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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면산의 여름 17 ; 뭉치면 짧은 애국, 헤어지면 긴 분열

두바퀴인생 2012. 8. 19. 21:59

 

 

우면산의 여름 17 ; 뭉치면 짧은 애국, 헤어지면 긴 분열

 

 

                                                                             구반포 오거리에 걸린 태극기 

 

국경일 전날 길거리에 태극기가 가로등마다 내걸린다. 그런데 광복절 당일 하루 종일 비를 맞고 말았다. 자주 세탁도 못하는 태극기가 자연 세탁되었으니 다행이라고 생각될 것이다. 과거에는 더러운 태극기가 많았으나 요즘으 비교적 관리를 좀 하는지  태극기가 깨끗한 편이다. 

 

국경일이 다가오면 태극기 달고 내리는 데 엄청난 인력이 소요될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길을 가다가 태극기가 걸리면 '곧 국경일이 오는구나',' 무슨 날이지?'하고 생각하게 된다. 길거리 태극기를 보고 국경일을 생각하고 애국심이 저절로 생겨났으면 좋으련만 사실은 그렇지 못하다는 이야기다.

 

길거리 태극기를 꼭 내걸어야 하나? 그 많은 인건비는 모두가 국민들 부담이다. 이제는 한 번쯤 비용 대 효과 면에서 그 실효성도 다져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뭉치면 짧은 애국, 헤어지면  긴 분열

 

무더위 속에서 잠을 설치며 올림픽을 응원하다보니 어느듯 광복절도 소리없이 지나갔다. 한여름의 꿈같은 감동이 넘치던 긴긴 밤도 지나갔다. 모두가 애국자가 되었고 안타까워 했으며 승리에 환호도 했다. 아마 축구 4강전이 가장 감동적이었던 모양이다.

 

과거 자유당 시절에 이런 구호가 있었다.

 

"뭉치면 살고 헤어지면 죽는다!'

 

우리는 뭉치면 붉은 악마도 되고 보기드문 열정적인 애국자가 된다. 2002년 월드컵 당시 10대가 이제는 그들이 자라서 어언 20대가 되어 붉은 악마의 주체 세력이 되었다. 과거 형과 누나들이 하던 것을 기억하고 그들도 다시 그 감동을 재현해보고 싶은 것이다. 세계가 놀랐던 한국의 붉은 악마의 응원 모습이 큰 뉴스거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극장에서, 서울 시청 앞 잔디 광장에서, 맥주집에서, 가정에서 올기 종기 모여 한국을 응원하는 모습을 보면 주변국들이 과연 한국을 침략할 수 있을 것인가를 의심해 보아야 할 것이다. 국내에서는 몰라도 해외로 나가면 누구나 애국자가 된다고 하였다. 한국 사람을 만나면 그렇게 반갑고 다정하다. 같은 핏줄, 같은 민족이라는 동질감에 우리는 매우 민감하다. 그것은 우리들이 국난을 그많큼 많이 겪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개별적으로는 애국자가 잘 보이지 않는다. 모두가 고등교육을 받고 자라서 똑똑하고 잘나서 잘 뭉쳐지지가 않는다.

 

우리들의 애국은 한 순간 한 순간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애국심으로 가득하다. 물론 마음 속에는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누군들에게 없겠느냐마는 국내에서 우리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진정으로 나라를 사랑하는 삶들이 아닌듯하다는 점이다. 우리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타인에게 피해를 주고 거짓과 사기를 치며 법을 어기고 공권력에 도전하며 공중도덕을 잊은지 오래다.

 

우리들의 수준은 아직 이렇기에 선진국 국민으로 자부하기는 힘들다는 이야기다. 길을 가다가 보면 곳곳에 흩어져 떨어져 있는 각종 쓰레기를 보노라면 우리는 아직 선진국이 되기에는 한참 멀었다고 생각된다.

 

공중도덕심의 상실이다.

아무곳이나 버리는 국민들이 있고 그것을 새벽부터 나와서 치우는 환경미화원들이 있다. 쓰레기 분리수 배출은 커녕 물래 재활용 불가 쓰레기를 내다놓는 인간들이 한 둘이 아니다. 그것도 큰 길가에 한밤에 몰래 내다 놓는다. 쉼터나 공원에는 지난 밤 먹다버린 술병, 음료수 병, 음식물 쓰레기, 담배갑과 꽁초, 테이커 아웃 컵 등 갖가지 쓰레기가 즐비하다.

 

치안부재의 밤길이 무섭다.

