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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763 : 조선의 역사 305 (제19대 숙종실록 11) 본문
한국의 역사 763 : 조선의 역사 305 (제19대 숙종실록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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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대 숙종실록(1661~1720년, 재위 : 1674년 8월~1720년 6월, 45년 10개월)
송시열, 그는 누구인가? (계속)
생애 후반
윤증과의 갈등
윤선거가 죽자 그의 아들이자 우암의 제자인 윤증은 묘지명을 친히 그에게 부탁하였다. 그러나 그는 윤선거의 피난을 못마땅히 여기며 비꼬았고 이는 회니시비의 원인이 된다. 한편 그는 생전의 윤선거에게 윤휴와 절교할 것을 여러번 권고하였다. 그러나 윤선거는 윤휴와 계속 만났고, 윤휴는 나중에 아버지를 추도하는 제문이라며 윤증에게 제문을 보낸다.
송시열과의 관계상 받지 않으려다 받았지만 제문은 윤선거가 우유부단하다고 조롱하는 내용이었으므로 윤증은 윤휴의 추도사를 받고 탄식했다 한다.
노,소 분당
1680년(숙종 6년) 경신대출척으로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집권하게 되자 1680년 6월 석방되어 귀향하였다. 바로 그해 10월에 중추부영사(中樞府領事) 겸 영경연사로 기용되었다가 1683년(숙종 9년) 고령을 이유로 치사(致仕)하고 벼슬에서 물러나 기로소에 들어갔고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이 무렵 남인에 대한 과격한 처벌을 주장한 김석주(金錫冑), 김익훈 등을 지지하여 많은 비난을 받았는데, 김석주와 김익훈은 허견의 옥사로 남인에게 지나친 처벌을 가한 뒤, 역모를 날조하여 허영, 허새를 역모로 몰아 죽인 뒤 허새의 옥사를 날조한다.
처음에 송시열은 김익훈이 허새의 옥사를 날조하여 죄없는 남인 인사를 죽인 소식을 듣고 처벌에 찬성하였으나, 김석주의 설득으로 의견을 번복하고 김익훈의 편을 든다. 이때 서인 내부의 소장파와 청년층이 그에게 실망하여 돌아섰다. 그 중에서도 제자였던 윤증(尹拯)과의 감정 대립이 악화되어 마침내 서인은 윤증 등 소장파를 중심으로 한 소론과 송시열을 영수로 한 노장파인 노론으로 다시 분열되었다.
김익훈이 남인을 일망타진할 목적으로 허영과 허새의 역모 사건을 날조했다가 의금부에 투옥되자 처음에 그는 그런 자는 죽어 마땅하다며 분노하였으나, 김석주 등의 말을 듣고는 머뭇거렸다. 한성부 입경 초 그는 김익훈의 처벌을 주저하다가 태조 이성계의 존호 추상 문제를 먼저 언급하며 유보를 보이다가 그뒤 신념을 바꾸어 김익훈을 옹호했다. 그가 자신의 스승인 김장생의 후손이니 목숨만은 구명해달라는 것이었다. 김익훈의 처벌을 원하던 서인 내 청년층은 실망, 반발하게 된다. 그후 정계에서 은퇴하여 청주(淸州)의 화양동(華陽洞)에 은거하였다.
우선 그의 지지자였던 김수항의 처남 나량좌가 실망했다는 발언과 함께 그에게 등을 돌렸고, 윤증, 박세당을 비롯하여 서인 중진들 중에도 등을 돌리는 이가 나타났다.
만년
그 후 금강산 지방을 여행하고 사표를 낸 후로는 다시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충청도 청주 화양동에서 은거 생활을 하였는데, 1688년 희빈 장씨가 숙종의 아들을 낳자 1689년 1월 이를 원자로 정하는 것을 반대하여 숙종의 눈밖에 났다. 또한 희빈 장씨의 아들 왕자 균이 왕세자에 책봉되자 송나라 철종의 고사를 들어 이를 시기상조라 하여 반대하는 상소를 했다가 숙종의 비위에 거슬리는 대목이 있어 숙종은 크게 노하여 그의 모든 관작을 박탈하였다. 이때 남인들은 다시 그를 죽여야 된다는 상소를 올리기 시작했다.
