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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762 : 조선의 역사 304 (제19대 숙종실록 10) 본문
한국의 역사 762 : 조선의 역사 304 (제19대 숙종실록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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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대 숙종실록(1661~1720년, 재위 : 1674년 8월~1720년 6월, 45년 10개월)
송시열, 그는 누구인가? (계속)
북벌론의 추진과 실패
김자점의 난과 북벌론
그 뒤 1649년(효종 1년) 인조의 뒤를 이어서 효종이 임금이 되자 부름을 받았다. 송시열은 곧 어명을 받들어 다시 사헌부 장령에 등용되었고, 세자시강원 진선(世子侍講院進善)을 거쳐 사헌부집의가 되어 정계에 진출하였다. 입대(入對)한 자리에서 13조목에 이르는 장문의 봉사(封事 기축봉사(己丑封事))를 올려 자신의 정치적 소신을 개진하였다. 그 가운데서 존주대의(尊周大義)와 명나라를 멸망시킨 여진족에 복수하여 숭정제 등의 치욕을 씻는 일에 대해 논한 것이 왕의 북벌 의지와 부합되어 효종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송준길의 상소로 김자점(金自點)이 유배되자 위협을 느낀 당시 집권당인 서인 공서파(功西派)의 김자점의 일파가, 효종이 신진 사림(新進士林)을 등용하여 북벌을 꾀하려 한다고 청나라에 밀고를 하였다. 그에 따라 청나라에서 한성부에 사신을 보내 엄중 문책한 뒤, 조선의 실정을 파악하고 조선 조정에 압력을 가하게 된다. 당시 집권당인 서인(西人)의 당원이었으나 청서파(淸西派)에 속한 그는 이후 공서파(功西派)의 김자점이 영의정이 되자 사직하고 다시 고향으로 내려갔다.
북벌론 제창
1650년 김자점이 파직되고 김자점 일파가 숙청된 뒤 진선에 재임명되었으나, 1649년 대제학 조경(趙絅)이 찬술한 《장릉지문》(長陵誌文)에 따르면, 청나라 연호를 쓰지 않았다고 김자점이 청나라에 밀고함으로써 청나라의 압력을 받아 사직하고 또 다시 고향으로 내려갔다. 충주목사(忠州牧師)·집의 등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후진 양성에 전심하였다. 이때 김자점은 효종이 새 사람을 등용하여 장차 청나라에 항거하려 한다고 하자, 청나라는 국경 지대에 병력을 집결하고 사신을 보내 추궁하였고, 이에 송시열은 또 사임하고 돌아갔다는 주장도 있다.
윤휴가 사물의 이치를 주자만이 아느냐며 이의를 제기하자 그는 반론을 제기하였으나 윤휴를 설득할수 없었다. 1653년(효종 4년) 황산서원에서 '윤휴의 주장'에 대한 대책을 세우고자 윤선거 등과 함께 만났다. 이 때 윤선거가 윤휴를 은근히 두둔하자 송시열은 윤선거에 대한 불쾌감을 드러냈다. 과거 윤선거가 병자호란 때 동지들과 아내는 모두 순절하였으나 홀로 살아서 탈출한 것을 경멸하던 송시열의 윤선거에 대한 태도는 격화되었다. 황산서원에서의 토론은 의미없이 종결되었다.
1653년 다시 효종의 부름을 받아 출사하였고, 청나라를 정벌하여 존주대의를 세워야 함을 역설하였다. 그해 3월에 충주 목사로 나갔다가 사직하였다. 1654년 사헌부집의(執義), 1655년 이조 참의 등에 연이어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출사하지 않은 채 은둔 생활을 하며 송준길 등과 강학과 후진 양성 및 저술 활동에 전념하였다. 1656년 윤 5월 스승 신독재 김집의 부고를 접하고 관직을 사퇴하고 낙향하여 3개월간 상복을 입다. 스승 김집의 상을 탈상한 뒤에 다시 이조참의로 출사하였다.
1657년 찬선(贊善)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그해 8월에 정유봉사(丁酉封事)를 올려 '시무 19조'를 건의하였다. 1658년 다시 찬선에 등용, 이조 참의, 예조 참판에 임명되어 사양하였으나 특지(特旨)를 내리자 소명(召命)하여 상경하였다. 효종의 간곡한 부탁에 따라 이해 7월 6년 만에 다시 찬선에 임명되어 벼슬길에 나왔고, 9월에 특명으로 차헌대부 이조판서로 승진, 10월에 효종이 특별 선물로 그에게 초피(貂皮) 모자를 주었다. 그는 황송한 것이라며 차자를 올려 사양하였으나, 효종은 당상관에게 초피모자를 주는 전례를 들어 윤허하지 않았다. 이후 1659년에 효종이 갑자기 승하할 때까지 절대적인 신임 속에 북벌계획을 추진하는 핵심적인 인물로 부상하였다.
