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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687 : 조선의 역사 229 (제16대 인조실록 4) 본문
한국의 역사 687 : 조선의 역사 229 (제16대 인조실록 4)
남한산성
제16대 인조실록(1595~1649년, 재위: 1623년 3월~1649년 5월, 26년 2개월)
1. 무력 정변으로 광해군을 폐출시킨 능양군(계속)
상황이 이처럼 급변하자 능양군을 비롯한 역모 세력들은 이듬해인 1623년 3월 13일 새벽에 거사를 도모하기로 확정하고 12일 밤부터 홍제원에 모여 대오를 가다듬고 군사 행동 지침을 마련하고 있었다. 그런데 계획에 차질이 생기고 말았다. 이미 조정에서 그들의 거사 계획을 눈치 채고 훈련도감 이확으로 하여금 역모 가담자들을 검거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던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이귀는 거사 시간을 앞당겨 출병을 서둘렀다.
출병 당시 반란군의 숫자는 겨우 7백 명 정도로 반란군 대장을 맏기로 했던 김류가 늑장을 부리는 바람에 반란군은 예상 인원의 절반에도 못미치는 상태였다. 하지만 그대로 눌러앉아 있어봤자 결과는 진압군에게 당하는 것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귀는 일단 이괄에게 대장직을 권유했다. 이괄은 대장직을 맡자 반란군으로 하여금 머리에 의(義)자를 쓴 띠를 두르게 하고 군사를 지휘했다.
한편 김류는 거사 계획이 탄로났다는 소리를 듣고 주저하다가 사태가 이미 어쩔 수 없다고 판단하고 뒤늦게야 군사를 이끌고 반란군에 합류하였다. 이때 이괄은 김류를 받아들이지 않으려 했으나 이귀의 중재로 결국 합류하게 되었고 김류가 총대장을 맡게 되어 궁궐을 향해 진격했다.
반란군이 창의문을 향해 진격했을 때 진압군은 문을 굳게 닫고 궁을 수비했지만 반란군은 곧 창의문을 쉽게 통과하여 창덕궁에 도달하였다. 창의문 안에는 이미 능양군이 자신의 수하들을 이끌고 그들을 맞이하기 위해 나와 있었다. 이 장면을 목격한 훈련도감 이확은 군사를 이끌고 창의문 주위에 매복하고 있었으나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알고 반란군을 공격하지 않았다.
한편 훈련대장 이홍립은 대궐 밖에 진을 치고 있었다. 그는 이미 반란군에게 내응하기로 약속한 터였기에 간접적으로 반란군을 돕고 있었다. 그래서 반란군은 순식간에 인정전을 지나 창덕궁 금호문에 이르렀다. 금호문 역시 수문장 박효립이 내응하기로 되어 있었기에 쉽게 통과한 반란군은 돈화문에 이르러 불을 질러 승리를 알렸다. 광해군은 그제야 반란군이 대궐을 점거했음을 알고 몇 명의 수하들을 거느리고 재빨리 궁을 빠져나갔다. 이렇게 해서 반란군은 쉽게 궁궐을 접수해버렸다.
반란에 성공한 능양군은 대궐을 장악하자 곧 광해군을 찿았으나 그는 이미 빠져나가고 난 다음이엇다. 능양군은 먼저 서궁으로 달려가 유폐되어 있던 인목대비를 찿았다. 능양군을 맞이한 인목대비는 반란이 일어나 광해군이 패주했다는 소식을 듣고 반색하여 기뻐하면서 광해군을 폐위하고 능양군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한다는 교서를 내렸다.
인목대비는 광해군을 폐위시키는 이유로 다음 세 가지를 내세웠다.
첯째는 선왕을 독살하고 형과 아우를 죽이고 어머니인 자신을 유폐시켰다는 것,
둘째는 과도한 토목 공사를 벌여 민생을 토탄에 빠지게 하고 정사를 위태롭게 했다는 것,
셋째는 두 마음을 품어 오랑캐에게 투항했다는 것 등이었다.
이 같은 폐위 이유는 곧 반정 세력들의 거사 명분이었다. 이 거사 명분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그들이 반정을 합리화하기 위해 광해군의 정사 운영을 악정으로 매도하였다는 사실이다.
첯 번째 이유로 내세운 선왕 독살 내용은 인목대비가 줄곧 주장해오던 것이었다. 인목대비의 이 말은 곧 자신이 서궁에 유폐된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내세운 과도한 토목 공사는 궁궐 재건 사업을 의미하는데 이를 악정으로 볼 수 없다. 궁궐 재건은 왕권을 바로 세우고 정사를 안정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과도한 재정과 인력 투입은 민간의 원성을 살 정도가 된 것은 사실이다. 마지막으로 두 마음을 품었다는 것은 광해군의 중립외교를 의미하는데 이는 광해군이 대명사대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이서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당시의 조선은 임진왜란의 후유증에서 겨우 벗어나 안정기로 막 접어들 순간이었다. 그래서 광해군은 명과 후금 사이에서 중립외교를 펼치며 실리를 취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던 터였다. 그러나 서인 세력은 자신들을 정계에서 축출했다는 이유로 광해군이 겨우 다져놓은 안정 기반을 송두리째 흔들어버린 결과가 되었다. 이 사건이 바로 인조반정이다.
거사 이틀 후 광해군이 의관 안국신의 집에서 붙잡힘으로써 능양군의 계획은 완전히 성공하였다. 이로써 능양군이 조선 제 16대 왕에 오르니 그가 곧 인조이다.
인조 반정은 능양군이 자신의 친동생이 역모혐의를 받고 죽자 이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과 왕권에 대한 욕심, 그리고 서인 세력들이 대북 세력에 당한 복수심과 권력에 대한 탐욕이 어울려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우고 일으킨 반정이었다. 따라서 반정으로 등극한 인조는 반정 세력에 끌려다닐 수밖에 없었으며 모든 국정의 의사결정을 우유부단한 처사로 일관하게 된다. 당시 그들은 이러한 탐욕에 눈이 멀어 국제 감각에 둔하였고 쓰러져가는 명나라에 대한 오로지 대명사대에 목숨을 걸고 후금과 적대관계를 부채질함으로써 정묘, 병자호란이라는 침략을 당하여 오랑캐에게 항복하는 치욕적인 결과를 초래하였고 청나라의 속국이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 인조는 후일 자신의 아들 소현세자가 오랜 볼모생활에거 돌아오자 자신의 왕권에 대한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였는데, 당시 청나라에서 인조의 왕위를 소현세자에게 넘겨줄 것을 강요하는 분위기가 돌았다. 그러자 이에 인조는 소헌세자가 청나라를 등에 업고 자신의 왕위를 겁박하는 세력으로 보고 불신하기 시작하였고 결국에는 소헌세자가 원인을 알 수 없는 급작스런 죽음을 맞는다. 그리고 오랜 볼모 생활 동안 중계 무역을 벌이며 조선인 포로를 돈을 주고 구출하고 소헌세자를 위해 헌신을 다해온 세자비 강씨와 세 아들을 모두 죽이거나 유배를 보내는 등 인륜을 저버린 무능하면서도 잔악한 인간으로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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