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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면산의 겨울 1 : 다시 되돌아보는 역사, 10.26 사건

두바퀴인생 2012. 11. 5. 05:25

 

 

우면산의 겨울 1 : 다시 되돌아보는 역사, 10.26 사건

 

 

 

 

10월이 소리없이 지나갔다. 낙엽들이 각가지 색깔로 물들고 새벽 길을 나서다보면 지난 밤 바람에 떨어진 낙엽들이 길바닥에 어지럽게 흩어져 떨어져 있다. 환경미화원 아저씨들이 열심히 낙엽을 쓸고 있고 부지런한 건물 경비원 아저씨는 이른 새벽에 일어나 열심히 건물 주위 낙엽을 쓸고 있다. 새벽일을 나가는 사람들이 시내 버스에 가득타고 어디론가 가고 강남대로 일대는 새벽 출근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된다.

 

삶에 바쁘고 힘든 사람들에게 낙엽은 쓰레기로 보이지만 가을을 만끽하며 돌담길이나 유명 사찰, 등산로를 찿는 사람들에게는 가을의 낭만이 될 것이다. 그래서 우주의 모든 만물은 사람들이 각자가 처한 환경과 처지에 따라 보이는 느낌과 감정이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전부는 아니지만 길바닥의 낙엽이 쓰레기처럼 보이면 삶이 팍팍한 사람일 것이고 낙엽이 아름다운 가을의 낭만처럼 보이면 그런대로 삶이 조금은 여유가 있는 사람일 것이다. 당신의 감정은 어떤가? 

 

 

 

고속터미널, 사당역, 방배역, 교대역 일대는 주말이면 등산을 가는 버스와 사람들로 북적인다. 주택가 골목길에는 새벽에 부지런히 등산차림으로 나서는 주부나 부부, 남자들을 자주 보게 된다. 그런데 부부가 다정하게 가는 모습은 극히 보기 힘들고 나이드신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가까운 공원을 찿아가는 모습은 가끔 보게 된다.

 

단풍불륜은 가을철이면 다반사로 일어나는 일이고 심지어 불륜 관계로 인해 부부싸움은 물론 이혼이나 가정 파탄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현실의 어려움과 권태, 새로운 즐거움과 행복을 만나고 싶어 이성의 짝을 찿아 나서는 그들을 향해 누가 돌을 던지랴! 나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인간들은 도덕과 비도덕 윤리와 비윤리, 선과 악의 얼굴을 가진 2중적인 인성을 가진 것이 대부분 비슷한게 아닐까 싶다. 

 

70대 남편이 침해걸린 아내를 목졸라 죽이고 자신도 스스로 자살하려 했다가 구조된 뉴스를 보았다. 자식들에게는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남편은 장기간 침해걸린 아내의 모든 수발을 들면서 돌본 모양이다.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심해지는 아내의 침해를 보다못한 남편이 결국 극단적인 결단을 한 것이 아내를 목졸라 죽이고 자신도 자살을 선택했지만 아내는 죽고 자신은 죽지 못했다. 우리 주변에는 이러한 나이든 노인 부부가 불치의 병을 앓으며 불행한 노후를 보내고 있거나 태반은 국가적 혜택을 받지 못하고 어렵게 살고 있거나 독거 노인으로 혼자 어렵게 살고 있는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다. 어두운 새벽 찬바람을 맞으며 폐지를 줍기 위해 이 골목 저 골목을 뒤지며 힘든 삶을 살고 있는 노인들이 한 둘이 아니다. 이것이 오늘날 한국 사회 노인 정책의 현주소이다. 

 

초고령 시대로 접어들면서 우리 사회는 노인 인구가 점점 늘어나고 어려운 환경의 많은 노인들이 사회적 배려 부족으로 대부분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그들의 윗 세대들은 그런대로 자식들의 돌봄을 받았으나 이제는 세태가 변하면서 자식들도 부모를 모시기를 꺼리지만 부모들도 자식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 하는 중간 과도기적 과정에 있는 듯하다. 앞으로 우리 사회는 부모와 자식 간에 서로 부양의 부담을 주지 않는 사회가 될 것이다.그래서 노후를 준비하지 못하고 자식들에게 올인한 부모들 중 생계 능력이 부족한 노인들은 노년이 불행한 노후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간 밤에 약간의 비가 내렸다. 이제 날씨는 겨울로 접어들 기세로 영하를 향해 주저앉고 있다. 또 이번 겨울은 유난히 추울 것이라는 예측도 나오고 있고 식량의 자급 능력이 계속 떨어지고 물가는 고삐없는 망아지처럼 날뛰고 있다. 배추가 생산량이 부족하여 가격이 오를 것이라 하고 올 해 김장은 주부들의 시름을 더하고 있는 듯하다. 매년 반복되는 배추 파동을 정부는 아무런 대책을 강구하지도 못하고 있다. 포대 바꿔치기 쌀 판매, 원산지 속이기, 부풀린 가격, 거짖 광고, 폭리 등으로 소비자들만 멍들고 주머니를 털어가고 있다.  

 

미국의 동부는 강력한 허리케인으로 많은 피해가 유발되었다고 한다. 마야인들의 예언설에 따라 금년 12월 21일이 지구멸망설이 유포된 상태로 지구의 대재앙이 과연 다가올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한반도 주변 해역도 해수 온도가 높아져 온대성 어류들로 바뀌고 있고 수많은 해파리 떼가 주변 해역에 나타나 어획고가 줄어드는 바람에 어민들의 시름이 깊어지고 있다. 한반도 고유 어종인 명태와 오징어가 사라지고 있다고 한다.지구의 기후도 급변하고 있다. 지구 자기장이 사라지던, 빙하기가 찿아오던, 혜성이 충돌하던, 대지진으로 육지가 바다로 바다가 육지로 변하던, 태양 흑점이 폭발하여 지구에 대재앙이 일어나던 인간은 개미처럼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지구상에서 사라질지도 모른다. 그러면 다시 원시 시대로 돌아가 새로운 인간이 나타나 새로운 지구의 역사를 만들어 갈 지도 모른다. 어쩌면 지금의 인류 문화는 지구 역사에서 한 순간이 불과할지도 모르고 반복되는 지구 역사를 의식하지도 못한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가운데 정치권은 대선을 앞두고 싸움질이 치열하다. 상호 비방과 저질 폭로, 믿을 수 없는 여론조사로 국민들을 호도하고 정권탈취를 위해 야권 단일화 중매쟁이들 설쳐대는 나라꼴이 기관이다. 비젼과 미래도 불확실한 정책으로 국민들을 선동하고 있는 대선 주자 중 누가 대통령이 되던지 한국은 조선 시대 임진왜란 당시 적의 능력도 모른채 오만에 빠진 신립 장군이 일본군을 맞아 탄금대에서 가마대 8천을 이끌고 배수진을 치고 죽음을 앞두고 있는 꼴이 될 지도 모른다. 주변 강대국은 동북공정에, 서해 어로자원 싹쓸이에, 독도 침탈 망언에, 이어도 넘보기에 바쁜 가운데 북쪽에서는 재래식무기.비정규전 부대.대량살상무기 등으로 남쪽을 위협하고 있고 무역로는 위협받고 있으며 경기는 침체 일로에 있다. 국산 잠수함과 함정, 미사일, 전차, 소총, 장갑차 등 각종 신형 무기들은 고장으로 제성능을 발휘하기도 전에 폐기 직전이다. 원전 비리가 사방에 난무하고 고장은 하루가 멀다하고 발생하고 있다. 언제 폭발할지도 모르는 원전 주변 주민들은 매일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독극물 공장이 폭발해도 속수무책이요 음식물에 발암물질이 발견되도 정부는 업체 두둔에 바쁘다. 군력형 비리를 포함하여 사기, 불법, 이익독식, 폭력, 매춘, 패륜, 자살, 실업, 이혼, 가정 파탄 등 사회전반에 퍼진 반사회적인 비도덕성이 날로 넘쳐나고 있다.

 

세계 경제는 침체 일로에 직면하여 있고 한국의 경제 성장도 2~3%대로 주저앉고 있다. 수출은 내리막길이요 내수 경기는 얼어붙었고 주택 가격은 폭락하고 있으며 전세값이 매매가를 웃돌고 있다. 청년 백수는 물론 실업자는 넘쳐나고 중년 백수가 부모집에서 무위도식하고 있는 숫자가 천문학적이다. 5%의 부자들이 95%의 서민들 고혈을 빨아 호의호식하면서 스키장으로 고급레스토랑으로 향하고 있고 서민들은 새벽부터 저녁까지 저임금으로 노예처럼 비참하게 살아가고 있다. 물론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두가 부자가 될 수는 없다. 모든 사람에게 처음 똑같은 재물이 주어져도 사람의 능력에 따라 그 재물을 어떻게 운용하느냐에 따라 어떤 사람은 재산을 잘 굴려 부자가 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재산을 탕진하고 가난한 사람으로 전락한다. 그러나 그것이 공정한 경쟁에서 벌어진 경우라면 몰라도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사회적 불만이 나타나는 것이다. 재벌 2, 3세들, 권력을 이용한 치부, 불법적인 재물 강탈, 사기, 국고 유용, 대가성 뇌물 등 우리 사회에서 불공정하고 정의롭지 못한 방법으로 부자가 된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가 남에 의한 해방-이승만 정권 수립-한국전쟁-자유당 정권-4.19 혁명-5.16 군사혁명-박정희 유신 정권-10.26 사태-12.12 군사 쿠테타-5.17 쿠테타-신군부 독재-6.10 항쟁-민주화-노태우 중도정권-문민정부-햋빛정책-참여정부를 거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자유당 정권이 4.19 학생혁명으로 무너지고 제2공화국은 한마디로 혼란의 극치를 이루었다. 학생혁명 주체 세력들이 권력을 농단하고 무정부 상태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혼란한 사회를 보다못한 군부가 박정희가 주도하여 혁명을 일으킨 것이 5.16 군사혁명이다. 혼란한 사회의 기강을 바로잡고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서 강력한 개발독재가 시작되었고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냈다. 그러나 장기집권을 위한 유신체제가 들어서면서 국민들의 인권과 자유를 무차별 탄압하였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남용하면서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전국적으로 발생한 학생 소요사태와 야권의 투쟁이 박정권을 압박하였고 그로인해 내부적으로 갈등을 빚어오던 권력층끼리 충돌로 결국 박정권의 종말을 가져왔던 것이 바로 10.26 김재규에 의한 박정희 대통령 살해 사건이었다. 10.26은 어쩌면 한국 현대사에 분수령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10.26에 대한 사건의 전개 과정과 뒤이어 발생한 전두이 주도한 신군부의 12.12 군사쿠테타와  5.17 쿠테타, 그리고 사건의 주도자인 김재규에 대한 평가를 알아보고 그 역사적 의의를 살펴보고자 한다.     

 

 

 

 

 

 

 

 

 

10.26 사건 개요

 

10·26 사건(궁정동 사태)은 1979년 10월 26일대한민국중앙정보부 부장 김재규박선호, 박흥주 등과 함께 대통령 박정희, 경호실장 차지철 등을 살해한 사건이다.

 

10월 26일, 박정희는 KBS 당진 송신소 개소식과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 참석한 후 궁정동 안가(염동진의 아지트가 있던 자리)에서 경호실장 차지철, 비서실장 김계원,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와 함께 연회를 가졌다. 연회 중에 박정희는 김재규의 총에 저격당하였고 곧 수도육군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오후 8시경 과다 출혈로 사망하였다. 당시 박정희의 나이는 만 62세였다. 이 사건은 박정희 정권의 1인 독재체제의 정치적 허점을 보여주였다.

 

김재규는 재판 과정에서 민주화에 대한 열망으로 대통령을 살해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권력 암투 과정에서 김재규가 차지철에 밀리는 상황이었고 이에 김재규가 충동적으로 일으킨 범행이라는 견해가 많다. 한편, 김재규는 10월 유신 때 부하들도 눈치를 챌 만큼 박정희에게 반감이 있었고 이 살인 사건을 7년간 준비해왔다는 설이 있고[1], 박정희 정권의 핵개발 추진과 박동선코리아게이트 사건 등으로 한미 관계가 악화되자 미국 정부가 김재규를 통해 박정희의 암살을 은밀히 조장했다는 설도 있다.

 

 

사건의 개요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대통령 박정희와 함께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과 당진에 있는 중앙정보부 시설에 가려 했다. 그러나 '권력의 제 2인자'라고 불리던 대통령 경호실장 차지철은 김재규를 일방적으로 제외시켰고 그 결과 방조제 준공식은 김재규가 없는 상황에서 진행되었다.

 

박정희가 준공식에서 돌아오자, 차지철은 김재규에게 전화를 걸어 오후 6시에 서울 종로구 궁정동 청와대 부지 내에 있는 중앙정보부 소속의 한 안가로 오라는 박정희의 명령을 전했다.

 

사건의 진행

김재규는 대통령 비서실장 김계원에게 박정희차지철을 죽일 것이라고 알렸다. 박정희와 차지철이 궁정동 안가로 들어오고, 김계원과 김재규도 연회장이 있는 '나'동으로 들어갔다. 김재규는 을 자신의 바지 주머니에 숨긴 채 박정희와 대면했다.

 

한편,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박선호는 가수 심수봉과 모델 신재순에게 보안 서약서를 쓰게 했다. 박정희는 김재규, 차지철, 김계원, 심수봉, 신재순 등과 함께 전통 한국식 만찬 교자상을 앞에 두고 앉아 술을 겸한 저녁 식사를 하였다.

