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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761 : 조선의 역사 303 (제19대 숙종실록 9) 본문
한국의 역사 761 : 조선의 역사 303 (제19대 숙종실록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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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대 숙종실록(1661~1720년, 재위 : 1674년 8월~1720년 6월, 45년 10개월)
4. 숙종의 환국정치로 인해 계속되는 정치 옥사(계속)
갑술환국과 무고의 옥
갑술환국은 기사환국으로 정권을 잡은 남인들이 인현왕후 민씨의 복위 문제와 관련하여 대거 축출당하고 다시 서인이 집권한 사건이다. 그리고 무고의 옥은 취선당에서 마련된 신당 문제로 희빈 장씨가 죽은 사건인데, 이 일로 그녀를 지지하고 있던 소론측의 정치적 입지가 약해지고 나아가 남인들이 정계에서 완전히 거세당하게 된다.
1694년 노론계의 김춘택과 소론계의 한중혁 등은 폐비 민씨의 복위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이들이 민씨 복위 운동을 전개한 것은 당시 숙종이 민씨를 폐위시킨 것을 후회하고 있다는 정보에 따른 것이다.
그들이 민씨의 복위를 꾀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남인의 민암, 이의정 등은 이 사건을 계기로 서인들을 완전히 몰아내기 위해 계획을 세운다. 그래서 복위운동 주모자들을 심문하여 그 사실을 파악한 다음 숙종에게 보고하려 했다.
그러나 숙종은 폐비사건 이후 중전 장씨와 연합한 남인 세력의 힘이 지나치게 팽창되고 있음을 염려하고 있었고, 장씨에 대한 애정이 식고 숙빈 최씨에게 애정을 쏟고 있는 중이었다. 그 때문에 대신들에게 민씨를 폐위한 것을 후회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은근히 주고 있었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서인측이 민씨 복위 운동을 꾀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자 오히려 서인을 제거하려 한 남인들을 궁지로 몰았다. 그리고 기사환국 당시에 서인에 대한 국문을 주관하던 민암과 판의금 부사 유명현 등을 제거해버렸다. 제거된 남인들이 유배당하고, 훈련청과 어영청의 지휘관도 소론의 신여철, 윤지완 등도 교체되었다.
그렇게 시작된 소론의 환국 도모는 대체로 두 방향에서 동시에 진행되고 있었다. 하나는 소론 쪽의 한중혁이 집권 남인측의 막후 실력자이며 총융사인 장희재(왕비 장씨의 오빠)와 동평군 항에게 뇌물을 주고, "폐비 민씨를 복위시키되 별궁에 거처하도록 한다."는 내부 계획을 달성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남인들과 정면 충돌을 피하는 동시에 세력을 잃은 서인들의 정계 진출을 도모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남인과 왕비 장씨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리는 것이었는데, 그들은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 당시 숙종이 총애하던 숙빈 최씨와 손을 잡았다. 그래서 숙빈 최씨로 하여금 왕비 장씨와 남인들의 잘못을 고변토록 했다. 즉, 왕비 장씨가 질투로 자신을 괴롭히고 있다고 말하는 한편 남인에 대해서는 민암, 이의정 등이 소론측 인사들이 인현왕후에게 동정적이라는 이유로 그들을 제거하려 한다는 내용을 숙종에게 고변했던 것이다.
그래서 숙종은 숙빈 최씨의 말을 듣고 왕비 장씨와 남인에 대한 신뢰가 상실되었고, 그 때문에 남인들이 폐비 민씨 복위운동에 대해서 보고도 하기 전에 이미 마음이 돌변하여 민암, 이의정 등을 유배시켜버렸다. 그리고 이어서 유배된 그들을 사사시키고 목내선, 김덕원, 민종도, 이현일, 장희재 등의 남인 중진들을 유배시키고, 장씨는 빈으로 강등시켜 버렸다.
이 사건의 뒤처리 과정에서 중인, 상인계층의 자금이 뇌물 수수의 방법으로 이용된 사실이 드러나 왕과 조정에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다. 이것은 경제적으로 성장한 중인, 상인계층이 중앙 정치를 움직일 수 있다는 것과, 또 한편으로 사대부가 상대적으로 힘이 약해졌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사대부 중심의 조선 사회가 흔들리고 있엇다는 것이다.
