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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764 : 조선의 역사 306 (제19대 숙종실록 12)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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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764 : 조선의 역사 306 (제19대 숙종실록 12)

두바퀴인생 2012. 11. 9. 02:18

 

 

 

 

한국의 역사 764 : 조선의 역사 306 (제19대 숙종실록 12)

              

 

 

 

제19대 숙종실록(1661~1720년, 재위 : 1674년 8월~1720년 6월, 45년 10개월)

 

 

 

 

윤휴, 그는 누구인가?

 

윤휴(尹鑴, 1617년 10월 14일 ~ 1680년 5월 20일)는 조선 중기의 문신, 성리학자, 정치인, 시인으로, 남인(南人)의 거두이며, 청남의 중진이자 예송 논쟁 당시 남인의 주요 논객이었다. 학행(學行)으로 시강원진선이 되었으며 이후 성균관사업, 사헌부대사헌, 이조판서, 의정부좌찬성 등을 지냈다. 윤선도, 허목과 함께 서인 공격의 선봉장이었다.

 

어려서 외할아버지인 김덕민의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남인 학자인 이원익, 이민구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이괄의 난 때에는 여주에 피신하였고 정묘호란병자호란 때는 보은 삼산(三山)의 외가에 은신했으며, 병자호란, 정묘호란 이후 관직을 단념하고 학문 연구에 전념하였다. 1653년(효종 3년) 우의정 심지원(沈之源), 병조판서 원두표(元斗杓)의 천거로 발탁되어 관직에 나갔으나 사퇴와 복직을 반복했다. 그러나 주자의 이론을 비판, 재해석하다가 송준길, 이유태, 윤선거 등에게 절교당하고 송시열로부터 사문난적으로 몰리게 된다. 그뒤 민정중, 송시열, 송준길 등의 요청으로 다시 관직에 나갔다.

 

1659년 제1차 예송 논쟁에서는 허목, 윤선도 등과 함께 효종이 왕위를 계승했으므로 장남으로 봐야 된다며 3년설을 주장, 서인과 갈등하였다. 이때 허목(許穆), 윤선도(尹善道) 등과 함께 송시열의 예론을 반박, 서인 정권의 전복을 꾀하자 송시열과 원수가 되었고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렸다. 1674년 제2차 예송 논쟁 당시 남인의 논객으로 인선왕후가 맏며느리의 예로써 1년복 설을 주장, 2차 예송에서 남인이 승리하면서 요직에 발탁, 사헌부 대사헌, 이조판서, 우참찬 등을 지냈다. 이때 호포법의 실시, 전제의 개혁 등을 꾀했으나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고, 사헌부 대사헌으로 재직 중에는 청나라를 정벌할 것을 주장했으며, 1679년 의정부우찬성에 이르렀다. 1675년(숙종 1년) 홍수의 변(紅袖之變) 때 숙종에게 "대비를 조관하라"고 충고하여 임금의 미움을 샀다. 이 일로 평소 숙종의 눈밖에 났던 관계로 1680년(숙종 6년) 허견의 옥사와 무관했으나 함께 엮여서 그해 5월 갑산에 유배가던 중 사형을 선고받고 법살당했다.

 

사후 1689년(숙종 15년) 3월 신원되어 (贈)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었으나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집권하고 남인이 거세되면서 관작이 다시 추탈되었고, 여러 번의 추탈과 복작을 반복하다가 1908년(융희 2년) 4월 이완용의 상주로 최종 복권되고, 죄안에서 삭제되었다. 그의 학문은 이서우를 거쳐 성호 이익안정복, 신후담, 정약용 등에게로 계승되었다. 그러나 윤휴와의 관계를 부담스럽게 여긴 그의 후학들은 윤휴 대신 허목이황을 사상적 뿌리로 내세운다. 그의 사상과 학문은 그가 사문난적으로 몰린데다가 갑술환국 이후 노론이 조선 멸망때까지 계속 집권했으므로 이단시되어 연구금지 되었다가, 1910년(융희 4년) 조선 멸망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했다.

 

송시열, 윤선거 등과는 광해군 시절부터 오랜 친구였으나 그가 주자, 성리학에 대한 의문, 의혹을 제기하면서 결별하였다. 예송 논쟁의 과정에서 송시열의 사형을 주장하는 윤선도, 허목 등을 옹호하고 그들의 주장에 동의하면서 송시열과는 타협할 수 없는 원수가 된다. 자(字)는 두괴(斗魁), 희중(希仲), 호는 백호(白湖), 하헌(夏軒), 야보(冶父). 본관은 남원(南原)이다. 이름 휴(鑴)를 잘못 오기하여 윤준(尹鑴), 윤전(尹鐫)으로도 읽기도 한다. 학자 간서재(澗西齋) 김덕민(金德民)의 외손으로, 간서재 김덕민, 이민구(李敏求), 이원익(李元翼)의 문인이다.

