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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685 : 조선의 역사 227 (제16대 인조실록 2)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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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685 : 조선의 역사 227 (제16대 인조실록 2)

두바퀴인생 2012. 8. 22. 08:05

 

 

 

 

한국의 역사 685 : 조선의 역사 227 (제16대 인조실록 2)

 

 

 

                                            

                                                                               남한산성                                       

                                                                                                                                                                                   

 

 

 

 

정묘호란

인조 정권은 광해군 때의 후금의 존재를 인정하는 현실주의적 외교정책을 비판하고 조선의 국력과 걸맞지 않은 무리수를 두는 "친명배금정책"을 실시했다. 이러한 때에 1624년 인조 반정의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이괄의 난이 일어났다. 결국 이 난은 진압은 되었지만, 이괄과 함께 난을 일으킨 한명윤의 아들, 한윤후금으로 도망가 정묘호란의 명분이 되기도 했다.

 

이에 후금은 명나라를 치기 위해서는 우선 모문룡을 원조해 주며 후금의 배후를 위협하고 있는 조선을 쳐서 모문룡을 고립시킬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또한 1626년 영원성 전투에서 청나라가 패배를 하고 누르하치가 사망을 하자, 후방 안정의 필요성을 강하게 인식하게 된다.

 

이무렵 선양(瀋陽)으로 수도를 옮기고 태종이 왕위를 계승하는 등 국세가 날로 강대해지고 있었던 후금은 조선이 형제의 관계를 맺자는 요구에 응하지 않자, 1627년 군사 3만 명을 이끌고 침략했다.

 

이괄의 난이 진압된 뒤 이괄의 잔당 중 한명윤의 아들, 한윤과 한택은 후금으로 도망하여, 거기서 광해군의 폐위와 인조 즉위의 부당성을 호소하고, 또 조선의 병력이 약하며 모문룡의 군사가 오합(烏合)임을 말하여 속히 조선을 칠 것을 종용하였다. 명나라와의 교전으로 인한 경제단교(經濟斷交)로 심한 물자 부족에 처하여 있던 후금 태종에게, 이괄 잔당의 이러한 종용은 더욱 조선 침입의 결의를 촉진시켰다.

 

1627년 1월 14일 인조 5년에 후금 태종 홍타이지는 광해군을 위하여 보복한다는 구실을 내세우고, 버일러(beile, 貝勒 : 만주·몽골의 부족장) 아민(Amin, 阿敏)에게 군사 3만 명을 주어 조선을 침입케 했다.

 

 

 

정묘화약

후금군의 일부는 가도모문룡을 치고, 주력 부대 3만 명은 1월 16일 의주를 돌파하고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1월 21일에는 능한산성을 함락시켰으며, 1월 24일에는 평양을 함락하였다. 인조는 부랴부랴 1월 25일 강화도로 피신을 하였다. 안주성에서 남이흥, 양진국, 장돈, 김언수, 함응수, 김준, 김양언, 송덕영을 전사시키고 평양을 거쳐 1월 25일에는 황주에 이르렀다. 이에 소현세자전주로 피난가고, 인조 이하 조정의 신화들은 강화도로 피난하였다.

 

의주를 거쳐 평산까지 함락되자 조정은 강화도로 천도했으며, 최명길의 강화 주장을 받아들여 양국의 대표가 회맹(會盟), 형제의 의를 약속하는 정묘화약(丁卯和約)을 맺었다.

 

1628년 네덜란드선박이 난파되어 제주도네덜란드 사람 얀 얀스 벨테브레이(Weltevree) 등이 표류하였다. 인조는 친히 벨테브레이를 서양 사정을 알게 되었고 그에게 박연이라는 이름을 내려 조선에 정착시켰다. 벨테브레이는 원산 박씨의 시조가 되었다. 벨테브레이조선 표류로 조선의 사대부, 지식인들은 고려시대 벽란도예성강을 오간 아랍 외에는 막연하던 서구 세계의 존재를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인조는 그에게 들은 화포와 총기를 만들게 하였으나 조선에서는 재료와 기술이 부족하였고 그것이 한계였다.

