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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670 : 조선의 역사 212 (선조실록 77)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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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670 : 조선의 역사 212 (선조실록 77)

두바퀴인생 2012. 8. 7. 04:13

 

 

 

 

 

한국의 역사 670 : 조선의 역사 212 (선조실록 77)

 

 

 

                                              

                                                                                           임진왜란 경과                                                                                                                    

                                                                                                                                                                                   

 

제14대 선조실록(1552~1608년, 재위: 1567년 7월~1608년 2월, 40년 7개월)  

                                                                                                                                                                                                                                    

 

 

 

 

 

 

 

이순신의 리더십

 

 

해전에서 승리하려면 하드웨어적 전투력 요소인 최신 함선, 첨단 무기체계 그리고 소프트웨어적 전투력 요소인 리더의 전략전술과 리더십이 있어야 한다.

임진왜란 해전의 승리는 혁신된 조선 수군과 위대한 수군 지도자 이순신의 리더로서의 역량이 결합하여 일구어낸 합작품이다.

 

이순신이 구사한 대표적인 전쟁승리의 원리가 ‘통합된 세력으로 분산되어 있는 열세한 적을 공격하라’는 이른바 병력 집중의 원리임을 강조하였다. 이순신은 명량해전을 제외한 거의 모든 해전에서 병력 집중을 통해 항상 우세한 상황에서 해전을 벌였지 열세하거나 불리한 해전을 결코 벌이지 않았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이순신의 리더쉽을 한마디로 평가한다면 군대나 사회에서 대중을 이끌어가는 기술로 그 분의 능력을 다라갈 사람이 없다는 점이다. 조건이 좋을 때 리더는 지휘 통제가 쉬울 수는 있으나 열악한 조건에서 대원들 모두가 생사를 알 수 없는 절대적인 불리한 상황에서는 리더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문제가 야기되는 것이 통상이다. 즉 어떤 집단이 위기에 봉착할수록 리더에 따라 집단의 존망이 좌우되기에 리더쉽의 중요성이 부각되기 때문이다.

 

당시 조선의 대표적인 인물로 임금 선조, 도원수 권율, 부산첨사 정발, 돌래부사 송상현, 상주 전투 패장 이일, 탄금대 전투 패장 신립, 한강 방어선 전투 패장 김몀원, 평양성 방어 책임자 윤두수, 정여립의 난을 취조한 정철, 영의정 서애 류성룡, 원균, 이순신 그리고 명나라, 일본의 여러 장수들......

 

그래서 이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오늘날의 우리 사회나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정발이나 송상현은 성을 지키다가 대부분의 부하와 성민들과 같이 전사하였고, 이일은 당시 조선 최고의 전략가라고 자처하던 인물로 상주에서 어이없이 싸우지도 못하고 패배하고 도망쳤다. 신립은 조선 최고의 용장으로 부하들이 건의하던 조령 방어를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쳤다. 신립은 기마전술에 능하여 여진족 정벌에 공을 많이 세운 장수였고 명실공히 조선 기마전술의 대가였다. 그러나 오합지졸이라고 생각하여 전투이탈을 방지할 목적으로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적을 맞아 싸웠으나 일본군의 조총과 대기마 장애물에 그리고 진흙탕 벌판에서 제대로 힘도 발휘하지 못하고 8천 군사와 같이 달천에 몸을 던져 전사했다. 국가의 전략 전술의 부재였고 지휘관들의 무지와 만용, 그리고 치밀하지 못한 대응자세였다. 그래서 그들이 이글엇던 대부분의 군사나 백성들은 어이없이 허망한 개죽음을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장수들도 대부분 군사와 성을 버리고 도망친 것은 물론 군량까지 남겨두고 도암치는 바람에 적에게 이로움까지 주었던 반역자들이었다.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에 이긴 것이 판옥선, 화포 등 함선과 무기의 우월성에 의해 달성된 것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그것은 일부 그런 점도 있으나 가장 중요한 것이 지휘관의 전투의지와 역량이었다고 생각된다. 이순신은 초기부터 패전을 몰랐다. 그는 적의 외침에 대비하여 사전 충분히 대비하여 왔으며 자신이 원하는 장소와 시간에 적을 유인하여 격멸시키는 전술을 구사했고 부하들의 자발적인 전투참여는 물론 전투역량을 충분히 발휘하도록 평소에 훈련시키고 ㄷㄴ령시켰으며 실제 전장에서는 120% 능력을 발휘하도록 유도하여 승리를 쟁취하였던 것이다. 

 

그에 비하여 반면 원균은 딱 한 번의 해전인 칠전량 해전에서 대패하고 말았다. 그것도 이순신이 임진년 이후 수년 동안 애써 길러놓은 400여 척의 함선과 수만 명의 조선 수군을 일본군의 기습을 받고 거북선을 포함한 모든 함선을 몽땅 한꺼번에 수장되거나 불탔으며 군사들은 흩어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조선 수군은 흔적도 없이 사리져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순신은 백의종군에서 복귀한 다음 명량 해전에서 절대 불리한 전력인 단 13척의 함선으로 333척이 넘는 적을 맞아 울돌목이라는 지형과 해류를 이용하여 적을 유인,격멸시키는 전술로 절대절명의 위기에서 조선은 구한 장수였다. 함선이 많고 화포가 적보다 우수하여 승리한 것도 아니다. 절대 불리한 전력으로 적과 싸워 이긴 것이다. 일대 내부적인 갈등이 얼마나 많았을 것인지 상상이 갈 것이다. 부하 수사들이 절대 우세한 적 규모를 보고 겁이나서 뒤로 물러나 싸우기를 거리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배가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뒤로 빠져 있었고 이순신의 배만 적과 혼전 중이었던 점, 그리고 지휘관이 가장 위험한 곳에서 선두에 서서 싸우는 모습을 보고 겨우 달려온 정도로 위태로운 순간이었던 것이다. 아마 다른 장수들이었다면 싸우지도 않고 육군에 합류하기를 청원하였을 것이다. 당시 선조나 조정이나 권율까지도 수군을 육군에 통합하려 했으니까. 이런 여러 관점에서 우리는 이순신의 뛰어난 리더쉽을 재발견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해전에서의 승패에 장수가 지니는 리더십 역량이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 지는 이순신과 원균의 비교에서 잘 드러난다. 똑 같은 함선과 무기체계로 무장한 조선수군을 지휘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원균은 칠천량에서 결정적이고 치명적인 패배를 당했는데 반해 이순신은 임진년 옥포해전부터 순국하는 노량해전까지 20여회의 해전을 모두 승리로 이끌었다는 사실은 장수의 리더십 역량이 해전 승패에 얼마나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지를 잘 보여 준다.

