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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770 : 조선의 역사 312 (제19대 숙종실록 18) 본문
한국의 역사 770 : 조선의 역사 312 (제19대 숙종실록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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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대 숙종실록(1661~1720년, 재위 : 1674년 8월~1720년 6월, 45년 10개월)
5. 의적 신화 '장길산'
장길산은 숙종 대에 산적 두목으로 유명했던 실존 인물이다. <숙종실록>에는 조적의 괴수로 등장하고 있고, 이익의 <성호사설>에는 홍길동, 임꺽정과 더불어 조선 3대 도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는 광대 출신으로 원래 활동 무대는 황해도였다. 그 무리가 워낙 많아 조정에서 큰 걱정거리로 여기다가 결국 신엽을 황해도 감사로 삼아 체포하도록 지시했다. 이때 신엽은 장길산의 부하 한 명을 잡아 그의 은신처를 알아냈지만 체포하진 못했다. 1692년 장길산은 황해도를 떠나 평안도 양덕현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조정에서는 포도청을 직접 움직여 그를 잡으려고 했지만, 역시 실패하였다. 이 일로 양덕현 현감이 파직되었고, 장길산은 행방을 감추어버렸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난 뒤, 장길산이 다시 나타난 곳은 국경지역인 함경도 두만강 입구 서수라였다. 하지만 서수라에서 활동하던 장길산이 잡혔다는 기록은 없다. 홍길동이나 임꺽정은 분명히 접혔다는 기록이 있는데, 장길산에 대해선 그건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는 끝까지 잡히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장길산은 과연 의적이었던 것일까? 장길산이 의적이었다는 말은 숙종실록 23년 1월 10일에 있었던 역적사건에 대한 심문과정에서 근거를 두고 있다. 이날 이절과 유선기라는 자가 이영창이란 자의 역적모의를 고변했는데, 그 내용을 보면 아래와 같다.
'어느날 이영창이란 자가 이절의 집에와서 하룻밤을 묵으면서 자기 스승을 만나보지 않겠느냐고 했다. 이영창의 스승이라는 자는 운부라는 승려였는데, 당시 나이가 70세가 된 노승이었다. 운부는 송나라 명신의 후예로 명나라가 망한 뒤에 중국에서 망명하여 금강산에 들어와 머리를 깍고 승려가 되었고, 천문과 지리를 통달하고 사람을 거느리는 재주가 제갈공명에 뒤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의 제자 중에 뛰어난 자가 많은데, 옥여, 일여, 묘정, 대성, 법주 등 1백여 명이며, 그들이 전국 각지 절에 흩어져 지내며 팔도의 승려들과 결탁하여 큰 조직을 결성하고 있다고 했다.
운부는 최씨 성과 정씨 성을 쓰는 두 명의 진인을 찿아내 은밀히 숨기고 있는데, 이들 중 정씨 성을 쓰는 자는 조선을 무너뜨리고 왕이 될 자이고, 최씨 성을 쓰는 자는 중국을 장악한 뒤 황제가 될 인물이라고 했다. 그들 두 진인은 기사년 무진월 기사일 무진시에 태어난 자들로서 모두 뱀으로 태어나 용이 될 운명이라는 것이다.
운부 휘하에 승려들 이외에도 여러 인물이 있었는데, 황해도와 평안도 일대의 산적을 움직이고 있는 장길산을 비롯하여 병마사를 지낸 최운서의 서자들인 최상중과 최상성, 용장 정학과 그의 아우 정신, 장사 최헌경, 유찬, 설유징, 김화의 부자 지대호, 함경도의 술사 주비, 강계부사 신건, 상토첨사 신일, 춘천의 용장 최흥복, 수원의 역사 한이태, 용인의 거사 조종석, 수원 군기감관 임필홍 등 숱한 인물들이 포진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 이들의 말에 의하면 운부의 명령에 따라 전국 각처에 흩어진 운부의 제자들과 조직에 동참한 장사 및 관리, 도적패 등이 3월 21일 동시에 군사를 일으켜 도성을 공격하기로 했다.'고 한다.
이런 자백을 받아낸 조정은 급히 군대를 파견하여 이들 무리들을 모두 체포하는 작업에 돌입하였다. 숙종은 금부당상과 양사의 장관, 좌우포도대장에게 명하여 거명된 자들을 모두 잡아들이고 문초하여 운부의 조직을 일망타진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운부의 제자로 고발된 승려 혜찰을 비롯하여 이영창과 그의 동생 이영만과 관련자들인 중길과 선옥을 잡아들엿다. 또 이영창과 함께 의형제를 맺고 변란을 도모했다는 김경함, 김정열, 장영우, 장한경, 최상성 형제 등도 붙잡혀 들어와 문초를 당했다.
숙종은 또 운부와 풍열, 묘정, 옥여, 일여, 혜일, 정학, 유찬, 정신, 최헌경, 신건 등도 빨리 잡아들이라고 명령했다. 그 결과 이영창이 언급한 풍열과 혜일이란 승려가 잡혀왔다. 하지만 나머지 승려들은 행방이 묘연했다.
어쨌던 포도청은 풍열과 혜일, 주비 등을 모두 국문하였는데, 승려들에게선 별다른 혐의점을 찿지 못했고, 주비란 자는 황설수설하며 미친 사람처럼 엉뚱한 소리를 해댔다. 그 바람에 주비는 참형에 처해졌다. 하지만 승려들을 비롯하여 다른 관련자들을 아무리 다그쳐도 주모자로 거론된 운부란 자는 아는 자가 없었다. 결국 포도청은 모든 것이 이영창이 거짓으로 만들어낸 인물들이라고 판단하고 그를 강력하게 추궁하였더니, 이영창이 고문 끝에 이렇게 말했다.