이에 의론이 분분하여 마침내 제주도로 귀양 보냈다. 다시 불러다가 심문하자고 주장하는 자들이 우세하니 숙종은 또 이를 허락하였다. 제주도에서 나온 그는 광양에 이르러 수제자인 권상하 등이 영접하였다. 육지에 당도한 송시열은 자신은 올바른 길을 가려다가 죽는 것이니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밝혔고 수많은 문도들이 눈물을 흘리며 그가 한성부까지 상경하는 길을 시종하였다. 그는 신발이나 우마를 타지 않고 한성부까지 걸어서 도보로 올라왔다.
그가 전라남도 장성군을 지날 무렵 김수항의 아들들과 측근들이 그에게 찾아왔다. 이미 유배지에서 사약을 받고 죽은 김수항이 유언을 남겨 '우암 선생이 나보다 나중에 돌아가시게 되면 내 묘지명과 비문을 꼭 우암 선생에게 부탁해달라'고 했고, 그 유언을 김수항의 사람들에게서 전해듣자 송시열은 즉시 묘비문을 써내려갔다. 자신도 죽음이 임박했다 하여 대충 쓰지 않고 몇시간 동안 심혈을 기울인 끝에 김수항은 도리와 정도를 지키려 했고 온화한 손길을 내밀었는데 사도(邪道)에 물든 자들은 그 손마저 거절하고 그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내용이었다.
김수항의 아들과 측근에게 묘비문을 지어서 준 뒤 다시 발걸음을 계속하여 전라북도 정읍군에 도달하였다. 그러나 그가 붙들려서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그를 국문시켰을 때의 파장을 우려한 숙종은 그에게 사약을 내린다.
그에게는 수암 권상하, 이단하, 민정중, 민시중, 김수항, 명재 윤증, 민유중, 김창협(金昌協), 김익훈, 송규렴, 직재 이기홍, 장암 정호 등의 문인들이 있었고 900여 명의 문하생을 배출하였다. 그 중에서도 권상하는 한때 그의 수제자로 손꼽히던 명재 윤증이 그와 등을 돌린 뒤 그의 수제자로 인정받았다.
사사
남인은 그를 한성부로 압송해 국문해야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남인 정승인 의정부영의정 권대운(權大運) 등이 ‘굳이 국문할 필요가 없다’면서 ‘성상께서 참작해 처리하라’고 권하자 숙종은 금부도사가 만나는 곳에서 사사하라고 명한 것이다.
9년 전 허적과 윤휴의 사형을 남인들이 정치보복으로 여긴 것처럼 김수항과 송시열의 사형 역시 서인들은 정치보복으로 여겼다. 지도자를 잃은 남인이었지만 송시열에 대한 원한과 복수심은 계속되었다. 그는 의금부에 가서 자신의 소신을 밝히고 죽으리라고 장담하였다.
국문 받기 위해 상경하던 6월 3일 정읍에서 만난 금부도사가 건넨 사약을 받고 최후를 맞이한다. 제주도를 나와 정읍에 이르자 이미 사약(賜藥)이 내렸으므로 제자 권상하(權尙夏)·김만준(金萬埈)의 손을 붙잡고 뒷일을 부탁한 후 도성에 3배를 올린 뒤 사약을 받고 최후를 맞이한다. 숱한 논란의 중심에 있던 87세의 노구(老軀)는 결국 사형으로 끝났다. 송시열은 임종 때 문인 권상하(權尙夏)의 손을 잡고 “학문은 마땅히 주자(朱子)를 주(主)로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곧이어 권상하에게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서적과 의복을 그에게 유품으로 물려주었다.
성격이 과격하여 정적(政敵)을 많이 가졌으나, 솔직담백하였고, 그의 문하에서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으며 글씨에도 일가를 이루었다. 이후 1694년 갑술옥사(甲戌獄事) 뒤에 신원(伸寃)되었다.
사후
그 후 5년 만에 다시 서인이 집권하자 신원(伸寃)되어 조정에서 관작을 복구하고, 1694년 수원(水原), 정읍(井邑), 충주(忠州) 등에 그를 제향하는 서원이 건립되었다. 그뒤 문정(文正)의 시호를 내렸다. 1697년 송시열, 송상민, 권상하의 위패를 모신 남간사를 건립했다.
생전의 행적에 대해서 칭송과 비방이 엇갈리지만 서인 정권 하에서 1744년 영조(英祖)에 의해 문묘(文廟)에 배향되고, 세손 시절부터 그를 존경하던 정조(正祖)에 의해 효종(孝宗)의 묘정에 추향(追享)되었다. 또한 정조는 그를 공자, 맹자, 순자, 한비자, 주자에 버금가는 송자(宋子), 송부자(宋夫子)로 추대하고 국가의 스승으로 선포하였다. 대전 광역시 동구 소제동에 있던 우암 별당 기국정을 1926년 남간정사에 옮겼다. 대전시는 남간정사 옆에 우암사적 공원을 조성하여 공원 안에 남간사를 새로 지어 남간사의 위패 등을 모시고 있다. 장판각에 [송자대전] 목판이 보관되었다.