 

윤휴
출생 1617년 10월 14일 조선 한성부
사망 1680년 5월 20일
조선 한성부
사인 사형 (사약형)
거주지 조선
국적 조선
별칭 초명은 정(鍞), 자(字)는 두괴(斗魁), 희중(希仲), 호는 백호(白湖), 하헌(夏軒), 야보(冶父)
학력 한학 수학
직업 문신, 사상가, 작가, 시인, 학자, 정치인
종교 유학 성리학
배우자 안동권씨
자녀 아들 윤희제, 아들 윤하제, 아들 윤은제, 아들 윤경제
부모 아버지 윤효전, 어머니 윤씨, 어머니 김씨, 서모 이름 미상
친척 외할아버지 김덕민, 서형 윤영, 할아버지 윤희손, 사돈 이원익, 사돈 이순신, 사돈 허목
유교
사상
수기치인(修己治人)
(仁) · (義) · (禮)
(忠) · (孝)
인물
공자 · 칠십자 · 맹자 · 순자 ·
동중서 · 소옹 · 주돈이 · 장재 ·
정호 · 정이 · 주희 · 왕양명
경서
사서오경 · 십삼경
역사
내성파 · 숭례파
법치주의 · 법가
성선설 · 성악설
분서갱유 오경박사
훈고학 경학
현학
성리학
양명학
고증학
관련 항목
삼공 · 서원 · 국자감 · 과거 ·
육예 ·
사대부 · 한국의 유교 · 한·당 시대의 사상 · 송·명 시대의 사상

 

 

생애

백호 윤휴는 1617년 10월 14일 한성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사헌부대사헌 윤효전(尹孝全)이고, 어머니는 경주 김씨로 첨지중추부사 간서재(澗西齋) 김덕민(金德民)의 딸이다. 간서재 김덕민은 그의 외할아버지이자 첫 스승이었다. 처음 이름은 정(鍞)이었으나 25세 때 휴(鑴)로 고쳤다. 아버지 윤효전은 첫 부인 윤씨를 잃고 두번째 부인 경주김씨에게서 윤휴를 얻었다. 그밖에 첩에게서 서자와 서녀 몇 명을 보았는데, 아버지 윤효전의 첩들 중 한명은 충무공 이순신의 첩이 낳은 서녀였다. 처음 자(字)는 두괴(斗魁)이고 뒤에 자를 희중(希仲)이라 하였다.

 

 

 

아버지 윤효전

 

 

 

 

고조부인 윤자관(尹子寬)은 정암 조광조(趙光祖)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수학했다가 기묘사화에 연루되었다. 그뒤 사림이 득세한 뒤 그의 가계는 당색으로는 북인이었다가 소북(小北) 계열이 되었다. 증조부 윤호(尹虎)는 생원으로 성균관 유생으로 수학하다 관직에 나가 이조참판에 이르렀다. 할아버지 윤희손은 유학자로 이황의 문인인 이중호(李仲虎)의 문하생이며, 할아버지 윤자관의 이종사촌이자 문인인 당문부수(唐文副守) 이준(李準)의 문하에서도 수학하였고, 조광조를 흠모하여 스스로 호를 정제라 하였다. 할아버지 윤희손은 선무랑을 역임했으나 33세의 나이에 요절하였다. 사후에 아들인 윤효전의 공훈과 현달로 의정부영의정에 증직되고 대성부원군에 추증되었다. 아버지 윤효전은 서경덕(徐敬德)의 손제자로, 서경덕의 제자인 문하인 민순(閔純)에게 수학하였다.

아버지 윤효전광해군 때에 임해군의 옥사를 주관했고, 대사헌, 지의금부사 등을 지냈으나 1617년(광해군 9)에 사헌부대사헌으로서 대비의 유폐를 반대하다가 경주부윤으로 밀려났다. 그러나 당색이 북인(北人)이었고, 광해군 정권에 참여했으며 임해군의 옥사를 지지했던 탓에 후일 서인이 아들 윤휴의 가계전력을 문제삼는 원인이 되었다. 윤휴는 아버지 윤효전이 후처 김씨에게서 늦게 얻은 만득자로, 그에게는 6년 연상의 서형(庶兄) 영(尹鍈)이 있었다.

