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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680 : 조선의 역사 222 (광해군일기 8) 본문
한국의 역사 680 : 조선의 역사 222 (광해군일기 8)
제15대 광해군 일기(1575~1641년, 재위: 1608년 2월~1623년 3월, 15년 1개월, 유배기간 18년)
4. 광해군의 정적 제거 과정과 대북파의 득세(계속)
소북파를 몰아낸 대북파는 어리지만 가장 위협적인 존재인 영창대군을 제거할 계획을 세우게 되는데, 때마침 '칠서의 옥'이 발생하여 이 계획을 이룰 수 있게 된다.
1613년 문경새재(조령)에서 상인을 죽이고 수백 냥을 약탈한 강도사건이 발생했다. 이때 그 범인 일당은 영의정을 지낸 박순의 서자 박응서, 심전의 서자 심우영, 목사를 지낸 서익의 서자 서양갑, 평난공신 박충갑의 서자 박치의, 박유량의 서자 박치인, 북병사를 지낸 이제신의 서자 이경준, 서얼 허홍인 등 권력가들의 서자 7명이었다.
이들은 허균, 이사호, 김장생의 이복동생 김경손 등과 사귀면서 스스로를 '죽림칠현' 또는 '강변칠우'라고 칭하는 무리였다.이들은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자 서얼의 차별을 없애달라는 상소를 한 바 있는데, 이것이 거부당하자 불만을 품고 1613년 초부터 경기도 여주 남한강변에서 당을 조직한다. 이들은 윤리가 필요없는 집이라는 뜻의 '무륜당(無倫黨)'을 짓고 그곳을 근거지로 소금장수, 나무꾼 등으로 변장하여 행세하면서 전국에 출몰하여 화적질을 일삼다가 새재에서 상인들을 죽이고 돈을 약탈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때 피살된 상인의 노비가 이들의 뒤를 은밀히 밟아 근거지를 알아내고 포도청에 고발함으로써 이들은 일망타진되었다. 하지만 이 '칠서의 옥'은 단순한 강도사건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의첨 등 대북파 중심 세력들은 이 사건을 계기로 영창대군을 몰아낼 계획을 세우게 된다. 이의첨과 그의 심복 김개, 김창후 등은 포도대장 한희길, 정항 등과 모의하여 이들 서얼 출신 화적들이 자금을 모아 영창대군을 추대하려 했다는 조작된 자백을 받아낸다. 이러한 자백은 칠서 중의 하나인 박응서가 광해군에게 비밀 상소를 올리는 형태로 이루어진다. 모두가 대북파의 사주에 의해 이루어졌다.
박응서는 이 상소문에서 자신들은 1608년에 명나라 사신을 저격한 바 있으며, 이를 통해 사회 혼란을 야기하고 한편으로는 군자금을 비축하고 무사를 모아 사직을 도모하려 하였고, 성사된 뒤에는 영창대군을 옹립하고 인목대비로 하여금 수려청정을 이루려 하였다고 했다.
이 상소문의 파장은 대단했다. 박응서의 상소 이후 대북 세력은 서양갑을 국문한 끝에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이 자신들의 우두머리이며, 인목대비 또한 영창대군이 장성하면 살아남기 힘들다고 판단하여 모의에 가담하기로 했다는 자백을 얻어내게 된다. 이 사건으로 종성판관 정협을 비롯하여 선조로부터 인목대비와 영창대군의 안위를 부탁받은 신흠, 박동량 등의 일곱 대신 및 이정구, 김상용, 황신 등의 서인 세력 수십 명을 하옥시켰다.
또한 이 사건의 취조 과정에서 김재남과 인목대비가 광해군을 양자로 삼았던 의인왕후의 능에 무당을 보내 저주했다는 일도 발각되기도 했다. 그래서 김재남은 사사되고 그의 세 아들도 화를 당하였으며, 영창대군은 강화도에 위리안치되었다가 이듬해 강화부사 정항에게 불을 떼서 뜨거운 방안에서 죽이는 방법으로 살해되었다. 이 사건으로 영의정 이덕형, 좌의정 이항복을 비롯한 서인, 남인 세력이 완전히 제거되고 대북파가 정권을 독점하게 되었다. 계축년에 일어난 이 사건을 흔히 '계축옥사'라 한다.
대북파의 또 다른 숙청 대상은 능창군이었다. 능창군은 선조의 다섯재 서자 정원군의 아들로서 인빈의 소생이자 한때 선조의 총애를 받아 세자로 책봉될 뻔했던 신성군의 양자로 입적한 인물이었다. 당시 17세로서 주변에서 그를 중심으로 역모를 감행하기에 적당한 나이였다. 뿐만 아니라 '능창군은 기상이 비범하다." 든지 '정원군의 집에 왕기가 성하다." 혹은 임빈의 무덤 자리가 좋다."는 등의 말들이 소문을 통해 광해군의 귀에도 들어왔다.
따라서 대북파와 광해군은 그를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북파의 능창군 제거 작업은 '신경희의 옥'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신경희는 당시 수안군수로 재직 중이었는데 1615년 그가 양시우, 소문진, 김정익 등과 함께 모반을 획책하고 있다는 소명국의 고변에 따라 이들에게 역모 혐의가 씌워졌다. 그리고 이때 이들이 추대하려고 한 사람이 바로 능창군이라는 자백을 받아내고 능창군을 유배시켜 죽여 버린다. 이때 죽은 능창군은 후에 반정을 통해 왕이 된 능양군(인조)의 동생이다. 따라서 이 사건은 능양군이 반정을 도모하게 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북파는 정권을 독점하게 되자 1618년 5월 지난번의 계축옥사를 다시 거론하며 이를 빌미로 인목대비를 폐위시켜 서궁에 유폐시킨다. 이 과정에서 이이첨 등의 강결론자들은 인목대비를 사사시킬 것을 간언하지만 광해군의 반대로 실현에 옮기지 못한다. 이후 이이첨은 몇 번에 걸쳐 인목대비 암살 계획을 세우기도 하지만 다른 대신들의 방해로 번번이 실패하고 만다. 이렇게 해서 광해군은 왕권을 위협하던 세력들을 거의 모두 제거하고 대북파의 이이첨, 정인홍 등은 세력을 독점하게 된다.
이렇듯 왕권 위협 세력을 거의 모두 제거했음에도 불구하고 광해군이 인조반정으로 폐위된 이유는 다음 몇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우선 정적의 제거 과정에서 지나치게 많은 적을 양산했는데도 이들에 대한 감시를 소홀히 한 것이 첯재 이유이고, 둘째로 대북 세력이 조정을 독점함으로서 전체를 균형 있게 볼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는 점, 그리고 마지막으로 후금과 명군의 전투에 명군을 원조하기 위해 병력을 동원하여 출전시키는 바람에 도성과 궁궐의 치안을 소홀히 한 점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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