1756년(영조 32) 2월 23일 왕명으로 증(贈)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그해 송준길과 함께 성균관 문묘에 종사되었다.
후일 송시열을 높이 평가한 정조가 친히 편찬한 앙현전심록에서 정조는 송시열을 마침내 주자에 비견될만한 성현의 반열에 올랐다. 또한 송시열을 비난하는 것은 공자와 맹자를 비난하는 것으로 못박아 그에 대한 비판을 금지했다. 1863년 이전까지 송시열의 주장에 공식으로 이의를 제기할수 없었다.
이후 송시열의 제자와 문도들은 송시열을 송자(宋子)라 부르며 공식화했지만 영남의 남인들은 이의를 제기하였다.
현대
일제 강점기 당시 당쟁을 일으킨 인물의 한사람으로 매도되고, 북벌론은 공상으로 취급되어 비판받아오다가 해방 이후 1970년대부터 재평가, 재조명되기 시작하였다. 1988년 송시열의 문집인 송자대전(宋子大全)이 국사편찬위원회 주도로 한글로 번역되어 출간했다.
2007년에는 충북대학교에 우암연구소가 설립되었다.
평가
일제는 조선조의 정통성을 훼손하기 위해 우암 폄하작업을 전개했다. 이로 인해 우암은 '사대주의의 표상', '수구보수 사상의 원조', '사색당쟁의 원인 제공자' 등으로 잘못 인식돼왔다. 이것은 우암의 사상과 기호학 전반에 관한 체계적이고 심층적인 연구를 부진하게 만든 원인이 되기도 했다.
긍정적 평가
송시열은 성격이 과격하여 정치적인 적을 많이 두었으나, 학식이 뛰어나 문하에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다. 조선 국왕 효종, 현종 두 임금이 그의 제자였으며, 송상민, 송상기, 민정중, 김만기, 김만중, 이경화, 윤증, 민진원, 김익훈 등은 모두 그의 제자들이었다. 귀양지에서도 끊임없이 후학 양성과 학문 연구에 몰두하여 《주자대전차의》 등과 같은 저서를 많이 집필하였다. 송시열이 사망한 지 5년 후에 문묘·효종묘를 비롯하여 충청북도 청주의 화양서원, 경기도 여주의 대로사, 수원의 매곡서원 등 전국 각지의 많은 서원에 배향되었다.
우암은 율곡과 사계 김장생(金長生)의 학맥을 계승한 기호 사림의 중추적 인물이면서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학자이자 사상가, 정치가였다.
임동철 충북대학교 총장은 "옥천에서 출생한 우암 선생은 우리나라 성리학의 대표 학자임에도 불구하고 학계에서 그에 걸맞은 평가를 받지 못한 측면이 있다"며 "충북의 화양동을 중심으로 활동한 우암의 학문을 연구하는 일은 지역사회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전통의 맥을 잇는 차원에서 매우 바람직한 일"이라고 평가했다.
부정적 평가
송시열의 문집인 <송자대전>이나 <효종실록> 등을 보아도 송시열이 북벌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이나 준비에 대해 기술한 것이나 조정에 건의한 사례를 단 한 건도 찾아볼 수 없다는 비판도 있다. 그에 의하면 그는 단지 북벌의 대의만 주장했을 뿐이다. 당시 서인의 영수인 송시열이 이런 주장을 한 것은 실제로 북벌에 대한 의지가 있어서가 아니라, 자신들이 불러들인 전쟁인 병자호란(조청전쟁)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을 뿐이라는 시각이 있다.
또한 송시열은 효종과 더불어 북벌 추진에 뛰어든 사람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는 후세 그의 제자들이 합리화한 것이고 사실은 북벌의 반대자였다. 송시열은 북벌 문제로 효종과 여러 차례 설전을 벌여야 했고, 급기야 효종은 그의 지지를 얻기 위해 병조의 벼슬을 내렸다. 하지만 송시열의 위선적인 태도는 변하지 않아 고민하던 중, 때마침 효종이 급사하면서 일단락되었던 것이다.
송시열과 허목이 자의대비의 복상을 1년상을 입느냐, 3년상을 입느냐는 상복문제로 피 터지는 예송논쟁 벌여 주도권 싸움을 벌인 것은 예학의 한계를 보여줌과 동시에 성리학이란 학문을 내세워 기득권 싸움을 했다는 증명밖에 되지 못한다.는 비판도 있다.