황산서원과 동학사 모임
윤휴는 주희의 학설에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태도를 배격하고 오히려 주희와 대등한 입장에서 독자적으로 경전을 해석하는 방향으로 나갔다. 중용에 대한 주희의 주석의 오류를 찾아낸 윤휴는 자기가 새로 주석하여 가르친다거나, 주희의 학설이라도 틀릴 수 있다, "천하의 이치를 어찌 주자 혼자만 안단 말인가? 주자는 내 학설을 인정하지 않겠지만, 공자가 살아온다면 내 학설이 이길 것이다" "공자라 할지라도 잘못된 것은 잘못되었다고 해야 한다. 내가 보기에 공자도 잘못된 것이 있다" 라고 하였다. 송시열은 윤휴에게 선현을 모독하는 행위라며 중단할 것을 촉구했으나 윤휴는 오히려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송시열과 이유태는 이 문제를 두고 1653년 황산서원에서 동료 친구들을 모아서 이 문제를 토론한다. 여기에는 윤선거(尹宣擧), 권시, 유계(兪棨) 등이 참여하였다. 1653년(효종 4년) 윤7월 송시열은 윤선거, 유계 등 10여명의 저명한 서인 학자들(대전 부근 지역 출신)과 황산서원(黃山書院, 논산 강경)에 모여 시회(詩會)를 열었다. 황산서원은 조광조, 이황, 이이, 성혼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송시열은 이 선현들 앞에서 윤휴를 단죄하려 한 것이다. 윤선거는 윤휴를 높이 보며, 그 학문이 높고 깊다고 했다. 반면 송시열은 윤휴가 사문난적과 같다고 극렬하게 비난했다.
그러자 윤선거는 "우리는 경전의 깊은 뜻을 다 알지 못하오. 그러나 의리(義理)는 천하의 공물(公物; 모두가 소유하는 것)인데, 그대는 지금 윤휴에게 감히 말도 못하게 함은 무엇 때문인고. 주자 이후에도 경전에 대하여 조금씩 주해한 것이 많이 있지 않는가" 라며 반박하였다. 윤선거의 반박에 송시열은 '주자가 논한 바는 그 이후 지금까지 한가지 이치라도 분명하지 않은 것이 없고, 한 글자라도 흐린 것이 없다. 만일 여기에 의심이 있으면 주자의 글에 대하여 그 분명하지 않은 점을 지적하면 될 것이지 윤휴는 왜 마음대로 주자의 중용 주석의 일부를 버리고 자기 주장을 대신 내세우는가?" 윤선거 - "그것은 윤휴가 고명(高明)함이 지나쳐서 실수한 것이다." 송시열이 이에 격노하여 "그대는 주자가 윤휴만큼 고명하지 못하단 말인가? 윤휴가 도리어 주자보다 더 고명하단 말인가?'라며 따졌다. 이에 윤선거는 '내가 말한 '고명(高明)'이란 말은 실수이고, 윤휴가 주석 만든 것은 다만 경솔한 소치일 것이다'라며 해명하니 송시열은 내가 사문난적이라 한 것은 바로 그 '경솔함'을 말한 것일 뿐이다." "그대는 윤휴의 재주와 기지가 특히 고명하다고 탄복하는데, (옛날 중국의 역적들인) 왕망, 동탁, 조조 같은 무리가 다 고명했으니, 윤휴도 그들과 같은 글-도둑이다. 그대도 그와 협조했으니, 이후에 만일 임금이 춘추의 법(春秋大義)에 따라 죄를 다스릴 때에는 (그 추종자를 먼저 치는 법인데), 그때 그대가 윤휴에 앞서 죄를 받을 것이다.'라고 강하게 나왔다. 윤선거는 윤휴와 결별할 것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윤선거는 계속 윤휴와 교제하였고, 송시열과 이유태 등은 동학사에서 또 한차례 친구 동료들을 모아 토론하였다. 송시열 윤선거 이유태 등 몇 사람은 다시 공주 동학사에 모였다. 이 모임에서 다시 윤휴에 대해서 종일 논쟁하다 해가 저물게 되었다. 이에 그날 저녁 토론이 끝나갈 무렵 송시열이 윤선거에게 길게 논쟁할 것 없다. 간단히 말해서, 주자가 옳으냐, 윤휴가 옳으냐? 어느 쪽이 옳고 어느 쪽이 그른지 한마디로 말하라며 추궁했다. 윤선거는 한참을 생각하다가 "옳고 그름(是非) 보다도 흑백으로 본다면 주희는 백, 윤휴는 흑이며 음양(陰陽)으로 본다면 주희는 양, 윤휴는 음이다." 라고 말하고 그 자리를 빠져 나왔다. 이에 이유태는 윤선거가 원래 비겁한 사람으로, 오늘 그의 대답은 믿을 수 없다고 했다. 이어 윤휴는 음이며 절교를 하겠다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1655년 봄에 윤선거가 편지를 송시열에게 보내서, 흑백론-음양론은 표현상 그런 것이고, 윤휴의 인격을 말한 것은 아니다 라고 했다. 이에 송시열은 윤선거에 대해서 풀기 어려운 악감정을 가졌다. 그리고 송시열은 윤선거를 잠재적인 논적으로 보고 경계하게 되었다.
