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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769 : 조선의 역사 311 (제19대 숙종실록 17) 본문
한국의 역사 769 : 조선의 역사 311 (제19대 숙종실록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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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대 숙종실록(1661~1720년, 재위 : 1674년 8월~1720년 6월, 45년 10개월)
조선의 붕당정치 과정(계속)
두 번의 호란(胡亂)과 서인의 분열
대북파의 잔혹한 숙청으로 위기감을 느낀 서인과 동생을 죽인 광해군에 대한 복수심에 불탄 능양군(인조)이 손을 잡고 반란을 일으켜 광해군을 쫓아낸다. 반정으로 정권을 장악한 서인은 철저한 ‘친명 사대주의’를 천명하고 여진족이 세운 후금(後金)을 배척한다. 후금의 배척은 곧바로 전쟁으로 연결되어 후금 군사 3만이 국경을 넘어 조선을 침공하는데, 바로 1627년(인조 5년) 정묘호란(丁卯胡亂)이다.
정묘호란은 조선에 큰 화를 입히지는 않았다. 전쟁이 발발하자 곧바로 인조와 조정은 강화도로 옮겨가 버티면서 후금과 화친을 맺게 된다. 명나라와 한창 전쟁 중인 후금도 조선과 너무 큰 전쟁을 치를 여유가 없기에 서로가 절반의 이익을 챙긴 채 끝난다.
그러나 이후 후금이 국호를 ‘청’으로 고치면서 정세가 변하는데, 청나라는 조선에게 ‘군신간의 예’를 강요하며 정묘호란 당시 맺었던 화친을 파기하였다. 인조와 서인정권이 이를 거부하면서 조선은 임진왜란 이후 또 한 번 큰 전란을 맞이하였다. 청나라 태종이 직접 참전하여 12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공하는데, 바로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丙子胡亂)이다.
병자호란을 일으킨 청나라는 정묘호란 때처럼 조선 조정이 대응할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 속전속결로 도성 한양으로 진격하였다. 급박해진 인조는 강화도로 피하지 못하고 ‘남한산성’에 들어가 항전하지만 곧바로 남한산성은 포위되고 만다.
남한산성이 포위되자 조정은 ‘척화론(斥和論)’과 ‘주화론(主和論)’으로 나뉘어져 격렬한 논쟁을 벌인다. ‘오랑캐’인 청나라에게 절대로 굴복할 수 없다는 척화론과 당장의 굴욕을 당하더라도 국가를 보전해야 한다는 주화론으로 팽팽히 맞섰다. 사실 ‘친명 사대주의’를 천명한 서인의 입장에서는 주화론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옳은 것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옳다고 말하는 것이 선비의 도리로 알고 있는 사림에게 옳은 것을 그르다고 말하는 것은 최대의 수치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현실을 말하는 주화론을 받아들여 결국 인조가 직접 청태종에게 ‘삼궤구고두(三跪九叩頭)’의 예로 항복하면서 전란은 끝이 났다.
이 척화론과 주화론은 붕당의 형성이 아니고 전쟁을 마무리 짓자는 의견 충돌이었다. 당시 조정은 제1당인 서인과 제2당인 남인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척화론과 주화론은 서인과 남인을 떠나 각자의 의견대로 나뉘었다. 실질적인 서인의 분열은 다른 곳에 있었다.
서인은 인조 때 반정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공신세력과 이를 관망한 세력으로 나뉘는데, 공신세력을 ‘공서(功西)’ 또는 ‘훈서(勳西)’라고 불렀고, 관망파를 ‘청서(淸西)’라고 불렀다. 훈서와 청서는 다시 ‘노서(老西)’, ‘소서(少西)’로 개편되었고, 이렇게 갈라진 두 파는 인조 말년에 노서파는 원두표를 당수로 하는 ‘원당(原黨)’과 김자점을 당수로 하는 ‘낙당(洛黨)’으로 분파되었고, 소서파도 사림의 청의(淸議)를 주장하는 ‘산당(山黨)’과 권력 지향적인 ‘한당(漢黨)’으로 분리되어 네 개의 분파로 나뉘게 된다.
