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마을
한국의 역사 773 ; 조선의 역사 315 (제19대 숙종실록 21) 본문
한국의 역사 773 ; 조선의 역사 315 (제19대 숙종실록 21)
|
숙종시대에 대한 평가 2
지금부터는 이덕일씨가 쓴 '윤휴와 침묵의 제국'이란 책의 내용을 토대로 숙종의 북벌에 대한 생각과 태도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숙종은 과연 할아버지 효종의 일생일대의 유업인 북벌에 대한 의지가 얼마나 있었던가? 그가 여러차례의 환국정치와 옥사를 치르면서 서인과 남인들을 교대로 숙청하면서 왕권을 강화하려했던 이유가 무엇인가? 왜 그는 북벌대의를 추구하려던 윤휴를 죽여야 했던가? 등등에 대해서 숙종의 생각과 태도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숙종의 북벌에 대한 생각과 태도
숙종의 할아버지인 효종은 북벌 의지를 불태웠지만 양송(송시열, 송준길)으로 대표되는 서인들의 내적인 반대에 부딪혀 실현을 이루지 못했다. 서인들은 양병보다 백성들을 살리는 양민이 중요하다는 이유로 효종의 군비 강화책에 사사건건 발목을 잡았다. 그러면서 정작 양민에 가장 중요한 대동법 확대 실시는 기를 쓰고 반대했다. 한편 청나라는 빈틈을 보이지 않았고 조선은 내부가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몇 배나 더 강한 대륙의 적을 상대로 싸을 수는 없었다.
서인들의 사보타주에 밀린 효종은 송시열과 기해독대를 통해 양송에게 권력의 상당 부분을 넘기면서 책임지고 북벌을 추진하라는 조건을 달았다. 그러자 송시열은 진퇴양난에 빠졌고 북벌 추진 책임을 영의정 정태화에게 넘기려고 했으나 정태와 역시 교묘하게 빠져나갔다. 이처럼 송시열이 곤란에 봉착해 있을 즈음 송시열과 독대한 지 한 달 반 만인 그해 5월 초 효종이 머리에 난 종기를 치료하다가 침을 잘못 맞고 과다 출혈로 갑자기 붕어한 것이다.
효종이 북벌에 대한 의지를 불태우다가 갑자기 승하하자 뒤이어 즉위한 숙종의 부왕 현종은 집권내내 부왕인 효종의 유업인 북벌 추진은 커녕 1, 2차 예송 논쟁에 휘말려 아까운 시간만 허송세월로 보냈다. 1, 2차 예송 논쟁은 사대부 선비들이 백성들을 교화대상으로 생각하였고 지배의 대상으로 간주하여 예를 숭상하는 길이 바로 당시의 혼란하던 사회의 기강을 바로잡는 길이라 생각했기에 발발한 것이었다. 특히 서인들은 효종을 왕권을 승계하였지만 장자로 생각하지 않고 차자로 생각하여 조대비의 복상 문제를 제기하였던 것이며 이에 반발한 남인들과 지리한 예송논쟁을 벌인 것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유성룡에 의해 만들어진 면천법으로 많은 양민들이 양반 대열에 합류하였으나 종전 후 유성룡이 실각과 함께 면천법이 폐기되자 하층민들의 불만이 높아졌고 이러한 하층민들의 반발을 억누르고 자신들의 신분적 특권을 계속 누리기 위해서는 예론을 주장한 것이 사대부들이며 특히 서인들이었다. 또 예송 논쟁의 진실된 내면을 들어다보면 조선 왕실을 정통성이 없는 왕실로 인정한 서인들의 사대주의에서 비롯되었고 그것을 통해 자신들의 기득권을 확립하고 혼란한 사회 기강을 바로 잡는 길이라고 생각하였다는 점이다.