지하철이나 지하도, 어슥한 곳에 노숙자가 념쳐나고 그 노숙자가 무작위로 흉기를 휘둘러 지나가던 사람들이 중상을 입었다. 어슥한 밤길에는 부녀자 혼자서는 불안해서 길을 다니기가 힘들다. 혼자 사는 여자는 문단속을 제대로 안하면 언제 괴한이 침입할 지를 알 수가 없다. 밤길을 가다가 언제 어디서 괴한이 나타나 각목을 휘둘러 머리를 치고 지갑을 털어가거나 성폭행을 자행할지 모른다.

 

행방불명 된 사람이 한 둘이 아니다.

집나간 사람이 소식이 없고 어린이들이 사라지고 있다. 주인없는 사체가 몰래 암거래 되고 있으며 장기를 밀거래하거나 각종 마약에 물뽕에 도시가 병들어 가고 있다.

 

도박이 생활화되어 가고 있다. 

주부, 남여노소를 막론하고 경마, 경륜, 경정, 빠징고, 온라인 도박, 도박 장기/바둑/당구, 고스톱, 섯다, 월남뽕 등 사기 도박이 판을 치고 있다. 한 번 도박에 빠진 사람은  헤어나오지 못해 가산을 탕진하고 이혼으로 가정도 파괴된다. 이혼이 요즘 젊은 친구들에게는 스팩이 된지 오래고 방송에는 이혼을 대서특필하고 있다. 또 선정적인 배우들이 아슬아슬한 옷을 입고 시청자 눈을 유혹하고 있다. 연예인이 되기 위해서 예비 훈련생들을 집단 수용하면서 지옥같은 훈련을 생활을 강요하고 최고의 인기 그룹을 만들기 위해 안간힘을 쏟고 있다. 또 소속사에서는 스폰서들에게 성접대를 시키며 자신의 이득을 챙기는 기획사 사장들이 한 둘이 아니다. 청소년들의 꿈이 연예인이요 김연아, 박찬호, 박지성 같은 최고의 스포츠맨을  꿈꾼다. 그러나 그 중에서 성공자는 극히 일부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또 직장도 더러운 직업은 싫고 자유롭고 편안하며 고액의 연봉을 주는 대기업 직장을 선호한다.

 

언론과 방송의 천하가 계속되고 있다.

드라마는 막장드라마가 판을 치고 관음증에 빠진 시청자들은 그것을 즐기고 그런 시청자들이 시청율을 좌우한다. 드라마 한 편에 나와서 인기 좀 얻으면 자기가 최고의 배우로 착각에 빠지고 인기를 유지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하지만 그런 기회가 자주 오는 것도 아니다. 넘치는 후보들이 즐비하게 도사리고 있고 그런 조그만한 성공이라도 기회를 잡기 위해 몸과 마음을 다 바친다. 한마디로 우리 사회가 언론과 방송의 천하가 계속되고 있다.  언론에 사실이던지 아니던지 한 번 폭로되면 그것을 만회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사람들은 한 번의 소문을 듣고 그것을 영원히 저장하는 머리를 가졌기 때문이다.

 

인기가  한 번이라도 정상에 오른 연예인은 광고회사들이 앞다투어 거액을 주며 광고를 찍는다. 한 번 인기를 누리고 돈 맛을 보면 환상에 빠지게 된다. 입고 타고 살고 있는 집이 고급이라야 되고 남에게 보이기 위한 살림 장만에 거액을 들인다. 성형이 스팩이요 비싼 옷을 입고 스마트폰을 들고 외제차를 타야 인정받는 사회다.

 

후진국형 정치계

그런가운데 정치는 서로 파당을 나누어 하루가 멀다하고 권력 투쟁에 아까운 세월을 다보내고 자신들의 권력 쟁위를 위해서는 이적 집단이 되어 국가의 안위도 불사하고 정치 싸움을 벌이고 있다. 기업은 국민을 우롱하고 권력형 비리가 끓일날이 없다. 사회 곳곳에 만연한 비리와 부패가 극을 달리고 있고 국민들의 행복지수가 바닥이요 국가 부패지수가 부끄러울 지경이다. 위로부터 아래까지 사회 각분야가 썩지 않은 곳이 없고 불쌍한 서민들만 노예처럼 살아가고 있다. 물가는 천정부지로 치솟고 장보기가 겁이 날 지경이다. 부동산을 포함한 경기가 바닥을 치고 있고 청년 실업과 초고령, 저출산, 극빈층이 날로 증가하고 있다.

 

 

기업하기 힘든 나라

새벽길에 자전거를 타고 가다보면 새벽일을 나가는 나이든 사람들이 많다. 노동자는 임금투쟁으로 귀족 노동자로 변하고 여차하면 고공 농성에 철야 투쟁에 기업이 휘청이고 문을 닫는 기업도 부지기수다. 또 일부 기업주는 노동자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기업이 번창하면 그 이익을 공유하지 않고 독식함으로써 세간의 비난을 받고 있으며 노동자의 눈물겨운 삶을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다.