정리하자면, 반정에 공을 세운 서인은 인물을 중심으로 나뉘어졌고 반정을 관망하던 서인은 정치적 이념에 따라 나뉘게 된 것이다. 네 개로 나뉜 서인은 극한 대립을 보이지는 않았다가 인조 이후 효종과 현종 대에 송시열을 중심으로 다시 규합(糾合)되어 서인 일당이 된다.
* 서인 --> 반정을 주도한 세력 : 공서파(훈서파) --> 원두표의 원당
--> 김자점의 낙당
--> 반정을 관망한 세력 : 청서파 --------> 사림의 청의 주장 산당
---> 권력지향적인 한당
논쟁의 전조(前兆)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는 조선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인평대군 등 왕자들을 볼모로 삼아 심양으로 끌고 갔으며 척화를 주장하던 오달제, 윤집, 홍익한 등도 잡아갔다. 특히 청군이 철군하면서 지나는 마을마다 약탈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거의 약 50만 명에 이르는 조선 포로들을 끌고 갔다. 이후 일부는 비싼 몸값을 치르고 돌아오지만, 기록에는 끌려간 여인들의 숫자가 있으나 돌아온 사람들의 정확한 숫자는 없다. 이렇게 돌아온 여인들은 ‘환향녀(還鄕女)’라 칭하며 ‘정절(貞節)을 지키지 못했다’하여 자살을 강요당하거나 이혼 당하는 등 당시에 큰 사회문제가 되었다.
아무튼, 인조 대를 거치면서 1당인 서인과 2당인 남인은 큰 충돌 없이 전란수습에 박차를 가한다. 그런데 인조 말년 얘기치 못한 사건이 일어났다. 명나라를 멸망시킨 청나라가 볼모로 끌고 갔던 소현세자를 풀어준 것이다. 문제는 여기서 생겼는데, 조선으로 돌아온 소현세자를 인조가 박대하였는데, 당시 소현세자는 청나라를 비롯하여 서양문물을 받아들여 조선을 개혁하고자 하는 원대한 꿈을 품고 있었다. 이런 세자를 보면서 인조는 청나라에 당한 수모를 생각하며 청나라에 대해 좋은 말을 하는 소현세자를 곱게 보지 않은 것이다. 급기야 조선으로 돌아온 지 두 달 만에 소현세자는 갑자기 병을 얻었고 병든지 3일 만에 의문의 죽음을 당하게 된다. 이듬해에는 세자빈 강씨가 사약을 받고 죽었고, 소현세자의 세 아들도 제주도로 쫓겨 가 두 명은 병에 걸려 죽게 된다.
소현세자의 죽음은 조선 붕당정치의 절정으로 평가되는 ‘예송(禮訟)논쟁’의 빌미가 되었다. 현재는 인조가 소현세자를 죽였다는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데, 이를 뒷받침하는 결정적인 조치가 바로 소현세자의 동생인 봉림대군을 차기 세자로 책봉한 것이다. 세자가 병사하면 세자의 아들, 즉 세손(世孫)이 왕위를 잇는 것이 법인데 인조는 이를 무시하고 둘째 아들인 봉림대군을 차기 임금으로 낙점한 것이다.
1차 예송(禮訟) 논쟁
원당(原黨), 낙당(洛黨), 산당(山黨), 한당(漢黨) 4개로 분리되었던 서인은 제2당인 남인이 팽창하자 송시열을 중심으로 다시 규합하여 서인 일당이 된다. 인조 말년과 효종 대에는 전쟁 피해의 수습과 북벌(北伐) 준비로 인해 큰 당쟁 없이 서인과 남인의 상호견제로 지내게 된다. 그러나 효종이 죽자 문제가 발생하였다. 바로 인조의 계비인 장렬왕후 조씨의 복상 기간이 문제가 된 것이다. 효종이 인조의 맏아들이 아닌 차자인 관계로 벌어진 이 논쟁은 예를 최고의 덕으로 여기는 성리학의 핵심문제였다. 율곡학파인 서인과 퇴계학파인 남인 간의 피할 수 없는 중요한 쟁점이 되었다.
