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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774 ; 조선의 역사 316 (제19대 숙종실록 22)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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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774 ; 조선의 역사 316 (제19대 숙종실록 22)

두바퀴인생 2012. 11. 19. 10:34

 

 

 

 

한국의 역사 774 ; 조선의 역사 316 (제19대 숙종실록 22)

 

 

숙종시대에 대한 평가 3

 

 

윤휴의 북벌대의를 위한 개혁안 실패

윤휴는 자신의 개혁안이 관철되지 않자 여러차례 사직 상소를 올리기도 했는데, 조정에서 북벌에 대한 의지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여러 차례 벼슬을 내놓고 낙향했다가 다시 출사하는 등 사직과 출사를 반복했다. 낙향할 때는 자신의 개혁안이 좌절되었을 때이고 출사를 결심할 때는 국제적인 분위기나 사회적 분위기가 다시 자신이 나서면 북벌에 대한 추진이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여 출사한 것이다.

 

1676년 숙종 2년 윤휴는 사직 상소를 올리면서 '자신의 말이 쓰이는 것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하면서 영의정 허적에 대한 불만도 토로했다. 그러자 허적도 사직을 하면서 '자신을 윤휴가 배척하고 서로 견해가 다르니 윤휴는 바로 중원으로 쳐들어가는 것이고 자신은 몰래 준비하면서 때를 기다리자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자 숙종이 "응병(應兵)이 옳은데 윤휴는 의병(義兵)을 하려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허적의 사직을 만류하였다. 의병이란 먼저 일어나 적을 치는 것이고 응병은 적이 침략하면 일어나는 것을 뜻한다. 의병이 선제 공격이라면 응병은 방어전을 전개하는 것이다.

 

숙종은 세 번이나 사관을 보내 윤휴의 사직을 만류하면서 임금의 글(어제)을 내렸는데, 그 내용은 

".....(중략) 고사를 보더라도 구천이 오나라를 칠 적에 와신상담 10년 동안 백성을 기르고 가르쳐 마침내 오나라 궁성을 연못으로 만들었다. 경은 우리나라가 좁고 작으며, 훈련받지 않은 약졸을 가지고 멀리 적을 몰아 쫓아 전진하려 하는데, 이 계책은 나로서는 그렇지 않다고 여겨진다."고 했다.

 

숙종도 공격적인 북벌에 반대한다는 뜻이었다. 허적의 준비론에 동의한다는 뜻이지만 청나라가 삼번의 난으로 혼란에 빠진 지금도 준비만 하자는 것은 북벌을 포기하자는 뜻이었다. 숙종은 윤휴의 충절을 잘 알고 있다면서 기회를 기다리자고 하였다. 결국 숙종은 북벌 반대론으로 돌아선 것이었다.

 

윤휴는 사직을 하고 물러났다. 윤휴가 사의를 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윤휴는 양반 사대부 자제들에게 군역을 부과하자는 의견과 전차를 만들자는 의견이 모두 반대에 부딪히자 숙종 1년 1월 24일에도 사직하였던 것이다.

 

윤휴는 모든 것을 잊고 여주로 돌아가 백호 곁에서 독서나 하고 싶었다. 그러나 시대가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만약 삼번의 난이 없었다면 그는 출사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를 잡아둔 것은 북벌의 꿈이었다. 그리고 북벌을 실행하려면 백성들의 호응이 필요했고 백성들의 호응을 얻어려면 백성들의 자발적인 참여가 필요했다. 그러나 현실은 양반 사대부들이 신분적 특권을 누리면서 백성들의 곤궁한 삶이 달라지지 않는 한 백성들의 호응을 얻기는 힘들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지패법을 시행하여 양반과 양민, 천민 등의 신분적 차별을 없애고, 호포법을 시행하여 누구나 군역을 담당토록 하며, 오가작통제와 상평제로 마을 공동체를 이루어 백성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많은 전차를 제작하여 청나라의 기병 전술에 대응하고, 만과를 시행하여 무예가 줄충한 무사와 장정을 뽑아 정예 군사력을 증강시키며, 도체찰사부를 만드는 것은 전시 군사 사령부를 설치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대만의 정성공, 왜국과 협력하여 삼번의 난으로 혼란을 겪고 있는 청나라를 해상과 육지 삼면에서 공격하여 북벌을 시행하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주장한 것이 지패법, 오가작통법, 호포법, 만과 시행, 전차 제작, 체부 설치였다.