 

불우한 유년기

 

 

한강 정구

 

 

아버지 윤효전은 관료이자 학자로 당색은 북인 소북(小北)이었다. 그가 태어날 무렵 경주를 방문했던 아버지 윤효전의 스승 중 한사람인 한강 정구(寒岡 鄭逑)는 만득자인 그에게 특별히 두괴(斗魁)라는 아명을 지어주었다.

 

윤휴는 3세 때 경주부윤으로 있던 아버지 윤효전이 갑자기 별세하자 여주 선산에다가 장례를 치르고 잠시 서울로 올라가 살았으나 1623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여주로 피난, 은신하였다. 이후 불우한 유년기를 보내다 정묘호란병자호란 때는 외가가 있는 충청북도 보은군(報恩郡)의 삼산(三山)에 머무르면서 외조부 김덕민으로부터 글을 배웠다.

 

1623년(광해군 15년) 인조 반정으로 북인 정권이 강제로 몰락하고 서인이 집권하였으므로 그는 당색으로부터 초연할수 있었으며, 관직에 나갈 생각을 단념하고 있었다.

 

소년기

 

 

할아버지 선무랑 윤희손
(33세에 요절하고 사후 영의정 대성부원군에 증직된다)

 

 

 

 

스승의 한사람인 오리 이원익

 

 

그는 어려서부터 총기가 있어서 한자를 가르치면 열자를 깨우쳤고 불과 2년 만에 경서를 외워 놀라게 하였다고 한다. 그뒤 조식(曺植)과 학문적으로 가까웠던 성운(成運)의 서실(書室)에서 독서하면서 이때 〈황극경세서 皇極經世書〉를 접했다. 이후 그는 이수광(李睟光)의 아들인 이민구(李敏求)의 문하와 이원익(李元翼)의 문하에 출입하며 이민구이원익에게서 성리학을 배웠다.

 

이수광은 왕족 출신 실학자였고, 이원익 역시 왕족으로 남인의 거두이자 인조 반정 이후 서인 내각에 의해 특별히 초빙된 남인 인사였다. 이원익은 또한 그의 서형인 윤영의 장인으로, 이원익의 첩이 낳은 서녀가 윤영의 아내였다. 서형수의 친정아버지인 덕에 그는 어린 나이에 의정부영의정을 지낸 남인 거물 이원익의 문하에 찾아가 수학할 수 있었다. 이원익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15년 연상인 그의 손녀사위 미수 허목을 만나 사귀었다.

 

이괄의 난 때에는 여주에 피신하였다가 한성으로 되돌아왔고 정묘호란이 터지자 보은 삼산(三山)의 외가로 가서 숨어 있다가 되돌아왔다. 1633년에는 추탄 오윤겸(楸灘 吳允謙)을 찾아가 그의 문하에도 출입하였다.

 

이원익서인조차 그 영향력을 무시할수 없어 인조 반정 이후에 다른 당원임에도 특별히 영의정으로 천거되었다. 또한 스승 이민구지봉유설을 쓴 남인계 왕족 실학자 이수광의 아들이며, 허목은 그들로부터 실학의 근간이 되는 사상을 접한다. 이원익오윤겸은 곧 죽었지만 그는 이민구, 허목 등과 교류하며 사물과 시국을 논하며 의견을 주고받았다. 28세 때 다시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백호에 정착하였고, 이후 그의 후손들은 그곳에 대대로 살게 되었다. 그의 호(號) 백호는 금사면 백호리에서 따서 호를 지었다.

 

 

학문 연구 활동

1635년(인조 13년) 19세 때, 당대의 석학으로 서서히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던 송시열(宋時烈)을 찾아가 속리산 복천사(福泉寺)에서 만나 3일간의 정치와 사물을 토론하였다. 그의 막힘없는 달변에 탄복한 송시열은 “30년간의 나의 독서가 참으로 가소롭다.”고 자탄할 정도로 높은 경지에 이르고 있었다. 송시열의 주선으로 그는 송준길(宋浚吉), 허적, 윤선거(尹宣擧), 윤선도 등을 소개받았다.