    

 

 

                                                

                                        

 

 

                                     

 

 

                                               

 

 

  

 

 

                                                  

 

 

                                  

 

                               

  

 

 

임진왜란에 얽힌 이야기들......

 

 

원균의 최후 ; 원균은 죽지 않았다?

 

임진왜란에 대한 소설들을 보면 김탁환의 <불멸의 이순신>과 고정욱의 <원균>에서는 원균은 마지막까지 칼을 휘두르다가 장렬히 전사한다. 이들 소설은 칠천량 해전을 비장하게 그려 원균을 미화하는 등 문제점이 많은 소설이므로 신뢰할 만한 게 못 된다. 월탄 박종화 선생의 <임진왜란>을 보면 원균은 살려달라고 싹싹 빌다가 최후를 맞이하고 이우혁씨의 역사판타지 <왜란종결자>에서는 원균은 마지막에야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달으면서 죽는다. 비장하냐, 비겁하냐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죽는다는 건 마찬가지이다. 


몇년 전 인터넷에 전쟁소설을 전문으로 집필하던 김경진씨, 이글루에도 블로그가 있는 윤민혁님 등의 공저로 인터넷으로 연재되다가 출간된 소설 <임진왜란>에서는 이전의 소설이나 학계 연구와는 다른 주장을 보인다. 원균은 죽지 않고 잠적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물론 구체적인 묘사는 소설의 허구성을 살린 것이지만, 원균이 전사하지 않았다는 주장 자체는 근거를 찾을 수 있다.

먼저 흔히 알려진 원균 전사에 대한 기록부터 알아보자. 그 문제의 기록은 <선조실록>에 실린 선전관 김식의 장계이다. 김식은 칠천량 해전을 원균과 동승해

 

참관했으며, 그
역시 도망쳤다.

 선전관 김식(金軾)이 한산(閑山)의 사정을 탐지하고 돌아와서 입계하였다.

 

  “15일 밤 2경에 왜선 5∼6척이 불의에 내습하여 불을 질러 우리 나라 전선 4척이 전소 침몰되자 우리 나라 제장들이 창졸간에 병선을 동원하여 어렵게 진을 쳤는데 닭이 울 무렵에는 헤일 수 없이 수많은 왜선이 몰려 와서 서너 겹으로 에워싸고 형도(刑島) 등 여러 섬에도 끝없이 가득 깔렸습니다. 우리의 주사(舟師)는 한편으로 싸우면서 한편으로 후퇴하였으나 도저히 대적할 수 없어 할 수 없이 고성 지역 추원포(秋原浦)로 후퇴하여 주둔하였는데, 적세가 하늘을 찌를 듯하여 마침내 우리 나라 전선은 모두 불에 타서 침몰되었고 제장과 군졸들도 불에 타거나 물에 빠져 모두 죽었습니다. 신은 통제사 원균(元均) 및 순천 부사 우치적(禹致績)과 간신히 탈출하여 상륙했는데, 원균은 늙어서 행보하지 못하여 맨몸으로 칼을 잡고 소나무 밑에 앉아 있었습니다. 신이 달아나면서 일면 돌아보니 왜노 6∼7명이 이미 칼을 휘두르며 원균에게 달려들었는데 그 뒤로 원균의 생사를 자세히 알 수 없었습니다. 경상 우수사 배설(裴楔)과 옥포(玉浦)·안골(安骨)의 만호(萬戶) 등은 간신히 목숨만 보전하였고, 많은 배들은 불에 타서 불꽃이 하늘을 덮었으며, 무수한 왜선들이 한산도로 향하였습니다.”

 

이것은 조정에 가장 먼저 접한 칠천량 해전에 대한 보고로, 흔히 알려진 칠천량 해전의 양상과 원균의 전사도 여기에 근거를 두고 있다. 김식은 늙어서 원균이 행보하지 못 했다고는 하는데, 나이도 나이지만 비만의 영향도 클 것이다. <난중잡록>에서는 원균은 체구가 비대하고 건장하여 한 끼에 밥 한 말, 생선 50마리, 닭과 꿩 3ㆍ4마리를 먹어서 평상시에도 배가 무거워서 행보를 잘 못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원균은 아마도 당시 장수들 중 가장 위대(胃大)한 장수가 아니었을까? 원균이 빨리 뛰지 못한 것은 이런 비만의 영향도 크다. 그래서 전라도 곡성의 생원 오천뢰(吳天賚)는 칠천량 해전 후 이런 시를 지어 원균을 조롱하였다.


  한산도는 나라의 남문인데 / 閑山一島國南門
  무슨 일로 조정에서 장수를 자주 바꾸었나 / 底事朝廷易將頻
  처음부터 원균이 나라를 저버린 것이 아니라 / 不是元均初負國
  원균의 배가 원균을 저버렸네 / 元均之腹負元均

 

 

그러나 김식 역시 재빨리 도망친 인물로, 그의 보고는 전투(?)의 양상을 제대로 담지 못 하였다. 그래서 전회에 설명한 바와 같이 조정도 처음에는 김식의 보고를 믿고 원균을 비롯한 수군 장수들이 다 죽은 줄 알았다. 하지만 얼마 후 죽은 줄 안 수군 장수들이 하나 둘 살아서 나타나고, 전투에 대한 제대로 된 보고를 접하면서 상황을 파악하게 되고, 김식도 얼마 안 가서 파직 당한다. 그런 보고이니 원균의 죽음도 정확하지 않다. 게다가 김식조차도 ‘그 뒤로 원균의 생사를 자세히 알 수 없었습니다.’라고 하였지, 죽었다는 소리는 안 했다. 즉, 김식의 목격담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원균의 죽음은 직접 확인하지 못 했다고 스스로 인정한 것이다.

