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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683 : 조선의 역사 225 (광해군일기 11) 본문
한국의 역사 683 : 조선의 역사 225 (광해군일기 11)
제15대 광해군 일기(1575~1641년, 재위: 1608년 2월~1623년 3월, 15년 1개월, 유배기간 18년)
5. 변혁의 시대에 핀 문화의 꽃
동방의 편작 허준과 <동의보감>
허준의 출생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무과 출신으로 경상도 우수사를 지낸 허곤의 손자이며 용천에서 부사를 지낸 허윤의 아들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그는 1546년 김포에서 무인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무과에 응시하지 않았다. 29세에 의과에 급제하여 의관으로 내의원에 봉직하게 된다. 이후 내의 태의 어의로 명성이 높았고 동양 의학을 집대성한 <동의보감>을 저술하여 조선 의학의 우수성을 청과 일본에 과시하기도 하였다.
의과에 급제한 일해 그는 1575년 2월에 어의로서 명나라의 안광익과 함께 입진하여 실력을 증명하였으며, 1581년에 고양생의 <찬도맥결>을 교정하여 <찬도방론맥결집성> 4권을 편성함으로써 맥법 진단의 원리를 밝혔다.
이후 그는 어의로 활동하며 많은 공적을 세웠으며, 왕자의 두창을 낫게 해 선조로부터 당상의 가자를 받기도 하였다. 그리고 임란 때는 선조의 곁은 떠나지 않고 의주까지 호종하여 호종공신이 되었다. 그 뒤로도 어의로서 내의원에 계속 남아 의료의 모든 행정에 참여하면서 왕의 건강을 돌보았다.
그러던 중 1596년 선조의 명을 받아 유의 정작, 태의 양예수, 김응탁, 이명원, 정예남 등과 함께 내의원에 편집국을 설치하고 <동의보감>을 편집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그 이듬해 정유재란이 발발하여 의관들이 각지로 흩어지는 바람에 작업은 일시 중단되었다.
그 뒤 선조는 다시 허준에게 명하여 단독으로 의서 편집의 일을 맡기고 내장방에서 5백여 권을 고증하게 했는데, 그는 내의원에서 어의로 종사하면서도 편집 일에 전념하여 광해군 2년인 1610년에 25권 25책의 <동의보감>을 완성했다.
이 책은 그 당시의 의학지식을 총망라한 임상의학의 백과사전으로서 내경, 외형, 잡병, 탕핵, 침구 등 5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5대 강편 아래에 질병에 따라 항, 목을 정하고 그 항복 밑에는 해당되는 병론과 약방들을 출전과 함께 자세하게 열거하여 각 병중에 관한 고금의 처방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각 병중에 따르는 단방과 침구법을 부기하였고,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의 경험을 기록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실용화할 수 있도록 기술하고 있다.
이 편집 과정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각 병중의 항과 목이 증상을 중심으로 열거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 예로 '내경' 편의 '잔액' 항 중에 '한증(땀병)'의 처방을 보면, 먼저 그 맥법과 원인을 밝히고 그 다음에 자한, 도한, 두한, 심한, 수족한 , 음한, 혈환 등 8목으로 분류되어 있어 임상가들이 환자를 대했을 때 많은 책을 참고로 하지 않아도 이 책 한 권으로 손쉽게 고금의 의서들을 열람한 효과를 낼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게다가 세종 때 만들어진 <향약집성방>, <의방유취>와 선조 때의 <의람촬요>, 복희의 저작으로 알려진 <천원옥쇄>, 산농의 저작이라는 <본초>, <소문>, <영추경> 등 83종의 고전 방서들과 <상한경>, <맥경>. < 단계심법> 등 한, 당 이래 편집된 70여 의방서가 인용되고 있다.