"중은 떠 다니는 구름 같기 때문에 운부라는 이름의 중을 허위로 지어냈고, 일여와 혜일은 일찍부터 알던 중이었고, 풍열은 이름이 알려진 중이었기에 끌어다 붙였고, 묘정 역시 내가 지어낸 인물입니다."
사건은 결국 이영창의 그 말을 끝으로 종결되었고, 혜일과 각선, 풍열, 일여 등의 승려들은 모두 무혐의로 풀려났다. 그리고 조정에서 운부가 전국적인 거대한 조직을 형성하여 반역을 도모하려 했다는 이영창의 말은 모두 거짓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이 사건은 한 달여 뒤인 2월 16일에 다시 거론되었다.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남인측에서 주장하길, 이영창을 고발한 유선기를 비롯하여 이영창에게 불리한 진술을 한 김정열, 김경한, 홍기주, 조석 등이 모두 서인 노론의 핵심 인물인 김춘택의 심복이라는 주장을 하여 이영창의 옥사는 근본적으로 김춘택이 남인들을 모함하기 위한 무고사건이라고 했다. 이 때문에 이영창을 몰아세운 김춘택의 심복들은 모두 무고죄로 처벌되었다.
만약 이영창이 주장대로 운부가 당시 전국적인 조직망을 가지고 있던 실존 인물이고 장길산이 운부의 휘하에서 활동하던 무장 세력이었다면, 장길산은 임꺽정이나 홍길동보다도 훨씬 거대한 조직에서 활동하던 의적이라 볼 수 있다. 그것도 끝까지 잡히지 않았던 유일한 의적인 셈이다.
소설 <장길산>에 대하여......
언젠가 암울하던 시절 강원도 현리에서 근무하던 때 였다. 대전 계룡대에서 3년간 근무하다 유배내지 귀양간 것같은 그 곳에서 난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책을 읽기로 했다. 그래서 간부들에게 집에 장편 소설이 있으면 빌려주라고 했다. 그래서 몇 몇이 가져온 책들이 있었는데, '여명의 눈동자', 동의보감, 목민심서, 장길산 등이었고 나는 닥치는대로 읽었다.
장편 소설의 묘미는 처음 읽을 때는 지루한 점도 있으나 점점 빠져드는 재미는 밥을 먹는 것도 잊을 정도로 심취하기 쉽다. 특히 여명의 눈동자 10권은 재미있게 읽었고 그 후에 드라마 모래시계란 재목으로 방영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장길산도 마찬가지로 재미있게 읽었고 비참한 조선 시대의 민중들의 실상을 적라라하게 느낄 수 있었다.
실록을 보면 숙종 시대는 그런대로 평화기로 환국정치가 반복되면서 왕권이 강화되었고 붕당정치는 견제와 균형을 이루면서 백성들의 삶은 풍족하였다고 하지만 장길산의 내용을 보면 백성들의 삶은 비참하기 짝이 없는 상태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양반과 사대부들만을 위한 나라, 그것이 바로 조선이었다는 점이며 그런 의미에서 소설 장길산은 그 시대상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작가 황석영씨는 암울했던 70~80년대의 한국 사회를 '장길산'이라는 소설을 통해서 민중의 저항의식을 그린 것으로 생각된다. 방대한 자료 수집과 10년이리는 각고의 노력 끝에 나온 것으로 처음부터 신문에 연재되었고 나중에 책으로 출간되었다. 많은 독자들이 책을 읽게 되었고 작가의 상상력과 치밀한 구성, 서민들의 삶, 새로운 이상향을 잘 나타낸 내용에 감탄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러한 대단한 소설을 쓴 작가의 정신 세계에 비해 현실적인 그의 언행은 별로 독자들에게 감동을 주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굶주림에 죽어가고 탈북자가 속출하고 있는 북한 김일성 세습체제에 대한 동경과 사상적인 편향성은 작가의 내면에 들어 있는 혁명적인 저항의식이 결국은 권력에 빌붙어 아부하고 출세를 지향하려는 한 인간의 치졸한 탐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며 민중을 위한 저항의식이 결국에는 가식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요즘도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정치권에 몸을 담고 있어 그동안 쌓아놓은 작가적 위상이 평가절하될 수밖에 없는 듯하다.
어쨌던, 이런 소설은 삶이 힘들 때, 의미없는 시간을 보내고 싶을 때, 무언가 새로운 취미를 갖고 싶을 때, 자신의 나쁜 습관과 태도를 버리고 싶을 때, 책 읽기를 싫어하고 관심이 없는 사람, 상처받은 영혼을 위로받고 싶을 때, 미래가 불투명 할 때 등등 이런 책을 읽으면 재미를 느끼고 시간을 보내기 좋을 것이며 새로운 이상과 꿈을 가질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도박, 게임, 성충동, 마약, 방황 등 각종 오락과 실의, 탐욕에 빠지지 말고 이런 책을 읽으면 힘든 삶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작가 서언>
지난 십년을 어디서부터 뭐라고 적어나가야 할까. 나는 <장길산>을 책 열 권으로 묶어 내면서 출판사의 뜻과는 달리 해설이나 후기 따위를 넣지 않기로 했다. 소설 자체가 나의 십년 동안의 삶이었기 때문이고, 그 외에 자신의 표현할 수 없는 개인적 부분을 덧붙이기가 쑥스러웠기 때문이다. 그 숱하게 구겨던졌던 파지들에조차 나는 드디어 작품을 끝낸 작자가 나라고 내세울 수가 없다.