그러나 재야에 있던 남인 거두 윤휴는 서인들의 이러한 이론에 반대하였다. 조선 왕실을 절대적인 왕실로 인정하려는 남인들의 견해와 조선 왕실을 명 황실의 신하로 인정하려는 서인들의 견해가 복제를 계기로 드러난 것이었다. 윤휴의 3년복설은 왕조의 정통성에 대한 문제였다. 서인들은 3년복설이 옳지만 3년복설을 주장하는 인물들은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졸지에 서자로 전락한 죽은 효종은 서인들의 권위를 위해서 서자로 전락해야만 했다. 그러나 재야 학자 윤휴는 이러한 시대를 개탄했다. 나라보다 당이 중시되는 시대, 군부보다 당수가 중시되는 시대, 국왕보다 스승이 중시되는 시대, 옳고 그름보다 유불리가 중시되는 시대, 윤휴는 이런 시대를 개탄하면서 유일한 피안의 언덕은 학문이었기에 초야에 묻혀 있었다.
주자학자들은 사대부 계급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해 백성들을 무지하게 만들고 그러면서 교화의 대상으로 전락시켰고, 지배 대상으로 삼기 위해서였다. 윤휴는 사대부들의 그런 계급적 차별을 거부했으며 머리만 아니라 실제 그는 서형제들을 한 식구처럼 대하였다.
현종은 2차 예송논쟁 이후 남인 허적을 영의정으로 삼고 대왕대비의 복제를 기년으로 고쳐 성복했다. 그런데 남인으로 정권을 갈아치우기 시작할 무렵부터 현종은 뚜렷한 원인을 알 수 없는 증세로 병을 앓다가 갑자기 세상을 떴다. 재위 15년 동안 각종 재해와 예송논쟁에 시달리다가 처음으로 칼을 뽑아 정권을 교체하려는 순간 급서한 것이다. 조선의 스물일곱 임금 중 유일하게 후궁을 한 명도 두지 않은 군주의 의문의 죽음이었다.
현종의 후사는 열네 살에 불과한 숙종이었다. 남인들의 집권은 일장춘몽이 되었고 서인들의 재집권은 시간문제로 보였다. 그러나 비록 나이는 14살에 불과한 어린 숙종이었지만 그는 그리 만만치 않은 인물이었다.
서인들은 북벌은 입에 달고 살면서도 실제로는 상황이 허락하면 청나라와 국경을 끓고 수비에 전념하는 것이 최선의 방책으로 여기고 있었다. 윤휴는 이런 방어론을 극력 비판했다. 윤휴는 압록강을 건너면 전쟁터는 청나라 영토가 되지만 수비에 치중하면 전쟁터는 조선이 되는 것이라 했다. 당시 청나라는 오삼계의 난(삼번의 난)이 발발하여 어수선한 상태였고 결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나라는 조선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당시 재야에 학문을 연구하며 지내던 윤휴는 북벌을 실천하려면 직접 조정에 출사하는 수밖에 없었다. 수차례 숙종의 부름과 신하들의 천거로 조정에 출사할 당시 조정은 숙종이 부왕의 유지를 이어 영의정 허적을 중심으로 남인에게 정권을 주었지만 남인 단독 정권이 아닌 서인과 연합정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윤휴는 외적으로 삼번의 난으로 국제 정치 지형이 근본적으로 변하고 있고 내부적으로도 남인의 정권 장악으로 국내 정치 지형도 상당히 변화가 있던 시기라 이때야말로 북벌대의를 실현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출사를 결심했다. 1674년 12월 1일 윤휴는 숙종 즉위년에 북벌의 방책을 보다 상세하게 적은 상소와 책자를 올렸다.
책자를 본 숙종은 영의정 허적에게 이렇게 말했다.
"윤휴의 상소는 곧 화를 도발하는 말이다."
이 말은 지금 조선이 청나라와 전쟁을 벌인다면 화를자초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숙종은 방어책인 자강을 주장했다. 즉 사태가 발생하여 청나라가 처들어오면 격퇴하겠다는 것이었다. 반면 윤휴의 계책은 자강이 아니라 선공이었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것이다. 윤휴는 당시 대만의 정성공이 반청복명을 외치면서 명나라 잔존 세력과 함께 청나라와 대적하고 있었고 왜국을 끌여들여 삼국이 동시에 바다와 육지 삼면에서 청나라를 압박한다면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고 삼번의 난으로 청의 군사력이 남쪽으로 집중된 이 시기가 북벌의 가장 좋은 때라고 생각했다. 윤휴는 효종이 살아 있었다면 당장 북벌을 단행하였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숙종은 할아버지 효종 이후 조선의 염원이던 북벌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으로 보았다. 그는 북벌보다 예송 논쟁으로 추락한 왕권의 확립이 우선이었던 것이다. 기세가 등등한 대신들과 사대부들의 등쌀에 임금은 제 권한을 제대로 발휘하지도 못하고 정통성마저도 휘손된 이 마당에 북벌을 감행하다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라고 생각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숙종은 표면적으로 노골적인 반대는 하지는 않았다. 만약 그가 북벌을 반대한다면 그것은 할아머지 효종의 유업을 팽개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숙종은 당시 학문적으로 명망이 높았고 서인 송시열과 학문적으로 쌍두마차를 이루고 있던 재야 학자 윤휴를 삼고초려 끝에 조정에 끌여들이고 싶어하였고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 세력에 대한 대항마가 필요하였던 것이었다.