물론 이런 것만으로 원균의 생존을 주장하기에는 부족하다. 하지만 나중에 다루게 될 이순신 은둔설의 증거로 제시되는 것들은 모두 정황증거나 추측에 불과한 것과는 달리, 원균의 경우는 살아있는 원균에 대한 목격담이 확실히 남아있다. 그것도 정사인 실록에 말이다. 다음의 권율이 군관 최영길의 보고를 받고 올린 장계를 보자.

 7월 21일에 성첩(成貼)한 도원수 권율의 서장에 아뢰기를,
  “신의 군관인 최영길(崔永吉)이 한산도에서 지금에야 비로소 나왔는데 그가 말하기를 ‘원균(元均)이 사지를 벗어나 진주로 향하면서 말하기를, 「사량(蛇梁)에 도착한 대선(大船) 18척과 전라선(全羅船) 20척은 본도에 산재해 있고, 한산에 머물러 있던 군민(軍民)·남녀·군기(軍器)와 여러 곳에서 모여든 잡선(雜船) 등을 남김없이 창선도(昌善島)에 집합시켜 놓았으며, 군량 1만여 석은 일시에 운반하지 못하여 덜어내어 불태웠고, 격군(格軍)은 도망하다 패배한 배는 모두 육지 가까운 곳에 정박시켰으므로 사망자는 많지 않았다.」고 하였다.’ 하였습니다. 최영길을 곧이어 올려보내겠습니다. 이순신(李舜臣)에게 흩어져 도망한 배를 수습하도록 사량으로 들여보내소서.” 하였는데, 비변사에 계하(啓下)하였다.

 자. 이 기록은 다음의 네 가지 중 하나로 해석이 가능하다.

 첫째, 최영길이 거짓말을 했다.
 둘째, 거짓말을 하려한 건 아니지만, 잘못 보고 착각을 하고 보고했다.
 셋째, 최영길은 귀신을 만났다.
 넷째, 원균은 그 때까지 죽지 않았고, 그래서 최영길과 만났다.

 최영길이 거짓말을 한 거면 나중에라도 들켜 처벌받아야 할 인인데, 이에 대한 별다른 기록은 없다. 그리고 칠천량 해전, 아니 수군의 춘원포 해산때는 없었지만, 그 이전의 출전에서는 권율의 명령으로 원균과 동승하여 전투를 참관하였다. 당연히 원균의 얼굴을 잘 안다. 그러니 그 원균을 못 알아 볼 리도 없으며, 더구나 구체적인 대화까지 나눴으니 최영길이 다른 사람을 원균으로 착각했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 최영길이 귀신을 보는 눈을 가졌는 지는 사료검증이나 현대 과학으로도 밝힐 수 없다. 결국 남는 건 네번째 가능성. 

이후에 이루어진 칠천량 해전에 대한 조사에서도 원균은 살아있는 것으로 보고 되고, 조정에서도 이를 받아들인다.

도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이 치계하기를,
  “주사(舟師)의 각 장수들에 대한 생사와 거처는 전에 태안 군수 이광영(李光英)이 진술한 바에 의거하여 이미 장계를 올렸는데, 뒤에 다시 조사해 본 결과 전후 말한 것이 각기 달랐으므로 권율(權慄)에게 전령하여 무사를 각처로 파견하여 사실을 확실히 조사케 한 후에 계문(啓聞)하려 합니다.”

 

임진난 이후 분궤(奔潰)한 장관(將官)들을 한 사람도 군법에 의해 치죄하지 않았으므로 오늘날에 와서는 관습이 되어 보통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이번의 주사들은 처음부터 서로 힘을 겨루며 싸우다가 패멸된 것이 아니라 살아 남은 자나 죽은 자나 모두 달아나기에 바빴던 사람들입니다. 중론을 참고해 보니 힘을 다하여 싸우다가 바다 한가운데에서 전사한 자는 조방장 김완(金浣)뿐이었습니다.(하지만 김완은 포로로 잡혔을 뿐 전사하진 않았다. 물론 육지로 튄 누구와 달리 용감히 싸운 건 인정해야 하지만) 많은 장수들에게 모두 군법을 시행할 수 없다 해도 원균(元均)은 주장(主將)이었으니 군사를 상실한 군율로 처단해야 합니다....”
(중략)

 

상이 이르기를,
   “아뢴 대로 윤허한다. 다만 원균(元均)을 죽이려 할 경우 균이 마음 속으로 복종하지 않을 듯하니, 헤아려서 처리하라.”
  하였다.

 

비변사가 회계하기를,
  “원균이 군사를 잃은 죄는 참으로 용서하기 어려우나 그간에 잘못한 죄를 오로지 원균에게만 책임지울 수는 없을 듯하니, 우선 원균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의논하여 처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아뢴 대로 윤허하였다.

자, 이원익은 “ 원균(元均)은 주장(主將)이었으니 군사를 상실한 군율로 처단해야 합니다.”라고 하고 있다. 전사한 장수를 부관참시까지 하는 일은 없으니 이는 원균이 살아 있다는 소리이다. 선조 역시 분명히 “원균(元均)을 죽이려 할 경우”라고 하고 있다. 이미 죽은 사람인 걸로 안다면 “죽이려 할 경우”라고 말할 리가 없다. 또한 비변사도 원균이 잠적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지, 죽었다고 판단하지는 않는다. 이원익의 조사결과에서도 원균의 전사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고, 원균이 살아있는 걸 본 확실한 목격담이 남아있으니 이런 결론이 내려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듬해인 1598년에도 패배한 수군 장수에 대한 징계 논의가 있으면서 다시 원균의 처벌문제가 논의된다.