어쨌던 이 사건으로 남인들은 대거 축출되었고 소론의 남구만, 박세채 등이 중용되었으며, 노론측도 폐비 민씨가 복위되고, 송시열, 민정중, 김익훈, 김수홍, 김수항 등이 복관되었다. 따라서 조정은 서인의 소론측이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그런데 소론측은 '무고의 옥'으로 인해 노론측에 주도권을 내주게 되고 만다. 소론은 정권을 잡은 이후 희빈 장씨 소생인 세자를 지지하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었는데, 즉, 그것은 희빈 장씨를 지원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장희재가 희빈 장씨에게 보낸 편지에 복위된 왕비 민씨를 모해했을 대 조정 일각에서 그를 죽여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지만 소론의 남구만이 나서서 세자의 앞날을 위해 용서해야 한다고 주장해 무마되기도 했다.
그러나 1701년 민비가 죽고 나서 취선당 서쪽에 신당이 발견되자 숙종은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희빈 장씨는 신당을 차려놓고 무당을 불러 굿을 하기도 하고 매일같이 민비가 죽기를 기원하며 자신의 복위를 꾀했는데, 실제로 민비가 죽자 이것이 사실로 드러나자 신당 문제는 걷잡을 수 없는 정치적 사건으로 확대되고 말았다.
그래서 숙종은 신당사건의 전모를 보고받고 희빈 장씨와 그녀의 오빠 장희재를 죽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때 소론측의 남구만은 후에 세자에게 미칠 영향을 고려하여 이를 저지하려 하였다. 당시 정국은 장씨 소생의 세자에 대해 지지 여부를 놓고 노론과 소론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던 상태였다.
하지만 숙종은 소론측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희빈 장씨에게 사약을 내리고, 장희재와 무속인 그리고 희빈 장씨 주변인들을 국문해 죽였으며, 희빈 장씨에 대한 치죄를 만류하던 소론 세력도 같이 제거해 버렸다. 그 결과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남구만, 유상운, 최석성 등의 소론 거두들이 유배되거나 파면되었다.
이 사건으로 조정은 다시 노론이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하지만 이후 세자 지지 문제를 중심으로 소론과 노론의 대립은 가속화되어 점차 대등한 세력을 형성하게 되었다. 하지만 영조 대의 장헌세자 사건 이후 노론은 벽파와 시파로 분리되고, 소론과 남인이 합류해 조정은 시파, 벽파의 대결 양상으로 치닫게 되었다.
송시열, 그는 누구인가?
송시열(宋時烈, 1607년 음력 11월 12일 ~ 1689년 음력 7월 24일)은 조선 후기의 문신·성리학자·철학자·정치가이자 시인·작가로서, 유교 주자학의 대가이자 당색으로는 서인, 분당 후에는 노론의 영수였다. 본관은 은진(恩津)이고, 자는 영보(英甫), 아명은 성뢰(聖賚), 성래(聖來), 호는 우암(尤庵)·우재(尤齋)·교산노부(橋山老夫)·남간노수(南澗老叟)·화양동주(華陽洞主)·화양부자(華陽夫子),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효종, 현종 두 국왕의 왕자 시절 가르친 스승이었으며 별칭은 대로(大老), 송자(宋子), 송부자(宋夫子)이다. 1633년(인조 10) 경릉참봉으로 출사하여 대군사부, 진선, 장령, 찬선, 세자사부, 이조판서, 의정부좌의정, 우의정, 영중추부사 겸 영경연사, 행판중추부사, 영중추부사 겸 영경연사에 이르렀다.
예송 논쟁 때 그는 주자가례에 의하여 효종이 인조의 차남이었으므로, 계모인 자의대비는 차남의 예에 따라 상복은 기년복을 입어야 된다고 하였다가, 남인과 오래 시비가 붙게 되었다. 당초 1차 예송에서는 허목과 윤휴의 3년복설을 이견으로 받아들이다가 윤선도가 그의 본심이 효종의 정통성을 부정하려는 의도라 비난하고, 허목이 그의 사형을 주장하면서 남인과 적대하게 된다. 그는 윤선도와 함께 효종, 현종을 가르쳤으나 그는 승승장구하고 윤선도는 한직에 머물렀으므로 이는 갈등의 불씨가 되기도 했다.