북벌을 위한 전제, 사회 대개혁을 시도하던 윤휴
윤휴는 북벌대의 실현을 출사의 명분으로 삼았을뿐 북벌 기치를 내세워 선명성을 과시함으로써 정권을 장악하려는 국내 정치용도 아니었다. 윤휴에게 북벌은 현실적인 과제였고 목숨을 걸고 실천해야할 대의였다.
북벌대의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들도 많았다. 첯째 패배주의를 극복해야 했다. 벼슬아치와 유학자들은 청나라라는 말만 나와도 겁부터 먹고 무릎 끓고 벌벌기는 형국이었다. 북벌이라는 말만 들어도 싫어하고 크게 위험한 일로만 생각하면서 입을 모아 배척하고 그 말을 다시 할까 두려워하고 있다고 보았다. 북벌대의를 위해서 넘어야 할 산이 사대부들의 이중 처신이었다. 말로는 북벌을 위치면서도 내심으로는 북벌은 꿈도 못 꾸는 겉과 속이 다른 이중 처신이었다.
윤휴는 겉다르고 속다른 사대부보다 백성들에게 희망을 걸고 백성들이 북벌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북벌의 기치를 높이들면 사대부들은 이런저런 명목으로 도망치기에 바쁘겠지만 백성들은 크게 호응할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백성들을 북벌에 동참시키려면 이런 상태로는 불가능했다. 백성들에게 이 나라가 사대부만의 나라가 아니라 백성들 자신들의 나라이며, 북벌은 남의 일이 아니라 백성들 자신의 일이라는 확신을 심어주어야 했다. 또 그것은 확신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 법과 제도가 백성들 중심으로 정비된 구체적인 정책이 뒤따라야 하는 것이었다. 백성들이 사대부에 비해 법적, 정책적으로 차별받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에서 윤휴가 주장한 법이 '지패법'과 '호포법', '만인과 설치', '도체찰사 설치'였다.
지패법 시행과 사대부들의 격렬한 반대, 그리고 좌절
지패법은 기존의 호패 대신에 종이로 만든 새로운 신분증 제도를 실시하자는 것이었다. 호패는 신분에 따라 재질과 기재 내용이 달랐다. 당시 2품 이상의 고위 벼슬아치는 상아로 만든 아패, 3품 이하 양반 사대부 및 잡과 입격자는 뿔로 만든 각패, 생원, 진사는 목재로 만든 황양목패, 잡직, 서인, 서리는 소목방패, 공사천인의 경우는 대목방패를 사용했다. 한마디로 호패만 봐도 신분을 알 수 있게 한 것이었다. 윤휴의 지패법은 이러한 호패를 모두 없애고 종이로 만든 지패를 차자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지패법은 반상을 구별하지 않았기 때문에 양반 사대부들은 격렬하게 반발했다. 지폐법은 다섯 집을 통으로 묶는 오가작통법과 함께 시행해야 했는데, 양반과 양민의 구분이 없는 통주 임명도 역시 큰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한 통을 구성하는데 양반, 상민의 구분을 없애고 서로 돕는 바람직한 마을 공동체가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이 윤휴의 구상이었다. 윤휴는 마을 단위의 공동체가 공존 공생할 수 있는 제도를 구상했는데, 이것이 '상평제'였다. 상평제는 각 통과 리에 창고를 만들어 풍년에 물가가 떨어지면 여기에 곡식, 면포 등을 사서 저장하였다가 흉년에 물가가 오르면 싯가보다 싸게 방출해서 백성들의 생활을 돕겠다는 제도이다. 이 제도는 물가조절 기관의 이미가 있었고 백성들의 등골을 빼먹는 폐단이 속출하던 당시 환곡의 폐단을 제거하는 새로운 제도였다.