비록 친아들이 아니지만 효종이 세상을 뜨면서 계모인 장렬왕후 조씨가 얼마동안 상복을 입어야 하는 것으로 벌어진 예송논쟁은 인조와 소현세자의 갈등만큼이나 꼬여 있었다. 성리학의 관혼상제에 대한 교과서인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르면 부모가 죽었을 때 장자는 3년상, 차자 이하의 아들은 기년상(1년상)을 치러야 한다고 되어있다. 이것에 대해 서인과 남인의 해석이 대립하였다. 송시열, 송준길 등 서인은 조대비는 효종의 어머니이므로 신하가 될 수 없으며, 효종은 조대비에게는 둘째 아들이므로 차자로서 기년상(1년상)이 당연하다고 주장합니다. 또 비록 왕위를 계승하였다고 하더라도 사종지설(四種之設, 왕위를 계승하여도 3년 상을 할 수 없는 경우) 중 체이부정(體而不正, 적자이면서 장자가 아닌 경우)에 해당하므로 기년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반면 허적, 윤선도 등 남인과 윤후 등 소북파는 효종이 비록 둘째 아들이긴 하지만 왕위를 계승하였으므로 장자로 대우하여 3년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얼핏 보면 아무것도 아닌 문제로 비춰질 수 있으나 여기에 큰 문제가 있었다. 가만히 놓고 보면 서인의 주장이 맞는 것 같다. 그러나 서인의 주장에는 당시에 큰 문제가 있었는데, 바로 소현세자의 존재였다. 소현세자가 죽었을 때 왕위가 소현세자의 아들에게 돌아간 것이 아니라 동생인 효종에게 돌아간 것이 문제였다. 서인의 주장대로 간다면 왕위는 효종의 아들인 당시 임금 현종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제주도에 살아있는 소현세자의 아들에게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심각한 모순을 가지고 있는 서인의 주장을 이용한 사람이 있는데, 바로 남인 윤선도였다. 그는 서인을 몰아내고자 송시열 등이 복상문제로 역모를 꾸미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윤선도의 논리가 서인에 대한 모함이라고 탄핵받아 윤선도는 귀양 조치되고 서인의 주장대로 조대비는 기년상을 치르면서 1차 예송논쟁은 마무리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남인 유생들이 윤선도의 구명운동을 전개하면서 다시 고개를 들게 된다. 그러나 결국 1차 예송논쟁은 소현세자의 셋째 아들 ‘석견’이 죽으면서 일단락되었다.
2차 예송(禮訟) 논쟁
1차 예송논쟁이 서인의 승리로 돌아가고 잠잠해지는 듯 보였으나 또 다시 문제가 발생했다. 1674년 정월 효종의 비이자 현종의 모후인 인선왕후 장씨가 세상을 떴다. 문제는 그때까지 조대비가 살아있었다는 것이다. 『주자가례』에 따르면 효종 비를 장자부(長子婦)로 보면 기년상(朞年喪 : 1년)이고 차자부(次子婦)로 보면 대공상(大功喪 : 9개월)이었다.
서인은 이번에도 1차 예송 때와 마찬가지로 효종을 차자로 다루었기에 효종비도 차자부로 다루어 대공설을 주장했다. 남인은 효종이 왕위 계승권자임을 들어 장자부로 다루어 기년설을 주장했다. 이 사건을 '2차 예송' 또는 ‘갑인예송’(甲寅禮訟)이라 부른다.
이미 1차 예송 때 서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졌으므로 당연히 대공설이 채택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세상은 언제나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송시열을 제거하고 서인 정권의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현종의 장인 김우명과 그의 조카 김석주가 돌연 남인의 주장에 동의하고 나선 것이다. 결국 조대비의 복상은 1차 예송 때와는 다르게 기년상으로 확정되었다. 이로서 2차 예송에서 승리한 남인의 힘이 커지게 되었고 현종 초기에 있었던 1차 예송의 결과도 수정될 수밖에 없는 형국이 되었다.
