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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766 : 조선의 역사 308 (제19대 숙종실록 14) 본문
한국의 역사 766 : 조선의 역사 308 (제19대 숙종실록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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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대 숙종실록(1661~1720년, 재위 : 1674년 8월~1720년 6월, 45년 10개월)
윤휴, 그는 누구인가? (계속)
사상과 신념
효종 국상때의 복상 문제
송시열 등 서인들의 기년설에 맞서 윤휴는 참최삼년설(斬衰三年說)을 주장했다. 그에 의하면 '장자를 위해서는 상, 하 구분 없이 삼년복을 입으며' 임금을 위해서는 내외종이 다 참최를 입는다는 설이다. 그는 『의례주소』의 상복참최장의 ‘아버지가 장자를 위해 상복을 입는 기간’에 대한 가씨의 주를 인용해 송시열의 논리를 반박하고 나섰다. '의례' 정현의 주에 있는 당나라 가공언의 소를 인용하며 이를 가소라 한다.
윤휴는 효종이 왕통을 계승했으니 장자와 다를 바가 없다고 주장하였으며 여기서 더 나가 신모설(臣母設)을 주장했다. 윤휴의 이른바 참최삼년설은 연양부원군 이시백을 통하여 편지로 영의정 정태화에게 알려졌고 정태화는 다시 송시열과 의논하였다. 윤휴가 제시한 참최삼년설은 장자를 위해서는 상,하 구분 없이 삼년복을 입으며 임금을 위해서는 내외종이 다 참최를 입는다는 설이다. 윤휴는 가씨의 주에서 ‘첫째 아들이 죽으면 적처 소생의 둘째 아들을 세워 또한 장자라고 부른다’는 구절을 취하여 자의대비는 효종에 대해 참최삼년설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윤휴는 이러한 예론을 통해 군신의 의리를 강조함으로써 군왕중심 왕도정치론의 명분을 제기하였다.
윤휴의 왕사부동례설에 대해 송시열은 예는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며 반박하였고, 군신관계와 명분을 강조하는 참최삼년설에 대해 송시열은 윤휴가 인용한 의례주소의 상복참최장의 가씨 주의 다른 구절을 들어 반박하였는데 "의례주소에 그런말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 아래에 '적처가 낳은 둘째 아들도 역시 서자라고 칭한다'하니 서자란 첩의 자식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장자가 아닌 모든 아들을 칭하는 말이다"라고 반박하였다. 이어 송시열은 다음과 같은 모자의 차원에서의 의리 명분을 강조하면서 반박하고 있다.
허목 역시 효종이 왕통을 계승했으니 장자와 다를 바 없다는 점과 왕사부동례설에 입각하여 3년설을 주장하였으나 자최 3년설을 주장했다. 이는 효종이 왕통을 계승했으니 장자와 다를 바 없고, 왕가의 예는 일반 백성들의 예와 같을 수가 없다는 점에는 허목의 견해와 같지만 허목은 모자지간이라는 인륜적 문제 때문에 효종이 자의대비를 신하로 삼을수는 없다고 규정했다.
신모설
윤휴는 제왕가의 예는 일반 백성의 예와 다르다(왕사부동례)고 하며 효종이 일단 왕위를 계승하였으니 효종이 임금이고 자의대비는 신하라고 주장하였다. 이를 신모설(臣母設)이라 한다. 윤휴는 신모설의 근거로 '무왕이 문모(무왕의 어머니 태비)를 신하로 삼았다'는 무왕신모설(武王臣母說)을 인용하여 참최 3년설의 근거로 '어머니를 신하로 삼을 수 있다'는 신모설을 제시했다. 주나라 무왕은 “나는 열 명의 어진 신하가 있다”라고 말했는데 그 어진 신하 중의 한명이 누군가를 정확하게 언급하지 않았다. 후일 공자는 이에 대해 “그 중에 부인이 한 사람 있다”고 평했다. 그러나 공자 역시 그 중에 부인이 한 사람 있다고 했으나 그 부인이 누구인지 정확히 밝히지 않았고, 후대의 학자들은 그 부인을 어머니인 문모로 보기도 하고 무왕의 아내인 읍강으로 보기도 하는 등 논란이 되는 부분이었다.
