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마을

한국의 역사 768 : 조선의 역사 310 (제19대 숙종실록 16) 본문

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한국의 역사 768 : 조선의 역사 310 (제19대 숙종실록 16)

두바퀴인생 2012. 11. 13. 04:01

 

 

 

한국의 역사 768 : 조선의 역사 310 (제19대 숙종실록 16)

              

 

 

 

제19대 숙종실록(1661~1720년, 재위 : 1674년 8월~1720년 6월, 45년 10개월)

 

 

 

조선의 붕당정치 과정(계속)

 

 

명종의 반격

 

17세에 중전으로 간택되어 34살 늦은 나이에 그토록 바라던 아들을 낳았던 문정왕후, 그 아들을 기어코 왕으로 만들었던 문정왕후. 역사는 그녀를 좋게 기록하지 않았다. 권력에 눈이 멀어 전처소생의 인종을 독살한 무서운 여자,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친아들 명종까지 괴롭힌 독한 어머니, 정치를 파탄 낸 장본인으로 지목한다. 임금의 모후로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던 ‘조선의 측천무후(則天武后)’ 문정왕후는 1565년(명종 20년) 65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한다.

 

문정왕후가 죽자 명종은 기다렸다는 듯이 국정쇄신을 단행한다. 우선 문정왕후의 동생 윤원형과 그의 첩 정난정을 귀양 보낸다. 윤원형과 정난정은 자신들의 처지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동반자살로 생을 끝낸다. 또한 독실한 불교신자였던 문정왕후가 등용한 승려 보우도 귀양 보낸 후 사사(賜死)하였다. 아울러 척신(戚臣)과 훈구세력을 조정에서 몰아냈다. ‘이량 사태’를 겪으며 훈구세력에게 더 이상 희망이 없음을 인식한 명종은 그 자리에 사림을 등용하였다.

 

하지만 명종은 모후에게 너무 시달린 탓인지 문정왕후가 죽은 지 2년 만에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뜬다. 죽기 전, 명종은 자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는지 국정쇄신과 함께 차기 임금을 찾았다. 그는 정비인 인순왕후 심씨에게 아들을 보았으나 13살에 요절하고 더 이상 후사(後嗣)를 보지 못했다. 명종은 왕족 중에 인재를 찾았는데 그때 눈에 띈 이가 하성군(河城君) 균(均)이었다. 그는 중종과 창빈 안씨의 소생 덕흥군의 셋째 아들이었다. 시간이 없다고 아무나 고른 것이 아니라 철저한 검증을 거쳤고, 특히 사림들과 학문을 론하는 자리를 자주 마련했다고 한다. 명종은 어린 나이지만 총명함을 보인 하성군을 차기 임금으로 낙점하였다.

 

 

 

사림의 세상

 

1567년 명종이 34세의 젊은 나이로 죽자, 16세 하성군이 등극하였다. 즉위 초년에는 명종의 비 인순왕후 심씨가 수렴청정을 하였으나 총명하고 정치능력이 탁월하다는 이유로 17세부터 친정을 하였다. 이가 바로 조선 최초의 방계 임금 선조(宣祖)이다.

 

선조는 명종의 유지를 받들어 훈구세력을 모조리 몰아내고 사림으로 조정을 구성하였다. 그야말로 사림의 세상이 열린 것이었다. 마침내 조선 건국 시기부터 끊임없이 투쟁해온 ‘신권정치(臣權政治)’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사림은 성종 때 김종직 이후 50여년 동안 숱한 탄압을 받았다. 4번의 큰 사화(士禍)로 수많은 사림들이 죽거나 다쳤고 너무도 많은 억울한 죽음이 있었다. 선조는 사화로 죽거나 파직된 사림들을 대부분 복권시킨다.