 상이 이르기를,
  “지난해 한산(閑山) 싸움의 패배에 있어 수군(水軍) 제장들에 대하여 즉시 공(功)과 죄(罪)를 가려내어 법대로 처리했어야 했는데도, 아직까지 고식적인 습관에만 젖어 위엄을 밝히는 교훈을 보여줄 생각을 않고 있다....(중략)”  하였는데,

 

비변사가 아뢰기를,
  “원균(元均)이 주장(主將)으로서 절제(節制)를 제대로 하지 못하여 적들로 하여금 불의에 기습을 감행하도록 하여 전군(全軍)이 함몰되게 하였으니 죄는 모두 주장에게 있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 아래 각 장사들의 공죄(功罪)에 대해서도 신상 필벌을 행하여 군기(軍紀)를 바로잡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원균 한 사람에게만 핑계대지 말라.”  하였다.

 

【이산해(李山海)와 윤두수(尹斗壽)가 그렇게 아뢰게 한 것이다.】
  【사신은 논한다. 한산의 패배에 대하여 원균은 책형(쾛刑)을 받아야 하고 다른 장졸(將卒)들은 모두 죄가 없다. 왜냐하면 원균이라는 사람은 원래 거칠고 사나운 하나의 무지한 위인으로서 당초 이순신(李舜臣)과 공로 다툼을 하면서 백방으로 상대를 모함하여 결국 이순신을 몰아내고 자신이 그 자리에 앉았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일격에 적을 섬멸할 듯 큰소리를 쳤으나, 지혜가 고갈되어 군사가 패하자 배를 버리고 뭍으로 올라와 사졸들이 모두 어육(魚肉)이 되게 만들었으니, 그때 그 죄를 누가 책임져야 할 것인가. 한산에서 한 번 패하자 뒤이어 호남(湖南)이 함몰되었고, 호남이 함몰되고서는 나랏일이 다시 어찌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시사를 목도하건대 가슴이 찢어지고 뼈가 녹으려 한다.】

여기서도 임금을 비롯하여 비변사, 사초를 적고 있던 사관까지도 여전히 원균은 살아있다는 가정 하에서 말을 하고 있다. 

이상의 <선조실록>기록을 살펴보면 전쟁이 끝날 때까지, 조정에서는 원균이 살아있다고 믿었다. 또한 유성룡도 <징비록>에서 “어떤 사람은 그(원균)가 왜적에게 죽음을 당한 바 되었다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그가 도망하여 죽음을 면하였다고도 말하는데, 그 사실을 확실하게 알 수는 없었다.” 라고 기록하여 원균이 죽지 않았을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다가 원균의 전사가 공식적으로 인정되는 건 전쟁이 끝나고 1601년의 일이다. 1601년 1월 17, 선조는 여전히 원균을 위한 변명을 멈추지 않으니 이덕형과 국방에 대한 논의를 하다가 원균 얘기를 꺼내면서 “《진서(陣書)》에 ‘대장(大將)이 죽으면 차장(次將)을 참수한다.’ 하였는데, 원균이 이미 싸움에 패하여 죽었으니 그 휘하들을 비록 다 죽이지는 못할지라도 사실을 밝혀 군율에 의하여 처리해야 옳다. 지금 원균의 후인(後人)으로서 고관 대작(高官大爵)이 된 자가 많은데도 그 싸움에 패한 죄를 유독 원균에만 돌린다면 원균의 본심이 후세에 밝혀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구천에 있는 그의 넋도 어찌 자기 죄를 승복하여 억울하게 여김이 없겠는가.”라고 말하였는데, 여기에서의 선조의 발언이 <선조실록>에서 나오는 원균의 전사를 최초로 공식적으로 인정한 대목이다. 

그 이전 연도의 실록에서도 사신론에서 원균이 전사했다는 말이 나오긴 하지만, 그건 사초의 기록 당시가 아니라 <선조실록> 편찬 과정에서 덧붙여진 사신론으로 보인다. 이를 제외하면 이 1601년 1월 17일의 기록이 원균 전사를 처음으로 인정한 기록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원균의 시체를 봤다거나 원균의 죽음을 목격했다는 증인이 나온 것도 아니다. 그냥 전사한 걸로 친 것이다. 왜? 순전히 자신의 실책 감추려는 선조의 농간 때문이었다. 실제 1601년 1월 17일의 이 대화에서도 선조는 원균을 용감하고 슬기로운 자라고 칭송하고 있다. 

다만 <연려실기술> 같은 후대 사료는 그렇다 치더라도 <난중잡록> 같은 당대 기록에서도 원균이 전사한 것으로 나오고, 1600년에 나온 소설 <달천몽유록>에서도 원균 귀신이 나온 걸 보면 민간에서는 그보다 일찍 원균이 전사한 걸로 알고 있었을 수도 있다.

그리고 현재 학계의 정설도 '원균은 전사했다'이다. 하지만 꽤 유명한 이순신 자살설이나 생존설의 근거는 정황과 추측 뿐인데 비하자만, 원균생존설은 보다 신빙성 높은 사료를 근거로 하니 두 주장은 차원이 다르다 하겠다. 

어쨋거나 원균은 이렇게 역사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두 번(임진난 초기, 칠전량 해전)이나 수군을 해산시키고도 그 책임을 지지 않은 자가 용감한 맹장소리를 듣기도 하니, 그 때문에 고통을 겪은 조선인들이 본다면 '가슴이 찢어지고 뼈가 녹으려'  할 것이다. 죽었건 잠적했건 그가 초래한 황당한 사건 때문에 조선은 엄청난 위기에 노출되었다. 그리고 이 위기를 수습할 사람은 오직 이순신 한 사람 뿐이었다. 

