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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678 : 조선의 역사 220 (광해군일기 6) 본문
한국의 역사 678 : 조선의 역사 220 (광해군일기 6)
제15대 광해군 일기(1575~1641년, 재위: 1608년 2월~1623년 3월, 15년 1개월, 유배기간 18년)
3. 광해군 가족들의 비참한 말로와 광해군의 유배생활
광해군이 폐위된 뒤 그의 가족들은 비참한 생활을 하다가 생을 마감한다. 이는 인목대비의 철저한 복수심의 표출과 인조 세력의 정치적 목적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은 인목대비와 인조반정 세력에 대해 종래와 다른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할 수 있게 하는 단서가 되고 있다.
광해군 폐위 후 광해군과 폐비 유씨, 폐세자 질과 폐세자빈 박씨 등 네 사람은 강화도에 위리안치되었다. 이들을 강화도에 유폐시킨 것은 그곳이 감시하기에 용이한 곳이엇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정 세력들은 이들 네 사람을 한 곳에 두지 읺았다. 광해군과 유씨는 강화부의 동문 쪽에, 폐세자와 세자빈 박씨는 서문 쪽에 각각 안치시켰다.
이들이 안치되어 울타리 안에 갇혀 살기 시작한 지 두 달쯤 후에 폐사자는 사약을 받았고, 세자빈은 자살하게 되는데 그 과정이 기이하다.
당시 20대 중반이던 이들 부부는 아마 강화도 바깥쪽과 내통하려고 한 것 같다. 세자 질은 어느 날 담 밑에 구멍을 뚫어 밖으로 빠져나가려다 잡히게 되는데 그의 손에는 은덩어리와 쌀밥, 그리고 황해도감사에게 보내는 편지가 있었다. 짐작칸데 그는 은덩어리를 뇌물로 사용해 강화도를 빠져나가려 했던 것 같다. 그리고 황해도감사에게 모종의 내용을 담은 편지를 전달하려 했을 것이다. 세자 질이 황해감사에게 전달하려 했던 편지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추론컨데 자신을 옹호하고 있던 평양감사와 모의를 하여 반정 세력을 다시 축출하려는 시도였을 것이다. 이 때문에 인목대비와 반정 세력은 그를 죽이기로 결정했고, 결국 세자 질에게 사약을 내렸던 것이다.
세자빈 박씨도 이 사건으로 죽었다. 박씨는 세자가 울타리를 빠져나갈 때 나무 위에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세자가 빠져나가는 것을 돕기 위해 망을 보고 있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하지만 세자가 탈출에 실패하여 다시 안으로 붙들려 오는 것을 목도한 그녀는 놀라서 그만 나무에서 떨어졌고, 이후 스스로 목숨을 끓었다.
이렇게 해서 장성한 아들과 며느리를 잃은 광해군은 1년 반쯤 뒤에 아내 유씨와도 사별하게 된다. 폐비 유씨는 한때 광해군의 중립정책을 이해할 수 없는 처사라고 하면서 대명 사대정책을 주청하기도 했다. 그리고 광해군이 폐위되자 궁궐 후원에 이틀 동안이나 숨어 있으면서 인조반정이 종묘사직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몇몇 인사들의 부귀영화를 위한 것이라고 비판한 적도 있었다. 그만큼 그녀는 나름대로 성리학적 사상에 기반한 가치관이 뚜렸했던 여자였다.
그러나 유배생활이 시작되면서 그녀는 화병을 얻고 말았다. 도저히 자신이 당한 현실이 믿기지 않았던 까닭이다. 그리하여 유배생활 약 1년 7개월 만인 1624년 10월에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아내마저 죽자 광해군의 가족은 박씨 일가로 시집간 옹주 한 사람밖에 남지 않았다. 하지만 광해군은 초연한 자세로 유배생활에 적응하여 그 이후로도 18년을 넘게 생을 이어간다. 이 과정에서 그는 몇 번에 걸쳐 죽을 고비를 넘긴다. 광해군으로 인해 아들을 잃고 서궁에 유폐된 바 있던 인목대비는 그를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고, 인조 세력 역시 왕권에 위협을 느낀 나머지 몇 번이나 그를 죽이려고 시도를 한다. 그러나 반정 이후 다시 영의정에 제수된 남인 이원익의 반대와 내심 광해군을 따르던 관리들에 의해 살해의 기도가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말았다.
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인조는 광해군의 재등극이 염려스러워 그를 배에 실어 태안으로 이배시켰다가 난이 평정되자 다시 강화도로 데려왔다. 1636년에는 청나라가 쳐들어와 광해군의 원수를 갚는다고 공언하자 조정에서는 또다시 그를 교동에 안치시켰으며, 이때 서인 계열의 신경진 등이 경기수사에게 그를 죽이라는 암시를 내리지만 경기수사는 이 말을 따르지 않고 그를 오히려 보호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듬해, 조선이 완전히 청에 굴복한 뒤 그의 복위에 위협을 느낀 인조는 그를 제주도로 보내버렸다. 이처럼 광해군에게는 몇 번의 복위 기회가 찿아왔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한다.
광해군은 제주 땅에서 초연한 자세로 자신의 삶을 이어갔다. 자신을 데리고 다니는 별장이 상방을 차지하고 자기는 아랫방에서 거처하는 모욕을 당하면서도 묵묵히 의연한 태도를 보였다. 심부름하는 나인이 영감이라고 호칭하며 멸시해도 전혀 이에 대해 분개하지 않고 말 한 마디 없이 굴욕을 참고 지냈다.
이렇듯 초연하고 관조적인 그의 태도가 생명을 오래도록 지탱시켰는지도 모른다. 또 긴 세월 동안 그는 다시 기회가 주어질지 모른다는 일념으로 묵묵하게 희망을 갖고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는 1641년 귀양 생활 18년 수개월 만에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그의 나이 67세였다.
죽기 전에 그는 자신의 어머니 공빈 김씨의 묘 발치에 묻어달라 했다고 한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그의 유언에 따라 경기도 남양주시 공빈 김씨 묘 아래쪽 오른편에 그를 묻었다. 그리고 박씨 집안으로 출가한 서녀의 자손들로 하여금 봉사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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