사상과 신념
그는 충과 의를 인간의 최고의 덕목으로 생각하였다. 또한 그는 윤원형의 첩 정난정이 정실부인으로 승격되었을 때, 한번도 찾아가지 않은 자신의 친할머니 이씨 부인을 높이 평가했다.
그는 자신의 서모와 서자, 서녀, 서얼 출신 친족, 친족의 서자, 서녀 등에게도 예의를 갖추고 깎듯하게 대하였다. 이는 서자와 서얼을 천대하던 다른 조선의 일반적인 사대부와 달랐다. 또한 자신의 부인 한산이씨에게도 깎듯이 존댓말을 쓰고, 출타와 복귀 시 부인에게 인사 또는 맞절을 하였다. 이 역시 아내를 땅이나 아래로 내려다 보는 다른 조선의 사대부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이괄 때문에 역모로 몰릴 뻔한 서모를 배려하여 서모의 친정을 대전으로 피신시키고 그들을 돌봐주기도 했다.
이기 일원론
그는 이기 논쟁에서 이와 기는 하나라고 하는 이기일원론을 계승하였다. 주자학(朱子學)의 대가로서 이이(李珥)의 학통을 계승하여 기호학파(畿湖學派)의 주류를 이루었으며 이황(李滉)의 이원론적(二元論的)인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배격하고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지지, 사단칠정(四端七情)이 모두 이(理)라 하여 이와 기는 하나라는 일원론적(一元論的) 사상을 발전시켰다.
산림으로 이름이 알려진 이후 그의 견해를 시험하고자 많은 문인들이 이황과 이이, 조식 중 누구의 사상이 정통이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때마다 그는 '주자의 뜻을 정확히 계승하는 학자를 나는 정통으로 본다' 하며 학문 연구에 있어서 당론이나 당색에 구애받지 않음을 스스로 입증하기도 했다. 그러나 윤선도가 그가 효종의 정통성을 부인했다는 상소와 허목이 그를 사형에 처하자는 상소를 연이어 올리면서 그의 태도는 경직된다. 그럼에도 당색을 떠나 주자의 학설을 올바르게 계승한 학자만이 정통이라는 신념은 변하지 않는다.
주자가례
그가 예송 논쟁에서 1년을 고집한 것은 주자가례와 주희는 장남 이외의 모든 자녀를 서자, 뭇 서(庶)로 해석하여 장남 이외의 모든 아들들은 중자로 간주하여 1년복을 입어야 된다고 봤다. 그러나 남인은 이를 송시열이 다른 마음을 먹은 것이라고 공세했다.
처음 윤휴의 이론을 이론으로 받아들이고 반론을 제기했으나, 윤선도 등이 정치공세를 하면서 이는 학문적 논쟁에서 정쟁으로 변질되기에 이른다.
윤선도와 허목이 송시열을 사형시켜야 된다고 주장하였고, 윤선도는 자신이 가르친 효종의 정통성을 송시열 자신이 부정했다는 인신공격성 비난을 하여 송시열을 분노하게 했다. 제1차 예송 논쟁에서 패한 이후 남인들이 송시열의 사형을 주장하면서 그는 남인에 대한 분노와 증오, 편견을 갖게 되었고, 윤휴는 송시열의 사형을 주장하지는 않았으나, 주자학만이 진실이 아니며 주자만이 진리를 아느냐고 주장한데 이어 윤선도, 허목을 옹호하여, 윤휴에 대한 개인적인 미움과 증오를 싹틔우게 되었다.
사회 문제
송시열은 유교 예법을 고수하여 매우 보수적이라고 평가를 받고 있지만 실제 사회문제에도 관심을 가지고 여러 대안을 제시하였다. 양반에게도 군포를 부과하는 호포제의 실시를 주장하였다. 양반의 노비증식을 억제하고 양민이 노비화되는 것을 막는 노비종모법을 옹호하였다. 평안도와 함경도의 인재의 등용하고 서얼에게 관직을 줄 것을 주장하고, 절개를 지킬 것을 지나치게 강요하는 것은 비인간적이라고 하여 양반부녀자들의 개가와 재혼을 허용할 것을 주장하였다.
또한 양반들이 군비부담을 회피하자 양반들의 군비 부담을 연구했으나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판단, 양민들의 군비부담을 줄이는 호포제의 실시하는 것이었다. 군포를 납부하면서 납부 수를 대장에 기록, 문서화하여 군비 부담의 비리, 폐단을 없앴다.