지패법은 양반과 상민의 구별을 없앤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제도였고 조선 후기 예론이 성리학의 주류 학문을 이루면서 강화된 신분제의 틀을 흔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양반 사대부들은 지폐법에 격렬하게 반발하자 지패법은 시행 2년 만인 숙종 3년 3월 1일 다시 양반 사대부는 호패를 차는 것으로 환원했다. 호패법 환원은 같은 남인인 영의정 허적이 주도한 것이었다. 숙종 또한 반상의 구별까지 흔들고 싶은 생각이 없던 터라 허적의 주청을 허락했다. 그러나 지패법 시행 2년 만에 다시 호패법으로 환원하려 하자 논란이 거세졌고 백성들의 불만은 극에 달하였으며, 윤휴는 호패법 환원은 불가하다고 극력 반대했다.
호패법과 지패법 문제는 결국 신분제 유지 또는 해체 문제임을 말해주는 것이었고 윤휴는 지패법을 시행함으로서 신분제를 폐지 내지 완화하는 것이었으나 허적, 김만기 등 사대부들은 그대로 신분제를 유지하려 한 것이엇다. 당시 호패법의 폐해에 대해 윤휴는 정묘호란 당시 사례를 들면서 호패법이 얼마나 나라를 좀먹는지를 생생하게 설명했다. 윤휴가 든 사례는 신분제에 대한 백성들의 불만이 어느 정도인지를 잘 나타내고 있다.
정묘호란 당시 후금군이 평안도 안주까지 남하했을 때 평안감사 윤훤은 안주성을 수호할 계책을 수립했다. 물론 그 계책의 모든 것은 병사들이 목숨을 걸고 항전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병사들이 호패를 성 위에 쌓아놓고 "호패가 적의 침략을 막을 수 있는데 우리들이 어찌 싸우겠느냐?"라며 싸우는 것을 포기했다는 것이다. 호패에 양반과 서얼, 상민, 노비를 구분해서 써놓았는데, 우리들 서얼, 상민, 노비들은 나가서 싸우지 못하겠으니 너희들 양반 사대부들이 나가서 싸우라는 이야기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호패법에 불만을 품은 백성들이 항전을 포기하자 안주성이 무너진 것은 당연하였고 호패법이 있는 한 조선은 어떤 전쟁에서도 이길 수 없다고 말하는 셈이었다.
호패법이 다시 환원되자 윤휴는 세상이 거꾸로 돌아가고 있음을 개탄하고 있었다. 임란 때 천인들이 경복궁에 난입해 형조와 장예원을 불태우고 일본군에 가담한 것처럼 정묘호란 때에도 하층민 출신 군사들의 사보타주가 있었다. 영의정이자 도체찰사였던 유성룡이 전시에 면천법을 실시해 천인들에게도 신분 상승의 기회를 줌으로써 떠났던 민심이 되돌아왔고 그래서 조선이 다시 살아났던 것이다.
그러나 종전과 동시에 양반 사대부들은 유성룡이 실각되자 전시에 실시했던 개혁 입법들을 모두 폐기시키고 다시 과거로 되돌아갔던 것이다. 그 이론적 기반은 예학을 조선 성리학의 핵심 줄기로 만든 성리학자들이 제공했다. 임란 7년 전쟁이 끝난 후 불과 30년 만에 발생한 정묘호란에서 조선군이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던 것은 단지 후금군이 강했기 때문이 아니라 신분제가 과거로 회귀한 데에 대한 백성들의 불만이 있었던 것이다. 윤휴는 이렇게 잘못 되돌려진 역사의 물줄기를 바로 잡아야만 조선이 강한 나라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것은 조선 지배 체제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리는 꼴이 되고 말았다.