 

숙종 2년 1월 11일 그는 다시 숙종의 부름을 받고 만과 실시를 앞두고 조정에 출사하였다. 당시 만과 지원자는 수만 명이나 되었고 사회 분위기가 바뀌고 있었다. 만과는 신분제를 뛰어 넘어 누구나 응시 할 수 있었고 응시한 무사들은 전의에 불타 있었다. 조만간 북벌의 기치를 들고 압록강을 건널 것이라는 사실을 이심전심으로 알 고 있었다. 좁은 울타리 안에서 양반이다 상놈이다 구분 짓던 나라가 윤휴는 변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북벌이란 말만 들어도 간이 덜컥 떨어지면서도 말로만 북벌을 주창하던 허위의 나라, 모순의 나라가 바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선두에 윤휴가 있었다.

 

윤휴는 이조판서에 임명되자 일반 사대부들에게도 군역을 부과하는 호포법과 마을 사람들이 함께 환란을 극복할 수 있는 상평법을 주창했다. 그때마다 서인과 탁남은 '뜻은 좋으나 시기상조'라면서 반대했고 개혁은 지지부진했다. 또 윤휴는 전차 제작에 반대했던 인물들을 좌천시킴으로서 벼슬아치들이 전차 제작에 참여 하도록 유도했다. 그러자 같은 남인인 허적이 인사에 문제가 있다면서 윤휴를 비판하고 나섰다.

 

윤휴는 숙종 2년 3월 16일 이조 판서직을 사임했고, 숙종은 3월 19일 윤휴를 다시 의정부 좌참찬에 제수했지만 윤휴가 거부하자 5월 12일에는 다시 대사헌으로 삼았다. 윤휴는 자신과 노선이 같은 사람들이 쫓겨나고 자신이 제기한 개혁 정책들이 모두 무력화되는 현실에 불만을 표시했다. 지패법과 오가작통법이 다시 환원되고 호포법은 반대파들의 방해로 시행을 하지도 못했다. 만과를 실시하여 무사 만여 명을 뽑았으나 졸병으로 편입시키고 군포를 거두니 만과 급제자들은 만과에 응시했다가 벼슬은 커녕 쌀이나 포만 납부하게 되었다. 국가가 백성들에게 사기를 친 셈이 되었다. 자세한 사정을 알 수 없는 백성들은 윤휴를 원망하였다.

 

윤휴는 자신이 조정에서 버림을 받았고 개혁법안들이 모두 폐기됨으로써 자신의 역활은 끝났다고 생각했다. 윤휴는 사직 상소를 올리고 대사헌직에사 사직하고 물러났지만 숙종은 그를 다시 성균관 좨주 종3품 한직이었다. 자신의 상소로 영의정 허적과 좌의정 권대운이 모두 물러남에 따라 국정에 공백이 생겼기 때문에 다시 조정에 들어온 것이다. 윤휴는 호포법에 기반을 둔 구산법을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윤휴는 굽힐줄 모르는 성격을 숙종도 잘 알고 있었다. 12월 좌참찬이 되었다가 숙종 3년 초 다시 대사헌이 되었다. 윤휴는 다시 상소를 올려 자신이 주장하던 개혁법안을 시행하도록 숙종에게 주청했다. 그러나 숙종은 윤휴의 개혁안에 대해서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숙종은 윤휴를 다시 우참찬으로 삼았지만 윤휴는 사양했다.

 

윤휴의 개혁안은 설사 받아들여졌다 하더라도 대부분 개혁안에 반대하던 관료들이 맡았다. 그러니 제대로 시행될 리가 없었다. 윤휴가 출사 후 역임했던 관직은 잠시 맡았던 이조판서만이 집행 부서일 뿐 주로 찬성이나 대사헌 등 비집행부서였다. 머리좋은 숙종은 결코 윤휴에게 북벌을 추진할 수 있는 병조판서나 체찰사부의 도, 부체찰사 같은 자리를 주지 않았다. 그런 자리는 김만기나 김석주 같은 척신들의 것이었다.

