많이 남아있다.

낙산 코스

 

순성(巡城)놀이

조선 시대에는 성곽을 따라 걸으면서 도성 안팎의 풍경을 감상했는데 이를 '순성'이라고 했다. 조선 후기 한성부의 역사와 모습을 기록한 <한경지략>에는 '봄과 여름이 되면 한양 사람들은 도성을 한 바퀴 돌면서 주변의 경치를 구경했는데 해가 떠서 질 때까지의 시간이 걸린다'고 적혀있다. 이러한 순성은 일제강점기까지도 이어졌다.

 

  

                                                              안내소에는 서을 성벽 안내도가 비치되어 있다.

 

서울 성곽은 하루에 다 돌기에는 힘들고 능력과 여유 시간에 따라 3~4회 나누어서 탐방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출입 시간이 제한되어 있고 청와대 뒷쪽 북악 코스는 곳곳에 감시원이 비치되어 있으며 사진 촬영 등 통제가 심하다. 북악쪽에서- 동대문, 남대문쪽에서 남산-동대문, 인왕산쪽에서 남대문 방향으로 나누어서 탐방하면 될 것이다. 안내도에는 4개의 탐방 코스가 나누어져 있다. 서울 성곽에는 4개의 대문과 4개의 소문이 있는데,. 4개의 대문은 북쪽의 숙정문, 동쪽의 동대문, 남쪽의 남대문, 서쪽의 서대문이며 4개의 소문은 서대문과 숙정문 사이의 창의문, 숙정문과 동대문 사이의 혜화문(동소문), 동대문과 남대문 사이의 광희문(수구문), 남대문과 서대문 사이의 서소문이다.

 

  

                                                                                         창의문

 

고개 정상에는 창의문이 우뚝 서있다. 창의문(彰義門)은 서울의 4대문 사이에 있는 4개의 소문 중 하나로 그중 서북쪽 문이다. 그 때에는 이 곳이 양주와 북한으로 가는 길과 이어져 있었다. 이 곳은 근처 계곡의 이름을 따서 자하문(紫霞門)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1396년(태조 5년)에 지어졌으며 1413년(태종 13년)에 풍수학자 최양선이 창의문과 숙정문이 경복궁의 양 팔과 같아 길을 내면 지맥이 손상된다고 주장하여 닫혔다. 이곳에는 인조반정때 공신들의 이름이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원래 창의문은 문루가 없었으나 나중에 세워지게 된다. 창의문은 4소문 중 가장 원 모습을 잘 유지한 문이다. 인근에 서울성곽하림각, 자하문터널이 있다.

  

 

 

                                                                               청와대 뒷 산 북악 정상인 청운대

 

북악산(北岳山)은 서울경복궁 북쪽에 있는 으로, 백악산(白岳山)이라고도 한다. 인왕산, 낙산, 남산 등과 더불어 서울 분지를 둘러싸고 있는 산으로 기반암은 화강암이며, 높이는 약 342m이다. 경복궁의 진산(鎭山)으로 서울 성곽의 기점이기도 하다. 북악산 동쪽 고갯마루에는 숙정문, 서쪽 산 기슭에는 창의문이 있으며, 남동쪽 기슭에는 삼청 공원이 있다, 입산 시에 신분 확인이 필요하여 신분증을 반드시 지참하여야 하고 공휴일의 다음 날과 매주 월요일은 등산 진입이 통제 된다.

 

                                                                                          인왕산 방향 

 

 

조선시대 태조와 세종 때는 주산(主山)인 북악의 서쪽에 있다하여 서봉(西峰) 또는 서산(西山)이라고 불렀는데, '광해군일기'에는 "인왕(仁王)은 부처님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부처님이시다. 이 산에 옛날 인왕사(仁王寺)가 있었기에 인왕산이라고 불리었다."고 하였듯이, 인왕산은 이 산에 인왕사가 있어 붙여진 산 이름이다. 인왕이 불법(佛法)의 수호신인 것을 보면 인왕산은 불교와 밀접한 관계를 가졌던 산으로 세종의 내불당(內佛堂)이 이곳에 있었고, 인왕사 서쪽에 금강굴이 있었으며, 세조 때는 복세암(福世庵)을 짓기도 하였다.