북벌준비 계획과 실패
1658년(효종 9) 12월 10일 효종은 송시열을 은밀히 불러 초구(貂裘:담비 가죽으로 지은 옷)를 내려 주었다. 송시열은 임금의 속내를 눈치채지 못하고 거듭 사양하자, 요하와 북경에서 함께 말달릴 때 입으라며 은밀한 암시를 주었다. 송시열은 초구를 받아 잘 간직하였다.
1659년 3월 효종은 송시열을 은밀히 불러들이면서 승지와 사관과 내시 등 늘 임금 곁에 붙어서서 수종하는 벼슬아치들을 모두 내보냈다. 이처럼 임금과 신하 단 둘이 만나는 것을 독대(獨對)라 하는데, 경국대전에 임금은 어떤 경우라도 독대하지 못한다는 조항이 있다. 효종은 규정을 어겼다는 비난을 감수하며서까지 독대를 하였다.[9] 이 자리에서 효종은 자신의 생각을 토로했다.
모든 신하들이 군비 확충의 중지를 바라지만 내 굳이 듣지 않음은 천시와 인사가 어느 날에 좋은 기회가 올지 모르기 때문에 정병의 포수 10만을 양성하여 사랑하기를 자식같이 해 모두 용감히 죽을 수 있는 사졸을 만들려 함이오. 그런 뒤에 틈을 기다려 저들이 생각지도 않은 때에 내달아 곧바로 저들 관문 밖에 이르면 중국의 의사 호걸들 가운데 어찌 응하는 자가 없으리요?
관문 밖에 이르는 것은 아주 쉽소. 오랑캐는 무비를 일삼지 않아 요동, 심양 천리에 활 잡고 말 탄 자가 없어서 무인지경에 들어가는 것 같을 것이오. 또 오랑캐가 우리나라 세폐를 요동과 심양에 쌓아 두었으니 하늘의 뜻은 도로 우리가 쓰라는 것 같고, 포로된 우리나라 사람들이 몇만 명인지 모르나 어찌 호응하는 자가 없겠소? 오늘날의 일은 오직 실행하지 않음을 근심할 뿐이지 성공하기 어려움은 근심할 것이 아니오.(송서습유).
송시열은 양병을 위해서는 기강을 확립해야 한다는 의견을 개진하였다. 이 말은 결국 북벌을 반대하는 논의 자체를 막아야 한다는 뜻이다. 이 일로 신하들이 임금이 송시열과 '독대'한 것에 대해 시비를 가려야 한다고 들고 나와 오히려 분란의 빌미만 제공하고 말았다. 효종은 세자를 시켜 은밀하게 송시열에게 비밀편지를 보내는 등 은밀하게 상의를 거듭하였다.
이 시기에 효종은 그에게 친히 초모(貂帽), 초구(貂裘) 등을 계속 송시열에게 하사하여 자신의 북벌 의지를 보이며 특별한 기대를 갖기도 한다. 그는 효종과 함께 북벌계획을 추진하였으나 이듬해(1659년) 봄 효종이 죽자 그 계획은 중지되었다. 한편 효종의 병이 위독하여 당시의 영의정 정태화(鄭太和)와 더불어 그를 불러 뒷일을 부탁하려는 눈치였으나 두 사람이 병상에 들어갔을 땐 이미 왕은 붕어한 뒤였다. 효종과 함께 북벌계획을 추진하였으나 효종이 갑자기 죽자 그 계획은 중지되었다.
소현세자 일가 복위 여론
소현세자가 의문의 죽음을 당할 당시 산림에 있던 재야 서인들은 소현세자와 세자빈 강씨 등이 억울하게 죽었다고 확신한다. 결국 재야의 산림 서인들은 소현세자의 복위 여론을 주청한다.
효종 즉위 초부터 송시열은 송준길과 함께 소현세자가 억울하게 죽었음을 공론화시켜 소현세자와 세자빈 강씨의 복위를 주장하였다. 이 주장은 서인의 당론으로 채택, 1651년(효종 2년) 김홍욱이 주장한 바와 같이 서인은 소현세자와 세자빈을 억울하게 희생당한 것으로 간주하였다. 효종은 내심 불쾌하게 생각하였으나 이를 벌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주장은 1차 예송 당시 윤선도와 남인에 의해 효종의 정통을 부인하려는 행위로 몰리게 된다.
