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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772 ; 조선의 역사 314 (제19대 숙종실록 20) 본문
한국의 역사 772 ; 조선의 역사 314 (제19대 숙종실록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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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시대에 대한 평가 1
조선의 역사에서 숙종 시대만큼 반전에 반전을 반복한 역사는 없을 듯하다. 숙종은 현종과 명성왕후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나 현종이 죽자 14세의 어린 나이에 조선의 제19대 왕으로 보위에 올라 바로 친정을 시작하여 재위 45년 10개월 동안 그 영특함을 바탕으로 임금 고유의 권한인 용사출척권을 휘두르며 사대부 신하들의 붕당과 파당을 서로 견제시키고 균형을 유지하면서 왕권을 최대로 확립하였던 군주로 평가하고 있다.
숙종 시대는 조선 시대를 통털어 당파간 당쟁이 가장 심했던 시기로 3차례의 환국으로 왕권을 공고히 하였으며 정치적 역량을 발휘하여 임진왜란과 양대 호란으로 심회된 사회 혼란을 수습하고 민생을 비교적 안정시켰으며 조선 사회가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왕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중전과 후궁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해 숱한 옥사를 유발하였으며 당대의 유능한 인재들을 여러 차례 환국과 옥사로 수많이 제거함으로써 인재 손실을 초래하는 오점을 남긴 왕이기도 하다. 부인은 9명에게서 6남 2녀를 낳았다.
세 번에 걸친 환국으로 정권을 교체하면서 붕당 내의 대립을 촉발시켜 왕에 대한 충성심을 강요하여 왕권을 강화한 왕이기도 하다. 왕의 지지가 없는 파당은 물락한다는 붕당의 한계성을 숙종이 인지하고 적절하게 이를 이용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1680년 3월에 발생한 경신환국은 남인 일파를 대거 축출한 사건으로 남인 영수 허적을 비롯한 남인 일파가 권력이 비대해지자 유악 남용 사건을 빌미로 하룻밤 사이에 남인들을 대거 축출하고 이어 제17대 효종의 동생인 인평대군의 세 아들 복창군, 복선군, 복평군 등과 함께 역모를 도모했다는 고변에 따라 삼복의 변에 직면하자 남은 남인들도 대거 축출되고 군권을 비롯한 모든 권한을 서인들에게 넘겨준 사건이다.
1689년에 발생한 기사환국은 후궁 소생 희빈 장씨의 소생을 원자로 책봉하는 문제로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들이 반발하다가 숙종의 분노를 사서 대거 축출되고 남인들이 다시 정권을 장악한 사건이다. 숙종의 정비는 원래 서인 김만기의 딸 인경왕후였는데, 그녀가 1680년에 죽자 노론 민유중의 딸을 계비로 맞이하는데, 그녀가 인현왕후이다. 그런데 인현왕후가 후사가 없자 후궁인 소의 장씨가 낳은 아들 균을 인현왕후의 양자로 삼아 원자로 정호하려 하였으나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들이 극력 반대하였다. 그러나 숙종은 서인 노론측의 반대를 물리치고 왕자 균의 정호를 종묘사직에 고하고 그의 생모를 빈으로 봉하였다. 이에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 노론측이 반대 상소를 올리자 이는 왕을 능멸하는 처사로 간주하며 분노하여 송시열을 비롯한 많은 서인들이 유배 내지는 사사된 사건이다.
갑술환국은 1694년 남인들이 인현왕후 복위 문제와 관련하여 대거 축출되고 서인들이 다시 권력을 장악한 사건이다. 숙종은 인현왕후 폐비 후에 희빈 장씨와 남인의 세력이 지나치게 커졌음을 인지하고 염려하던 중 서인들이 숙빈 최씨와 손을 잡고 숙종을 설득하여 남인들을 대거 축출하고 권력을 다시 잡게 되는 사건이다.
환국정치와 숙종의 여인들
숙종은 혼란을 수습하고 사회안정을 꾀하면서 왕권을 강화하는 등 유능한 왕으로 평가되나 환국정치의 중심에 왕비와 후궁들이 연루되어 매우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 되었다. 인현왕후, 장희빈 등은 사극의 주요 단골 소재가 되었으며 얼마전 방영된 MBC 인기사극 동이(숙빈 최씨, 영조의 생모)의 배경도 바로 숙종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인경왕후 김씨(1661 ~ 1680년)는 1670년 열살 때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의동별궁에 들어갔으며, 이듬 해 3월 왕세자빈으로 책봉되었고 1674년 현종이 죽고 숙종이 즉위하자 왕비되었으며, 1676년 정식으로 왕비에 책봉되었으나 1680년 10월 천연두 발병 8일만에 세상을 떠났다.