 

박정희는 정치 및 경제적인 문제로 인해 벌어지고 있는 민중들의 대규모 소요사태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김재규를 질타했다. 또한 신민당에 대한 중앙정보부의 온건한 자세도 질타하였다. 평소 학생 시위와 노동자 파업을 보다 확실하게 탄압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던 차지철도 지나치게 온건한 대응 탓에 혼란이 더욱 확산됐다고 주장하며 "반항하는 자들은 모두 탱크로 눌러버려야 한다"고 말하였다.

 

이후 김재규는 궁정동 안가에 오자 마자 전화로 들어오라고 한 육군참모총장 정승화와 중앙정보부 제 2차장보 김정섭이 있는 '가'동으로 들어가 저녁 7시 10분경 그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김재규는 다시 연회장으로 갔고 문 앞에서 총 점검을 하는 순간 차지철이 나타났으나, 김재규는 총을 바지 주머니에 집어 넣었고 차지철은 그냥 지나갔다. 차지철이 경호원들이 있는 주방으로 내려갔다가 연회장에 다시 들어온 시점에 심수봉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차지철이 들어오자 김재규가 나가 저녁 7시 30분에 중앙정보부장 수행비서 박흥주와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박선호를 불러 아래와 같이 말했다.

" 나는 각하와 차지철을 죽일 것이다. 박선호 너는 정인형(대통령 경호처장)과 안재송(대통령 경호부처장)을 처단하고, 박 대령(박흥주)은 경비원들과 함께 주방의 경호원을 모두 없애라. 이것은 혁명이다! "


다시 돌아와보니 시간이 저녁 7시 38분이었다. 심수봉의 노래가 끝나고 신재순이 노래를 부르는 중이었다.

 

대통령 저격 상황

1979년 10월 26일 금요일 저녁 7시 41분, 신재순심수봉의 반주에 맞춰 '사랑해'라는 노래를 부르던 중 김재규가 총을 쏘아 차지철의 팔을 맞혔고 이어 박정희의 가슴을 향해 쏘았다. 그 총소리가 들리는 순간,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박선호는 대기실에서 대통령 경호부처장 안재송과 대통령 경호처장 정인형을 차례로 쏘아 죽였고, 중앙정보부장 수행비서 박흥주 역시 경비원들과 같이 주방에 있던 경호원들을 죽였다.

 

김재규가 총구를 차지철에게 조준했고 차지철이 김재규에게 계속 저항하는 가운데 김재규가 방아쇠를 당겼지만 총이 작동되지 않았다. 그때 정전되었으며 김재규는 연회장을 빠져나가 1층 로비로 갔다.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박선호가 나타났고 김재규는 총을 박선호의 총과 맞바꾸었다.

 

박선호는 탐색하러 갔고 김재규는 연회장으로 다시 들어갔는데 심수봉과 신재순이 박정희를 부축하고 있었다. 차지철은 화장실에 숨었다 다시 나와 경호원을 찾으러 나가려는 순간 다시 김재규가 들어왔다. 차지철은 김재규에게 장을 던져 총쏘는 것을 막으려 했지만 김재규는 이를 피한 후 차지철의 배를 향해 총을 쏘아 차지철이 맞고 그대로 엎어졌다. 김재규는 박정희 앞으로 다가와 총을 겨누었고 심수봉과 신재순은 도망쳐 어디엔가 숨었다. 김재규는 총구를 박정희의 머리에 겨누고 이내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나 박정희의 사인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에 총을 맞은 것으로, 머리에 맞기 전에 이미 사망했다.

 

대통령 비서실장 김계원은 연회장의 대기실에서 사건을 지켜봤다. 연회가 열린 '나'동이 아닌 '가'동에 있던 육군참모총장 정승화와 중앙정보부 제 2차장보 김정섭도 20여 발의 총소리를 듣고 의아하게 여겼다.

 

박정희와 차지철을 살해한 김재규는 당황한 가운데 정승화의 주장에 따라 김정섭과 함께 육군 본부로 갔다. 한편 현장의 비서실장 김계원은 박정희의 시체를 국군 서울지구병원으로 싣고 가서 박정희를 살려내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소생이 불가하다고 판단한 다시 김계원은 청와대로 들어와 국무총리 최규하에게 박정희의 저격범은 김재규라고 말했고, 최규하와 함께 육군 본부로 가서 정승화와 국방부 장관 노재현을 만나 거듭 범인은 김재규라고 말했다.

 

현장에서는 박선호의 명령을 받은 경비과장 이기주는 경비원 김태원을 시켜 쓰러져 있는 사람 모두를 확인 사살하였고 이때 아직 꿈틀거리던 차지철도 죽고 말았다.

 

김재규의 체포와 사형 집행

육군참모총장 정승화는 육군 본부 헌병감 김진기에게 김재규 체포 명령을 내렸고, 10월 27일 오전 0시 40분경에 김진기가 김재규를 체포하자, 정승화는 보안사령관 전두환을 불러 헌병감 김진기 준장에게 김재규를 인계받아 철저히 조사하라고 지시하였다.

 

이후 김재규는 동빙고동에 있던 보안사령부 서빙고 분실에서 가혹한 고문과 수사를 받았다. 김재규는 "너, 각하와 차지철에게 무슨 짓 했어? 어? 너 쇠파이프 맞아야 될려나 보다. 너 미쳤니? 네가 장애인이라서 그렇게 함부로 행동하는 거야?"라는 말을 들었고, 쇠파이프로 맞았으며, 전기고문과 물고문까지 당했다. 김재규는 1980년 군법회의에서 <내란목적살인>이라는 죄목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고 1980년 5월 24일서울구치소에서 교수형당했다.

 

사건의 의의

"

나는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쐈습니다. 나는 민주 회복을 위해 그리 한 것이었고, 이 땅의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그리 한 것이었습니다. 아무 뜻도 없었습니다.

"
 
— 김재규, 계엄군법회의 최후진술


2004년에는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심의위원회에서 김재규 부장에게 명예회복을 시도하는 등 10·26 사건에 대한 재평가 시도가 있었다. “안중근과 같은 의사다”라는 주장도 있었다.

 

박정희를 저격한 이유

김재규는 10월 유신 때 부하들도 눈치챌 만큼 박정희에게 반감이 있었고 거사를 7년간 준비해 왔다는 설이 있다. '내 뒤에 미국이 있다'는 말도 했다. 1심 최후 변론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 저의 10월 26일 혁명의 목적을 말씀드리자면 다섯 가지입니다. 첫 번째가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것이요, 두 번째는 이 나라 국민들의 보다 많은 희생을 막는 것입니다. 또 세 번째는 우리 나라를 적화로부터 방지하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혈맹의 우방인 미국과의 관계가 건국이래 가장 나쁜 상태이므로 이 관계를 완전히 회복해서 돈독한 관계를 가지고 국방을 위시해서 외교 경제까지 보다 적극적인 협력을 통해서 국익을 도모하자는 데 있었던 것입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로 국제적으로 우리가 독재 국가로서 나쁜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이것을 씻고 이 나라 국민과 국가가 국제 사회에서 명예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 다섯 가지가 저의 혁명의 목적이었습니다. "


김재규는 ‘내가 (거사를) 안 하면 틀림없이 부마항쟁이 5대 도시로 확대돼서 4·19보다 더 큰 사태가 일어날 것이다’고 판단했다. 이승만은 물러날 줄 알았지만 박정희는 절대 물러날 성격이 아니라는 판단을 했다. 김재규에 의하면 차지철은 ‘캄보디아에서 300만 명을 죽였는데 우리가 100만~200만 명 못 죽이겠느냐’고 했다고 한다. 또한 김재규에 의하면 차지철은 그런 참모가 옆에 있고 박정희도 ‘옛날 곽영주가 죽은 건 자기가 발포 명령을 내렸기 때문인데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리면 나를 총살시킬 사람이 누가 있느냐’고 말했다고 한다. 이어 김재규는 더 큰 희생을 막기 위해서 암살했다고 주장했다.

 

 

미국의 대응

한미 연합사령부 부사령관 류병현 장군은 10월 26일 자정 무렵에 주한 미국 대사 글라이스틴(William H. Gleysteen, Jr)을 찾아와 "박대통령에게 사고가 발생했다"고 보고했다. 당시 류병현 역시 사태 파악이 안 된 상태였으므로 더 이상의 설명은 불가능했다. 글라이스틴은 통신보안이 철저한 전화선을 이용하기 위해 미국 대사관으로 달려가 워싱턴에 있는 브레진스키(Zbigniew Brzezinski)와 국무부에 이 사실을 알렸다.

 

10.26 사태 며칠 전 김재규는 로버트 브루스터 CIA 한국지부장을 면담했다. 이 일로 미국이 박정희의 죽음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김재규는 군사재판에서 사상 최악에 이른 한미관계의 개선을 자신의 거사의 한 이유로 들었지만 미국의 직접적인 개입은 부정했다. 주한미국대사 글라이스틴은 김재규의 한미관계 발언을 '쓰레기 같은 소리'라면서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사건의 여파

전두환은 10.26 사건 수사를 하기 위해 설치된 합동수사본부장에 오르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군부 내 파벌 갈등으로 인해 전두환을 중심으로 하는 신군부 세력이 12·12 사태를 일으켜 군부를 장악했다. 신군부 세력은 민주화 여론을 탄압하고 5.17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다.

 

한편, 10·26 사건 목격자 가수 심수봉은 전두환이 집권하던 시기에 가수로서 활동을 금지당해야했고, 사건 목격자 모델 신재순은 미국으로 이민갔다.

 

사건 관련자 명단

 

사건 현장에 있던 사람들

  • 박정희 - 대한민국 대통령,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저격을 당한 뒤 사망.
  • 차지철 - 대통령 경호실장,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총을 맞고, 중정 안가 경비원 김태원에게 확인 사살당함.
  • 김재규 - 중앙정보부장, 대통령 박정희와 대통령 경호실장 차지철을 궁정동 안가 연회장에서 사살함.
  • 김계원 - 대통령 비서실장, 사건 목격자.
  • 심수봉 - 가수, 사건 목격자.
  • 신재순 - 모델, 사건 목격자.[7]

 

사망자

  • 박정희 - 대한민국 대통령,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머리와 가슴을 맞고 사망.
  • 차지철 - 대통령 경호실장,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팔과 배를 맞고 안가 경비원 김태원에게 확인 사살당함.
  • 정인형 - 대통령 경호처장,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박선호에게 가슴을 맞고 사망.
  • 안재송 - 대통령 경호부처장,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박선호에게 가슴을 맞고 사망.
  • 김용섭 - 대통령 경호관, 별관 식당에서 안가 경비원들에 의해 사살당함.
  • 김용태 - 대통령 운전기사, 별관 식당에서 안가 경비원들에 의해 사살당함.

 

생존자

  • 김계원
  • 박상범
  • 심수봉
  • 신재순

 

사건 처리자들

  • 정승화 - 육군참모총장, 육군 대장, 박정희 유고후 계엄 사령관
  • 최규하 - 국무총리, 박정희 유고 후 비상 국무회의 주관
  • 김정섭 - 중앙정보부 제 2차장보
  • 전두환 - 국군보안사령관 겸 합동수사본부장, 10·26 사건 수사 지휘자

 

처벌

박흥주 대령의 경우는 그 신분이 현역 군인이었던 관계로 다른 가담자들보다 일찍 육군 교도소 내에서 총살형이 집행되었다.

  • 김재규 - 중앙정보부장 - 1980년 5월 24일 교수형
  • 박흥주 - 중앙정보부장 수행비서, 육군 대령, 중위 시절 김재규의 전속부관 - 1980년 3월 6일 총살형
  • 박선호 -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중학교 시절 김재규의 제자 - 1980년 5월 24일 교수형
  • 유성옥 - 중앙정보부 궁정동 안전가옥 운전기사 - 1980년 5월 24일 교수형
  • 이기주 - 궁정동 안전가옥 경비과장 - 1980년 5월 24일 교수형
  • 김태원 - 궁정동 안전가옥 경비원 - 1980년 5월 24일 교수형
  • 유석술 - 궁정동 안전가옥 경비원- 징역형
  • 서영준 - 궁정동 안전가옥 경비원- 징역형

 

 

 

 

 

 

 

12.12 군사쿠테타

 

12·12 군사 반란(- 軍士 反亂) 또는 12·12 사태(- 事態)는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노태우 등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이 최규하 대통령의 승인 없이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 정병주 특수전사령부 사령관, 장태완 수도경비사령부 사령관 등을 체포한 사건이다.

 

당시 보안사령관이던 전두환 소장은 12.12 군사 반란으로 군부 권력을 장악하고 정치적인 실세로 등장했다. 이후 1980년 5월 전두환을 중심으로 하는 신군부는 5·17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사실상 장악했고, 5·17 쿠데타에 항거한 5.18 민주화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했다. 전두환은 8월 22일에 육군 대장으로 예편했고 1980년 9월 대한민국 제11대 대통령이 됐다.

 

 

사건의 배경

10·26 사건 이후 각 군 수뇌부들은 계엄사령관으로 임명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구심점으로 국가의 보위와 안녕을 위해 일치단결하기로 결의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아 10.26 사건을 수사했다. 하지만 10.26 사건 당시 정승화가 현장 가까이 있었고 범인인 김재규와 평소 친분이 두터웠기 때문에 정승화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혹이 증폭됐다.