 

윤휴는 숙종 4년 2월 10일 공조판서로 이임되었다가 3월 9일 다시 대사헌에 임명되었고 동년 6월1일 다시 좌참찬, 10월에는 다시 대사헌으로 삼았다. 그러자 윤휴는 다시 군사 문제에 대하여 진술하면서 군사를 방어용이 아닌 공격용으로 사용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숙종은 '맞다'라고만 할 뿐 실천할  생각이 없었다. 윤휴가 혁파된 도체찰사 재건을 주청하자 그해 12월 23일 체부를 다시 설치하고 허적을 도체찰사로 임명했다. 허적은 늙고 병이 있다고 극력 사양했으나, 숙종은 임명을 강행했다. 숙종 5년인 다음해 1월 17일 윤휴를 다시 대사헌으로 임명했다. 숙종은 윤휴에게 어떠한 군권도 주려고 하지 않았다.

 

이 무렵 남인들에 대한 숙종의 총애가 점차 멀어지고 있었다. 서인들과 척신들의 윤휴를 비롯한 남인에 대한 공세가 점점 더 강도를 더하고 있었다. 1680년 숙종 6년은 모든 게 뒤바뀌는 운명의 해였다. 윤휴는 출사하여 약 5년 정도 벼슬에 있었지만 실제 벼슬에 있었던 기간은 불과 1년도 채 되지 않았다. 그 기간 동안 줄기차게 주장한 것은 북벌과 민생의 폐단을 해소하는 개혁안이었다. 이 두 가지는 윤휴에게 자신이 조정에 서게 한 핵심 요소였다. 그해 2월 20일 윤휴는 북벌을 주청하는 밀서를 숙종에게 올렸다. 그러나 숙종은 이미 삼번의 난이 거의 진압 단계에 들어서고 있었고 남인들에 대한 숙종의 총애도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숙종은 소국으로 대국을 상대하는 모험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런 마당에 윤휴같은 인물을 계속 지근거리에 두었다가는 자신이 화를 입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숙종의 마음이 남인을 떠났다고 판단한 서인들은 드디어 정권을 되찿을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다. 그 선두에 선 인물이 척신인 숙종의 비 인경왕후의 아버지이며 송시열의 문인인 김만기였다. 외척과 척신들이 서인의 선두에서 남인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각종 모함과 음모가 진행되었고 숙종은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빌미를 잡고 대대적인 숙청 시기를 점치고 있었다.

 

1680년 숙종 6년 3월 30일 숙종은 느닷없이 윤휴가 지난 번 대비의 정치 참여를 거론하면서 조관이란 말을 한 것을 들고 나와서 비난하고 나섰다. 숙종은 윤휴를 비난하다가 귀양 간  남구만과 포도대장 구일에게 북귀토록 하여 벼슬을 주었다. 이제 정권을 서인에게 넘기려는 숙종의 마음을 알게 된 서인들의 총공세가 가해졌다.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윤휴의 극변 안치를 요청했고 숙종은 바로 승인하였다. 졸지에 갑산으로 유배가는 신세가 된 윤휴는 서인들에게나 사대부들에게는 살아 있어서는 안 돨 사람이었다. 영의정 허적도 도체찰사 직위를 사직하였고 그 자리는 김석주에게 주어졌다. 영의정 자리는 귀양 갔던 김수항에게 주어졌다. 귀향지에서 원한의 칼을 갈고 있던 인물에게 도체찰사와 영의정 자리를 내주었으니 정치 보복의 면허장을 준 셈이 되었다.

 

 

 

윤휴의 북벌대의의 좌절과 종말

1680년 숙종 6년 그해 4월 5일 정원로와 강만철이 허견을 역모로 고변하였다. 윤휴는 갑산으로 유배되었으나 그것이 끝은 아니었다. 서인들은 윤휴를 살려두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감히 성인 주희에 맞서면서 사상을 논하고, 사대부의 특권을 폐지하려 한 대단히 위험스런 인물을 살려두어서는 자신들의 계급적 특권을 계속 누릴 수가 없었다. 다시는 윤휴같은 인물이 출현하지 못하게 싹을 잘라버려야 했다. 서인들은 윤휴의 죄를 조작하여 만들었다. 조관이란 단어가 전가의 보도로 다시 사용되었고, 도체찰사부가 설치될 때 부체찰사가 되기를 원했다는 것도 죄로 추가되었다. 도체찰사부를 만든 자체가 역모를 하기 위한 것으로 둔갑되었다. 그래서 윤휴는 갑산 유배지에서 다시 서울로 압송되었다. 압송되어 오는 도중 금부도사는 권수만은 자신이 윤휴의 동서 오정창의 천거로 금부도사가 되었지만 그것과는 무관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이동 중  윤휴가 세면과 빚질도 못하게 하는 등 갖은 모욕을 가했다. 

