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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693 : 조선의 역사 235 (제16대 인조실록 10)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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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693 : 조선의 역사 235 (제16대 인조실록 10)

두바퀴인생 2012. 8. 30. 02:38

 

 

 

 

한국의 역사 693 : 조선의 역사 235 (제16대 인조실록 10)

 

 

 

                                            

                                                                               남한산성                                       

                                                                                                                                                                                   

 

제16대 인조실록(1595~1649년, 재위: 1623년 3월~1649년 5월, 26년 2개월)

 

 

4. 인조시대의 변란들

 

이괄의 난, '삼일 천하' (계속)

  

이괄은 도원수 장만이 주둔하고 있던 평양을 피해 곧바로 도성으로 향했다. 장만은 이괄에게 잡혔다가 풀려난 군관 남두방을 통해서 이괄의 반란 사실을 듣고 있었으나 5천 명의 지원 부대로 1만 명의 주력 부대를 상대하기는 역부족이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일단 자기 휘하의 군졸들을 결집시켜 성문을 굳게 닫고 이괄의 반란 소식을 조정에 전했다.

 

이괄 부대는 별다른 방해를 받지 않고 거침없이 한성을 향해 진군했다. 이괄의 반란군은 철저히 샛길을 통해 이동하였고 황해방어사나 경기방어사의 부대도 미처 그들을 저지하지 못했다. 진압군과 처음으로 접전이 이루어진 곳은 황해도 황주였다.

 

그곳에서 이괄 부대를 가로막은 부대는 정충신과 남이홍이 이끄는 부대였다. 그들 두 사람은 이괄과 절친한 친구 사이였다. 그래서 이괄은 가급적이면 정면 돌파를 피하고 급습을 통해 그들을 돌파할 계획을 세웠다.

 

이괄은 우선 부하 장수 허전으로 하여금 거짓으로 진압군에게 투항하게 하여 적의 경계를 늦춘 다음 급습하였다. 결과는 이괄의 대승이었다.

 

진압군을 누른 이괄은 관군 선봉장 박영서를 죽이고 다시 도성을 향해 재빠르게 진군하였다. 그토록 도성 진입을 서두른 것은 아마 도성 내에 살고 있던 가족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도성에 채 도착하기도 전에 그의 아내와 동생 이돈은 관군에게 체포되어 이미 사형당하고 말았다.

 

이후 이괄 부대의 두 번째 전투는 개성과 임진강을 사이에 두고 있는 평산에서 벌어졌다. 이때 관군은 방어사 이중로와 평산부사 이확이 이끌고 있었다. 이들은 여울을 사이에 두고 서로 경계를 삼고 이괄 부대를 기다리고 있었으나 잠복 정보를 입수한 이괄 부대의 급습으로 관군은 다시 대패했다.

 

세 번째 전투는 임진강 나루터에서 벌어졌다. 이 싸움에서 이괄은 한명련의 노련한 조언에 힘입어 관군을 대파하고 벽제로 진출했다.

 

한편 임진강 전투에서 관군이 대패했다는 소식을 보고 받은 인조와 서인 세력은 기자헌 등 옥에 갇혀 있던 수십 명의 대북 세력들이 반란군에 내응할 가능성이 있다는 판단을 하고 그들을 모두 처형시켰다. 그리고 한성을 버리고 서둘러 공주로 피난을 떠났다.

 

이괄 부대가 마침내 한성에 도착한 것은 출군 19일 만인 2월 10일이었다. 그들은 도성에 당도하자 우선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반란군이 승리하여 새로운 왕이 즉위할 것을 알린다. 태조 이성계 이후 반란군이 도성을 점령하기는 이괄이 처음이었다. 그때까지 도성을 점령하면 승리한 것으로 간주할 만큼 이괄 부대는 선조의 아들 흥안군을 왕으로 옹립하고 곳곳에 방을 붙여 주민들의 생업에 충실하도록 민심을 안심시켰다.

