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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672 : 조선의 역사 214 (선조실록 79) 본문
한국의 역사 672 : 조선의 역사 214 (선조실록 79)
임진왜란 경과
제14대 선조실록(1552~1608년, 재위: 1567년 7월~1608년 2월, 40년 7개월)
임진왜란을 마치며......
조선의 역사를 출발하여 213일, 선조대에 들어와서 임진왜란을 기술하면서 78일, 즉 거의 1년의 3분지 2와 임진왜란만 거의 두 달 반 동안 기술하여 왔다.
그동안 봄이 지나고 지금은 여름의 절정을 이룬 삼복더위로 연일 폭염에 잠 못이루는 밤이다. 고속도로는 휴가철 차량으로 넘쳐나고 전국의 계곡이나 해수욕장마다 사람들이 초만원을 이루고 있다. 지금 우리들이 이렇게나마 작은 삶의 행복을 누리는 것도 선조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이룩한 것이며 그것은 60년대의 획기적인 경제적 발전을 이룩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420년 전 임진왜란은 정말 한심한 전투였고 안타까운 전투였고 지리한 전투였고 울분의 전투였고 가슴이 저미는 전쟁이었다.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임진왜란을 기술한 이유는 임진왜란이 조선의 역사에서 망할 것이냐 아니면 이시 왕조를 이어나갈 것이냐를 좌우하던 위기였으며, 그것은 조선의 역사에서 변곡점이었고 존망의 기로였기 때문이다. 만약 그 때 선조가 압록강을 건너 요동으로 망명가고 일본군이 조선 전역을 점령하였다면 조선은 일제 식민지배가 앞당겨 졌을 것이며 나라도 사라져 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아마 우리는 지금 쯤 노예처럼 살아가거나 대부분 일본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극복한 조선은 그후 300년 역사를 더하여 500여 년의 역사를 기록했다. 그래서 조선의 역사에서 임진왜란이 가장 클라이막스로 볼 수 있겠다. 조선이 임진왜란을 당하게 된 것은 당시 임금 선조와 조정의 무능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조선 조정은 창업 이후 권력을 독식하던 훈구척신들이 물러나고 수차례 사화를 겪으면서 세력이 거의 몰락하였던 사림 세력들이 중앙 정계에 진출하면서 권력을 차지하게 되자 서로 권력을 독식하기 위해 학풍과 혈연, 지연에 따라 분파되어 치열한 당쟁을 전개하였다. 그런 와중에 백성들의 삶은 물론 주변 국제정세를 제대로 살피지 못하고 다가올 미래의 국난을 미리 예측하고 대비하지 못햇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의 군부는 제승방략 전략.전술 문제점을 예측하지 못함은 물론 당시 군제에 따라 유사시 동원 가능한 군사는 대부분 종잇장에 불과하였고 장수들은 적에 대하여 제대로 잘 알지도 못한체 우물안 개구리처럼 자만에 빠져 일본군을 왜구 수준 정도로 얕잡아 보았다. 또 방어 임무를 받고 현지로 출동한 장수들도 지형도 미숙하고 적정도 제대로 모른체 방어에 절대 유리하고 전술적으로도 중요한 지형지물이나 천험의 애로를 이용하지 못하고 절대 열세한 전력임에도 불구하고 적을 맞아 대적하여 대부분 대패하고 말았다. 또 적의 침공에 대비할 군사 체제가 통합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문제점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모든 것이 조선 창업 후 약 200년 동안 평화기를 누리면서 문민우위의 조정과 국방에 대한 소홀한 인식이 대부분이었고 그것은 성리학을 기반으로 한 유교 사회의 단적인 병폐였던 것은 과언이 아닐 것이다.
420년 전 7년 동안 진행된 당시의 전쟁을 오늘날의 시각으로 함부로 폄하는 것은 역사를 바로 보는 자세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시대 상황이나 전해지는 자료들에 의해 치세를 주도한 선조, 당시의 조정, 그리고 장수들의 언행을 살펴보면 권력에 대한 탐욕, 자신의 목숨에 대한 아까움, 공리공론으로 국익보다 당론에 따라 의사결정이 이루어졌으며, 유교 서적을 통해 충효사상를 따갑도록 배웠지만 실제는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성리학의 이상론과 인간 심성의 이중성 등 인간의 속성은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된다. 대부분 고관대작 집안 출신의 관료들은 현지 사정도 잘 모른체 임금 선조의 의중에 부합되는 언행으로 일관하였고, 적이 침입하자 선조와 조정은 도망치기에 바빴고 심지어 만주로 망명까지 생각하고 있었던 임금, 그로인해 전선과 지역을 책임지고 지키던 관료와 장수들은 적의 위세에 놀라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성, 군선, 무기, 식량, 백성을 버리고 군사들을 헤쳐버린 다음 도망치기에 급급하였고 자신의 치부를 감추기 위해 다른 장수를 모함하거나 비난하며 자신의 몸보신에 여념이 없었다.
