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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775 ; 조선의 역사 317 (제19대 숙종실록 23)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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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775 ; 조선의 역사 317 (제19대 숙종실록 23)

두바퀴인생 2012. 11. 20. 03:03

 

 

 

 

한국의 역사 775 ; 조선의 역사 317 (제19대 숙종실록 23)

 

 

숙종시대에 대한 평가 3

 

 

 

 2% 함량 미달의 승자, 숙빈 최씨

 

 숙빈 최씨(淑嬪 崔氏, 1670년 ~ 1718년)는 조선의 19대 왕 숙종(肅宗)의 후궁이자, 21대 왕 영조(英祖)의 생모이다. 본관은 해주(海州)이다.

 

후일 영의정으로 추증최효원(崔孝元)의 딸로서 1670년 태어났다.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흔히 무수리로 궁에 입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숙빈 최씨의 출신에 대한 이설 중의 하나로, 김용숙의 《조선조 궁중풍속 연구》에는 고종의 후궁 삼축당 김씨와 광화당 이씨가 고종에게 직접 전해 들은 이야기라고 하여 숙빈이 본래 침방 출신이라는 설이 수록되어 있다.

 

1689년 인현왕후가 폐서인이 되고 희빈 장씨(禧嬪 張氏)가 왕비가 된다. 이후 숙빈 최씨는 숙종의 승은을 받고 1693년 4월에 숙원(淑媛)이 된다. 숙종 19년(1693년) 10월 6일 아들 영수(永壽)를 낳으나 영수 왕자는 두 달만에 세상을 떠났다. 인현왕후가 복위된 해(1694년) 9월 13일, 최씨는 연잉군(延礽君) 금(昑)을 낳았는데 이는 훗날 조선의 21대 임금인 영조이다. 같은해인 1694년 최씨는 숙의(淑儀)가 된다. 최씨는 숙종 21년(1695년)에 귀인이 되었고 숙종 25년(1699년)에는 단종의 복위(숙종 24년(1698년))를 축하하면서 정1품 숙빈(淑嬪)으로 봉해졌다.

 

숙종의 제1계비 인현왕후 민씨(仁顯王后 閔氏)와는 친분이 두터웠으며, 희빈 장씨가 중전일 때는 그녀에게 모진 박해를 받다가 인현왕후1694년 갑술환국으로 복위되자 평상을 되찾았다고 전한다. 인현왕후의 사후 숙종에게 장희빈의 저주굿을 발고하였다. 숙종장희빈을 처형하기 전에 후궁에서 왕비로 오르지 못하게 하는 새로운 법을 만들었기 때문에 인현왕후가 죽은 뒤에도 숙빈 최씨는 왕후가 될 수 없었다.

 

1718년 아들 연잉군의 저택에서 49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선원록(선원계보기략) 등에 의하면 장남 영수와 영조의 아래에도 왕자가 한 명 더 있었다.

 

그녀의 아들 연잉군왕세제를 거쳐 마침내 왕으로 등극하니, 바로 조선의 제21대 왕 영조(英祖)이다. 그는 즉위 원년, 어머니 최씨의 사당을 지어 숙빈묘(淑嬪廟)라 하였고, 영조20년(1744년) 육상묘(毓祥廟)라고 올렸다가 다시 영조 29년(1753년) 육상궁(毓祥宮)으로 승격시켰다. 육상궁은 현재 [[칠궁]에 합사되어 있다. 묘소 또한 영조 20년에 소령묘(昭寧墓)라고 올렸다가 29년에 소령원(昭寧園)으로 다시 승격시켰으며, 또한 사당과 무덤에 궁호와 원호를 올릴 때 함께 화경(和敬)의 시호를 올렸다. 후일에 여러 차례에 걸쳐 휘덕안순수복(徽德安純綏福)의 존호가 더 올려졌다.