그런데 남인의 손을 들어주었던 현종이 죽자 숙종이 등극하였고 송시열은 다시 예론을 들고 나왔다. 부왕의 뜻을 받든 숙종은 다시 예송을 일으킨 스승 송시열을 유배보낸다. 송시열이 유배되자 성균관을 중심으로 한 전국의 유생들이 송시열의 차자 대공설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구명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남인과 영합하였던 김석주가 이번에는 남인 세력에 밀려 자신의 입지가 위태롭게 되자 다시 서인 세력과 손잡고 허적, 윤후 등 남인과 북인들을 역모로 몰아 제거하였는데, 이를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 또는 '경신환국(庚申換局)'이라고 한다. 이로서 예송논쟁은 비로소 종료된다. 이때 숙종은 다시는 예론을 거론하지 못하도록 엄명을 내린다.
앞서 밝혔듯이 예송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당시 지배계급인 사림(士林)들에게는 자신의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중요한 문제였다. 현종 치세기간인 약 15년 동안 중앙정부의 서인과 남인뿐만 아니라 지방의 사림들까지 가세한 엄청난 논쟁이었다. 이 모든 문제를 제공한 것은 소현세자를 죽인 인조였다.
조선은 이처럼 성리학적 예송논쟁에 빠져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종교와 사상은 비슷한 특성이 있는데, 바로 성서와 사상의 이론적인 해석이다. 이처럼 종교나 사상이 깊이 빠질수록 새로운 이론이 생성되고 자신들의 주장이 관철되지 않으면 상대는 적으로 둔갑시켜 이단으로 치부하며 자신들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상대를 탄압하고 죽이지 않으면 이론적인 분파를 허용하게 되는 모순을 안고 있는 것이다.
숙종의 '용사출척권(用捨黜陟權)'
우리가 흔히 외우는 조선왕들의 이름, ‘태정태세문단세...’는 임금이 죽은 후 붙이는 시호(諡號)이다. 조선조 왕들 중 특이하고 의미심장한 시호가 붙여진 임금이 있는데, 바로 조선 19대 왕 ‘숙종(肅宗)’이다.
숙종의 시호는 ‘숙종현의광륜예성영렬장문헌무경명원효대왕(肅宗顯義光倫睿聖英烈章文憲武敬明元孝大王)’이다. 임금의 시호는 원래 이렇게 길지만, 통상 앞 두 글자를 임금의 이름으로 칭한다. 특이하고 의미심장하다는 것은 ‘숙(肅)’자를 두고 하는 말이다. ‘엄숙하다’, ‘정중하다’라는 뜻인 ‘숙(肅)’자의 본뜻은 ‘매우 두려워하며 조심하여 깊은 연못에 임하듯이 삼가고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이다.
사후에 ‘두렵고 조심스러운’ 존재가 된 숙종은 조선조 붕당정치의 절정으로 평가되고 있는 45년의 치세기간동안 나름대로 고도의 정치술을 발휘하여 두 번의 전란으로 실추된 왕권을 회복한 임금으로 평가받고 있다. 반면 계비인 인현왕후 민씨와 후궁인 희빈 장씨 사이에서 변덕스러운 모습을 보이며 왕실은 물론 정국을 어지럽게 한 임금으로 평가 받기도 한다.
후대에 이렇게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는 당시 임금 숙종은 서인과 남인 사이의 끊임없는 당쟁 속에서 ‘용사출척권(用捨黜陟權, 왕이 정국을 개편하는 권한)’을 이용해 환국(換局)이라는 방법을 동원하여 왕권을 강화해 나갔다. 이 환국을 시행할 때 결정적인 매개로 작용한 것이 인현왕후 민씨와 희빈 장씨이기에 상반된 평가를 받게 된 것이라 생각된다.
경신환국(庚申換局)
1674년(현종 15년)에 일어난 2차 예송논쟁이 남인의 승리로 끝나자 남인의 세력이 팽창하였다. 그해 8월 현종이 죽고 14세 나이로 숙종이 등극하자 서인 송시열은 2차 예송이 잘못된 결정이라며 상소를 올린다. 이에 비록 어린 나이이지만 친정(親政)을 하고 있던 숙종은 송시열을 귀양 보낸다. 이 사건으로 조정은 남인이 득세하고 서인은 위축되었다.
