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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한국의 역사 681 : 조선의 역사 223 (광해군일기 9)

두바퀴인생 2012. 8. 18. 04:20

 

 

 

한국의 역사 681 : 조선의 역사 223 (광해군일기 9)

 

 

 

                                            

                                                                                      

                                                                                                                                                                                   

 

제15대 광해군 일기(1575~1641년, 재위: 1608년 2월~1623년 3월, 15년 1개월, 유배기간 18년)

 

 

5. 변혁의 시대에 핀 문화의 꽃

 

 

비운의 혁명가 허균과 불사의 영웅 홍길동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에 대해 사람들은 흔히 최초의 한글 소설을 남긴 문사 정도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만, 사실 그는 시대를 변혁하기 위해 혁명을 꿈꾸던 대단한 사상가였다.

 

그는 서경덕의 문하에서 성장하여 학자와 문장가로서 이름읋 날렸던 허엽의 아들이다. 자는 단보, 호는 교산, 학산, 성소, 백월거사 등 여러 가지를 썼다. 그의 어머니는 예조판서를 지낸 김광철의 딸로서 명문 출신이었으나 허엽의 두 번재 부인이 되었다. 따라서 허균은 비록 서출은 아니지만 이복형제들 틈바구니에서 자라면서 다분히 서얼들이 겪는 고통을 맛보았고, 이러한 경험이 후에 <홍길동전> 속에서 서얼  출신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배경이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의 이복형 허성은 당대에 뛰어난 문장가였으며, 임진왜란 직전에 서장관으로 일본에 다녀온 인물이었다. 또한 그의 동복누나 허난실헌은 양반 출신임에도 황진이와 더불어 한국 여류 문학의 양대산맥으로 불릴 만큼 섬세하고 뒤어난 문장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뛰어난 문인 집안 출신답게 허균 역시 5세 때부터 글을 읽기 시작하여 9세 때 시를 지을 줄 알았다고 한다. 영남학파의 거두 유성룡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둘째 형 허봉의 친구 이달에게서 시를 배웠다.

 

그 뒤 26세 때인 1594년 정시문과에 을과롤 급제하고, 1597년 문과중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황해도도사가 되었지만 한양의 기생을 끌여들여 가까이 했다는 탄핵을 받아 부임 6개월 만에 파직되는 신세가 되었다. 그 후 다시 벼슬길에 나가 춘추관기주관, 형조정랑 등을 지내고 1604년 수안군수를 지내다가 불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자 스스로 관직을 내놓고 계속 불교에 몰두하였다.

 

1606년 명나라 사신 주지번을 영접하는 종사관이 되어 문장과 학식을 높이 평가받고, 그에게 누이 허난실헌의 시를 보여 이를 중국에서 출판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 공로로 삼척부사가 되었으나 불상을 모시고 염불과 참선을 한다는 탄핵을 받아 세 번째로 관직에서 쫓겨났다. 그러나 그의 학식을 높게 평가하던 조정은 그를 다시 공주목사로 기용하였는데, 이번에는 서얼 출신들과 가까이 지내다가 관직을 더럽힌다는 이유로 또다시 네 번째 파직을 당하게 된다.

 

파직을 당한 뒤 그는 부안으로 내려가 산천을 유람하다가 기생 계생을 만나 서로 시문을 주고 받으며 함께 지냈고, 천민 출신 시인 유경희와도 교분을 쌓아 인간관계의 폭을 넓혔다. 그러다가 1609년 명나라 책봉사가 오자 종사관이 되어 영접했으며, 이 해에 첨지중추부사가 되고 이어 형조참의가 되었다. 하지만 1610년에 있었던 과거에 시험관으로 발탁되어 조카와 사위를 합격시켰다는 이유로 탄핵되어 전라도 함열로 유배되었다.

 

그 뒤 몇 년간은 태인에 은거하면서, 1613년 영창대군을 죽인 계축옥사와 관련하여 평소 친분이 있던 서출인 서양갑, 심우영 등이 처형당하자 신변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당시 실세로 자리를 굳히고 있던 정인홍, 이이첨 등 대북파에 가담하였다. 그는 이잉첨의 주선으로 형조참의에 임명되고, 1615년에는 외교 문서를 담당하는 승문원의 책임자가 되어 두 번이나 천추사로 중국을 다녀왔다. 특히 두 번째로 명나라에 갔을 때 중국 문헌에 종묘사에 대한 기록이 잘못되었음을 발견하고 이를 정정시키는 등으로 인해 광해군의 신임이 두터웠다.

 

이때부터 그는 광해군의 총애를 받아 광해군으로부터 '그대의 충성은 해와 달처럼 빛나고 있다.'는 찬사를 듣기도 했다. 그리고 일약 형조판서에 제수되엇으며, 이어 좌참찬이 되어 인목대비 폐모론을 주장해 성사시켰다.

 

그러나 이 즈음 허균은 그동안 자신이 모아온 세력을 바탕으로 반역을 도모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는 서얼 차별을 없앨 뿐 아니라 신분계급을 타파하고 붕당을 혁파해야 한다는 이상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현실화시킬 방법으로 혁명을 꿈꾸고 있었다.

 

그는 이 혁명을 실천으로 옮기기 위해서 우선 한성을 장악할 것을 결심하고 수하들을 시켜 헛소문을 퍼뜨리게 했다. 소뭉의 내용은 "북방의 오랑캐들이 쳐들어 오고, 남쪽에서는 왜구들이 쳐들어와 섬을 점령하고 대군을 상륙시키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이 소문이 점차 민간 속으로 파고들어 효력을 발휘하자 그는 남대문에 이 내용을 붙이게 하였다.

 

남대문에 전란에 관한 방이 나붙자 장안은 온통 전쟁 분위기에 사로잡혀 도성민들 중에는 황급히 피난을 가는 사람이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허균은 민심의 동요가 더욱 심해지면 그 틈을 노려 한성을 점령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혁명 계획은 엉뚱한 곳에서 탄로나고 말았다. 1618년 8월 그의 부하 한응민이 도성을 출입하다가 불심 검문에 걸려 거사 계획을 발설한 것이었다. 한응민으로부터 모반 계획을 파악한 이이첨은 군사를 이끌고 허균의 집을 내사하여 그와 반란 핵심 인물들을 모두 체포하였다. 그리고 허균을 역모혐의로 능지처참에 처하였다.

 

이로서 20년 가까이 준비해온 그의 혁명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그는 50세를 일기로 파란 많은 생애를 마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