 

 

가족관계

  • 부 : 증 영의정 최효원
  • 모 : 증 정경부인 홍씨 (홍계남의 딸)
  • 남편 : 조선 제19대 왕 숙종
    • 1남 : 영수(永壽, 조졸)
    • 2남 : 조선 제21대 왕 영조
      • 손자 : 진종
      • 손자 : 장조
        • 종손자 : 조선 제22대 왕 정조
    • 3남 : ?(조졸)

 

 

 

 

드라마 '동이'와 최숙빈에 대하여......


 얼마전 드라마 '동의'가 방영되었다. 숙종 시대를 잘 보여준 것으로 숙 종시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같아 나도 다시보기로 보았다.

 

풍요와 빈곤의 혼돈 속에 왕권을 확고히 하기 위한 숙종이 환국정치를 전개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옥사가 일어났고 그 와중에 자신의 부인들도 서인과 남인의 몰락과 복귀에 따라 부침을 거듭했던 애증과 갈등의 세월을 보냈던 임금이었다. 그는 영특한 군주였으나 자신의 스승 송시열을 포함한 윤휴 같은 대학자를 품기도 하고 내치기도 한 비정한 군주였다. 당파를 서로 견제시키고 균형을 이루면서 왕권은 어느정도 확립되었는지는 몰라도 윤휴가 주장하던 북벌대의라는 엄청난 모험을 시도하기를 꺼려했고 윤휴가 북벌대의를 수행하기 위한 사회개혁법인 지패법, 호포법, 오가작통법, 만과 설치 및 시행, 전차 제작, 도체찰사 설치 등 대개혁을 미온적인 태도로 일관하다가 사대부들의 강력한 반발로 포기하였던 군주였다.

 

북벌대의와 사회 대개혁을 주장하던 대학자 윤휴를 사사시킨 것은 소국이 대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인다는 것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과 북벌에 대한 청나라의 추궁에 대비하여 윤휴를 사사시킨 것으로 판단된다. 그래서 모험을 시도할 정도로 무모하지도 않았고 사대부만을 위한 나라의 폐단을 대개혁이라는 무리한 정책도 시행하지 않았던 군주였다. 그는 서인들이 쿠테타를 일으켜 자신을 몰아낼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이기도 했고 남인들을 숙청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부인 희빈 장씨를 사사하기도 한 매몰찬 군주였다. 그래서 그는 후궁이 왕비가 되지 못하도록 법규를 정하고 나중에는 숙빈 최씨마저 버림으로써 그녀는 사가로 나가야 했다.

 

서인들의 공작정치를 모른채 했고 그의 사후 노론들이 권력을 잡고 경종을 독살하고 그들이 옹립한 임금이 바로 연잉군인 영조가 이 즉위하였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갇혀 죽게 만들 정도로 강력한 신권을 구사하며 조선이 망할 때까지 사대부들의 부귀영화를 누리게 만든 장본인이기도 했다. 

 

 

 

 MBC 드라마 <동이>.
ⓒ MBC

 


남성들의 당쟁과 여성들의 여인천하가 가장 치열하고 격렬했던 조선 제19대 주상('왕'의 공식 명칭) 숙종 때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MBC 드라마 <동이>가 얼마전 방영된 적이 있었다. 

드라마에서 숙종(지진희 분)이 연잉군(훗날의 영조)을 차기 주상인 왕세자 이윤(훗날의 경종)의 후계자로 만들려 했다거나 병조참판 장무열이 군사력을 동원해 동이(한효주 분) 모자를 죽이려 했다는 등등의 이야기를 전개했지만, 이 모든 것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연잉군이 후계자가 된 것은, 숙종이 죽은 후에 연잉군을 지지하는 노론당(이이·성혼·송시열의 추종세력)이 마치 12·12사태를 연상케 하는 방식으로 한밤중에 경종을 압박해서 재가를 얻어낸 결과였는데, 그것은 결코 숙종의 의중과는 무관한 것이었다. 그리고 병조참판 장무열은 실존 인물이 아니며, 숙종 재위기에 누군가가 그처럼 대놓고 연잉군 모자를 죽이려 한 적도 없었다.