예송 논쟁 당시 송준길, 김수항과 함께 서인의 주요 이론가였으며, 기사환국으로 덕원부, 거제도 등의 유배지를 전전하다가 제주도에 유배됐으나 숙종 때 장희빈의 아들 원자 균을 세자로 지정하는 문제를 반대하다가 숙종의 진노와 남인의 사주로 국문을 받으러 오던 중 전라북도 정읍에서 사사된다. 1756년(영조 32년) 증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었고, 그를 평소 존경하던 정조(正祖)에 의해 성인(聖人)으로 추숭되어 송자, 송부자(宋夫子)로 격상되고, 국가의 스승으로 추대되었다.
서인 성리학파의 종주로 송시열 역시 수많은 문하생을 배출하여 이단하, 윤증, 민정중, 민유중, 권상하, 이여, 정호 등을 길러냈으나, 이 중 윤휴와는 그의 아버지 윤선거의 비문 문제로 절교하였다. 윤선거, 윤선도, 윤휴 등과 친구가 되어 교류하였으나 예송 논쟁 이후 모두 적대적 관계로 변한다. 노론의 정신적 지주로서 정조 때는 국가적 차원에서의 스승인 송자로 격상되고 유고는 송자대전(宋子大全)으로 간행된다. 한국의 유학자 가운데 도통을 이은 성인을 의미하는 자(子) 칭호를 받은 유일한 인물이나 논란의 여지가 있으며, 이는 1787년(정조 11년) 조선 정조가 《송자대전》을 편찬함에 따라 공식화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 그의 이름이 3,000회 이상 언급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송이창, 사계 김장생, 신독재 김집의 문인이다.
우암 송시열은 1607년 음력 11월 12일 조선 충청북도 옥천군 구룡촌(九龍村)에서 사옹원 주부를 지낸 은진 송씨 송갑조와 곽자방의 딸 선산곽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안동대도호부사 송여해(宋汝諧)의 후손으로 증조부 송구수(宋龜壽)는 영경전참봉(永慶殿參奉)·종묘서봉사(宗廟署奉事)을 역임하였으나 효성이 지극하여 이름이 높았다. 그의 가계는 대대로 서인이었으나, 그의 5대 방조 송세충(宋世忠)의 손자 송응개(宋應漑), 송응형(宋應泂)은 동인이 되었다. 같은 충청남도 출신으로 함께 김장생과 김집의 제자가 된 송준길 역시 그의 먼 친척으로 13촌이 된다.
곽자방의 다른 딸이자 그의 이모는 한산이씨 이덕렴과 결혼하였다. 또한 송시열의 조부와 송준길의 조부는 이윤경의 딸을 아내로 맞아 동서가 되었다. 그래서 송시열과 송준길은 가계상 13촌이지만 진외가 쪽으로는 6촌 재종간이다. 나이 한살 위인 송준길을 송시열은 13촌 숙으로가 아니고 재종형으로 늘 춘형이라 불렀다.
이후 어머니 곽씨 사후 아버지 송갑조는 지씨 부인을 계모로 맞이하였고, 서모로 고성이씨 부인을 들이게 된다. 송시열은 후일 자신의 서모가 이괄의 친척인 관계로 서모의 친정 일가가 화를 입게 되자, 특별히 배려하여 서모의 일가를 대전 근처로 피신시키기도 한다. 서모와 서자를 차별하는 조선사회와 달리 그는 서모와 서자, 서녀, 그리고 친척의 서자, 서녀들도 존중하고 깎듯이 예의를 다하였다. 그러나 서자, 서녀들에게 정통성과 가계 계승권리는 인정하지 않는다.