 

먼저 김종직을 영의정에 추존하는 등 역모의 누명을 쓴 사림들을 복권시키고 사림에게 화를 입힌 훈구세력들의 관직을 추탈(追奪)하고 사화를 통해 공신이 된 이들을 삭훈(削勳)하였다. 또한 현량과를 다시 실시하여 사림들을 대거 등용하는 등 사림 중심으로 국정을 쇄신하였다. 아울러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를 나라의 스승으로 여기고 극진히 대우하였고 이황이 죽었을 때는 3일간 정사를 폐하고 애도하기까지 하였다.

 

 

 

시작되는 붕당정치(朋黨政治)

 

선조의 국정쇄신으로 정국은 안정을 찾아가는 듯 했지만 얼마 못가 평화는 깨지고 만다. 바로 사림들의 붕당정치가 시작된 것이다. 이후부터 ‘동인, 서인, 남인, 북인, 노론, 소론, 시파, 벽파’ 등으로 나뉘는 복잡한 정국이 도래하게 된다.

 

‘붕당정치(朋黨政治)’라는 말은 원래 중국에서 유래된 말인데, 유학은 원래 붕당정치를 금기사항으로 여겼다. 진나라와 한나라 때에는 붕당정치를 국정을 어지럽히는 중죄로 다스렸다. 반면 송나라 때 대표적인 성리학자인 구양수는 붕당정치의 긍정적인 면을 재평가하여 그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훈구세력이 사화로 사림들을 몰아낼 때 썼던 명분은 진나라와 한나라 때의 정책이고 선조 이후 사림들의 붕당정치는 송나라 때 정책을 따른 것이었다.

 

조선의 붕당정치는 출신 지방에 따라, 학풍에 따라 나뉘는데, 출발은 ‘주리론 철학’의 영남학파와 ‘주기론 철학’의 기호학파이다.

 

성리학은 세상이 우주만물을 구성하는 이(理)와 이를 움직이는 기(氣)로 나뉜다고 보는 학문이다. 이 이(理)와 기(氣)의 상호작용을 두고 ‘주리론’과 ‘주기론’으로 나누어진다. 이(理)를 중심에 두고 상호작용을 해석하는 것이 ‘주리론(主理論)’이고 기(氣)를 중심에 두고 해석하는 것이 ‘주기론(主氣論)’이다.

 

주리론의 대표적인 학자가 이언적, 이황 등이고 고려 말부터 이어온 성리학의 정통 주류학파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주기론은 독특하게 조선에서 발전한 학문인데 최초의 주기론 학자는 화담 서경덕이다(물론 논란의 소지는 있다). 이후 주기론은 성혼 등에 의해 발전하는데 주기론의 대표 학자 율곡 이이는 엄밀히 말해 ‘주기론’ 학자라고 할 수 없다. 다만 주기론의 입장에서 이(理)와 기(氣)의 작용을 중용(中庸)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주리론 학파와 대비되는 관점에서 편의상 이이를 주기론 학파라고 칭하는 것이다. 이후 기호학파는 이이의 주기론 학문을 이어 받는다.

 

 

 

동인(東人)과 서인(西人)

 

최초의 붕당은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이다. 동인의 구성원은 주로 주리론 영남학파이고 서인의 주요구성원은 주기론 기호학파이다. 동인과 서인의 분당은 어찌 보면 별일 아닌 것이지만 당시의 사림에게는 중대한 문제였다. 기독교가 유태교에서 분파되고 신교가 구교에서 분파되듯이 성리학도 엄밀히 말하면 정치사상이지만 종교적인 사상과도 상통된다고 판단된다.

 

분당은 당시 문명(文名)이 높았던 영남출신 김효원과 명종 비 인순왕후의 동생 심의겸의 대립으로 시작되었다. 명종 때 김효원은 한양에 왔다가 며칠간 윤원형의 집에서 기거한 사실이 있었다. 이 사실 때문에 1575년(선조 9년) 김효원이 하급관리 인사권을 쥐고 있는 이조전랑(吏曹銓郞)에 천거되자 심의겸은 권세에 아부한 소인배라며 김효원을 비난한다. 결국 김효원이 이조전랑에 취임하여 잠잠해지는 것 같았으나 다음에 김효원이 자리를 옮기자 이번에는 이조전랑에 심의겸의 동생 심충겸이 천거된다. 이에 김효원이 왕의 외척이 인사권을 쥘 수 없다며 반대하고 나섰다.