이와 같이 드라마 <동이>는 '철저하게' 역사적 사실과 무관하게 최 숙빈(숙빈 최씨, '동이'는 실명 아님)의 삶을 묘사하고 있지만, 이 드라마는 그동안 인현왕후와 장희빈의 그늘에 가려 제대로 조명되지 못했던 최 숙빈이라는 여성을 대중에게 널리 각인시켰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갖는다고 평가할 수 있다. 



 최숙빈 역의 한효주.
ⓒ MBC

 


현종 11년(1670) 한성에서 출생한 최 숙빈은 세 살 때 아버지 최효원을 잃고 나이 5세에 어머니 홍씨마저 잃어 졸지에 고아가 되고 말았다. 물론 오빠와 언니가 있었지만, 그들은 최 숙빈을 키워줄 형편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할 수 없이 최 숙빈은 나이 7세에 공노비의 신분으로 입궁하여 궁녀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녀에게 궁궐은 고아원이나 마찬가지였다. 장래의 남편이 될 숙종이 왕위에 오른 지 2년 후인 1676년의 일이다.

고된 바느질을 담당하는 침방의 생각시(견습 궁녀)로 배치된 최 숙빈은, 죽은 인경왕후를 대신해서 인현왕후가 중전에 책봉된 숙종 7년(1681)을 전후한 시점에 중궁전(왕후의 처소)의 생각시로 자리를 옮긴 것으로 보인다.

그는 궁중의 관행대로 18세가 되던 숙종 13년(1687)에 성인식인 관례(冠禮)를 거쳐 중궁전의 정식 시녀가 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하지만, 인현왕후가 폐위되고 장 희빈이 중전 자리에 오른 숙종 15년(1689)에 20세의 최 숙빈은 원래의 침방으로 복귀해야만 했다.

궁녀들 입장에서는 가장 노른자위라 할 수 있는 중궁전 시녀 자리를 장 희빈 때문에 잃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스무 살 최 숙빈의 젊은 심장은 장 희빈에 대한 분노로 들끓었을 것이다. 그러나 먼 훗날의 최 숙빈은 이때의 사건이 자기 인생의 돌파구가 되었다는 사실을 회고하면서 장 희빈을 오히려 그리워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왜냐. 깜깜한 한밤중에 침방 숙소에서 등불을 환히 켜놓고 폐비(인현왕후)를 위한 의식을 거행하다가, 산책 중인 숙종의 눈에 우연히 띄어 잠자리(소위 '승은')를 함께하게 된 것이 그녀 인생역전의 출발점이었기 때문이다. 장 희빈이 득세하는 궁궐 안에서 폐비의 전직 시녀로서 '폐비 지지, 장희빈 반대'의 기치를 환하게 내건 것이 그의 신분을 바꾸는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이다.

인현왕후가 폐위되지 않아서 그가 계속해서 중궁전 시녀 생활을 했다면, 혹은 장 희빈이 중전이 된 후에도 그가 중궁전에서 쫓겨나지 않았다면, 비록 임금의 눈에는 좀 더 잘 띌 수 있을지언정 그녀가 숙종과 친해지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화장이나 옷에 신경을 쓰거나 왕에게 잘 보이려는 대전(왕의 처소) 혹은 중궁전 시녀들은 중전이나 후궁들의 견제를 받기 쉬웠기 때문이다.

 

 

그날 밤, 인현왕후를 위한 의식을 치르지 않았다면


고종황제 시대에 궐에 근무한 구한말 궁녀들의 증언에 따르면, 특정 궁녀가 왕의 사랑을 받는 것 같은 낌새가 보이면 그 궁녀는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지곤 했다고 한다. 명성황후(민비)와 순헌황귀비(엄귀비)의 첩보망이 그처럼 촘촘했던 것이다.