신모설에 대한 윤휴의 주장에 대해 송시열은 내종부녀가 모두 신하를 가리키는 것이지만 자의대비는 내종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반박하였다. 송시열은 내종이 임금에게 참최복을 입는 것은 비록 임금의 사사로운 친척일지라도 군신의 의리가 지엄하기 때문에 임금을 사척으로 대할 수 없어서 신하로 처신한다는 것이다. 송시열은 자의대비는 이미 효종이 왕후, 어머니로 받들던 분이므로 다른 내종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자의대비는 효종의 계모이지만 왕후로서 어머니였고, 효종이 봉림대군과 세자로 있을 때 왕후로 받들던 분으로서 모자관계인 것 외에도, 군신(왕후와 백성으로서의)의 의리가 있어서 효종이 자신을 아들이라 하지 않고 대군이나 세자로 있을 때 신이라고 칭했던 점을 들었다. 자의대비가 왕후이고 효종은 대군, 세자로서 신이었으므로 군신관계에 있었던 이상 다시 자의대비가 다시 효종에게 신하가 되어 신칭을 하고 임금에 대한 복을 입을수는 없다는 것이다.
또한 송시열은 주자가 유시독의 말을 들어 아들이 어머니를 신하로 삼는 법이 없다고 가르쳤음을 들어 반박했다. 그러나 윤휴가 다시 효종이 임금이고 임금의 통치를 받는 국민의 한사람이라고 주장하자 송시열은 감히 어머니를 신하로 삼는 사례는 없다며 후인이 어찌 이를 반박하느냐며 일축했다. 허목 역시 신모설에는 부정적이었는데, 어머니와 아들이라는 인륜 문제가 있는 바 어머니를 신하로 삼을 수는 없다는 것이 허목의 견해였다. 윤휴의 신모론은 패륜으로 지목되기도 하는 등 서인 사대부들의 강한 반감을 초래했고, 오히려 같은 남인들 조차도 패륜, 패리라고 주장했다.
주자의 이론
주자의 학설을 그대로 추종하는 데서 벗어나 경서의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고 주자의 주해와 저서는 물론 다른 유교 경전에 대해서도 재해석을 가하였다. 또한 이황, 이이 등의 이기론을 비판했다.
그는 성리학 사상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성리학 사상만이 완벽한 진리라는 사고관에 대해 의혹을 제기했다. 그러나 주자만이 사물의 진리를 파악했다는 사상, 성리학만이 사물의 진리라는 사상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오랜 친구인 윤선거, 이유태, 송시열 등과 차례로 절교하고 적으로 변한다. 절교 직후까지만 해도 송시열과 이유태는 그가 주자를 능멸하고 사문을 어지럽히지 않았는지 수시로 추궁, 질책하였다.
처음 윤선거와 토론하다 논쟁이 벌어지자 윤선거는 그의 주장이 과격하다며 조심할 것을 권고하였다. 윤선거는 몇번의 서신을 보내 윤휴를 설득하였으나 윤휴가 고집을 굽히지 않자 윤선거는 절교를 선언했다. 이어 송시열은 처음에는 그의 이론을 학문상 이론으로 인정하고 토론과 서신 교환을 통해 비판과 상호 문답을 주고받았으나, 남인에서 송시열을 죽이려 하고, 윤휴는 직접 송시열을 죽이려 하지는 않았지만 남인의 선봉장으로 활약하면서 송시열은 그를 타협할수 없는 정적(政敵)으로 간주하게 된다. 서인 측에서는 그를 사문난적이나 사상범으로 몰아 집요하게 공격을 가한다.
그는 주자나 성리학만이 사물의 진리를 볼수 있는가며 의문, 의혹을 제기하였으나 유교의 틀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허목은 그보다 한발 더나가 유교사상이 아니더라도 사물의 진리를 알수 있는 사상은 존재한다고 하여 논란이 되었다.
성리학 이외의 사상
그는 유교 학문을 성리학 위주로만 이해하는 것에 반발하였다. 그는 늘 세상의 이치를 주자만이 알고 다른 사람들은 모르느냐며 주자학(성리학)과 주자가례로 사물을 보려는 당시 시각에 이의를 제기하였다. 그러나 그는 기본적으로 유학자였고, 윤휴는 일반 유학자들처럼 이단배척의식이 강하였다. 그가 북벌을 주장한 것도 이단이며 사이비인 야만족이 중국을 정벌한 것에 대한 반감에서 유래한 것이다. 도학과 노장 사상, 불교는 배척하였다. 역사의식에 있어서도 조선의 역사의 기원을 기자로 보고, 기자조선이 정통이라고 인정하는 것 역시 다른 성리학자들과 다르지 않다.