서인에서는 당론으로 소현세자 일가의 죽음을 억울한 죽음으로 규정했다. 그는 효종 즉위 초부터 소현세자의 억울한 죽음을 언급했고, 뒤에 남인에서는 이를 효종의 종통을 부인한 것처럼 몰고갔다. 그러나 남인의 공세에도 불구하고 민회빈 강씨는 숙종때 송시열 등의 거듭된 주청으로 복위된다. 또한 구언에 의해 소현세자와 민회빈 강씨 복권을 주장했다가 사형당한 김홍욱에 대한 포증도 계속 청원하였다.
숙종 초 송시열은 다시 민회빈 강씨의 억울함을 주장하여 신원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 뒤 김수항의 신원 상소로 복관되었다.[12] 그뒤 그와 김수항이 죽고 1718년 숙종은 소현세자빈 강씨의 무혐의를 인정하고, 민회(愍懷)라는 시호를 내려 복권시켰다. 강씨가 억울하게 죽은 지 80년 만이었다.
1차 예송 논쟁
그 뒤 효종의 죽음으로 효종의 계모이자 인조의 계비였던 자의대비 조씨(慈懿大妃 趙氏)의 복상 문제가 제기되자 윤휴(尹鑴) 등 남인은 삼년복(三年服)을 주장하였고 우암은 기년복(朞年服)을 주장하였다. 이를 예송(禮訟) 논쟁이라 한다. 효종이 인조의 맏아들로 왕위를 이었다면 별 문제가 없었겠지만 그는 차남이고 인조의 맏아들인 소현세자의 상중에 자의대비가 맏아들에게 행하는 예로써 3년상을 치렀기 때문에 다시 효종의 상을 당하여서는 몇 년 상을 해야 하는가가 문제가 되었다. 이 문제에 직면하자 서인의 송시열과 송준길은 효종이 차남이므로 원칙대로 당연히 기년상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남인의 허목과 윤휴는 효종이 비록 차남이지만 왕위를 계승하였으므로 장남과 다름없기에 3년상이어야 한다고 반론을 제기했다. 서인과 남인의 복상 논쟁은 극단적인 감정으로 치달았고,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정쟁으로 확대되고 말았다. 그리고 이 정쟁은 지방으로 확대되어 재야 선비들 사이에서도 중요한 쟁점으로 부각되었다.
송시열은 중국의 주례에 따라 부모상에 자녀는 3년복, 자녀 중 장남의 상에는 부모가 3년복을 입고 차남 이하는 1년복을 입는다는 것을 참고하여 기년설(만 1년설)을 주장하였으며, 윤휴가 이의를 제기하자 의례 참최장의 주석을 찾아서 서자는 장자가 될 수 없고 본부인 소생 둘째 아들 이하는 모두 서자로 간주한다는 자료를 증거로 제시하였다.
남인이 그가 왕통과 종통을 나누려 한다고 공세를 가하자 그는 일단 이론으로 접수했다. 남인이 계속 정치 공세를 가하자 의례의 3년조의 소에 가통(家通)을 계승하였더라도 3년 상복을 입지 않는 사유인 사종지설과 체이부정, 정이부체설을 찾아서 제출하였다. 그러나 남인은 송시열을 탄핵하여 역모로 몰아가려다가 실패하였고, 3년설을 주장하며 송시열이 효종의 왕통을 부정한다는 정치 공세성 모함을 하며 송시열을 제거하려 하자 그는 기년설을 관철시키고 《대명률(大明律)》, 《경국대전(經國大典)》 등을 근거로 한 국제기년설(國制朞年說)에 따르도록 한다. 그래서 그의 주장이 채택되자 남인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 사건 이후 송시열은 서인의 최고 지도자로서의 자리를 굳혔다.
이때 남인 허목은 송시열의 주장에 반박하여 왕가의 예는 일반 사대부와 같을수 없다고 항변하였다. 그러나 송시열은 예를 논함에 있어서 성역이 있을 수 없다고 맞받아쳤다.
1660년 4월 호군 윤선도는 허목을 변호하면서 송시열이 종통과 적통을 분리하려 한다며 사형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윤선도는 기년복 주장의 논리상의 오류를 지적하며 송시열, 송준길 등 서인 세력이 복상 문제를 기회로 역모를 도모하고 있다고 몰아 제거하려 했다. 즉, 이종비주(二宗卑主, 종통과 적통을 분리해 임금을 비하시킴)의 논리를 폈던 것이다. 그는 평소 송시열의 체이부정 주장과 서인이 당론으로 소현세자와 민회빈 강씨, 김홍욱 복권운동을 벌이는 점을 근거로 송시열이 효종의 정통성을 부정한다는 근거로 삼기도 했다. 그러나 송시열의 처형 주장은 서인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왔다.