그래서 중궁전 시녀는 영광스러운 자리인 동시에 그만큼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자리였다. 중궁전 시녀였을 때에 숙종의 눈에 띄지 않은 것은, 최 숙빈 인생을 전체적으로 놓고 보면, 실로 천만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죄인 신분으로 쫓겨난 인현왕후를 위한 의식을, 대궐 안에서 그것도 불을 환히 켜놓고 거행하는 의리와 대담성. 그런 최 숙빈의 특성이 꽤 신선하게 느껴졌는지, 그 후 숙종은 최 숙빈에 대해 파격적인 신뢰와 지지를 보냈다. 최 숙빈의 첫 아이를 지우려는 장 희빈의 행동을 저지한 사실에서 잘 나타나듯이, 숙종은 구중궁궐에서 최숙빈을 지켜줄 수 있는 가장 듬직한 보호막이었다. 

그 같은 숙종의 든든한 후원을 배경으로 최 숙빈은 24세 때인 숙종 19년(1693)에 종4품 숙원이 되어 후궁의 반열에 오른 데 이어, 숙종 20년(1694)에는 장 희빈의 비행을 숙종에게 고발하여 장 희빈을 중전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자기 자신은 인현왕후의 복위와 함께 종2품 숙의로 승진했다. 숙종 20년은 또 다른 측면에서 최 숙빈에게 의미 있는 한 해였다. 훗날 제21대 주상이 될 둘째아들 이금(연잉군)이 바로 그 해에 출생한 것이다.

 



남편은 '남' 편이라더니, 숙종이 그럴 줄이야

 장희빈 역의 이소연.
ⓒ MBC

 

최 숙빈의 상승세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계속되었다. '인현왕후·최 숙빈 대 장 희빈'의 대결구도가 형성된 뒤인 숙종 21년(1695)에 종1품 귀인으로 승진한 데에 이어, 숙종 25년(1699)에는 서른 살의 나이로 정1품 숙빈에 책봉된 것이다.

고아 신분으로 궁녀가 되어 궐에서 바느질을 배운 코흘리개 소녀가 그로부터 23년 뒤에 영의정과 동급인 정1품의 자리에 오르리라고는 누구도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걸어서 하늘까지' 성큼성큼 올라간 그는, 누가 보더라도 가장 인상적인 성공을 이룩한 조선 여인 중 하나였다.

인현왕후 복위 후에 왕후의 편에 서서 장 희빈과 대립하던 최 숙빈은 숙종 27년(1701)에 왕후의 사망을 계기로 장 희빈이 중전이 될 가능성이 유력해지자, '왕후 생전에 장 희빈이 왕후를 저주했다'고 숙종에게 고발하여 장 희빈을 죽음으로 내모는 데 성공했다. 장 희빈을 중전에서 후궁으로 끌어내린 데 이어, 이번에는 그를 이승에서 저승으로 떨어뜨리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32세의 최 숙빈은 숙종시대 여인천하의 '최후의 1인'이 되었지만, 그는 전혀 뜻밖의 곳으로부터 전혀 뜻밖의 '저격'을 받게 된다. '저격수'는 남편 숙종이었다. 

죽음이 확정적인 장 희빈이 왕후가 될 가망성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숙종이 '앞으로는 후궁이 왕후가 될 수 없도록 한다'는 법령을 발포한 것은 사실상 최 숙빈과 그의 지지자들을 겨냥한 조치였다. 최 숙빈의 중전 책봉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조치였던 것이다. 궐내에서 자신을 가장 신뢰하고 가장 보호해준 숙종 임금으로부터 최 숙빈을 향한 '총탄'이 발사되었다는 사실은, 최 숙빈 입장에서는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총알'이 한 방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뒤이어 숙종이 최 숙빈을 왕궁에서 아예 내보내고 인원왕후를 새로 맞아들이면서, 최 숙빈은 30대 초중반부터 숙종과 떨어져 살게 되었다. '안방마님'이 되지 못하는 것보다 남편과 헤어지는 것이 최 숙빈에게는 더욱 더 고통스러운 일이었을지 모른다.

이렇게, 중전 자리도 놓치고 숙종과도 헤어진 최 숙빈은 왕궁 밖에서 쓸쓸한 삶을 살다가 숙종 44년(1718)에 49세의 나이로 병석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조선왕조 역사상 가장 격렬했던 숙종시대의 여인천하에서 최후의 승리를 거둔 여인의 죽음치고는 너무나 쓸쓸한 죽음이었다고 평하지 않을 수 없다.