 

하지만 이들의 한성 점령은 오래 가지 못했다. 그들이 도성을 점령하자 곧 뒤쫓아온 장만이 흩어진 군사들을 모아 전열을 가다듬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장만과 정충신, 남이홍 등은 작전을 짠 끝에 북산의 길마재(무악재 부근 안산)에 진을 쳤다.

 

이괄은 이 소식을 듣고 군대를 둘로 나누어 관군을 압박해 들어갔다. 반란군의 선봉장은 백전노장인 한명련이 맡았다. 하지만 접전 결과 지형상 유리한 지역을 고수하고 있던 관군에게 반란군이 대패하고 말았다.

 

관군과의 싸움에서 대패하자 이괄은 부상당한 한명련과 패잔병을 이끌고 급히 도성을 빠져나가 이천에 다시 진영을 구축했다. 하지만2월 15일 이천에 도착했을 때 반란군은 이미 뿔뿔이 흩어진 상태였다. 그러자 전세를 회복하기 힘들다고 판단한 이괄의 부하들이 기습적으로 이괄과 한명련의 목을 베어 관군에게 투항해버렸다. 조선의 이씨 왕조가 다시 한 번 꺼져가던 등불이 되살아나는 순간이었다.

 

이로써 이괄의 난은 평정되었지만 조선 사회의 혼란은 가속화되었다. 내부 반란으로 왕이 쉽게 도성을 비우자 백성들은 불안과 공포에 떨어야 했고, 이러한 정서는 난이 평정 된 이후에도 조정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졌다.

 

또한 반란으로 인해 변방의 주력 부대가 상실되어 북방 수비가 허술해졌고, 이는 후금의 침략욕을 자극시켜 결국 정묘호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리고 정묘호란은 다시 병자호란으로 일어져 왕이 청 태종에게 무릎을 끓고 사죄하는 굴욕적인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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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괄의 반란군과 관군의 결정적인 전투 ; 길마재(안산) 전

 

 

 무악재에서 바라본 안산의 모습

 


서대문구 홍제동 산33번지 일대에 위치한 안산은 동봉과 서봉의 두 봉우리로 나누어져 있다. 멀리서 바라보면 두 봉우리 사이가 움푹하므로 길마(소에 짐을 실을 때 그 등에 얹는 기구)와 같다하여 ‘길마재’라고도 불리었으며 이를 한자로 표기하여 안(鞍, 안장 안)산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안산은 무악(毋岳)이라고도 불리는데 이 별칭의 유래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첫째는, 풍수지리상 서울의 진산(鎭山)인 북한산의 인수봉이 어린애를 업고 나가는 모양이어서 이를 막기 위해 이 산을 ‘어머니의 산’이란 뜻으로 모악(母岳)이라고 칭했던 데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이며 나머지는 조선 초기 한양을 도읍으로 삼는데 공이 컸던 ‘무학 대사’에서 연유되었다는 설이다. 그러나 그 정답이 무엇이건 간에 ‘무악재’라는 지명에서도 볼 수 있듯이 안산의 별칭은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아온 것이 분명해 보인다.

 

 

▲  안산의 바위들. 암벽등반 장소이기도 하다

 


 

 근대의 상징들. 왼쪽부터 한성과학고, 구 서대문 형무소, 군부대

 


안산 기슭에는 현재 기존의 서대문 형무소와 한성 과학고, 그리고 군부대가 삼각형을 이루며 위치하여 한군데 모여 있는 형국이다. 서대문 형무소(구 경성감옥)의 위치야 일제시대 때 데라우치 총독이 안산과 인왕산으로 막혔다는 지정학적 요소 외에, 애국지사들에게 자괴감을 심어주기 위해 독립문이 경성감옥 정문처럼 보이도록 배치한 데서 연유되었다고 한다. 산 중턱에 올라서면 정상의 봉수대와 전망대가 있다.