 

김효원과 심의겸의 대립이 날로 거세졌고, 이에 따라 사림도 두 사람의 출신지방과 사상에 따라 양분되었다. 김효원의 집이 도성 동쪽 건천동에 있었고, 심의겸의 집이 도성 서쪽 정동에 있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김효원 일파를 동인(東人), 심의겸 일파를 서인(西人)이라고 불렀다.

 

시작은 김효원과 심의겸의 감정싸움이었을지 몰라도 동인과 서인으로 굳어지면서 서로 다른 학맥과 사상으로 사림이 재편된다. 약 200년 동안 지속된 붕당정치 시대의 개막이었다.

 

 

 

당쟁(黨爭)을 막아 선 대학자

 

김효원과 심의겸의 대립으로 시작된 동.서인의 붕당(朋黨)은 시간이 지나면서 당쟁(黨爭)의 모습을 띄게 된다. 사실 동.서인 각각의 주장이 틀린 것이 아니었다. 김효원이 윤원형에게 벼슬을 청탁하거나 아부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윤원형의 집에 기거한 것은 사실이었다. 반면, 임금의 외척이 인사권을 장악하거나 권력을 장악하는 것은 훈구세력과 다를 바가 없기에 사림(士林)들은 이를 극도로 꺼려했다.

 

이와 같은 이유로 서로에게 ‘소인배(小人輩)의 당’이라며 비난하며 대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 기호학파의 시조라 할 수 있는 ‘율곡 이이’의 중재로 극한 대립은 피하고 있었다. 율곡은 붕당(朋黨)이 송나라 이후 공인된 정치 형태이기는 하나 훈구세력에게 파탄난 정치를 바로잡기 위해 당쟁(黨爭)은 피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율곡의 이와 같은 입장에 동인들은 비록 사상은 다르다고 하지만 당대 대(大)선비인 율곡을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서인들은 자신들의 사상적 지주이기에 율곡의 말을 거스를 수가 없었다. 율곡 이이가 완충지대가 된 것이다. 이리하여 동서 분당 이후 10여 년 동안은 큰 충돌 없이 상호 견제하는 형태로 지내게 된다.

 

이 시기 조선 성리학은 퇴계 이황이 집대성한 ‘주리론(主里論)’과 율곡 이이의 ‘주기론(主氣論)’으로 각각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였다. 또한 송강 정철 등 당대 대문호들의 문학도 꽃을 피웠다.

 

 

 

시작되는 당쟁(黨爭)

 

1584년 당쟁을 막고 서있던 큰 산, 율곡 이이가 죽자 동인과 서인은 본격적인 정치 투쟁을 전개하게 된다. 그 동안 중도세력에 머물러 있던 인사들이 동인에 가세해 서인의 거두 심의겸을 탄핵하자 서인 중에 탈락자가 생겼기면서 조정은 동인의 손에 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동인의 조정 장악이 거의 끝나갈 무렵, 뜻밖의 사건인 정여립 역모 사건으로 권력은 서인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된다.

 

이 사건은 본래 서인이었던 정여립(鄭汝立) 때문에 일났다. 서인이었던 정여립은 동인으로 넘어가 이이를 배반하고 성혼, 박순 등 주기론 학자들을 비판하고 다녔다. 정여립의 이당(移黨)을 선조가 불쾌하게 여기자 정여립은 벼슬을 버리고 낙향해버렸다. 조선 판 ‘철새 정치인’ 정여립에게 서인의 미움이 집중되었고 반면 동인 사이에서 그의 명성은 높아졌다.