정치적 대의
그는 반역과 배신, 훼절을 미워하였고 경멸했다. 의리를 저버리는 것, 배신하는 것, 절개를 훼손하는 것을 가장 수치스럽게 여겼다. 그가 자신의 친구인 윤선거를 경멸했던 것은 그가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에서 혼자 살아나온 것을 의리를 저버린 것, 배신행위 또는 훼절하여 절개를 더럽힌 것으로 인식한 것이 이유였다.
소현세자빈 강씨의 복권 여론을 조성했고, 사육신의 신원과 명예 회복, 생육신의 포상을 주장하였으며, 노산대군과 여산군부인을 다시 왕과 왕비로 복위시켜야 된다고 주장했다. 이때 그는 노산대군도 옳고, 세조도 옳다는 유연한 의견을 개진하기도 했다. 노산대군은 세종의 적장손이고 문종의 적장자이니 옳고, 세조는 세종대왕의 차남으로 왕통을 이었으니 옳다는 것이었다. 일부 남인들은 여기서 다시 그가 세조의 정통을 부정한다는 비판을 시도했으나 남인 당내에서조차 공감대를 얻지 못하면서 묻혀지고 만다.
그는 자신의 유배를 순교라고 확신했다. 자손들과 질손들에게 남긴 유서에서 '맹자와 주자가 사설(邪說)을 물리치되 죽도록 미워하기를 마치 원수처럼 여기는 데에 이르렀던 것이다. 처음에는 털끝만큼의 어긋난 것도 나중에는 천리 거리만큼 어긋나게 되는 것인데, 더구나 처음부터 크게 어긋난 것이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느냐. 그 사람[渠 윤증을 가리킴]인들 종말이 이 지경에 이를 줄이야 어찌 알았겠느냐. 애석하기 그지없다. 나는 변변치 못한 하찮은 사람으로 망녕되이 맹자와 주자가 사설(邪說)을 배척한 일을 본받아, 난신적자(亂臣賊子)는 누구든지 그를 죄줄 수 있다는 교훈을 독신(篤信)한 소치로 결국 유배되는 참사(慘事)를 당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나는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유배와 1689년 사형에 이르러서는 그는 자신의 사형을 고통이라 생각하지 않고 의를 위한 당연한 순교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신덕왕후 복권 운동 주관
1669년(현종 10년) 우암 송시열에 의해 신덕왕후 복위가 건의되었다. 서인은 당론으로써 신덕왕후를 복권시켜야 된다는 여론을 조성하였다.
" | 태종대왕께서는 성대한 덕과 순일한 효성이 천고에 탁월하시니 요임금이 전하듯, 순임금이 이어받듯 질서가 정연하다고 사변에 대처할 방법이 없었으나 유독 신덕왕후에 대해서만 능침의 의절에 손상이 있고 배향하는 예가 오래도록 결손되었습니다. 이는 당시의 예관이 예의 참뜻을 몰라 이렇게 된 것에 불과합니다. | " |
형식은 송시열의 상소를 현종이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태종의 잘못된 조치를 바로잡는다고 할 수 없으니 모든 죄는 당시 태종을 보필했던 신하가 뒤집어 쓸 수 밖에 없었다. 서인들은 만장일치로 지지를 보냈고, 남인이나 기타 군소집단도 반대할 수가 없게 됐다. 이로써 신덕왕후는 복위되어 종묘에 모셔지고 정릉은 왕릉으로서의 상설을 갖추게 되었다.
단종, 사육신 복권 운동 주관
1680년대에는 송시열을 중심으로 단종 복위 여론이 조성되었다. 노산군을 추복하는 근거로 노산군이 세조에게 양위하였고, 세조가 노산군을 상왕으로 모신 것이며 쫓아낸 것은 아니다. 또한 단종을 죽게 한 것도 세조의 본심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세조가 사육신을 “당대에는 난신(亂臣)이나 후세에는 충신(忠臣)”이라한 것 역시 단종 복위의 근거로 제시하였다.
결국 송시열의 그와 같은 노력으로 1691년 사육신은 충절의 상징으로 복권되고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 직후에는 노산군이 대군으로 승격되었다가 곧 추복되었다. 노산군은 묘호를 단종(端宗)이라 하고, 능호를 장릉(莊陵)이라 했다.