호포법 시행 주장과 좌절
양반 사대부들이 지패법에 반대한 이유가 반상을 구별하지 않고 모두 종이로 만든 지패를 차고 다니게 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또 오가작통법을 반대한 이유도 상민이 통수가 될 수 있기 때문만도 아니었다. 지패법은 호포법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에 양반 사대부들이 강력하게 반대한 것이었다. 지패법과 오가작통법은 시행하면서도 호포법은 연기되면서 혼선이 발생했다. 윤휴를 비롯한 청남은 지패법과 오가작통법은 호포법과 같이 시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원래 입법 목표의 절반만 입법된 셈이었다. 사대부들은 지패법, 오가작통법이 호포법과 같이 시행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고 있었고 극도로 긴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호포법이란 모든 호가 군포, 즉 병역세를 납부하자는 법이었다. 16세에서 60세까지의 남자들이 직접 군역의 의무를 수행하는 대신 1년에 2필의 군포를 납부해야 했다. 문제는 양반 사대부들은 군포 납부에서 제외되었다는 점이다.
조선 개국 초기에는 양반 사대부 할 것 없이 모두 군역의 의무가 있었다. 그러다 차차 실제 군역 의무를 면제해 주는 편법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관아에서 납부 받은 군포보다 싼 가격에 다른 사람을 고용해 군역의 의무를 지우고 중간 차액을 경비로 사용하거나 개인적으로 착복했던 것이다. 이것이 '방군수포제'인데, 처음에는 불법이었으나 대부분의 관아가 시행하면서 피할 수 없는 추세가 되었다.
그러다 중종 36년 1541년 '방군수포제'는 '군적수포제'로 명칭이 바뀌면서 합법화되었다. 이제 군역 의무를 수행하는 대신에 1년에 포 2필을 납부하는 것이 법재화된 것이다. 문제는 양반 사대부들은 군포를 납부해야 했지만 합법적으로 면제되었고 중인과 노비들은 별도의 신역이 있으므로 결국 가난한 농민들만 병역의 의무를 져야 했다. 군적수포제가 실시된 후에는 군포를 내느냐 내지 않느냐가 양반과 일반 양인을 가르는 기준이 되었다. 군포를 내면 상놈 취급을 받고 군포를 내지 않으면 양반 사대부가 되는 이상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더군다나 양란 이후 양반의 수효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양반층의 군역 면제는 더욱 심각한 국가 문제가 되었다. 조정에서 전쟁이나 흉년 때 곡식을 바치면 명목상의 벼슬을 주는 '납속책'과 '공명첩'을 남발하자 법률상 양반의 숫자가 크게 증가했다. 부유한 농민, 상인 등 재력 있는 양인들은 대부분 양반이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양반은 증가하는 반면 양민은 계속 줄어들었고 부유한 양인들이 양반으로 신분 상승함에 따라 가난한 양인들이 이들의 군포까지 이중으로 부담해야 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그야말로 부자는 군포를 면제받는 대신 가난한 양인들만 등골이 휘도록 일을 해서 군포를 이중, 삼중으로 내야 했던 것이다.
여기서 양란 이후 군사의 숫자가 증가한 것도 문제였다. 군사는 늘어나는데, 군사비를 부담해야 할 양인 숫자는 줄어들자 여러 사회 문제가 발생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여 군제를 개혁하자는 '양역변통론'이 제기되었다. 문제 해결은 간단했는데, 바로 양반 사대부들도 군포를 납부하면 해결되는 문제였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나라 병역 제도처럼 힘있고 능력있는 정치인, 법조계, 대기업 등 지도층 자녀들이 군대를 가지 않기 위해 갖가지 불법과 편법을 사용하는 모습이나 마찬가지라 생각된다.
오가작통법과 지패법이 호포법과 동시에 시행되지 못하니 절름발이 법일 수밖에 없었다. 오가작통과 지패법은 호포법과 함께 시행되어야 민생을 살리고 국부를 증가시킬 수 있었지만 사대부의 반발로 호포제는 연기하고 오가작통과 지패법만 시행하였기 때문에 현장에서는 탐관과 아전들이 백성들을 옭아매는 수단으로 악용하기도 했다.