 

정의가 사리지고 불공정이 판을 치는 나라

정의가 사라지고 불공정이 판을 치며 이익집단들이 우후죽순으로 나타나 정책집행이 어려운 지경이다. 지역 이기주의가 팽배하고 군대가 갈 곳이 없다. 제주 해군기지는 무수한 고통을 겪으면서 진척이 더디다. 지금 우리 주변에는 강대국들이 호시탐탐 우리들을 노리고 무역로에 목숨을 걸고 경제적 불흥을 이룬 우리들 입장에서는 해양로 안전이 최우선이다. 일본, 중국, 러시아가 무인도나 물에 잠기는 섬을 두고 영토 분쟁을 벌이고 있고 독도에 탐욕을 멈추지 않고 있다. 우리의 국론이 분열하고 갈등하면 그에 따른 이득은 주변국들이 챙기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래서 우리는 올림픽 때만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다시 갈라섰다. 진보와 보수로, 경상도와 전라도로, 젊은이와 노인으로, 여와 야로 대립해 싸울 것이 확실하다. 몇 달 남지 않은 대선은 우리의 갈라섬을 더욱 깊게 만들 것이다. 잠시의 하나됨은 한여름 밤의 꿈이었는가. 왜 올림픽 때만, 월드컵 때만 하나가 되어야 하는가?

우리의 몸이나 눈이 밖에 있거나 밖으로 향해 있을 때 우리는 하나가 됐다. 연평도에, 독도에, 그리고 런던에 우리 눈이 향해 있을 때 우리는 하나가 됐다. 북한의 위협에 노출되고, 일본의 억지에 분통이 터지고, 상대국 선수와 대결할 때 우리는 같은 팀에 소속된 일원임을 깨닫게 된다. 상대 집단의 위협에서 내 집단을 보호·유지하지 못하면 그 안에 있는 개체는 집단과 함께 사라지고 만다. 이는 인류가 오랜 역사 경험에서 깨달은 집단본능이다. 다른 한편 우리는 개체 간에 개별이익을 추구하는 이기적 동물이기도 하다. 각 개체는 집단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개인의 이익을 최대화하려고 애쓴다. 그 과정에서 경쟁과 갈등, 그리고 분열이 일어난다. 우리 눈이 안으로만 향해 있으면 그래서 살벌해지는 것이다. 이 개인의 본능은 집단본능보다 더 본원적인 본능이다. 이 두 가지 본능의 조화 여부에 따라 한 나라의 흥망이 결정되는 것이다. 

런던 올림픽이 귀중했던 이유는 우리 선수들이 예상외로 많은 메달을 땄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 우리의 눈을 밖으로 향하게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세계 속의 대한민국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해준 것이다.

 

문득 궁금한 생각이 든다. 태극기를 외면하고 애국가를 부르지 않던 사람들, 국민의례 대신 노동의례를 하던 사람들, 그들은 지금 어떻게 하고 있을까? 소위 종북파라 불리는 사람들은 지난 오림픽 기간 동안 금메달을 따고 애국가가 울려퍼지는 장면을 보고는 있을까? 이런 순간에도 대한민국은 태어나지 말아야 했을 나라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만약 그랬다면 이런 사람들은 이 나라에 암적인 존재다. 집단을 무너뜨리려 공격하는 외부의 적과 똑같기 때문이다. 우리는 내부적으로 경쟁을 하더라도 나라는 허물지 말아야 한다. 나라가 허물어지면 개인은 존재하지 못한다. 진보를 하든, 보수를 하든 대한민국의 울타리 안에서 해야 한다.

애국심은 집단본능에서 나온다. 올림픽을 응원하면 애국심이 생긴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그때뿐이라는 것이다. 게임이 끝나고 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우리는 각기 제 갈 길로 간다. 다시 개별이익에 몰두한다. 이 애국심이 마음속에 늘 자리잡게 할 수는 없을까? 집단의 생존을 지키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하다. 모두 개별이익을 확대할 때 누군가 이를 던져버리고 집단을 위해 희생하면 그 집단은 살아남는다.

 

안중근의 희생 때문에 대한인의 자존심과 명예가 지켜질 수 있었다. 우리 선수들의 빛나는 승리 뒤에는 개개인의 크고 작은 희생이 있었다. 올림픽 때의 응원이 항구적인 애국심으로 승화되지 못하는 것은 응원에는 대부분 즐거움만 있을 뿐 이러한 자기희생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대한민국'을 외칠 때, 저 선수들처럼 이 나라를 위해 나는 무엇을 희생할 수 있는가를 자문해 보았는가. 나라를 위해 헌신한 아름다운 제나 존재한다. 파시즘, 나치즘과 같은 전체주의, 과거 일본의 침략적 민족주의가 그런 것들이다.