이처럼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작성된 <동의보감>은 편집력과 서술 능력의 우수성으로 인해 동양 의학의 보감으로서 출간된 뒤 일본과 중국에 전해져 오늘에 이르기까지 귀중한 한방 임상의학서로 자리하고 있다. 우리 나라 사람의 어작으로 이 책처럼 중국인과 일본인들에게 널리 읽힌 책은 아마 없을 것이다.
허준은 이 책을 완성한 이후에도 세조 때 편찬한 <구급방>을 <언해구급방>으로 주해하였으며, 임원준의 <창진집>을 <두창집요>로 그 이름을 바꾸어 언해하고 간행하였다. 또 노중래의 <태산요록>을 <언해태산집요>로 개칭하여 간행하였으며, 당시 유행하던 전염병을 예방하기 위해 <신찬벽온방>과 <벽역신방>을 편집하여 배포하기도 했다.
그는 동의학에서 이 같은 많은 위대한 업적을 남기고 1615년 11월 7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6. 광해군 일기 편찬 경위
<광해군일기>는 총 64책으로 1608년 2월부터 1623년 3월까지 광해군 재위 15년 1개월간의 역사적 사실을 편년체로 기록하고 있다. 편찬 작업은 1624년 춘추관의 건의로 시작되었다. 원래 1623년 이수광이 광해군 당시의 시정기를 수정해야 한다고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또한 이후 광해군이 폐군이라는 이유로 편찬 작업을 하지 않고 시정기만 수정한다는 방침을 세웠으나, 시정기만으로는 광해군의 실록을 대신할 수 없다는 춘추관원들의 주장에 따라 1624년 2월에 <광해군일기> 편찬 작업이 결정되었다.
같은 해 6월에 일기 편찬을 위해 남별궁에 찬수청을 설치하고, 총재관 윤방을 중심으로 3개 조로 나누어 편찬 작업에 돌입하였다. 그러나 기본 자료인 <정원일기> 등이 대부분 이괄의 난 때 없어졌기 때문에 부득이 광해군 즉위 이후의 조보와 사대부 집안의 소장 일기, 상소문의 초고, 야사, 문집 등과 사초를 합쳐 편찬하였다.
그러나 이 작업은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 한때 중단되었다가 1623년 2월에 다시 시작되어 이듬해 12월에 겨우 완성을 보아 곧 인쇄에 착수하였으나 물자가 부족하여 한 달 동안 광해군 즉위년 2월에서 6월까지의 기록 5권과 그해 7, 8월에 해당하는 기록만 인쇄하는 데 그쳤다. 이에 조정은 정초본을 여러 벌 등사하여 각 사고에 나누어 분장하기로 하고, 1634년 정월부터 등록관 50인을 임명하여 4반으로 나누고 정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해 5월에 2부의 정초본을 작성하였다.
실록의 편찬을 완료하면 원래 초초와 중초는 세초하고 정초본만 인쇄하여 사고에 보관하는 것이 관례였으나 <광해군일기>는 불과 2부를 동시에 등사했을 뿐이어서 주초본을 세초하지 않고 이를 64권으로 구며서 태백산사고에 보관하였다. 그리고 정초본 2부는 걍화도 정족산사고와 전라도 무주의 적상산사고에 나누어 보관하였다. 이 때문에 실록 중에서 유일하게 중초본과 정초본이 함께 남게 되었다. 그 후 이 책은 숙종 대와 정조 대 두 번에 걸쳐 인쇄와 출판이 논의된 바 있으나 결국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유일하게 남아 있는 <광해군일기> 중초본은 먹 또는 붉은 먹으로 수정하여 삭제하거나 보첨한 부분이 많다. 그래서 이 중초본은 실록 편찬 과정을 여실히 보여주는 좋은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또한 이 책이 비록 일기라는 표제를 달고 있으나 중초본을 통해 실록과 다름없이 편찬되었음으로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을 편찬한 사람들이 인조반정을 주동하거나 또는 방조한 서인 세력이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많은 부분이 왜곡, 조작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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