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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760 : 조선의 역사 302 (제19대 숙종실록 8) 본문
한국의 역사 760 : 조선의 역사 302 (제19대 숙종실록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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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대 숙종실록(1661~1720년, 재위 : 1674년 8월~1720년 6월, 45년 10개월)
4. 숙종의 환국정치로 인해 계속되는 정치 옥사(계속)
기사환국
기사환국은 후궁 소의 장씨의 소생을 원자로 책봉하는 문제를 계기로 서인들이 대거 축출되고 다시 남인들이 정권을 잡는 사건이다.
숙종의 정비는 원래 서인 노론의 김만기의 딸 인경왕후였으나 그녀가 1680년에 죽어 숙종은 노론 민유중의 딸 인현왕후를 계비로 맞았다. 그런데 그녀는 원자를 낳지 못하고, 숙종이 총애하던 소의 장씨가 원자를 낳았다. 숙종은 소의 장씨가 낳은 원자 균을 인현왕후의 양자로 삼아 원자에 정호하려 하였는데, 서인측에서 이를 반대했다. 영의정 김수홍을 비롯하여 이조판서 남용익, 호조판서 유상운, 병조판서 윤지환, 공조판서 심재, 대사간 최규서 등 노론계는 한결같이 중전의 나이가 아직 한창인데 태어난 지 두 달밖에 안 된 후궁 소생을 원자로 정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했다. 이에 숙종은 나라의 형세로 외롭고 위태로워 종사의 대계를 늦출 수 없다고 하면서 서인 노론측 대신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5일 만에 왕자 균의 정호를 종묘사직에 고하고, 그의 생모인 장씨를 빈으로 격상시켰다.
하지만 대신들의 반발은 누구러들지 않았다. 노론의 영수 송시열은 송나라 신종이 28세에 철종을 얻었으나 후궁 소생이어서 번왕으로 책봉하였다가 적자가 없이 죽게 되자 그때 비로소 태자로 책봉하여 후사를 이은 고사를 예로 들며 후궁 소생인 왕자 균을 원자로 확정하는 것은 시기상조라는 의견을 재차 강조했다.
숙종은 송시열의 반대 상소를 접하고 이미 종묘사직에 고하여 원자로 확정했는데도 이 같은 태도를 보이는 것은 왕을 능멸하는 처사라고 지적하여 심하게 분노하였다. 그래서 그는 승지 이현기와 윤빈, 교리 남치훈, 이익수 등과 의논하여 송시열의 관작을 삭탈하여 외지로 출송시키고, 이어서 영의정 김수흥을 파직하였으며, 목내선, 김덕원, 민종도, 민암, 목창명 등 남인계 인사를 대거 등용하였다.
반면에 노론계는 송시열이 유배되어 사사된 것을 비롯하여, 이이명, 김수항, 김만중, 김수홍 등도 유배되거나 사사되었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숙종은 본질적인 원인이 민비에게 있다 하여 다시 중전을 폐비하려 했다. 그러자 노론측이 오두인 등 86인의 이름으로 이를 저지하는 상소를 올렸다. 하지만 숙종은 그 주동자인 오두인, 박태보, 이세화 등을 국문하고 위리안치하거나 귀양 보냈으며, 그해 5월 민비를 폐하고 희빈 장씨를 왕비로 책봉하는 한편 원자 균을 세자에 책봉했다.
궁인 출신의 후궁 장씨는 1686년 처음 숙종의 총애를 받기 시작하여 숙원을 거쳐 소의에 봉해지고, 왕자 균을 낳은 후 그가 원자에 정호되어 이듬해 세자에 책봉되자 그해에 중전이 되었다.
그녀가 일개 궁인에서 왕비에까지 오를 수 있었던 데에는 인조의 계비인 장렬왕후의 동생 조사석과 종친인 동평군 항의 힘이 많이 작용했다. 조사석은 남인과 연결을 맺고 있었고, 동평군 항은 궁중과 연결을 맺고 있었기에, 장씨는 조사석을 통해 남인의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었고 동평군을 통해 종친의 힘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궁인 장씨의 집안이 역관 출신으로 부유한 집안이라 남인들에게 정치자금을 충당하고 있었던 것이 막강한 힘을 발휘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재력과 권력의 상관관계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모양이다.