 

1979년 11월 6일 보안사령관 겸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은 10·26 사건 수사를 마치고 김재규의 단독 범행이라는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전두환은 '정승화 총장이 육군본부 벙커에 도착 후 신속한 조치를 취함으로써 문제가 확대되지 않고 질서정연히 사태를 수습했다'라고 말했다. 또한 "발표문을 보면 정승화 총장의 일거일동을 알 수 있다"면서 "정승화 총장이 김재규의 말을 듣고 중앙정보부로 갔으면 큰 혼란이 초래되었을 것이다. 정총장이 육군 본부로 가자고 하였다"라고 말했다.

 

신군부 세력은 정승화 총장이 무혐의라는 발표를 뒤집으면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묵시적으로 동조했다는 혐의를 내세우며 12.12 반란을 일으켰지만,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이 군내의 반발을 무릅쓰고 계엄사령관을 강제 연행한 실제 이유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동해안경비사령관으로 전보 발령시키려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대통령 박정희의 총애를 받아 주요 보직을 독점해온 일부 정치군인들을 견제하기 위해 육군참모총장 대장 정승화가 ‘인사조치안’을 작성하여 실행하려고 계획했기 때문인 것으로 밝혀졌다.

 

전개 과정

전두환 보안사령관 겸 합동수사본부장은 11월 중순부터 정승화 총장을 제거하고 군부를 장악할 계획을 세우고, '하나회'를 비롯한 동조 세력 규합에 나섰다. 허화평 보안사 비서실장, 허삼수 보안사 인사처장, 이학봉 보안사 대공처장, 장세동 제30경비단장, 김진영 제33경비단장 등 영관급 후배의 동조를 얻어 모의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11월 말 경 전두환황영시 제1군단장, 노태우 제9사단장, 백운택 제71훈련단장, 박희도, 최세창, 장기오 공수여단장 등 선후배 동료 장성과 거사를 협의했다. 12월 8일 전두환이학봉 중령으로부터 정승화 총장 연행은 일과 시간 후 총장 공관에서 실행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 첨부된 세부계획서를 전달 받고, 이를 확정한 후 허삼수와 우경윤에게 구체적인 계획을 짜도록 지시했다.

 

12월 12일 오후, 전두환은 박희도, 최세창, 장기오, 차규헌, 노태우, 황영시 등 규합한 동조세력을 장세동이 있던 경복궁 내 수도경비사령부 여하 제30경비단 단장실로 모이도록 한 후 시내 일원을 장악하기로 한 계획을 지시, 논의했다. 같은 날 오후 6시, 전두환은 최규하 대통령에게 육군참모총장 체포안에 대한 재가를 제안했으나 거절당했다. 이와 동시에, 전두환의 지시를 받은 허삼수와 우경윤 책임 아래 정총장 연행계획이 진행됐다. 오후 7시, 정승화 총장을 체포하기 위해 병력이 투입됐으며, 육군참모총장 공관에서 무력 충돌이 발생했다. 오후 7시 21분, 결국 정총장은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강제 연행됐다. 21시 30분경, 전두환, 유학성, 황영시 등은 다시 국무총리공관으로 가서 최규하 대통령에게 집단으로 정승화 총장의 연행 · 조사를 재가해 달라고 재차 요구하였으나 다시 거절당했다.

 

이후, 신군부 세력은 육군 참모총장의 강제연행이 부당하다며 원상복귀를 주장하던 3군사령관 이건영 중장, 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 소장, 특전사령관 정병주 소장,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하소곤 소장 등에 대해 하극상의 대항을 감행하고, 이들을 무력으로 제압하며 연행했다. 이 과정에서 신군부측 병력의 무력진압에 대항해 상관인 정병주 소장을 지키려했던 특전사령관 비서실장 김오랑 소령이 사망했다. 12월 13일 새벽부터 신군부 세력은 국방부, 육군 본부, 수도경비사령부 등 주요 군시설을 점령하여 군부의 실권을 완전 장악했다.

 

결국 보안사령관 전두환의 의도대로 사태는 일단락되었다. 최규하 대통령에게는 세 차례 걸쳐 10시간 만인 13일 새벽 4시, 사후 재가가 이루어졌다. 12월 13일 오후, 노재현 국방부 장관이 담화문을 통해 10.26 사건 연류 혐의로 정승화 총장을 연행하고 이와 연관된 일부 장성 또한 구속됐으며, 정승화의 육군참모총장 대신 계엄사령관직에 이희성 육군 대장이 임명되었음을 발표했다. 12.12 사건 이후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이희성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을 직접 임명하고 6인 위원회로 군부의 인사를 조정하여 군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권력 공백기에 최고 실력자가 됐다.

 

미국 측 판단

당시 미국은 12.12 사태 직후, 북한의 남침 가능성을 50% 정도로 판단하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미 중앙정보국(CIA)은 12.12 사태 발생 8일후인 12월 20일 작성한 `남한내 불안정에 대한 북한의 반응'이라는 특별 상황판단 보고서를 통해 이같이 밝혔다.

 

또한, 미국 정부는 신군부가 평시 작전통제권 행사와 관련한 한.미간의 합의를 위반한데 대해 백악관과 미 군부의 강력한 불만을 전달하고 향후 대한민국의 민간정부만을 전폭 지지하겠다는 입장을 표명해 신군부 세력과 긴장감이 고조됐다. 하지만 보름 뒤 신군부 세력에 대한 비판 어조는 다소 누그러져, 사실 상 군부 내 반란을 묵인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측 판단

1979년 12월 20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김일성 주석은 12·12 군사 반란에 대해 "지금 남조선에서는 군 수뇌부가 갈팡질팡하고 있습니다. 연락부와 인민무력부에서는 언제든지 신호 만 떨어지면 즉각 행동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24시간 무휴상태로 들어가야 합니다."는 반응을 보였다.

 

 

반란 이후

12·12는 숙군 목적을 띤 군내부의 반란이었다. 정권을 탈취한다고 하는 의미로의 쿠데타에 해당하는 것은 오히려 1980년의 전국 비상 계엄령으로부터 광주 민주화 운동에 이르는 과정(5.17 쿠데타)이다. 결국 이러한 일련의 사건을 통해 최규하를 사임시키고 신군부가 실권을 잡았기 때문이다.

 

1980년 1월 군장성들의 대대적인 물갈이가 있었고, 그 이후에도 공사석에서 12·12 군사 반란에 대해 비판적인 발언을 했던 장성들은 내쫓기거나 보직이 변경되는 등, 군부가 정권장악의 도구로 이용될 준비가 갖추어졌다.  미국과의 관계는 신군부의 뜻대로 쉽게 풀리지 않았다. 주한 미군사령관 존 위컴 장군은 군사 반란을 인정하지 않았다.

 

박정희 정부 시대와 비슷한 군부 체제를 형성하려는 신군부의 움직임에 저항하여 5월 중순부터 대규모 학생 시위가 발생했다. 신군부는 집권 시나리오에 따라 1980년 5월 17일 군사 쿠데타에 의한 전국 비상 계엄령을 선포했다. 5월 18일부터 이에 항거한 광주 민주화 운동이 발생하자, 계엄군을 투입해 무력으로 진압했다. 5월 24일 김재규박정희 피살 관련자는 대법원 판결 확정 후 즉결심판으로 처형됐다. 같은 해 8월, 최규하 대통령은 신군부의 압력으로 사임했고 9월 1일에는 전두환 장군이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회에서 제11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국보위는 헌법을 개정했고, 제5공화국이 성립되었다.

 

처벌

문민정부가 들어서자 김영삼 대통령은 12·12 사건을 "하극상에 의한 쿠데타적 사건"이라고 규정했다. 박계동 의원의 노태우 비자금 폭로로 시작된 역사 바로 세우기 작업은 전두환노태우에 대한 고발로 이어지기까지에 이른다. 1994년 12월 검찰은 12·12 사건은 군사반란이 맞지만 국내의 혼란을 우려하여 기소 유예 처분한다고 발표했다. 12.12 사건 기소 유예 처분에 대한 헌법소원심판 청구사건에서 헌법재판소1995년 1월 20일 검찰의 12·12사건 기소유예에 대해 불기소처분 취소 판결을 내렸다. 1995년 7월 검찰은 5ㆍ18 사건은 전두환의 정국 장악 의도에 진행됐다는 수사 결과를 발표하면서도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로 기소하지 않았다. 이후 국회에서 5·18 특별법을 제정하였고 신군부 인사들의 새로운 혐의가 발견되자 검찰1995년 12월 12·12, 5·18 사건 재수사에 나섰다. 결국 전두환,노태우 등의 신군부 핵심 인사는 1월 23일 5·18 사건에서의 내란혐의로, 2월 28일 12·12 사건에서의 반란혐의로 구속 기소되었다.

 

12·12, 5·18 사건 재판 1심에서는 전두환은 사형, 노태우는 무기징역의 판결을 내렸다. 고등법원에서는 전두환에게는 무기징역으로 감경했다. 대한민국의 대법원은 12·12 군사반란에 대해서 전두환과 노태우 등에게 반란죄를 인정했다. 대법원은 군사반란과 내란을 통하여 정권을 장악한 후 국민투표를 거쳐 헌법을 개정하고 개정된 헌법에 따라 국가를 통치하여 왔다고 하더라도 그 군사반란과 내란을 통하여 새로운 법질서를 수립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으며, 헌법에 정한 민주적 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 폭력에 의하여 헌법기관의 권능행사를 불가능하게 하거나 정권을 장악하는 행위는 어떠한 경우에도 용인될 수 없다고 판시했다.

 

사면

1997년 대선을 앞두고 정치 보복은 없다는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와 김영삼 대통령의 합의에 따라 1997년 12월 22일 김영삼 대통령은 12·12, 5·18 사건 관계자를 특별 사면했다.

 

반란군과 진압군

군사 반란 당시 하나회 핵심 인물

보안사
  • 전두환 보안사령관 겸 육군본부 합동수사본부장 (소장)
  • 허화평 보안사 비서실장 (대령)
  • 허삼수 보안사 인사처장 (대령)
  • 이학봉 보안사 수사과장 (중령)
  • 정도영 보안사 보안처장 (대령)
  • 권정달 보안사 정보처장 (대령)


수경사
  • 장세동 수경사 30경비단장 (대령) (당시 장태완 수도경비사령부 사령관 (소장) 직속부하)
  • 김진영 수경사 33경비단장 (대령) (당시 장태완 수도경비사령부 사령관 (소장) 직속부하)
  • 조홍 수경사 헌병단장 (대령) (당시 장태완 수도경비사령부 사령관 (소장) 직속부하)
  • 최석립 수경사 33헌병대장 (중령) (33헌병대는 청와대 경호실 배속부대이나, 10.26 직후 합동수사본부(본부장:전두환)에 임시로 배속됨 )
  • 신윤희 수경사 헌병부단장 (중령)
육군본부 및 국방부
  • 유학성 국방부 군수차관보 (중장)
  • 우경윤 육군본부 범죄수사단장 (대령) (당시 김진기 헌병감 (준장) 직속부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불법연행에 직접 관여)
  • 성환옥 육군본부 헌병감실 장교 (대령) (당시 김진기 헌병감 (준장) 직속부하)
  • 변규수 육군본부 보안부대장 (준장)
사단 군단 및 여단 제군 사령부
  • 차규헌 육군 수도군단장 (중장)
  • 황영시 육군 제1군단장 (중장)
  • 최동수 육군 제1군단 헌병대장 (대령)
  • 백운택 육군 제71방위사단장 (준장)
  • 박준병 육군 제20기계화보병사단장 (소장)
  • 박희모 육군 제30기계화보병사단장 (소장)
  • 노태우 9사단장 (소장)
  • 정호용 50사단장 (소장)
  • 구창희 9사단 참모장 (대령)
  • 이상규 제1기갑여단장 (준장)


특전사
  • 박희도 특전사 제1공수특전여단장 (준장) (당시 정병주 특전사령관 (소장) 직속부하)
  • 최세창 특전사 제3공수특전여단장 (준장) (당시 정병주 특전사령관 (소장) 직속부하)
  • 장기오 특전사 제5공수특전여단장 (준장) (당시 정병주 특전사령관 (소장) 직속부하)
  • 이기룡 제1공수특전여단 참모장(대령)
  • 박종규 제3공수특전여단 15대대장 (중령)
대통령(청와대) 경호부대
  • 고명승 대통령(청와대)경호실 작전과장 (대령)
  • 정동호 대통령(청와대)경호실장 직무대리 (준장) (10.26사건 당시 이재전 대통령(청와대)경호실 차장 (중장) 직속부하)


 

진압측 인물

수경사

  •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 (소장)
  • 김기택 수경사 참모장 (준장)
  • 김수택 비서실장 (중령)
  • 박동원 수경사 작전참모 (대령)
  • 구명회 수경사 야포단장 (대령)

특전사

  • 정병주 특전사령관 (소장)
  • 김오랑 비서실장 (소령)
  • 이순길 특전사 부사령관 (준장)
  • 윤흥기 제9공수특전여단장 (준장)

사단및군단 제군사령부

  • 이건영 제3군사령관 (중장)
  • 제26기계화사단장 (소장)
  • 수도기계화사단장 (소장)

육군본부 및 국방부

  • 노재현 국방부장관
  • 김종환 합동참모의장 (대장)
  • 류병현 연합사부사령관 (대장)
  • 존 위컴 한미연합사 사령관 (대장)
  • 윤성민 육군참모차장 (중장)
  • 문홍구 합동참모본부장 (중장)
  • 김진기 육군본부 헌병감 (준장)
  • 하소곤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소장)
  • 안종훈 육군본부 군수참모부장 (소장)
  • 구정길 육군본부 헌병경호대장 (중령)
  • 천주원 육군본부 인사참모부장 (소장)
  • 이범진 국방부 소속 (소장)
  • 김광해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비서실장 (중령)


 

기타

  • 최규하 대통령
  • 신현확 총리
  •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대장)
  • 김인선 육군참모총장 경호 대장 (대위)
  • 이재천 육군참모총장 부관 (소령)
  • 이희성 중앙정보부장 서리 (중장)
  • 우국일 보안사 참모장 (준장)

 

  

 

 

5.17 쿠테타

 

5·17 쿠데타1980년 5월 17일 전두환·노태우를 비롯한 신군부 인사가 정권 장악을 위해 주도한 비상계엄 확대조치에 의해 발생한 사건이다. 신군부는 시국을 수습한다는 명목 아래 5월 17일 24시부터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면서 정당 및 정치활동 금지·국회 폐쇄·국보위 설치 등의 조치를 내리고, 불법적으로 학생·정치인·재야인사 2699명을 체포했다.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로 실권을 장악한 신군부비상계엄 기간 제5공화국 정권을 창출하는 과정에서 인권유린·헌정파괴 행위를 자행했다. 이 사건은 1997년 12.12 5.18 사건 재판 당시 사건명칭인 5·18 내란 사건으로 불리는 경우도 있다.

