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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689 : 조선의 역사 231 (제16대 인조실록 6)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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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689 : 조선의 역사 231 (제16대 인조실록 6)

두바퀴인생 2012. 8. 26. 03:31

 

 

 

 

한국의 역사 689 : 조선의 역사 231 (제16대 인조실록 6)

 

 

 

                                            

                                                                               남한산성                                       

                                                                                                                                                                                   

 

제16대 인조실록(1595~1649년, 재위: 1623년 3월~1649년 5월, 26년 2개월)

 

 

2. 굴욕의 왕 인조의 등극과 조선의 끝없는 수난(계속)

후금의 13만 대군에 밀린 조선군은 남한산성에 1만 3천의 군사로 진을 쳤지만 세력의 열세와 군량미 부족에 시달리다가 결국 45일 만에 항복하고, 인조는 삼전도에서 무릎을 끓고 청과 군신의 의를 맺는 한편, 소현세자, 봉림대군을 청에 볼모로 보내야 했다. 이때 척화론을 주장하던 홍익한, 오달재, 윤집 등과 수많은 포로들도 함께 청으로 끌려갔다.

 

병자호란으로 조선은 임진왜란 이후 다소 수습되었던 국가 기강과 경제 상태가 악화되어 민생은 피폐해지고 백성들은 굶주림으로 원성이 높았다. 게다가 인조는 삼전도에서 당한 굴욕을 이겨내지 못하고 반청의 색깔을 더욱 짙게 드러내는 한편 망해가고 있던 명나라에 대한 사대주의 노선을 한층 강화시켰다.

 

인조의 그 같은 모화정책은 청에 인질로 잡혀 있던 소현세자의 의견과는 배치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는 소현세자를 불신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후궁 조소용의 이간질에 말려들어 급기야 볼모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아들 소현을 독살하는 극악한 일면을 드러내고 만다.

 

그리고 둘째 아들 봉림대군을 세자로 세움으로써 현종 대의 서인과 남인 사이에 치열한 예송논쟁 정쟁으로 비화된 예송의 원인을 제공하게 된다.

 

조정은 이때부터 귀인 조소용 소생의 옹주를 손자며느리로 맞아들인 김자점이 정권을 독점하면서 횡포를 일삼아 조정에 대한 민간의 불신은 깊어지고 정국은 더욱 혼란으로 치달았다.

 

인조는 이괄의 난 이후 계속된 조정과 사회의 혼란을 일소하고자 한때 병권을 안정시키고 민생을 구제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1624년에는 총융청, 수어청 등 새로운 군영을 설치하여 북방과 해안 방어를 보강했으며, 이후 군역의 세납화와 군량 조달을 위해 납속사목을 발표했다. 이로써 군역을 세금으로 대신할 수 있는 제도가 마련되었다.

 

1628년에는 네들란드인 벨테브레가 표류하여 왔는데, 그의 이름을 박연으로 고치고 훈련대장 구인후 휘하에 넣어 대포 제작법과 사용법을 가르치게 해 조선군의 화력을 증강시키기도 했다.

 

한편 민생 안정책으로 광해군 당시 경기도에 한정하여 실시하던 대동법을 1623년 강원도까지 확대 실시하여 농경지의 면적을 정확하게 측정함으로써 세금 수입을 확대시켰다. 또한 농토세 징수 규범인 전제법을 폐지하여 농민의 부담을 줄였다.

 

그리고 화폐 사용을 위해 1633년 상평청을 설치하여 상평통보를 주조했으며, 청인과의 민간 무역을 공인하여 북관의 회령 및 경원, 압록강변의 중강에 시장을 열었다.(경원개시, 중강개시)

 

이 같은 인조의 노력은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으로 그다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또한 대부분의 정책들은 이미 광해군 대에 실시한 것들이어서 새로운 발전을 도모하지는 못했다. 오히려 1645년 청에 볼모로 잡혀갔던 정두원과 소현세자가 돌아오면서 화포, 천리경, 과학 서적, 천주교 서적 등을 가져오고, 송인룡 등이 서양의 역법인 시헌력을 수입하여 새로운 문화 형성에 도움을 주었다. 또한 이 시기에 <황극경세서>, <동사보편>, <서연비람>등의 책들이 간행되었고, 송시열, 송준길, 김육, 김집 등 우수한 학자들이 배출되어 조선 후기 성리학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하지만 이들 학자들은 현종, 숙종 대에 걸쳐 예송을 일으켜 조정을 일대 파란으로 몰고 가게 된다.