그가 태어나기 며칠 전에는 마을 앞의 강물이 이유 없이 바싹 말랐다가, 그가 태어나자 다시 물이 불었다고 하며, 또한 그가 태어나기 며칠 전에 그의 아버지 송갑조(宋甲祚)의 꿈에 공자가 제자들을 거느리고 나타나서 그 중의 한 제자를 가리키며 “이 아이를 그대에게 보내니 잘 가르치시오.”라고 말한 뒤 사라졌다고 전해진다. 꿈에 공자와 그의 제자들을 보았다 하여 성인이 왔다는 뜻의 성뢰(聖賚), 성래(聖來)를 그의 아명으로 하고 뒤에 시열로 이름을 고쳤다.
송시열은 3세 때에 혼자서 이미 글자를 깨우쳤으며, 기억력이 좋고 암기가 능하였으며 5세 무렵에는 스스로 글을 쓰기 시작하였다. 7세 때에는 그의 두 형이 읽은 글을 받아 적을 줄 알았다고 한다. 기억력이 비상하였으며 어려서부터 독서를 좋아하였다. 8세에 친척인 송이창의 제자가 되어 친척이자 첫 스승 송이창의 아들인 송준길의 집에서 함께 공부하게 되어 훗날 양송(兩宋)으로 불리는 특별한 교분을 맺게 되었다. 옥천에는 신령스럽고 괴이한 무당이 있었는데, 그가 무당이 살던 곳을 지날때면 떠들어대는 일을 하지 못하고 그를 피하였다. 그러면서 무당이 하는 말이 "이 도련님이 오시면 귀신이 바로 내리지 않는다" 라고 했다 한다. 이후 사람들은 그를 더욱 신통하게 보게 되었다.
한산이씨인 이덕사(李德泗)의 딸과 혼인했다. 이덕사는 이덕렴의 동생이고 이덕렴은 곽자방의 사위이니 송시열은 자신의 이모부 이덕렴에게 질여서(조카사위)도 된다. 12세 때에 아버지 송갑조로부터 이이의 격몽요결(擊蒙要訣)을 배우다.
아버지 송갑조는 광해군 집권 이후 인목대비 폐모론이 나왔으나 그는 관직에 있지 않음에도 홀로 의리를 지켜 1618년 서궁(西宮)에 유폐된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찾아가 사은숙배한 후 안부를 묻는 등 이이첨, 정인홍의 폐모론에 항거하였다. 그러나 1618년말 인목대비가 유폐된 서궁을 출입하다가 발각되어 금고(禁錮)되어 낙향한다.
1618년 삭직되고 금고당한 아버지 송갑조로부터 《격몽요결(擊蒙要訣)》·《기묘록(己卯錄)》 등을 배웠다. 이때 부친은 우암에게 “주자(朱子)는 후세의 공자이고 율곡(栗谷)은 후세의 주자이니, 공자를 배우려면 마땅히 율곡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격려하면서, 주자, 이이(李珥), 조광조(趙光祖), 김시습(金時習) 등의 절의를 교훈삼아 본받도록 가르쳤다.
그 중 송시열은 주자의 예론에 깊이 공감하였는데, 이후 그는 주자를 평생 사표로 받들고 신념을 지켜나갔다.
김장생, 김집의 문하생
송갑조, 김장생의 문인으로 그 뒤로 송시열은 아버지 송갑조, 사계 김장생, 김장생의 아들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 등을 비롯하여 당시의 유명한 학자들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13촌 숙질 간인 송준길(宋浚吉)과 함께 동문수학하였으며, 뛰어난 학문으로 노론(老論)의 쌍벽을 이루었다.
1625년(인조 3년) 김장생의 문하생이 되었으며, 이때 송준길, 윤선거(尹宣擧), 유계(兪棨), 윤휴, 이유태(李惟泰) 등을 만난다. 1625년(인조 3년) 송시열은 19세의 나이로 도사 이덕사의 딸 한산 이씨와 결혼했는데, 부인 한산이씨는 고려 문정공 목은 이색의 후손이다.
이때 만난 윤선거는 그의 친구였으나 병자호란을 계기로 관계가 악화된다. 윤휴는 당색을 초월한 절친한 친구였으나 이후 예송논쟁으로 정적으로 돌변한다. 이후 윤휴가 그를 사형에 처하려 하는 윤선도, 허목을 편들면서 감정이 더해져 원수가 된다.