 

 

배경

1979년 10·26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살해당하자 대한민국 정부는 국무총리 최규하를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임명하고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10월 27일 계엄사령관에 육군참모총장 정승화가, 10·26 사건 수사를 담당하는 합동수사본부장에 보안사령관 전두환이 취임했다. 10·26 사건을 계기로 긴급조치로 민주화 여론을 억누르던 유신헌법을 폐지하고, 개헌하려는 움직임이 형성됐다. 통일주체국민회의 선거에 의해 당선된 최규하는 12월 7일 0시 대통령 취임 직후 헌법에 대한 일체의 비판이나 반대 논의를 금지하는 긴급조치 제9호를 해제하면서 민주적인 헌법으로 개정을 약속하고, 정치적 억압을 완화했다. 하지만 12월 12일 군부내 강경파 세력인 하나회12·12 군사반란을 일으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강제 연행하고 군 주도권을 장악했다. 12·12 군사반란으로 등장한 신군부는 민주화 일정을 불투명하게 만들고 명확하게 제시하지 않았다. 1980년 2월부터 보안사령부는 폐지됐던 정보처를 부활시키고, 민주화 여론을 군부의 정치 참여를 정당화하는 방향으로 전환하기 위해 언론에 대한 회유를 핵심으로 하는 K-공작 계획를 실시했다. 같은해 3월 보안사령관 전두환은 육군 중장으로 진급한데 이어, 4월 중앙정보부장 서리(부총리급)를 겸직하며 양대 정보기구를 장악하고 국내 정치에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

1980년 5월 초순경부터 전두환을 중심으로 하는 신군부 인사들은 시국을 수습한다는 명목 아래 본격적으로 정국을 장악하고 집권을 하기 위한 방안을 의논했다. 5월 12일 보안사에서는 전두환의 지시를 받아 '비상계엄 전국확대'·'국회 해산'·'국가보위 비상기구 설치' 등을 골자로 하는 집권 시나리오로 시국수습방안을 기획했다. 지역계엄만으로는 신군부가 정국을 장악하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에 전두환 퇴진 등을 요구하는 국민들의 시위와 저항을 강력히 제압하고 군부가 전면에 나서서 정국을 장악하기 위해서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국가보위 비상기구를 설치해 내각을 조종·통제하는 기능을 군부가 수행하는 과정에서 헌법상 계엄해제 요구권을 가지고 있는 국회가 계엄해제를 요구할 우려가 있어 신군부에 의한 지속적인 정국장악을 담보하기 위해서 정치인 체포와 국회해산이 필요하다는 것이 시국수습방안의 기획의도였다.[2] 이후 전두환·노태우·황영시·차규헌·유학성·정호용 등 신군부 핵심 인사들은 시국수습방안을 실행하기 위한 논의를 순차적으로 하고, 전군주요지휘관회의에서 군지휘관들의 지지결의를 유도함으로써 전군의 의사를 배경으로 시국수습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5월 15일 보안사 대공처장 이학봉김대중·김종필 등 주요 정치인을 연행하기 위해 '국기문란자 수사계획', '권력형 부정축재자 수사계획'을 마련해 전두환에게 보고하고, 전두환은 이학봉에게 검거 준비를 지시했다.

 

1980년 4월 말부터 학생 운동권과 정치권에서 보안사령관과 중앙정보부장 서리를 겸임하면서 권력을 강화하는 전두환을 경계하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5월 1일 서울대 총학생회는 철야회의 끝에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중심으로 하는 신군부의 정치 개입이 민주화에 가장 큰 걸림돌이라는 이유로 정치 투쟁을 결정했다. 5월 초부터 대학생들은 전두환 퇴진·민주화 일정 제시 등의 시위 구호를 외치면서 민주화 요구 시위를 벌였다. 한편 5월 중순부터 정부와 국회에서는 민주화 일정을 앞당기고 있었다. 5월 12일 신민당공화당 양당 총무들은 개헌안 접수하고, 5월 20일 10시 임시국회의 소집해 계엄 해제·정치일정 단축 등 정치 현안 문제를 논의하기로 합의했다. 5월 13일부터 대학생들에 의한 본격적인 가두시위가 시작됐다. 5월 15일 서울역에는 대학생 10만명이 결집했다. 같은 날 신군부의 동향이 심상치 않자 대학생들은 오후 8시까지 시위를 하던 중 자진 해산했다. 이날 신현확 총리는 정치 일정을 앞당기겠다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하면서, 80년 말까지 개헌안을 확정하고 81년 양대 선거를 실시해 정권을 이양하겠다고 말했다. 5월 16일 전국총학생회 회장단은 정상수업을 받으며 당분간 시국을 관망하기로 결정하고 당분간 집회를 중지하기 결정했다.

 

북괴남침설 악용

1980년 5월 10일 중앙정보부는 일본 내각조사실의 첩보를 토대로 대북 특이동향을 경고하는 보고서, '북괴남침설'을 작성했다. 5월 11일 육군본부 정보참보부에서는 '북괴남침설'을 분석하고 이와 같은 첩보는 가치 없다고 결론내렸다. 5월 13일 미국 국무부 대변인은 '북괴남침설'와 관련해 "우리가 가진 정보에 따르면 북한에서 평소와 다른 부대이동을 볼 수 없으며 한국에 대한 모종의 공격이 임박했다고 믿을 만한 움직임이 없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주한미군 사령관 존 위컴은 "전두환이 청와대의 주인이 되기 위한 구실"라고 평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두환은 5월 12일 심야에 임시 국무회의에서 관련 내용을 과장해서 보고했다. 남침설을 제보했다고 알려진 당시 일본의 내각 조사실 한반도 담당반장과 나카소네 당시 방위성 장관 등은 "그런 구체적인 내용을 말한 적도 그런 정보도 없었다"고 밝혀 5월 17일을 전후한 '북괴남침설'은 신군부에 의해 조작된 것으로 드러났다. 신군부는 북한의 남침 가능성을 빌미로 위기감을 조성하고 비상계엄 확대조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남침 첩보를 악용했던 것이다.

 

군부대의 사전이동

전두환·황영시·정호용 등 신군부 핵심세력은 집권 시나리오에 따라 이루어질 조치에 대한 반대 집회가 있을 것으로 예상해 진압병력 투입 및 강경진압 방침을 결정했다. 시국수습방안은 계엄 확대와 동시에 공수부대를 투입해 과감한 방법의 타격으로 시위대를 진압한다는 지침이 즉각 실행될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1980년 3월 초부터 이미 학생 시위가 가열될 것을 대비해 전국 군 부대에 공세적 폭동진압훈련인 충정훈련이 강도높게 실시됐다.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 이전, 신군부는 군부대를 사전 이동시켜 시위 진압 준비를 마쳤다. 5월 초부터 경기도 양평의 제20사단, 강원도 화천의 제11공수여단, 충청북도 증평의 제13공수여단 등은 서울로 이동했으며, 동시에 수도경비사령부에 배속됐다. 5월 10일부터 2군사령부에서는 광주·대전 등에 제7공수여단을 배치하는 방안을 의논했다. 5월 15일 제7공수여단은 광주·대전으로 이동할 준비를 마쳤고, 제31사단은 광주 지역의 주요 보안 목표를 점거했다.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

신군부는 1980년 5월 20일 임시국회가 개회되면 정국 장악에 차질이 빚어질 것을 우려해서, 김재규에 대한 대법원 판결이 확정되는 5월 20일 이후에 시행하겠다던 당초 계획을 수정, 시국수습방안을 17일으로 앞당겨 시행하기로 결정했다. 5월 17일 9시 30분경 전두환은 권정달주영복에게 보내, 시국수습방안을 자신이 대통령에게 보고할 예정이니 대통령에게 전군주요지휘관회의 결의사항이라고 말하라고 요구했다. 17일 오전 이학봉은 전두환의 지시에 따라 전국 보안부대에 17일 24시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니 학생 등 시위 주동자들을 일제 검거할 준비를 하라고 지시했다.

 

17일 정오 신군부는 정부로부터 계엄 확대조치를 이끌어내기 위해 전군주요지휘관회의를 열었다. 노태우·정호용·황영시 등 신군부 핵심 인사들은 전군주요지휘관회의에서 비상계엄 확대 방안을 역설했으며, 비상계엄 전국확대를 통한 군의 정치개입을 결정하도록 유도했다. 17일 오후 5시 전두환, 주영복 등은 전군의 일치된 의견임을 내세워 대통령과 국무총리에게 '비상계엄 전국확대'·'비상기구 설치' 등의 조치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했다. 17일 오후 9시 중앙청에 집총한 군인들이 도열하고 외부와의 연락이 끊어진 상황 속에서 국무회의가 열려 특별한 토의 없이 비상계엄 확대안이 통과됐다. 이에 따라 5월 17일 24시 부로 비상 계엄령이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으로 확대됐다. 계엄 확대와 동시에 신군부는 계엄사령관 이희성 명의로 계엄포고 제10호를 발령하면서 정치활동 금지·대학교 휴교령·언론보도 사전검열 강화·집회 및 시위 금지 등의 조치를 내렸다. 이는 헌법에 규정된 국회 통보 절차도 거치지 않고 계엄군을 동원해 국회를 무력으로 봉쇄한 채 벌인 불법조치였다. 5월 18일 새벽 2시 신군부는 국회를 점령한 뒤 무력으로 봉쇄했고, 헌정중단 사태가 발생했다. 한편 비상계엄이 확대되기 직전, 보안사에서 예비검속을 통해 김대중·김종필를 비롯한 주요 정치인 26명은 합동수사본부로 불법 연행하면서 학생·정치인·재야인사 2699명을 체포하고 신민당 총재 김영삼 역시 가택연금 처분내리는 정치 탄압을 감행했다.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로 인해 국회와 정부에 의해 진행된 개헌 논의가 중지됐다. 서울의 봄은 허무하게 막을 내렸다.

 

신군부의 정권장악

 

 

전두환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에 따라 전국 보안 목표에 계엄군이 투입됐다. 투입된 계엄군의 90%가 대학교에 주둔했다는 점을 볼 때, 계엄군의 투입은 군부에 반대하는 학생 시위를 막기 위한 목적이었다. 5월 18일 오전 전남대학교 학생 수 백여명이 학교 정문 앞에서 계엄령 확대와 휴교령에 반발하는 시위를 했는데, 공수부대는 학생들을 구타하며 잔혹하게 진압했다. 광주 시내에 투입된 공수부대는 대검·곤봉으로 과격진압을 전개했고, 이는 광주 시민을 자극해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도화선이 됐다. 당시 신군부의 핵심인사였던 전두환은 중앙정보부장과 보안사령관이라는 직위를 이용해 지휘계통에 불법 개입함으로써 강경진압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했다. 신군부는 5월 20일 오전 계엄령 해제와 헌법 개정을 논의하려는 임시국회를 무산시키기 위해 수도경비사령부 소속 제30경비단 병력을 동원하여 국회를 봉쇄하고 국회의원의 등원을 강제로 저지했다.

 

신군부는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에 항거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한 다음, 내각을 조종·통제하는 초헌법적 기구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를 설치해 실질적으로 정권을 장악했다. 국보위 상임위원장에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상임위 분과위원장에 현직 군인이 중심으로 선임됐다. 신군부 세력은 국보위를 기반으로 통치권을 행사했으며, 군부의 의도에 따라 사회를 개조하는 작업을 시행했다. 전두환은 국보위 사회정화분과위원회를 통해 공직자 숙정계획을 입안하고 1980년 7월 31일까지 공직자 총 8061명에게 사임을 강요했으며[8], 국보위 문교공보분과위원회를 통해 1980년 10월 말까지 기사 검열반대나 제작 거부운동을 주도해 보안사의 '언론 정화자 명단'에 오른 기자 933명을 각 언론사의 자율정화 형식으로 해직하도록 했다. 국보위 사회정화분과위원회는 사회악일소특별조치 및 계엄포고령 제19호에 따라 삼청교육대를 설치하고, 사회정화계획에 따라 합동수사본부에 수사지시를 내려 10·27 법난를 일으켰다.