 



장희빈의 죽음에서 시작된 최숙빈의 비애

 최숙빈과 장희빈
ⓒ MBC

 


최 숙빈이 장 희빈을 죽이고도 쓸쓸한 말년을 보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최 숙빈에 대해 그토록 신임을 표시하던 숙종이 장 희빈이 죽자마자 최 숙빈을 내친 이유는 무엇일까? 최 숙빈의 비애는 어디서 시작된 것일까?

최 숙빈의 삶을 전체적으로 조망해보면, 그의 비애가 32세 때부터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비애는 장 희빈을 '죽인'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보다 더 정확히 표현하면, 그의 비애는 '적대적 공존관계'인 장 희빈을 없어버린 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적대적 공존관계의 룰을 위반한 것이 비애의 출발점이 된 것이다. 

적대적 공존관계의 예는 국가·정당·기업·갱단 등의 대결에서 종종 찾아볼 수 있다. 쌍방이 치열한 싸움을 펼치면서도 항상 일정한 선을 넘지 않는 경우가 있다. 평소에는 금방이라도 집어삼킬 듯이 으르렁대지만, 막상 결정적인 순간에는 공격을 멈추고 마는 것이다. 상호 공존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만 죽일 '듯이' 으르렁대는 것이다. 경쟁자가 없어지면 자신도 존립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적대적 공존관계의 본질은 '적대'가 아니라 실은 '공존'인 것이다.

1990년대 이전의 미·소 냉전에서도 적대적 공존의 사례를 확인할 수 있다. 경쟁자가 사라지면 그 경쟁자가 두려워서 자신을 필요로 했던 세력도 함께 사라질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존재가치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경쟁자를 적당히 살려놓고 공존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룰을 위반하고 승리의 도취에 빠져 상생의 이치를 파괴하는 유일 최강의 생존자는 얼마 안 있어 존재의 기반을 잃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최 숙빈과 장 희빈이 적대적 공존관계라는 점은, 최 숙빈의 성공과 실패가 한결같이 장 희빈과의 관련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처음 만난 날에 숙종이 최숙빈에게 호감을 느꼈던 것은, 그가 대담하게도 폐비인 인현왕후 편을 들었기 때문이다. 이는 당시의 중전인 장 희빈에게 반기를 드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처럼 대담한 궁녀의 발굴은, 장 희빈의 대항마가 필요했던 숙종에게 아주 반가운 소식이었다. 숙종이 무명의 최 숙빈을 전폭 지원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장희빈과 최숙빈의 대결 이용한 숙종

 숙종 역의 지진희.
ⓒ MBC

 


집권당을 바꿀 때마다 집권당 소속의 여인을 중전 자리에 앉힌 사실에서 잘 드러나듯이, 숙종은 집권당과 중전 자리를 동일 선상에서 인식한 인물이었다. 그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여자에 빠져 자기 일을 그르친 인물이 결코 아니었다. 그는 권력유지를 목표로 궁정의 여인들을 대했던 것이다.

'집권당과 중전은 동일 당파로'라는 원칙과 더불어 숙종이 실천한 또 하나의 원칙이 있다. 그것은 특정 당파에게 집권당과 중전 자리를 주더라도, 이들을 견제할 대항마도 동시에 키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원칙 하에 그는 조정의 당파들과 궁정의 여인들이 상호 격렬하게 대립하도록 만들었다. 그렇게 격렬하게 대결하는 와중에 서로에 대한 신뢰가 사라지면, 결국에는 양쪽 다 숙종 자신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이 숙종의 계산이었다. 나아가, 승자에게 '챔피언 벨트'를 수여하는 동시에 패자에게도 '약값'을 건네어 재기를 도모하도록 하는 것이 숙종의 권력유지 방식이었다. 숙종시대에 당쟁과 여인천하가 가장 격렬했던 것은, 조정과 궁정의 분열을 토대로 권력의 극대화를 추구한 숙종의 정치철학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숙종의 행동패턴을 파악하면, 인현왕후가 폐위되고 장 희빈이 득세할 때에 그가 최 숙빈이라는 무명의 궁녀를 일약 스타로 만들어준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장 희빈을 견제할 또 하나의 카드를 만들어 두려 했던 것이다.