 

이어 허목, 권시(權諰), 권준(權儁), 이유(李木劉), 장중함(張沖涵), 이해(李澥), 윤선도, 허적 등 남인계 인사들과 가깝게 지냈고, 기해예송(己亥禮訟) 문제가 비화되기 전까지는 송시열, 송준길(宋浚吉), 이유태(李惟泰), 유계(兪棨), 윤선거(尹宣擧) 등 서인계 인사들과도 가깝게 지냈다. 복천사(福泉寺)에서 송시열을 만나 3일간의 토론 끝에 송시열이 “30년간의 나의 독서가 참으로 가소롭다.”고 자탄할 정도로 그의 학문적 능력을 높이 샀다. 또한 송시열은 윤휴의 이모의 아들들이던 송규정, 송규렴 형제의 스승이기도 했다. 윤휴의 명성은 입에서 입으로 널리 알려졌고, 허적의 조카이자 송시열의 문인이며 같은 여주 출신인 민중정(閔鼎重), 민유중(閔維重) 형제는 그의 집을 자주 찾아왔다.

 

송시열은 그의 가계가 북인 계열이었다가, 전향 후 서인이 되지 않고 남인을 지원한 것을 상당히 안타까워하였다. 권시(權諰)와 처남인 권준(權雋)그리고 이유(李?)·장충함(張冲涵)·이해(李澥) 등 남인계 인사들과의 친분관계가 있었으며 서인측 인사들과도 1659년(효종 10년)의 기해예송 이전까지는 친교가 잦았다. 유천 시절부터 송시열, 송준길, 이유태(李惟泰), 유계(兪棨), 심지원, 윤선도, 윤문거(尹文擧), 윤선거 등 서인 계열의 학자들과도 만나 세상과 사물을 담론하며 교분을 나누었으며, 송시열의 문인들인 민정중(閔鼎重)·민유중(閔維重) 형제는 특히 윤휴를 각별히 여겨 그가 살던 여주를 자주 찾았다고 한다. 노봉 민정중은 한때 그의 사심없는 삶을 시로 표현해 안빈낙도의 전형으로 칭송하기도 하였다. 여양부원군 민유중은 “윤휴의 기모를 보면 좌상춘풍(左上春風)이요 그 언론을 들으면 경전에 출입하고 금고(今古)를 관천(貫穿)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감동하여 귀 기울이게 하니 어찌 경도치 않으리오.” 라며 칭찬하였다. 그의 수려한 외모와 막힘없는 재주, 글재주, 달변은 여러 선비들을 매료시킨 하나의 매력이었다. 그러나 권대운은 그가 지나치게 자기 고집을 꺾으려 하지 않음을 단점으로 지적한다.

 

1636년 병자호란이 터지자 다시 외가가 있던 보은군의 삼산으로 피신하였다. 이때 국가의 치욕에 한을 느껴 관직을 단념하고 학문 연구에 전념하였다. 공주 유천(柳川)으로 들어가 학문에 전념하기도 했으나, 주로 여주에서 젊은 시절을 보냈다. 이때 그는 송시열과 두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복수설치를 할 것을 굳게 다짐하였다. 이때부터 10여 년간 그는 오로지 학문에만 열중하여 유교의 경전인 중용, 대학, 효경 등에 독자적인 해석을 가할 수 있게 되었고 장구(章句)와 주(註)를 수정하는 작업에 몰두하였다. 그의 학문적 명성이 널리 알려지자 조정에서는 여러 차례 벼슬을 내렸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이이, 성혼의 문묘종사 반대 운동

인조 즉위 초부터 시종 율곡 이이우계 성혼의 문묘 종사를 놓고 논란이 발생했다. 이때 남인 중에서 율곡과 우계의 문묘 종사를 반대한 핵심 인물들은 미수 허목과 고산 윤선도, 백호 윤휴 등이었다.

 

율우의 문묘종사 논쟁이 벌어지자 허목은 이이를 유학자의 옷을 입은 불교 승려라고 비판했다. 윤휴도 허목과 같은 시각에서 이이를 비판했다.

울곡 이이가 성학집요(聖學輯要) 서문에서 말하기를 '먼저 요로(要路)를 찾아서 문정(門庭)을 확실히 연 후에 정해진 방향 없이 널리 배우라'고 했는데, 이 말은 크게 잘못되었다. ...(이하 중략)... 율곡의 말처럼 한다면 근본을 세움이 확실하지 못하고 방햐잉 정해지기도 전에 요로와 문정을 얻게 되는 것이니 이 무슨 말인가? ...(이하 중략)... 이는 불가(佛家)의 거꾸로 배우는 방법이지 공자의 가르침이 절대 아니다.

남인 중에서 율곡과 우계의 문묘 종사를 반대한 핵심 인물들은 미수 허목과 고산 윤선도, 백호 윤휴 등이었다. 어린 시절 한때의 방황을 이들은 이해하지 않았다. 이율곡서인의 종주이자 학문적, 정신적 지주로 그에 대한 비난은 서인의 맹공격을 초래하게 된다.