 

우리 정치 지도자 중에도 개인의 인기를 위해, 정권의 이익을 위해 이러한 집단본능을 이용했던 일이 많았다. 애국을 가장 많이 외치는 부류는 정치인들이다. 선거철이 오면 후보자들은 누구나 애국을 말하지만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기 어렵다. 자기의 정치적 성공을 위해 나라의 분열까지도 이용하려는 사람은 애국심이 없는 사람이다. 나라를 위해 희생하지 않았거나 희생할 의사가 없는 사람은 무슨 말을 해도 애국심이 없는 것이다. 헌신 없이 나라 사랑은 없다. 애국은 자기희생이 따라야만 완성되게 되어 있다. 이번 올림픽의 교훈은 바로 이것이다.

 

 

 

 

광복을 보는 눈

 

3·1운동은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에 자극받아 독립을 위해 전 민족이 일치단결한 사건이었다. 광복과 대한민국의 건국은 1941년 8월 ‘대서양헌장’에 그 맥이 닿아 있다. 대서양헌장은 1941년 8월 14일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과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가 민족자결 등의 원칙을 천명한 공동선언이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이 대서양헌장의 정신에 따라 미국 중심의 패권질서하에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원리에 기초한 대한민국을 세웠다.

구한말 이후 한반도는 세계사적 전환기마다 주변 강대국들의 패권경쟁의 영향으로부터 한 번도 자유로운 적이 없었다. 구한말 대영제국의 패권질서에 제정러시아가 도전함으로써 세계적 차원에서 첫 번째 패권경쟁이 벌어졌다. 그 와중에 거문도가 점령당했고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이 일어나면서 한반도는 열강의 전쟁터로 변했다. 당시 개혁과 개방을 거부하고 쇄국정책을 고집한 조선왕조는 일제 식민지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광복의 기쁨도 잠시였다. 냉전이라는 이름하에 전개된 미-소 패권경쟁의 소용돌이는 또다시 한반도를 덮쳤다. 그 여파로 냉전 초기 한반도는 분단되고 말았다. 뒤이어 발생한 6·25전쟁으로 인해 우리 민족은 역사상 전례 없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었다.

21세기 대한민국은 또다시 세 번째 패권경쟁의 중심에 놓이게 되었다. 특히 올해는 한국을 비롯해 주변 국가 모두가 지도자를 교체한다. 이런 국내 정치적 변화와 함께 21세기 미중 패권경쟁의 파도가 한반도와 동아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거칠게 일고 있다. 미국과 중국은 이미 패권경쟁의 길로 들어선 지 오래다. 과거의 역사적 경험에 비추어볼 때 그 결과는 대한민국의 미래, 한반도 통일, 동북아 지역질서, 21세기 국제정치질서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미중 패권경쟁에 대처하고 민족의 생존과 번영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국민적 공감대를 바탕으로 제대로 된 국가전략을 마련하고 국력을 결집해나가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하다. 돌이켜보면 국론통일과 국력결집에 실패했을 때 패권 경쟁기 우리 민족은 커다란 어려움을 겪었다.

구한말 패권 경쟁기에는 친청파 친일파 친러파 친미파로 사분오열(四分五裂)되어 엄청난 국론분열과 국력 소진으로 망국의 비극적 결과를 맞았다. 또 광복 이후 냉전질서로 이행되는 두 번째 패권 경쟁기에는 좌우대립과 신탁통치를 둘러싼 노선대립으로 급기야 민족이 남북으로 분단되고 6·25전쟁이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었다.

건국 후 우리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국가 중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룩하는 기적을 만든 유일한 국가가 되었다. 이제 대한민국은 더이상 주변 열강에 이리저리 휘둘리는 국제정치 무대의 엑스트라가 아니다. 주연은 아니더라도 미국 일본 유럽연합 중국 등 국제정치의 주연급들이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빛나는 조연’의 위치를 확보했다.

21세기 대한민국의 생존과 번영은 미중 패권경쟁과 급변하는 국제정세 변화에 얼마나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안’에서 밖을 보는 시각이 아니라 밖에서 한국을 보는 지혜가 필요한 시점이다.

 

 

 

 

독도 문제로 한일 간에 냉각기가 시작되었다. 대통령의 독도 방문, 그리고 광복절 날 일왕을 언급한 것이 일본인들에게는 매우 자존심이 상했던 모양이다. 그들은 중국과 러시아, 한국과 영토 문제로 마찰을 빚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에게는 굽신거리며 유연한 태도를 보이나 유독 한국에 대해서만 매우 강경하다. 그것은 바로 힘을 바탕으로 한 국력에서 그 차이를 엿볼 수 있다.