 

 

 안산에서 바라본 북한산

 


정상에 올라서 사방을 둘러보면, 북한산, 남산, 인왕산은 바로 눈앞에 있었으며, 맑은 날  멀리 개성의 송악산까지 선명하게 보인다.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거리는 63빌딩과 여의도, 그 뒤로 관악산이 보인다. 조선시대 호랑이가 그렇게 자주 출몰했다는 곳이 이곳 안산이 있는 무악재이다.

 


                                                    안산에서 바라본 서울의 남쪽. 여의도와 관악산 전경

 

 

▲  안산에서 바라본 개성 송악산

 


 호랑이가 나타났었다는 무악재와 안산의 상징 봉수대

 


 

 안산에서 바라본 남산

 

지금의 서울 풍경이 이 정도라면 과연 과거 조선시대에는 어떤 전경이 펼쳐졌을까? 아마도 600년 도읍으로서 서울을 결정할 만큼 커다란 산들에 둘러싸인 분지의 모습은 무척이나 아름다웠으리라. 결국 풍수지리란 땅을 잘 골라 단순히 명복을 비는 개념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이 하나의 유기체로 운행될 수 있도록 지세를 자연 그대로 이용하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안산에서 바라본 경복궁

 

음지산이라 유독 약수가 많다는 안산. 아직까지 22곳이나 있다는 약수터와 사찰인 봉원사(奉元寺)가 있다. 봉원사는 신라 진성여왕 3년(889)에 도선선사가 창건한 반야사(般若寺)에서 유래되었는데, 임진왜란 때 다 타버린 절을 지인이 중창하고 영조 24년(1748년) 찬즙, 증암 두 대사가 현 위치로 절을 이전 중건 하면서 이름을 봉원사로 지었다고 한다. 봉원사는 갑신정변의 주역 김옥균, 박영효 등이 그들의 사승(師僧)인 이동인과 갑신정변을 모의하였던 진원지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많은 유물과 가람 일부는 한국전쟁 당시 소실되었으며, 1966년 복원된 염불당은 마포에 있었던 대원군의 별장 아소정을 옮겨온 것이라고 한다. 유교 왕실의 건물이 불교 사찰의 건물로 쓰이고 있는 아이러니는 결국 우리의 흐트러진 역사의 단면일 것이다.

 

 안산 봉원사

 

1624년 2월10일 이괄이 서울로 입성한 직후, 도원수 장만은 관군을 이끌고 서울을 향해 달렸다. 장만은 초조했다. 반란군에게 도성을 내주고 국왕으로 하여금 파천 길에 오르게 만든 일차적 책임이 자신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장만은 파주 혜음령(惠陰嶺)에 이르러 부원수 이수일(李守一)과 남이흥, 정충신 등 장수들을 불러모아 작전 회의를 열었다. 장만은 두 가지 계책을 제시했다. 서울로 달려가 결전을 벌이든가,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남쪽에서 원군이 오기를 기다려 세력을 키운 뒤 공격하자는 안이었다. 그는 사실 지구전을 생각하고 있었다.

 

● 관군 승기 잡자 관망하던 민심 돌아서

정충신은 지구전에 반대했다. 그는 즉시 서울로 달려가 안현(鞍峴)을 장악하자고 주장했다. 높은 고개를 차지하여 진을 친다면 도성을 내리누르게 될 것이고, 관망하고 있는 도성 백성들도 관군 편으로 붙을 것이라고 했다. 또 반란군이 공격해와도 지형의 이점 때문에 승리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장만은 정충신의 계책을 받아들였다. 관군은 안현을 향해 내달렸다.

