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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673 : 조선의 역사 215 (광해군 일기 1) 본문
한국의 역사 673 : 조선의 역사 215 (광해군 일기 1)
제15대 광해군 일기(1575~1641년, 재위: 1608년 2월~1623년 3월, 15년 1개월)
1. 전란이 가져다 준 왕위
선조는 아들이 14명이나 되었지만 정비 의인왕후 박씨 소생은 없었다. 그녀가 왕비에 책봉된 이후 줄곧 병석에 누워 있었기 때문이다. 별수 없이 서자들 중에서 세자를 선택해야 했는데 서자가 너무 많아 이 또한 쉬운 문제는 아니었다.
선조는 자신이 방계 혈통으로 왕위에 올랐다는 사실이 무척 부담스러웠던지 정비 의인왕후가 와병 중이라 더 이상 적자를 볼 수 없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세자 책봉을 계속 미루고 있었다.
하지만 선조의 나이가 40세를 넘기자 대신들이 더 이상 세자 책봉을 미루어서는 안된다는 의견을 내놓기 시작하였다. 당시로서는 40세가 결코 적은 나이가 아니었기 때문에 혹여라도 선조가 미처 세자를 결정하지도 못하고 불시에 죽는다면 조정이 혼란에 휩싸일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대신들은 이런 혼란을 미연에 방지하기 의해 건저(세자 책봉) 문제를 거론했는데, 이 문제를 가장 먼저 내놓은 사람은 좌의정 정철이었다.
1591년, 좌의정 정찰은 우의정 유성룡, 영의정 이산해, 대사헌 이혜수, 부재학 이성중 등과 세자 책봉 문제를 놓고 심각한 논의를 벌였다. 그리고 논의 결과 광해군을 세자로 옹립하기로 하고 선조에게 주청을 올리기로 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음모가 진행되었는데, 서인의 거두 정철을 궁지로 몰아넣기 위해 동인의 중심 인물인 이산해는 은밀히 계략을 짜고 있었다.
이산해는 선조가 인빈 김씨 소생의 신성군을 염두에 두고 총애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여 인빈을 찿아가 정철이 광해군을 세자로 올립하려 한다는 말을 전했다. 그리고 광해군을 세자로 옹립한 다음 인빈과 신성군을 죽일 계략을 짜고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 말을 듣고 인빈은 당장 선조에게 달려가 정철이 자신들을 죽이려고 모략을 꾸미고 있다고 말했다. 인빈을 총애하고 있던 선조는 이 말을 듣고 심히 분개하여 정철을 벼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내막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정철이 어느날 경연장에서 선조에게 건저 문제를 꺼내면서 광해군을 세자로 세울 것을 주청했다가 선조의 진노로 그만 화를 당하고 말았다. 이때 동인인 유성룡과 이산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서인 이혜수, 이성중 등만 정철의 주청에 가세했다가 같이 강등되어 외직으로 쫓겨갔다.
그 후 세자 책봉 문제는 거론되지 못하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 피난 가는 중에 분조(비상시 임시로 조정을 분리하는 일)를 해야 될 상황에 처해서야 비로소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게 된다.
당시 선조는 북쪽으로 쫓겨가는 몸이었기에 후사를 결정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였고, 조정 또한 분리하여 비상 사태에 대비해야 하는 입장이어서 평양성에 머무를 때 대신들의 주청을 받아들여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게 된다. 이때 선조는 총애하던 신성군이 이미 병사하고 없었고, 임해군은 성격이 포악하여 임금의 자질이 없다는 이유로 장자임에도 불구하고 세자 책봉 대상에서 제외된 상태였다.
하지만 이것으로 세자 책봉 문제가 일단락된 것은 아니었다. 세자를 책봉하면 명나라에 보고하여 승인을 받아야 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명에서 고명이 내려와야 정식으로 세자로 확정되는 상태였다. 그런데 전란 중인 1594년 선조가 윤근수를 명에 파견하여 세자 책봉을 주청했지만 명은 장자 임해군이 있다는 이유로 이를 거절하였다.
때문에 광해군은 비록 왕으로부터 세자로 임명되기는 했지만 그때까지도 위치가 불안정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광해군은 분조의 소임을 성심을 다하여 수행함으로써 조야의 명망을 얻게 되었고, 명의 고명에 관계없이 모든 대신들이 그를 세자로 받들었다.
그 후 광해군의 계승권은 요지동한 사실로 인식된 듯하였다. 하지만 전란이 끝나고 1602년 10대의 인목왕후가 50대 선조의 계비로 왕후가 되면서 광해군의 입지가 조금씩 약해지기 시작하였다. 만약 인목왕후가 적자를 낳는다면 상황은 달라지기 때문이었다. 설상가상으로 1606년 인목왕후가 영창대군을 낳자 상황은 더욱 악화일로로 치달았다. 적자가 아닌 방계승통으로 왕권을 이은 선조의 입장에서는 정말 학수고대하던 일어었던 것이었다. 선조가 그렇게도 염원하던 적자가 태어났기 때문이었다. 선조는 적자 영창대군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할 요량으로 그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일부 눈치빠른 신하들은 선조의 속내를 파악하고 서서히 영창대군을 옹립하려는 움직임이 보였다. 게다가 선조는 영의정 유영경을 비롯한 몇몇 신하들을 모아놓고 공공연히 영창대군을 잘 부탁한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상황이 이쯤 되자 대신들은 암암리에 영창대군 지지파와 광해군 지지파로 분리되고 말았다.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파는 광해군이 서자에다 차남인 까닭에 명나라의 고명도 받지 못했다면서 광해군을 세자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을 보였다. 그러나 1608년 선조가 갑자기 병이 악화되어 사경을 헤메는 지경에 처하자 현실적인 판단에 근거해 광해군에게 선위 교서를 내린다. 그런데 선위 교서를 받은 영의정 유영경은 이를 공포하지 않고 자기 집에다 감춰버린다.
이후 이 일은 광해군을 지지하던 대북파의 거두 정인홍, 이이첨 등에 의해 발각되었고 정인홍이 선조에게 이 사건을 알리면서 유영경의 행동을 엄히 다스릴 것을 간언하지만 선조는 미처 결정을 내리지도 못하고 운명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왕위 계승 결정권은 인목대비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유영경은 인목대비에게 영창대군을 즉위시키고 수렴청정할 것을 종용하지만 인목대비는 고심끝에 현실성이 없다고 판단하고, 언문 교지를 내려 광해군을 즉위시켰다.
인목대비는 만약 어린 영창대군을 즉위시킨다면 성년이 될 때까지 자신이 오랫동안 수려청정을 해야하는 입장이고, 한편 광해군은 물론 저 많은 서자들의 반발과 음모를 불을 보듯 뻔하였고 조정의 혼란은 물론 어쩌면 조선 초기 왕자의 난처럼 종친과 형제 간에 피를 부르는 내전과 숙청으로 비화될 가능성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그래서 오랫동안 세자로 책봉되어 분조도 운영하는 등 전란에 공도 많은 광해군에게 왕위를 양보함으로써 조정의 안정은 물론 자신과 어린 영창의 생명을 보장받으려는 계산을 했는지도 모른다.
드디어 재위를 향한 기나긴 여정이 끝난 것이었다. 이때가 1608년 2월 2일로 광해군의 나이 이미 34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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