만동묘 설립의 취지
우암은 1689년에 제주로 유배의 길을 가면서 수암 권상하에게 화양동에 만동묘를 세울 것을 부탁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 편지의 마지막에 '만동묘에서 명나라 신종(神宗)과 의종(毅宗)을 제사지내는 이유를 이야기한다.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준 신종에게는 멸망하는 나라를 지켜준 은혜에 보답하는 의리(義理)를 다하는 것이요, 의종에게는 나라가 망하면 국왕이 죽음으로써 책임을 져야 한다는 정도(正道)를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하였다.
북벌론
명나라를 정벌한 청나라를 원수로 보았고, 이는 그가 죽을때까지 신념으로 간직하고 있었다. 수제자인 권상하에게는 명나라 신종과 의종의 위패를 제사지내고, 중국의 은혜를 영원히 기억하도록 유지를 내려 만동묘와 화양동 서원을 건립케 하였다.
명나라를 정벌한 만주족(여진족)을 원수로 여겼으며, 병자호란과 정묘호란으로 국토가 유린당하고 백성들이 도륙되자 청나라에 대한 원한을 극대화시켰고, 그는 척화론과 북벌론을 주장하였다. 그는 공공연히 북벌론을 주장했고, 인조 때의 친청파 김자점은 이를 문제삼아 그를 제거하려 했다.
효종과 함께 병력 양성과 북벌을 준비했으나, 효종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예송 논쟁에 휘말려 북벌론을 실행시키지 못했다. 그러나 김석주가 북벌론을 주장한 윤휴의 강군 양성론과, 윤휴의 강군 양성설을 받아들여 도체찰사부를 부활시킨 허적을 역모로 엮여서 죽일 때 그는 입을 다물었다. 이후 북벌론을 공식적으로 주장하지는 않았으나 그는 임종때까지 북벌에 대한 신념을 유지했다. 한편 북벌론을 공리공담이라 주장하는 허목을 김자점과 동류라며 공격하였다.
인간관
그는 자신을 찾아오는 이에게는 누구에게나 깎듯이 대하였고, 사람을 만날 때는 누구에게나 열린 자세로 대하였다. 신분에 구애됨 없이 누구에게나 편견 없고, 사심없이 대하였다. 그러나 성리학이나 주자, 공자와 맹자를 비판하거나 유교사상을 부정하는 자는 원수로 여기고 거침없이 공격하고 규탄하였다.
그는 예의와 염치, 인간의 도리를 중요한 덕목으로 여겼고, 이를 평생 신념으로 삼았다. 그는 예의와 염치, 인간의 도리를 알기 위해서는 배움, 교육이 중요했고, 예의와 염치, 인간의 도리를 밝히는 길이 성리학에 있다고 봤다.
그는 한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려면 자신의 몫을 다해야 된다고 봤고, 그 자신의 의무를 다 하는 방법 역시 성리학에 있다. 그는 양반 사대부에서부터 평민, 당시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하던 상민들과 여성들에게까지도 성리학을 가르쳤다. 배움을 구하는 자에게는 신분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문하에 출입시켜 가르쳤다. 그가 유배된 뒤에는 유배지까지 그에게 배움을 청하러 문도들이 따라왔다.
율곡 이이에 대한 관점
인조 반정 이후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을 문묘에 종사하는 일을 두고 서인과 남인 간에 갈등이 벌어졌다. 인조 즉위 초부터 시종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의 문묘 종사를 놓고 논란이 발생했다. 남인 중에서 율곡과 우계의 문묘 종사를 반대한 핵심 인물들은 미수 허목과 고산 윤선도, 백호 윤휴 등이었다. 그러나 허목과 윤휴가 율곡 이이를 불교 승려이자 노장 사상을 가진 위학자로 몰고 가자 송시열은 이이를 두둔하며 그들에 대한 감정적인 비판을 하게 된다.
실제로 이이는 19세에 어머니 신사임당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충격을 받고 금강산에 들어가 1년간 승려로 생활하였다. 그러나 후에 그의 정적들은 이를 두고 그가 학자의 탈을 쓴 중(불교 승려)이라고 비난하였다. 그래서 문묘종사 논쟁이 벌어지자 허목은 이이를 유학자의 옷을 입은 불교 승려라고 비판했던 것이며 윤휴도 허목과 같은 시각에서 이이를 비판했다.
허목이 이이를 유학자의 옷을 입은 불교 승려라고 비판했던 것은 이이의 학문이 유교가 아닌 불교에 바탕을 두었다는 것이었다.