 

1980년 6월 말부터 국보위 법사분과위원회가 개헌안을 연구하고, 전두환·노태우 등 신군부 주요 인사들이 모인 자리에서 대통령 단임제와 선거인단에 의한 선출 등을 골자로 한 개헌안이 확정됐다. 8월 14일로 예정된 김대중 등에 대한 내란음모사건의 재판을 앞두고 보안사는 양병호, 민문기, 임항준, 김윤행, 서윤홍 대법원 판사를 일괄 사직하도록 강요했다. 8월 16일 국정 수행에 한계를 느낀 최규하 대통령이 사임하고 8월 27일 통일주체국민회의 선거에 의해 전두환이 제11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10월 27일 계엄령하에 치뤄진 국민 투표를 통해 제5공화국 헌법이 공포됐다. 제5공화국 헌법 부칙에 따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는 입법권을 가진 임시 입법 기구 국가보위입법회의로 개편됐다. 국가보위입법회의는 국회의 역할을 대행해 언론기본법, 노동관계법, 정치풍토쇄신을위한특별조치법 등 189개의 법안을 통과했다.

 

신군부는 제5공화국의 출범을 앞두고 집권 기반을 다지기 위해 정치적 정지작업에 나섰다. 80년 11월 전두환과 노태우(보안사령관)는 보안사와 중앙정보부에 지시해 K-공작계획의 결과를 바탕으로 언론기관 통폐합방안을 마련한 다음, 정보기관을 동원해 각 언론사를 협박함으로써 언론 강제 통폐합을 시행했다.

 

전두환은 보안사와 중앙정보부에 지시해 정치인별 신상카드를 가지고 정치 활동 규제 대상을 선정하게 하고 이를 결재해 사회정화위원회에 그 명단을 전달, 80년 11월 12일 811명에 대한 정치활동 규제조치를 발표하게 했으며, 정치활동 규제조치로 신군부의 집권에 방해가 되는 구 정치인들의 정치적 도전을 막기 위해 3김씨를 비롯한 500여명의 유력정치인들을 정치무대에서 퇴출시켰다. 이후 신군부는 신군부의 정치참여를 위한 여당격인 민주정의당의 창당뿐만 아니라 민주한국당 등 다수의 친여 성향 야당 창당에도 직간접적으로 개입을 했다. 1981년 1월 23일 신군부가 조작한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연루된 김대중에 대한 사형 판결이 확정됐다. 1981년 3월 3일 전두환이 제12대 대통령이 되면서 공식적으로 제5공화국이 출범했다.

 

당시 주요 인물의 평가

최규하정부의 국무총리를 역임했던 신현확은 1980년 5월 당시 신군부 세력으로 부터 시국수습방안 결재 요구를 받고 나서,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비상계엄 전국확대, 국회해산, 국가보위 비상기구 설치를 통해 행정부·국회 등 주요 헌법기관을 사실상 장악해 국정을 명실공히 주도하고 나아가 정권까지도 찬탈 하려는 마각을 드러낸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신현확은 비상계엄 조치로 인해 실질적으로 내각이 국정운영과정에서 배제됐으며, 이에 따라 무력감을 느끼게 되어 5월 20일 사퇴했다고 말했다. 80년 5월 당시 신현확은 "국보위 설치와 국회 해산에는 내각이 거의 전원 반대하는 입장이며 비상계엄확대조치안은 대통령이 최종 결재할 사안이므로 시간을 두고 결정할 일"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이에 불구하고, 신군부 세력은 임시 국무회의장에 30경비단과 헌병대 병력을 불법동원,강압적인 분위기를 조성한뒤 5.17 비상계엄확대안을 강행 통과시켰다.

 

1980년 5월 17일 최규하 전 대통령은 '시국수습방안' 첫 재가 요구에 반대 의사를 밝혔다. 최규하는 당시 이희성 계엄사령관 등에게 "헌정질서가 뒤바뀌는 것은 5.16 정변 한번으로 족하다. 모든 일은 법테두리안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말해 신군부측의 `시국수습방안'에 반대하는 입장을 명백히 했다.

 

신민당 총재 김영삼은 5월 20일 상도동 자택에서 신군부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는 "오늘 계엄통치를 확대 강화한 5 ·17 사태를, 민주회복이라는 국민적 목표를 배신한 폭거로 규정한다. 계엄당국의 강압통치로 빚어진 유혈사태는 이 나라를 파국으로 몰아가고있다."면서 '국민적 목표를 배신한 5·17 폭거'라는 기자회견문을 발표했다.

 

미국 국무부는 5월 18일과 이튿날인 5월 19일에도 워싱턴에서 "우리는 비상계엄이 대한민국 전역에 확대 실시되고, 대학이 폐쇄되고, 많은 정치 지도자와 학생 지도자들이 체포된 것에 대해 심히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정치 자유화를 향한 발전에는 법의 준수가 수반되어야 한다. 우리는 한국의 지도자들에게 우리가 매우 우려하고 있는 바를 분명히 밝혔고, 崔대통령이 일찍이 밝힌 바와 같이 헌법 개정과 광범위한 지지기반을 갖춘 문민정부 선거가 즉시 계속되어야 한다는 우리의 신념을 강조했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해 신군부의 조치에 우려하는 입장을 밝혔다.

 

 

미국의 반응

1979년 10·26 사건 직후 미국은 유신헌법 개정을 통한 민간 정부 수립을 희망하면서 대한민국의 정치일정에 깊숙이 관여했다. 12·12 군사 반란으로 신군부가 실세로 군부를 장악하고 나서 미국 정부와 신군부 간의 갈등이 고조됐지만, 결국 미국 정부는 전두환이 한국군의 실권을 장악한다고 해서 반드시 한국의 민주화가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라 판단, 사실 상 군사 반란을 묵인했다. 12·12 군사 반란 이후, 미국은 신군부가 국방에만 주력하도록 하고 대한민국에 민간정부를 수립하는 것을 목표로 설정했다. 미국은 전두환의 중앙정보부장 겸임·경제 사정 악화·언론 검열 강화 등으로 민주화 일정이 지연되는 것을 우려했다.

 

1980년 5월 8일 학생 시위가 가열되는 가운데 주한 미국대사 글라이스틴은 전두환(보안사령관), 최광수(대통령 비서실장)와 면담을 가졌다. 그는 군 투입을 통한 폭력 사태와 체포 상황을 우려하는 입장을 보이면서도, "한국 정부의 법질서 유지 필요성을 이해하며, 미국은 군대를 투입하는 '비상계획'의 수립을 막지 않겠다"고 밝혔다. 글라이스틴은 면담 이후 한국 정부가 군투입의 위험성을 알고 있으며 군투입에 신중한 입장이라고 미국 국무부에 보고했다. 이는 결과적으로 신군부 주도 세력에 대해 안이하게 판단, 정국 흐름을 오판한 것이었다. 5월 23일 박충훈 국무총리 서리와 글라이스틴간의 회동에서도 보이듯이, 당시 미국의 입장은 서울에서 발생한 학생 시위를 확고하게 진압하는 것은 필요할지 모르지만 계엄령 확대나 정치인 체포와 같은 정치 탄압을 수반하는 데 반대한다는 것이었다.

 

5월 17일 신군부가 계엄확대와 정치인 체포 준비를 완료한 뒤, 미국은 비상계엄 2시간 전에 신군부로부터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를 갑작스럽게 통보받았다. 월리엄 글라이스틴 주한 미국대사는 워싱턴의 지시에 따라 5월 18일 최규하 전 대통령을 방문해 전날의 탄압과 비상계엄 확대는 '충격적이고 경악할 일'이라는 미국 측의 강력한 항의를 전달했다. 미국이 신군부가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를 내리도록 조종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미국은 신군부의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를 사전에 알지 못했고, 미국이 이와 관련됐다는 주장은 전혀 근거가 없다.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에 항거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 발발하자, 미국은 신군부에 평화적 해결을 촉구하는 입장을 거듭 밝혔지만 신군부의 무력 진압을 강력하게 제지하지는 않았다.

 

5월 30일 전두환이 국보위 상임위원장에 취임하고 신군부로 권력이 완전히 넘어가게 되자, 미국은 대화를 꺼리던 이전과 달리 실권자가 된 전두환과 접촉하기 시작했다. 미국 정부 내에서 신군부를 배제하고 북한과 대화를 해서라도 신군부를 강경하게 다뤄야 한다는 카터·머스키 등 강경파와 전두환을 현실로 인정하자는 홀브룩·글라이스틴 등 신중파의 대립이 있었지만, 결국 미국은 전두환을 현실로 인정하는 대신 타협을 통해 최대한 한국의 정치발전을 이끌어 낸다는 쪽으로 방향을 설정했다. 계엄령 아래서 보안사에 의해 통제되던 한국언론은 한국의 사태 전개에 대한 미국관리들의 말을 번번이 무시하고 왜곡 하기도 했다. 미국관리가 한미 안보관계를 지지하는 말을 하면 그 말은 반드시 대서특필됐으나, 민주화와 인권존중을 촉구하는 말은 대수롭지 않게 취급되거나 아예 보도되지도 않았다. 당시 지미 카터 미 행정부는 이란 인질 사건과 대통령 선거를 맞아 어려움을 겪고 있어 한국 상황에 신경 쓸 여유를 갖지 못 했고, 전두환은 철저하게 친미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미국의 이러한 상황을 활용함으로써 집권을 굳혔다. 1981년 1월 20일 대통령에 취임한 로널드 레이건은 전두환을 미국으로 초청했다. 81년 2월 2일 방미한 전두환은 정치적으로 자신을 지지해 달라고 미국에 요청을 했지만 거절당했다. 전두환의 미국 방문은 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군당국의 유혈진압을 계기로 불안정했던 전두환 정권에 대한 미국의 공식지지로 해석돼 비판을 받기도 했다.

 

 

관련 판결

1993년 문민정부가 출범한 뒤,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에 대한 처벌 요구가 잇달았다. 김영삼 대통령은 5·13 담화에서 '문민정부는 민주 정부로써 광주민주화운동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표현을 사용하여 광주민주화운동을 복권했다. 하지만 전·노 두 전직 대통령들을 법적으로 처벌하기 보다 역사의 평가에 맡기자는 입장을 보였다. 1994년 5월 13일 5·18 사건의 피해자 3백 22명은 전두환·노태우 등 5.18 관련 책임자 35명을 내란 및 내란 목적 살인 혐의로 서울지검에 고소했다. 1995년 7월 18일 서울지검은 5·18 사건이 전두환의 정권 장악 의도에 따라 최규하 대통령의 사전 지시없이 기획·입안해 추진됐다는 수사결과를 발표했음에도 불구하고, 피의자들에 대해 '공소권 없음' 결정을 내렸다.[35] 이는 각계 각층의 거센 비판을 받았다. 김영삼 대통령은 여론에 따라 5·18 특별법 제정을 수용했다. 1995년 11월 27일 검찰은 5·18 사건 재수사를 결정하고, 12월 3일 전두환을 안양교도소에 수감했다.[36] 12월 15일 헌법재판소는 '성공한 쿠데타도 처벌 가능하다'는 취지의 인용결정을 내렸다.[37] 12월 21일 국회5·18 특별법을 제정했다. 1996년 1월 23일 공소시효 만료 하루 전 검찰은 5·18 사건 관련자들을 전격적으로 구속 기소했다.[38] 1997년 4월 대법원은 5.18 사건에서 두 전 대통령 및 다른 피의자들에 대해 “내란수괴·내란모의참여·내란중요임무종사·내란목적살인·반란수괴·반란모의참여·반란중요임무종사”등의 유죄를 인정했다.

 

대법원은 성공한 쿠데타의 가벌성에 대해 “피고인들의 정권장악을 통해 새로운 법질서를 수립한 것으로 볼 수 없고, 우리의 헌법질서하에서는 헌법에 의한 민주적 절차를 거치지 않고 폭력에 의해 헌법기관의 권능행사를 불가능하게 하거나 정권을 장악한 행위는 어떤 경우에도 용인될 수 없다.”라고 적시했다. 대법원은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와 이후의 정권 장악 과정을 내란죄반란죄로 인정하면서 아래와 같이 정리했다.

12·12군사반란을 통하여 군의 지휘권을 실질적으로 장악함과 아울러 국가의 정보기관을 완전히 장악한 뒤, 1980. 5. 초순경부터 이른바 '시국수습방안', '국기문란자 수사계획', '권력형 부정축재자 수사계획'을 마련하여 이를 검토, 추진하기로 모의하고, 그 계획에 따라 1981. 1. 24. 비상계엄의 해제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예비검속, 비상계엄의 전국확대, 국회의사당 점거·폐쇄, 광주시위진압,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의 설치·운영, 언론기관 통폐합, 정치활동 규제 등 일련의 행위를 강압에 의하여 행한 사실을 인정한 다음, 피고인들이 행한 위와 같은 일련의 행위는 결국 강압에 의하여 헌법기관인 대통령, 국무회의, 국회의원 등의 권한을 침해하거나 배제함으로써 그 권능행사를 사실상 불가능하게 한 것이므로 국헌문란에 해당된다.

 

 


이러한 10.26 사태를 계기로 군대 내 하나화를 중심으로 일부 정치화된 집단은 1979년 12월 12일 불법적으로 군권을 차지하고 정치적 실권도 장악하였다. 이에 1980년 군인들의 정권 장악 기도에 반대하고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서울의 봄)되었는데 특히 광주에서 시위는 절정을 이루어 5.18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민주화 운동과 정치인들을 억압하며 실권을 장악한 군부 세력은 강압적 분위기를 조성하여 대통령 선거인단에 의한 간접 대통령 선거와 7년 단임을 내용으로 하는 헌법 개정을 단행하였고 이에 따라 전두환이 대통령에 취임하여 제 5 공화국을 열었다.