 

이렇게 서울로 다시 압송되어 온 윤휴는 5월 12일 병조의 내병조에 설치된 국청에 끌려나갔다. 같은 날 숙종의 명으로 귀양지에서 위리안치되어 있던 송시열은 위리안치를 풀고 거주지만 한정시키는 중도부처로 느슨한 귀양살이로 변경되었다.

 

윤휴의 죄목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대비를 조관하라'고 했다는 말이고, 다른 하나는 도체찰사부를 설치할 때 부체찰사가 되기를 원했다는 것이다. 두 번재 혐의는 허견과 역으려는 의도였다. 윤휴는 허견과 같이 복선군을 추대하려 했다는 혐의도 추가되었다. 조관이란 단어로 윤휴를 죽이려는 것은 아무리 정적 제거에 눈이 멀었다고 해도 무리한 시도였다. 그러나 이들의 목적은 윤휴가 무슨 뜻에서 조관이란 단어를 사용했는지가 아니라 불경으로 몰아 죽이려는 것이었다. 갖가지 말이 추가되고 역모 혐의에 초점을 맞추어 죄를 만들어 나갔다. 윤휴가 항변하였지만 이미 대세는 기울어진 상태로 어떠한 타당한 설명과 항변이나 답변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도체찰사 설치 건의가 역모로 몰렸다는 것은 심각한 사실이엇다. 숙종이나 서인들은 당초 북벌에 대한 생각이 전혀 없엇다. 삼번의 난이 일어났을 당시 송시열은 집권 서인의 영수였지만 '북벌'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괜히 북벌 운운했다가 청나라의 심기를 거슬러 국내의 기득권을 빼앗길 것을 우려했을 뿐이다. 북벌은 명황실을 위한다는 구실일 뿐 그 명분으로 조선 국왕을 압박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 위로는 조선 국왕을 압박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억압하면서 사대부들의 기득권을 영구히 잇겠다는 것이 서인들의 전략이었다. 그런 전략의 허구성과 이중성이 윤휴의 북벌론에 의해 만천하에 드러났으니 윤휴를 살려둘 수 없었던 것이다.

 

윤휴는 자신이 이 모양이 된 것은 시대의 우환을 범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대부분의 사대부들이 제 한 몸의 영화와 제 집안의 부귀에만 힘쓰는 것이 조선 사대부들의 형세였는데 이를 무시하고 북벌하겠다고 나선 것이 시대의 우환을 범한 것이었으며, 사대부들이 힘없는 백성들의 등골을 빼서 제 배를 채우는 것이 시대의 형세였는데 양반들에게도 군역을 부과해야 한다고 나선 것이 시대의 우환이었으며, 입으로 주자학을 외우는 것으로 학문이 완성되었다고 자부하는 것이 시대의 형세였는데, "천하의 이치를 어찌 주자 홀로 안다는 말이냐?"라면서 새로운 학문의 길을 열려고 했던 것이 시대의 우환이었다. 주자학 절대주의 사상으로 가는 것이 시대의 형세였는데 다른 사상도 용인함으로써 사상의 자유를 꾀하려 했던 것이 또한 시대의 우환이었던 것이다.

 

윤휴는 갑산 유배지에 되돌아가 가시울타리에 갇힐 것이고 그곳에서 마지막 학문의 불꽃을 불태우리라고 마음먹었다. 그것이 이 세상의 마지막 존재 이유였다. 그러나 그 또한 이룰 수 없는 꿈이었다. 윤휴가 서울 북족 미아리에 도착해 길가의 촌가에서 잠시 쉬고 있을 때 금부도사가 뒤쫓아와서 찿았다. 서인들은 윤휴를 죽여야 한다는 강박감에 사로잡혀 관련자를 참혹하게 고문하며 윤휴의 사주 내지 혐의를 조작하고 숙종의 결심을 유도했다. 결국 숙종이 윤휴의 사사를 명했다.

