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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674 : 조선의 역사 216 (광해군 일기 2)

두바퀴인생 2012. 8. 11. 03:04

 

 

 

 

한국의 역사 674 : 조선의 역사 216 (광해군 일기 2)

 

 

 

                                            

                                                                                      

                                                                                                                                                                                   

 

제15대 광해군 일기(1575~1641년, 재위: 1608년 2월~1623년 3월, 15년 1개월, 유배기간 18년)

 

 

2. 실리주의자 광해군의 과감한 현실정치

 

우여곡절 끝에 비로소 왕으로 등극한 광해군은 외적으로는 실리적 외교론을 폈고, 내적으로는 왕권 강화를 통해 민생을 안정시키고 당쟁을 종식시키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명분론에 입각한 서인들의 음모를 미연에 방지하지 못하고 결국 폐위되어 역사에 폭군으로 기억되고 마는 비운의 왕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광해군은 1575년 선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공빈 김씨 소생이다. 공빈 김씨는 그가 세살 때 죽었으며, 임해군은 그의 동복형제이다. 그의 이름은 혼으로, 어린 나이에 광해군에 봉해졋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에 세자에 책봉되었다. 이후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분조체제 아래서 조정의 일부를 이끌며 소임에 최선을 다했고, 선조가 죽던 1608년 인목대비의 언문 교지에 따라 왕위를 이어받았다.

 

왕으로 등극한 광해군은 우선 조정의 기풍을 바로잡고 임진왜란으로 파탄지경에 이른 국가 재정을 회복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초당파적인 입지를 굳히고 있던 남인의 이원익을 영의정으로 등용시키고 전란 중에 타버린 궁궐을 창건, 개수하는 등 왕실의 위엄을 살렸으며 대동법을 실시하여 민생을 구제하려 했다.

 

하지만 왕권 안정 과정에서 피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우선 왕위 계승 과정에서 계략을 부린 유영경을 유배보내 죽이는 한편, 왕의 권위에 도전하며 끓입없이 왕권을 위협받던 동복형 임해군을 유배보내 죽인다. 또 선조의 적자인 영창대군을 죽이고, 계모 인목대비를 서궁(덕수궁)에 유폐시키기에 이른다.

 

광해군이 임해군을 유배시킨 것은 1608년 명나라에서 조선의 세자 책봉 과정에 대한 진상 조사단을 파견했기 때문이다. 조선에서 서얼 출신이 왕위를 게승하게 되자 명나라에서는 이에 대한 논란이 일었고, 그래서 현장 실사를 위해 진상 조사단이 파견된 것이었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임해군이 문제를 발생시킬 소지가 있다고 판단하여 그를 유배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강하게 대두되엇다. 당시 임해군은 왕위를 도둑맞았다면서 노골적으로 광해군을 비방하고 다녔기 때문에 집권당인 대북파는 이를 그냥 묵과할 수 없었던 것이다.

 

명의 현장 실사로 광해군의 심사는 무척 괴로웠다. 이미 세자 책봉 과정에서 고아해군이 장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고명을 거부하였던 명나라였던 것이다. 때문에 명에 대한 광해군의 감정이 좋을리 없었다. 더군다나 왕위를 계승한 이후에도 진상 조사단을 파견하는 것은 그야말로 조선 조정과 광해군을 무시한 처사가 아닐 수 없었다.

 

이러한 광해군의 분노는 그의 왕위 계승을 반대하던 소북파, 그리고 명분론과 대명 사대주의를 강조하던 유생들에게 전가되었다. 광해군은 명나라가 사신을 보내어 현장 실사를 한다는 것은 조선 내부의 친명 세력이 요청한 것이라는 판단을 하고 잇었던 것이다. 이러한 광해군의 분노를 부추긴 것은 대북파 정치인들이었다. 그들은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광해군으로 하여금 정적들을 제거하게끔 종용했고, 광해군은 왕권 안정을 목표로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오히려 많은 정적들을 양산해 결국 이로 인해 인조반정이 일어나고 자신이 폐위되는 비극을 초래하게 된 것이다.

 

1611년 대북파의 거두 정인홍이 어언적, 이황의 문묘 종사를 반대하자 성균관 유생들이 유생들의 이름이 올려져 있는 청금록에서 정인홍의 이름을 삭제하는 사건이 발생하여였는데, 광해군은 이 사태에 직면하자 강경한 입장을 보이며 유생들을 모두 성균관에서 쫓아내는 조처를 취하였다. 이 때문에 그는 등극 초기부터 유생들과 등을 지고 만다.

 

그리고 이듬해 1612년 이른바 '김직제의 옥'으로 소북파 인사 1백여 명이 숙청당하는 대옥사가 발생한다. 이 옥사는 김경립이 군역을 회피하기 위해 어보, 관인을 위조한 사건에서 시작되었는데 모진 고문 과정에서 사건이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어 결국 역모사건으로 결론이 나고 말았다.

 

 

 

광해군의 중립외교(실리외교)

광해군은 즉위한 뒤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주지 않고, 조선의 사정에 맞추어 실리를 취하는 외교 정책을 취하게 되는데, 이를 광해군의 중립외교(光海君-中立外交)라고 한다. 뒤에 인조반정의 빌미가 된다.