윤휴는 숙종의 결단을 촉구했다. 그러나 숙종은 윤휴기 주장하는 대개혁을 단행해 양반 사대부들을 적으로 돌리고 싶지 않았다. 숙종은 이 문제를 묘당에 내려 처리하게 했다. 의정부에 내려 논의하게 하는 것은 호포법을 하지 않겠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 윤휴가 주장하면 숙종은 의정부에 내려 논의하게 하고 의정부는 사대부의 이익을 대변해 묵살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숙종은 이미 호포제나 지패법, 구산제를 실시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윤휴의 개혁안에 대해서 허적을 비롯한 사대부들이 반대하거나 시기를 늦추자며 시행을 미루자고 하였고 숙종은 이에 동조하면서 백성들이 겪고 있는 아악, 물고의 질고를 탕감해주자는 윤휴의 건의를 묵살하고 말았다. 이렇게 윤휴의 개혁안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조선의 유학자들은 이미 유학자들이 아니었다. 입으로는 성현의 말씀을 딛고 살지만 행동은 성현의 말씀과는 정반대로 사는 사회의 암적인 존재가 되어 있엇다. 어떤 지탄을 받아도 계급적 특권을 내려 놓을 생각은 없었다. 언행일치와 지행합일을 추구하던 윤휴 같은 사대부는 소수에 불과했다. 그래서 윤휴의 이런 통절한 절규는 사대부의 계급적 특권 앞에 아무 소용이 없었고 그렇게 윤휴와 청남이 고군분투하는 중에도 조선은 변화하지 않고 있었다.
수레(전차, 병거) 제작을 주장하지만 실패
윤휴는 북벌을 위한 필수 도구가 병거, 곧 전차라고 주장했다. 윤휴는 숙종 1년 1675년 1월 23일 국정의 급무를 아홉 가지로 논하는 상소에서 병거를 제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병 중심의 청나라 군대를 보병 중심의 조선군이 꺽기는 어렵다고 보았고, 청나라 기병 군대를 상대하기에 가장 좋은 방법이 전차라고 본 것이다. 윤휴는 전차가 농경에도 이용하고 수송 수단으로도 이용할 수 있는 일거양득의 기구라고 보았다.
숙종은 윤휴의 상소를 접하고 다음 날 비변사에 내려 논의케 했다. 숙종의 외척이면서 총융사인 김만기는 회의적이었고 남인 허적, 권대운도 동조하였다. 몇 대만 시험 제작하여 시범적으로 숙종에게 보여줄 것을 주청했다. 그러나 대신들은 청에 정보가 흘러나갈 것이고 지형이 산지라 운용이 어렵고 물량의 소요나 제작 기간 등을 들먹이며 반대 여론이 많았다. 그러자 숙종도 시제품도 제작하지 말도록 했다.
윤휴는 분개했다. 이런 형편이라면 남인 정권으로 교체된 의미가 없었다. 북벌도 반대하고 백골, 아약의 고통도 없애는 것도 반대한다면 서인 정권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래서 윤휴는 숙종 1년 4월 167일 사직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숙종은 아직 윤휴를 잃고 싶지가 않았고 말로 달래기도 했다. 이런 상태로 장벽에 막히자 윤휴는 자신의 영향력이 미치는 곳에서 일단 전차를 제작해 보기로 했다. 그래서 윤휴의 외삼촌인 황해도 병사 김경에게 주문하여 전차를 몇 대 제작토록 했다. 그러나 이 일이 반대론자들의 귀에 들어갔다. 목래선, 허적 등이 황해도가 요란하다며 청나라 사신들에게 들키게 된다며 반대 의견을 냈다. 숙종은 목래선의 의견을 지지했다. 윤휴가 사직서 제출에 대해서 허적은 그것도 비판했다.
윤휴가 출사한 이유는 흉중의 포부를 실천하기 위해서였다. 윤휴가 보기에 조선은 전체적인 체제를 다시 짜야 하는 나라였다. 소변통이 아니라 혁명에 가까운 대변통이 필요한 나라였다. 주희의 경전 해석만 금과옥조로 여기는 사상계도 변해야 하고, 말로만 북벌을 외치는 사대부들의 이중적 태도도 변해야 했다. 권리만 누리고 의무는 방기하는 사대부들의 계급 이기주의도 버려야 했다. 이렇게 국가가 기운을 일신해 북벌에 나서야 했다. 그러나 윤휴의 야심찬 개혁은 매번 저지되었다. 숱한 개혁안 중에서 만과, 즉 만인과 정도만 실행되었다.
만인과(萬人科)를 실시하다.