문치를 강조하는 일반 유학자들과는 달리 상무정신이 강한 것은 윤휴만의 독특한 태도이기도 하다.
주자에 대한 관점
그는 주자(朱子)를 부인하지는 않았다. 주자가 학문의 진로 개척과 성학(聖學) 발전에 최대의 공로를 세웠다고 높이 평가하는 한편, 후학들이 학문 연구와 발전에 기여하는 길은 주자가 일생 동안 학인(學人)의 자세로 일관하여 새로운 길을 찾고 업적을 이루었듯이 선배들의 업적을 토대로 새로운 해석과 이해의 경지를 개척해야 한다는 사상을 피력하였다. 이러한 신념에 따라 그는 주자를 비롯한 각종 유교 경전과 고전 등에 대해 새로운 분장·분구 및 해석을 시도하였다. 그의 이러한 학문 자세는 처음에는 당색을 초월해 칭양받았으나, 나중에 정치적으로 악용되어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려 규탄받게 되었다.
북벌론
윤휴는 청나라를 정벌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군대를 양성하여야 된다고 보고, 군사의 중앙집권화를 주장하였다. 허적은 윤휴의 북벌론에 동조하였다. 허적은 윤휴의 강군 양성론을 받아들여 도체찰사부(都體察使府)의 복설, 부활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도체찰사부의 설치는 서인들에 의해 경신환국에 엮이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도체찰사부를 설치하고, 무과인 만과(를 설행하는 한편, 병거인 전차와 화차의 개발을 고안해 보급하고자 한 것 등은 모두 평생의 신념이던 북벌을 실현시키려는 뜻에서였다. 서인 김석주는 윤휴의 강군 양성 주장과 허적의 도체찰사부 부활에 처음에는 동의하였으나, 허견의 옥사 당시 서인들이 허적, 윤휴 등의 도체찰사부 부활과 군사 중앙집중화 주장을 근거로 역적으로 몰고 갈 때 변호하지 않았다.
남인의 선봉장
학문과 언변에 뛰어났던 그는 온건파인 허적과 달리 그는 허목, 윤선거와 함께 송시열, 김수항 등의 비판의 선봉장이었다. 그러나 서인계 중 누구도 토론에서 그의 달변에 맥을 추지 못했다. 그러나 같은 남인 당원이던 권대운은 그가 자기 주장이 너무 강하고 고집을 굽히지 않음을 여러번 지적한 바 있다.
성호학파와의 관계
성호 이익의 아버지 이하진을 비롯한 선대 인사들은 대부분 윤휴와 가깝게 지냈다. 이익의 6촌 형님뻘 되는 반계 유형원도 윤휴와 어느정도 거리를 두면서도 절친한 사이였다. 또한 성호 이익의 스승인 송곡 이서우는 윤휴와 허목 모두에게서 수학하였다. 이에 따라 성호 이익의 문도들 중에는 윤휴와의 연관성을 주장하며 그의 학문을 계승했음을 강조하였다.
이익 가문의 학문은 17세기까지 북인 계열의 윤휴와 상당히 유사하였다. 이하진이나 이잠 형제, 조하주 등은 윤휴와 학문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매우 밀접한 관계였다. 반면 뒷날 이익이 계승한 인물로 평가받는 허목과는 정치적으로나 학문적으로 거리가 있었다. 이때까지 이익 집안의 학문은 성리학적 흐름과는 무관하였으며, 오히려 주희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
1699년 이잠은 정시한을 예방하여 가르침을 받았는데, 이는 퇴계학 수용의 증거이다. 이서는 주희의 경전 해석을 따르면서 이황의 학문을 수용하였다. 이익 단계인 1710년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이기심성론과 관련된 저술을 하면서 학파를 개창하기에 이르렀다. 퇴계학을 수용하고 이기심성론과 관련된 성과를 낸 이익은 이제 이황과 자신을 연결하고자 하였다. 윤휴의 학문이 다소 과격하고 급진적이라는 비판적인 견해가 계속 제기되자 이를 부담스럽게 느꼈던 이익은 학문적 전통을 윤휴에게서 찾던 형 섬계 이잠 등과 달리 허목을 거쳐서 퇴계 이황으로 연결하려 했다. 이러한 시도는 이익의 스승 중 한사람인 이서우가 허목과 윤휴 모두에게서 수학한 것에서 근거로 삼았다.