 

선조는 왜란이 끝나고도 9년이나 더 집권한 다음 타계했으며, 1608년에 세자 광해군(光海君, 1608~1623)이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광해군은 유능한 왕자로서 왜란 때에는 항일의 공로도 매우 컸으나, 혈통상으로는 이복동생인 영창대군(永昌大君)에 비해 불리한 조건에서 왕위에 올랐다. 이것이 광해군 시대를 어렵게 만든 요인이 되었다.

 

광해군을 추종한 북인은 원래 동인 중에서 이황 문인을 제외한 여러 파벌이 연합한 붕당이어서 조식과 서경덕의 문인이 중심을 이루었다고는 하지만 쉽게 분열될 소지를 안고 있었다.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둘러싸고 영창대군의 혈통을 존중하면서 훈척의 정치 간여에 비판적 입장을 지닌 명분주의자가 소북(小北)을 형성하고, 광해군의 혈통상 약점보다는 항일의 공적과 능력을 존중하여 부국강병을 추구하려는 현실주의자가 대북(大北)을 형성했다. 대북파는 왜란 중에 의병 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했고, 그 여세를 몰아 소북파를 압도해 광해군을 추대한 후 권력을 잡았다. 대북파는 먼저 전쟁 중에 피폐된 산업을 복구하고, 부강한 국가를 재건하기 위해 토지 조사 사업과 호적 조사 사업을 실시하고, 공납제를 대동법(大同法)으로 바꾸어 처음으로 경기도에 시행하였으며, 성지(城地)와 무기를 수리하여 군사훈련을 강화했다.

 

이 밖에 전란을 전후하여 기근이 계속되고 질병이 만연하여 인명의 손실이 많았던 경험을 살려 허준(許浚)과 정작(鄭?)으로 하여금 《동의보감》(1596~1610)을 편찬하게 하였다. 이 책은 도교 의술을 도입하여 조선 초기에 정리된 의학서를 한 수준 높였으며, 동아시아 의학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또한 《동국여지승람》, 《국조보감》, 《경국대전》, 《악학궤범》, 《고려사》, 《용비어천가》, 《삼강행실도》 등 건국 초에 간행되었던 문헌들을 재간하고, 전라도 무주(茂朱)의 적상산(赤裳山)에 사고(史庫)를 새로 설치하는 등 문화 중흥에도 힘을 기울였다.

 

한편, 인왕산 기슭에 왕기(王氣)가 있다는 풍수가의 주장에 따라 1617년(광해군 9년)에 서대문 부근에 경덕궁(慶德宮, 서궐)을 건설한 것도 이때였다. 또한 파주 교하(交河)로 서울을 옮기려는 계획도 세웠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광해군 때의 정책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대외정책이었다. 임진왜란 때 원병을 보내면서 조선을 도왔던 명나라는 왜란 후 국력이 한층 쇠약해졌다. 이 틈을 이용하여 압록강 북쪽에 살던 여진족 사회에서는 급속한 통일운동이 일어났다. 만포진 건너편 건주위 여진의 추장 누르하치는 흥경노성을 근거로 하여 주변의 여진족들을 복속시키더니, 1616년(광해군 8년) 마침내 나라 이름을 ‘후금(後金)’이라 하고 스스로 한(왕)이라 칭하였다. 그는 계속하여 서쪽으로 세력을 뻗쳐 1618년에는 푸순(撫順)을 점령하고 명나라에 대하여 전쟁을 포고했다.

 

명나라는 큰 병력을 풀어서 후금을 공격하는 한편, 조선에 대해서 지원병을 보내줄 것을 요청해 왔다. 조선은 명나라의 요청을 받아들여 1619년 1만 3천이나 명나라의 원병을 보냈으나, 도원수 강홍립(姜紅立)은 후금의 감정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후금과 휴전을 맺고 돌아왔다. 그 후 명나라는 모문룡(毛文龍) 부대를 압록강 입구의 가도(假島)에 주둔케 하였으나, 조선 측은 그들의 식량을 지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후금과 친선을 도모하여 중립적인 정책을 취했다. 다시 말해 명나라와 후금의 싸움에 말려들지 않으면서 내치와 국방에 주력하는 실리정책을 펴나갔다.

 

한편, 광해군은 붕당정치의 폐단을 극복하기 위해 처음에는 이원익(李元翼)을 비롯한 남인과 정인홍(鄭仁弘)·이이첨(李爾瞻)·이산해(李山海) 등 대북인을 골고루 등용했으나, 자신의 친형인 임해군(臨海君)과 인목대비의 아들인 영창대군을 왕으로 옹립하려는 움직임에 위협을 느껴 1613년(광해군 5년) 인목대비를 폐위시키고 영창대군을 살해하는 등 반대파 정적들을 과격한 수단으로 제거했다. 이를 계축옥사(癸丑獄死)라 한다.

 

특히 1611년(광해군 3년)에 정인홍의 주장으로 남인의 추앙을 받던 이언적과 이황을 문묘제사에서 삭제하고, 이를 반대하는 성균관 유생들을 축출한 사건은 유생들의 반발을 사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광해군의 급진적 개혁은 왕권을 강화하고 국력을 키우는 데 큰 효과를 보았으나, 법가의 패도를 빌린 까닭으로 성리학의 명분론에 어긋나는 점이 많아 사림의 불만을 사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