 

 

                                          

 

 

 

이순신의 자살설, 생존설(은둔설)

 

이순신의 죽음에 대하여 유언문제 정도가 아니라 다른 견해도 있다. 이순신은 노량 해전에서 전사하지 않고 스스로 죽었다는 자살설, 그리고 노량해전에서 죽은 게 아니라 전사를 위장하고 어디론가 숨었다는 은둔설  등이 전해지고 있다. 어느 드라마는 자살설을 반영한 듯한 결말을 보여주기도 했고, 어떤 소설에서는 은둔설이 나오기도 했다.

자살설과 은둔설은 그 내용은 다르지만 그 근거로서의 배경은 일치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이순신이 전쟁이 끝난 후 영웅으로 대우받는 게 아니라 선조에 의하여 역적으로 처형당했을 것이며, 이순신은 역적으로 죽느니 차라리 명예를 지키기 위해, 혹은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자살 혹은 은둔을 선택하였다는 것이 그 주장이다.

물론 선조 때문에 이순신이 죽을 고비도 넘기도 고생도 많이 했다. 이순신의 승전이 거듭될 수록 선조는 이순신에 대하 시기심과 질투심이 점점 증가하고 있었다. 조정 신료들과 백성들의 이순신에 대한 흠모가 높아질수록 선조는 불안해하고 있었다. 자신이 이순신에게 무고한 징벌과 탄압을 가했기에 수군을 이용한 반정, 즉 이순신이 수군을 이글고 서해와 한강을 거슬러 올라와서 도성을 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서도 불안해했다. 선조가 이순신을 시기한 이유야 전회에서도 본, 이순신의 전사 소식을 들은 백성들이 보여준 광경만 봐도 알만 하지 않겠는가?

이순신 자살설이나 은둔설에서 자주 언급되는 인물이 의병장 김덕령이다. 김덕령은 1594년 1월 담양에서 3천의 의병을 거느리고 봉기, 영남까지 진출하였으며 곽재우와 함께 장문포 해전에도 참전한 인물이다. 당시에는 일본군의 소극적 대응 덕분에 별 성과는 거두지 못하였지만, 선조는 한 때 김덕령에게 각도 의병을 소속시킬 정도로 그를 신임했다. 하지만 비극은 뜻밖의 곳에서 왔다. 충청도에서 반란을 일으킨 이몽학이 자신이 김덕룡, 권율, 이덕형과 내통하고 있다고 거짓 선전하다가 진압 당하였다. 반란 진압을 위해 출동한 김덕령은 중도에 진압 소식을 듣고 돌아왔는데, 결국 이몽학의 난에 연루되었다는 명분으로 체포당하여 모진 고문 끝에 서른 살이라는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김덕령도 억울하게 죽었는데 이순신이 무사할 리가 없다. 이미 정유년에 있지도 않은 죄가 날조되어 죽을 고비를 넘긴 이순신이다. 그래서 전쟁 후에도 누명을 쓰고 죽을 수도 있다. 이것이 자살설과 은둔설의 공통적인 설명이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 이순신이 자살이나 은둔을 했다는 물증은 될 수 없다. 자살설이니 은둔설에 다른 근거는 있는가?

먼저 자살설을 살펴보자.

 

자살설은 이순신이 전투 중 갑옷을 벗어 일부러 적병의 저격에 노출되었다는 주장인데, 이를 최초로 제기한 건은 숙종 대의 문인 이민서였다. 이민서는 김덕령의 전기에서 그의 죽음을 언급하면서 이순신도 ‘한참 싸울 적에 갑옷을 벗고 스스로 적탄에 맞아 죽었다(方戰 免甲自中丸以死)’라고 적고 있다. 자살설은 현대에 이르러 더욱 퍼져서 노량 해전이 있던 그 날 유성룡이 실각한 점, 이순신이 노량 해전 이전 ‘오직 한번 죽는 일만 남았다.’ 라는 식의 말을 했다는 걸 근거로 제시한다.

하지만 이 근거들은 타당성이 부족하다. 먼저 자살을 하기 위해 적의 총탄을 맞으려 한다는 건 자살 치고 너무 소극적인 방법이다. 적병이 이순신을 반드시 맞춘다는 보장도 없고, 맞아도 반드시 죽는다는 보장도 없다. 실제로 사천 해전에서 조총에 맞았으나 부상에 그친 경험을 한 이순신이고, 노량 해전에서도 류형은 탄환을 여섯 발 맞고도 분전했다고까지 하니까. 아니면 이순신을 죽이기 전에 적군이 먼저 조선군의 공격으로 죽어버리거나 날라 오는 총탄을 충성스럽고 용감하지만 눈치는 없는 부하 장수나 병졸이 “조심 하십시오, 통상!”이라 외치면서 몸을 날려 자기가 대신 맞는다면 자살 계획은 실패다. 명예를 지키려고 죽겠다는 사람이 과연 이렇게 불확실한 방법을 선택할까?

더군다나 ‘"이순신이 면주(免胄:투구를 벗다)하고 싸웠다"의 의미는 정말 갑옷을 벗는 게 아니라 중국 진나라 장수 선진의 고사에서 유래된 것으로 그만큼 용감히 싸운다는 은유적 표현이지 문자 그대로 해석할 말이 아니니, 역시 이것이 자살을 의미한다고 볼 수는 없다.

노량 해전 전에 ‘오직 한번 죽는 일만 남았다.’라고 말을 했다 하더라도 자살설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 무인으로서 전투에 임하면서 그런 말을 한다는 건 역시 목숨을 바쳐 싸우겠다는 의미이지, 자살의 다짐이 되지는 않는다.

 

군인들이 “이 한 목숨 바쳐 조국을 수호하겠습니다.”라 말하는 것이 “조국수호를 위해 자살하겠습니다.”라는 의미가 아니고 어느 이산가족이 “동생만 만나면 죽어도 여한이 없다.”라고 말한다고 그것이 “동생을 만나면 자살하겠다.”라는 의미가 아니지 않는가?. 이렇듯 자살설은 지나친 억측으로 만들어졌지 정작 직접적인 증거를 제시하지는 못 한다.