 

 

 

병자호란
 

 

남한산성

 

 

 

 

 

 

삼전도비

 

 

1636년 12월 후금은 국호를 ‘’으로 바꾸었는데 조선측에서 반정이후 끝까지 친명배금정책을 고집했으므로 청은 어쩔 수 없이 형제의 관계를 군신의 관계로 바꾸자고 요구했으나 거부당하자 10만여 군을 이끌고 다시 침입해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이를 막지 못했고 봉림대군·인평대군과 비빈을 강화도로, 인조 본인은 남한산성으로 후퇴하여 항거했다.

 

 

 

 

인조의 원병 요청과 전멸

남한산성에 들어간 인조는 각 도에 납서를 보내 근왕군을 불러모았다. 산성을 포위한 청나라 군대를 조선의 군사들이 역포위하면 해볼만 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근왕병은 오지 않았다. 납서는 작게 쓴 글시를 밀로 뭉쳐 몰래 전하는 비밀편지다.

 

경기도 원병이 왔으나 청나라 군사에 의해 모두 전멸당했다.

 

충청도 원병이 헌릉에 도착하여 불화살로 신호를 보내어 서광이 비쳤으나 청나라 군사들의 함성 속에 사라져버렸다. 당황한 충청도 병력은 청나라 병사들과 교전도 제대로 못하고 우왕좌왕하다가 전멸당했다. 강원도 영장 권정길이 이끄는 군사는 검단산에서 그리고 충청감사 정대규가 데리고 온 군사는 험천에서 청나라 군사들의 칼날 앞에 쓰러졌다.

 

원군이 패퇴했다는 소식을 접한 경상감사 심연은 8000명으로 근왕군을 편성했다. 좌병사 허완, 우병사 민영에게 군사를 주어 남한산성으로 진군하라 명했다. 그러나 선봉부대는 남한산성 동남쪽 40리 지점 쌍령에 이르렀을 때 불당리에 매복하고 있던 청나라군의 공격을 받아 전멸하고 말았다. 본진을 이끌고 여주에 진을 치고 있던 심연은 선봉부대가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군사를 돌려 조령 이남으로 철수했다. 그 후 강원감사 조정호, 함경감사 민성휘, 전라감사 이시방이 군대를 출정시켰지만 그것은 임금을 구하러 오는 것이 아니라 문책을 면하기 위해 오는 척하였던 것이었다. 이후 근왕군이 결성되었다는 소식은 없었다.

 

 

 

기근과 굶주림
 

 

남한산성의 수어장대

 

 

 

조선팔도에는 괴소문이 퍼졌다. 청나라 군사는 바람같이 나타나 귀신같이 사라진다는 소문이었다. 옹성 전술을 구사하는 조선군들에게 만주벌판을 달리며 단련된 팔기군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인조는 괴소문은 헛소문일 뿐이라고 선언하고 소문을 확대하는 자들에게는 처벌을 공언하였다. 조선인 병사들의 후퇴에 당황해한 인조는 청나라 군사를 피해 후퇴하는 조선인 병사 몇 명을 처벌하였으나 조선인 병사들의 공포감과 무력감을 없애지는 못했다.

 

남한산성 성안의 군사들은 추위에 얼었고 식량은 바닥나기 시작했다. 인조는 죽 한그릇으로 하루 끼니를 이어갔고, 굶주림에 지친 군사들은 말을 잡아먹었다. 설상가상으로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까지 날아들었다. 성안에 피신한 백성들은 물론 사대부들과 수종자들도 굶주렸고 기근으로 쓰러져 아사, 동사하는 일도 속출했다.

 

망월봉에서 천둥벼락 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 커다란 포탄이 성안에 떨어졌다. 홍이포다. 행궁에 머물던 백관들은 마루 밑으로 기어들어 가기 바빴고 군사들은 혼비백산했다. 215센티미터 포신과 10센티미터의 구경에서 뿜어져 나온 탄환은 천혜의 요새 남한산성 성벽을 무력하게 만들었다. 당시의 홍이포는 현대의 미사일 이상으로 공포의 무기였다. 당황한 인조는 아무런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치열했던 논쟁도 허무했다. 인조는 대신들을 불러 어떻게 해야할 지를 물었으나 아무도 속시원한 대답을 내놓지 못한다. 옛 제도를 고수하고 의리를 지키자던 김상헌과 대륙에 지각변동이 일어났으니 우리도 변해야 된다는 최명길이 각을 세웠지만 모두가 허사였다. 척화와 주화 논쟁이 불붙었을 때 일찍이 결론을 도출했다면 전쟁의 참화를 막을수 있었을 텐데 인조에게는 그러한 덕망이 없었다.

