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마을

한국의 역사 691 : 조선의 역사 233 (제16대 인조실록 8) 본문

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한국의 역사 691 : 조선의 역사 233 (제16대 인조실록 8)

두바퀴인생 2012. 8. 28. 09:03

 

 

 

 

한국의 역사 691 : 조선의 역사 233 (제16대 인조실록 8)

 

 

 

                                            

                                                                               남한산성                                       

                                                                                                                                                                                   

 

제16대 인조실록(1595~1649년, 재위: 1623년 3월~1649년 5월, 26년 2개월)

 

 

4. 인조시대의 변란들

 

이괄의 난, '삼일 천하'

 

인조가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이후 조선 사회는 한동안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반란으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집권한 서인들은 또 다른 반란을 염려하는 한편, 조정 내에서는 사분오열되어 각자의 정치적 입지를 다지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 과정에서 각 계파들은 반대 세력을 몰아내기 위한 계략을 짜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고, 급기야 역모설을 퍼뜨려 반대파를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이 같은 계파간의 갈등이 빚어낸 '이괄의 난'으로 인해 인조는 등극한 지 1년도 못 되어 도성을 버리고 피난길에 오르는 신세가 된다. 고전 끝에 가까스로 난은 평정되었지만 이 사건으로 조선의 국력은 극도로 쇠약해지고 사회는 극심한 혼란과 불안에 휩싸이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혼란은 결국 후금의 침공을 유발하게 되어 왕이 무릎을 끓고 후금(청)에 사죄하며 항복하여 군신관계를 맺는 삼전도의 치욕으로 이어진다.

 

인조시대의 혼란과 국치의 전주곡이 된 '이괄의 난'은 반정 이후 논공행상에 대한 이괄의 불만에 의해 야기된 사건이라는 것이 사관들의 통평이었다. 하지만 당시의 상황을 좀더 면밀히 분석해보면 이 사건은 이괄의 불만 때문이 아니라 서인들의 세력다툼이 원인이 되어 발생한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인조실록의 한 시론은 이 사건을 이괄이 인조반정 때 혁혁한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겨우 2등 공신에 책록된 데다가 평안병사 겸 부원수라는 직에 임명되어 외직으로 밀려난 것에 대한 앙심을 품고 일으킨 변란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 시론은 당시의 동아시아 정세를 감안하지 않고 기술되어 있다. 이괄이 평안병사로 부임하던 시기는 누루하치가 후금을 일으켜 명의 요동 지방을 함락시키고 조선에 위협을 가해오던 시기였다. 이 때문에 친명정책을 쓰고 있던 조선은 변방 방어에 안전을 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고, 따라서 변방 방어의 주력 부대 지휘관인 평안병사 이괄에게 국운이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때문에 인조가 이괄을 당순히 정치적인 이유에서 외직으로 내쫓아 그의 불만을 야기시켰다는 논평을 높게 평가하기보다 그의 능력을 높게 평가하여 그에게 북방 수비군의 주력 부대를 맡겼다고 이해하는 것이 당시의 상황 논리에 맞다.

 

 

------------------------------------------------------------------------------------------------------------------------------

 

 

이괄

 

이괄(李适, 1587년 ~ 1624년 2월 14일)은 조선시대 중, 후기의 무신, 군인, 정치인이다. 본관은 고성, 자(字)는 백규(白圭)이다. 무과 급제 직후 형조 좌랑, 태안 군수, 대정 현감 등을 지냈다.

 

인조 반정 거사 도중 기밀이 누설되자 후퇴한 김류, 이귀 등을 대신하여 반정군을 인솔하여 반정이 성공하게 했고 후금과의 국경 분쟁이 잦자 성책을 쌓고 국경을 경비했다. 인조반정을 성공시키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으나, 2등공신에 책록되어 불만을 가졌다. 그러나 후금과의 전투를 위해 평안도 병마절도사로 부임했으나 서인 공신들의 비판을 받게 된다. 논공행상에서 2등 공신으로 밀려난 것과 아들 전이 공신들의 횡포로 인한 시정의 문란을 개탄하는 것을 두고 곤신들로부터 반역의 무고를 받자 공신들에 대한 적개심이 폭발, 기익헌, 한명련 등을 포섭하여 난을 일으켰다. 반란 초기 서울을 점령하는 등 기세를 올렸으나 서울 입성 2일 후 관군에게 패퇴한 뒤, 부하에 의해 암살되었다. 경기도 출신.