1715년에서 1720년 사이 이익은 전대에 거리가 있었던 허목과 이하진의 관계를 강조하면서, 허목을 자신이 사숙한 스승으로 규정하였다. 이러한 시도는 퇴계학으로 자정한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근기 남인들에게 수용되었다. 한편 이익은 허목의 후학으로 자정한 이후에도 경전해석이나 경세론 분야에서는 여전히 윤휴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이에 따라 일부에서는 전통적인 윤휴와의 계통을 강조하였는데, 이들은 상대적으로 개방적인 학문 경향을 보였다. 윤휴를 강조하던 인사들이 신유 박해로 몰락하면서 성호 학파의 학통은 오로지 퇴계학과 관련된 내용으로 전승되게 된다. 북인계 학문의 전통을 가진 윤휴에게 영향을 받은 성호 학파는 지속적으로 퇴계학을 수용하면서 새로운 정체성을 찾고자 하였으며, 이는 18세기 후반의 정치적 상황 속에서 완성되었다.
성호 이익의 스승 중 한 사람인 송곡 이서우는 윤휴와 허목 모두에게서 수학하였고, 이익은 학통상으로 윤휴의 손제자가 된다. 그러나 윤휴의 영향을 부담스러워하던 이익은 윤휴를 패리로 규정했지만 이익의 문도들 중 한명인 다산 정약용은 윤휴의 사상이 선명성을 갖춘 정론이고 허목의 견해는 다소 노선이 선명하지 못하다며 윤휴를 정통으로 보기도 했다.
송시열과의 관계
윤휴와 송시열은 어릴 적부터 가까이 지낸 사이이자 친구였다. 예송 논쟁 초반까지만 해도 송시열과 윤휴는 서로를 당이 다른 양반 정도로 인정하였다. 그러나 예송 논쟁이 터지면서 둘은 원수로 돌변한다.
송시열과 윤휴는 비록 멀지만은 같은 문중과 혼인한 인척관계였다. 송시열의 증조부였던 송구수(宋龜壽)는 윤휴의 조상인 윤형(尹衡)과 함께 고성이씨(固城李氏) 이원(李原)의 후손이었던 군수(郡守) 이구연(李龜淵)의 딸들과 결혼하여 동서지간이었다. 송시열과 윤휴는 같은 진외가를 공유하고 있는 사이였고 대대로 먼 인척 관계를 유지해 왔고, 두 집안 모두 오래전부터 친밀한 사이었다. 그런데 윤휴가 당시의 주자학에 대한 비판적 견지를 내 비추자 주자(朱子)의 열렬한 숭모자인 송시열은 이를 대단히 불쾌하게 생각했다. 윤휴가 또 윤선거, 허목 등과 같이 활동하면서 양자의 관계는 틀어지고, 학문상 이유로 절교(絶交)하게 된다.
숙종의 윤휴 사사 공작설
허견의 옥사 당시 허적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윤휴가 엮어져서 사형당한 것에 대해 숙종의 계략이었다는 시각도 있다. 그에 의하면 남부 중국 전역을 전쟁터로 몰고 갔던 삼번의 난이 거의 진압되고 있었다. 숙종 4년 8월 오삼계가 죽고 그 손자 오세번이 뒤를 이었고, 청군은 숙종 5년 악주를 탈환했다.
삼번의 난이 오래 진압되기를 원하였지만 삼번의 패퇴가 기정사실이 되자 숙종은 북벌을 위한 도체찰사부를 역모의 근거지로 만들고 북벌론자 윤휴 등을 사사함으로써 청의 의심에서 벗어나려는 술책을 부린 것이다. 서인은 북벌을 위한 허적의 도체찰사부 복설에 찬성하였으면서도 허적이 역모를 꾸민다며 날조했고, 숙종은 이를 근거로 허적의 도체찰사부 부활의 근거가 된 윤휴의 북벌론을 문제삼아 그를 처형했다는 것이다.
일화
우암 송시열이 백호를 얼마나 두고두고 미워했으면 제자(권상하)와 문답에서 “윤휴의 죄 중 무슨일이 가장 큰가?”하고 물었는데, 제자는 모역죄라고 답하자 공부가 깊지 못하다고 꾸짖고, 주자를 모욕한 것이 가장 큰 죄라고 문답하고 있다. 국가 모역보다 주자 모욕이 더 큰 죄라는 것이다.