 

대통령의 독도 방문에는 예상돠는 대일본 시나리오를 생각하여 대응에 준비하고 방문하였는가 하는 점이다.

 

 

독도를 넘보는 일본

 

일본이 역사적 지리적 국제법적으로 명백한 우리의 고유영토인 독도를 영유권 분쟁지역화하기 위해 국제사법재판소(ICJ) 공동제소를 제안했다. 1954, 1962년 이후 세 번째이자 50년 만의 일이다. 우리가 실효적 지배권을 행사하고 있는 독도는 결코 영유권 분쟁 대상이 될 수 없다. 일본의 시도는 우리의 영토주권에 대한 명백한 도발행위다.

일본의 공동제소 제안은 ICJ 단독제소 강행을 위한 구실이다. 단독제소를 한다 해도 ICJ는 강제관할권을 행사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불응할 경우 독도 문제가 재판에 회부될 일은 없다. 일본은 한국이 국제기구를 통한 ‘평화적 해결’을 거부한다는 인상을 준 뒤 1965년 분쟁해결각서에 따른 양자협의 및 국제중재위원회 회부까지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재판에 응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독도 영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근거를 충분히 축적하는 노력을 소홀히 해선 안 된다. 재판에서 이길 수 있는 만반의 준비가 돼 있지만 ICJ에 가지 않는 것과 ICJ에 갈 경우 패소할 가능성이 두려워 회피하는 것은 분명 다르다. 독도에 대한 실효적 지배를 강화하는 조치도 필요하다.

일본은 중국과 분쟁 중인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에 상륙한 홍콩 시위대를 사법처리하지 않고 송환했다. 2년 사이에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총리가 분쟁 지역인 쿠릴 열도(일본명 북방영토)를 두 번 직접 방문했지만 일본은 이명박 대통령의 이번 독도 방문 때처럼 격렬하게 반응하지 않았다. 중국이나 러시아는 제쳐두고 독도만 도발하는 것은 한국을 얕잡아 
하지 않을 수 없다.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일본의 모습에서 식민지배 망령의 부활을 본다. 일본이 한국 강점에 혈안이 됐던 1905년 독도를 시마네 현에 강제 편입할 당시 그곳 주민조차 ‘다케시마’가 도대체 뭐냐고 물었을 정도였다. 일본은 최근 한일 재무장관 회의를 일방적으로 연기하고 한일 통화스와프 연장을 재검토하는 한편 한국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비상임이사국 진출을 막겠다는 위협을 서슴지 않고 있다. 일본은 허황된 독도 영유권 주장을 접고 과거사 문제에 대해 보다 진지한 태도로 주변국에 사과하고 반성해야 한다.

일본의 노다 요시히코 정부는 9월로 유력시되는 총선을 앞두고 대외관계에 무르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연일 한일 관계에 상처를 내고 있다. 일본의 독도 ICJ 제소는 20세기 초 한국을 병탄한 침략근성의 발로라고 보는 태도다.

 

 

 

 

매년 광복절, 3.1절 날마다 골프 연례행사 벌인 주중대사관

 

이규형 대사를 비롯한 주중 한국대사관 직원들이 광복절에 집단 골프를 즐긴 것은 적절치 못한 처사였다. 전체 직원 82명 가운데 41명이 참가한 행사였다. 주중대사관 측은 “최근 직원들이 많이 교체돼 송별회와 단합대회 차원에서 골프 행사를 마련했다”면서 “매년 3월 1일과 8월 15일 단합대회를 했다”고 해명했다. 대사관 측의 해명대로 3·1절과 광복절마다 그런 단합대회를 했다면 더 큰 문제다. 단합대회도 좋지만 왜 하필이면 국경일에, 그것도 골프로 해야 하는가.

더구나 당시 북한의 장성택 국방위원회 부위원장 일행이 중국을 방문하고 있었다. 주중대사관은 다른 어느 때보다 경각심을 갖고 촉각을 세워야 할 상황이었다. 대사관의 정무라인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곤 대부분이 비상근무 체제를 유지했다고 하지만 그것으로 면피(免避)가 될 순 없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 대사는 제자리를 지키면서 북-중 접촉 결과를 챙겼어야 한다. 세계의 이목이 중국으로 쏠려 있는 상황에서 한국 대사와 외교관의 절반이 장성택을 옆에 놓고 한가하게 ‘굿 샷’이나 외쳤으니 나사가 빠져도 한참 빠졌다. 노무현 정부 때 이해찬 총리가 철도파업의 와중에서 3·1절에 골프를 쳐 불명예 퇴진한 일을 잊었던 모양이다.