 

결국 5월 20일 신시 윤휴가 머물고 있던 서대문 밖 여염집에 사약이 내려졌다. 사약을 마시기전 윤휴는 필묵을 요청했다. 그러나 금부도사 홍수태는 이를 거부했다. 마지막 유서까지도 거부한 것은 그만큼 윤휴가 남길 말이 두려웠던 것이었다.

 

유서 작성도 거부당한 윤휴가 말했다.

"내 주량이 있는데 이 약이 목숨을 끓지 못할까 두렵다. 소주를 가져와야 되겠다."

사약을 마셨는데도 죽지 않으면 낭패였으므로 금부도사는 소주를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윤휴는 소주를 많이 마신 후에 사약을 들이키고 운명하였다.

 

학문과 북벌대의와 백성들의 민폐 제거에 바친 인생이 이렇게 역사의 이슬로 사라진 것이다. 야사에는 윤휴가 사약을 마시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전한다.

"나라에서 유학자가 싫으면 안 쓰면 그만이지, 죽일 것은 무엇 있는가?"

 

숙종은 허적과 윤휴가 역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숙종은 왜 정권을 갈아치우는 데서 더 나가서 탁남과 청남의 영수를 죽이기까지 했을까? 허견 등이 복선군을 추대하려 했다는 것은 빌미에 불과했다. 그것도 숙종을 몰아내고 임금으로 삼으려 한 것이 아니라 숙종이 후사없이 죽으면 임금으로 추대하려 한 것에 불과했다. 각 당파마다 숙종이 후사없이 죽으면 추대하려던 인물이 있었다.

 

서인 중서 계열은 인조의 다섯재 아들인 승선군 이징을, 송시열 등 산서 계열은 소현세자의 손자인 임창군 이혼과 임성군 이엽을, 남인은 복선군 이남을 추대하려 했다. 숙종은 자칫하면 서인들이 쿠테타를 일으켜 자신을 좇아낼 수 있다고 두려워했다. 그 결과가 정권을 서인에게 주는 것으로 나타난 것이었다.

 

또 하나는 청나라가 삼번의 난을 평정하고 조선이 북벌 움직임을 조사할지 모른다고 두려워했다. 아무 죄가 없던 허적과 윤휴를 죽인 것은 청나라에 대한 면피용일 가능성이 크다. 숙종은 아무 관련이 없다고 발뺌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윤휴가 죽어야 했던 실제의 죄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실제로 북벌을 추진하려 했던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양반 사대부들도 평민처럼 똑같은 군역의 의무를 지는 대개혁을 실시하려던 것이었다. 이 두 가지는 서인 정권 시대의 금기였다. 북벌은 말로만 추진해야 했고 자신들은 영원히 계급적 특권을 누려야 하는 것이었고 평민들은 사대부를 위해 존재하는 노예계급이어야 했다. 이러한 사대부 지상천국을 바꾸려던 윤휴는 사라져야 했던 것이다.

 

서인들은 숙종 8년 김환과 김중하는 남인 허새, 허영, 민암, 유명견 등이 복평군을 임금으로 추대하려 했다고 고변하는 '임술고변'을 일으켰다. 이 사건 역시 김석주의 사주로 조작의 혐의가 짙었으나 허새, 허영 등은 심한 고문 끝에 조작된 혐의를 시인하고 사형당하였으나 복평군을 끌여들이지 않아 복평군을 죽이는데 실패하였고, 이덕주는 장을 맞고 죽었으며 민암, 유명견 등은 무혐의가 입증되어 풀려났던 사건이었다. 

 

임술고변이 김석주, 김익훈 등이 사주한 무고 사건으로 드러나자 젊은 서인들은 강력하게 반발했다. 이에 숙종과 김수항, 민정중 등의 서인 중진들이 이를 억누려 했으나 강력한 반발 때문에 실패하는 등 파문이 확산되었다. 숙종은 이런 파문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서인 산림의 거두인 송시열, 윤증, 박세채 등을 조정으로 불렀다. 당초 젊은 서인들은 무고를 법대로 처리할 것을 송시열에게 기대를 걸고 있었다. 송시열도 당초 여주에서 승지 조지겸으로부터 임술고변의 진상을 듣고 김익훈의 처벌에 동의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서울로 와서 김수항, 민정중, 김만기 등 서인 중진들이 임술고변이 서인정권 유지 차원에서 전개된 일이라는의 설명을 들은 후 태도가 바뀌었다. 숙종의 질문에 송시열이 김익훈을 옹호하는 답변을 하자 서인 젊은층들이 송시열의 태도에 크게 실망한 나머지 서인에서 이탈해 나갔다. 아무리 다른 당파라도 공작 정치로 무고한 남인들을 죽음으로 몬 것은 잘못이라고 주장하는 젊은 서인들이 소론이 되었고, 정치 공작을 옹호한 서인 중진들은 노론이 되었다.