연재를 시작할 무렵에 태어났던 딸아이는 어느덧 국민학교 4학년짜리가 되었으니, 그즈음에 내 소설을 읽을 수가 있었던 젊은이들은 최소한 자녀를 키우는 부모가 되어 있을 것이며, 연재소설이 무엇인지도 모르던 어린이들까지도 청춘남녀가 된 셈이다. 참으로 나는 동시대인이라거니 독자들이라거니 하는 말에 대하여 십년 전에는 실감할 수도 없었던 깊고 성숙한 감동을 느끼에 된다. 아, 정말 우리는 같은 연대에서 함께 쓰고 읽으며 인생을 살아온 것이다. 또는 돌아가셔서 나의 소설이 완결되는 것을 못보게 된 분들도 많다. 끊길 때마다 격려하고 질책하시던 얼굴 모를 수많은 분들과 함께 살아온 나날이었다.
언젠가 산문정신이란 일상 속에서의 싸움 끝에 획득된다고 썼지만 지금도 그런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작자가 사는 만큼만 나오게 되어 있어 누구도 속일 수 없는 것이 바로 산문이라고 생각한다. 썩지 않는 의식을 팽팽하게 견지하면서 참을성있게 하나 둘씩 쌓아 올려가야 하는 것이다. 우선 장편소설은 작업의 양이 막대하고 오랜 시간이 걸린다. 십년 동안 거의 매일 밤을 새웠고 소설의 구성이며 줄거리에 대한 강박관념에서 놓여났던 적이 없다. 그것은 벗어날 수 없을 것같은 보이지 않는 연옥이었다. 그러나 십년 동안에 내가 체득하게 되었던 것은, 덧없이 뜨고 가라앉는 세평 속에서 무슨 화끈한 성과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겸허하게 미완을 쌓아가야 한다는 생각이다.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의 관계를 바탕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일상과 함께 가야 한다는 믿음이다. 만년설을 쓴 신비로운 산과 같은 예언자가 되려고 하기보다는 구체적인 일상적 실천을 해내기가 훨씬 어렵고 그것이 다른 이에게 더욱 도움이 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앞서 가는 자가 아니라 같이 가려 한다.
분단된 나라의 과도적 시대의 작가로서 나는 칠십년대에 비롯되었던 민중이라는 개념의 실체를 찾아서, 자생적인 근대화의 원류에 닿을 것을 바라면서 민중사라는 장강의 상류로 거슬러 올라갔던 셈이다. 이제 바야흐로 민중이란 말이 실천적 단계를 넘어서는 위기의 시대에 나는 이 소설을 끝맺고 있다.
잔뜩 찌푸려진 하늘에서는 폭풍의 전조가 보이고 음산한 천둥소리와 번개가 빛나고 있다. 그러나 옛말에도 있듯이 폭풍우의 날에도 시간은 흐른다. 두려워하거나 지레짐작할 필요도 없고 천변만화의 변란을 피하려 해서도 안된다. 장길산의 지난 십년이 그러했듯이 뚝이 무너지면 묵묵히 막아내고 쓰러지는 기둥은 여럿이서 다시 버티어 세우고 밤새도록 물을 퍼낼 일이다. 무슨 재간이나 심오한 생각이나 엉뚱한 착상으로 될 일이 아닌, 세상 무지렁이들처럼 묵묵히 대처하면서 눈물 고인 눈시울을 쓱 훔쳐내고 코를 휑하니 풀고 나설 일이다. 그러므로 지난 십년을 보내고 그 성과로 어찌하겠다는 욕심은 없다.
책이 좀 팔려서 세속적으로 인세가 생겨서 밥먹고 사는 일이 불편해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도 있을 터이고, 따라서 내심 기회주의적인 포즈도 나올까 경계가 된다. 마지막에 길산이 말하였듯이 글 아는 자로서의 폐단을 주변의 이웃들에게 보여 주어서는 안 될 것같다.
나는 이미 써버린 내 소설에 대하여 다시 고치거나 덧붙이거나 할 생각은 전혀 없다. 소설의 한계는 워낙 처음부터 역부족이었던 나의 한계이며 그 한계는 지난 세월에 붙이고 다른 작업을 통해서 뛰어넘으려 한다. 또한 작가가 나 혼자가 아니라 여러 분 계시니 그분들께서 보다 완전하고 훌륭한 작품으로 더욱 이러한 흐름을 심화시켜갈 터이다. 어떤 독자는 십년만 더 써보라고 하셨지만, 이미 팔십년대 초입에서부터 밀린 일이 너무 많아서 이제는 더이상 피할 수가 없게 되었다. 무엇보다 사료가 풍부한 후반에 올수록 상상력이 압박을 받아서 작업이 지리했고, 특히 병자년의 승려 세력과 한양 선비들과의 체결 부분에 오면서는 그 깨어지는 과정이나 정쟁의 모양이 살주계, 검계, 미륵 부분에 비하여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장길산의 활빈도 이념에 비한다면 이영창 부분은 에피소드로 취급하고 싶었다. 이것이 팔십년대를 바라보는 작자의 현실인식이기도 하였다.