 

 

관직 추천 사퇴와 학문 몰두

 

 

오랜 친구 우암 송시열
(1,2차 예송 논쟁을 거치면서 정적으로 돌변한다.)

 

 

1636년 벼슬에 나아갈 뜻으로 만언소(萬言疏)를 지었으나 바로 그해에 병자호란이 일어나 피난하였다. 1637년 정축하성으로 청나라 황제에게 인조가 삼두고배를 하고 군신의 의를 맺자 신하로서의 치욕과 부끄러움을 자책, 이후 치욕을 씻을 때까지 벼슬에 나아가지 않을 것을 결심하였다. 그뒤 10여 년간 그는 오로지 학문에만 열중하여 유교의 경전인 중용, 대학, 효경 등에 독자적인 해석을 가할 수 있게 되었고 장구(章句)와 주(註)를 수정하는 작업에 몰두하였다. 그의 학문 연구에 그의 오랜 친구였던 송시열은 찬탄해 마지않았다. 그뒤 한성부 쌍계동(雙溪洞)의 하헌에 거처를 잡고 여주를 자주 왕래하였다.

 

1637년부터 송시열송준길은 그의 학덕이 높음을 치하하며, 윤휴를 천거하여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그는 학문 연구를 이유로 관직을 사양, 사퇴하였다. 이후 그의 학문적 명성이 널리 세상에 알려지자 조정에서는 여러 차례 벼슬을 내렸으나 모두 사퇴하고 나가지 않았다. 1652년(효종 3년) 봄 부교리로 있던 민정중(閔鼎重)이 상소하여 그를 등용할 것을 적극 건의한다.

현재 윤휴·윤선거와 같은 사람들은 모두 유학(儒學)으로 당대의 촉망을 받고 있습니다. 전하께서 특명으로 백의(白衣)를 소견하시기를 고사(古事)처럼 하시어 제각기 갖고 있는 생각을 진달하게 하여 그들의 재주가 쓸만하면 채용하고 그렇지 않으면 돌려보내는 것이 가합니다. 윤휴와 윤선거는 모두 세신(世臣)인데, 만약 그들의 인품을 논한다면 윤휴는 재주와 식견이 탁월하고 윤선거는 국량이 견고하고 확실합니다.

 

민정중의 건의를 받아들인 효종은 사람을 보내 윤휴를 불러들이나 그는 사양하고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1653년 우의정 심지원(沈之源)과 병조 판서 원두표(元斗杓)의 건의로 발탁되었다. 우의정 심지원은 "허목(許穆)·윤휴(尹鐫)가 힘써 배워 재주가 많으며 행실이 남보다 낫다 하니, 이러한 사람은 발탁하여 써서 권장되게 해야 하겠습니다."라 하고, 병조 판서 원두표(元斗杓)가 아뢰기를, "윤휴는 윤효전(尹孝全)의 아들인데 고서(古書)를 많이 읽었다 합니다."라 하여 그들을 발탁하여 교육과 학문 연구 등 조정에 문풍 진작에 힘써야 된다고 주장하였고, 윤휴는 경연관으로 등용되어 관직에 나간다.

 

 

 

중매결혼 옹호와 연애결혼 비판

조선후기 이후 신분제 사회가 붕괴되면서 연애 결혼이 나타났고, 과부의 재혼도 증가하였다. 보쌈이라는 용어가 민간에서는 과부를 자루에 넣어 납치하는 형식의 일종의 재혼을 상징하기도 했다. 그는 이를 강하게 비판하며 중매결혼의 정당성을 역설하였다. 한편 그는 신분제 붕괴와 가족 제도의 변화를 인륜이 땅에 떨어지는 현상이라며 안타까워하였다.

" 남자가 전적으로 혼자 장가들지 않고 여자는 전적으로 혼자 시집가지 않는다. 반드시 부모를 통하고 중매를 필수로 한다. 이는 무엇 때문인가? 부끄러움을 멀리하고 음란함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


그가 후에 '독서기'에서도 이와 같은 내용을 언급, 지적한 것처럼 조선시대의 결혼은 대부분 부모가 개입된 중매결혼이었다. 그는 연애 결혼을 일종의 란함으로 규정하고 이를 방지하기 위해 자녀결혼에 부모의 개입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중매결혼을 옹호하였다.