 

 

 

항복과 인질
 

 

인조가 청나라 황제 홍타이지에게 항복하는 장면

 

 

결국 59일간을 버티던 인조는 항복을 결심했다. 그러나 인조는 항복이라는 표현을 쓰고 싶지 않아 스스로 하성(下城)이라 표현했다. 이후 인조는 영을 내려 남한산성 하산을 항복이라 하지 않고 하성이라 쓰도록 명했다. 이후 공식 기록에는 정축하성(丁丑下城)이라 쓰였다.

 

성문을 나선 임금이 눈밖에 쌓인 비탈길을 내려와 수향단에 좌정한 홍타이지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삼배구고두례를 행했다. 세 번 절 할 때마다 세 번씩 머리를 땅에 찧는 의식이다. 이것도 청나라가 많이 봐준 것이었다.

 

그들은 처음에는 반합(飯哈)을 요구했다. 반합은 장례를 치를 때 염하는 의식에서 차용한 방법으로 '임금의 두 손을 묶은 다음 죽은 사람처럼 구슬을 입에 물고 빈 관과 함께 나와 항복하라'는 것이었다. 괴기스럽지만 중국에서는 흔히 쓰이던 항복의식이다. 임금이 오랑캐에게 무릎꿇고 절하는 모습을 지켜본 백관들과 유신들은 충격을 받았다. 소중화를 자처하며 명나라의 멸망 이후 중화의 도를 계승하였으며, 여진족, 거란족, 왜인, 유구인, 월남인 등을 야만인으로 간주하던 조선의 사대부와 지식인들은 엄청난 정신적 공황과 충격에 사로잡히게 된다.

 

조정에서는 전쟁 수행 여부를 놓고 김상헌·정온을 중심으로 한 척화파와 최명길 등의 주화파 간의 치열한 논쟁이 전개되었으나, 주화파의 뜻에 따라 항복을 결정하고 삼전도에서 군신의 예를 맺었다. 이와 함께 소현세자·봉림대군과 척화론자인 삼학사, 즉 홍익한.윤집·오달제를 청나라에 인질로 보냈다.

 

 

 

국방 정책과 경제 정책

인조는 허약한 왕권을 강화함과 동시에, 친명정책을 추진하면서 생겨난 전란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군사력 강화책을 활발히 추진했다. 먼저 1623년 호위청을 신설하여 반정을 주도한 세력의 사병을 정규병력으로 변화시켰다.

 

1624년에는 어영군을 창설했으며 이해 6월에는 기존의 경기군을 정비·강화하여 총융군으로 재편했다. 이와 함께 방어의 거점으로 남한산성을 수축하고 강화도의 군사력을 정비했다. 한편 군역 자원과 재정의 확보를 목적으로 직후부터 호패청을 설치하고 호패법을 시행하여 거의 완성했으나 정묘호란 때 소실되어 이를 통한 군사력 증강은 실패로 돌아갔다.

 

1627년 정묘호란이 끝난 후, 군사력 강화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즉 남한산성의 수비강화를 위해 수어청을 신설하고 어영청과 훈련도감의 인원을 증강함으로써 조선 후기 5군영 체제의 기초를 마련했다. 이같은 군제의 재편과 함께 경제질서의 재건을 위한 정책도 각 방면에서 실시되었다. 이는 왜란과 호란으로 말미암아 파탄 직전에 놓였던 국가재정·농민경제·농업생산력을 되살리기 위한 일련의 조치였다. 광해군 때 경기도에 시험적으로 실시했던 요역과 공물의 전세화(田稅化) 조치인 대동법을 이원익의 건의로 1623년 실시했다. 애초 강원도·전라도·충청도 등 3도에 시행하기로 했으나 1626년에 강원도에만 실시했다. 1634년에는 삼남지방에 양전을 실시하여 전결(田結) 수를 증가시킴으로써 세원을 확대했다.