전두환 정부는 정의 사회 구현과 복지 사회 건설을 표방하였으나 여러 부정과 비리로 말미암아 집권 내내 시민들의 격렬한 비판과 저항을 받았다. 특히 1987년에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들의 열망이 6월 민주화 항쟁으로 승화되었는데, 당시 군부 세력이 이에 굴복하여 6.29 민주화 선언이 이루어졌다.


6.29 민주화 선언으로 직선제와 5년 단임의 대통령제를 골자로 하는 헌법 개정이 이루어졌고 새 헌법에 따라 1988년 출범한 노태우 정부는 서울 올림픽 대회 이후 북방 정책을 추진하여 사회주의 국가들과 국교를 수립하는 등 외교 관계를 확대하였다.


1993년 출범한 김영삼 정부는 역사 바로 세우기, 금융 실명제 법제화, 지방 자치의 전면적 실시 등을 추진하였고, 기업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내외적 경제 여건의 악화와 외환 부족으로 인해 1997년 말 외환위기가 발발하여 경제적 위기를 겪게 되었다.


1998년 출범한 김대중 정부는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의 동시 발전을 추진하여 정부 조직 개편과 금융권 및 대기업의 구조 조정을 추진하였고, 남북정상회담 등 한반도 평화 정착을 위해 노력하였다.


2003년 출범한 노무현 정부는 참여 정부를 표방하고 국민과 함께하는 민주주의, 더불어 사는 균형 발전 사회,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시아 시대를 국정 지표로 추진하였다.


2008년 출범한 이명박 정부는 일류 국가의 건설을 위해 잘사는 국민, 따뜻한 사회, 강한 나라를 추구하며 섬기는 정부, 활기찬 시장 경제, 능동적 복지, 인재 대국, 성숙한 세계 국가를 국정 지표로 삼고 지금까지 국정을 수행하여 왔으나 각종 대통령 인친척을 비롯하여 권력형 비리가  속출하여 비리 정권으로 추락하게 되었고 세계 경치 침체로 인한 국내 경기 침체로 정권의 부도덕성은 물론 국민들은 심각한 빈부의 격차, 초고령, 저출산, 높은 실업율, 대기업 이익 독식, 대북 정책 부재 등 국민들의 민심이 이미 떠난 상태이며 금년 대선을 앞두고 대선 후보들의 치열한 선거전으로 국론 분열은 물론 국제정세는 도외시한채 정권을 잡기 위해 소모적인 비방과 정쟁을 일삼고 있어 국력의 낭비는 물론 국민들은 현실적인 삶에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다. 

 

 

 

 

10.26과 부마항쟁

 

현직 중앙정보부장이 대통령을 권총 살해한 10.26사건은 역사 상 어떤 자리매김을 받을까. 대통령 박정희를 제거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대해 어떻게 가해야 할 것인가. 의리와 배신, 권력경쟁과 충동적 행동, 정국대처에서 강경파와 온건파 간의 대립, 망상적 사명감과 소영웅심…. 지금까지 10.26 김재규 거사에 대해 이런 평가들이 유행어처럼 전파돼 왔다.

그런 평가들은 10.26사건과 김재규에 대해 맨 먼저 재단했던 당시의 전두환 합수부가 발표한 수사결과에 주로 의존한 결과다. 김재규가 경호실장 차지철과의 권력경쟁에서 밀리고 박정희의 신임을 잃으니까 욱하는 충동적 성미에 일을 저질렀다는 수사 발표였다. 김재규가 박정희의 신임을 잃은 이유는 당시 선명야당 노선의 신민당 지도부와 부산마산 시민항쟁에 대해 온건한 입장을 견지했기 때문이었다. 학계나 언론계 일각에서 10.26을 집권세력 내부의 강경파와 온건파 간 대립과 갈등이 표면화한 것이라고 보는 근거이기도 하다.


 

김재규 중정의'큰 영애와 최태민 내사보고서'박정희의 역린 건드려
강경파와 온건파 간 권력투쟁론은 '전두환 합수부 프레임'에 불과


그러나 김재규가 박정희의 역린을 건드린 것은 이런 정치문제보다도 1977년 봄 중앙정보부가 내사해서 작성한 "큰 영애와 최태민에 관한 종합보고서"때문이었다. 김재규는 군사법정에서 이 내사 결과를 보고하고 적절한 조치를 건의하자 박정희가 "정보부가 이런 것까지 내사하나?"라며 언짢은 반응을 보였다고 밝혔다. 그래도 박정희는 당사자인 큰 영애 박근혜 씨와 최태민, 그리고 중앙정보부의 김재규와 수사국장인 백 모씨를 한 자리에 불러 놓고 이른바 '친국'을 벌였다.

 

박근혜 씨와 최태민은 세간에 떠도는 풍문과 중앙정보부의 내사가 음해라면서 강력히 항변했다. 지금 같으면 특검에 맡겨 수사해서 규명해야 할지도 모르는 대통령의 자녀관련 문제였지만 박정희의 친국으로 그 근거가 밝혀지지 못한 채 유야무야로 끝나고 말았다. 당시 중정의 능력을 고려할 때 내사까지 해서 박정희에게 직보할 정도였으니 이는 그렇게 만만한 내용이 아니었을 것이다. 내사보고서는 중정의 문서이니 만큼 당연히 중정의 기밀자료 존안실에 보관돼 있다. 박근혜 후보가 유력한 대선 주자이기 때문에 법률에 의한 정보청구를 통해 검증해야 할 것이다.

10.26사건의 원인에 대해 지금도 웬만한 학자들을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이 집권층 내부의 강경파와 온건파 간의 권력투쟁을 꼽는 것은 '전두환 합수부 프레임'에 갇힌 결과다. 무엇보다도 전두환 합수부는 훗날 대법원이 판결한 내란집단과 동질적 조직이었고 따라서 그들의 수사결과 발표란 실체적 진실과는 가장 거리가 멀다고 볼 수밖에 없다. 강경파에 밀린 온건파로서의 김재규가 아니라 이성적 판단력을 상실한 절대권력에 대한 국가위기 관리자로서 예방조치였다고 보는 것이 옳다.

10.26사건의 원인은 당시 상황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것처럼 면밀히 분석해야 실증과학적인 역사 평가가 가능할 것이다.

첫째는 물론 극단적 반민주체제인 유신독재정권에 대한 국민으로부터의 저항과 민주회복을 요구하는 압력이 크게 폭발한 것을 들어야 한다. 직접적으로 부마항쟁이 큰 원인이었다.

둘째, 당시 유신독재정권의 대국민 인권탄압에 대해 도덕적 근본주의와도 같은 노선을 내세운 미국의 카터 행정부가 강력한 민주헌정 회복을 요구했으나 박정희가 반발함으로써 조성된 한미관계의 파국이 또한 주요 원인으로 작용했다. 김재규는 박정희가 "미국놈들 갈테면 가라고 해"라고 내뱉었다면서 이에 크게 충격 받았다고 밝혔다. 그의 경력을 보면 보안사령관- 군단장- 중앙정보부 차장- 건설부장관을 거친 중앙정보부장으로서 보기 드문 국가안보주의자였음이 드러난다. 그는 미국이 등을 돌리면 "한국은 태평양 상의 일엽편주와도 같이 위태로워진다"고 군사법정 진술을 통해 강조했다.

셋째, 위의 두 가지 사실만으로는 김재규가 박정희를 '확인사살'까지 한 이유가 잘 납득되지 않는다. 거기엔 바깥의 제3자가 알기 어려운 박정희와 김재규 사이의 인간적 감성이 작용한 것 아니냐는 의문이 생긴다. 당시 김재규 변호인단에 참여한 강신옥, 안동일 변호사들의 문제의식이기도 하다. 절대권력자 박정희의 사생활 문란에 대해 직접 그것을 뒷받침해 왔던 중앙정보부 간부들의 실망감과 인간적 환멸 때문에 김재규의 야수성이 폭발했다는 보아야 한다.

10.26이라는 역사적으로 희귀한 사건의 배경에는 이 같은 3대 원인이 작용했으며 여기서 비로소 설득력 있는 설명이 가능해짐을 느낄 수 있다. 이 중 사생활 문제에 대해서 는 학계 인사들이 별반 중시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10.26사건에 대한 군사법정의 신문과 진술 내용은 비밀재판까지 이미 녹취록으로 출판된 바 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1차자료에 속한다. 그런데도 사생활이라는 이유로, 또 남자의 허리 아래 이야기는 역사 평가와 관련 없는 뒷얘기일 뿐이라는 고루한 생각 때문에 소홀히 취급돼 왔다. 그러나 대통령이 국가기관에 전담인력을 두고 권력을 이용해서 외부 여인을 데려다 술자리를 빈번하게 가진 것은 결코 사생활로 가려질 수 없다. 그것은 엄연히 대통령의 권력 행위에 속하며 따라서 사생활이라는 이유로 덮어 두면 안된다. 더구나 10.26 사건도 외부에서 온 두 여인이 동석한 술자리에서 부마항쟁과 이른바 야당 공작을 얘기하다가 터진 것으로 드러났다.

 

 



"민주주의와 박정희 각하는 양립할 수 없어"
10.26은 정당방위"다수 국민 희생 막기 위해 한 사람 죽였다"


당시 태풍전야와도 같은 민심 이반과 전국의 시위 동향에 대한 대책에서 차지철은 무자비한 진압을 주장했다. 차지철은 캄보디아에서 크메르루즈가 1975~79년 사이 3백만명을 학살한 것을 인용하면서 "우리도 한 1,2백만 쯤 싹 쓸어버리면 문제없다"고 내 뱉었다. 어쩌면 자신의 고유한 생각이라기보다는 박정희의 복심을 헤아리고 그것에 추종한 결과였을 가능성도 있다.

김재규는 그런 강경책에 반대해 왔고 10.26 현장에서 차지철의 그 말을 듣고선 크게 충격을 받았다. 그는 당시 폭발한 부산마산 시민항쟁이 불순세력과 야당의 배후조종에 의한 것이라는 차지철 등 강경파의 주장과 강압적 진압대책에 극력 반대했다. 그는 부마 시위사태가 유신독재 체제 때문으로 이유가 있다고 보았다. 불순세력과 학생운동권의 배후조종이 아니라 일반시민 다수가 자발적으로 참여했다고 보고했다. 김재규는 유신체제를 완화해서 민심을 달래야 한다고 박정희에게 건의했다.

이에 박정희는 김재규에 대해 "김영삼을 구속하랬더니 유약한 중앙정보부가 야당 공작도 제대로 하지 못했으며 시국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있다"며 질책했다. 전두환 합수부는 이런 정황을 권력투쟁에서 밀렸다고 했다. 그래서 상관이며 은인인 박정희를 살해하는 패륜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어쩌면 지금까지 박정희 신봉자들이 믿어왔고 그렇게 믿고 싶은 내용이다. 그러나 이것은 김재규 거사의 정당성을 은폐하기 위해 조작된 수사 결과였다. 김재규가 거사 당일 청와대 비서실장 김계원에게 던졌다고 합수부가 발표해서 세간에 회자된 "형님, 나는 한다면 합니다"라는 말도 지어낸 각본이었다. 김재규는 군사법정 인정신문에서 "나는 그런 식의 말을 쓰지 않는다"고 부인했다.

김재규는 군사법정 진술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4.19 혁명이 일어나니까 하야했지만 박정희 각하는 결코 물러날 줄 모르는 분이다"면서 "자유민주주의와 각하는 양립이 불가능하고 민주주의 회복을 요구하는 국민들이 얼마나 희생될지 모르는 상황이다"고 말했다. 그는 "다수 국민의 희생을 막기 위해서 각하 한 사람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고 밝혔다. 비록 그가 법정에 선 피고인으로서 사후 변명을 전혀 안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해도 이 대목은 틀린 말이 아니다. 부마항쟁에 대한 계엄령 선포와 그로부터 불과 7개월 뒤에 일어난 광주민주항쟁에 대한 살상진압을 보더라도 그렇다. 10.26은 독재권력으로부터 다수 국민의 희생을 막기 위한 정당방위 성격이 있었다는 평가가 그래서 나온다.

 

 


10.26으로 유신체제 종식되지 않고 '박정희 없는 박정희체제'이어져
전두환의 하나회 내란집단 12.12와 5.17광주학살로 잔악한 복고반동


그러나 김재규의 그런 거사 목적은 박정희 친위대인 전두환 하나회 집단의 12.12 군사반란과 5.17 광주학살로 실패하고 말았다. 혁명의 역사에서 흔히 나타나는 복고반동 그것이었다. 여기서 1인중심 유신체제가 10.26 거사에 의해 박정희가 제거됨으로써 종식됐다는 일부의 평가는 옳지 않다는 근거가 드러난다. 유신체제는 10.26으로 종말을 고하기는커녕 더욱 잔악한 5.17 내란을 거쳐 친위대 전두환 노태우 등의 하나회집단에 의해 계속 이어졌다. 그것은 유신체제를 그대로 계승한 '박정희 없는 박정희 체제'였다.