 

 

주자학 비판과 관료 생활 사퇴

 

 

윤휴의 편지 간찰 (작성연대 미상)

 

 

20대 초반에 '사단칠정인심도심설 四端七情人心道心說'을 지어 이기심성(理氣心性)의 문제에 대해 이황이이의 견해를 비판하고 독자적인 견해를 형성하였다. 이는 그의 스승이던 김덕민, 이원익, 이민구의 견해와는 상당히 다른 것이라서 화제가 되었다. 학문적 명성이 널리 알려지면서 효종 즉위 초, 그는 송시열, 송준길, 윤선거에 의해 학행으로 천거되어 시강원진선(侍講院進善)·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등 여러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사퇴하고 나가지 않았다. 중용장구보록, 중용대학후설 등에서 주희와 다른 해석을 하여 송시열과 논쟁을 벌이는 등 학문에 뛰어났다. 그는 관직에 여러번 천거되었으나 그때마다 모두 사양하고 저술 활동과 강연에 전념했다.

 

재학(才學)과 행의(行誼)로 천거되어 관직에 발탁되었다. 1656년(효종 7년) 1월 세자시강원 자의(咨議)에 특별 발탁되었다. 그러나 상경한 뒤 잠시 있다가 사퇴하였고 다시 주부에 임명하였으나 역시 사양하고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그뒤 민정중의 거듭된 출사 요청으로 한성부에 왔다가 1656년 종부시주부, 사헌부지평, 예빈시정(禮賓寺正) 등 여러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관직을 사퇴하고 내려가 학문 연구에 전심했다. 1658년(효종 9년) 세자시강원 진선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사양하였다.

 

그는 주자만이 답을 아느냐며, 주자의 학설에 추종하여 이를 묵수하려는 태도를 배격하고, 《대학》,《중용》,《효경》 등의 경전을 독자적으로 해석하여 구절과 해석을 수정, 주자와 대등한 입장에서 유학의 독자적인 경지를 개척하는 데 과감했다. 이는 당시 학계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그가 성리학을 심하게 비판하자 그와 친분이 있었던 민정중, 김수항 등이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송시열은 그가 잘못된 사상을 가졌다며 여러 번 만나거나 서신으로 설득하였다. 송준길윤선거 역시 여러번 찾아가고 서신을 보내 그를 설득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송준길은 그의 집 출입을 끊었고, 윤선거는 절교를 선언한다.

 

 

정치 활동

그뒤 민정중의 출사 요청과 송시열, 송준길, 윤선거 등의 계속된 설득으로 관직에 나갔다. 1659년(효종 10년) 공조정랑을 거쳐 사헌부지평에 임명되었으나 사직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예송 논쟁이 벌어지자 그는 관직에 취임하여 한성부로 올라온다. 이후원은 그를 등용했다가 화를 불러올 것이라며 반대했고, 이유태는 윤휴의 사상이 의심스럽다며 그를 추천하는 일은 중단할 것을 권고한다. 한편 송시열이 그를 천거하자 이후원이유태가 만류했음에도 송시열은 윤휴를 경연관으로서의 적임자라고 계속 추천한다.

 

그는 북인계열로 서인이나 남인 중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는 않았다. 본래 당색에 구애됨이 적었으나, 예송을 통하여 서인측과 틈이 생겨 출사 뒤에는 남인으로 활약하였다. 그는 기해예송 때 포의(布衣)로서 송시열의 주장의 오류를 가장 먼저 지적하였으며, 후일 1674년 갑인예송 때에도 같은 기준에서 서인측 견해의 잘못을 지적하였다.남인으로서 그는 허적(許積), 권대운 등을 중심으로 한 탁남(濁南)과는 입장을 달리하여 허목(許穆)과 함께 청남(淸南) 일파를 형성하게 된다.

 

그가 주자의 사상을 맹목적으로 존경하지 않고, 심지어는 공자맹자의 사서육경에도 자신만의 독특한 견해를 보이자 이는 서인은 물론 일부 남인들에게도 공격의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1차 예송 논쟁

 

 

고산 윤선도
(윤휴, 허목과 함께 남인 강경파 인사였다.)

 

 

남인의 중심인물이 되어 제1차 예송논쟁 때 서인들이 주장하는 1년복 설에 반대하여 3년복설을 주장하였으나 패배한 후 제2차 예송논쟁 때는 1년복을 주장하여 승리했다. 남인이 정권을 잡은 숙종 초 성균관사업(成均館司業)으로 관직에 나가 같은 해 대사헌이 되어 청나라를 정벌할 것과 송시열을 이배(移排)하고 서인 중진 민유중(閔維重)과 이단하(李端河)를 삭탈관작하자고 주장했다.