 

이와 함께 세종 때 제정되었던 연등구분의 전세법을 폐지하고 전세의 법적인 감하를 주된 내용으로 하는 영정법과 군역의 세납화를 실시했다. 1633년 김육의 주장에 따라 상평청을 설치하여 상평통보를 주조하고 그 유통을 시험했다. 이는 실패로 끝나기는 했으나 효종대 이후 화폐 유통의 기초를 이루었다.

 

또한 청인과의 민간무역을 공인하여 1637년 북관의 회령(會寧) 및 경원개시, 1647년 압록강중강개시가 행해졌다. 개시에는 상고(商賈)의 수, 개시기간, 체류일수, 매매총수 등을 미리 결정하도록 했다.

 

 

 

소현세자 일가 제거

병자호란(丙子胡亂) 이후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간 소현세자(昭顯世子)는 그곳에서 선교사 아담 샬 등을 통해 서구의 문물을 접하게 되면서 청나라에 대한 시각이 바뀌게 된다. 1644년 11월 석방된 소현세자1645년 2월 조선으로 귀국한다. 그러나 그가 청나라에 대한 반감을 갖지 않고 친청적인 뜻을 보이자 분노한 인조는 그를 제거할 계획을 세운다.

 

인조의 총애를 받던 후궁 소용 조씨(후일의 귀인 조씨)와 김자점 일파는 소현세자를 공격했고, 1645년 그를 독살하였다. 소현세자가 죽은 뒤에는 그 아내인 민회빈 강씨가 세자를 독살하고 소용 조씨를 저주했다는 소문을 이유로 민회빈과 그녀의 친족들을 죽이고, 소현세자의 세 아들은 제주도로 유배보낸다. 이후 유배간 세 아들 중 장남 경선군(慶善君)과 차남 경완군(慶完君)은 제주도에서 죽고 막내 경안군(慶安君)만이 살아남는다.

 

경선군과 경완군이 제주도에서 죽자, 세인의 비난 여론을 무마하고자 인조는 손자들이 유배될 때 따라가 그 시중을 들던 나인들을 잡아다가 문초, 장살하는 것으로 여론을 무마시키려 했다. 그러나 인조가 손자들을 죽게 했다는 소문은 사라지지 않고 계속 퍼졌다.

 

 

 

전란 이후

 

 

한당의 영수 김육
 

 

 

소현세자의 죽음과 강빈의 옥사, 봉림대군의 세자책봉과 왕위승계는 이러한 대립 속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병자, 정묘호란 이후 원칙론을 내세운 산림세력은 북벌을 주장했고 지나친 북벌 여론을 그는 부담스러워하게 된다.

 

2차례의 전란을 거치면서, 임진왜란 이후 다소 수습된 국가 기강과 경제는 파탄 상태로 빠지는 한편, 정국은 친청파와 배청파로 분화·대립해 혼란스러워졌다. 특히 서인의 분화는 가속화하여 김자점(金自點)을 영수로 하는 낙당(洛黨)과 원두표를 중심으로 한 원당(原黨), 김집·김장생·송시열 등의 산당(山黨), 김육(金堉) 등의 한당(漢黨)이 형성되었다. 인조 말년 김자점은 외척으로서 친청세력을 규합하여 정권을 장악했고, 이에 반해 산당을 중심으로 반청친명사상과 북벌론이 강화되어 광범위한 여론이 형성되었다.

 

1635년(인조 13년) 정비 인열왕후가 죽자 3년 후인 1638년(인조 16년) 왕비간택령을 내려, 그해 10월 당시 14세인 인천 부사 조창원의 딸 장렬왕후를 간택하여 가례를 올렸다. 그러나 인조는 그로부터 10년 뒤에 사망하고 아들과 며느리보다 나이 어린 계비는 후일 복상예송 등의 문제를 야기하게 된다.

 

 

 

최후

1641년에는 군량조달을 위해 납속사목(納粟事目)을 발표하고, 납속자에 대한 서얼허통(庶孽許通) 및 속죄(贖罪)를 실시했다. 그러나 재정 조달은 확충되지 않았고, 산림 세력의 북벌론에 인조는 피로감을 느끼게 된다. 1644년(인조 22년) 명나라 황제 숭정제가 자결하자 황제의 사망 소식을 듣고 뭇 신하를 거느리고 슬퍼하여 상복을 입고, 진위사(陳慰使)와 진향사(進香使)를 남명 조정에 파견하였다.