인현왕후(1667 ~ 1701년)는 인경왕후가 죽과난 다음 해인 1681년 가례를 올리고 숙종의 계비가 되었다. 그러나 왕자를 낳지 못해 숙종의 총애를 받지 못하다가 기사환국이 발발하여 서인의 지우너을 받던 인현왕후는 폐서인되어 출궁되었다. 1694년 갑술환국으로 다시 복위되어 당시 빈으로 강등된 희빈 장씨와 대립하다가 1701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인원왕후 김씨(1687 ~ 1757년)는 1701년 인현왕후가 죽자 간택되어 왕비로 책봉되었다. 1720년 숙종이 죽은 뒤 왕대비에 오르고, 1724년 경종이 죽자 대왕대비가 되었다. 소생은 없으며 경기도 고양에 숙종과 함께 묻혔다.
희빈 장씨(1659 ~ 1701년)는 본명이 옥정으로 역관 장경의 딸로 중인 집안이었으나 어머니가 천인 신분이었다. 그러나 집안이 부유하여 정치권, 특히 남인들에게 정치 자금을 지원하며 많은 역활을 하고 있었고 어머니가 왕족과 친밀한 관계를 이용하여 남인들의 추천을 받아 궁에 들어가 자의대비전(慈懿大妃殿)의 나인이 되었다. 그러다가 숙종의 눈에 들어 은총을 입게 되었고 서인을 대표하는 인현왕후 민씨와 남인의 지지를 받는 장옥정이 서로 갈등하고 대립하여 적대적 관계가 되었다.
당시 숙종과 인형왕후 사이에는 후사가 없었는데 장옥정이 왕자 균(훗날 景宗)을 낳았고 숙종은 1689년(숙종 15) 1월 균을 원자로 책봉하게 되고 장씨는 희빈에 오르게 된다.
당시 세자 책봉을 반대하던 서인 거두 송시열은 유배되어 사사(賜死)되고, 나머지 서인들도 유배되었고 권대운 등 남인(南人)이 정권을 잡게된다. 이를 기사환국(己巳換局)이라 한다. 이 해 5월 숙종이 인현왕후를 폐출하고 희빈 장씨를 왕비로 책봉하였고 이에 반대하는 서인 박태보 등 80여 명이 반대 상소를 올렸다가 참혹한 형벌을 받고 축출된다.
1694년(숙종 20) 서인의 김춘택 등이 서인의 집권을 위해 남인들을 역모로 고발하여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서인들이 다시 정권을 잡게 되고 숙종은 인현왕후를 복위시키고 장씨를 희빈(후궁)으로 강등시킨다.
1701년(숙종 27) 인현왕후가 죽자 희빈 장씨가 자신의 거처인 취선당 서쪽에 신당(神堂)을 차려 놓고 인현왕후를 저주한 것이 발각되고 오빠 장희재의 편지가 밝삭되어 장희재가 처형되고 곧이어 희빈 장씨는 사사되었다. 이를 '무고의 옥'이라 한다.
숙빈 최씨(1670 ~ 1718년)는 7살때부터 궁중에서 청소, 설거지 등 주로 허드렛일을 담당하는 무수리로 입궐하였다. 숙종의 총애를 받아 아들 연잉군을 낳았고 후일 경종의 뒤를 이어 조선 제21대 왕위에 오르게 된다.
1693년 아들 영수를 낳았으나 두달만에 사망하였고,
야행성, 과단성, 비정한 군주 숙종
드라마 ‘동이’ 때문인지 조선 후기 군주 숙종에 대한 관심이 높다. 숙종이 미행(微行)을 자주 했느냐, 정말로 다정다감한 임금이었느냐는 질문을 받곤 한다. 왕의 궁궐 밖 거둥을 풍부하게 담은 ‘한국구비문학대계’에 숙종의 이야기가 78건이나 실려 있다는 사실을 통해서 볼 때 그는 야행성 군주였던 것 같다.
다정다감한 임금이었는가에 대한 대답은 회의적이다. 숙종은 한마디로 마키아벨리스트였다는 것이다. 정치세력 간의 변화와 균형을 주도하고 언론플레이에 능한 현실 정치가라는 평가가 그것이다. 실제로 숙종은 부왕인 현종이나 이전의 국왕 인조나 효종도 어찌하지 못했던 대정치가 송시열을 거꾸러뜨린 유일한 군주였다.