 

 

이괄
출생 1587년
조선 경기도 여주군 여주읍
사망 1624년 2월 14일
사인 암살(참수)
국적 조선
별칭 자는 백규
학력 한학 수학
직업 무신, 군인, 정치인
종교 유교(성리학)
자녀

 

 

아들 이전

 

 

이괄(李适)
1587년 ~ 1624년 2월 14일
별명 자는 백규
태어난 곳 조선 경기도 여주부 여주읍
죽은 곳 조선 한성부
복무 조선
최종 계급 함경도, 평안도 병마절도사(품계:종2품급) 겸 부원수
주요 참전 인조반정 참가

 

 

생애

이괄은 경기도 여주군 여주읍에서 태어났다. 행촌 이암과 모헌 이육(李陸)의 현손이다. 고조부 이육은 안기도 찰방(安奇道 察訪)을 지냈으나 1498년(연산군 4년)의 무오사화(戌午史禍)로 큰형인 쌍매당 이윤(雙梅堂 李胤)과 둘째 형 만헌(忘軒) 이주(李胄)가 연루되자 벼슬을 버리고 경상북도 청도로 낙향했다.

 

고조부 외에도 5대 방조 중에 세조때 병조참판을 지낸 이육(李陸)도 있었다.

 

그뒤 아버지의 대에 경기도 여주군에 정착하였다. 그는 무예 뿐 아니라 글을 잘 하고 글씨를 잘 써서 명성이 있었다.

 

무과 급제와 관료 생활

선조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었다. 1599년(선조 32년) 선전관으로 재직 중 그해 윤 4월 9일 중국 명나라의 장수 유 제독(劉提督) 휘하의 항왜를 추격하여 사로잡아 처형하였다. 유 제독 휘하의 항왜가 독약을 잘 만들자, 좌상 이덕형이 이 항왜를 꾀어내기 위해 사사로이 도감의 초료를 내어 항왜 사야여문(使也汝文) 등에게 주어 꾀어내게 하였다. 그런데 그 항왜가 황해남도 평산(平山)에 이르러 달아나자 제독이 크게 노하여 국왕에게 글을 보내 끝까지 추적하여 잡게 하였기 때문에 부득이 계략으로 잡아 참수하게 하고 그 머리를 보내었다.

 

1599년 5월 1일 명천 현감(明川縣監)으로 부임하였고, 1603년 내직으로 돌아왔다가 그해 8월 30일 비변사 회의에서 이덕형에 의해 "전에 명천 현감(明川縣監)으로 있었으므로 오랑캐의 정세를 잘 아는데, 이미 대정(大靜)에 제수되었으나 아직 부임하지 않았으니 바꾸어 보낼 수 있습니다. 변장에 마땅한 사람을 얻어 군사를 어루만져 돌보면 적을 막기가 어렵지 않을 것"이라는 이유로 변방에 천거되었다.

 

그러나 1603년(선조 36) 11월 이신(李愼)의 후임으로 대정현감으로 부임하였다. 그뒤 1606년 11월 4일 형조좌랑에 임명되었으나 그해 12월 28일 간원으로부터 나이어린 무관(武官)으로 범람한 짓을 많이 저질렀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1607년(선조 40년) 3월 14일 태안군수를 지냈고, 그해 9월 경성 판관(鏡城判官)으로 부임하였다.