이 소설을 쓰면서 이사를 네 번 했는데 서울에서 해남으로, 다시 광주로, 제주로 갔다가 광주에 돌아왔다. 그러나 집필실을 혼자서 따로 옮긴 것은 거의 스무 번에 가깝다. 그때마다 책과 자료들을 트럭에 싣고 돌아다녀야 했다. 긴장과 생동감의 유지가 어려웠던 것이다.
나는 장길산을 쓰면서 그 줄거리며 구성이며 인물들에 대한 생생한 것들을 내가 각처에서 숱하게 부딪혔던 당대의 사건과 사람들 가운데서 얻어 냈다. 어느 등장인물을 짚으면 나는 곧 내가 만난 누구인가를 떠올릴 수가 있고, 소설의 어느 대목을 들추면 그때가 언제였는가를 기억해 낼 수가 있다. 서울과 호남에서 내가 겪었던 여러 시대적 우여곡절들 가운데는 그대로 표현하지 못할 줄거리도 많았다. 어떤 때에는 신문사의 마감시간과 그와 똑같이 긴요한 현실에서의 내 몫이라는 양수겹장을 받고 쫓기며 소설을 소설을 미처 쓰지 못했던 때도 많았고, 또 어떤 날은 벼랑 끝에 선 것처럼 갈 길을 잃어 뜬눈으로 밤을 세우며 겨우 두 세 장의 원고지를 메운 날도 많았다.
그렇지만 그 덕분에 나는 작품이든 역사든, 무리의 한 사람으로서 일상적 싸움을 통해서 겸허하게 기여할 수 있다는 미덕을 알게 된 셈이다. 긴장이 풀리고 작업이 지리해질수록 생활을 다잡지 못하고 느슨해지거나 개인적으로도 자신을 방기해버리게 되는 때도 있었지만 결코 오랫동안 그러고 있지는 못했으며, 새벽에 술이 깨듯이 꾸무럭거리며 일어나 냉수 한 사발 들이켜고 속을 차리고는 다시 자신을 붙잡아 일으키곤 했었다. 이런 되풀이 가운데 가장 고통을 많이 받고 글쓰는 나보다 더욱 인내했던 아내는 혼자서 빈 방을 지키고 원고를 추리며 달려나가 송고하거나 전화로 부르거나 하는 일에 시달렸고, 무엇보다도 나의 초조와 강박감에서 오는 지독한 신경질과 변덕을 참아 내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식구들이야 나와 함께 먹고 사는 일에 연결되었으니 어쩔 수 없이 감당해야 하겠으나, 누구보다도 중도에 여러 번 끊길 적마다 화를 내시던 독자들께 엎드려 사과를 드린다. 그뿐 아니라 십년 동안 똑같은 악몽에 시달려온 한국일보 문화부기자들에게는 무슨 험담을 듣더라도 대꾸할 변명의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특히 한국일보의 신문 제작이라는 엄연한 행정적 질서에 막대한 지장과 타격을 여러 차례 끼치게 되었던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자의 역부족과 불성실을 감내하며 끈질기게 완료의 길로 내몰아준 과감하고 패기있던 방침에는 뭐라고 드릴 말씀이 없다. 참으로 장길산은 한국일보와 함께 그 전폭적인 지지의 토대 위에서 썼던 소설이다. 다른 지면이었으면 나는 이미 뒤로 나자빠졌거나 중도에 우물쭈물 끝내 버렸을지도 모른다.
당시 서른 두 살의 무명 신인이었던 내게 다른 아무것도 묻지 않고 의심없이 내맡기면서, 신문지면임을 의식하지 말고 자네 마음대로 해보라던 백상 장기영선생님께도 이제 겨우 마음의 빚을 더는 듯 하다. 자료에서부터 집필 환경에 이르기까지 밀어주셨던 후의를 잊을 수가 없다.
이러한 자리가 아니라면 어찌 개인적인 얘기를 꺼낼 수가 있겠는가마는, 소설 장길산은 작작의 능력이었다기 보다는 함께 살아온 여러분들에 의하여 쓰여진 것이 분명하다. 시작할 무렵에 병고에 시달리면서 모든 자료를 내주고 도와주었던 정석종 교수께도 감사드린다. 원고를 날라주신 기억할 수도 없이 수많은 독자들에게도 뜨거운 인사를 올리면서, 나는 이 소설을 어려운 시대의 파도에 쏠리고 몰리며 살아가는 우리 당대의 모든 이들에게 돌려 드린다.
나는 이제 다시는 장길산의 세계를 뒤돌아 보지 않고 새로운 작업을 향하여 출발하려 한다.
/ 황석영
<줄거리>
장길산은 신분의 해체가 서서히 시작되던 조선조 효종 말, 도망하는 여비(女婢)의 몸에서 태어난다. 노상에서 길산을 낳자마자 그의 생모는 죽고, 구월산 광대들의 손에 기탁된 길산의 삶의 출발은 당시 유민계층이 천민세력의 핵심이 되어가는 시대의 박명과도 같은 상징이다. 광대로서 성장하는 길산은 같은 광대로 역사(力士)인 이갑송과 함께 해주 간상배 신복동 패를 혼내주고 송도 상인 박대근과 사귀게 된다.