 

인왕산은 한양이 도읍으로 정해지면서 주산인 북악의 서쪽에 있어 우백호(右白虎)에 해당함으로써 주목받았으며, 따라서 도성은 쌓을 때 인왕산 능선을 따라 서쪽 성곽이 축조되었다. 그러나 일제시대와 광복 후 성곽 파손이 계속되어 겨우 일부만 남았던 것을 서울시가 1975년부터 도성복원사업을 벌여 인왕산 청운지구(돈의문 북쪽-창의문)의 성곽이 복원되기에 이르렀다.

 

인왕산 골짜기는 인왕동이라고 불렀는데 경치가 빼어나 조선 후기의 뛰어난 화가였던 겸제 정선은 '인왕제색도'(국보 제216호)로, 강희언은 '인왕산도'로 그 아름다움을 표현하여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의 대표작으로 남기었다.

 

1993년에 이르러 20여 년간 안보상의 이유로 출입이 통제되었던 인왕산이 새 정부의 출범과 더불어 시민에게 개방되었다. 자유로운 등산과 암벽 등반을 할 수 있게 되었으며 하루 2천여 명의 등산객이 이용하는 시민공원이 되었다.

   

인왕산은 높이가 338.2m이며 화강암으로 이루어져있고 암반이 유난히 노출된 것이 특징이다. 그러므로 경복궁의 내사산(內四山)인 북악산이나 남산 그리고 낙산에 비해 높고 우람한 남성적인 산세이다.

 

인왕산에는 실제의 사물과 닮은 기묘한 괴석들이 많은 것으로 유명한데 그 중에서도 장삼을 입은 스님과 흡사한 선바위, 둥근 모자 모양을 하고 있는 모자바위, 돼지가 코를 들고 있는 듯한 돼지바위, 달팽이가 기어가는 모양의 달팽이바위, 기관차가 객차를 끌고 가는 모양의 기차바위, 사람의 두개골과 흡사한 해골바위, 코끼리의 긴 코 같은 코끼리바위, 호랑이가 웅크리고 있는 듯한 범바위 등이 있고 무엇보다 보는 이를 숙연하게 하는 것은 중종과 폐비 단경왕후 신씨와의 애틋한 전설이 있는 치마바위가 있다.

 

바위산이라 중턱 이상에는 수목이 별로 없으나 옥인동 골짜기와 그 위 등성이에는 때죽나무, 국수나무, 팥배나무, 소나무, 상수리나무, 좀작살나무, 아까시나무, 산초나무, 가죽나무, 싸리나무 등이 크거니 작거니 오밀조밀 들어차 있고 홍제동 뒷산에는 소나무 숲이 울창하다. 무악동에서 성곽을 따라 올라가는 등산로에는 사철쑥, 쑥, 고들빼기, 씀바귀, 이고들빼기, 감국 산국, 솔새, 억새 돼지풀, 쑥부쟁이, 구절초, 양지꽃, 제비꽃, 꽃두서니 등 다양한 풀과 야생화들이 계절 따라 저마다 자태를 뽐내고 있다.

 

                                                                           남산 방향.  멀리 송신탑이 보인다.

 

 

남산(南山)은 서울특별시 중구용산구에 걸쳐있는 이다. 높이는 해발 265m로서 서울의 중심부에 위치하여 서울의 상징이 되기도 한다. 정상에는 서울타워가 있으며, 그 부근까지는 케이블카가 설치되어 있으며, 남산 1·2·3터널이 뚫려 있다.

 

남산의 본래 이름은 인경산(仁慶山)이었으나 조선초 태조가 1394년 풍수지리에 의해 도읍지를 개성에서 서울로 옮겨온 뒤에 남쪽에 있는 산이므로 ‘남산’으로 지칭되었고 풍수지리상 안산으로 중요한 산이다. 나라의 평안을 비는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산신령을 모시는 신당을 세워 목멱대왕 산신을 모시고있어 '목멱신사'라고 불리고 이때부터 인경산은 목멱산(木覓山)으로 불렸다.