정충신이 제일 먼저 연서역(延曙驛, 지금의 은평구 역촌동)을 통과하여 안현에 도착했다. 그는 정상으로 달려 올라가 봉수대를 지키는 병사를 생포했다. 정충신은 평상시의 봉화(烽火)를 올리도록 하여 이괄의 진영에서 안현이 탈취된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게 했다. 이윽고 관군의 병력이 속속 안현으로 집결했다. 때마침 동풍이 크게 불어 이괄 진영은 관군이 안현으로 모여드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이튿날 아침에야 이괄은 관군이 안현을 접수한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그는 느긋했다. 이미 승승장구해온 터라 관군을 가볍게 보는 자만심이 생겼던 것이다. 이괄은 항왜들을 이끌고 연서역으로 나아가 장만을 생포하려는 계책을 세웠다. 한명련(韓明璉)은 도성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안현을 공격하여 승리를 거둠으로써 민심을 얻어내자고 건의했다. 이괄의 반란군은 부대를 둘로 나눠 안현을 향해 진격했다. 한명련이 항왜 수십 명과 정예 포수를 이끌고 선봉에 서고, 이괄은 중군이 되어 싸움을 독려했다. 아침 6시쯤부터 격전이 벌어졌다. 도성의 백성들은 성이나 높은 곳에 올라가 두 진영의 싸움을 지켜보았다

전황은 밑에서 위쪽으로 공격하는 반란군에게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화살과 총탄이 제대로 맞지 않았다. 더욱이 장만 등은 도성을 내준 것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도 분전했다. 오전 11시쯤까지 이어지던 싸움의 중간에 바람의 방향마저 바뀌었다. 반란군 쪽으로 서북풍이 불었다. 관군은 승기를 잡았다. 반란군 진영에서 사상자가 속출했다. 많은 수가 안현을 향해 기어오르다가 벼랑에서 떨어져 죽었다. 한명련도 화살에 맞은 뒤 퇴각했다.

전투 장면을 구경하던 도성 백성들은 반란군이 수세에 몰리자 돈의문(敦義門)과 서소문(西小門)을 닫아 버렸다. 관망하던 민심의 향배가 정해진 것이다. 퇴로가 막힌 반란군은 숭례문 쪽으로 향하거나 마포 서강(西江) 방면으로 도주했다. 여염으로 숨어 들어간 자들도 있었다. 결국 1만여 명의 반란군이 허무하게 괴멸되고 말았던 것이다.

 

● 기익헌 등이 반란군 지휘부 9명 죽여

2월11일 밤 아홉시 무렵, 이괄과 한명련은 패잔병을 이끌고 수구문(水口門)을 통해 서울을 탈출했다. 다음날 새벽 삼전포(三田浦)를 경유하여 광주(廣州)까지 달아났다. 이괄은 광주목사 임회(林檜)를 살해하고 경안교(慶安橋)라는 곳에서 병력을 수습하려 했다.

12일 아침, 정충신 등이 병력을 이끌고 추격해 왔다. 안현에서 패한 이후 반란군은 이미 기세가 꺾였다. 얼마 되지 않는 관군의 공격에 변변하게 저항도 해보지 못하고 무너졌다. 이괄은 고작 60여명 정도의 기병만 거느리고 다시 이천(利川) 쪽으로 달아났다. 이괄을 따라가던 흥안군은 광주 소천(昭川) 쪽으로 도주했다.

관군 또한 지쳐서 추격을 멈추고 있을 때, 이괄의 진영에서 포수 한 사람이 도망쳐 왔다. 그는 반란군 내부에 이괄과 한명련의 목을 베려고 시도하는 자가 있다고 알려 주었다. 막다른 골목에 몰리자 반란군 내부에서 자중지란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튿날 새벽 정충신이 관군을 이끌고 이천 묵방리(墨坊里)에 당도했을 때 상황은 이미 종료되었다. 반란군 가운데 기익헌(奇益獻) 등이 이미 이괄과 한명련 등 지휘부 아홉 명을 살해한 상태였다. 한명련의 아들과 조카만 간신히 달아나고 반란군은 궤멸되었다.

흥안군은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여염으로 숨어들다가 체포되었다. 그는 서울로 압송되어 돈화문 앞에서 살해되었다. 한남원수(漢南元帥) 심기원(沈器遠)과 훈련대장 신경진(申景 )이 ‘흥안군이 선조의 아들이고 인조의 숙부지만 참역(僭逆)에 가담했으니 아무나 죽일 수 있다.’는 명분을 내세워 죽였던 것이다. 흥안군은 이괄에 의해 추대된 지 불과 4일 만에 몰락하고 말았다.