윤휴는 권대운으로부터 송시열은 자신의 제자인 윤증으로부터 지나치게 비타협적이고 고집이 강함을 지적받은 바 있다.
예송 이후 송시열은 윤휴를 적휴(賊鑴), 참적(斬賊), 허목을 독물(毒物), 독극물, 흉목(凶穆)이라고 불렀다. 이는 송시열의 수제자인 권상하에게도 계승되어, 권상하는 윤휴를 지칭할 때마다 항상 적휴, 참적, 허목을 지칭할 때는 독물, 독극물, 흉목이라 불렀다. 권상하는 공문서와 다른사람의 묘지명, 묘갈명, 신도비문 등에서도 윤휴를 항상 적휴, 참적, 허목을 독물, 독극물, 흉목이라 불렀다.
어록
- "사색하지 않으면 얻는 것도 없다. 사색한 것은 글로 기록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사라지기 때문이다. 사색하고 기록하고 해석하다보면 깨닫고 알게 되어 언행이 두루 통하게 된다"
평가와 비판
정적이기도 했던 여양부원군 민유중은 “윤휴의 기모를 보면 좌상춘풍(左上春風)이요 그 언론을 들으면 경전에 출입하고 금고(今古)를 관천(貫穿)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감동하여 귀 기울이게 하니 어찌 경도치 않으리오.” 하면서 상찬해 마지않았다.
남인 온건파였던 권대운은 그가 지나치게 지지 않으려고 하는 점을 여러번 지적하여 충고하기도 했다. 뒤에 자신의 충고가 먹혀들지 않자 권대운은 허적 등이 모인 자리에서 윤휴는 병과 화를 부르는 인물이라며 비난하기도 했다.
후대의 사학자 이인화에 의하면 '윤휴는 송시열과 정치적으로 적대관계였고 경전 해석을 두고도 심한 이견을 보였다. 그런데도 유독 북벌론만은 그 명분론이나 현실적 대응이 너무나도 닮았다. 그래서 두 차례에 걸친 북벌 논의를 두고 명나라를 위한 대의나 민족의 치욕을 씻으려는 복수심보다는 체제 유지를 위한 위장 논리였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 다시말해 존명배청(尊明排淸)을 통치 이데올로기로 정립해 나가면서 북벌론을 정치권력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써먹었다.'고 평하기도 했다.
저서 및 작품
저서
- 《백호전서》(白湖全書)
- 《독서기》
- 《주례설》
- 《중용대학후설》
- 《중용설》
- 《백호집》
작품
- 〈현종대왕행장 顯宗大王行狀〉
- 〈공고직장도설 公孤職掌圖說〉
가족 관계
이순신, 이원익, 허목 등과 인척관계였다. 아버지 윤효전의 첩은 덕수 이씨로 이순신의 서녀였다. 또한 서형수 전주 이씨는 오리 이원익의 서녀로, 오리 이원의 손녀사위는 미수 허목이었다.
- 고조부 : 윤자관(尹子寬, 1490년 - 1550년)
- 증조부 : 윤호(尹虎)
- 할아버지 : 윤희손(尹喜孫)
- 할머니 : 이씨(李氏, ? - 1629년, 이수(李琇)의 딸)
- 서조모 : 이름 미상
- 서숙 : 윤효종(尹孝宗)
- 서숙 : 윤효증(尹孝曾)
- 서숙 : 윤효광(尹孝光)
- 아버지 : 윤효전(尹孝全, 1563년 ∼ 1619년)
- 어머니 : 파평윤씨, 윤담휴의 딸, 아버지 윤효전의 본처
- 어머니 : 경주김씨(慶州金氏, ? - 1656년 6월, 첨지중추부사 김덕민(金德民)의 딸)
- 서모 : 덕수이씨, 충무공 이순신의 첩의 딸
- 이복 형(서형) : 윤영(尹鍈, 1651 - 1691년)
- 이복 형수(서형수) : 전주 이씨, 오리 이원익의 첩의 딸
- 부인 : 정경부인 안동권씨, 권첩(權怗)의 딸
- 아들 : 윤의제(尹義濟, 1640년 - ?)