우리는 임진왜란을 통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고 교훈으로 기억해야 할 것들이 많다. 우둔한 지도자와 정권 아래서는 백성들의 삶이 고난과 불행을 당하게 되어 있고 현명한 지도자를 만나면 백성들의 삶이 윤택해지는 법이라는 점이다. 지도층과 가진자들은 유사시 자신의 목숨 부지와 몸보신으로 도덕적 책임정신이 희박하다는 점, 머리만 좋고 시기심과 질투심이 많은 지혜롭지 못한 사람은 지도자로 부적합하다는 점, 국방을 소홀히하면 반드시 외침을 당하고 국난을 초래한다는 점, 지도층이 권력투쟁에 빠지고 갈등이 심화되면 국론분열이 일어난다는 점, 아무리 우수한 무기와 병력을 가진 전력이라도 지휘관에 따라 승패가 좌우된다는 점, 지도층이 부패하고 백성이 곤궁이 처할수록 국난을 당하기 쉽다는 점,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인재를 등용하면 반드시 훌륭한 인재를 만나게 된다는 점, 나라의 교육이 병들어 젊은이들의 바른 정신과 윤리가 무너진 나라는 국난에 처하여 바로 망하지만 교육이 바로 선 나라는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다는 점, 역사에 이름이 남는 인물은 반드시 자신의 기록을 솔직하고 정확하게 기술하고 남겼다는 점 등등이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 사회를 살펴보면 420년 전 조선의 상황과 거의 차이가 없다는 점이다. 주변 국제정세는 시시각각으로 빠르게 돌아가고 주변 4대 강대국의 이해관계가 상충하고 있으며 미.중의 세력분쟁은 점점 그 도를 더해갈 것이다. 가까운 중국과 일본은 우리 미래에 절대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나라들이므로 그들과는 운명적인 관계를 피할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태평양 바다 건너 이억 만리 미국이라는 나라의 손을 잡고 한반도 남쪽에서 배수진을 치고 패권주의를 지향하고 있는 중국, 군군주의 부활을 꿈꾸며 대동아공영권을 획책하고 있는 일본, 적화통일을 목표로 김씨 세습왕조를 유지하기 위해 적화통일을 목표로 군비증강에 여념이 없는 호전적인 북한과 마주하고 있다. 북한 김씨 세습 정권은 경제가 파탄나고 아사자와 탈북자가 속출하는 가운데도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어 체제유지와 군비증강에 여념이 없다. 즉 평양의 김정은 정권 핵심층과 열성 공산당원들만이 모여 살고 있는 600만 주민들 외에는 절대적인 빈곤과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고 노예처럼 살아가고 있다. 이것도 자들의 지도자를 잘못 만난 탓일 것이다.
지금 우리들이라고 별다른 미래가 밝아보이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오늘이 있기까지는 5.16 혁명이 도화선이 되어 경제발전을 이루었고 이는 고려가 망한 이래 이조 500년, 일재치하 36년, 해방 후 15년 전체 약 547년 만에 보릿고개에 신음하던 백성들이 겨우 가난에서 벗어났던 것이다. 경부고속도로를 착공할 때 장비 앞에 드러누워 농성을 벌이던 집단의 조직 우두머리들이 바로 김영삼, 김대중을 포함한 그를 따르던 무리들이 그 주인공들이다. 만약 혁명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지금도 보릿고개를 넘지못하고 가난과 굶주림에 신음하고 있을 지 모른다. 이제는 모두가 배가부르니 일부 세력들은 자신들의 탐욕을 위해 역사를 부정하려 하고 있다. 역사는 힘에 의해 엮어지고 공과를 떠나 시대를 살아가던 사람들은 큰 물결에 쓸려가듯이 흘러가기 마련이다. 이제와서 5.16 혁명을 부정한다고 역사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한 대선 후보를 깍아내리기 위해 가난과 배고픔을 잊게 해준 역사적인 사실을 부정할 수도 없다.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을 부정하면 이조 500년 역사도 부정하여야 할 것이다. 물론 박정권이 민중들에 대한 탄압과 유신을 통한 장기집권의 야욕을 드러낸 박정권의 과는 역사가 평가할 것이다. 역사는 부국강병을 이루어 영역을 수만리 확장하여 강대국을 이루었거나 내우외환을 이겨내며 나라를 튼튼히 하여 백성들의 삶을 윤택하게 만들어 태평성대를 누린 지도자를 기억하고 있다.