한편, 흉년이 들어 색상에 팔려 창기(娼妓)가 되었던 묘옥(妙玉)은 재인말 총대 손돌 노인의 건짐을 받는데, 길산은 묘옥과 정분을 맺고 평생을 기약한다. 같은 도망 노비로서 봉산 자비령의 화적당 임태룡에게서 분가해나온 마감동과 오만석이 구월산채의 두령노가를 등지고 장길산·박대근·이갑송과 손을 잡는다. 해주 상인 신복동은 선상 임유학을 모략에 의해 패망시키고 그의 충실한 도사공이었던 우대용은 살인죄로 투옥된다. 길산과 만나기로 했던 박대근은 신복동 패거리의 분풀이를 받게 되었고, 길산과 갑송이 그들을 징치한 후 달아나다가 길산이만 관군에게 붙잡혀 처형의 날을 기다린다. 때마침 길산은 해주 감영옥의 회자수 망나니로 전락하여 잔명을 붙이고 있는 우대용과 만나 박대근의 도움으로 탈출을 모의하기 시작한다.
길산이 탈옥에 성공하여 구월산에 당도해 보니, 묘옥은 간데 없고 그를 길러준 양부모는 누이동생처럼 자라온 봉순이와 혼인을 시키려 한다. 길산은 양부모의 명을 어길 수 없어 봉순을 아내로 맞고 갑송이 또한 성혼을 하는데, 이 기회를 빌어 뜻맞는 벗들이 형제의 의를 맺는다. 송상 박대근, 봉산의 선비 김기, 장길산, 이갑송, 해주 도사공 우대용, 구월산의 화적 마감동과 오만석, 그리고 장연의 소금장수 강선흥 등이었다. 길산은 마침내 생각하는 바가 있어, 풍열수님의 소개로 금강산에 은거하여 적국의 승려와 천민세력을 모으고 있는 운부대사를 찾아 떠난다. 한편, 안성의 사당패로 흘러간 묘옥은 모가비 고달근의 권유로 여주 도장(陶匠) 이경순을 알게 되고, 경순은 묘옥을 깊이 사랑하게 된다.
우여곡절 끝에 묘옥은 송파 부근에서 자리를 잡고 주막을 차린다. 금강산에 들어간 길산은 운부의 지도를 받으며 산에다 화전 개간도 하고 역병에 시달리는 마을 사람들을 구호하여 새로운 뜻을 다진다. 길산은 차츰 백성의 나라가 어떤 것인가 하는 확실한 생각을 갖게 된다. 금강산에서 삼년 수도를 마친 길산은 생부의 종적을 찾아 묘향산으로 가다가 중도에서 깨우쳐 운봉산에 들어가 다시 수도를 계속한다. 낭림산맥의 깊은 산중에서 그의 인간성과 정신은 더욱 성숙되고 깊어간다. 구월산으로 돌아온 길산은 선비 김기를 완전히 천민을 택한 사람이 되게끔 도와주고, 세상에 널리 알려진 구월산 산채를 나누어 자비령으로 옮길 계획을 세운다.
숙종 10년 봄부터 시작된 대기근이 전국을 덮치기 시작한다. 길 위에는 양식을 구하러 다니다 쓰러진 주검들이 하나씩 늘어났고, 역병까지 나돌게 되자 백성들의 울음은 곳곳마다에 가득 찬다. 이에 길산은 보다 너른 기민 구휼을 위해 자비령에다 그들의 세력 일부를 옮기려 한다. 관의 혹심한 수탈에 못 이겨 민변을 일으키고 도주해 온 자비령 산채의 두령 최흥복을 그의 수하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한다. 마침내 그들은 구월산과 자비령을 중심으로 휘하의 모든 무리들에게 활빈에 나설 것을 명하고, 해서 곳곳에 출몰하여 관창과 부호를 털어 잡초처럼 버려진 기민들의 목숨을 건지기 시작한다.
이어 그들은 평안도에까지 그 세를 뻗쳐 나갔고 자연 장길산의 이름이 백설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된다. 급기야 감사 이세백은 출중한 무관들을 뽑아 토포에 나서나 실패하고 만다. 한편 한양 조정에서는 권세 다툼으로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계속되고 따라서 백성들의 원한과 탄성은 높아 간다. 이들의 짓눌린 삶에 응어리져 있던 울분이 불씨가 되어 한양 성내에서도 살육과 침탈의 불길이 번져 갔다. 부패한 관리와 무도한 양반들을 몰아내고 백성들의 나라를 세우겠다는 검계와 살주계는 부호와 대갓집들을 차례로 들이친다. 양반의 세상이 곧 끝난다는 소문이 파다하고 한양 성내는 술렁대기 시작한다. 이에 포청에서는 당대에 그의 무예를 따를 자가 없다는 포도 종사관 최형기를 토벌에 나서게 한다.
정묘년 4월, 입국(立國)의 뜻을 가진 사람들이 구월산에 모인다. 길산의 활빈도, 운부 대사의 승병, 해서의 무계(巫系), 근기 지방의 미륵교도 등이 결속한다. 백성들 사이에서 왕조가 망한다는 괴서가 나돌고, 미륵이 도래하여 용화(龍華) 세계를 이룩한다는 믿음이 번져 나간다.
길산은 언진산에 터를 잡고 관군과 맞설 자금을 조달한다. 이 때 고달근이 큰 이익을 꾀하다 관가에 검거되자 길산 일당을 밀고한다. 토포관 최형기가 급습하지만 길산은 이미 달아난 뒤이다. 길산은 고달근을 찾아 징계하여 다스리고 최형기를 처단한다. 해서와 관북 일대에는 장길산을 자처하는 무리들이 출몰해 조정을 괴롭히지만, 이후 길산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 등장인물>
* 장길산 :쫓기는 노비의 몸에서 태어나 광대들의 손에서 길러지지만 총명하고 날렵하고 힘 있는 젊은이로 성장한다. 같은 마을 力士(이갑송)과 함께 백성을 괴롭히는 간상배(奸商輩)들을 혼내주며 송상(박대근)과 손을 잡고 고통받는 민중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고 결심한다. 비운의 여인 묘옥과 평생을 함께 할 약조를 하지만 관가에 사로잡힌 그가 탈옥하는 사이에 헤어지고 만다.