학문에는 차례가 있고 공(功)에는 순서가 있다. 율곡은 한갓 큰 것을 이기려는 굉장한 논의를 갖고서 자신이 (싸움에서) 이기기만을 힘썼다. 그는 '먼저 중요한 길을 찾아 문정(門庭)을 훤히 연 뒤에라야 정해진 방향이 없이 널리 배울 수가 있다'라고 하였다. 이는 도(道)를 보는 것을 먼저 하고 학문을 뒤로 돌린 것으로 학문 방법을 거꾸로 한 것이다. 이는 불교의 돈오법(頓悟法)이지 공자의 가르침이 아니다.
윤휴도 허목과 같은 시각에서 이이를 비판했다.
울곡 이이가 성학집요(聖學輯要) 서문에서 말하기를 '먼저 요로(要路)를 찾아서 문정(門庭)을 확실히 연 후에 정해진 방향 없이 널리 배우라'고 했는데, 이 말은 크게 잘못되었다. ...(이하 중략)... 율곡의 말처럼 한다면 근본을 세움이 확실하지 못하고 방향이 정해지기도 전에 요로와 문정을 얻게 되는 것이니 이 무슨 말인가? ...(이하 중략)... 이는 불가(佛家)의 거꾸로 배우는 방법이지 공자의 가르침이 절대 아니다.
허목과 윤휴에 의하면 율곡은 유학자가 아니라 유학자의 옷을 입은 불교 승려에 불과한데 승려를 어떻게 문묘에 종사하느냐는 비난인 셈이었다. 허목의 비판은 결국 율곡 이이의 출가 경력을 정치적으로 이용해 그의 문묘종사를 막으려는 당파적 비판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남인 중에서 율곡과 우계의 문묘 종사를 반대한 핵심 인물들은 미수 허목과 고산 윤선도, 백호 윤휴 등이었다. 어린 시절 한때의 방황을 이들은 이해하지 않았다. 허목, 윤휴 등이 이율곡을 학자가 아니라 불교 승려라고 몰고가자 분노한 송시열은 허목과 윤휴를 이단 사이비라고 규탄하였고, 이들에 대한 감정적인 분노를 품게 된다.
유배, 사사에 대한 관점
송시열 자신은 자신의 사약을 순교로 해석했고, 유배생활을 정도를 걷는 자에 대한 사도의 탄압으로 여겼다. 이는 그의 제자들에게도 그대로 전해졌다. 송시열의 사후 그의 제자였던 권상하 역시 송시열의 죽음을 순교로 해석하였다.
권상하는 "윤증이 (사사로운 마음으로) 윤휴, 허목의 무리와 함께 조작한 것"이라며 윤증과 허목, 윤휴가 술수를 꾸며 송시열을 죽게 했다고 굳게 확신하였다. 권상하는 송시열의 묘비문을 쓰면서 "윤증이 (사사로운 마음으로) 윤휴, 허목의 무리와 함께 조작한 것"이라는 글귀가 문제시되어 다시 노론, 소론간의 갈등을 유발하기도 했다.
윤휴와의 관계
송시열은 윤휴와 어릴 적부터 가까이 지낸 사이이자 친구였다. 예송 논쟁 초반까지만 해도 송시열과 윤휴는 서로를 당이 다른 양반 정도로 인정하였다. 그러나 예송 논쟁이 터지면서 둘은 원수로 돌변한다.
송시열과 윤휴는 비록 멀지만은 같은 문중과 혼인한 인척관계였다. 송시열의 증조부였던 송구수(宋龜壽)는 윤휴의 조상인 윤형(尹衡)과 함께 고성이씨(固城李氏) 이원(李原)의 후손이었던 군수(郡守) 이구연(李龜淵)의 딸들과 결혼하여 동서지간이었다. 송시열과 윤휴는 같은 진외가를 공유하고 있는 사이였고 대대로 먼 인척 관계를 유지해 왔고, 두 집안 모두 오래전부터 친밀한 사이었다. 그런데 윤휴가 당시의 주자학에 대한 비판적 견지를 내 비치자 주자(朱子)의 열렬한 숭모자인 송시열은 이를 대단히 불쾌하게 생각했다. 윤휴가 또 윤선거, 허목 등과 같이 활동하면서 양자의 관계는 틀어지고, 윤휴에게 적개심을 품게 된다.
윤선도는 송시열이 종통과 적통을 부정했다는 비판을 하여, 효종의 스승이자 북벌론의 기수인 송시열을 인신공격했다. 이후 윤선도와 허목의 송시열 사형 주장과 남인의 거듭된 공격으로 감정이 악화되었고, 윤휴가 윤선도와 허목을 옹호하면서, 절교하게 된다. 이때 그는 윤휴가 성리학과 주자가례, 주자의 사상을 비판한 바 있었으므로 학문상 이유로 절교(絶交)를 선언하였다.