윤선도와 등은 예송 논쟁 때 송시열과 송준길이 효종에게 소현세자빈의 명예회복과 복권을 강력하게 주청했다는 점을 걸고 넘어지며, 그들이 소현세자를 정통으로 생각했다고 공격하고, 윤휴 등도 이에 동조했다. 윤선도는 송시열을 사형에 처하라는 상소를 올렸고, 허목 등도 그가 불경한 의도로 체이부정을 주장했다며 사형에 처할 것을 상소하였다.
소현세자와 소현세자빈은 인조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되어 죽었고, 세자빈을 구명했다가 희생된 김홍욱을 의를 위해 희생된 선비라고 확신하던 송시열과 송준길은 윤선도, 허목, 윤휴와 남인들의 정치공세에 크게 분노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송시열은 남인을 당이 다른 사대부로 인식하였으나, 자신을 사형시키라는 탄핵상소를 접하게 되면서 이후 남인을 위붕으로 규정하고 대립하게 된다.
정쟁으로 비화
1차 예송논쟁은 송시열의 승리로 끝났지만, 예송을 둘러싼 학문적 논쟁이 정권을 사이에 둔 당쟁으로 치닫는 계기가 되었다. 송시열의 주장에 패한 후 남인은 송시열이 종통(왕실)과 적통(적서, 가통)을 구별하려 한다며 송시열의 사상이 불순하다며 공격했다. 이후 윤선도가 송시열의 사형을 주장한 이후, 허목 등이 송시열의 사형을 주장했다. 남인은 그를 사형시켜야 된다며 비난했고, 처음 남인의 주장을 사상의 문제, 학문의 문제, 이념의 차이로 인정하고 접수했던 송시열은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남인의 정치공세에 분노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국구(國舅) 청풍부원군 김우명(金佑明) 일가와 알력이 깊어지고, 현종에 대해 실망하게 된다. 의정부우찬성으로 승진했으나, 우찬성에 재직중이던 1660년 효종의 장지를 잘못 잡았다는 비판이 다시 나타나자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그러나 현종은 눈물을 흘리며 그를 찾았고, 송시열은 현종의 부름을 뿌리치지 못하고 다시 올라온다. 이후 현종 재위 15년간 조정에서 융숭한 예우와 부단한 관직의 제수가 있었지만 사양하고, 야인의 신분으로 자문하였다.
학문 논쟁에서 출발한 예송 논쟁을 남인이 정치공세로 비화, 자신을 사형시키라고 주장하자 송시열의 남인에 대한 반감과 분노는 극에 달하게 되었다. 허목(許穆) 등은 노골적으로 송시열을 사형에 처해야 된다고 주장했고, 송시열은 윤휴(尹鑴)는 참적(讒賊), 적휴((賊鑴), 흑수(黑水)라 불렀고, 허목은 독물(毒物)이라 불렀다.
1666년 12월 세자이사(世子貳師)에 임명되다. 1668년(현종 9년) 2월 의정부우의정에 임명되자 곧 사직하였으나 간곡한 임금의 부름에 따라 상경하였다. 곧 사은숙배하고 부임하였으나, 남인 출신 좌의정 허적(許積)과의 갈등과 불화로 곧 사퇴하고 낙향한다. 1671년 다시 우의정에 임명되자 좌의정 허적과 계속 마찰을 빚었는데도 현종의 간곡한 부탁으로 머물러 있다,
한편 그는 여성에게도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했다. 그는 자신의 며느리와 딸에게도 꾸준히 한글로 간찰을 보내며 연락을 하는 한편 한글로 서신과 간단한 서책을 엮어 교훈으로 삼도록 지도하였다.
1차 예송 논쟁의 후폭풍
윤선도를 옹호했던 권시가 파직되자, 윤선거의 형이자 송시열의 사돈인 윤문거가 사직소를 올렸다. 이 사건의 여파로 교리 이익(李翊) 등이 송시열을 떠나게 되었고, 재야 사림들도 허목과 윤휴 쪽으로 여론이 많이 기울어졌다.
여기에 삼조의 노신이요 판중추를 지낸 조경(趙絅)이 윤선도를 옹호하고 그의 상소를 태워버린 것은 잘못이라는 상소를 올려 이에 가세했다. 조경의 상소는 조정을 둘로 갈라놓았다. 송시열과 이유태, 그리고 부제학 유계 등은 조경을 공격했으나, 영상 정태화와 좌상 심지원(沈之源), 그리고 대사간 조수익(趙壽益) 등은 조경을 옹호했다. 조경은 관직을 내놓고 재야에 물러나 있었는데 반대파들은 그를 삭직해서 내쫓자고 주장하면서 이것이 관철되지 않으면 모두 물러나겠다고 강경하게 대응했다.