 

조선 도읍 초기부터 신성한 영산으로 여겨져 온 남산은 종남산(終南山)·열경산(列慶山)·마뫼 등으로도 불렸다.  북악산, 낙산, 인왕산과 더불어 한양의 내륙분지를 형성하던 곳이고, 조선 도읍 초기에는 이들 산군들의 능선을 따라 성곽이 쌓였다. 정상에는 조선 중기까지 봄과 가을에 초제(醮祭)를 지내던 국사당(國祀堂)과, 통신제도의 하나인 봉수제(烽燧制)의 종점인 봉수대(烽燧臺)가 있었다. [3] 또한 성벽 일부가 남아 당시의 흔적을 보여 준다.

 

일제는 일제강점기에 황국신민화 교육을 위해 사대문 안 어디에서든 보일 수 있도록 남산에 신사를 세웠다. 당시 신궁은 일본 본토를 통틀어도 15개밖에 없는 실정이었으나 식민지의 수도에 신사중에서 가장 격이 놓은 신궁 중의 하나로 조선신궁을 세워 중요한 의미를 부여했다. 조선신궁에서는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와 메이지 천황을 제신으로 삼아 숭배하게 했다. 지금의 힐튼호텔 맞은편 어린이 놀이터에서 안중근의사기념관과 남산식물원 터를 아우르는 43만 제곱미터의 넓은 면적을 자랑했다.

 

탑골공원에 이어 남산도 시민공원으로 개발되어 한양공원이라 불렀다. 당시 공원묘지로 세웠던 '漢陽公園(한양공원)'이라는 고종 친필의 석비가 지금도 구 통일원 청사 옆에 보존되어 있다.

 

남산은 높이 262m이며 대부분 화강암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북쪽의 북악산(北嶽山), 동쪽의 낙산(駱山), 서쪽의 인왕산(仁旺山)과 함께 서울의 중앙부를 둘러싸고 있다.

 

 

남산공원
南山公園
유형 자연공원
위치 서울특별시 중구 회현동1가
면적 2,958,864 ㎡
관리 서울특별시
방문객 연간 840만명
개원일 1968년 9월 2일
웹사이트 서울의 공원

 

 

1940년 3월 12일 남산 일대가 공원으로 지정되어 1968년 9월 2일에 개원하였으며 1991년부터 8년간 ‘남산제모습가꾸기’ 사업으로 공원 내 부정적 시설 89동을 이전하고 중구 예장동, 회현동, 용산구 한남동 일대를 대대적으로 복원 정비하여 시민의 공원이 되었다.

  • 공원식물: 85과 552종, 초본 42과 187속 361종, 목본 43과 93속 191종
  • 주요식물: 신갈나무, 아까시나무, 팥배나무, 산벚나무, 소나무, 잣나무, 단풍나무
  • 야생동물: 7목26과61종

분수대 2개소, 야외식물원, 야생화공원, 남산전시관, 팔각정, 안중근의사기념관, 남산도서관, 서울타워, 케이블카, 놀이터, 주차장 등의 시설이 포함된다.

서울타워 전망대에서는 맑은 날에는 인천 앞바다까지 볼 수 있으며, 각종 시설들은 자연탐구와 운동, 생활의 활력을 되찾을 수 있는 휴식 등 도심 속의 정원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N서울타워

철따라 그 자태가 다르게 보이고 새롭게 느껴지며 독특한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90만평의 넓고 쾌적한 남산 위에 우뚝솟아 있는 서울타워는 그 높이가 해발 480미터에 달해 서울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남산케이블카

대한민국에 현존하는 케이블카 시설 중 최초로 지어졌으며. 1962년 5월 12일에 처음 개통해 하루도 쉬지 않고 운행하는 국내 최장수 케이블카로 서울의 명물이다. 낮에는 사계절의 아름다운 경관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으며 밤에는 대형 빌딩들이 내뿜는 환상적인 야경을 즐길 수 있다.