지금 동북아는 ‘신(新)냉전’이라고 불릴 정도로 위태로운 외교적 격랑에 휩싸여 있다. 한국과 일본은 독도와 과거사 문제, 한국과 중국은 북한인권운동가 김영환 씨 납치 및 고문, 중국과 일본은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 분쟁으로 심각한 갈등을 빚고 있다. 일반 국민도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판인데, 정작 동북아 외교의 핵심인 주중대사관 직원들은 태평성대(太平聖代)인 듯하다.

외교관은 국가를 대표하기에 여느 공직자들보다 더 행동거지를 조심해야 하고, 투철한 국가관과 책임감을 지녀야 한다. 김성환 외교통상부 장관은 작년 “복무기강 문제는 무관용”이라고 했지만 주중대사관만은 예외였나 보다. 이명박 정부가 임기 말에 들어서면서 외교부의 기강이 풀려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이라면 더욱 심각하다. 외교부는 광복절 집단 골프의 진상을 철저히 파악해 합당한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다.

 

 

 

 

 

김영란 법 입법 예고

 

공무원과 정치인의 부패 정도를 나타내는 지표로 널리 쓰이는 게 부패인식지수(CPI)다. 국제투명성기구(TI)가 매년 발표하는 이 지수에서 우리나라는 지난해 5.4점을 얻어 조사대상 183개국 가운데 43위를 차지했다. 3년째 하락세다. 경제규모가 세계 14위이고, 세계에서 7번째로 20-50클럽(1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 인구 5000만명 이상)에 들었고, 대학 진학률이 세계 최고 수준인 80%에 이르는 나라라며 어깨에 힘 주기엔 남 부끄러운 수치다. 국민소득이나 경제규모만 따져 선진국 진입 운운하길 주저하게 만드는 게 바로 이 우리나라 권력계층의 고질적인 부패와 비리 구조다.

국민권익위원회가 어제 김영란 위원장 주도로 부정청탁금지법을 마련해 입법예고한 것은, 그래서 때 늦은 감이 있다 싶을 정도로 시급한 조치다. 이른바 ‘김영란법(法)’은 대가성이 있든 없든 공직자가 100만원 이상의 금품이나 향응을 받았거나, 요구하거나, 약속한 경우 3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거나 수수액의 5배에 이르는 벌금을 물도록 하는 내용이다. 중앙부처와 지방자치단체 공무원, 국회의원, 판검사, 공공기관 직원, 교사가 주된 적용 대상이다. 그동안 관행처럼 여겨졌고, 그래서 주고받으며 아무런 죄의식도 느끼지 못했던 ‘떡값’을 공직사회에서 완전히 추방하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

 

 

 

 

스마트폰과 독서, 토론, 성찰의 시간

 

스마트폰 열기가 누그러지고 있다는 뉴스도 있지만,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스마트폰이 그만큼 포화상태가 될 만큼 보급돼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는 얘기이다. 신문과 방송, 통신을 융합한 스마트폰은 정말 스마트한 놈이다. 내 손바닥 안에서 온갖 세상을 움직일 수 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뉴스도 실시간으로 볼 수 있고, 호텔·식당·교통편 예약도 하고 은행결제도 하고, 또 지인들과 시도 때도 없이 수다도 떨 수 있고, 온라인 게임을 하며 시간을 때울 수도 있다. 삼성과 같은 대한민국 회사를 손꼽히는 글로벌 기업의 위치에 자리잡게 한다.

스마트폰 보급률로만 보면 우리나라는 이미 세계 최고 선진국이다. 올해 말 국내 스마트폰 보급률이 80%에 이를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북미가 약 65%, 유럽과 일본이 45% 선, 기타 아시아·동유럽·북미의 20% 미만 선 보급률 전망치와 비교된다.

그런데 스마트폰을 가지고 대한민국이 선진국이 되고, 대한민국 국민이 스마트해질 수 있는 것일까. 그랬으면 좋겠지만, 세상에 노력 없이 공짜로 성공하는 법은 없다. 스티브 잡스의 신화와 삼성전자의 성공, 스마트폰의 현란한 기능에 가려 잘 보이지 않지만, 텔레비전이 바보상자라 불렸듯이 스마트폰이 멍청이폰으로 퇴색하는 징후가 발견되고 있다. 지하철 풍경의 변화를 보자. 한때는 출퇴근 시민들이 책과 신문을 읽던 지하철 풍경은 선정적인 무가지를 보고 DMB를 시청하는 풍경으로 바뀌더니 요즘은 승객들 대부분 하나같이 스마트폰에 빠져 있는 모습뿐이다. 사람들은 스마트폰을 가지고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래서 스마트해지고 있는 것일까.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스마트폰 이용 실태 조사에서는 대학생들이 하루 평균 4~5시간을 스마트폰을 이용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스마트폰을 가지고 주로 무료 카카오톡 등 메신저 수다를 하거나 온라인 게임을 즐긴다. 시사정보를 검색하거나 학습에 이용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이러한 결과는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해도 별반 다르지 않다. 스마트폰을 통해 대한민국이 ‘수다 공화국’이 되어가는 듯하다. 수다가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된다 하니 스마트폰이 시민들의 정신건강을 증진시킬 수도 있겠다.