- 며느리 : 안동권씨, 탄옹 권시의 딸
- 손자 : 윤상정
- 손녀사위 : 송진룡(宋震龍)
- 손녀사위 : 이한제(李漢濟)
- 손녀사위 : 이주우(李柱宇)
- 아들 : 윤하제(尹夏濟)
- 손자 : 윤상흥
- 손녀사위 : 신필해(申弼海)
- 손녀사위 : 이한덕(李漢德)
- 아들 : 윤은제(尹殷濟, 자는 경숙, 1649년 - ?)
- 손자 : 윤상태
- 손자 : 윤상정, 백부 윤의제의 양자로 출계
- 손자 : 윤상리(尹相履)
- 손자 : 윤상항(尹相恒)
- 아들 : 윤륭제(尹隆濟)
- 손자 : 윤상선(尹相宣)
- 아들 : 윤경제(尹景濟)
- 손자 : 윤상정(尹相靖)
- 손자 : 윤상덕(尹相悳)
- 딸 : 윤씨
- 사위 : 임수(林滫)
- 첩 : 이름 미상
- 서자 : 윤만제(尹晚濟)
- 첩 : 이름 미상
- 처남 : 권준(權雋), 처 안동권씨의 남형제
- 외할아버지 : 김덕민(金德民, 1570년 ~ 1651년 12월 10일, 호는 간서재, 학자. 그의 외할아버지이자 스승이었다.)
- 진외증조부 : 이수(李琇)
- 장인 : 권첩(權怗)
- 처남 : 권준
- 처남댁 : 파평 윤씨, 윤황의 딸, 성혼의 외손녀, 윤선거의 누이
- 사돈 : 권시(權諰, 호는 탄옹, 1604년 - 1672년)
- 사돈 : 이순신(李舜臣, 1545년 - 1598년)
- 사돈 : 허목(許穆, 1595년 - 1682년, 호는 미수, 오리 이원익의 정실부인의 손녀 사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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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씨의 저서 <윤휴와 침묵의 제국>에서......
이덕일씨는 이 책 서문에서 윤휴에 대해서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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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의 벗이되고자 했던 시대의 개혁가, 동아시아 맹주가 되길 꿈꾸었던 국제정치가, 교조에 얽메이지 않는 자유로운 사상가였다.
1680년 숙종 6년 5월 20일. 서대문 밖 여염집에서 장독(곤장을 맞은 독)으로 신음하던 백호 윤휴에게 사약이 내려왔다. 윤휴는 금부도사에게 필묵을 요청했다. 이 세상에 남길 마지막 말을 위한 것이었으나 이 마져도 허용되지 않았다. 금부도사 홍수태는 필묵울 허용하지 않았는데, 그 시대는 윤휴에게 더 이상 한 마디의 말도 허용하지 않았다.
유언마져 거부당한 윤휴는 "내 주장이 있는데 이 약이 목숨을 끓지 못할까 두렵다. 소주를 가져와야 되겠다"라고 말했다. 자칫 질긴 목숨이 이승과 뒤엉킬 수 있었다. 그의 목숨이 더 이상 잠시라도 이승에 남아 있으면 안되겠기에 금부도사는 소주를 갖다주었다. 윤휴는 소주를 마시고 사약을 들이켰다.
한때 그의 정적들은 이렇게 마지막 말 한마디까지 거부당한 윤휴를 당대 최고의 선비로 추앙했다. 이 선비의 죄목은 놀랍게도 역(逆)이 아니었다. 역은 커녕 임금과 백성, 그리고 학문을 너무나도 사랑하였고, 평생 일관되게 도(道)를 추구하였던 그는 그의 학문의 길에 주자는 상대적 가치를 지닐 뿐이었다. 그 순간 그는 사문난적(斯文亂賊)이 되었다.
또 그의 길에는 북벌대의가 있었다. 그 순간 말로만 북벌을 외치던 세력에게 그는 정적이 되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백성들의 힘이 됫받침 되어야 했기에 그는 지폐법, 호포법 등 강력한 개혁을 시도하려 하였다. 그래서 그의 길에 백성들의 민폐 해소가 있었고, 신분제 해체가 있었다. 그 순간 그는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야 했다. 그는 기득권을 지키려던 서인들에게 도저히 살려두어서는 안 될 적이 되었다. 숙종의 계속된 환란 와중에 그는 결국 사약을 마셔야 했고, 마지막 유언도 남길 수가 없었다.