그는 김장생으로부터 《근사록(近思錄)》·《심경(心經)》·《가례(家禮)》 등을 배웠고, 1641년 김장생이 작고하자 다시 그의 아들인 신독재 김집을 스승으로 받들고 수학하였는데, 이때부터 전적으로 주자의 글을 읽으며 주자의 예학대로 생활하였다.
성격이 직설적이고 솔직담백하였으며 꾸밈이 없었다. 또한 뒤에서 남의 흉허물을 하는 것을 상당히 불쾌하게 여겼고, 자신의 앞에서 타인의 흉허물을 보는 자를 질타하였다. 솔직하고 직설적인 그의 성격은 정적을 많이 만들었고, 윤선거는 그에게 서신을 보내 참을 것을 권고한다. 한편 자신의 친척이자 오랜 동문인 송준길과 오랜 우의를 다져나갔다. 송시열은 송준길을, 송준길은 송시열을 서로 각별히 챙겨주었다.
청년기
한편 그는 1633년(인조 11년) 사마시에 응시하여 장원 급제하여 생원(生員)이 되었다. 바로 최명길의 천거로 경릉(敬陵) 참봉이 되었으나 곧 1개월 만에 사직하였고, 1635년(인조 13년) 대군사부(師傅)가 되어 봉림대군(효종)과 인평대군을 가르쳤다. 그는 청나라의 침략을 당한 조선의 현실을 금나라의 침략을 당한 남송과 같이 보았고, 주자의 사상이 이를 극복하는 해답이라 보았다. 송시열이 항상 주자를 언급하자 효종은 '말마다 옳은 이는 오직 주자이며, 일마다 옳은 이가 오직 주자이십니까'라고 반문했다 한다.
그가 대군사부가 될 무렵 윤선도 역시 세자시강원에 부임, 대군사부에 임명되어 이때 윤선도를 다시 만나게 된다. 윤선도 역시 재야에 있을 때 이이첨 일파의 난행을 규탄했고, 왕자의 사부였으며, 북벌론을 주창했으나 당색이 남인인 탓에 주목받지 못했다. 같이 이이첨 탄핵과 왕자의 사부, 북벌론 주장 등을 하였음에도 주목받지 못하자, 윤선도는 그에게 원한을 품게 된다.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 때 강화도로 피신하는 봉림대군(효종)을 따라가지 않았다. 그 대신 인조를 호종(扈從)하여 남한산성으로 피란하였고, 그는 청나라에 항복하는 것을 반대하였으나, 1637년 화의가 성립되었다. 인조가 청태조를 알현하러 남한산성을 나섰을 때 송시열이 인조를 따라 나섰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
병자호란이 종결된 후 1637년 화의(和議)가 성립되고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봉림대군이 인질로 잡혀가자 봉림대군(효종)의 스승이었지만 그는 봉림대군(효종)이 심양에 인질로 끌려갈 때에 따라가지 않았다. 그는 벼슬을 사퇴하고 낙향, 고향으로 내려가 학문 연구에만 전념했다. 봉림대군(효종)이 인질기간 8년 사이에 송시열과 서신을 교환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화의로 크게 실망하여 이후 별제(別提), 용담 현령(龍潭縣令), 익위(翊衛), 지평(持平) 등에 임명되었지만 출사(出仕)하지 않고 모두 사퇴한 뒤 10여 년간 고향에 은거하며 강학(講學)과 교육, 독서, 학문 연구에 전념하였다. 그의 문하에서는 수많은 학자가 배출되어 문인으로 이단하, 윤증, 민정중, 민유중, 권상하, 이여, 정호 등이 배출되었다.
첫째 딸은 대전 탄동에 사는 권유에게 시집보냈는데 권유는 우윤을 지낸 탄옹 권시의 아들이다. 송시열은 첫째 딸을 시집보내면서 계녀서(戒女書)를 써 주었다. 이후 다른 딸들과 조카딸, 손녀딸, 외손녀, 종질녀 등이 시집갈 때 혹은 결혼 이후에 손수 계녀서를 써서 보냈고, 이해하기 쉬우라고 당시 언문으로 천대받던 한글로 친히 써서 보냈다. 또한 사자소학과 사서삼경의 내용 중 핵심 부분을 한글로 정리하여 출가녀들에게 보내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다할 것을 부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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