은둔설은 이분의 <행록>에 이순신 전사 광경을 그 근거로 삼고 있다. 이순신 전사 당시 주위에는 아들 이회와 조카 이완뿐이고 송희립 등은 이 사실을 몰랐다고 기록되었는데, 20대 초반으로 실전 경험도 부족한 이회와 이완이 전투를 지휘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으므로 이는 이순신의 은둔을 감추려는 장치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일부 사료만을 보고 속단한 결과이다. 이분의 <행록>이 이순신을 연구할 사료이기는 하나 이 역시 가문을 높이는 일반적인 행장 집필 방식에서 자유롭지는 않아 이회와 이완을 추켜세울 수 있다. 따라서 다른 사료와의 비교가 필요하다.

도원수 권율의 보고서에는 이덕형의 연락관 자격으로 좌선에 탑승한 손문욱이 지휘권을 인수하였다는 기록 있다. 그러나 이듬해 초 형조정랑 윤양이 수군을 돌아보고 온 후 한 보고에서는  ‘노량(露梁)의 전공은 모두 이순신이 힘써 싸워 이룬 것으로서 불행히 탄환을 맞자 군관 송희립(宋希立) 등 30여 인이 상인(喪人)의 입을 막아 곡성(哭聲)을 내지 않고 재촉하여 생시나 다름없이 영각(令角)을 불어 모든 배가 주장(主將)의 죽음을 알지 못하게 함으로써 승세를 이루었다. 저 손문욱(孫文彧)은 하찮은 졸개로 우연히 한 배에 탔다가 자기의 공으로 가로챘으므로 온 군사의 마음이 모두 분격해 한다.’라고 하여 손문욱이 공을 가로챘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 보고에서는 분명 송희립 등의 다른 인물들이 이순신의 전사를 알고 있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다른 기록에서도 이순신 전사 후 송희립이 지휘를 하였다고 나오니, 결국 이순신의 전사 당시 그 광경을 목격한 것은 이회와 이완이지만, 실질적인 임무대행은 이순신을 오랫동안 모셔서 해전 경험이 풍부한 송희립이 부상에도 불구하고 충실히 수행하였다고 본다면 훨씬 합리적이다. 따라서 이완과 이회만이 이순신의 죽음 알았다는 <행록>의 기록 자체가 잘못된 것이고 이를 근거로 은둔설을 주장하는 것도 무리이다.

< 이순신은 전사하지 않았다>, <이순신 자서전> 등의 저자 남천우는 은둔설을 주장하면서 노량 해전이 야간전인 것도 은둔을 위해서였다고 하는데, 노량해전은 순천에 고립된 고니시를 구원하려는 병력을 막기 위하여 급작스레 이루어진 전투였기에 어쩔 수 없이 야간전이 된 것이지, 이순신이 의도한 바는 아니었다는 점에서 타당성이 없다.

이순신의 장례가 이순신 사후 80일 만에 치러진 점을 은둔의 시간 벌기로 보고 15년 후 이순신의 무덤을 이장한 시기가 이순신의 진짜 사망시기라고 은둔설에서는 주장한다. 장례를 그렇게 미룰 이유도 없고, 국가가 지원하여 성대히 장례를 치렀는데 굳이 이장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역시 증거가 되지는 못 한다. 과거의 장례기간은 황제가 7개월, 제후가 5개월, 사대부는 3개월이었다. 여기에 덧붙여 국가가 지원한 장례와 관련된 기록을 한번 보자.


선조 107권, 31년( 1598 무술 / 명 만력(萬曆) 26년) 12월 11일 임술 7번째기사

예조가 이순신의 장례문제에 대해 아뢰다

예조가 아뢰기를,

“아무 일로 전교하셨습니다. 등 총병(鄧摠兵)의 치제관(致祭官)은 이미 차출하였으니 곧 내려보낼 것입니다. 그러나 듣건대 이순신(李舜臣)의 상구(喪柩)가 이미 전사한 곳에서 출발하여 아산(牙山)의 장지(葬地)에 도착할 예정으로, 등 총병의 상구와 한 곳에 있지 않다고 합니다. 치제하는 차례에 있어 서로 구애되지 않을 듯하므로 본조의 낭청을 먼저 보냈습니다. 이축(李軸)을 오늘 내일 사이에 재촉해 내려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중국 장수를 먼저 제사하고 다음에 우리 나라 장수를 제사하는 것이 예의상 옳을 것이다. 상구가 한 곳에 있다 하여 선후의 절차를 따지고, 각기 다른 곳에 있다 하여 중국인이 우리가 하는 일을 모를 것이라고 여겨 우리 나라 장수를 먼저 제사하려고 하는 것은 도리상 온당치 못한 듯싶다. 등 총병에 대한 치제관을 속히 먼저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노량 해전을 11월 19일, 이순신의 상구가 아산에 도착할 예정이라는 보고는 12월 11일이다. 20여일 정도 걸렸다. 그런데 이순신 장구의 위치를 전화나 팩스, 이메일로 보고했을 리가 없는 이상 이순신의 장구가 아산을 향해 떠난 것은 남해안과 한양 사이의 이동시간을 감안할 때 12월 11일로부터 적어도 4~5일전, 게다가 파발마가 달려가는 게 아니라 관을 이동시키는 것이며 이순신의 관을 실은 수레를 백성들이 붙잡고 울부짖었다는 기록을 감안하면 그 속도는 더 느려졌을 점을 감안하면, 은둔을 위한 시간벌기를 할 여유는 그리 충분치 않다.

장구는 더미였고, 장구를 옮기고도 장례를 늦게 치렀으니 은둔이 맞다고 할 수도 있다. 자 그렇다면 윗 기록의 뒷부분을 보자. 선조는 중국 장수 제사가 먼저라고 말하고 있다. 즉, '등자룡부터 제사지내고 이순신 제사 지내도 된다' 라는 소리인데, 이는 이순신의 장례가 늦어진거라 하더라도 그건 이순신 가족이 아니라 국왕의 뜻이었다는 걸 보여주는 것이다. 위에 제시한 사대부의 제사 기간과 비교하면 그렇게 많이 늦어진 것도 아니지만.