정씨에게 조사석을 연결시켜 준 사람은 그녀의 어머니였다. 장씨의 어머니는 조사석과 한때 내연의 관계에 있던 여자였는데, 이 때문에 장씨가 조사석의 딸이라는 소문도 있었다. 한편 동평군 항을 끌여들인 사람은 장씨의 오빠 장희재였다. 동평군 항은 종친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선혜청제조를 맡고 있었기에 궁중을 무상으로 출입할 수 있었는데, 장희재는 그 점을 이용하기 위해 일부러 그에게 접근하였던 것이다.
왕자 균이 원자로 정호될 당시에 남인의 민암, 민종도, 이의정 등이 이들과 은밀히 손을 잡았다. 이 때문에 원자 정호 문제로 서인이 대거 축출되자 남인이 다시 등용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남인 세력과 장씨가 은밀히 연합 세력을 형성하고 서인과 인현왕후를 공략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사환국과 인현왕후 폐출 사건은 이러한 세력이 주도한 것이 명백하게 드러내고 있다.
조사석(趙師錫)
1632(인조 10)∼1693(숙종 19).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공거(公擧), 호는 만회(晩悔) 또는 만휴(晩休)·향산(香山)·나계(蘿溪). 아버지는 형조판서 계원(啓遠)이고, 어머니는 영의정 신흠(申欽)의 딸이며, 태구(泰耉)의 아버지이다.
1660년(현종 1)진사가 되고, 1662년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의 관직과 주서 등을 거쳤다.
1666년 사관(史官)인 검열이 되고, 이어 봉교·겸설서로 승진하였다. 사관으로 있을 때인 1667년 왕이 지난해에 정태화(鄭太和)·홍명하(洪命夏)·허적(許積)을 탄핵한 이숙(李䎘)·박증휘(朴增煇) 등 7명의 간관을 유배보내면서 사관들에게 이를 사초(史草)에 기록하지 말도록 명하였으나, 왕의 거둥은 반드시 기록하여야 하는 것이라며 거절하고 이를 사초에 기록하였다. 이 일로 왕의 노여움을 사서 파직당하였으나, 파직의 왕명이 곧 철회됨으로써 복직되었다.
그뒤 전적·정언·사서·지평 등을 거쳐 1672년말에 접위관(接慰官)이 되어 동래에서 왜인을 접대하였다.
그뒤 부교리·헌납·이조정랑 등을 거쳐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진하였다.
1675년(숙종 1)에 수원부사를 거쳐 이후 황해도관찰사·예조참의·승지·강원도관찰사·충청도수사·경기도관찰사·이조참판 겸 수어사(守禦使)·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하고, 1680년 예조판서가 되었다.
이어 대사헌·호조판서·강화유수·병조판서·판의금부사·우참찬·좌참찬·이조판서 등을 거쳐 1687년에 우의정이 되었다. 그 사이 1683년 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1688년 좌의정이 되었는데, 이때 인조의 손자인 동평군 항(東平君杭)의 횡포를 논하다가 처벌된 박세채(朴世采)·남구만(南九萬) 등을 변호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게 되자 병을 핑계로 사직하였다.
다음해 판돈녕부사가 되었고, 이어 영돈녕부사가 되었으나, 1691년 전해에 있었던 왕세자책봉하례에 참석하지 않은 죄로 고성(固城)에 유배되어 배소에서 죽었다.
죽은 뒤인 1694년 갑술환국으로 복관되었다. 시호는 충헌(忠憲)이다.
동평군 이항
동평군 이항(東平君 李杭, 1660년 ~ 1701년)은 조선 후기의 왕족이자 서예가로, 인조의 손자이며, 숭선군 이징(崇善君 李澂)과 군부인 평산신씨(郡夫人 平山申氏)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이다. 부인은 장령 나주인(羅州人) 박세장(朴世樟)의 딸로 금성군부인 박씨(錦城郡夫人 朴氏)이다. 본관은 전주, 휘는 항(杭), 자는 제보(濟甫), 호는 존오당(存吾堂)이다.
숭선군의 장남으로 1660년(현종 1) 4월 8일 탄생하였다. 처음에는 동평정(東平正)에 제수받고, 1680년(숙종 6) 21세에 현록대부 보사원종공신의 책록되었다.