 

 

광해군 시절

1610년 고령군수, 그해 10월 영흥 부사(永興府使) 등을 지냈다. 그뒤 1616년(광해군 8년)에 제주목사가 되어 3년간 근무했다. 1617년 허락 없이 군량과 무기를 조성하였다는 이유로 우부승지 이원(李瑗)의 탄핵을 받았으나 왕이 무마시켰다.

 

포도대장을 지내고 1622년(광해군 14년) 12월 16일 함경북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다. 함경도 병마절도사로 부임하기에 앞서 김류 · 이귀(李貴) 등이 그의 재주와 지혜가 많음을 인정하고 반정의 비밀계획을 알려왔다. 처음에는 이들의 요청을 거부하였다. 그러나 함경북도 병마절도사에 부임하여 있을 때 신경진의 아우 신경유(申景裕)가 협박하다시피 권유하므로 그를 따라 상경, 1623년(광해군 14년)에 이귀, 김류 등의 반정세력과 합류하여 인조반정에 가담하였다.

 

 

인조 반정

1623년(광해군 15년) 음력 3월 21일, 인조반정 당일에 능양군을 주축으로 해서 반정군을 지휘해야 할 김자점이 예정 시각에 도착하지 않자 자신이 반정군을 진두지휘하여 이를 성사시켰다. 거사하던 날 부서를 나누는 등 온갖 계획을 도맡아 하였으나 인조 반정 모의가 알려지자 김류이귀 등은 반정군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처럼 행세하였다.

 

이괄은 바로 병사를 이끌고 한성부를 수색하여 광해군을 체포한다.

 

사실 인조반정은 이괄의 과단성이 없었으면 성공하지 못했을 쿠데타였다. 반정군의 대장을 맡기로 한 김류는 정보가 누설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거사 장소에 나타 나지 않고 자신의 무관함을 보이기 위해 집에서 근신하고 있었다. 이괄이 대신 대장을 맡아 군사를 움직이자 김류는 그제서야 뒤늦게 현장에 나타나 반정에 합류했던 것이다.

 

 

논공행상에서의 불만

인조반정을 성공시키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으나, 2등공신에 책록되어 불만을 가졌다. 포도대장을 지낸 뒤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이 되었다가 얼마 후 후금과의 국경분쟁이 인조의 핵심 현안으로 떠오르자 평안도 병마절도사 겸 부원수로 임명되어 영변에 출진, 성을 쌓고 국경지대를 수비하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훈록(勳錄)에 있어서 김류보다 낮은 2등에 책록되자 사람들도 억울하다 하였다. 그뒤 이귀가 최종적으로 훈록을 결정하는 자리에서 '반정하던 날 이괄의 공적이 많았다' 고 역설하였으나 김류의 고집으로 2등 공신에 한성 판윤이 제수되었다가 곧이어 평안도지방에 오랑캐의 침입이 염려된다는 이유로 평안 병사 겸 부원수로 전출된 것이다. 그 이후에도 그는 평소 반정에 공이 컸음에도 불구하고 직위가 낮아 속으로 원망을 품었다고 전해진다.(학계에서는 이것을 이괄을 폄하하려는 사대부들의 왜곡이라 추측하기도 함) 특히, 그는 김류 등의 기회주의적인 성격에 큰 불만을 품었다고 한다.

 

서인 내부에서 주도권 다툼에서 밀린 이괄은 중앙의 서인들이 자신을 역모로 몰아가려 하자 인조가 즉위한 지 10개월 만에 반란을 일으켜 서울로 진군했다.

 

반정이 성공할 수 있게 한 가장 큰 공로자는 이괄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논공행상에서 2등 공신으로 밀린 후 외직으로 축출되었다. 중앙의 서인들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이괄을 역모로 몰았다. 문희, 이우 등이 이괄의 아들 등과 짜고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며 인조에게 고해 그의 아들을 잡아가려 하자 그는 반란을 일으켜 이에 반발한 것이었다.