이장 문제 역시 조선 전기에 흔한 건 아니었지만 임진왜란 이후로는 일본군에 의한 도굴 사건을 경험하면서 풍수지리 사상의 영향으로 많이 이루어지고, 이순신 역시 풍수지리나 여타의 다른 이유로 이장이 이루어질 수 있지, 있을 수 없는 일이 있었던 건 아니다. 그리고 은둔론자들은 이순신의 이장이 덕수 이씨 족보에는 기록되지 않은 점을 은둔의 근거로 드는데, 이순신이 정말 이장 당시에 죽었다면 그것이야말로 족보에 기록되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노량 해전 직후 명나라 수군 지휘관 진린 등이 이순신의 시체를 보았고, 서로군에 있던 이덕형 역시 시체를 확인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나 의심 많은 선조가 이순신의 시체도 확인하지 않았을까? 이미 원균이 칠천량 해전 후 그 누구도 원균의 시체를 보지 못하였기에 살아있다고 판단하고 그 처벌까지 논의를 한 적이 있는데도? 그리고 원균 생존론은 그 목격담이 정사인 <선조실록>에 전하지만, 이순신 은둔설은 실록은 물론 야사에도 목격담은 없고 그저 몇 가지 추측만이 있다는 점에서 근거는 희박하다.

 

 

                             



자살설과 은둔설은 공통적으로 이순신이 노량 해전을 마지막 전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점을 기본으로 한다. 물론 결과적으로 노량 해전은 마지막 전투가 맞다. 하지만 전투 시작 전 시점으로 살펴보면 여전히 고니시는 순천에 머물고, 경상도 해안에는 일본군이 여전히 몰려 있다. 그렇게 순천의 고니시군을 잘 봉쇄하고 있는데, 고니시가 진린에게 뇌물을 주고 보낸 구원요청으로 적 함대가 접근하니 어쩔 수 없이 봉쇄를 풀고 한 전투가 노량해전이다. 처음부터 마지막으로 예정하고 있던 전투가 아니다.

만일 이순신이 살아있었다면 복수를 위해서도, 재침 방지를 위해서도 이들을 그냥 돌려보낼 가능성이 높지 않다. 하지만 이순신이 노량 해전을 마지막으로 죽음으로 전투를 이어갈 사람이 더는 없어서 일본군은 무사히 고국으로 돌아갔다. 결국 이순신이 죽었기에 노량해전이 마지막 전투가 된 것이지, 노량해전이 마지막 전투라서 이순신이 죽거나 죽음을 위장한 것이 아니다.

또한 자살설과 은둔설은 이순신이 수군 함대를 자살 도구나 은둔 도구로 사용했다는 의미가 된다.  이는 곧 이순신이 자신의 개인적 목적을 위해 수군을 위험에 노출시킨 무책임한 지휘관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이순신은 전쟁 기간 내내 자신이 위험을 무릎 쓰는 일은 있어도 자기 목적을 위해 부하들을 희생시키는 일은 없었다. 그런 이순신이 함대를 자살도구나 은둔도구로 사용했을까? 결국 별다른 증거도 없는 자살설과 은둔설은 이순신을 폄하하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된다.

 

 

 

 

이순신 죽음의 역사적 의의

어쨌던, 임진왜란이라는 국난을 당하여 한 시대를 살아간 구국의 영웅 이순신은 이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갔다. 그의 죽음은 군인으로서 가장 극적인 장소와 시간에 이루어졌으며 애국심이 충일한 군인이라면 누구나 그런 죽음을 희망할 것이다. 만약 그가 죽지 않고 살아있었다면 어찌되었을까? 아마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그의 죽음은 우리들에게 너무나도 아쉽지만 당시 그의 입장에서 가장 적절한 시간과 장소에서 죽음을 맞이하므로써 역사에 더욱 빛나는 군인으로 남게 된 것이라라. 그래서 자살설과 은둔설이 나온게 아니었나 판단된다.

 

영화, 연극, 드라마에서 우리는 주인공의 말로를 대부분 해피앤딩으로 기대하거나 그것을 바라고 잇다. 특히 주인공이 많은 고난과 고통을 받고 주변의 멸시와 박대를 받으면서도 오로지 자신에게 주어진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였으나 적의 계략인줄 뻔히 알면서도 부산포 공격 명령을 내려 수군 전체를 괴멸당할 상황을 직시하고 당당하게 거절한 것이 명령불복종이라는 선조의 진노를 사고 잡혀가서 죽음 직전까지 몰리고 결국 백의종군이라는 수모를 당하면서도 꿋꿋하게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묵묵히 노고를 거부하지 않았던 장군. 그러한 처절한 억울함을 이겨내고 다시 등용되자 수군이 괴멸되고 남은 전선 13척으로 절대 불리한 상황에서도 기적같은 승리를 일궈냈기에 우리는 더욱 감동을 받게되었던 것이다.

 

그는 한 시대의 국난을 극복한 인물로 주인공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 전투 노량 해전에서 정렬하게 전사하고 만다. 원균, 선조 등 뛰어난 조연들이 있었기에 이순신은 더욱 빛나게 된 것이며 신출귀몰하고 주도면밀한 그의 전략. 전술은 연전연승을 거듭하였고, 특히 옥포 해전의 승리는 조선의 조정에게는 희망을, 백성들게게는 감동을  주었고 승첩 소식에 동기부여된 의병들이 전국 각지에서 불꽃처럼 일어나게 된 것이었다. 계속된 승첩으로 일본군의 서해 진출을 좌절시켜 해상보급로를 차단함으로서 전쟁의 변곡점을 가져다주기도 한 장군. 그래서 주인공 이순신은 조선을 구한 불세출의 영웅이 된 것이다.