* 이갑송 : 장길산과 같은 재인말 출신의 광대로 힘이 장사다. 간상배 신복동 패거리를 징치하며 괴력에 가까운 힘으로 길산을 도와 준다.
* 박대근: 송도 상인 차인 행수로 상단을 거느리며 장길산과 손을 잡는다. 길산이 옥에 갇혔을 때 교묘히 탈출시키고 구월산 일당들과 광대패들을 돕는다.
* 묘 옥 : 흉년에 색상(色商)에 팔려 창기(娼妓)가 되었던 그녀는 재인말 총대 손돌 노인에게 건져져서 그의 딸로 살게 된다. 뛰어난 미모의 그녀는 길산과 정분을 맺고 평생을 기약하며 가슴에 '길(吉)'자의 연비(聯臂)를 새긴다.
* 마감동 : 구월산 화적패의 모사꾼인 그는 길산의 도움을 받아 잔인한 두목 노가를 처치하고 두령의 자리에 오른다.
* 우대용 : 신복동의 모함에 걸려 살인죄를 뒤집어쓰고 투옥된 그는 박대근의 도움을 받아 죄인들의 목을 치는 회자수로 전락하는데 때마침 투옥된 길산과 더불어 탈출한다.
* 강선흥 : 장연의 소금장수 출신의 力士. 남장을 하고 길산을 찾아나선 묘옥을 구해준다. 갑송이와 힘겨루기 끝에 의형제를 맺는다.
* 고달근 : 안성사당패 모가비. 장사 강선흥과 한판을 겨루고 인연을 맺는데 묘옥을 그들 사당패에 머물게 한다.
* 김 기 : 버림받은 선비 출신의 학자. 갑송이의 도움을 받아 목숨을 건진 그는 구월산 녹림당과 한 패가 된다.
* 풍열스님 : 월정사의 괴짜 주지승. 문화 재인말 광대들을 탑고개에 정착시킨다. 장길산으로 하여금 금강산의 운부대사를 찾아가도록 권유한다.
<작가 황석영>
1943년 만주 장춘(長春)에서 태어났다. 고교시절인 1962년에 사상계 신인문학상을 통하여 등단하고, 197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탑」과 희곡 「환영(幻影)의 돛」이 각각 당선되어 문학 활동을 본격화했다.
1966~67년에 베트남전쟁 참전 이후 74년대 들어와 본격적인 창작 활동에 돌입하여 「객지」, 「한씨연대기」, 삼포 가는 길」 등 리얼리즘 미학의 정점에 이른 걸작 중단편들을 속속 발표하면서 진보적 민족문화운동의 추진자로서도 크게 활약했다.
1974년 첫 소설집 『객지』(창작과비평사)를 펴냈으며, 대화소설 『장길산』 연재를 시작하여 1984년 전10권으로 출간하였다. 1976~85년 해남, 광주로 이주하였고 민주문화운동을 전개하면서 소설집 『가객(歌客)』(1978), 희곡집 『장산곶매』(1980), 광주민중항쟁 기록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1985) 등을 간행했다. 중국에서 『장길산』(1985), 일본에서 『객지』(1986), 『무기의 그늘』(1989), 대만에서 『황석영소설선집』(1988)이 번역,간행되기도 했다.
1989년 동경, 북경을 경유하여 평양 방문. 이후 귀국하지 못하고 독일 예술원 초청 작가로 독일에 체류한다. 이 해 11월, 장편소설 『무기의 그늘』로 제4회 만해문학상을 수상했고 1990년 독일에서 장편소설 『흐르지 않는 강』을 집필, 한겨레신문에 연재했다.
1991년 11월, 미국으로 이주, 롱 아일랜드 대학의 예술가 교환 프로그램으로 초청받아 뉴욕에 체류.
1993년 4월 귀국, 방북사건으로 7년형 받고 1998년 사면되었다
<해설 1>
우리나라 현대문학사에서 '임꺽정'으로 시작한 대하소설의 맥은 '토지'를 지나 '장길산'으로 이어졌다. 1974년 한국일보에 연재되기 시작하면서 첫 선을 보인 '장길산'은 황석영 문학의 정점으로 현대문학의 값진 유산으로 남아있다.
'장길산'은 1976년부터 현암사에서 단행본으로 나오기 시작해 30여 쇄를 찍었고, 1995년부터는 창작과비평사에서 각 권 별로 10쇄 이상을 찍었다. 또 풀빛출판사에서는 만화로 엮어 20권으로 내놓았다.
몇 년 전 '임꺽정'이 드라마로 방영된 데 이어 '장길산'도 SBS에서 남북합작으로 드라마를 제작 방영되었다. 이처럼 '장길산'이 꾸준히 읽히는 데에는 질펀한 입담으로 재미를 한껏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투철한 민중적 관점에서 역사를 재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황해도의 장산곶이라는 어느 해안가 마을에 전해져 오는 전설을 들려주는 것으로 시작하는 '장길산'은 역사상 실재했던 사건들을 재구성한 것이다. 그에 관해서는 장석종 교수의 주목할 만한 논문을 통해 많은 사료들이 소개된 바 있다.