 

정여립은 고향 정읍으로 내려가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하였다. 대동계는 매달 모임을 갖는 등 세력을 키워 전라도는 물론 황해도까지 확장되었다. 대동계가 세간의 주목을 받으며 명성을 떨치고 있을 즈음, 황해도 관찰사가 역모(逆謀) 사건을 고변(告變)한다. 정여립의 대동계가 황해도와 전라도에서 동시에 봉기하여 한양을 공격하고 병권을 장악하기로 했다는 내용이었다. 결국 정여립은 관군에게 쫓기다 아들과 함께 자살하였고 그의 역모사건은 사실로 굳어지게 되었다.

 

이때 ‘정여립의 역모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서인의 거두 정철(鄭澈)이 조사관이 되어 이 사건을 계기로 동인을 몰아내고자 대동계 인물들은 물론 동인의 핵심인물들까지 제거하게 된다. 이때 숙청된 인사가 거의 1천여 명에 육박했다고 전해자는데, 이를 ‘기축옥사(己丑獄死)’라고 한다. 정여립이 사실 역모를 계획했는지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고 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분명한 것은 역모사건을 계기로 동인의 핵심인물이 숙청당했고 ‘기축옥사’는 조선 최초의 당쟁으로 기록되었다는 것이다.

 

 

 

계략에 빠진 대문호(大文豪)

 

기축옥사를 통해 서인이 정권을 잡았으나 오래가지 못했다. 정철의 건저의(建儲議)가 문제였다. 건저의(建儲議)란 세자 책봉에 관한 의견을 말하는데, 선조의 정비 의인왕후 박씨는 병약하여 후사를 두지 못했고, 임금 선조의 나이 40이 다되어 가도록 세자 책봉을 미루고 있었다. 자신이 방계 임금이기에 다음 왕은 적통이 잇기를 선조는 바랐던 것이다.

 

하지만 서인의 거두 정철은 생각이 달랐다. 적통 대군(大君)이 없는 마당에 임금에게 변고라도 생기면 정국은 걷잡을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게 될 것이기에 후궁 소생 왕자 중에 세자를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좌의정이던 정철은 건저(建儲)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동인들에게 손을 내민다. 그러나 이때 동인인 영의정 이산해(李山海)는 이 문제를 이용해 정철을 제거할 음모를 꾸미게 된다.

 

이산해는 정철과 건저 문제를 의논하기로 하고, 뒤로는 당시 선조의 총애를 받고 있던 후궁 인빈 김씨에게 정철이 광해군을 세자로 만들고 인빈 김씨와 아들 ‘신성군(信城君)’을 죽이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무고(誣告)한다.

 

사실 선조는 적통 대군(大君)이 태어나기를 기대하고 있었으나, 후궁 소생 왕자 중에 세자를 책봉해야 한다면 인빈(仁嬪) 김씨의 소생 신성군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선조의 의중을 파악한 이산해가 인빈 김씨를 이용해 정철을 무고한 것이었다. 인빈 김씨는 이를 선조에게 고했고 선조는 진노하게 된다. 이 사실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정철은 경연장에서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해야 한다고 선조에게 주청하였다. 이에 선조는 대로(大怒)하여 정철을 유배보내 버린다. 함께 주청하기로 한 이산해를 비롯한 동인들은 그 자리에서 침묵을 지켰다.

 

 

 

또 다른 붕당, 남인(南人)과 북인(北人)

 

정철이 실각(失脚)하자 동인은 서인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하였다. 말하자면 ‘정여립 역모사건’에 대한 보복을 하는 것이었다. 서인 인사들이 대부분 숙청되었고 조정은 완전히 동인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동인은 이때부터 인조반정이 있기까지 30여년을 집권하게 된다.