그런 숙종의 패턴을 보노라면, 그가 인현왕후 복위 후에 '인현왕후·최 숙빈 대 장 희빈' 구도를 묵인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밑바닥인 궁녀에서부터 당차게 올라온 데에다가 역관 가문의 경제적 지원은 물론이요 남인당(이황의 추종세력)의 정치적 지원까지 받고 있는 장희빈을 홀로 상대하기에는 인현왕후의 역량이 너무 모자랐다.

인현왕후 역시 서인당의 지원을 받기는 했지만, 그는 장 희빈만한 재정적 기반을 갖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장 희빈처럼 그렇게 당찬 여인도 아니었다. 그래서 인현왕후와 장 희빈의 일대일 대결은 하나마나한 것이었다.

그런데 가진 것이라곤 정말 아무것도 없지만, 웬만한 사람이 겪기 힘든 고된 삶을 경험해서 장 희빈보다 더 억셀 수밖에 없는 최 숙빈이 인현왕후 편에 가세함에 따라 궁정 여인천하의 구도는 비로소 균형을 잡을 수 있게 되었다. 인현왕후 복위로부터 7년 동안 여인천하 구도가 별 탈 없이 유지된 것은 이 같은 세력균형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숙종은 이들의 공존을 통해 여인천하의 세력균형을 꾀했던 것이다.

이 구도를 지탱하는 진짜 원동력이 '무조건 적대'가 아니라 적대적 '공존'이라는 점은, 인현왕후와 장 희빈이 죽자마자 숙종이 최 숙빈의 중전 책봉을 원천 봉쇄하고 최 숙빈을 왕궁에서 내보낸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그동안 최 숙빈에 대한 전폭적 신뢰를 표시하면서 그가 하는 말이라면 뭐든지 믿어주던 숙종이 갑작스레 돌변한 것은, 그가 더 이상 궐 안에 있을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장 희빈을 견제할 대항마를 궐 안에 남겨둘 필요성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년의 최 숙빈이 장 희빈과 대결하던 시절을 그리워했을 것이라고 말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최 숙빈의 존재 의의는 장희빈과의 대결에 있었던 것이다. 대결을 하려면 둘 다 살아 있어야 하므로, 최 숙빈의 존재의의는 장 희빈과의 공존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적대적 공존관계인 장 희빈이 사라지면 최 숙빈 역시 더 이상 궐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동이가 외친 상생의 정치, 최숙빈은 거기까진

고아 출신의 궁녀로서 정1품의 자리에 오르는 대성공을 거둔 최 숙빈이 여인천하의 최종 승리를 움켜쥐고도 쓸쓸한 최후를 맞이할 수밖에 없었던 이치는 바로 거기에 있었다. 적대적 공존관계인 장 희빈을 그냥 꺾는 데에 그치지 않고 아예 죽여 버렸기 때문이다. 드라마 속의 동이는 언제나 '상생'을 외치고 있지만, 실제의 최 숙빈은 거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가장 밑바닥에서 출발해서 신분적 한계를 극복하고 자기 자신의 성공을 이룩했을 뿐만 아니라 자기 아들을 조선 최고의 성군 중 하나로 길러냈다는 점에서, 최 숙빈은 봉건사회 조선에서 매우 특기할 만한 여성상을 남긴 인물이다. 자식의 성공만 이룩했을 뿐 자기 자신의 인생과 관련하여서는 뾰족한 성공을 이루어내지 못한 한석봉 모친이나 신사임당 등과 비교할 때, 그는 차원이 전혀 다른 여성이었다.

이처럼 자신과 자식의 성공을 함께 이룩했다는 측면에서 최 숙빈은 참으로 특기할 만한 여성이다. 하지만, 장 희빈과의 적대적 공존의 룰을 지키지 않은 탓에, 그의 성공신화는 '2퍼센트 함량 미달'의 것이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