 

인조는 이처럼 굴욕과 고통으로 왕위를 유지하다가 1649년 재위 24년 만에 5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인조는 인렬왕후 한씨를 비롯하여 5명의 부인에게서 6남 1녀를 낳았고, 능은 장릉으로 왕비 인렬왕후와 함께 합장되었는데, 처음에는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운천리에 있다가 영조 때 탄현명 갈현리로 옮겨졌다.

 

 

 

 

3. 상평통보의 탄생

인조 대의 경제정책 중 주목할 것은 상평청을 설치하여 명목화폐이자 동전인 상평통보를 주조하게 한 것이다. 이때 발행된 상평통보는 숙종 대에 이르러 조선의 유일한 법화(法貨)로 굳어지기 때문이다.

 

상평통보를 주조했던 상평청은 원래 흉년에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해 비축 곡물이나 자금을 관리하던 관청이다. 이는 고려 성종 대에 설치되어 세조 대까지 이어졌던 상평창을 계승한 것이다. 세조는 상평창의 원활한 운영을 위해 운영 법규까지 제정하였으나 국가 재정의 궁핍으로 본래의 취지를 살리지 못했다. 그 때문에 선조 대에 와서 상평창을 격상시켜 각 지방의 구제곡물을 관장토록 하며 활로를 모색하게 된다. 하지만 임진왜란으로 국가 경제가 파탄에 이르자 그 기능을 상실하고 인조 대에 와서 대동법을 시행하던 경기청과 선혜청에 부속되기에 이른다.

 

이때 비변사에서 운영하던 진휼청과 병합되어 평소에는 상평청이라는 이름으로 곡물을 관리하고, 흉년이 들면 진휼청으로 개칭하여 구제 업무를 담당하였다. 그리고 1633년 마침내 상평통보를 주조하게 된다.

 

상평통보 이전에도 조선은 이미 세종 대에 조선통보를 주조하여 유통시킨 적이 있었다. 하지만 동전의 주조로 당시 법화로 규정해놓은 저화의 가치가 폭락하는 바람에 저화의 퇴진을 가져왔다. 또한 일본으로부터 수입하고 있던 원료와 주조에 투입할 인력 부족으로 충분한 양의 동전을 생산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조선통보 역시 법화로써 그 기능을 수행하지 못했다.

 

인조는 법화가 실종된 이 같은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고심하다가 결국 신망을 잃은 조선통보를 거둬들이고 상평통보를 주조하여 보급하게 된다.

 

하지만 이때 주조된 상평통보 역시 미처 신망을 얻기도 전에 크나큰 난관에 부딪힌다. 형제관계에서 군신관계로 전환할 것을 요구하던 청나라가 1636년에 대대적인 침략을 지행함에 따라 화폐가 무용지물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병자호란이 끝난 후에도 전란의 여파는 계속되어 시장에는 한동안 물품화폐만이 유일한 교환수단으로 남는다.

 

하지만 효종, 현종 대를 거치면서 점차 경제적인 안정을 되찿고, 숙종 대에 이르러 조선 조정은 다시금 화폐정책을 실시하여 법화를 만들어내고자 했는데 그것은 곧 상평통보의 부활로 이어진다.

 

1678년 숙종 4년 조선 조정은 상평통보를 유일한 법화로 채택하여 유통, 보급토록 공포하게 된다. 주조작업은 호조, 상평청, 진휼청, 정초청, 사복시. 어영청 및 훈련도감 등 7개 관청 및 군영에서 맡았다.

 

이후 상평통보는 1894년 고종에 의해 정식으로 주조 중단 명령이 내려지기까지 조선의 공식적인 법화로 활용되었던 것이다.

 

 

 

4. 인조실록 편찬 경위

<인조실록>은 총 50권 50책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1623년 3월부터 1649년 5월까지 인조 재위 26년 2개월간의 역사적인 사실을 편년체로 기록하고 있다. 편찬 작업은 1650년 8월 1일에 시작되어 1653년 6월에 끝마쳤다.

 

편찬 작업에 참여한 사람은 총재관 이경여, 김육을 비롯한 도청당상 3명, 도청낭청 25명, 일반당상 5명, 일방낭청 7명, 이방당상 3명, 이방낭청 6명 그 외 실무자 15명 등 도합 66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