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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679 : 조선의 역사 221 (광해군일기 7) 본문
한국의 역사 679 : 조선의 역사 221 (광해군일기 7)
제15대 광해군 일기(1575~1641년, 재위: 1608년 2월~1623년 3월, 15년 1개월, 유배기간 18년)
4. 광해군의 정적 제거 과정과 대북파의 득세
광해군시대는 왕권에 대한 위협이 극대화되어 있었다. 선조 이후 적자가 아닌 서자가 왕권을 이어 방계 승통이라는 오점을 남긴 데다가,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민간에 이씨 시대가 끝나고 정씨 시대가 올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게다가 광해군 역시 서자였고 세자 책봉과정에서 장자인 임해군을 제치고 선택된 터라 중국의 고명을 받지도 못했으며, 설상가상으로 유영경의 모략 때문에 선조의 선위 교서를 받지 못해 인목대비의 언문 교지로 겨우 왕위를 넘겨받은 처지였다.
게다가 왕으로 등극한 이후에도 명나라에서 사신을 파견하여 그의 왕위 세습 과정에 대한 진상 조사를 하는 사태까지 발생한 데다 선조의 적자인 영창대군이 존재하였기에 왕권에 대한 위협은 한층 심화된 상태였다. 왕권에 대한 이 같은 위협은 광해군으로 하여금 정적 제거 작업에 몰두하게 했으며, 광해군 지지파였던 대북파가 이 작업을 구체적으로 지원하고 실천하게 된다.
광해군의 왕권 안정책은 그에게 가장 위협적인 인물이었던 임해군의 제거 작업부터 시작되었다. 임해군은 세자 책봉에 탈락된 이후 줄곧 광해군을 헐뜯어온 인물이었다. 이런 그의 처사는 광해군이 왕으로 등극한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게다가 그의 광폭한 성격으로 인해 민간이 피해를 입는 일도 잦아졌다. 그런 와중에 광해군의 집권을 반대하던 서인과 소북 세력은 은밀히 명나라에 사람을 보내어 세자 책봉 과정에 대한 진상 조사단을 파견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자 집권당인 대북파는 임해군이 말썽을 일으킬 것을 염려하여 그를 유배보내야 한다고 간언했다.
하지만 임해군 이외에도 왕권을 위협하는 세력은 적지 않았다. 특히 영창대군과 신성군의 양자 능창군이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이리하여 광해군과 대북파는 영창대군을 지지하던 소북파를 몰아내고 영창대군과 능창군을 제거할 계획을 세우게 된다.
대북파가 영창대군 지지파인 소북파를 몰아내기 위해 꾸민 첯 번째 사건은 1612년에 일어난 '김재직의 옥'이었다. 이 사건은 황해도 봉산군수 신률이 병역회피를 위해 어보와 관인을 위조한 김경립을 체포하면서 시작된다. 신률은 그를 체포한 후 관련자 유팽석을 고문하여 김경립이 모반을 획책하기 위해 어보와 관인을 위조했다는 내용의 자백을 받아내고, 다시 김경립을 문책하여 거대한 역모 계획을 받아내기에 이른다.
김경립이 자백한 내용을 요약하면 8도에 각각 대장, 별장 등을 정하여 불시에 한양을 함락시키고 대북 세력 및 광해군을 축출한다는 것이엇다. 게다가 김경립의 아우 김익진의 입을 통해 팔도도대장으로 내정된 사람이 김백함이라는 자백이 나오자 사건은 급속도로 확대되었다.
김백함이 팔도도대장으로 내정되었다는 자백을 받아낸 대북파는 김직재와 김백함 부자는 물론, 김직재의 사위 황보신 및 그 일족을 모두 체포하여 모진 고문을 가한다. 이 고문 과정에서 김백함은 아버지 김직재의 실직에 불만을 품고 모의를 했다는 자백을 강요받았으며,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모든 내용을 시인하게 된다. 또한 김직재는 자신이 역모의 주모자이며, 연흥부원군 이호민, 전 감사 윤안성, 전좌랑 송상인, 전 군수 정호선, 전 정언 정호서 등 일군의 소북파 인사들과 모의하여 특정한 날을 잡아 도성을 무너뜨리려 했다고 허위자백하기 이른다.
이 사건은 소북파의 거두이자 선조의 유명을 받든 일곱 신하 중 하나였던 박동량의 반대 상소에도 불구하고 옥사로 이어졌고, 그들 역모 세력이 추대하려던 선조의 아들 순화군의 양자인 진릉군 이태경이라고 함에 따라 그도 처형되었으며, 그들과 관련이 있는 대부분의 인사는 모두 숙청되었다. 이 옥사로 김직재, 김백함 부자가 처형당하고 김제, 유열 등 1백여 명의 소북파 인사들이 대거 숙청되었다.