숙종 초기 정권을 잡았던 남인은 오래가지 못했다. 허적의 ‘유악 남용사건’으로 숙종의 신임을 잃게 된 것이다. 1680년(숙종 6년) 3월, 당시 남인의 수장이자 영의정이었던 허적은 조부인 허잠이 시호를 받게 되자 잔치를 벌였다. 그런데 이날 공교롭게 비가 내렸다. 이에 숙종은 허적에게 유악(油幄, 비가 새지 않도록 기름을 바른 천막)을 내어주라고 명했다. 하지만 이미 허적이 임금에게 허락도 받지 않고 유악을 가져간 뒤였다. 유악은 군수물자라 개인이 사사로이 사용할 수 없는 물건이었기 때문이었다. 혹시 유악이 필요하면 임금에게 고하고 왕이 선처하여 빌려주는 형태를 취했는데 당시 군부는 물론이고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남인들이 숙종에게 고하지도 않고 허적에게 내어 준 것이었다. 이 사실은 알게 된 숙종은 진노하여 그날 저녁 군부의 요직을 남인에서 서인으로 모두 바꾸어 버린다.
이 유악사건이 있은 후 그해 4월, 같은 남인인 정원로가 현종의 비 명성왕후의 사촌 동생인 서인 김석주의 사주를 받고 역모를 고변하였다. 허적의 서자인 허견이 인조의 3남 인평대군의 세 아들인 복창군, 복선군, 복평군 등과 함께 역모를 도모했다는 고변이었다. 이른 바 ‘삼복의 변’이다. 삼복의 변으로 허견과 삼복 형제뿐만 아니라 허적, 윤휴 등 남인의 핵심 인물들이 죽거나 유배되었다. 이로써 남인은 대거 축출되고 서인이 조정을 장악하게 되는데, 이를 ‘경신환국(庚申換局)’ 또는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이라 한다.
이 ‘삼복의 변’은 2차 예송 때 서인이면서도 남인의 의견에 동참했던 현종의 비 명성왕후 김씨의 사촌동생 김석주가 정원로를 사주하여 벌인 거짓 역모사건이라고 보는 것이 현재 다수의 의견이다. 김석주는 송시열을 몰아내면 자신이 서인의 수장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2차 예송 이후 서인이 몰락하면서 남인들의 세상이 되자 자신이 설자리가 없어진 것이었다. 그래서 이러한 이유로 남인을 몰아내고자 벌인 거짓 역모사건이라는 게 현재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서인의 분열과 '기사환국(己巳換局)'
한편, 경신환국(경신대출척) 이후 정권을 잡은 서인이 서서히 분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다. 남인에 대한 강력한 탄압을 주장하는 세력과 유연한 태도로 더 이상의 피를 보지말자는 세력으로 나뉘게 된다. 이후 송시열과 그의 제자 윤증이 대립하면서 분당은 가속화 되었고, 급기야 송시열 등 노장세력이 이끄는 세력인 ‘노론(老論)’과 남구만 등 소장파 세력이 규합한 ‘소론(少論)’으로 나뉜다. 이렇게 서인이 분당 되면서 경신환국 이후 조정은 노론과 소론을 갈라진 다수의 서인과 소수의 남인, 그리고 극소수의 북인 등으로 이른바 ‘4색 정당’의 시대가 되었다.
이즈음 또 한 번의 환국이 단행된는데, 이 시대가 현대 사극에서 연산군 다음으로 많이 다루어진 인현왕후와 장희빈의 이야기가 전개되는 시기이다.
숙종의 정비는 서인 노론인 김만기의 딸 인경왕후 김씨였다. 그러나 20살에 천연두를 앓아 죽자 노론 민유중의 딸을 계비로 맞이하였다. 이가 인현왕후 민씨이다. 그런데 여러 해가 지나도록 인현왕후는 후사를 보지 못한다. 그런데 숙종이 총애하고 있던 소의(昭儀) 장씨가 아들을 낳게 되자, 문제는 여기서 발생했다.