유신체제가 종말을 고하기 시작한 계기는 1987년 6월 시민항쟁이었다. 당시 전두환 5공 정권은 시민항쟁을 강압적으로 진압할만한 군대와 경찰력을 충분히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6.29 항복 선언을 내놓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당시의 민중적 힘도 작게 평가할 수 없지만, 보다 큰 배경은 그들이 겪은 광주항쟁의 살상진압이라는 '악몽'이었다. 제아무리 '인간 성악설'을 생각하게 하는 내란정권이었지만 그들이 또 한 번의 그런 살상진압책을 검토할 수는 없었다. 광주항쟁은 그런 의미에서 그 당시엔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 좌절했지만 훗날 6월항쟁 때 내란정권을 결국 굴복하게 만든 역사적 성공을 거두었다고 평가된다. 유신체제의 종식을 분석할 때는 이처럼 부마항쟁, 광주항쟁, 6월시민항쟁을 연계해서 역사적 상관관계에 바탕해야 할 것이다.

10.26의 두 번째 원인으로 민주헌정을 복원하라는 미국 쪽의 압력은 직접적인 박정희 살해 지령설로까지 발전했다. 그러나 이는 아직까지 밝혀진 근거가 없다. 당시 미국의 카터 대통령은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 그에 걸맞게 유달리 인권과 도덕을 대외정책 기조로 내세웠다. 카터의 그런 기준에서 볼 때 박정희 유신독재는 당연히 방관할 수 없는 '악의 축'이었다. 미국의 언론들도 박정희 정권에 대해 기회 있을 때마다 신랄하게 비판했다. 1979년 봄, 미국의 영향력 있는 시사주간지 타임과 뉴스위크는 박정희 독재에 대해 한국 군부 내에 미묘한 저항 움직임이 있다는 관측을 보도했다. 이런 기사는 박정희 정권에 의해 검은 먹칠로 칠해지거나 아예 절단된 뒤 잡지의 국내 배포가 가능했다. 그러나 뜻 있는 사람들은 전국 곳곳의 미국문화원 도서실에 비치돼 있는 잡지의 원본 기사를 접할 수 있었다. 기사는 사실 근거가 약했지만 박정희 독재에 저항하라는 메시지 성격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느껴졌다. 이런 미국의 분위기가 김재규에게 상당한 시사를 던져주었던 것으로 분석할 수 있다.

김재규는 남한산성 육군교도소에 수감된 뒤 얼마 지나서 교도관들에게 "미국 쪽에서 무슨 소식 없느냐"고 두어 번 물었다. 이것도 10.26에 대한 미국 관련설의 한 배경일 수 있다. 그러나 미국은 1980년 5월24일 김재규가 처형될 때까지 그에 대해 아무런 구원의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 카터 행정부의 정책으로 보더라도 시간이 좀 지나면 개입할 가능성은 작지 않았다. 전두환 내란집단은 이런 정황을 염두에 두었는지 김재규를 그야말로 전광석화와 같이 재빨리도 사형 집행시키고 말았다. 5월21일 대법원 확정판결이 난지 불과 사흘만이었다. 당시는 광주항쟁이 진행 중이었다. 단순 살인이 아니라 명분 있는 정치범이며 양심범으로서 김재규는 미국과 국제사회의 인권단체들에서 구출운동이 벌어질 것을 두려워 한 내란정권에 의해 보복적으로 처형된 것이다.

 

 


박정희 뒤통수 정조준해 확인사살한 김재규의 비정한 행동 배경
사생활 타락으로 인간적 환멸감과 정상적 판단력을 의심한 때문

▲ 현장검증과 두 여인의 진술을 통해 김재규는 박정희에게 머리 뒤통수를 정조준해 확인사살한 것으로 밝혀졌다.


10.26사건에서 풀기 어려운 의문은 김재규가 동향 선배로 군 출신 상관이었으며 자신을 중용해 온 은인인 박정희를 살해했다는 점이다. 김재규가 군사법정에서 국민의 요구인 민주회복과 국가안보상 한미관계가 중요하다고 역설했지만 그것만으로 두 사람 관계의 파탄을 설명하기는 부족하다. 더구나 김재규는 10.26 사건의 현장검증에서 박정희의 머리 뒤통수를 정조준해 확인사살하는 장면을 재연한다.

10월26일 저녁, 궁정동 비밀연회장 참석자는 박정희 김재규 김계원 차지철과 외부에서 데려 온 두 여인이었다. 여기서 김재규는 먼저 차지철을 향해 쏘았다. 차지철은 팔에 관통상을 입고 화장실로 피신한다. 김재규는 다음으로 박정희에게 첫 발을 쏘았다. 박정희는 가슴을 맞았으나 치명상은 아니었다. 김재규가 2차로 권총 방아쇠를 당겼으나 철컥 소리만 들리며 불발, 총은 고장이었다. 밖으로 나간 김재규는 연회장 앞 뜰에 서 있던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박선호의 권총을 손에 잡았다. 방안으로 돌아 온 김재규는 한 여인의 무릎에 상반신을 눕히고 있는 박정희 곁으로 다가가 머리 뒤통수에 권총을 정조준했다. 여인은 기겁을 하며 밖으로 튀어 나갔고 김재규는 그대로 방아쇠를 당겼다. 이런 확인사살만 안했어도 박정희는 목숨을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김재규의 그런 비정한 행동은 박정희에 대한 인간적 증오와 환멸감 없이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박정희에 대한 인간적 환멸감은 가장 가까운 측근으로서 그의 사생활, 술과 여자조달해 온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와 의전과장 박선호가 가질 수 있는 비밀이었다. '절대 권력은 절대 타락한다'는 정치학적 금언처럼 박정희의 사생활 타락상은 도를 넘은지 오래였다. 궁정동 비밀연회장을 관리한 중앙정보부 사무관 남효주도 10.26 당일 저녁 "아무리 대통령이지만 너무 한다"고 다른 직원과 대화했음이 군사법정에서 알려졌다.

▲10.26사건 당일 박정희의 최후 술자리에서 시중을 든 '그 때 그 여인들'이 군사법정에 증인으로 소환됐다. 당시 일류 가수와 여대생 광고모델인 두 여인이 대통령의 비밀연회장에 동석했던 사실이 법정을 통해 공개되면서 절대권력자의 사생활 타락상이 세상에 알려지는 계기가 됐다.


대통령의 채홍사로 불린 박선호는 군사재판 진술에서 "외부에서 여인들을 데려다 술자리를 갖는 대행사 소행사를 한달이면 열 번 한다"면서 "이 때문에 나는 일년 내내 휴일도 없고 쉬어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법정에서 변호인의 질문에 "궁정동에 왔다 간 여인들은 지금 시내에서 일류로 활동하는 연예인들로 내가 밝히면 시끄러워 질 것이고 해서 그런 사실이 있었다는 것만 말한다"고 답변했다. 당시 강신옥 변호사는 역대 의전과장들과 궁정동 술자리 행사 주변 얘기들을 취재하면서 박선호와 면담을 통해 박정희의 술과 여자 문제를 처음으로 재판과정에서 공개했다.

▲10.26사건 당일 궁정동 비밀연회장에서 술시중을 들었던 두 여인이 법정에 출두해 박정희의 최후에 대해 진술하고 있다. 외부의 여인들을 조달해 오는 일은 중앙정보부 의전과장이 전담했으며 이것이 알려지자 의전과장 자리가 대통령의 채홍사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궁정동에 온 여인들은 단순히 술 시중만 든 것이 아니었다. 술이 거나해지면 박정희는 좌우에 앉은 두 여인 중 어느 한 쪽으로 몸이 기울었다. 그날 밤 잠자리 시중을 들게 되는 낙점이었다. 이런 그의 사생활타락은 1974년8월 육영수 여사가 사거했기 때문에 외로움을 달래기 위한 것이라는 인간적 변호도 있다. 그러나 궁정동 비밀연회장의 대행사 소행사는 육영수 생전에 청와대 경호실이 맡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런 일을 청와대가 하는 것으로 국민에게 알려지면 큰일이라면서 외부에 완전히 가려진 중앙정보부로 넘겼다는 진술이 군사법정에서 공개됐다.

김재규는 그렇게 술과 여자에 빠진 박정희가 정상적인 판단력을 상실했다고 보았다. 또 그 옆에서 시국대응책을 강경 일변도로 주입시키는 차지철 때문에 큰 사태에 직면할 것이라는 위기감에 사로잡혔다. 10.26 사건은 이렇게 복합적인 배경 아래 거사된 것이다.

 

 

 

 

 

 

 

 

 

 

 

 

박정희 정권의 유신시대에 대한 토론

 

학술단체협의회에서 진행한 박정희 정권의 유신시대에 대한 토론회에서 발표한 조희연 선생의 토론문을 보완한 글이다. 이 토론회의 기조 발제자는 성공회대의 정해구 교수였다. 조희연 선생의 동의를 얻어 레디앙에 게재한다.<편집자>

 

정해구 교수는 10.26 사건을 ‘독재권력 내부 온건노선’의 분출이고, 10.26 사건을 ‘민주회복을 위한 쿠데타적 거사’라고 적극적으로 평가하였다.

 

정 교수는 김재규 시해사건에 대해서 “탈독재 민주화 이행이라는 정치적, 역사적 맥락이 무시된 채 대통령의 최대의 신임을 받고 있는 중앙정보부 부장이 그 신임을 배반하고 자신의 주군인 대통령을 시해했다는 ‘패륜아’식의 접근은 사태의 본질을 이해하기 어렵게 만든다’고 보았다.

 

더구나 12.12 및 5.17 쿠데타 세력이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시키기 위한 목적에서 김재규에 대한 평가를 그런 식으로 몰아갔던 당시의 현실을 감안할 때, 그런 접근의 위험성은 더욱 커진다고 평가한다.

 

오히려 김재규의 행동에 대한 정당한 평가는 유신독재를 종료시키고 민주화 이행의 돌파구를 열었던 독재권력 내부의 온건노선의 분출이라는 10.26 사건의 의미와 관련하여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이런 견지에서 우리가 확인해야 할 것은 김재규 스스로가 명백히 민주회복의 의도를 가지고 박정희 대통령 제거의 거사를 수행했는가, 아니면 사적 권력욕 등 다른 동기를 가지고 그런 행동에 임했는가 하는 점이다.

 

나는 김재규를 ‘유신이라는 독재 하에서 아래로부터의 민중적 저항의 분출로 인한 체제 위기에 대응하는 온건파의 거사’로 보기 때문에, 정해구 교수의 논지에 동의한다.

 

 

김재규가 느낀 안보위기감, 도덕적 환멸

또 다른 토론자로 나온 경기대 김재홍 교수는 10.26 사건을 더욱 적극적으로 평가했는데, 김 교수는 “자기 상관을 죽임으로써 국민의 희생을 막은 ‘정당방위’라고 할 수 있다. 밑으로부터의 압력, 사생활 문란에 대한 환멸, 미국과의 관계에서의 안보위기감이 있었다”고 이야기했다.

 

도덕적 동기가 없으면, ‘정조준’해서 박정희를 시해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특히 섹스파티에 해당하는 소행사와 대행사가 10여차례 이어지는 것을 보면서 도덕적 환멸감을 강하게 느꼈기 때문에, 그러한 거사가 가능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당시 미국과의 갈등관계에서 미국이 압박을 하는 것에 대해, 박정희는 ‘미국이 갈려면 가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서, 보수적인 안보관을 가지고 있는 김재규는 ‘미국과의 관계 악화에 따른 안보위기감’이 컸다.

 

김재규는 일종의 ‘국가안보 중시론자’라고 할 수 있는데, 김재규는 보안사령관, 군단장, 중앙정보부 차장보, 중정부장을 두루 거친, 일반 장교가 아니라 안보, 정보전문가로서 일한 경력을 가지고 있어서, 안보가 대단히 중요한 거사 이유였다고 평가하였다.

 

우리는 왜 박정희 독재체제의 붕괴와 제1민주화 시도가 -민중적 저항에 체제위기를 체감한 온건파의- 쿠데타적 거사로 출현하고 그리고 그것이 실패한 후 제2군부정권/광주항쟁을 거쳐 제2민주화로 가게 되었는가 라는 점에 대해 구조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

 

 

반독재 세력의 힘

독재 대 반독재의 힘 관계에서, 한국은 반독재, 민중세력의 역동적 도전이 존재하고, 후자의 주도성이 강한 사회이다. 동남아시아의 많은 나라들과 비교할 때 한국의 민주화 유형은 민중세력-반독재세력의 도전과 주도성이 강한 유형이다. 거센 도전과 저항이 존재하는 사회라는 것이다. 이러한 거센 저항은, 이른바 ‘탄압과 저항의 악순환’이 나타나게 하는 것은 물론, 군부 통치엘리트 내의 균열로도 나타난다.

 

 

10.26 사태 이후 신군부가 등장하면서 자행된 광주학살의 전조들

 

 

내부 강경파와 온건파의 집단적 분화가 불가능

거센 도전의 반대편에 박정희 지배세력의 헤게모니적 결합이. 강고한 결합이 아닌 1인 독재자를 중심으로 하는 경직된 위계적 지배구조 하에서 작동하고 있었다는 점이 있다. 아래로부터의 민중적 저항이 체제위기로 나타나고 그것이 내부에서 김재규 같은 온건파를 출현시키지만, 그것이 온건파와 강경파의 집단적 분화로 나아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박정희 체제의 폭력적인 위계적인 통합구조 때문에 집단적 분화가 불가능했다.