이 사건이 '김직재의 옥'으로 불리게 된 것은 그가 모반의 주모자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는 임진왜란 중에 아버지 상을 당하였는데 이때 고기와 술을 먹었다 하여 직첩을 빼앗겼다가 돌려받은 적이 있었다. 그 후 광해군 때에 늙은 어머니를 학대하였다 하여 직첩을 다시 빼앗겼다. 이 때문에 그는 광해군에 대해 원한을 품게 되었고, 대북파가 이 같은 그의 약점을 이용하여 소북파를 완전히 제거한 것이다.
아래는 인터넷에서 발췌한 참고자료이다.
광해군의 정적 제거와 실리외교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폐륜의 군주로 알려져 있는 광해군도 이 때문에 많은 오해를 받고 있지 않나 싶다. 영창대군을 증살하고, 인목대비를 유폐시켰다는 것이 역모의 이유였다. 하지만 지금의 역사학자들은 이는 인조반정의 정당성 확보를 위한 명분이지 사실과 많이 다르다고 주장하고 있다. 어떻든 광해군은 북인과 서인간의 당파싸움에서 희생된 비운의 폐주였다는 데는 재론의 여지는 없는 것 같다.
조선 왕조 오백년사를 보면, 왕으로 등극하면 맨 먼저 왕권 강화작업에 들어갔다. 왕권을 위협하는 정적들을 제거하는 데는 한 치도 소홀함이 없었다. 광해군은 서인들이 난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이를 진압하지 못했다. 여러가지 정황으로 볼 때 광해군은 폭군의 기질과는 거리가 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광해군은 세자 책봉때부터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왕위에 올랐지만, 왕위 계승에 문제가 있다는 이유로 논란이 끊이질 않았다. 그 중심엔 선조의 적출인 영창대군과 친형인 임해군이 있었기 때문이다. 광해군은 준비된 왕이었다. 임진왜란때 분조 임무를 기대 이상으로 잘 해내 조정은 물론 백성들에게 큰 신망을 얻는 등 세자 역할들을 충실히 해냈다. 전란으로 도탄에 빠져 있는 백성들을 또 다시 전쟁터에 내몰지 않기 위하여 평화주의 노선을 택했고, 농민의 세금 경감을 위하여 대동법을 시행하는 등 새로운 민생정치를 펼쳐 나갔다.
이웃 중국에서는 명·청의 교체기로서 국내외 정치상황이 복잡했다. 광해군은 명과 후금을 두고 중립외교를 펼치면서 자신의 정치노선을 끌고 가다 한순간에 권좌에서 밀려났다. 쿠데타에 성공한 이들은 광해군의 치적을 철저히 폄하하고 은폐했다. 하지만 현대의 역사가들은 전란을 피하게 한 군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광해군은 거듭되는 상소를 물리치고 명나라와 신흥 강국인 후금을 서로 견제하는 탁월한 외교력을 펼쳤다. 그 결과 광해군의 집권기에는 안정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광해군의 실리주의가 계속 유지되었더라면 대명관계도 청산되고 국력도 신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지금 한반도의 국내·외 정세는 광해군시대 이상으로 복잡하게 변해가고 있다. 북핵문제 등 분단국가로서의 풀어야 할 숙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고 있는 역사는 우리들에게 산교육의 장이 되어야 할 것이다. 유명한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는 자는 반드시 실패한다고 했다. 역사는 되풀이되기 때문이다.
강걸수 부산 북구의회 사무과장
광해군의 즉위 과정과 영의정 유영경
선조가 승하한 뒤 이튿날 즉위식에서 어서 어좌(御座. 임금의 자리)에 오르라던 신하들의 권유를 광해군은 부왕의 시신이 빈전에 있는 상황에서 차마 즉위하지 못하겠다며 광해군은 물리쳤다. 이때 다시 광해군에게 몇 차례나 ‘어서 즉위하시어 만백성의 여망에 부응하시라’고 권유, 광해군이 어좌에 오르게 했던 것이 영의정(領議政) 유영경(柳永慶. 1550. 명종 5년~1608. 광해군 즉위년)이었다. 그러나, 임해군보다 먼저 광해군의 즉위와 함께 조정을 떠나야 했던, 세상을 떠나야 했던 인물이 바로 이 유영경이었다.