주자의 절대적인 가치가 군림하던 시대, 그가 죽은 후 그는 시대의 금기가 되었고 조선은 침묵과 위선의 세계로 빠져들어 갔다. 그리고 그 후 33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노론들의 철저한 배척과 탄압 속에 침묵과 위선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여주에 사는 그의 후손들은 아직도 윤휴에 대해서 말하기를 꺼리고 있다. 사망한 지 300여 년이면 과거의 화석이 희석되기 마련이지만 윤휴는 달랐다. 그는 죽은 화석이 아니라 마지막 유언까지도 거부당했고 강요당한 침묵 속에서 죽어갔기에 역설적으로 그는 죽지 않았던 것이다.
윤휴가 사형당한 후 조선은 침묵의 제국이 되었다. 더 이상 그와 같은 생각은 허용되지 않았다. 윤휴와 같은 생각은 특히 그런 생각을 표출하는 것은 '사문난적'으로 가는 초청장이었고, 저승으로 가는 지름길이었다.
<숙종실록>에 노론 사관이 윤휴에 대해서 어떻게 기록하였는지를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윤휴는 주자를 반대하고 거슬러서 장구(章句)를 마음대로 고쳤으며, 심지어 중용의 주자 주석을 고친 것이 많았다. 항상 말하기를 "중용의 저자 자사의 뜻을 주자 혼자만 알고 어찌 나는 혼자 모른단 말인가?"라고 했으니 이는 진실로 사문의 반적이다." <숙종실록> 3년 10월 17일
'사문난적'을 넘어 '사문반적'으로까지 모는 글이 실록에 버젓이 실릴 정도니 다른 이야기는 더 필요 없을 것이다. <수옥문답>이란 책이 있다. 윤휴의 일생이 학문 추구와 북벌대의의 실천과 백성들의 각 종 폐단을 제거하는 것이었다고 쓴 책이지만 그렇기에 윤휴는 이름을 맑힐 수가 없었다. 그 책은 손에서 손으로 윤휴의 후손에게 전해졌다. 그 긴 침묵의 제국에서 말살되지 않았다는 자체가 신기할 따름이다. 그러나 어찌 그 뿐이겠는가? 불과 십몇 년 전까지만 해도 어떤 후손은 조상에 대해 말하기를 껴려했다. 그래서 윤휴의 일생을 돌아보는 것은 단순히 300여 년 전에 사형당한 한 선비의 궤적을 추적하는 일이 아니었다. 아직도 윤휴를 다시 보려는 사람들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현실의 힘미 있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윤휴의 일생을 추적하는 일은 그 자체 만으로도 단순한 과거사가 아니라 현대사로 연결된다.
침묵은, 언젠가는 깨지게 마련이다. 최근 들어 여러 사람들이 윤휴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세상은 바뀌어 간다. 이 책이 윤휴의 못다 한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윤휴 일생의 아주 단순한 편린밖에 조명하지 못했다. 아직 터널은 다 벗어나지 못했다. 그럼에도 터널 끝의 세상이 보이기 시작한다는 의미만으로도 가치가 있다. 터널 끝에 세상을 맛보는 행운이 몇 사람에게나 허용되겠는가?
윤휴가 사약을 마시기 전, "나라에서 유학자를 쓰기 싫으면 안쓰면 될 것이지 죽일 것은 무엇 있는가."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유언 아닌 유언이 되었다. 그런데 백호 윤휴가 쓴 가야금 악보가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그의 곡이 이 시대에 다시 살아난다면 거부당했던 그의 유언이 다시 되살아나는 것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가 끝내 송시열과 노론 기득권 세력에 의해 사문난적과 역적으로 몰려 사형을 당하고 나자, 조선은 침묵과 위선의 세계로 빠져들어 갔다. 33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금기시되었던 그의 이름을 10여 년의 연구끝에 오롯이 되살려냈다.
"군자가 되고 소인이 되는 것은 하늘에 있는 귀신과 후대의 사람들에게 맡길 뿐"이라는 윤휴의 담담한 고백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외곡된 역사를 바로잡기를 당부하는 뜨거운 요청으로 울리고 있다.
나와 다른 너를 인정하지 않았던 시대, 나와 다른 너는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시대, 그리고 실제 그렇게 죽어왔던 시대, 그런 증오의 시대 유산은 이제 청산할 때가 되었다. 백호 윤휴의 인생은 그렇게 말하고 있다.
2011년 6월 천고 이덕일 기(記)
* 서문 내용 중 일부 가감했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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