장길산의 활동상에 관해서는 '숙종실록'과 공초기록인 '추안급국안', '성호사설' 등에 부분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검계, 살주계 사건과 미륵신앙 사건은 '숙종실록, 야사인 '조야회통'과 '연려실기술'에 상세한 기록이 남아있다.
황석영은 이런 사료들을 바탕으로 철저히 민중적 시각에서 역사를 재해석하고자 한 의식적 노력에서 장길산을 탄생시킨 것이다. 황석영이 밝히는 장길산의 한국일보 연재에 대한 회고는 장길산 못지 않은 재미있는 얘기로 가득하다. 1974년 당시 황석영의 나이는 서른 두 살의 젊은이였다. 이 해 3월에는 그의 첫 창작집인 '객지'를 출판한 직후였으며, '장길산'의 구상은 1972년 가을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자료를 수집하는 동안 장길산의 집필계획이 한국일보 문화부에도 알려져 연재 권유를 받게된다. 준비가 덜 된 상태라 고사하던 황석영씨는 충분한 시간과 지원을 하겠다는 한국일보 측의 설득으로 당시 사주였던 장기영 선생을 만나게 되었다.
이 때 선생은 당시 집 한 채쯤 살 수 있는 액수의 재료비를 내놓았고, 복사기술이 형편없는 때라 사진기자를 불러 규장각에 있는 자료들을 일일이 사진으로 찍어오게 하였다고 한다. 거금의 자료비를 받은 황석영씨는 만나는 사람마다 술 한 잔 사라고 난리였고, 그도 원없이 술을 먹어보는 게 소원이라 패거리를 지어 한 보름쯤 줄창 퍼마시다 보니 자료비라는 돈을 다 써버렸다고 한다.
약속시간이 되어서 다시 한국일보 사주를 찾아가 저간의 사정을 얘기했더니 크게 웃으며 다시 자료비를 내놓았고, 명함을 꺼내 메모를 끄적이더니 이제부터 술을 마시려거든 그 집에 가서 자기 이름을 대고 마음대로 마시되 재료비는 꼭 자료수집에만 쓰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이렇게 신문연재를 시작했어도 많은 양을 써댈 수가 없어 날마다 한 두 꼭지가 고작이었다고 한다. 당시 삽화를 맡은 이미 화단의 원로급인 운보 김기창 화백은 원고를 기다리느라 여행은커녕 외출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파란만장한 예고편에 지나지 않는다. 문화부 고참기자는 원고 한 회분을 들고 운보에게 갔다가 가슴을 치며 답답함을 표현하는 노화백의 꾸중을 들은 뒤에 먹물이 마르지 않은 삽화를 입으로 후후 불어대며 들고 뛰기도 하였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황석영씨가 거처를 옮길 때마다 광주에서 해남에서 버스편으로, 텔렉스로 등등 갖은 수단으로 원고를 전송하는 등 많은 이들을 애태우게 했다고 한다.
이렇게 시작된 신문연재는 1974년 7월 11일부터 1984년 7월 5일까지 10년 동안 2,092회나 연재를 거듭한 끝에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고 한다.
우리 문학사에서 가장 가파른 고비길이었던 1970년대와 80년대의 시대와 황석영은 그 운명을 같이한 작가이다. 이미 19세에 등단할 정도로 천부적인 자질을 드러낸 황석영은 자신의 재주를 밀실에 가두지 않고 역사와 현실 속에 펼쳐 내었다.
1970년대 민족문학 리얼리즘문학의 대표작으로 거론되는 '객지' '삼포가는 길' '한씨연대기' 등은 이른바 산업사회로 인한 인간 소외, 노동문제, 분단문제를 본격적으로 형상화한 소설로 당대부터 주목을 받았다.
그의 문학세계는 '임꺽정'의 뒤를 이어 해방 후 역사소설의 대미를 장식한 '장길산'을 지나 제3세계 문제를 다룬 소설로 '탑' '무기의 그늘'을 내놓았다.
황석영 씨는 1989년 방북 혐의로 1993년 시작된 5년간의 옥살이 끝에 가석방되었다.
<해설 2>
장길산, 그는 조선 왕조 숙종 때 이름을 떨친 의적이었다. 작가가 광대 출신인 의적을 주인공으로 삼은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그 직업적 특성이 당시의 사회상을 폭넓게 그려내려는 작가의 의도와 맞아떨어진 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특히 하층민들의 삶의 애환을 구석구석 드러내는 데에는 넓은 지역을 떠돌며 연희를 베푸는 것으로 업을 삼는 광대의 시각만큼 편리한 것은 없었으리라.
<장길산>의 주인공은 말할 것도 없이 이 작품의 주된 역할을 하는 인물이지만, 이 소설에서는 여러 계층과 신분에 속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에 못지 않은 중요한 역할들을 담당하고 있다. 그들이 삶을 영위했던 시대는 두 차례에 걸친 전란과 양반 계급 내부의 분쟁, 문란해진 정치 질서 속에서 이루어진 하층민들에 대한 양반 관료들의 무자비한 착취와 억압, 그리고 민중들의 생존 투쟁으로 심하게 뒤틀려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상전을 버리고 도주하는 노비들과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산에 들어가 '녹림당'을 이루는 무리들이 늘어간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장길산>의 1부 역시 이러한 시대상을 반영하듯 팔려간 남편을 찾아 만삭이 된 몸으로 도주하는 한 여비에 대한 묘사에서 시작된다. 이야기의 진행은 하층민들의 피해·보복·도주, 그들의 집단화와 의식화, 탐관오리와 악덕 부호들에 대한 징치와 굶주리는 백성들에 대한 구휼의 과정을 거치면서 평등한 세상을 꿈꾸는 자들의 역모를 위한 공동 전선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이와 같은 서사적 구조를 이루는 네 개의 부에 포함되지 않는 두 가지 전설이 이 소설의 첫머리와 끝머리를 장식하고 있다. '장산곶 매'라는 황해도 지방의 전설과 전라도 능주땅에 전해 오는 '천불동 전설'이다. 이 방대한 규모의 대하소설이 전설로써 수미를 장식하고 있는 데에는 그럴 만한 까닭이 있어 보인다.