 

이순신이 옥포 해전, 한산도 해전, 명량 해전, 사천 해전에서 죽음을 맞이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냥 몇 번의 해전에서 승리한 장수 정도로 폄하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지 않고 살아남아 왜적이 물러가는 마지막까지 단 한 명의 왜적이라도 괴멸시키려는 불타는 증오심으로 가득하였던 인물이었다.  그는 수많은 백성과 수군 병사들이 당한 고통과 억울한 죽음에 통분하였고 누구도 쉽사리 달성하지 못하던 전쟁에서의 승리, 항상 그것에 대한 복수의 일념에 불타고 있었고, 이러한 그의 복수심은 그가 누구보다도 깊은 애정으로 그들을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역사의 관망자들은 선조와 조정, 그리고 원균이 백성과 수군을 버리고 도망치기에 바빴던 것처럼 조연들이 무능하고 무지하고 바보스러울수록 주연인 주인공에 대한 기대치를 높게 기대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조선 조정과 백성들의 통분을 대신하여 죽음을 무릎쓰고 왜적을 격멸하는 데 골몰하였으며 주도 면밀한 작전으로 그 통분을 풀어주는 역활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한 그가 마지막 전투인 노량 해전에서 장렬하게 전사함으로써 그의 군인으로써의 진가는 더욱 빛을 발하게 되었고 최고의 순간에 마지막 죽음을 맞이하였다는 점에 그의 죽음에 대한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살아남은 전쟁 영웅들의 비참한 최후

 

역사를 보면 전쟁의 영웅이 살아남아서  마지막 그의 인생여정이 순탄하지 못했던 과거 역사를 떠올리게 만든다.

 

기원전 200~300년 경 고대 시대 신생국 로마와 당시 지중해 최강대국 카르타고와 벌어진 '포에니 전쟁'에 대한 이야기다.  당시 에스파냐 식민지 총독이었던 한니발은 카르타고 용병 9만을 이끌고 로마를 타도하기 위해 론강을 지나고 밀림을 지나서 알프스를 넘어 갔다. 병력은 4만으로 줄었고 다시 주변 갈리아족을 징집하여 5만 용병 군대를 편성했다. 그후 그는 16년 동안 이탈리아 반도를 종횡으로 휩쓸며 로마군을 격파하였고, 특히 유명한 '칸내 전투'에서는 로마군 7만을 상대로 벌인 전투에서 새로운 전술인 양익포위 전술로 로마군을 전멸시키는 대전과를 세우는 등 로마인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 되었던 위대한 정복자였다.

 

그러나 젊은 로마 장수 스키피오가 북아프리카 카르타고 본국을 침공하자 본국의 호출로 급거 귀국하여 5만 용병군대를 재편하여 4만 로마군과 벌인 '자마 전투'에서 젊은 로마군 장수 스키피오의 기발한 전술에 걸려 결국 패배하게 된다. 한니발 일생에 딱 한 번의 이 패전으로 한니발은 패장이 되었고 카르타고는 로마와 강화회담을 맺은 후 그는 스키피오 장군의 배려로 카르타고 재상으로 5년여 동안 카르타고를 통치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전장터에서는 유능한 장군이었지만 유능한 정치가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정치의 지루한 논쟁과 반대파의 모함, 그리고 로마에 대한 반기 계획이 발각되자 어느날 야밤에 조국 카르타고를 떠나 배를 타고 서아시아로 망명을 떠나게 된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그의 원대한 로마타도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실패하자 로마군의 추격을 피해 카스피해 근방 비타비아란 나라로 숨어들었지만, 결국 그곳에서도 로마군 추격대의 추격을 받고 더 이상 숨을 장소가 없자 자신이 지니고 있던 독약을 마시고 세상을 하직하게 된다. 한 시대 전쟁 영웅의 비참한 말로였다.

 

태평양 전쟁과 한국 전쟁의 영웅 멕아더 장군도 마찬가지다. 그는 북한군의 침공으로 낙동강 전선까지 후퇴한 유엔군이 부산함락 직전에 성공한 인천상륙작전으로 극적으로 전세를 만회하고 북진하면서 한반도 통일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 중공군의 개입을 우려하여 진격을 멈춘 상태에서 관망하던 중, 미트루만 대통령에게 만주 폭격, 원폭 사용, 대만군 본토 공격 등을 요구하였으나 세계 3차 대전을 염려한 미대통령 트루만의 반대로 서로 갈등을 빚다가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선이 붕괴되어 후퇴를 거듭하자 결국 그는 유엔군 사령관직에서 해임당하게 된다. 그는 미국민들의 열렬한 환영 속에 귀국하여 유명한 미의회 연설을 마치고 반대파의 매도 속에 쓸쓸히 귀향하여 노년을 맞이하다가 태평양 전쟁, 한국 전쟁의 영웅은 조용히 역사 속으로 사라져갔다. 

 

세계 역사의 주인공이던 이 두 사람은 모두 전쟁터에서 죽음을 맞이하지 못하고 살아남아 노년에는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중국의 고사 '토사구팽'처럼 전쟁 영웅은 살아남아서는 대부분 대접받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위대한 성공에 대한 시기심과 질투심이 난무하고 특히 기존 국가 지도자의 불안감을 야기하기 때문이다. 배우가 인기를 먹고 살듯이 지도자도 인기를 잃는 순간 나락으로 떨어지기 때문이다. 전쟁 영웅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가 높으면 높을수록 지도자의 무능은 반비례한다. 그래서 대부분 정쟁 영웅은 살아남아서는 국가 지도자의 미움을 받고 죽임을 당하거나 반정을 도모하다가 소리없이 사라져갔다. 그것은 국가 지도자가 오로지 자신이 국가 최고 지도자라는 자만심에 빠져 국민들의 지지도가 높은 전쟁 영웅에 대한 불안감을 떨칠 수가 없어서 전쟁 영웅을 그냥 놔둘리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순신은 가장 적절한 시간과 장소에서 값진 죽음을 맞이한 전쟁 영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