만과는 무과에 국한된 것으로 무사 만과라고도 한다. 숙종 2년 1676년에 시행되었지만 윤휴가 주도한 정책은 그가 사형당한 후 대부분 왜곡되거나 은폐되었으므로 그 전모를 알기가 쉽지는 않다. 숙종 2년 기록에 의하면 문과는 일곱 명을 뽑았지만 무과는 무려 만 명을 뽑으려 했음을 알 수 있다.
무과는 원래 문과보다는 많지만 급제자가 그리 많지는 않았다. 문과가 3년마다 뽑는 식년 문과인 것처럼 무과도 3년마다 식년 무과를 치렀다. 무과도 문과처럼 초시, 복시, 전시의 세 단계가 있었다. 초시는 훈련원에서 주관하는 원시와 각 지방에서 병마절도사가 실시하는 향시가 있었다. 원시는 70인을 뽑았고, 향시는 경상 30, 전라 25, 강원, 황해, 영안(함경), 평안도 각 10명으로 모두 120인을 뽑았다. 무과 초시는 원래 원시와 향시를 합쳐 190인이 정수였다.
초시 합격자는 식년 봄 서울에서 모여 복시를 치러 28인을 뽑았는데 이것이 사실상 최종 합격자였다. 초시는 무예 실력만 봤으나 복시는 책을 읽고 해석하고 시험관의 질문에 답하는 강서도 해야 했다. 강서란 사서(논어, 맹자, 중용, 대학)와 오경(시경, 서경, 역경, 춘추, 예기) 중 한 권과 무경칠서(손자, 오자, 육도, 삼략, 사마법, 울요자, 이위공문대) 중에서 한 권, <자치통감>, <역대병요>, <소학>, <장감박의> 중에서 한 권, 그리고 <경국대전>을 시험쳤다. 28인은 전시에 합격해야 최종 급제가 되었는데, 전시는 갑과 3인, 을과 5인, 병과 20인이 정원이었으나 복시의 합격자 등급을 갑, 을, 병으로 나눈 것이었다. 물론 이 밖에도 국가에 경사가 있을 때 실시하던 증광시, 별시 등이 있었으므로 그 급제자 수는 더욱 많았으나 숙종 초 윤휴가 주장한 만과와는 달랐다.
만과는 윤휴가 처음 주장한 것은 아니었다. 1620년 광해군 12년 때도 만과를 실시한 적이 있었다. 그 무렵 만주족이 세운 후금이 맹렬한 기세로 성장하자 그에 대비하기 위해서 만과를 실시해 많은 무사를 급제시킨 것이다. 숙종 2년에 실시한 만과는 그 급제자 수가 대단히 많았는데, 이때 만 명 이상의 급제자를 낼 수 있었던 배경은 양반 사대부가 아닌 상민들의 응시를 허용했기 때문이었다.
사대부들의 반발이 심했다.무사는 무예가 중요하지 신분이 중요하지 않았다. 윤휴는 만과를 실시해 사실상 신분제의 틀을 무너뜨리고자 하였다. 그러나 양반 사대부들의 반발은 물론 무과 자체를 천시하기 시작하였다. 사대부 자식들은 무과를 상놈의 직업이라고 부끄럽게 여겼고 막상 윤휴가 사대부 자손들을 총부에 넣어 군역을 부과하려고 하면 어떻게 서얼들과 함께 근무하느냐며 반대하였던 것이다.
윤휴가 당초 만과를 설치한 목적은 신분을 망라하고 능력 있는 자를 선발해 북벌에 앞장서게 하려던 것이었지만 만과를 실시해 놓고 북벌을 단행하지 않으니 많은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지패법과 호포법이 실시되어야 했으나 호포법은 실시하지 않고 지패법만 실시하니 많은 문제가 생긴 것과 마찬가지였다. 만과 급제자들에게 벼슬을 주어야 하는데 북벌을 단행하지 않으니 자리가 모자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들을 군졸로 편입시켰으니 큰 반발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 만과를 실시하자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고 이 인원만 잘 활용하면 북벌도 가능해 보였다. 그러나 북벌이 무산되니 이들의 활용방도가 없었고 만여 명의 무사들은 귀찮은 존재가 되고 말았다. 또 만과 급제자들을 군역에 충당해 곡식이나 베를 내게 하는 등 군포를 맏는 존배로 전락시켰다는 점이다. 그러니 원성이 하늘을 찌를 수밖에 없었다.