전설에는 장구한 세월 동안 민중들의 의식 밑바닥에 켜켜이 쌓인 염원이 깃들여 있다. 말하자면 이러한 삶의 정서들이 언어적 질서를 부여받음으로써 전설이라는 보편적인 실체로 구체화되는 것이다.
이 소설 앞머리의 '장산곶 매' 전설을 한 마리의 매로 상징되는 민중 장수의 비극적 운명을 통해 작품 전체에 비장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끝부분에 놓인 '천길동 전설'은 이 소설에 펼쳐진 다채로운 사건들의 의미를 미륵사상이라는 하나의 주제로 통합하면서 대미를 장식하는 기능을 해내고 있다.
마을 사람들이 자기들의 것이라고 표지로서 발목에 묶어준 끈 때문에 장산곶 매는 구렁이와의 싸움에서 목숨을 잃게 된다는 전설에서 우리는 억눌린 자들에 대한 연대 의식 때문에 목숨을 불사를 수밖에 없는 이들의 운명을 강하게 감지하면서 이 소설을 읽어 나가게 된다. 이 장엄한 비극성은 시대적 운명에 저항하는 모든 사람들, 심지어는 북성이나 산지니와 같은 천민들의 행동에 되풀이되는 모티브로 작용하고 있다.
이들은 용천 세계, 즉 미륵이 나타나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게 살게 되는 세상을 꿈꾸면서 투쟁하고 죽어 가는 것이다. 이들의 저항은 일차적으로 현세에서의 해방을 지향한다. 그러나 불가피하게 마주친 좌절 속에서 미륵 세상은 언젠가 일시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투쟁 속에서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깨달음에 도달하기도 한다.
보잘것없는 천민인 산지니가 자기 처지의 억울함을 벗어나기 위한 투쟁의 위한 투쟁의 결과로 마주치게 된 죽음의 장면이 그러한 예에 속한다. 산지니는 한낮의 네거리에서 공개 처형을 눈앞에 두고 있다. 그의 뇌리에 하나의 깨달음이 번개처럼 스쳐간다.
"미륵은 언제가 오시는 게 아니라 우리의 넋 가운데 시시때때로 찾아들어 이렇게 잠깐 당신을 현신시키고는 넘어진 내 고깃덩이를 넘어 다른 넋으로 찾아간다. 미륵은 내게 왔다. 미륵은 언제나 이 자리에 있다."
황석영은 1부에서는 풍열 스님, 2부에서는 운부 대사의 입을 통하여 세상 개조를 위한 사상으로서의 미륵 사상을 보여 주었고, 3부에서는 산지니의 죽음을 통해 그것의 체현을 감동적으로 그려냈다. 4부에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당시 회에 폭넓게 자리잡은 미륵 사상을 바탕으로 모든 억눌린 자들과 처지에 공감하는 지식인들까지 포함한 공동 전선이 이루어지는 모습이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다. 그러나 아들 내부에 존재하는 방법상의 편차와 산재하는 세력들 사이의 쟁점의 시차 때문에 봉기는 무산되고 만다. 사상적 편차의 핵심은 '진인'을 내세워 새로운 정권을 창출하려는 생각과 층부만 다른 양반으로 바뀌게 되는 한 민중들의 질곡은 해결될 수 없다는 근본주의적인 생각 사이에 존재하다. 작가의 시각은 후자를 정당화하고 있다.
이상의 서술은 이 소설의 전체적 구조와 그것을 관통하고 있는 미륵 사상의 의미를 간단히 살펴본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의 생명감은 주로 당시 민중의 심층 의식 또는 집단무의식에 대한 풍요로운 재현에서 비롯된다.
사실적인 묘사의 사이사이에 설화, 민담, 잡가, 민요, 무당의 사설, 그리고 옛사람들의 생활 기록 등을 통해 그 새대 사람들의 정서와 사고 방식, 그리고 시대적 분위기까지 생생하게 되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전라도 땅에서 반란을 일으킨 노비들이 하룻밤 사이에 자신들의 모습을 닮은 천불과 천탑을 세움으로써 그들이 주인되는 세상을 이루려 했다는 '천불동 전설'은 이 소설을 미학적으로 마무리하는 데 더없이 적절해 보인다.
이 전설에 담긴 핵심적이 뜻은 운주사라는 절 이름에 대한 늙은 노비의 해설로 집약되고 있다. 미륵님 세상은 배. 그것을 뜨게 하는 물은 그들과 같은 천민을 포함한 만백성이라는 것이다.
그들이 가슴 깊이 품고 있는 꿈의 실현은 결국 기약학 수 없는 미래의 시점으로 옮겨지고 있지만, 작가는 그들을 대신하여 마지막 문장 속에 강렬한 희망을 심어 놓고 있다.
"티끌처럼 수많은 생령들의 뜻이 어찌 이루어지지 않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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