 

앞서 1660년(현종 11년) 복상문제가 일어나자 허목(許穆)·윤선도(尹善道)와 함께 송시열, 송준길 등의 예론(禮論)을 통박하다가 사문난적으로 낙인이 찍혔다. 논쟁 초기에 송시열은 윤휴의 주장을 접수하였으나, 남인복상 문제송시열을 제거하려 하자 송시열은 그를 공격하였다.

 

 

 

 

 

미수 허목
(윤휴, 윤선도와 함께 예송논쟁 당시 3년복 설을 주장했다.)

 

 

효종이 인조의 맏아들로 왕위를 이었다면 별 문제가 없었겠지만 그는 차남이고 인조의 맏아들인 소현세자의 상중에 자의대비가 맏아들에게 행하는 예로써 3년상을 치렀기 때문에 다시 효종의 상을 당하여서는 몇 년 상을 해야 하는가가 문제가 되었다. 이 문제에 직면하자 서인의 송시열과 송준길은 효종이 차남이므로 원칙대로 당연히 기년상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7] 하지만 남인의 허목과 윤휴는 효종이 비록 차남이지만 왕위를 계승하였으므로 장남과 다름없기에 3년상이어야 한다고 반론을 제기했다.[7] 서인과 남인의 복상 논쟁은 극단적인 감정으로 치달았고,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정쟁으로 확대되고 말았다. 그리고 이 정쟁은 지방으로 확대되어 재야 선비들 사이에서도 중요한 쟁점으로 부각되었다.

 

그러나 남인송시열을 탄핵하여 역모로 몰아가려다가 실패하였고, 3년설을 주장하며 송시열이 효종의 왕통을 부정한다는 정치 공세성 모함을 하며 송시열을 제거하려 하자 그는 기년설을 관철시키고 남인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 사건 이후 송시열서인의 최고 지도자로서의 자리를 굳혔다.

 

 

논쟁과 갈등

그는 효종이 일단 왕위를 계승하였고 국가의 지존이니 자의대비는 사사롭게는 효종의 어머니가 되지만 공적으로는 국가의 신민의 한사람이 된다고 주장하였다.(신모설) 그가 신모설을 주장하자 서인은 아들이 어머니를 신하로 삼는 예가 어디있느냐며 패리, 패륜이라며 그를 공격했다. 송시열은 '주나라 무왕의 고사를 들어 아들이 어머니를 신하로 삼는 예는 없다'며 후인이 어찌 이를 반박하느냐며 일축하였다. 이어 송시열자의대비는 이미 효종왕자시절 왕자(신하)의 입장에서 국모로 받들었기 때문에 자의대비가 효종의 신하가 될 수가 없다고 반론을 제기하였다.

 

이때 윤선도 등은 예송 논쟁송시열송준길효종에게 소현세자민회빈 강씨의 명예회복과 복권을 강력하게 주청했다는 점을 걸고 넘어지며, 그들이 효종 대신 소현세자를 정통으로 생각했다고 공격했고, 윤휴 역시 이에 동의, 묵인하였다. 그가 이를 묵인하거나 동조하는 태도를 취한 것에 분개한 송시열은 그에 대한 신뢰를 버렸다. 그럼에도 그는 송시열과 교류했는데, 그의 이모의 아들인 송규정, 송규렴 형제가 송시열의 제자들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송시열과 대립하면서 송규정, 송규렴과의 관계도 소원해진다.

 

남인들이 송시열 등이 소현세자를 정통으로 봤다는 상소를 계속 올릴 때 윤휴는 묵인하거나 수수방관하였다. 소현세자와 소현세자빈, 김홍욱 복권의 당론 외에도 소현세자소현세자빈인조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되어 죽었고, 세자빈을 구명했다가 희생된 김홍욱을 의를 위해 희생된 선비라고 확신하던 송시열송준길은 윤선도, 윤휴와 남인들의 정치공세에 크게 분노했다.

 

 

송시열과 결별

1차 예송 당시 송시열의 주장에 오류가 있음을 지적하였고, 이후 서인과는 틈이 생겼다. 그러나 송시열, 송준길은 처음에는 학문상의 견해차이로 보고 수용하였다. 그러나 학문 논쟁에서 출발한 예송 논쟁남인이 정치공세로 비화, 이 과정에서 남인 당원들이 송시열을 사형시키라고 주장하자 송시열의 남인에 대한 반감과 분노는 극에 달하게 되었다. 송시열이 윤휴를 사문난적으로 공격하면서, 윤휴 역시 송시열을 죽여야 된다는 윤선도, 허목 등의 강경파의 입장에 동조하게 된다. 송시열은 윤휴를 참적(讒賊), 적휴((賊鑴), 흑수(黑水)라 불렀고, 소년기의 우정은 증오와 경멸로 변하였다.