 

 

이괄의 난

1624년(인조 2년) 1월 아들 이전이 지식층과 사귀다가 공신들의 횡포로 인한 시정의 문란을 개탄한 것이 과장되어, 반역의 무고를 받고 영변의 군영에 금부도사 고덕률(高德律)·심대림(沈大臨), 선전관 김지수(金芝秀), 중사(中使) 김천림(金天霖) 등이 당도하였다. 이후 1월말 대간에서 이괄에 대한 탄핵 역시 계속되었다. 아들이 역모내통이라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체포되자 무능하고 의심 많은 공신들에 대한 적개심이 폭발, 금부도사 등을 죽인 뒤 잠복부대를 파견하여 자신의 아들과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이었던 한명련 등을 구출하고 난을 일으켰다. 곳곳에서 관군을 대파한 그의 군대는 마침내 서울까지 점령, 흥안군을 임금으로 추대하였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서울에 있던 부인과 장인 이방좌, 아우 이돈능지처참을 당하는 비극을 겪었다.

 

정충신과 이중로가 이끄는 관군을 거듭 격파한 이괄의 반란군은 임진강 나루터에서 관군을 다시 격파하고 서울 진입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 서울 함락이 눈앞에 닥치자 인조와 서인 정권은 공주로 피난하기로 결정했다. 임진왜란 때 서울을 버리고 도망한 지 불과 30년 만의 일이었다. 반정 세력 끼리 내분이 일어나 나라를 또 한번 혼란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것이었다. 이괄은 군사를 일으킨 지 19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선조의 서자 흥안군을 왕으로 옹립하면서 새 정권을 수립했다. 인조반정이 일어난 지 1년이 안되어 새로운 정권이 들어선 것이었다.

 

 

패배와 처형

파죽지세로 진격하던 그의 군대는 안령에서 도원수 장만(張晩)이 이끄는 토벌군에게 참패, 이천(利川) 묵방리로 퇴각했다가 부장이던 이수백, 기익헌(奇益獻) 등에게 살해당하고 목이 잘려 수급은 인조가 피난해 있던 공주로 보내져 효시(梟示)되었다.

 

사후 그의 형제의 손자인 이복령(李福齡)이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는데, 이때 이복령은 숙모인 진주강씨(晋州姜氏)의 강보에 싸여 서해안으로 탈출한다. 진주강씨는 어린 이복령을 데리고 충청남도 서산군 해미를 거쳐 태안에 숨어 살게 되었다.

 

이후 이괄과의 가까운 관계 때문에 후손들은 조선시대 내내 고성이씨(固城李氏)라는 성씨를 사용하지 못하고 진주이씨(晋州李氏)로 본관을 숨기고 생활하다가 조선 멸망 후에 고성 이씨로 환원하였다.

 

 

사후

그는 무과 출신이었으나 문장과 서예에도 능하였다. 그러나 이괄의 난이 실패로 돌아가고 그 역시 역모로 몰려 단죄되면서 그의 작품과 저술 중 대부분은 사라졌다.

 

이후 이괄의 이름은 그의 아버지와 함께 문중의 족보에서 빠졌다가 1930년 이후 다시 실리게 되었다. 이때 그의 친족으로 일찍 죽은 이응태에 관한 기록까지 추가로 발견되면서 400년 만에 발견된 미이라에 대한 자료로 연구 중에 있다.

 

 

가족 관계

  • 아버지 : ?
    • 동생 : 이돈(李遯, ? - 1624년 2월 4일)
  • 부인 : 이씨(李氏, ? - 1624년 2월 4일)
    • 아들 : 이전
    • 며느리 : 계이(季伊, ? - 1624년 2월 6일)
  • 장인 : 이방좌(李邦佐, ? - 1624년 2월 4일)
  • 친족 : 이응태(1556년 - 1586년)

 

 

기타

  • 고령군수와 영흥부사로 재직할 때 본래 일 처리하는 솜씨를 가지고 있었다는 칭찬을 들었다.
  • 이귀인조반정 후 논공행상을 논하는 자리에서 이괄의 공로가 적지 않았음을 주장했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