1687년(숙종 13) 6월 4일 27세 때에 숙종의 특명으로 혜민서 제조(惠民署提調)로 임명되어 가난한 백성을 구제하는 사업에 앞장섰고, 특히 문장이 출중하여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 조씨(趙氏)의 사책관으로 국상 중에 왕후의 행장을 써 뛰어난 문장력을 인정받기도 하였다.
1689년(숙종 15) 29세 때부터는 숙종의 각별한 신임을 얻어 중국에 동지사의 정사(正使) 및 사은사(謝恩使)의 정사로 세 차례나 다녀오는 등 사신으로서 막중한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외교에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였다.
1690년(숙종 16) 1월 6일 숭선군이 죽자 동평군은 도성과 멀리 떨어진 공주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받들어 묘역 작업을 하던 중 평소 동평군을 숙종이 편애하는 것을 투기하고 있던 조정 대신들이 이기양(李基陽)을 시켜 가옥 수백호를 철거하고 자신의 아버지 묘를 옮기는 행패를 부린다고 터무니 없는 상소를 하여 작업이 중단되자 신문고를 울려 숙종에게 호소하자 임금은 경조(京兆)에 명하여 낭관(郞官)을 시켜 은밀히 현장에 보내어 조사 보고토록 한 결과 모두 거짓으로 판명되어 이기양을 비롯한 관련자들을 모두 체포하여 귀양을 보내고 숭선군 묘역 일대를 숭선군 가문의 사패지로 하사하였다.
간신들의 끊임없는 투기와 모함으로 장희빈의 오라비인 장희재(張希載)에게 집에서 부리던 종을 첩으로 보내어 역모를 꾀했다는 터무니 없는 누명을 쓰고, 1701년(숙종 27) 11월 8일 절도(絶島)의 귀양지에서 향년 42세에 사사되었다. 그러나 숙종은 간신들의 성화에 못이겨 사약을 내렸지만 평소 신임하고 아끼던 종숙이라 전례를 깨뜨리고 동평군의 아들인 반양도정과 반릉군에게는 연좌율을 적용하지 말라는 특명을 내려 멸문지화를 면하게 하였다.
동평군이 사사되자 온갖 정성을 다하여 조성하고 있던 숭선군 묘역 작업이 중단되어 현재도 신도비 비신은 찾을 길 없고 좌대만 있을 뿐이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 이불자락에 "나는 원통함을 안고 땅속에 들어가기는 하지만 황천과 일월이 나의 무죄함을 비추어 줄 것이며 후세에 군자가 있으면 이것을 알 것이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 귀중한 자료는 현재 종가에서 소장하고 있다.
1864년(고종 1) 7월 10일에 신원 복작되었다.
저서
- 동평군은 시와 글씨에 능하여 중국 진(晉)·당(唐)의 여러 서체를 두루익혔으며, 현재 문집이 종가에 남아있고, 서울특별시 은평구 역촌동에 있는 인조별서비(仁祖別墅碑)와 창빈안씨신도비 등에 글씨가 남아있다.
가족관계
- 아버지 : 숭선군 이징(崇善君 李澂, 1639년 - 1690년)
- 어머니 : 영풍군부인 신씨(永豊郡夫人 申氏, 1639년 - 1692년), 증 영의정 평산인(平山人) 신익전(申翊全)의 딸.
- 동생 : 동성도정 이강(東城都正 李棡)
- 녀 : 해평인(海平人) 윤세정(尹世鼎)에게 출가.
- 녀 : 파평인(坡平人) 윤정호(尹廷虎)에게 출가.
- 녀 : 순흥인(順興人) 안수정(安壽鼎)에게 출가.
- 녀 : 양주인(楊州人) 조명봉(趙鳴鳳)에게 출가.
- 부인 : 금성군부인 박씨(錦城郡夫人 朴氏, 1659년 - 1727년), 장령 나주인(羅州人) 박세장(朴世樟)의 딸.
- 장남 : 반양도정 이소(潘陽都正 李炤, 1686년 - 1739년)
- 2남 : 반릉군 이현(潘陵君 李炫, 1693년 - 1713년)
- 녀 : 칠원인(漆原人) 윤경구(尹敬龜)에게 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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