 

물론 여기에는 더욱 크게 분단체제(외부의 적을 명분으로 내부의 통합이 폭력적으로 유지되는 구조)의 영향도 언급할 수 있다. 이런 조건이, 김재규로 상징되는 온건파에 의한 쿠데타적 거사의 형태를 출현시키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김재규가 자신의 시해행위를 규정했던 민주회복 ‘국민’혁명이라는 소망이 현실로 나타나려면 그것은 아래로부터의 민중적 저항과 만났어야 한다. 그러나 앞서 이야기한 박정희체제의 폭압적 작동양식, 지배와 저항의 역관계로 인하여, 체제 내부의 온건개혁파 흐름과 체제 외부의 거세 민중세력의 저항의 흐름이 만난다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그래서 온건파의 쿠데타적 거사가, 김재규의 소망이나 의지처럼 “민주회복 ‘국민’혁명”으로 발전할 수 없었다. 이것이 한국 독재의 ‘붕괴’양식이 가지는 특수성이다.

 

사실 돌이켜 보면, 체제 위기 시에 나타나는 경로는 통상 3가지이다. 개항기 조선시대도 그러했다. 즉 ①지배세력 자체의 전형과 혁신(계몽군주로서의 고종의 개혁 성공), ②체제 지배엘리트 내 온건 개혁파의 혁신 시도(개화파), ③체제 외부의 급진적인 변혁세력(동학혁명 등)이다. 근대 초기 ②와 ③의 경로가 결합되지 못한 것과 유사하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그 결과 한국의 민주화는 ‘점진적 이행’의 경로가 아니라, 훨씬 적대적인 충돌의 경로를 통해서 민주화로 가게 되었던 것이다.

 

 

‘미국의 제3세계 지배전략’ 전환의 과도기적 상황

다음으로 분석적으로 볼 때, 70년대 말~80년대 초 1차 민주화 경로의 실패를 규정한 것은 국제정세적 조건과 미국의 전략기조에 기인한다. 미국의 제3세계 지배전략의 변화는 70년대 후반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70년대 중반부터 80년대 중반(86년 필리핀의 피플파워의 등장)까지의 시기는, 미국의 제3세계 지배전략의 ‘민주화전략’ 이른바 ‘저강도전략’으로 전환하지 않은 과도기였다고 나는 평가한다.

 

75년 월남 공산화, 78년 이란 혁명, 79년 니카라구아 혁명 등으로 안보독재를 앞세운 미국의 60-70년대 제3세계 지배전략은 균열되고 있었다. 그런데, 독재정권의 연이은 붕괴. 그에 대한 저항의 혁명적 분출 속에서, 폭압적 독재정권을 내세운 미국의 제3세계 지배전략이 위기에 처했지만, 그것이 새로운 민주화 전략으로 명확히 전환되지 못한 시기가 바로 이 시기이다.

 

바로 여기에, 반독재세력의 거센 저항력을 가지고 있던 남한에서, 먼저 붕괴의 시작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것이 79년의 10.26 사건이다. 그러나 이처럼 미국의 ‘독재 이후의 지배전략’이 분명하게 확립되지 않은 상황, 독재의 붕괴가 혁명정권의 등장으로 이어지는 위기상황에서, 미국은 ‘독재 붕괴와 민주화 이후의 전략’에 대해서 이중적 태도를 드러냈다.

 

바로 이런 과도기에서 12.12라고 하는 군부강경파의 반격이 가능하고 성공할 수 있었다. 전두환를 정점으로 하는 신군부세력이 온건파의 쿠데타적 거사를 진압하고 권력을 재장악한 것이다. 여기서 제1민주화의 시도는 실패하고 전두환 신군부정권에 대항하면서 87년 6월 민주항쟁까지 이어진 제2민주화의 시기가 열리게 된 것이었다.

 

결국 박정희 독재 하 온건파의 쿠데타적 거사는 실패함으로써 한국 사회는 민주화의 궤도로 ‘직행’하지 못하고 7년 동안의 ‘우회로’로 들어서게 되었다. 군부엘리트 내의 강경파의 반격(12. 12), 그에 대한 민중적 저항(광주항쟁), 그에 대한 유혈적 진압을 거쳐, 제2군사정권이 출현하게 되고, 그에 대응하는 새로운 민주화의 고통스런 경로가 열리게 된 것이다.

 

김재규가 소망했던 민주회복 ‘국민’혁명은, 스스로의 거사가 실패하고, 반대 강경파의 권력장악 과정에서 등장한 광주항쟁, 학살과 그 희생에서 새로운 도덕적-정치적 에토스를 보강함으로써 민주회복 ‘국민’혁명이 될 수 있었다. 광주의 피의 항쟁을 이어받는 급진적인 그리고 진정으로 국민적인 반독재 ‘국민혁명’(김재규)이 나타나게 되었다(김재규의 소망은 그렇게 실현된 것이다)

 

 

유신체제의 도덕적 붕괴

김재규가 박정희를 처음 쏘고 다시 정조준해서 쏠 때에는 유신체제에 대한 도덕적 환멸이 강렬하게 작용했다는 지적은 중요한 지점이다. 이것은 유신체제의 붕괴의 일차 원인은 민중의 저항이었지만, 또 다른 점에서 이것은 유신체제의 도덕적 자기붕괴가 원인이라고 본다. 체제의 도덕적 기반, 즉 체제엘리트들이 자신들이 지배세력으로 있는 그 체제에 대해 더 이상 도덕적 자부심을 가질 수 없었고, 오히려 자기모멸적 심리상태에 놓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박정희와 개발독재체제>라는 책을 보면 5.16 당시 군부엘리트들이 기성엘리트들의 부패와 무능에 대한 일종의 ‘우국충정’의 결속감이 있었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말기에 오면 이러한 우국충정식의 결속감은 산산조각이 났다. 이는 마지막에 유신체제의 작동양식이 거의 마피아 수준으로 작동했으며, 또한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구조화된 부패가 고착되었기 때문이었다.

 

먼저 마피아적으로 작동하였다는 것은, 유신체제가 민중들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체제에 조금이라도 항변하거나 비판적인 상층 엘리트, 심지어 군부 엘리트들에게까지 폭력을 행사하는 수준이 되었다는 것이다.

 

70년대 초반이지만, 김성곤 등의 항명파동에 대해 안기부가 수염을 뽑고 고문하는 수준으로 ‘탄압’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박정희에 비판적인 군부 엘리트도 고문을 당하는 마피아적 성격이 말기의 유신체제였다.

 

다음, 부패가 구조화되어갔다. 사실 각종 개발 인허가와 관련된 특혜를 주면서 공화당이나 안기부가 리베이트 자금을 공식적으로 모금하여 이를 통치자금으로 사용하는 구조였다. 당시 서울대 총장이 병원에 입원했는데, 억대의 위로금을 받고 청와대를 향해 큰 절을 했다는 일화도 있다. 전별금이라는 이름으로, 충성분자들에게 돈을 배분하는 것도 일반적이었다. 70년대 이후에는 요정정치도 확산되었다. 이런 것들이 결합하면서, 박정희 정권 자체의 내부적인 도덕적 붕괴가 나타났다고 생각한다. 김재규의 거사에서 김재규가 가졌던 도덕적 환멸도 자기가 엘리트로 있는 체제에 대한 도덕적 환멸이기도 했다. 

 

 

 

 

 

<10.26은 아직도 살아있다> 김재규 변호한 안동일 변호사 저서

 

 "당시 수사당국은 처음부터 10.26을 '자기가 제거될 것이라고 우려한 김재규의 우발적 행동'으로 규정했다. 단언컨대 그렇지 않다."

유신체제의 막을 내린 10.26사건 관련하여 출간된 책 <10.26은 아직도 살아있다>가 관심을 모으고 있다. 민감한 역사적 사안을 다뤘을 뿐 아니라 책을 펴낸 이의 경력 때문이다. 지은이 안동일(65) 변호사는 10.26사건의 당사자인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을 1심부터 3심까지 모두 변론했던 사람이다.

사건 직후부터 1980년 5월 20일 대법원에서 사형선고가 내려질 때까지 김 전 부장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켜본 안 변호사. 그가 지금 시점에서 10.26사건 재판을 돌아보는 기록을 남긴 이유는 무엇일까.


"뒤틀린 현대사에 10.26의 진실 묻혔다"

"10.26에 대해 잘못 알려진 부분이 많아요. 수사당국이 김재규를 '배은망덕한 패륜아' 혹은 '대역죄인'으로 몰아간 발표내용을 그대로 믿고 있는 사람도 아직 많은 것 같고요."

안 변호사는 10.26 직후 일어난 12.12 군사반란으로 우리 현대사가 뒤틀린 데서 그 원인을 찾았다. "'3공 유얼(유복자)' 5공화국과 군사문화의 연장선에 놓였던 6공화국 등 군사정권이 13년이나 더 지속되면서, 박정희 군부정권 18년을 끝낸 10.26의 진실이 묻혔다"는 것이다.

안 변호사는 사건내용 대부분이 수사기록에만 의존해 세상에 알려진 것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형사재판의 요체는 공판중심주의인데 당사자의 법정 진술이 담긴 공판조서 등을 고려하지 않은 채 수사기록 위주로 사건내용을 구성, '실체적 진실'을 제대로 밝히지 않았다는 것.

그렇다면 10.26의 실체적 진실은 무엇일까. 안 변호사는 "가려진 진실이 제대로 드러날 수 있도록 자료를 제시하는 게 내 몫이며 김재규에 대한 판단은 역사와 독자의 몫"이라고 전제하면서도 "10.26의 의미는 이후 역사에서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라고 강조했다.

안 변호사는 "당시 군 검찰 주장과 달리 김재규는 '우발범'이 아니다"라고 단언했다. "김재규는 '박정희가 있는 한 민주회복은 불가능하다'는 판단 아래 10.26을 준비했고 10.26을 '민주회복 국민혁명'으로 규정했어요. '우연'이 아닌 '필연', 즉 당연히 있어야 할 사건으로 10.26을 바라본 겁니다."

 

 


"박정희 제거하면 혁명가로 추앙할 것으로 착각"

안 변호사는 10.26 직전 발생한 부마항쟁도 김 전 부장이 그런 판단을 내리는 데 영향을 줬다고 말했다. "김재규는 현장을 방문한 뒤 항쟁이 5대 도시로 확산될 가능성이 높다고 예상했어요. 그리고 그 경우 (박정희의 성격상) 4.19보다 더 큰 희생이 일어날 거라고 판단합니다. 김재규는 그 희생을 막기 위해 박정희를 쐈던 거죠. 박정희와 개인적으로 아주 가까운 사이였지만 대의를 위해 소의를 버린 겁니다."

안 변호사는 김 전 부장이 '민주회복 국민혁명'의 결의를 다지며 1979년 봄부터 썼다는 휘호 6점 등을 근거로 제시하며, 그는 민주회복에 대한 대의를 10.26 사건보다 훨씬 이른 시점부터 가슴에 품고 있었다고 평가했다.

"당시 군 검찰은 김재규가 민주회복이나 자유민주주의를 강조하는 것에 대해 이른바 '반체제' 변호사인 우리 변호인단에게 교육받은 결과가 아니냐고 생각했지만 전혀 그렇지 않아요. 김재규는 우리를 만나기 전부터 그 부분에 대한 확신이 있어 보였습니다."

안 변호사는 "김재규는 박정희를 제거하면 전 국민이 자신을 '혁명가'로 추앙할 거라는 믿음과 '혁명'이 성공하면 미국이 자신을 지지할 거라는 확신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착각'으로 드러났다"고 풀이했다.

안 변호사는 10.26사건의 의미를 올바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그 이후 역사가 전개된 양상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거듭 강조했다.

"10.26 직후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은 자유민주주의 실천, 긴급조치 해제 등을 발표했어요. 정치범들이 감옥에서 풀려났고 김대중씨도 오랜 가택연금에서 해제됐습니다. 10.26으로 민주회복의 길이 열린 겁니다."

 

 



"5.18항쟁과 6.10항쟁의 바탕에는 10.26사건 있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그렇기 때문에 안 변호사는 "(당시를 살아보지 않은 사람들은) 유신체제가 무너지는 순간의 느낌이 상상이 가지 않을 것"이라며 '부마항쟁 등에서 표출된 아래로부터의 힘으로 박 정권을 무너뜨리고 진정한 민주화를 이룩하는 길을 오히려 10.26사건이 막았다'는 비판에 동의하지 않았다.

이어 "어쩌다가 12.12사태가 일어나고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민주화가 지체되긴 했지만 5.18항쟁과 6.10항쟁 등이 일어날 수 있었던 바탕에는 유신의 핵을 제거한 10.26이 놓여 있다"고 말했다. "10.26이 민주화의 바탕을 이뤘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는 게 안 변호사의 판단이다.

그런 배경에서 안 변호사는 뒤늦게라도 그의 명예를 회복해줘야 한다고 믿는다. 안 변호사가 재판 기록, 법정에서 메모해둔 내용 등 사과상자 두 개에 달하는 자료를 하나하나 다시 살펴 정리한 것도 이 때문이다.

책을 쓴 안 변호사의 첫 소감은 "25년만에 밀린 숙제를 마친 것 같다"는 것. 그의 숙제는 끝났지만 독자들에게는 10.26사건의 실체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새로운 숙제가 생긴 셈이다.

"아마도 3공·5공의 부라퀴(자기에게 이로운 일이면 기를 쓰고 영악하게 덤비는 사람)들은 '패륜아를 비호하는 책이 말이 되느냐'고 날 공박하겠지요. 그러나 사반세기가 지났어도 10.26은 우리에게 여전히 과거가 아니라 현재로 남아 있습니다. 흘러간 과거사로 치부하기보다는 26년 전으로 시간여행을 떠나 김재규가 법정에서 어떤 주장을 했는지, 10.26이 우리 사회에 무엇을 남겼는지 되돌아보는 계기가 됐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