송시열은 조경을 삭탈관직하라는 자신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시골로 내려가겠다면서 사직소를 올리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런데 이 사건 이후에 남인 유생들의 윤선도 구명 운동이 계속 일어나 조정에서 끝난 예송 논쟁은 지방 유생들의 대립으로 확산되었다. 결국 이러한 1차 예송 논쟁은 소현세자의 셋째 아들인 석견이 죽자 일단락되고, 서인과 남인의 대립은 송시열과 허적의 정책 대립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남인과의 갈등
1659년 윤휴 등을 경연관의 적임자로 추천한다. 송시열이 윤휴를 천거하자 이후원은 후에 화를 입을 것이라며 윤휴를 추천하지 말라고 조언하였다. 이유태는 윤휴의 사상이 의심스럽다며 그를 추천하는 일은 중단할 것을 권고한다. 이후원과 이유태가 여러 차례 만류했음에도 송시열은 윤휴를 경연관으로서의 적임자라고 계속 추천한다.
효종 다음의 현종(顯宗)도 세자시절의 스승인 그를 신임하여 숭록대부에 특진시키고, 이조 판서에 판의금부사, 지경연사를 겸임시켰다. 이어서 1660년 행의정부좌참찬으로 임명되어 효종의 능지(陵誌)를 지었다. 1661년(현종 2년) 윤선도(尹善道)가 유배된 삼수는 흉년과 기근이 심하여 그의 유배지를 북청으로 옮기는 논의가 있었다. 허목 등은 윤선도의 유배지를 옮겨줄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송시열과 송준길은 윤선도의 유배지를 옮기는 것을 반대하여 허목 등과 언쟁이 벌어졌고, 남인들은 송시열과 송준길이 잔인하다며 성토했다. 그러나 송시열과 송준길의 뜻이 관철되어 윤선도의 유배지는 옮겨지지 못했다.
그뒤 3월 의정부우찬성에 올랐을 때 효종의 장례와 장지(葬地)를 에워싸고 말썽이 일어나 그는 사임하고 충청도 회덕(懷德)으로 돌아갔다.
윤선도(尹善道) 등 남인(南人)의 공격을 받은 것도 그 직후였다. 그해 병조판서, 이조판서, 판중추부사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직하였다. 1662년 금강산을 여행하고 돌아오다가 명나라가 멸망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애통해하였다. 이후 조정에서 여러 번 불렀으나 응하지 않다가 1655년 3월에 송강 정철의 후손과 상의하여 정철의 묘소를 충북 진천으로 이장하는 일을 주관하였다. 그해 원자(元子)의 탄생을 하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허목의 공격을 받았다.
1668년 우의정으로 취임하였으나, 좌의정 허적(許積)과 뜻이 맞지 않아 한때 사임하였다가 1671년 다시 우의정으로 복직하였다. 이어서 허적이 물러가자 1672년 좌의정에 승진하고, 그의 후임으로 김수항(金壽恒)이 우의정이 되었다. 그러나 효종이 돌아갈 때의 대왕대비 복상 문제와 장지 문제는 항상 말썽의 대상이 되어 벼슬길도 평탄치 못하였다.
1669년 윤선거가 그에게 남인과 화해를 청하며 "예론(禮論)에 관계된 윤휴(尹鑴)·허목(許穆) 등과 화해하여 그들이 감복하게 해야 한다." 며 그들을 등용하라고 권고했으나, 그는 거절하였다.
윤휴와의 관계
윤휴는 종래 주자의 해석방법을 배격하고 <중용> <대학> <효경> 등 경전을 독자적으로 해석하여 장구(章句)와 주(註)를 수정, 당시 학계에 큰 파문을 일으키기에 이르렀다. 송시열은 처음에 윤휴의 의견을 이설로서 받아들였다.
윤휴는 주자의 해석을 그르다 하고, 장구를 멋대로 고쳤다. 심지어 "경전의 깊은 뜻을 어찌 주자만 알고 우리는 모른단 말인가?"하는 말로 주자의 아성에 도전하는 듯한 인상까지 풍겼다. 그러나 그의 사상이 과격하다고 본 송시열은 그를 설득하게 된다. 송시열은 윤휴를 직접 찾아가 설득해 보고, 편지로 달래 보기도 했으나 허사였다. 우암은 격분한 나머지 백호를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며 규탄했다.
예송 논쟁이 격화되면서 그의 오랜 친구였던 윤휴는 참최복을 주장했고, 역시 같은 3년복을 주장한 같은 남인인 윤선도의 편을 들었다. 그가 3년복을 지지한 것은 당론때문이었다고 해도, 송시열을 죽이자고 거듭 주장한 윤선도나 허목하고 어울려 지내자 윤휴에 대한 송시열의 감정은 악화되었다. 그는 윤휴와도 오랫동안 서신을 주고 받았는데, 원시유학으로 돌아가자는 의견 중 윤휴가 주자만이 사물의 진리를 알수 있느냐며 항변한 것이 송시열을 심히 불쾌하게 했다. 윤휴가 허목, 윤선도와 함께 서인 및 송시열에 대한 공세를 하자 그는 윤휴에게 절교를 선언한다.