또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과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를 통해 네트워크를 형성함으로써 서로 연대하고 신뢰하는 사회자본을 키울 수도 있겠다. 그러나 스마트폰이 시민들의 독서와 신문 열독 시간을 빼앗아 가고 있음은 분명하다. 여러 조사를 보면 스마트폰이 보급되면서 신문 열독 시간뿐만 아니라 방송뉴스 시청 시간도 줄어들고, 심지어 포털뉴스 보는 시간도 감소했다고 보고한다.

인터넷이나 모바일 화면으로 글을 읽을 때의 부작용을 연구한 학자 니컬러스 카는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원제는 ‘The Shallows’)이라는 책에서 사람들이 동일한 텍스트를 읽더라도 종이 책이 아닌 컴퓨터 화면으로 읽으면 기억이나 성찰 능력이 떨어진다고 경고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인터넷이나 스마트폰 앞에서 깊이 생각하거나 성찰하는 모습은 상상하기 어렵다. 인터넷이나 모바일이 관련 정보 링크 등을 통해서 신속하고 다양한 정보를 제공할 수는 있지만, 독서를 하면서 사색하거나 토론을 통해 합의를 도출하는 것과 같은 성찰행위에는 오히려 방해가 된다는 얘기다. 우리 사회가 시민의 이성과 합리·성찰을 기반으로 한 ‘숙의 민주주의’를 지향한다고 하면, 소모적인 스마트폰 이용행위는 민주주의 훼방꾼이 될 수도 있다.

문제는 전통적인 언론매체인 신문의 저널리즘 정신도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지배력에 압도당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다. 민주주의와 저널리즘 관점에서 인터넷 포털과 스마트폰의 패악은 상업적이고 선정적이고 가벼운 뉴스를 사회적으로 중요한 뉴스로 둔갑시킨다는 것이다. 이러한 패악을 신문들조차 따르는 비극이 시작됐다. 살림이 어려워진 신문의 인터넷판은 선정적인 기사와 속임수 낚시제목으로 난무하고 있다. 스마트폰 시대를 어떻게 스마트하게 살아갈 수 있을지 깊은 성찰이 필요한 때이다.

 

 

 

 

 

해파리와 녹조

 

인구 증가와 무분별한 개발로 자연계의 그물망에 구멍이 뚫리기 시작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요즘엔 기후변화의 위협요인이 커졌다. 올여름 해수욕장이 썰렁했던 데는 주폭 단속도 있었지만 주된 요인은 해파리였다. 어구를 망치고 어획량을 줄이는 해파리는 어민에겐 일찌감치 공포의 대상이었다. 2006∼2008년 해파리로 인한 피해 추정액은 연간 2200억 원이나 된다. 올해 인천 을왕리해수욕장에서 해수욕을 하던 여덟 살 여자아이가 독성 해파리에 쏘여 죽는 사고가 일어났다. 아이를 쏜 것으로 추정되는 노무라입깃해파리는 길이 1m에 무게 50kg 안팎으로 대략 우산 크기이다. 큰 것은 길이 2m에 무게가 수백 kg이라고 하니 그 엽기적 모습을 상상하면 앞으론 해파리냉채를 못 먹을 것 같다.

중국 양쯔 강과 보하이 만 사이에서 서식하는 해파리가 제주를 거쳐 남해와 동해까지 올라온 이유 중 하나는 해수 온도 상승이다. 7월 한반도 주변의 바닷물 온도는 지난해 대비 1.4도 높았다. ‘6도의 악몽’을 쓴 마크 라이너스는 지구 평균기온이 2도 상승하면 초대형 가뭄이 발생하면서 세상은 지옥으로 들어간다고 경고했다. 과장이 없진 않겠으나 해수 1.4도 상승이 몰고 온 변화가 가볍지 않다. 동해 오징어가 서해에서 잡히고 흑산도 홍어가 울릉도 독도에서 잡힌다고 하지 않는가.