숙종이 소의 장씨의 소생 왕자 균을 원자(元子)로 삼고자 한 것이다. 원자(元子)라 함은 세자(世子)가 정해지기 전에 임금의 장자(長子)를 뜻하는 것으로 세자가 되는 1순위의 왕자를 뜻한다. 당연히 당시 집권당인 서인이 반발하고 나섰고, 반면 남인은 자신들을 지지하는 소의 장씨의 편에서 원자책봉을 지지했다. 서인의 반발과 남인의 지지 속에서 급기야 1689년(숙종 15년) 왕자 균의 정호(正號)를 종묘사직에 고하고 그의 생모인 장씨를 빈(嬪)으로 격상한다.
숙종의 독단적인 행동에 서인이 들고 일어났다. 특히 조정의 다수를 점하고 있던 노론의 영수 송시열은 송나라 신종이 28세에 철종을 얻었으나 후궁의 소생이어서 태자로 책봉하지 않고 번왕으로 책봉하였다가 적자가 없이 죽게 되자 그때 비로소 태자로 책봉하여 후사를 이은 고사를 들어 후궁소생의 왕자를 원자로 확정하는 것은 시기상조라는 의견을 상소했다. 이에 숙종은 이미 종묘사직에 고하여 확정한 일을 반대하고 나선 것은 왕을 능멸하는 처사라며 심하게 분노하여 자신의 스승이었던 송시열을 귀양 보낸 후 사사(賜死)하였다. 이와 함께 노론의 핵심인물들을 유배 보내거나 사사하고 그 자리에 남인을 대거 등용한다.
숙종은 이에 그치지 않고 신하들이 임금을 능멸하는 것은 자식을 낳지 못한 중전 때문이라며 인현왕후를 폐하려 하였다. 이에 노론은 물론, 소론까지 가세하여 중전의 폐위는 부당하다고 진언한다. 하지만 숙종은 오히려 폐비를 반대하는 서인을 몰아낸다. 그해 5월 인현왕후 민씨를 폐하고 희빈 장씨를 왕비로 책봉하였고 아울러 원자 균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이 사건을 숙종조의 두 번째 환국, '기사환국(己巳換局)'이다. 기사환국을 통해 서인이 몰락하고 남인이 정권을 잡게 되었다.
'갑술환국(甲戌換局)'과 ‘무고(巫蠱)의 옥’
기사환국으로 정권을 잡은 남인과 중전이 된 희빈 장씨 일가의 권력은 급속도로 팽창하게 된다. 특히 장희재는 왕비의 오빠라는 이유로 중인 신분에서 일약 권력 핵심으로 등장하며 전횡(專橫)을 일삼았다. 장희재의 이런 행보에 남인들의 반발이 있었으나 이미 희빈 장씨와 남인은 뗄래야 뗄 수없는 관계가 된 지라 어찌하지 못하는 형국이었다. 당시 장씨 집안은 역관 출신 집안으로 부유하였고 남인들에 대한 정치적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었기에 남인들은 희빈 장씨를 옹호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권력 쟁탈을 위한 정치자금의 중요성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은 없는 듯하다.
이때 작지만 큰 사건이 벌어진다. 1694년(숙종 20년) 노론 김춘택과 소론 한중혁 등이 폐비 민씨의 복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남인은 이 사건을 계기로 서인들을 완전히 몰아낼 계획을 세운다. 복위운동의 주모자를 체포하고 심문하여 그 사실을 파악한 다음 숙종에게 보고하려 했지만, 남인의 이런 계획은 오히려 자신들이 화를 당하는 계기가 되고 만다.
그때 숙종은 날로 권력을 탐하는 중전 장씨에게 염증을 느끼고 있었고, 그 즈음 나인들의 시중을 드는 무수리 한 명을 후궁으로 책봉하였는데, 바로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이다. 서인은 숙빈 최씨와 손잡고 숙종에게 중전 장씨와 그 일가의 전횡과 폐비 민씨의 억울함을 고하게 하였다. 숙빈 최씨를 총애하고 있던 숙종의 마음이 중전 장씨에게서 차츰 멀어진 것을 알게 된 서인은 보란 듯이 폐비 민씨의 복위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는 이 사실을 남인에게 고의로 흘렸다.