 

1644년 11월 볼모에서 석방된 소현세자가 귀국하였으나 친청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자 그를 독살한다. 세자가 죽자 조정은 세자 책봉 문제로 시끄러웠는데, 산림은 소현세자의 아들 석철을 세손으로 책봉해야 된다고 하였으나 그는 이 의견을 물리치고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한 뒤 소현세자빈 강씨를 사사(賜死)하였다.

 

사림의 계속된 북벌 요구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인식하던 인조는 1646년 그는 친청파 인사인 김자점의 손을 들어주게 된다.

 

이후 군제를 정비하여 총융청수어청 등을 신설하였으며, 북쪽 변방의 연해 방위를 위하여 평안도, 황해도, 함경도의 여러 곳에 진(鎭)을 신설하였다. 또한 서적 간행에 힘써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 《동사보편(東史補編)》 《서연비람(書筵備覽)》 등의 서적도 간행하였다.

 

1649년 인조 27년 손자 연(棩)을 왕세손으로 책봉하였다. 1649년초 병석에 누웠다가 그해 5월 8일 오전 창덕궁에서 세상을 떠났다.

 

 

 

능묘

능은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갈현리에 있는 《장릉》이다. 인조와 그의 원비 인열왕후가 같이 합장된 릉이다. 인조 13년 1635년 12월 9일 산후병으로 42세의 나이로 인렬왕후가 승하하자 능호를 《장릉》이라 하고 이듬해 1636년 4월 12일 파주 운천리의 언덕에 능을 조영하였다. 인조는 장릉을 조영하면서 오른쪽에 미리 자신의 능을 마련해 두었다가 인조 27년 1649년 1월 30일 승하한 후 그곳에 묻혔다.

 

그러나 후에 화재가 일어나고 뱀과 전갈이 능 주위로 무리를 이루고 석물 틈에 집을 짓는 등 이변이 계속되어 영조 7년 1731년 8월 30일 천장을 결정하고 현재의 파주시 탄현면 갈현리로 옮겼다.

 

 

 

가족 관계

 

 

할아버지 선조의 유묵 어필
  • 조부 : 제 14대 선조
  • 부 : 추존 원종
  • 모 : 인헌왕후 구씨
    • 능창대군
    • 능원대군
  • 서모 : 김씨
    • 서형 : 능풍군
  • 원비 : 인렬왕후 한씨(仁烈王后 韓氏) - 한준겸의 딸
    • 소현세자 왕(昭顯世子 氵+㞷, 1612년-1645년)
    • 봉림대군 호(鳳林大君 淏, 1619년-1659년): 조선 제17대 왕 효종
    • 인평대군 요(麟坪大君 㴭, 1622년-1658년)
    • 용성대군 곤(龍城大君 滾)
    • 조졸 : 2남 1녀
  • 계비 : 장렬왕후 조씨(莊烈王后 趙氏) - 조창원의 딸, 조존성의 손녀
  • 후궁 : 폐귀인 조씨(廢貴人 趙氏) - 참판 조익전의 딸
    • 숭선군 징(崇善君 澂)
    • 낙선군 숙(樂善君 潚)
    • 효명옹주(孝明翁主) : 김세룡(金世龍)에게 하가(下嫁)
  • 후궁 : 귀인 장씨(貴人 張氏)
  • 후궁 : 숙의 나씨(淑儀 羅氏)

 

 

소현세자 독살 사건

1645년초 석방되어 귀국한 소현세자는 부왕과 언쟁, 갈등하다가 그해 갑자기 사망한다. 소현세자의 죽음의 원인은 독살로, 진원군 이세완 내외가 확인한 바에 의하면 독살 증상이 나타나 있었다. 이후 그가 소현세자를 독살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으나 확증은 없다.

 

 

 

삼전도비

병자호란정축하성 이후 청나라에서는 인조에게 대청황제 공덕비를 세울 것을 명하였다. 신하들은 모두 꺼려하였으나 결국 이경석이 자처하여 삼전도비의 비문을 쓰게 되었다. 이는 조선의 사대부들에게는 치욕적인 상징물로 남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