선조 말의 실력자, 유영경
유영경은 전주(全州)가 본관으로, 자는 선여(善餘), 호는 춘호(春湖)였다. 아버지는 참봉 의(儀)이다. 1572년(선조 5) 문과에 급제해 정언 등 청요직(淸要職)을 역임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사간으로서 초유어사(招諭御史)가 되어 의병을 모집했던 전력도 있다. 동인과 서인으로 정당이 갈렸을 때는 유성룡(柳成龍)과 함께 동인에 속했고, 동인이 다시 남인·북인으로 나뉘자 이발(李潑)과 함께 북인에 가담했다.
한편 1599년 대사헌(大司憲. 감사원장+검찰총장)으로 있을 때 남이공(南以恭)·김신국(金藎國) 등이 같은 북인인 홍여순(洪汝諄)을 탄핵하면서 대북·소북으로 나뉘자 남이공과 함께 소북파의 영수가 되었다. 이때 대북파에 밀려 파직되었다가 1602년 이조판서에 이어 우의정에 올랐는데, 1604년 임진왜란 때 세운 공으로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들어갔고, 전양부원군(全陽府院君)에 봉해졌다. 그리고 선조에게 존호를 올리고 영의정이 되었다. 그러므로 그는 선조와 밀착해 선조의 뜻에 영합하면서 권력의 핵심에 이른 인물이었다.
그는 대북파의 기자헌(奇自獻)·정인홍(鄭仁弘) 등과 세자(世子) 문제로 심한 마찰을 빚었다. 유영경은 공빈(恭嬪) 김씨 소생이지만 이미 세자로 지명된 광해군 대신 인목왕후 소생으로 갓 태어난 영창대군(永昌大君. 1606~1614)을 옹립하려 했던 것이다. 이것이 그가 영창대군을 보호해달라는 선조의 유교를 받은 ‘유교 7신(臣)’에 들어갔던 이유였고, 또한 광해군 즉위와 함께 운명을 달리하게 된 이유였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런 배경에는 선조와 광해군의 관계가 순조롭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다. 명나라가 임진왜란 초기의 패전에 대한 책임을 선조에게 돌리고, 광해군을 즉위시켜야 한다는 논의가 명나라 조정에서 있을 정도였다. 이런 상황이라면 좋은 사이라도 멀어질 수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한편, 조선 조정에서는 왜란 초기부터 광해군을 왕세자로 승인해달라고 중국에 요청했으나 번번이 거절당했다. 광해군이 맏아들이 아닌 둘째아들이라는 것이 이유였다. 1592년부터 1604년까지 13년 동안 다섯 번이나 주청사(奏請使)를 보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선조와 광해군의 관계가 명나라 때문에 벌어졌다는 해석은 좀 더 숙고해야 할 듯하다.
즉위의 걸림돌
선조 후반에 갈수록 선조는 광해군에게 국왕이 될 자질, 즉 왕재(王才)가 없다고 판단했다는 주장도 있다.(‘연려실기술’ 권18 ‘광해사위(光海嗣位)’) 왜란에서 분조(分朝. 제2의 정부)를 이끌었던 공로로 계속 왕세자의 역할을 수행했지만, 선조가 가까이서 본 광해군은 ‘어리석고 용렬하여’ 나라를 경륜할 수 있는 인재로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 자세한 이유가 무엇이고, 어떤 근거였는지 확인할 수는 없다. 역사가 늘 그런 기록까지 친절하게 남겨주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는 광해군 시대를 읽어가면서 선조의 판단이 옳았는지 그릇되었는지 확인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선조가 병석에 있는 기간이 길어지면서 점점 가망이 없어지자, 세자 광해군의 섭정(攝政)을 추진했다. 이 일은 중전에게 부탁했고, 중전은 광해군의 섭정을 권유하는 선조의 명령을 한글로 써서 조정에 내려 보냈다. 이 정황에 대해 당시 사관(史官)은, “상(上)의 기후가 미령하지만 국가를 위한 계획이 가장 중요하다. 중전은 여주(女主)이다. 이처럼 정책을 결정하고 부탁하는 일을 어떻게 언서로 간여할 수 있겠는가. 이런 습속을 자라게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중전인들 어찌 여주가 간여할 수 없다는 것을 모르겠는가. 이처럼 위급한 때를 당하여 특별히 선조의 분명한 뜻을 조정에 내린 것은 나라의 대계(大計)를 보인 것이다.”(‘선조실록’ 권217 40년(1607) 10월 11일)라고 기록했다. 이 섭정 논의 때도 유영경을 중심으로 중전의 명을 따르지 않았다. 그리고 선조가 광해군에게 전위하려던 비망기(備忘記)도 유영경이 감추었다는 이야기까지도 있었다.