오늘날 국민들이 주말이면 유명한 먹거리를 찿아다니며 즐기고 가족과 여름 휴가를 떠나고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는 성공, 한류가 전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으며 경제대국을 이루어 한국 상품이 대접받는 것도 유신정권이라는 불행한 과거가 있었지만 한강의 기적이라는 경제발전을 이룬 정권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던 것이다. 북은 굶주림에 허덕이지만 우리는 비만과 포만감에 젖어 희희락락하고 있는 것도 5.16이라는 혁명이 역사의 전환점이 되었다는점이다. 5,16과 박정권을 싸잡아 그의 딸인 대선 후보에게 족쇄를 채우려는 무리들은 대부분 편향된 사상이나 기득권을 상실한 무리들로 대부분이 자신들이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국민을 선동하고 결국은 자신들만이 부귀영화를 누리려는 무리들에 불과할 것이다.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이 모두 그랬다. 이들 중 어떤 사람을 존경하는 사람들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모두가 대통령이 되는 데 목숨을 걸어 평생을 투쟁해 왔지만 대통령이 된 다음 이룬 업적은 결국 그 평가가 대부분 무능한 대통령이 되고 말았다. 국가 위기를 이용해서 권력을 잡고 강압적인 무단 통치 및 측근 정치, 친구에 빌붙어 권력을 쟁취한 다음 의리없는 친구가 되었으며 비젼도 없이 우유부단한 결정으로 나라를 혼돈에 빠뜨린 사람, 측근 비리로 권력을 절단내고 나라의 곳간을 거들낸 사람, 국민의 세금인 나랏돈을 뿌려 평화상을 받고 남북정상회담을 빌미로 북에 마구 퍼주며 서해 해전에서 아까운 우리 장병들의 죽음을 자초하며 북을 이롭게 한 근대정치사의 이단아, 보통과 서민을 내세우며 이념 투쟁에 아까운 세월을 다보내고 결국은 측근 및 가족들의 비리와 부패의 사슬에 스스로 목을 멘 사람 등 불행한 대통령이 대부분이었다. 지금의 정권도 탐욕에 빠진 무능한 정권의 범주에서 벗어나기 힘든 꼴이 되고 말았고 고구마 줄기같은 끝없는 권력형 비리와 부패에 대한 심판이 다음 정권에서 또 불거질 것이다.
금년 대선에 출마할 사람들이 대부분 국민들을 위한다고 한다. 정말 그들이 국민들을 위한다고? 포플리즘 공약, 헛공약에, 무상 복지 구호로 마구 국민들을 현혹시키며 한편으로는 뒷구멍으로 표리부동한 비리와 부패를 저지르며 겉으로는 뻔뻔한 얼굴로 자신이 최고인양 환상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 불과하다. 불행한 대통령이 전통인 이 나라에서를 대통령이 되고자 함은 불행한 인생길로 들어설 것이라는 점은 불을 보듯 뻔하다는 점이다. 그것은 대통령이 된 다음에 자신과 무리들이 권력의 독식으로 인한 탐욕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국민을 위한다지만 국민을 위하는 게 아니요 나라를 위한다지만 나라를 위하는 게 아니다. 정권을 연장하기 위해서 국민을 기만하기 위해서 모든 정책이 수행되고 지역, 혈연, 학연 등 주변 인물들이 대거 낙하산 인사로 국가공공기관과 공기업 등을 장악하고 탐욕을 부리기 때문이다. 조선의 역사에서 훈구 세력과 척신 세력, 외척들이 권력을 독식하며 저지른 것은 자신과 무리들의 부귀영화 뿐이었다. 그러면서 부패와 비리가 만연하고 매관매직이 성행하였으며 나라는 병들었고 백성들은 토탄에 빠져 거지처럼 살아도 신경쓴 인물들은 거의 없었던 것이다.