 

윤휴는 종래 주자의 해석방법을 배격하고 <중용> <대학> <효경> 등 경전을 독자적으로 해석하여 장구(章句)와 주(註)를 수정, 당시 학계에 큰 파문을 일으키기에 이르렀다. 송시열은 처음에 윤휴의 의견을 이설로서 받아들였다.

 

윤휴는 주자의 해석을 그르다 하고, 장구를 멋대로 고쳤다. 심지어 "경전의 깊은 뜻을 어찌 주자만 알고 우리는 모른단 말인가?"하는 말로 주자의 아성에 도전하는 듯한 인상까지 풍겼다. 그러나 그의 사상이 과격하다고 본 송시열은 그를 설득하게 된다. 송시열은 윤휴를 직접 찾아가 설득해 보고, 편지로 달래 보기도 했으나 허사였다. 우암은 격분한 나머지 백호를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며 규탄했다.

 

송시열은 "분서갱유(焚書坑儒)의 화가 미칠지라도 윤휴를 배척한 일을 후회하지 않는다.", "만약 (내가) 윤휴의 손에 죽는다면 더 이상 영광이 없다.[8]"며 윤휴에 대한 노골적인 적개심을 드러내게 된다.

 

 

송시열, 윤증와의 갈등

 

 

명재 윤증

 

 

윤증은 아버지 윤선거가 죽자 친히 스승 송시열에게 부탁하였다. 그러나 송시열윤선거의 피난을 못마땅히 여기며 비꼬았고 이는 회니시비의 원인이 된다. 한편 송시열윤선거에게 윤휴와 절교할 것을 여러번 권고하였다. 그러나 윤선거는 윤휴와 계속 만났고, 윤휴는 나중에 아버지를 추도하는 제문이라며 에게 추도문을 보낸다.

내가 보기에 공은 어떤 사람에게 끌려다니는 것 같소.

– 윤선거 추도문 중에서

윤선거의 문인들은 윤증에게 윤휴의 제문을 받아서는 안된다고 만류하였지만 윤증은 옛 정을 생각하여 윤휴의 제문과 추도문을 받았다. 윤증송시열과의 관계상 받지 않으려다 받았지만 제문은 윤선거가 우유부단하다고 조롱하는 내용이었으므로, 윤증은 윤휴의 추도사를 받고 탄식했다 한다. 그뒤 윤증으로부터 절교장을 받았다. 윤증은 이후 윤휴에게 절교를 선언하고 다시는 만나지 않았다. 오히려 윤휴가 허목 등과 함께 장희빈의 편을 들게 되자 그를 사악한 인물이라며 비난하였다.

 

 

2차 예송 논쟁

1674년(현종 15년) 2월 효종인선왕후가 죽으면서 시계모인 자의대비의 복상 문제가 도마에 올랐고, 영남 유생 곽세건이 지난 효종상 때의 복제 문제를 언급하자 다시 예송논쟁이 발생했다. 이때 윤휴는 맏며느리의 예에 따라서 1년복을 입어야 된다고 주장했다. 효종이 왕으로서 정통성을 계승한 만큼 효종비인 인선왕후는 맏며느리로 대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허목과 함께 맏며느리의 예에 따라 1년복 설을 주장하였는데, 현종의 의중이 1년복 설에 있었으므로 승리를 거뒀다. 1674년(현종 15) 7월 중국에서 오삼계(吳三桂)의 반청(反淸)반란이 일어난 소식을 듣자 윤휴는 현종에게 '이 때가 전날의 치욕을 씻을 수 있는 기회'라며 북벌을 주장하는 상소인 대의소(大義疏)를 올렸다. 그러나 현종은 곧 사망했고 그의 상소는 묻혀졌다.

 

그뒤 현종이 갑자기 죽자 송시열이 현종의 묘지명을 쓰는 것을 두고 서인들이 숙종의 진노를 유발하여 숙청되자, 윤휴는 성균관사업에 제수되어 조정의 요직에 복귀한다. 한편 이 무렵을 전후해서 그가 복창군과 친밀하게 지낸다는 헛소문이 암암리에 퍼져서 만난적이 없음을 해명하느라 곤혹을 치루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