윤휴는 중용의 주석을 놓고 연구를 거듭한 끝에 주자의 주석에 오류가 많다고 선언했다. 윤휴는 서슴없이 자기 주장을 펴며 이를 바로잡겠다고 큰소리쳤다. 이 소리가 송시열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송시열은 고향 회덕에서 가까운 논산군 연산의 황산서원을 찾아갔다. 여기에서 윤선거를 만났다. 송시열은 두 사람이 잘 어울려 지낸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윤휴는 실로 사문(斯文)의 난적(亂適)이오. 혈기를 지닌 사람이면 누구나 그의 죄를 성토해야 하거니와 춘추의 법에 따르면 난적을 다스리는 데에는 반드시 먼저 붙좇는 무리부터 다스리라고 하였으니 참임금이 일어난다면 그대가 마땅히 윤휴보다 먼저 죄를 받을 것이오.
송시열은 "분서갱유(焚書坑儒)의 화가 미칠지라도 윤휴를 배척한 일을 후회하지 않는다.", "만약 (내가) 윤휴의 손에 죽는다면 더 이상 영광이 없다."며 윤휴에 대한 노골적인 적개심을 드러내게 된다. 허목은 유교만이 진실을 알수 있는 방법은 아니라고 하였고, 윤휴는 성리학이나 주자의 주해만이 진실을 바라보는 열쇠는 아니라고 반박하였다. 어느 강의에서 윤휴는 사서육경에서 정주가 달아놓은 주해를 삭제하고 자신의 방법대로 해석했고 이는 송시열의 분노를 가중시켰다.
회니시비
1669년 윤선거가 죽자 남인계 인사들도 윤선거의 빈소를 찾아와 조문했다. 윤증은 부친상에 남인 윤휴(尹鑴)의 조문을 받았는데 이 사실을 전해들은 송시열은 이를 매우 불쾌하게 여겼다.
윤증은 아버지 윤선거가 남긴 편지 중 송시열에게 허목, 윤휴에게 화해의 손길을 먼저 내밀라는 권고를 적은 편지를 스승 송시열에게 전달하였다. 군사부일체의 의리를 확신한 그는 아버지와 절친한 친구이기도 한 스승 간에 비밀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신념하에 송시열에게 아버지 윤선거가 남긴 편지를 전달했다. 윤증의 뜻을 높이 평가한 송시열은 처음에 윤선거의 편지를 읽고도 윤증을 봐서 불쾌감을 숨겼다. 그러나 뒤늦게 그가 윤휴의 조문을 받은 것을 알게 되자 심히 불쾌해 하였다.
2차 예송 논쟁
북벌론의 재개
1672년 동문수학한 친구이자 외6촌 형인 송준길이 사망하자, 3년간 상복을 입었다.
1674년부터 허적과 윤휴 중심으로 북벌론이 계획되었다. 김석주 역시 북벌론 재개에 지지 의사를 표했고 곧 체부(도체찰사부) 부활과 만과 설치, 병력 선발 등의 안이 건의되었다. 유배소에 있으면서도 이 점에는 깊이 공감하고 지원하라는 글을 문하들에게 보낸다.
서인, 남인의 당론이 일치하면서 일시적으로 통합이 가능하였으나 남인의 당수였던 허목이 불가함을 들어 강하게 반대했다. 장정을 많이 징발하면 국가의 일꾼이 없어진다는 것과 청나라는 대국이고 조선은 소국에다가 국론까지 분열되었는데 상대가 가능하냐는 것이었다. 여기에 남인 강경파들이 반대하고 나서면서 북벌론은 다시 묻혀진다. 결국 그는 같은 남인이던 윤휴의 북벌론 주장의 진정성을 의심하게 되었고, 북벌 계획은 수포로 돌아간다.
제2차 예송 논쟁
1673년 허적의 후임으로 의정부좌의정이 된다.
1674년 인선왕후의 별세로 다시 자의대비의 복상 문제가 제기되어 대공설(大功說 : 9개월)을 주장하였으나, 남인 쪽이 내세운 기년설이 채택됨으로써 실각했고, 제1차 복상문제 때 기년설을 채택하게 한 죄로 남인의 공격을 받고 영중추부사 겸 영경연사로 전임되었다. 그러나 남인들의 거듭된 공격으로 1675년 함경남도 덕원(德源)으로 유배되었다가, 그 뒤 여러 곳으로 유배 장소가 옮겨졌다.
