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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682 : 조선의 역사 224 (광해군일기 10) 본문
한국의 역사 682 : 조선의 역사 224 (광해군일기 10)
제15대 광해군 일기(1575~1641년, 재위: 1608년 2월~1623년 3월, 15년 1개월, 유배기간 18년)
5. 변혁의 시대에 핀 문화의 꽃
비운의 혁명가 허균과 불사의 영웅 홍길동(계속)
당시 사람들은 허균에 대해 총명하고 영리하여 능히 시를 아는 사람이라 하여 문장과 식견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인격에 대해서는 경박하다거나, 인륜 도덕을 어지럽히고 이단을 좋아하며 행실을 더럽혔다는 등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그의 생애를 통해 볼 때 다섯 처례에 걸친 파직의 이유가 대개 그러한 부정적 견해를 대변해주고 있다. 그러나 그는 한글로 된 <홍길동전>을 남김으로써 한국문학사에 일획을 긋는 대업을 이루었다. 허균의 혁명사상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홍길동전>은 당대에만 하더라도 누구의 저작인지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그보다 18세 아래인 이식이 그의 <택당지> 잡저 부분에서 '허균이 홍길동전을 지었다.'라고 기록한 것을 통해 후대에 밝혀졌을 뿐이다.
이 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세종 때로 주인공 홍길동은 홍판서의 서자로 등장하고 있다. 그는 어려서부터 기상이 뛰어나고 무술이 남달랐으나 신분이 미천하여 한을 품게 된다. 이에 홍판서 가족들은 길동의 비범한 재주가 장래에 화를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생각하여 자객을 시켜 그를 죽이려고 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길동은 길을 떠나 도적 두목이 되고, 활빈당을 조직하여 의적생활을 하게 된다. 홍길동의 의적 행위에 대한 소문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전국 각처에서 같은 이름의 도적들이 나타나, 어명으로 잡아들인 홍길동만 해도 3백여 명에 달하게 된다. 그러나 결국 길동을 체포하지 못한 조정은 홍판서를 시켜 그를 회유하기에 이르고, 타협안으로 그에게 병조판서를 재수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길동은 한때 병조판서를 지내다가 다시 남경으로 떠날 것을 결심하고 고국을 떠나게 되는데, 남경으로 가는 도상에서 산수가 수려한 율도국을 발견하고 그곳에 상륙하여 율도국을 지배하고 있던 요괴를 퇴치한 후 율도국 왕이 된다. 이후 아버지의 부음을 전해듣고 일시 귀국하여 3년상을 마친 후에 다시 율도국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왕으로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평생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해피앤드로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이 작품은 도적을 주인공으로 한 영웅 소설이자 양반 가정의 서얼 차별의 불합리에 항거한 사회 소설이다. 또한 이상향을 그리는 낙원사상을 담고 있으며, 도교적인 둔갑법, 측지법, 분산법, 승운법 등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도교 적인 요소도 있다. 하지만 기본적인 성격은 사회 혁신을 꿈꾸는 사회 소설이라 할 수 있다.
이 소설에 대하여 비교 문학적으로 고찰한다면 중국 명대의 <수호전>, <삼국지연의>, <서유기> 등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도적의 의적 행위에 관한 것은 <수호전>과 흡사하고, 분신법으로 팔도 감영에 방을 붙이고 짚으로 사람을 만들어 속이는 것은 <삼국지연의> 제68회의 좌자의 분신법에 의하여 조조를 희롱하는 것과 상통하며, 도술을 부리고 구름을 움직이는 것은 <서유기>를 본받은 듯하다. 하지만 이 소설의 모델은 주선 국내에 있었던 것 같다.
즉, 연산군 6년에 가평, 홍천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이름난 화적 '홍길동'과 명종 대의 의적 '임꺽정', 선조 29년 7월 임진왜란 와중에 충청도 홍산을 중심으로 거사한 종실의 서얼 '이몽학의 난' 등에 나타난 여러 가지 요소를 복합적으로 조합시킨 흔적이 역력하기 때문이다. 또한 율도국 같은 이상국의 건살에 관한 것은 조선 선비들이 내면적으로 가지고 있던 이상향에 대한 동경이 노출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이것은 혀균 역시 이상향을 꿈꾸던 대표적인 조선의 선비였다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다.
이렇게 보면 <홍길동전>은 당시 조선 중기 사회의 양반과 민중들의 사고를 읽어낼 수 있는 가장 한국적인 소설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서얼 문제를 비롯한 사회계급의 불평등에 대한 것이 후대로 갈수록 점차 사회 쟁점으로 부각한 것을 볼 때 조선 중기 전반에 걸쳐 <홍길동전>은 혁명사상의 교과서로 인식되었던 듯하다.
허균은 홍길동을 통해 자신이 이상향으로 여기던 사회를 건설하려고 했고, 또한 소설 속에서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실제로 혁명을 일으켜 이를 실천하려 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의 사회 변혁 사상은 홍길동이라는 인물을 통해 그 이후에도 조선 사회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이에 대한 일례로 홍길동은 후대의 박지원에 의해 '허생'으로 재탄생되어 혁명 사상을 잇게 되었고, 민간에서는 사실적 인물로 전해져 전라도 영광의 홍길동 마을에 대한 전설을 낳고 공주 유구에는 홍길동이 쌓았다는 산성이 전설로 남기게 되었다.