또 민중을 선동하여 반역,반정을 일으켜 나라를 전복하려고 시도하였던 수많은 사람들도 모두 마찬가지다. 한가지 예로 중국의 역사에서 청조말 '그리스도교 나라를 세워 천국같은 나라를 만들겠다'며 '태평천국의 난'을 일으킨 홍수전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마지막 순간, 이미 내분으로 지리멸렬되어 반란군이 괴멸되던 순간 남경의 궁궐에서 수많은 처첩들과 같이 죽음을 맞이했다. 종교와 사상을 빙자한 이상국가는 절대 이루어질 수가 없다. 왜냐면, 그 언저리에는 부귀영화를 누리려는 인간의 탐욕이 항상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종교적인 이론으로 제시하는 천국이나 극락, 공산주의 사상에서 지향하려던 인민들의 이상국가, 그리고 사이비던지 아니던지 편협한 종교 사상을 내세우며 민중을 선동하여 기존 권력에 항거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말은 열정에 넘치고 비젼을 제시하며 기존에 분노하며 사랑과 이상, 복지를 설파하지만 대부분 결국은 그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과거를 살펴보고 오늘을 반성하며 내일을 준비하는 태도는 미래를 열어가는 현명한 자세일 것이다. 오늘날에 과거처럼 똑같은 오류를 다시 반복한다는 것은 역사를 알지 못함일 것이다. 역사를 소홀히 취급하고 배착하는 민족은 지구상에서 그 흔적조차 사라져갔다. 그러나 역사를 기록으로 남기고 후세인들이 선조들이 기록한 역사를 보며 다시금 불행한 국난을 당하지 않도록 경계함은 당연할 것이다. 그래서 이순신의 <난중일기>와 유성룡의 <징비록>은 그 역사적 가치가 엄청나다.
대충 이렇게 임진년과 정유년의 피비린내나는 조일전쟁(임진왜란)에 대하여 주요 전투 위주로 역사의 시간을 음미해 보았다. 조상들의 역사 보기를 진행하면서 나는 가슴이 답답하고 울분이 솟구치는 것은 나만의 현상은 아닐 것이다. 이 땅에서 태어나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한국 사람이라면 당연할 것이다.
이번 런던 올림픽에서 축구가 영국을 꺽고 4강에 올라가던 그 날 새벽, 축구를 본 사람이라면 태극전사들의 분전에 다같이 열광하였고 기뻐하였을 것이며 다같이 애국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4강에서 브라질에 패배하였을 때는 다같이 안타까웠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 마음 속에는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누구에게나 존재하고 있다는 점이다.
어쩌면 임진왜란은 이순신의 전쟁이었고 이순신의 신화였으며 이순신의 영웅담이었다고 생각된다. 나머지 등장 인물들은 모두가 이순신이라는 역사의 주인공을 돋보이게 만든 조연들에 불과하였다. 지도층이 무능하면 할수록, 사회가 병들어 비리와 부패가 만연하면 할수록, 서민들에 대한 탄압과 고통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러한 고난을 이겨내면서 묵묵히 자신의 직분에 최선을 다하며 불의와 항쟁하며 반듯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반드시 우리 주변에 있을 것이다. 대부분 사람들이 권력에 빌붙어 기생하면서 불법을 저지르며 재산을 축적하고 남을 시기하고 모함하며 사리사욕을 채우고 출세와 부귀영화를 누리기를 원할 것이다. 그러나 이순신은 그러지 않았다. 우리 보통인들이 감히 견디기 힘든 자기 절제와 심적 고통을 이겨내며 주어진 자기 직분에 최선을 다했을 뿐이었다.
이순신은 몰락한 선비 집안의 가난한 집안에서 자랐고 심성이 올바르며 무척 내성적인 성격의 아이였다. 자상한 어머니 밑에서 가정교육을 잘 받았으며 명분을 중요시 했고 불의와는 거리를 멀리했다. 부모를 공경했고 아내와 자식을 사랑했으며 오로지 부모에 대한 효와 나라에 대한 충성을 최고의 미덕으로 삼았던 인물이었다.