 

그러나 정철의 치죄(治罪) 과정에서 동인은 남인(南人)과 북인(北人)으로 갈라서게 됩니다. 정철을 사형시켜야 한다는 이산해와 유배로 끝내야 한다는 우성전이 대립하면서 분당의 조짐이 보이더니 이조전랑(吏曹銓郞) 천거문제로 이산해와 유성룡이 대립하면서 분당이 가속화되었다. 급기야 유성룡과 개인적인 불화가 있었던 이발이 이산해와 결탁하면서 유성룡, 우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당과 이산해와 이발을 추종하는 당으로 나뉩니다. 유성룡이 영남 출신이고 우성전의 집이 남산 밑에 있었다 하여 이들 당을 남인(南人)이라 하였고, 이산해의 집이 한강 북쪽 편에, 이발의 집이 북악산 밑에 있었다고 해서 북인(北人)이라고 칭했다.

 

남인과 북인 모두 근본적으로 주리론 영남학파였으나 남인은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하였고, 북인은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문하였다. 이렇게 보면 남․북인의 붕당은 철저한 학연 중심으로 형성되었다고 할 것이다.

 

 

 

 

전란 속에서도 계속되는 당쟁

 

임진왜란(1592년 선조 25년) 직전 조선 정국은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선 다수의 동인과 소수의 서인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이들의 대립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고, 당쟁의 폐단으로 지적되는 유명한 사건인 ‘통신사 사건’은 단적인 예를 보여주고 있다.

 

전쟁으로 인해 당쟁은 다소 가라앉는 듯 보였으나 전쟁 막바지에 서서히 고개를 들게 된다. 전란 중에 남인인 유성룡이 화친을 주장하였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아 실각하고 북인들이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몇 년 전 방영되었던 ‘불멸의 이순신’이라는 드라마에서 이순신을 유성룡과 친분이 있는 남인으로 규정하고, 이산해를 비롯한 북인들이 원균을 부추겨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을 탄핵하여 백의종군 시키는 장면이 나온다. 권력을 향한 당시 지배계급의 행태를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북인의 득세와 몰락

 

전란 중에 정권을 장악한 북인은 이후 홍여순과 남이공의 대립으로 다시 대북(大北)과 소북(小北)으로 갈라진다. 대북과 소북은 선조 말년 각각 광해군 지지와 영창대군 지지로 의견을 달리하면서 대립하였다.

 

선조 이후 광해군의 등극으로 정권을 장악한 대북파는 선왕과 마찬가지로 후궁의 아들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지닌 광해군과 함께 왕권강화와 권력 유지를 위해 수많은 옥사를 일으켜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 갔다. ‘임해군 살해사건’,  '칠서의 옥',  ‘김직재의 옥’,  ‘계축옥사’,  ‘신경희의 옥’,  ‘영창대군 증살사건’,  ‘인목대비의 서궁유폐’ 등 많은 사건들이 있었다. 대부분 사소한 범죄행위를 역모사건화 하거나 거짓사건을 만들어 정적들을 죽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일련의 과정 속에 대북파는 영창대군을 죽여야 한다는 골북(骨北), 인목대비를 죽여야 한다는 육북(肉北), 이들을 반대하는 중북(中北)으로 세분화 된다. 이 골북, 육북, 중북의 세분화는 당을 형성했다고 보기보다는 대북파의 내부에서 의견이 나뉘어져 대립의 상태를 보인 것이었다. 좀 더 엄밀히 말해 대북파가 세 개의 붕당으로 갈라서기 전에 ‘인조반정’이 일어나 붕당을 형성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광해군 집권 15년 동안 수많은 옥사와 사건으로 많은 사람들의 피를 보았던 북인은 광해군의 실리외교와 너무 많은 정적을 양산 한 탓에 1623년(광해군 15년) 서인이 주도한 인조반정으로 몰락하게 된다. 이후 북인은 ‘명나라에 대한 의를 저버린 당’으로 낙인찍혀 완전히 몰락하였다. 소수의 인물들에 의해 명맥만을 유지하다 숙종 대 이후 조선 정계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