허균이 남긴 소설은 <홍길동전> 이외에도 <엄처사전>, <손곡산인전>, <장신인전>, <남궁선생전>, <장생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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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의 '호민론'에 대하여......
천하에 두려워할 대상은 오직 백성뿐이다. 백성은 홍수나 화재 또는 호랑이나 표범보다도 더 두려워해야 한다. 그런데도 윗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백성들을 업신여기면서 가혹하게 부려먹는데 어째서 그러한가?
이미 이루어진 것을 여럿이 함께 즐거워하고, 늘 보아 오던 것에 익숙하여 그냥 순순하게 법을 받들면서 윗사람에게 부림을 당하는 사람들은 항민(恒民)이다. 이러한 항민은 두려워할 것이 없다. 모질게 착취당하여 살가죽이 벗겨지고 뼈가 부서지면서도, 집안의 수입과 땅에서 산출되는 것을 다 바쳐서 한없는 요구에 이바지하느라, 혀를 차고 탄식하면서 윗사람을 미워하는 사람들은 원민(怨民)이다. 이러한 원민도 굳이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자신의 자취를 푸줏간 속에 숨기고 몰래 딴 마음을 품고서, 세상을 흘겨보다가 혹시 그 때에 어떤 큰일이라도 일어나면 자기의 소원을 실행해 보려는 사람들은 호민(豪民)이다. 이 호민은 몹시 두려워해야 할 존재이다. 호민이 나라의 허술한 틈을 엿보고 일의 형편을 이용할 만한 때를 노리다가 팔을 떨치며 밭두렁 위에서 한번 소리를 지르게 되면, 원민은 소리만 듣고도 모여들어 모의하지 않고서도 소리를 지르고, 항민도 또한 제 살 길을 찾느라 호미, 고무레, 창, 창자루를 가지고 쫓아가서 무도한 놈들을 죽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진나라가 망한 것은 진승과 오광 때문이었고, 한나라가 어지러워진 것은 황건적 때문이었다. 당나라가 쇠퇴하자 왕선지와 황소가 그 틈을 타고 일어났는데, 마침내 백성과 나라를 망하게 한 뒤에야 그쳤다. 이러한 일들은 모두 백성들에게 모질게 굴면서 저만 잘 살려고 한 죄의 대가이며, 호민들이 그러한 틈을 잘 이용한 것이다. 하늘이 임금을 세운 것은 백성을 돌보게 하기 위해서였지 한 사람이 위에서 방자하게 눈을 부릅뜨고서 계곡같이 커다란 욕심을 부리라고 한 것은 아니었다. 진나라, 한나라 이후의 화란은 당연한 결과였지, 불행했던 것은 아니다.
조선은 중국과는 다르다. 땅이 비좁고 험하여 사람도 적고, 백성 또한 나약하고 게으르며 잘아서, 뛰어난 절개나 넓고 큰 기상이 없다. 그런 까닭에 평상시에 위대한 인물이나 뛰어난 재주를 가진 사람이 나와서 세상에 쓰여지는 일도 없었지만, 난리를 당해도 또한 호민이나 사나운 병졸들이 반란을 일으켜 앞장서서 나라의 걱정거리가 되었던 적도 없었으니 그 또한 다행이었다. 비록 그렇긴 하지만 지금의 시대는 고려 때와는 같지 않다. 고려 때에는 백성들에게 조세를 부과함에 한계가 있었고, 산림(山林)과 천택(川澤)에서 나오는 이익도 백성들과 함께 했었다. 장사할 사람에게 그 길을 열어 주고, 물건을 만드는 기술자에게 혜택이 돌아가게 하였다. 또 수입을 잘 헤아려 지출을 하였기 여분의 저축이 있어 갑작스럽게 커다란 병화나 상사(喪事)가 있어도 조세를 추가로 징수하지는 않았다. 그러고도 그 말기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삼공할 정도였다.
우리 조정은 그렇지 아니하여 구구한 백성이면서도 신을 섬기고 윗사람을 받드는 범절을 중국과 대등하게 하고 있었는데, 백성들이 내는 조세가 다섯 푼이라면 조정에 돌아오는 이익은 겨우 몇 푼이고 그 나머지는 간사한 자들에게 어지럽게 흩어져 버린다. 또 관청에서는 여분의 저축이 없어 일만 있으면 한 해에도 두 번씩이나 조세를 부과하는데, 지방의 수령들은 그것을 빙자하여 칼질하듯 가혹하게 거두어들이는 것 또한 끝이 없었다. 그런 까닭에 백성들의 시름과 원망은 고려 말보다 더 심한 상태였다. 그런데도 윗사람들이 태평스레 두려워할 줄 모르고, 우리 나라에는 호민이 없다고 생각한다. 불행하게도 견훤이나 궁예 같은 자가 나와서 몽둥이를 휘두른다면 근심하고 원망하던 백성들이 가서 따르지 않으리라고 어떻게 보증하겠는가? 기주·양주에서와 같은 천지를 뒤엎는 변란은 발을 구부리고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백성을 다스리는 사람이 두려워해야 할 만한 형세를 명확하게 알아서 시위와 바퀴를 고친다면, 오히려 제대로 된 정치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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