인조 일행은 안현 전투에서 승리했다는 소식을 천안에서 들었다. 하지만 13일 새벽, 도주하던 적이 달려들 것을 우려하여 공주로 들어갔다. 2월15일, 참수된 이괄의 머리가 공주에 도착했다. 인조와 신료들은 군용(軍容)을 벌여놓고 이괄의 수급(首級)을 받는 의식을 거행했다. 반정을 일으켜 어렵사리 잡은 권력을 1년이 채 못 되어 내놓을 뻔하다가 다시 잡는 감격의 순간이었다.

 

● 난의 후유증

인조는 2월18일 공주를 출발하여 22일에 서울로 귀환했다. 난민들이 불을 질러 창경궁이 불탔기 때문에 인조는 경덕궁(慶德宮)으로 들어갔다.

도성은 엉망이었다. “모든 재물이 바닥나서 열흘 먹을 저축도 없는 상황”이라는 보고가 올라왔다. 민심이 흉흉한 것이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였다. 며칠 사이에 궁궐의 주인이 바뀌었다가, 다시 바뀌면서 처참한 살육전이 벌어졌다.

이미 파천하기 직전인 2월7일, 인조 정권은 옥에 갇혀 있던 정치범들을 즉결 처분했다. 광해군 때 정승을 지냈던 기자헌(奇自獻)을 비롯하여 역모 가담 혐의를 받았던 37명의 목을 베었다. 이들은 의심은 받았지만, 혐의를 부인하고 있었던 데다 심문도 채 마치지 않은 상태였다.

이원익이 “기자헌은 반역에 가담한 죄상이 없는 데다 폐모론에도 반대했다.”고 애써 변호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정권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이 반정공신들의 여유를 빼앗아 갔다.

격변의 와중에서 무고하게 목숨을 잃은 백성들도 적지 않았다. 안현 싸움에서 패한 이괄군이 도주하기 전에 80여 명을 학살했고, 관군이 서울을 접수하면서 다시 처참한 학살이 빚어졌다. 좌의정 윤방(尹昉)은 인조에게 ‘적에게 붙었던 백성 가운데 자신이 처단한 사람만 200명’이라고 보고했다. 백성들 가운데는 무고한 사람을 살해하여 ‘반란군의 머리’라면서 수급을 가져다 바치는 자들이 있었다.

비록 잠깐이었지만 이괄이 도성을 점령했던 동안 서울의 민심은 인조정권에 몹시 적대적이었다. 백성들은 이괄군을 맞이하고, 창경궁에 불을 지르고, 내탕(內帑)을 훔치고, 반정공신들의 저택을 점거했다. 인조반정 성공 직후 자살한 박승종(朴承宗) 집안의 노비들은, 대가가 서울을 나가자마자 반정공신 김류의 집을 접수했다. 박승종의 며느리는, 역시 공신 가운데 실세였던 이귀의 집에 들이닥쳐 문을 봉해버렸다. 반정 직후 김류가 박승종의 저택을, 이귀가 박승종의 아들 박자흥(朴自興)의 저택을 차지한 데 대한 보복이었다.

인조가 환도한 뒤 또 다른 보복이 자행되었다. 서울을 비운 사이에 피해를 당한 관인이나 사대부들은 환도하자마자 의심나는 대상자들을 포도청에 고발했다. 그 때문에 ‘포도청의 감옥이 가득 찼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 아예 직접 대상자들의 집으로 쳐들어가 재물을 약탈하는 자들도 있었다.

이괄의 난은 진압되었지만 인조정권은 여러 면에서 한계를 드러냈다. 논공행상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이괄로 하여금 거병하게 만든 것 자체가 심각한 문제였다.

후금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는 와중에 내란을 치르면서 조선의 군사적 역량은 심하게 훼손되고 말았다. 인조정권은 숨 돌릴 겨를도 없이 민심을 수습하고 국방력을 재건해야 하는 어려운 과제에 직면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