남산골한옥마을

남산골한옥마을은 1990년 남산제모습찾기 사업의 일환으로 추진되었다. 오랜 세월동안 훼손된 24,180평의 지형을 복원하고 전통정원으로 꾸미면서 서울특별시 민속자료 한옥 5개동을 이전복원하였다.

서울천년 타임캡슐

1994년 서울정도 600년을 맞이하여 시민생활과 서울의 모습을 대표할 수 있는 문물 600점을 서울천년 타임캡슐에 담아 남산 산자락에 묻었다.4백년후 서울 1000년에 용기 속에 든 이 시대의 문화유산을 펼쳐보게 될 것이다. 1994년 11월 29일 매설하였으며 2394년 11월 29일 개봉할 예정이다. 캡슐안에는 '94 서울의 인간과 도시를 대표할 수 있는 문물 600점 실물 축소 모형 마이크로 필름 Video-CD 형태로 수장하였다.

남산실개천

2009년 4월 복원 완료 예정인 실개천이다. 2.6km길이와 1m의 폭을 가지며, 자연형 실개천으로 조성할 계획이다.[5]

남산오르미

남산 끝자락과 케이블카를 이어주는 경사형 엘리베이터 운영개시 2달 만에 13만 명이 이용할 정도로 높은 인기를 얻고 있다.[6]

기타 시설

  • 남산도서관
  • 자유센터
  • 국립극장
  • 백범광장 (백범 김구, 김유신, 안중근의 동상이 있다)
  • 남산식물원
  • 남산의 봉수대
  • 서울시청 남산별관 (건물 지하에는 고문이 행해지던 취조실이 있다)
  • 문학의 집 (안기부장 공관으로 사용되었었다)
  • 러일전쟁 당시 뤼순전투를 승리로 이끈 노기 마레스케를 기리던 노기신사의 터

또 남산 주변에는 조선시대에 축성된 도성(都城)의 성곽 일부가 남아 있다.

 

 

                                                                                        청운대에서 바라 본 북한산 방향

 

북한산(北漢山)은 서울특별시 강북구, 도봉구, 은평구, 성북구, 종로구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의 경계에 있는 높이 836m의 이다. 예로부터 한산·화산·삼각산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려왔으며 백운대(836m), 인수봉(810m), 만경대(799m) 세 봉우리가 모여 있어 주로 삼각산(三角山)으로 불렀으나, 일제 강점기 이후로 점차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북한산이라 불리게 된 것을 조선조 중종 때 북한산성을 축성한 뒤부터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1983년국립공원으로 지정 되었고, 최근에는 북한산 둘레길 코스를 개방하여 지역 주민들로부터 많은 각광을 받고 있다. "북한"은 한강의 북쪽을 뜻한다.

 

북한산국립공원은 세계적으로 드문 도심 속의 자연공원으로, 수려한 자연경관을 온전히 보전하고 쾌적한 탐방서비스 제공을 위하여 우리나라의 15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그 면적은 서울특별시와 경기도에 걸쳐 약 78.5㎢, 우이령을 중심으로 남쪽의 북한산 지역과 북쪽의 도봉산 지역으로 구분된다.

 

공원전체가 도시지역으로 둘러싸여 도시지역에 대한 "녹색허파"로서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고 있으며, 수도권 이천만 주민들의 자연휴식처로 크게 애용되고 있다. 수도권 어디에서도 접근이 용이한 교통체계와 거대한 배후도시로 연평균 탐방객이 500만에 이르고 있어 "단위면적당 가장 많은 탐방객이 찾는 국립공원"으로 기네스북에 기록되어 있다.

 

북한산국립공원은 거대한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주요 암봉 사이로 수십 개의 맑고 깨끗한 계곡이 형성되어 산과 물의 아름다운 조화를 빚어내고 있으며, 그 속에 1,300여종의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다. 또한 삼국시대 이래 과거 2,000년의 역사가 담겨진 북한산성을 비롯한 수많은 역사,문화유적과 100여개의 사찰,암자가 곳곳에 산재되어 있다.