중전 장씨만을 믿고 있던 남인들은 임금에게 고하지도 않고 폐비 복위운동을 심문하게 되었고 어떻게든 역모사건으로 만들려고 하였다. 그러나 심문을 채 끝내기도 전에 마음이 돌변한 숙종에 의해 민암, 이의징 등 남인의 핵심세력이 유배된 후 사사되고 만다. 이어 숙종은 중전 장씨를 빈으로 강등시키고 폐비 민씨를 복위시킨다. 이 사건이 '갑술환국(甲戌換局)'이다. 이 과정에서 남인은 완전히 숙청되어 이후 정조 대까지 중앙정계에 진출하지 못할 정도로 거세된다. 이어 숙종은 세자인 균을 위해 희빈 장씨를 폐위시키는 것만은 막고자 한 소론을 대거 등용하게 되고, 이로서 조정은 서인 소론이 장악하게 된다.
그러나 소론 정권은 오래가지 못한다. 장희재가 희빈 장씨에게 보낸 편지가 발각되고, 그 내용은 와병중인 인현왕후를 빨리 죽게 하고 다시 중전이 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라는 내용이었다. 이 편지로 인해 장희재를 죽여야 한다는 상소가 빗발쳤으나 세자를 위해 장희재를 살려야 한다는 소론의 주장으로 무마되었다. 하지만 이후 더 큰 사건이 발생한다.
1701년(숙종 27년) 인현왕후 민씨가 결국 세상을 뜨자, 숙종은 매우 슬퍼하며 예전 자신이 인현왕후를 폐비시킨 일을 후회하는 글을 지어 대소신료들이 읽게하였다. 며칠 동안 정사를 돌보지 않고 중전의 빈소를 지키는 등 인현왕후에 대한 후회와 애정을 나타냈다. 그런데 국상이 진행 중인 와중에 엄청난 일이 일어나는데, 희빈 장씨의 처소인 취선당 서쪽에 신당이 발견된 것이다. 신당에서 인현왕후를 저주하는 물건들이 발견되고 무당이 인현왕후를 저주하는 굿판을 벌렸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사건은 걷잡을 수 없이 확대고 만다.
진노한 숙종은 희빈 장씨와 장희재를 죽이라고 명했다. 이에 소론측 남구만 등은 후에 세자에게 미칠 영향을 고려하여 이를 저지하려 했지만 한번 마음먹은 숙종은 소론의 주장을 무시하고 장희재와 무당 그리고 희빈 장씨의 주변 인물들을 참수하고 희빈 장씨에게 사약을 내린다. 이때 희빈 장씨의 단죄를 만류하던 소론 세력도 제거해 버린다. 이 사건을 무속과 관련하여 일어난 옥사라 하여 ‘무고(巫蠱)의 옥’이라 한다.
당시 정국은 희빈 장씨 소생의 세자를 지지하는 소론과 이를 반대하는 노론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던 상태였다. 무고의 옥 이후 정권은 노론이 장악한다. 하지만 이후 세자 지지 문제로 소론과 노론의 대립이 가속화 되어 점차 대등한 세력이 형성된다. 숙종은 비록 세자의 생모를 죽였지만 세자만큼은 지키고 싶어 했던 것 같다.
숙종은 이렇게 세 번의 환국을 통해 붕당정치 최절정의 시대를 지냈다. 이 환국은 당쟁의 틈 속에서 왕권을 강화하고자한 고도의 정치술로 평가되기도 하고 변덕스러운 숙종의 태도와 당쟁 안에서 벌어졌던 내명부의 갈등을 바로잡지 못하고 휘둘린 어리석은 임금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분명한 것은 경신환국을 제외하고 두 번의 환국은 역모사건이 아닌 ‘용사출척권(用捨黜陟權)’을 이용하여 환국을 단행했다는 것이다. 숙종에 대한 어느 평가가 옳은 것인지 판단하기 어렵지만 사림의 붕당정치는 차츰 당쟁으로 변모해가는 과정을 밟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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