윤휴의 상소는 절규였다. 두 번의 큰 외침을 당하고도 무사를 천시하는 나라, 문신들이 무사를 종처럼 보는 나라에 대한 절규였다. 이렇게 군사를 무시하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겠느냐는 경고이기도 했다. 윤휴는 오랜 가뭄으로 백성들이 토탄에 빠진 상황에서 민정을 거스리는 처사는 하늘의 분노를 살 것이라 하면서 호패법을 폐지하고 만과 출신자들에 대한 형조의 투옥과 고문을 멈추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숙종은 윤휴의 말에 수긍은 하면서 별다른 조치를 내리지도 않았다. 호패법과 만과 출신자들에 대한 문제는 모두 양반 사대부의 반발을 넘어야 하는 문제였고 북벌이 실시되지 않는 한 만과 출신자들에 대한 문제는 나라와 조정에 대한 불만 세력으로 큰 사회적 문제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체부(體府) 설치를 주장하다.
윤휴는 북벌을 실시하려면 이를 전문적으로 담당할 군사 지휘부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1675년 숙종 1년 9월 6일 대신과 비변사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는 자리에서 체부 설치를 요청했다. 체부란 '체찰사부(體察使府)'의 준말로서 군부의 총사령부를 의미했다. 이에 대해 허적, 권대운, 김만기 등이 청나라가 의심하니 뒤로 미루자며 반대했다. 이에 숙종은 대신들의 이야기를 다 듣고 한참 생각하더니 "잘 생각해서 해야 한다."면서 군사에 대한 민감한 사안이라 모호한 답변만 내렸다. 그해 10월 우부승지 이동규가 상소를 올리면서 체부 설치를 주장했지만, 서인을 포함한 반대론자 대신들은 윤휴가 이동규를 내세워 병권을 장악하려는 의도라고 비난하면서 윤휴가 실제로 체부를 장악할까봐 전전긍긍했다.
그러다가 그해 11월 숙종은 허적을 체찰사로 삼았다. 그러나 체찰사만 임명해 놓고 체찰사부를 설치하는 일은 마냥 미뤄지고 있었다. 허적은 청나라 사신들이 들어온 다음에 설치하자고 시간을 끌었고, 숙종도 청나라에서 눈치챌까 두려워 허적의 말을 따랐다. 그래서 체부는 도체찰사만 임명해 놓은 상태에서 유명무실한 기관이 되고 말았다.
윤휴는 다음해 1월 19일 다시 이 문제를 제기했다. 숙종 2년 10월 일부 무기를 내리고 만과 합격자들을 체부에 소속시켰지만 그 의복과 무기를 스스로 마련하게 하는 등 원망을 초래했다. 숙종 3년이 되자 체부를 혁파해야 한다는 의견들이 개진되기 시작했다. 숙종은 체부를 실행 부서로 만들고 싶지가 않았다. 그러다가 숙종은 부체찰사로 허적의 추천을 받아 외척 김석주를 부체찰사로 임명했다. 허적이 체찰사인데, 북벌에 반대하는 김석주가 부체찰사라면 북벌은 물건너 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윤휴가 이 문제를 제기하자 숙종은 얼굴색이 변하면서 윤휴를 꾸짖었고 매우 불쾌하게 생각했다. 이미 숙종의 마음은 윤휴나 북벌에서 떠나 있었고 북벌 의리에 몰두한 윤휴가 눈치를 채지 못했을 뿐이었다.
'시대의 흐름과 변화 > 생각의 쉼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의 역사 774 ; 조선의 역사 316 (제19대 숙종실록 22) (0) | 2012.11.19 |
---|---|
우면산의 겨울 3 ; 한양 성벽길을 거닐다 1 (0) | 2012.11.19 |
한국의 역사 772 ; 조선의 역사 314 (제19대 숙종실록 20) (0) | 2012.11.17 |
한국의 역사 771 : 조선의 역사 313 (제19대 숙종실록 19) (0) | 2012.11.16 |
한국의 역사 770 : 조선의 역사 312 (제19대 숙종실록 18) (0) | 2012.11.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