 

1,300여 종의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고 북한산성북한산신라진흥왕순수비유지를 비롯한 수많은 문화 유적이 있어 1983년 4월 2일한국에서 15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면적은 서울특별시와 경기도에 걸쳐 약 79.916㎢이다. 우이령을 중심으로 남쪽의 북한산 지역과 북쪽의 도봉산 지역으로 구분된다. 행정구역상으로는 공원의 동남쪽은 도봉구·성북구·종로구·은평구의 4개 구에 북서쪽은 경기도 고양시·양주시·의정부시에 속한다.  연평균 탐방객이 500만에 이르고 있어 '단위 면적당 가장 많은 탐방객이 찾는 국립공원'으로 기네스북에 기록되어 있다.

 

최근에 지리산 둘레길, 제주도 올레길, 변산 마실길 등 다양한 유형의 걷기 탐방 코스가 생겨남에 따라 북한산 국립공원 내에도 이와 같은 외부 탐방수요에 발맞추어 다양한 국립공원 탐방인프라 구축의 필요성이 대두됨에 따라 북한산 저지대 자락을 연결하는 북한산둘레길을 조성하여 2010년 8월 말에 이중 북한산(서울시 구간)을 개방하게 되었다.

 

북한산 국립공원은 지형적으로 볼 때 북에서 남으로 이어지는 산맥으로 이루어졌으며 우이령을 경계로 하여 북쪽으로는 도봉산 지역, 남쪽으로는 북한산 지역으로 크게 나뉜다.남쪽의 북한산 지역은 최고봉인 백운대를 정점으로 주능선이 남북으로 길게 뻗어 북으로는 상장봉, 남으로는 보현봉에 이르며 다시 사방으로 굵직한 지능선을 뻗쳐 웅장한 산세를 이룬다. 특히 북한산 국립공원 전체의 중심에 높이 솟아 그 웅장함을 자랑하는 인수봉, 백운대, 만경대와 노적봉 일대의 암봉군은 북한산 경관의 으뜸으로 꼽힌다. 북한산의 다른 이름인 삼각산도 북한산을 멀리서 볼 때 인수봉, 백운대, 만경대 등 세 개의 높은 암봉이 마치 뿔처럼 날카롭게 솟아 있는 데서 유래한다고 한다. 북한산 국립공원에는 숙종 37년(1711년)에 축성한 북한산성과 신라말 도선국사가 창건한 도선사, 조선 중종 때 신월 선사가 창건한 화계사, 신라의 고찰 승가사·진관사·망월사 등의 유적지가 있다

 

 

 

 

 

청와대 바로 뒷 산이다. 1.21 사태 당시 교전 지역으로 총탄이 소나무에 박혀 있다. 당시 이 곳만 통과하면 바로 청와대로 당시 무장공비들이 무인지경의 전방 지역을 통과하여 청와대 근방까지 진출하였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당시 무장공비들은 야간에 침투하여 아군 복장을 하거나 민간인 복장, 취객 등으로 위장하여 청와대 주변 지형을 완전히 숙지하여 침투하였으며 아군 경찰이 검문하자 검문에 불응하며 교전이 벌어졌고 일부는 이곳으로, 일부는 인왕산 방향으로 도주하였다. 아군에게 당시 아군의 희생자가 적군보다 더 많았다. 적의 산악 행군 속도와 사격술, 위장 능력이 뛰어났고 아군은 상대적으로 경찰 병력으로 대응하다가 이어 군이 투입되어 힘겹게 소탕하였다. 총 31명 중 29명 사살, 1명 생포, 1명 도주하여 월북하였다. 만약 당시 무장공비에 의해 청와대가 기습을 받아 박대통령이 살해되었다면 김재규의 궁정동 암살 당시처럼 남한은 겉잡을 수 없는 사태로 발전하였을 것이고 북한 김일성은 휴전선 일대에 사전에 전진 배치했던 북한군에 명령하여 일시에 기습적으로 남침을 시도했을지도 모른다. 아찔한 순간이었다. 

 

 

 

 

                                                                          북악 능선을 따라 구축된 성벽

 

 

 

                                  

                                                                                  북악 북쪽 평창동 방향

 

 

 

 

                                                                               삼청공원 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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