유배지에서도 그는 독서와 성리학 연구와 사물의 현상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았고, 사람이 없어도 사람이 있는 것처럼 삼가고 조심하며 한결같이 행동했다. 변방의 오지는 교통편이 불편하여 교육과 문화가 제대로 전해지지 않았으므로, 그는 외지의 백성들에게 공자, 맹자의 가르침, 주자의 가르침과 예학, 인간의 도리를 강의하였다.
학문의 연구는 진리를 찾는 길이라는 신념을 시종일관 유지했다. 그가 유배되는 유배지에는 위리안치의 예에 따라 가시울타리가 쳐져있었음에도, 양반 사대부와 평민들이 찾아와 가르침을 청하였다. 의식있는 선비와 평민들이 찾아와 가르침을 청하면, 거절하지 않고 신분에 구애됨 없이 모두 받아들였다.
숙종의 즉위와 석방
마침내 현종이 돌아가고 숙종 즉위에 이르러 영중추(領中樞)로 복직했다. 1674년 8월 23일 성균관 유생 이심 등은 송시열이 ‘덕을 쌓은 유학의 종주(宿德儒宗)’라면서 “현자(賢者)의 진퇴는 구차스럽게 할 수 없지만 군주의 정성스러운 예절이 어떠한가에도 달려 있다”며 ‘정성스럽게 모셔야 한다’고 상소했다. 같은 날 전 영의정 김수흥과 그를 구원하다 유배형에 처해졌던 간관(諫官)들에 대한 처벌도 모두 무효화되었다.
8월 24일에는 숙종이 가주서(假注書) 이윤(李綸)을 보냈으나 송시열은 이미 서울을 떠나 버린 뒤였다. 이윤이 뒤따라가 국왕의 말을 전했음에도 광주(廣州)를 거쳐 수원으로 가 버렸다. 숙종은 송시열을 거듭 타이르면서 현종의 능 지문(誌文)을 지으라고 명했으나 송시열은 모두 거부했다.
얼마 전 여러 신하들이 득죄(得罪)한 것은 그 근원이 신에게서 나왔습니다. 선왕께서 여러 신하들을 벌할 때 신의 죄상이 여러 번 전교에 나왔지만 특별히 그 성명을 들지 않았을 뿐입니다(『숙종실록』 즉위년 9월 8일).
그뒤 숙종은 그에게 다시한번 승지를 보냈으나 거절한다. 그 대신 그의 문인 이단하에게 현종의 묘지를 짓게 한다.
숙종과의 갈등, 유배
이후 영중추부사를 거쳐 9월 17일 행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전임되었다. 그러나 1675년 1월 함경남도 덕원(德源)에 유배된 이후 이해 6월에 경상도 장기(長鬐)로 이배(移配)되었고, 1677년(숙종 3년) 3월에는 유배지인 경상도 장기에서 부인 이씨(李氏)의 사망 소식을 접했다. 덕원·웅천(熊川)·장기(長鬐)·거제(巨濟)·청풍(淸風) 등지로 귀양살이를 하다가 풀려 나왔다.
1675년 5월 허목은 "죄인에게 형을 더하는 것을 반대하는 차자"(請勿罪人加律箚)를 올려 송시열이 "효종을 마땅히 서지 못할 임금으로 여겨 지존을 헐뜯고 선왕을 비방했다. 마땅히 죽어야 할 죄가 셋이나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허목은 형량을 가중해 송시열을 사형시켜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허목의 상소 이후 남인계열의 성균관유생, 재지인사들에 의해 송시열의 사형를 청하는 상소가 계속 올라왔다.
남인이 예송 논쟁을 빌미로 송시열을 역모로 몰아가려 하자 송시열을 두둔하는 상소가 올라왔는데, 그 중 송시열의 제자이며 대전 회덕의 유생인 송상민이 1679년 음력 3월 12일 예송 논쟁의 전말을 정리하여 책 《석곡봉사》를 지어 올리며 송시열의 처벌이 부당함을 호소하며 송시열의 구명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지만 실패하고, 분노한 숙종은 송상민을 사사했다. 남인들은 다시 송시열을 죽이기 위해 고묘(종묘에 고하는 일)를 계속하여 주장하였다. 한편 송시열이 유배되자 성균관을 중심으로 한 서인계 유생들이 송시열의 차자기년설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그에 대한 구명운동을 벌이기 시작하였다.
유배지에서도 위리안치된 그에게 가르침을 청하는 사대부와 평민들의 방문이 이어졌다. 그는 위리안치의 신분이었으나 가르침을 청하는 이들을 받아들였다. 그는 또한 한자를 모르는 아녀자들을 위해 '사서삼경'과 '주자가례'를 한글로 번역하여 집필하기도 했다.
한편 그는 김수항과 함께 김종직의 포상을 줄곧 주청하여, 1694년(숙종 20년) 영의정으로 추증하게 하였는데 비록 그는 생전에 김종직의 추증포상을 보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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