부하들에게는 군율을 엄정하게 적용했으며 한편으로 부하들을 지극히 사랑했고 인재를 등용함에 귀천을 가리지 않았다. 모든 것은 나라와 백성, 그리고 부하들의 안위였다. 그리고 전쟁이 일어날 것을 사전에 예견하고 철저한 준비를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정작 전쟁에 임하면서 주도면밀한 작전으로 적을 연달아 격파하였다. 그것은 정찰과 탐색을 게울리 하지 않아 항상 적정에 밝았으며 적의 의도를 읽을 줄 알았다. 작전 지역의 지형과 기후, 물길에 대해 항상 연구하였고 자신의 전투역량을 통합하는 뛰어난 지휘통솔력을 발휘하였다. 그리고 그는 전장에서는 항상 앞장섰으며 진두지휘하였다.
그리고 매사에 항상 고민하고 분석했으며 부하들과 상의하여 의사결정을 하였고 평소 많은 책을 읽었고 지혜를 축적했으며 매사에 항상 고민하고 분석하여 의사결정을 내렸다. 그는 항상 공정한 내용의 기록을 항상 남겼고 사실대로 꾸밈없이 기록하였다.
그리고 적을 칠 때는 단호하였고 자신이 원하는 장소와 시간에 적을 유인하여 격멸하였으며 승리를 쟁취하였다. 절대 불리한 상황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솔선수범하였으며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진심을 갖고 부하를 설득했으며 전장에서 그는 가장 위험한 최전선에서 스스로 앞장섰다.
그는 마지막 전투인 노량 해전에서 정렬하게 전사했다. 어쩌면 자신의 죽음도 가장 절정의 시간을 선택하였는지도 모른다.
우리 역사에서 수많은 영웅호걸들이 등장하였지만 그처럼 모진 고난을 당한 인물로 없을 것이다. 그는 그러한 고난을 극복하고 이겨내고 당시 누구도 쉽게 달성하지 못했던 전승의 신화를 남겼기에 우리 역사에서 더욱 찬연히 빛나는 인물로 기록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우리 역사에서 천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인물이 아닌가 생각된다.
국난을 당하게 되면 반드시 큰 인물이 나오는 법, 우리 주변에 젊은이와 어린 청소년들 중에는 아마 이순신에 버금가는 인물이 어디선가 자라고 있을지 모른다. 넉넉하지는 않으나 중산층 가정에서 성실하게 가정 교육과 학교 교육을 충실히 받으며 항상 부모를 공경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겸손하며 가족과 이웃을 사랑하는 젊은이일 것이다. 또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정직하며 반듯하게 자라고 있을 것이다. 항상 책을 많이 읽고 탐욕을 억제하며 자신의 몸과 마음의 수양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젊은이일 것이다. 격변하는 시대의 흐름을 읽을 줄 알고 다가올 미래에 대한 변화에 적응하며 대비하는 마음과 자세로 묵묵히 자신을 준비하고 있을 지 모른다. 그런 젊은이 중 누군가가 아마 후일 한반도 남북통일을 이루는 주도적인 인물로 이순신의 대를 이를 것을 기대하고 싶다.
선조실록 편찬 경위
<선조실록>은 총 211권 116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567년 7월부터 1608년 2월까지 선조 재위 40년 7개월부터 사실을 편년체로 기록하고 있다.
<선조실록> 편찬 작업은 1609년 7월부터 시작하여 대음해 11월에 완료되었다. 이 일을 위해 처음에는 이항복이 총재관을 맡았으나 뒤에 북인 기자현이 이를 대신하였다. 편찬에 참여한 사람은 총 222인으로 역대 편찬 작업에 투입된 인원 중에서 가장 많은 인원이었다.
실록 전체 221권 중에 선조 25년 3월까지의 기사가 26권인 데 비해 임진왜란 이후의 16년간의 기사가 195권이나 되는 특이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처럼 임진왜란 이전에 기사가 적은 것은 전란으로 인해 춘추관, 승정원 일기 등이 대부분 소실되고 각종 기록이 전화되었기 때문이다.
임란 전의 기사에는 기사가 전혀 기록되지 않은 달도 많다. 임란 이후의 기사는 양은 방대하나 지나치게 조잡한 내용까지 다루고 있어 전의 것에 비해 다소 질이 떨어지는 평가를 받고 있다. 게다가 광해군 당시의 집권당인 북인들에 의해 과장된 내용이 많은 편이었는데, 북인들에 대해서는 칭찬이 과도하고 다른 당 인물에 대해서는 혹평을 가해 사서로서의 균형을 잃고 있다. 후에 서인들이 집권하고 나서 실록을 개정하자는 의견이 대두해 결국 <선조수정실록>을 편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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