 

이후부터 노론 주도의 정치 세력이 전개되면서 노론들은 자신들과 다른 정견을 가진 국왕 경종을 독살하는가 하면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이는 등 정치 공작을 자행했다. 그러면서 윤휴의 북벌론을 송시열 등이 주장한 것처럼 역사 바꿔치기를 시도했다. 그렇게 노론은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집권하였고, 조선이 멸망할 때는 일제에 가담했다. 지금도 우리나라 국정 교과서에는 북벌의 자리에 윤휴의 이름을 지워 버리고 송시열의 이름을 올려 놓았다.

 

윤휴는 그렇게 사망한 지 3백 년이 지난 지금도 지워진 이름이 되었다. 아직도 그의 이름을 지우고 있는 우리 시대는 그를 살해했던 시대보다 다 낳은지 윤휴는 지하에서 묻고 있는지 모른다.

  

이렇게 숙종은 북벌론을 주장하여 사회 개혁을 추진하려던  윤휴의 건의를 묵살하고 좌절시킨 점에 대해서는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기존의 사대부들의 신분과 권리를 허무려는 윤휴의 개혁정치는 사대부들의 강력한 반대와 같은 남인들의 부정적인 호응, 그리고 모험을 피하고 안정을 추구하려던 임금 숙종의 미온적인 태도로 말미암아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결국 실현을 이루지 못하였고, 북벌론도 말로만 하는 구호에 불과하였고 결국 북벌대의는 무위로 끝나고 만다.

 

한편 현실적인 문제를 살펴볼 대, 당시 내부적으로 이미 깊게 썩고 멍들은 조정과 사대부 위주의 허약한 나라의 국력이 개혁을 이루기도 힘든 상태에서 인적, 물적 자원이 상대적으로 빈약하던 조선이 강대국 청나라와 전쟁을 벌이자는 무리한 북벌을 주장한 윤휴의 성급한 개혁정책과 북벌대의도 문제였다고 생각된다. 당시 청나라는 강희제라는 중국 역사상 그리고 청나라 역사상 가장 강력한 정복 군주가 삼번의 난을 평정할 정도로 국력이 상승 일로에 있었고 티베트, 신장 위그루, 안남 등 주변 영토 최대로 확장한 시기였다. 그래서 과연 그 당시 조선이 북벌을 감행, 청나라를 침공하였다면 과연 어느정도 성공하였을 것인지는 의문이다. 만약 성공하였다 하더라도 만주 지역 일부를 되찿는데 그치고 말았을 것이며 중원 본토까지 침공할 여력이 ㄷ아시의 조선 국력을 볼 때 가능하였을 것인지도 의문이다. 만약 북벌이 실패하였다면 청의 역공으로 제3차 호란을 당하여 조선이 멸망하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또 당시 대만의 정성공과 왜국과 협동하여 삼면에서 청나라를 침공한다는 계획도 전혀 사전 협의된 적도 없는 상태였다. 정성공은 결국 청군에 항거하다가 항복하였고 왜국이 과연 조선의 권유에 이에야스 막부가 대규모 군사를 동원하여 참전하였을 것인지도 의문이다. 어쩌면 숙종과 서인들의 선택이 조선의 명줄을 이어가게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숙종 정부에서 가장 아쉬운 점은 새로운 비전의 결여이다. 숙종은 정통성 시비에 휘말릴 염려가 없는 적장자로 왕위에 오른 탓인지 재위 기간 46년 내내 이렇다 할 국가경영의 방략을 제시하지 않았다. 세종과 정조가 즉위교서에서 각각 ‘백성들이 잘살게 되는 나라’와 ‘대통합의 정치’를 제시한 것과 대조를 이룬다. 숙종이 풍요로움을 뛰어넘어 인재의 마음을 설레게 할 국가비전을 제시했다면, 그래서 우리 역사가 한 번 더 도약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