절교 이후 그는 윤휴를 가리킬 때 이름이나 성 대신 참적, 적휴, 흑수(黑水) 등으로 불렀다.
윤선거, 윤증 부자와의 관계
윤증(尹拯)과도 인척관계였다. 송시열은 윤증의 아버지인 윤선거와 개인적으로 친구였다. 그러나 병자호란 당시 윤선거 혼자 빠져나온 강화도 사건을 계기로 윤선거를 경멸하면서 윤선거와의 관계가 멀어진다. 이는 윤증과의 관계 악화로까지 이어져 회니논쟁과 노론, 소론 분당의 원인이 된다.
윤증은 송시열의 제자였고, 윤선거는 송시열의 어릴 적부터 친구였다. 그런데 윤선거의 할아버지 윤창세(尹昌世)는 윤황(尹煌)과 윤전(尹烇) 형제와 딸 1명을 두었는데, 윤창세의 사위인 은진송씨 송희조(宋熙祚)는 송시열의 5촌 당숙이 된다. 또, 윤창세의 아들 윤전의 딸이 사촌 형 송시형(宋時瑩)과 결혼한다. 송시열의 사촌 형수는 윤선거의 사촌 누이가 되고, 송시열의 당숙모는 윤선거의 고모였다.
팔송 윤황(尹煌)은 윤문거(尹文擧)와 윤선거 형제를 두는데, 윤문거의 아들 윤박(尹搏)이 송시열의 딸과 결혼하였다. 윤선거의 손자이자 윤증의 아들 윤행교(尹行敎)는 다시 은진송씨 송기후(宋基厚)의 딸과 결혼하는데, 송기후는 송시열의 5촌 조카이자, 사촌동생 송시염(宋時琰)의 아들이다.
여성 교육
유교적 이념사회에서 남자는 하늘이고 여자는 땅, 남자(남편)를 여자(아내)의 상위에 두었고, 부부관계도 군신관계, 주종관계와 같은 수직적인 관계로 해석했다. 따라서 여성들에 대한 차별이 정당화되었다.
그러나 송시열은 여성들에게도 인간답게 살게 해야 되고, 인간답게 살려면 자기의 몫을 다해야 되며, 예의와 염치와 도리를 알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에 따라 우암은 여성들에게도 같이 문자(천자문)를 가르치고, 효와 충과 신의를 강조하였으며, 사자소학에서부터 사서 육경을 가르쳤다. 배움이 짧아서 혹은 오래 한학을 교육받지 못하여 한문의 어려운 뜻을 해석하지 못하는 여성들을 배려한 그는 사서 육경을 한글로 번역하여 책을 만들어 여성들에게 가르치기도 했다.
1671년 송시열이 맏 손자 며느리인 박씨에게 써 준 글과 시집간 딸에게 한글로 손수 지어준 계녀서를 보냈고, 출가녀들에게도 여성으로서 지켜야 될 의무를 서신과 서책 등으로 손수 써서 보냈다.
부부관계조차 군신관계, 상하, 주종관계로 해석하여 여성들을 일종의 불완전한 존재로 해석하던 사회에서 세인들은 여성에게 교육을 시키는 것을 부정적으로 봤으나, 그의 앞에서 한마디 언급조차 하지 못했다.
정조의 각별한 존경심
정조는 평소 우암 시열을 존경하여 그의 영정에다가 친히 어제시를 남겼다. 이는 송시열 생전인 1683년에 작성된 영정들 중 송시열 자신이 자신 스스로를 경계하는 사자성어를 쓴 영정의 중앙부 상단에 친필로 기입하였다. 즉위 후 정조는 송시열을 송자(宋子), 송부자(宋夫子)라 하여 국가의 스승으로 추대하고 송시열의 문집과 자료를 모아 국비를 들여 송자대전으로 간행하였다.후에 정조가 송시열을 추모하며 지은 어제시 한수가 전한다. 이 시에서 정조는 송시열이 아니면 주자와 공자를 알수 없다고 표현하여 송시열이 아니고서는 바른 학문을 알수 없다고 평하기도 했다.
송시열의 문하 사람인 김종수 (1728년)가 세손 시절의 정조의 스승으로 그를 지도하였고, 그로인해 정조의 송시열에 대한 숭배사상이 각인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또 김종수는 노론의 당론에 저항하여 세손이었던 그를 보호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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