원상(院相)과 영의정
사실 여부를 떠나 이런 소문은 유영경이 광해군의 즉위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았는지를 설명해준다. 그리고 선조에서 광해군으로의 시대 전환이 살얼음판 같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울러 광해군에게는 이런 살얼음판을 어떻게 잘 수습하느냐가 즉위 초반 국정운영의 과제가 되었다. 요즘말로 하면 정치력의 시험대였던 것이다.
아무튼 우여곡절 끝에 광해군이 즉위했다. 그리고 이산해(李山海)를 원상(院相)으로 삼았다. 이 대목부터 심상치 않았다. 원상이란, 국상(國喪) 때 국정을 총괄하는 임무를 맡는다. ‘은대편고(銀臺便攷)’에 보면, 대왕(大王)의 초상 때 수상(首相. 영의정)을 ‘원상’이라고 칭해 승정원에서 대소사를 임금에게 아뢰어 처리하게 하며, 성복한 뒤에 그만둔다고 규정되어 있다. 은대(銀臺)는 국왕 비서실인 승정원의 별칭인데, 은대편고는 곧 승정원의 업무 매뉴얼이다.
그러니까 국왕의 초상이 나면 영의정이 원상을 맡아 승정원에서 숙직하며 국사(國事)를 처리한다는 말이고, 그래서 승정원의 ‘원’ 자와 재상의 ‘상’ 자를 따서 ‘원상’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광해군은 바로 그 원상에 규정대로 영의정 유영경을 임명하지 않고, 대북의 원로 이산해를 임명했던 것이다. 이해가 가기도 한다. 정치에는 입장이 있게 마련이고, 각각의 입장에 따라 정적이 되기도 동지가 되기도 하는 것이라지만, 자신의 세자 자격을 인정하지 않고 부정해왔던 인물이 달갑기는 성인이라도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지만 광해군이 곧장 유영경을 제거하려고 했다고 보는 것은 비약이다. 조정과 통합 역시 정치의 몫이기 때문이다.
밀려드는 탄핵
그러므로 광해군은 즉위 다음 날부터 밀려드는 유영경에 대한 탄핵에도 불구하고 그 탄핵을 쉽게 허용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상중인 군주의 덕목이기도 했을 것이다. 2월 7일에 유영경이 사직 상소를 올렸을 때도, ‘지금이 어떤 때인데 사직하겠다는 말을 하는가’라고 되물었다. 완산군(完山君) 이축(李軸)이 탄핵했을 때에도, 예의 광해군은 부왕인 선조의 유신으로 유영경이 7년 동안 영의정으로 신임을 받았던 사실을 상기시켰다.
그러나 원래 인심은 좀 야박한 데가 있는 것이다. 왕정에서 군주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관료의 운신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유영경의 처지에서 보면 비극적인 전환 국면이지 않은가! 당시 사람들도 유영경에 대한 탄핵이 좀 씁쓸했던지, “이에 앞서 임해군이 음란하고 난폭한 짓을 멋대로 하고 유영경이 권세를 독점해 나라를 병들게 했으므로 정인홍이 소장을 올려 유영경을 논하다가 찬배당한 데 대해 사람들이 모두 통분스럽게 여겼었다. 그런데 이때에 이르러 대행 대왕이 승하한 지 겨우 10여 일 만에 대각(臺閣. 사헌부)이 입장을 바꾸어 임해를 대역(大逆)으로 무함했다. 또 유영경을 파출시키고 정인홍을 복구시키는 것을 마치 혁명(革命)을 일으켜 바꾸듯 했기 때문에 조야(朝野) 사람들이 도리어 탄식하면서 안타까워했다.”고 전한다.
결국 줄기찬 탄핵을 견디지 못한 유영경이 계속 사직을 요청했고, 보름도 안 된 14일에 영의정에서 갈린다. 아무렴 유영경인들 영의정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겠으며, 자리에 눌러 붙어 있고 싶기도 했겠는가? 그런데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유영경에 대한 안치(安置)를 넘어 정형(正形. 형률에 따라 처형함) 요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즈음에서 우리가 생각해 볼 문제가 있다. 원래 정치엔 적도 동지도 공존한다. 동시에 정치는 조정과정이기도 하다. 정적인 광해군이 즉위했으니 유영경은 끝나는 게 당연하다는 식으로 정리한다면 우리는 정치에서 배울 게 없다. 그런 정치는 B급, 아니 C급 정치이기 때문이다. 설사 그렇게 되더라도 그 과정이 가능한 상처를 적게 남기고, 사회에도 생산적인 논의와 결실을 가져오는 방향으로 이루어지는 것, 그래서 저 정도면 볼 만하다고 사람들이 인정하는 그런 마당의 가능성을 물어보자는 것이다.
가는 사람 오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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