숙종이 왕위에 올라 송시열과 15년간이나 정치적 수 싸움을 전개하는 모습을 보면 얼마나 노련한 정치가인가를 알 수 있다. 83세의 노회한 정치가 송시열이 스물아홉 살의 군주 숙종에게 무너진 계기는 1689년의 ‘세자책봉 반대상소’였다. 송시열은 이 상소에서 태어난 지 1년밖에 안 된 장희빈의 아들(나중의 경종)을 세자로 책봉하는 것은 너무 이르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숙종은 한밤중에 승지 등 여러 신하를 들어오게 했다. 그는 “일이 정해지기 전에 말하는 것은 괜찮지만 이미 정해진 일을 가지고 말하는 것은 반드시 그 뜻하는 바가 있기 때문”이라면서 노기 띤 목소리로 신하 모두에게 소견을 말하게 했다. 이 자리에서 신하들은 대부분 송시열의 상소가 ‘망발’이며 참으로 ‘부당한 말’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국가의 대계를 훼방 놓는 ‘반역의 신하’라고 극언하는 신하도 있었다.
대정치가 송시열을 꺾은 유일한 왕
숙종은 신하들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송시열의 관직을 빼앗고 도성 밖으로 내쫓았다. 송시열의 제자인 영의정 김수흥도 파직했다. 김수흥이 전에 “예로부터 임금의 무리들은…”이라고 왕을 경멸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는 이유였다. 여기서 보듯이 숙종은 정적을 제거할 때 반대자가 스스로 함정에 빠지기를 기다린 다음 일망타진하는 방법을 사용하곤 했다.
1688년부터 1689년 사이의 ‘숙종실록’은 그런 숙종의 통치 방식을 잘 보여준다. 한밤중에 대궐 담을 넘다 체포된 군사를 관대하게 풀어주는 기사로부터, 후궁 장옥정의 출산을 전후해 그의 어미가 화려한 가마를 타고 궁궐에 출입한 것을 청죄하는 일 등 다양한 기사가 실려 있다. 특히 장옥정의 왕자 생산 이후 인현왕후의 폐비 및 새 왕비 책봉 등 숱한 소설과 사극의 소재가 되었던 사건이 담긴 것도 이 시기의 실록이다.
흥미로운 대목은 인현왕후 폐비를 반대하는 노론 신하들을 숙종이 국문하는 내용이다. 1689년 4월 25일에 86명의 전현직 관리가 폐비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자 숙종은 한밤중에 신하를 한 명씩 국문하면서 “한 명의 부인을 위해 절의를 세우느니 차라리 나를 폐위하는 게 낫지 않겠느냐”며 밤새 고문했다. 항변하는 박태보를 향해 “네가 더욱 독기를 부리는구나, 독기를 부려. 매우 쳐라, 매우”라면서 더없이 진노하는 모습을 보였다. 놀라운 점은 국문 과정을 생중계하듯 모든 언행을 기록하는 사관의 태도이다. 사관은 이를 통해 ‘폭군’ 숙종의 모습을 여지없이 폭로한다.
이처럼 환국과 옥사가 계속되면서 당파간에는 서로 견제와 균형을 이루었으나 인재들의 손실이 많았다. 또 이 환국과 옥사가 궁중의 정비와 후궁들이 당파에 연결된터라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정비와 후궁들의 싸움과도 연계되어 상황은 매우 복잡하게 전개되었고 원자를 낳은 희빈 장씨를 사사시킬 정도로 장씨의 패악질도 문제였지만 숙종의 비정함도 대단하였던 인물이었다고 생각된다.
풍요 속에 갈등이 혼재된 사회
그럼에도 숙종 시대는 풍요로운 시대였다. 상평통보라는 동전의 유통과 대규모 농업경영에 의한 생산력의 증대로 ‘한 해 동안에 호화주택을 두 채씩이나 마련하는’ 부자가 등장했다. 집짓기와 집수리를 되도록 웅장하고 화려하게 하는 풍조가 유행하는가 하면, 한 번의 잔치를 열흘이 넘게 계속하는 사람도 많았다.
한편 이러한 환국과 옥사로 조정과 관리들의 부정부패가 수구러들었고 반대로 민생은 비교적 안정을 되찿았지만 사방에 검계(劍契)가 출몰하고 장길산(張吉山)같은 도적떼가 활약하는 데서 보듯이 사회적 갈등이 심각하게 노정된 때였다.
재위 23년째인 1697년 1월에 숙종은 “극적(劇賊) 장길산이 날래고 사납기가 견줄 데가 없다. 여러 도(道)로 왕래하여 그 무리들이 번성한데, 벌써 10년이 지났으나 아직 잡지 못하고 있다”면서 “상세하게 정탐하고, 별도로 군사를 징발해서 체포하라”고 긴급 지시한다. 조정의 체포 독려와 높은 현상금에도 불구하고 장길산을 끝내 추포하지 못했다. 숙종 정부의 무능력을 그대로 드러낸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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