국립수산연구원의 ‘해파리 박사’ 이혜은 연구원은 “생태계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고 말한다. 해파리는 동물 플랑크톤을 먹고 산다. 수온 상승에 따라 부영양화가 활발해지면 플랑크톤이 풍성해진다. 그러나 성체가 되기 전 해파리는 폴립 형태로 고정돼 있다. 폴립 형태의 새끼 해파리가 붙어 있을 항만 방파제 콘크리트 등과 같은 수중구조물이 없으면 아무리 수온이 높아도 해파리는 이동하지 못한다. 어족자원 남획으로 해파리를 잡아먹는 어종이 사라진 것도 원인이다. 자연적 요인에다 인위적 요인이 더해져 ‘해파리 재앙’이 생긴 것이다.

올여름 하천에 발생한 녹조는 해파리보다 훨씬 심각한 위협이었다. 녹조로 시퍼런 물을 취수원으로 쓰기 때문이다. 녹조의 원인과 관련해 환경단체들이 “녹조는 4대강 사업 때문”이라고 문제를 제기하자 이명박 대통령은 “녹조는 가뭄과 폭염 탓이며 불가피한 현상”이라고 대응했다. “녹조는 4대강 사업이 강을 막아 생긴 재앙”(문재인), “한강 녹조는 보(洑) 탓 가능성”(박원순)이라는 발언이 이어지면서 녹조는 정치적 공방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환경부와 수자원공사 등은 북한 임남댐(26억2000만 t)의 방류량이 예년에 비해 절반 이하로 줄어든 것을 한 가지 원인으로 지목했다.

인간 오염원이 만들어낸 녹조

녹조는 가뭄과 폭염 이전에 인간이 하천을 망가뜨린 것이 근본 원인이다. 매일 버려대는 수많은 쓰레기 침출수, 비료와 농약, 축산폐수가 어디로 흘러들 것인가. 이런 물질이 강물로 흘러들어 녹조류의 먹이가 많아졌고 햇볕이 내리쬐니 광합성이 활발해져 녹조가 과잉 증식한 것이다. 녹조 원인을 두고 폭염 탓, 4대강 사업 탓, 북한 탓을 하며 서로에게 손가락질을 하는 동안에 정작 중요한 인간의 활동은 망각되고 만다. 자연의 눈으로 볼 때 인간이야말로 가장 큰 오염원이다. 단순한 인간만 자연의 복잡성을 모를 뿐이다.

정성희 논설위원

 

 

 

 

 

뇌물에 대하여......

 

뇌물은 인류 역사에서 아주 오래된 거래다. 이브가 아담에게 건넨 사과가 뇌물의 시작이라는 관점도 있다. 우리 역사에는 신라의 김춘추가 고구려를 탈출하기 위해 보장왕 측근에게 청포(靑布)를 건넸고, 고려의 세도가 이자겸의 집에 뇌물성 선물로 들어온 고기 수만 근이 썩어갔다는 기록이 있다. 2010년 뇌물 수수 혐의를 받은 이대엽 전 성남시장의 집에서 외화 뭉칫돈과 함께 포장도 뜯지 않은 고급 넥타이 300여 개와 명품 가방 30여 개, 1200만 원 상당의 양주 ‘로열살루트 50년산’, 400만 원 상당의 ‘루이13세’ 코냑 등이 나와 검찰 수사관을 놀라게 했다.

미국 법조인 출신 법학자 존 누넌은 저서 ‘뇌물의 역사’에서 뇌물을 마술(魔術)에 비유했다. 뇌물을 받은 사람이 정신적 포로가 돼서 안 되는 일을 되게 하고 자신의 행위를 감춘다는 점에서 비슷하다는 것이다. 사적 관계를 중시하고 정부의 시장 개입이나 관료의 영향력이 큰 나라일수록 뇌물이 성행한다. 뇌물의 이익이 ‘뇌물에 따른 처벌×적발 확률’보다 클 때 뇌물이 만연할 수밖에 없다. ‘뇌물의 마술’을 푸는 첫 단추는 정부나 공무원이 시장에 부당하게 개입해 뇌물의 이익을 키울 싹을 없애는 일이다. 그런 다음에 처벌 수위와 적발 확률을 높여야 뇌물을 차단할 수 있다. 처벌의 두려움이 프랑스산 세계 최고의 포도주 로마네콩티의 유혹보다 강해야 한다.

죽음에 대하여...

 

'내 묘지 앞에서 울지 마세요, 나는 그곳에 없습니다. 난 잠들어 있지 않습니다. 난 천 개의 바람, 천의 숨결로 흩날립니다. 나는 빛이 되고, 비가 되었습니다. 나는 피어나는 꽃 속에 있습니다. 나는 곡식 익어 가는 들판이고, 당신의 하늘을 맴도는 새…, 내 묘지 앞에서 울지 마세요, 나는 그곳에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