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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668 : 조선의 역사 210 (선조실록 75)

두바퀴인생 2012. 8. 5. 02:52

 

 

 

 

한국의 역사 668 : 조선의 역사 210 (선조실록 75)

 

 

 

                                              

                                                                                           임진왜란 경과                                                                                                                    

                                                                                                                                                                                   

 

제14대 선조실록(1552~1608년, 재위: 1567년 7월~1608년 2월, 40년 7개월)            

 

 

 

 

 

 

 

 

 

 

임진왜란 전투목록

 

아래 임진왜란 전투 목록임진왜란 중 있었던 전투 목록이다. 시간 순으로 작성되었으며, 모두 음력으로 날짜순대로 표시했다. 주요 전투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1592년

  • 다대포 전투 : 4월 13일 ~ 4월 15일
  • 부산진 전투 : 4월 14일
  • 동래성 전투 : 4월 15일
  • 경상도 및 충청도 함락 : 4월 17일~4월 28일
  • 상주 전투 : 4월 25일
  • 충주 탄금대 전투 : 4월 28일
  • 한강 전투 : 5월 2일
  • 옥포 해전 : 5월 7일
  • 합포 해전 : 5월 7일
  • 적진포 해전 : 5월 8일
  • 해유령 전투 : 5월 16일
  • 임진강 전투 : 5월 18일
  • 기강 전투 : 5월 18일
  • 사천 해전 : 5월 29일
  • 당포 해전 : 6월 2일
  • 당항포 해전 : 6월 5일
  • 용인 전투 : 6월 5일
  • 무계 전투 : 6월 6일
  • 율포 해전 : 6월 6일
  • 정암진 전투 : 6월 8일
  • 여주 전투 : 6월 10일
  • 제1차 평양 전투 : 6월 15일
  • 웅치 전투 : 7월 7일
  • 이치 전투 : 7월 8일
  • 한산도 대첩 : 7월 8일
  • 제1차 금산 전투 : 7월 9일
  • 안골포 해전 : 7월 10일
  • 우척현 전투 : 7월 10일
  • 제2차 평양 전투 : 7월 17일
  • 영천성 전투 : 7월 24일~7월 27일
  • 지례 전투 : 7월 29일
  • 제3차 평양 전투 : 8월 1일
  • 청주 전투 : 8월 1일
  • 제1차 경주 전투: 8월 2일
  • 제2차 금산 전투 : 8월 18일
  • 영원산성 전투 : 8월 25일
  • 장림포 해전 : 8월 29일
  • 화준구미 해전 : 9월 1일
  • 다대포 해전 : 9월 1일
  • 서평도 해전 : 9월 1일
  • 절영도 해전 : 9월 1일
  • 초량목 해전 : 9월 1일
  • 부산포 해전 : 9월 1일
  • 연안 전투 : 9월 2일
  • 제2차 경주 전투 : 9월 8일
  • 북관대첩 : 1592년 9월 16일~1593년 1월 28일
  • 창원 전투 : 9월 27일
  • 제1차 진주성 전투 : 10월 10일
  • 독성산성 전투 : 12월 11일

 

1593년

  • 제4차 평양 전투 : 1월 9일
  • 성주 전투 : 1월 15일
  • 벽제관 전투 : 1월 27일
  • 웅포 해전 : 2월 10일~3월 6일
  • 행주 대첩 : 2월 12일
  • 제2차 진주성 전투 : 6월 29일

 

1594년

  • 제2차 당항포 해전 : 3월 4일
  • 영등포 해전 : 10월 1일
  • 장문포 해전 : 10월 4일

 

 

1597년

  • 칠천량 해전 : 7월 16일
  • 고령 전투 : 8월 15일
  • 남원 전투 : 8월 16일
  • 황석산성 전투 : 8월 16일
  • 어란포 해전 : 8월 27일
  • 직산 전투 : 9월 7일
  • 벽파진 해전 : 9월 7일
  • 명량 해전 : 9월 16일
  • 제1차 울산성 전투 : 12월 24일

 

1598년

  • 절이도 해전 : 7월 19일
  • 제2차 울산성 전투 : 9월 21일
  • 사천성 전투 : 9월 28일
  • 순천성 전투 : 9월 20일~10월 7일
  • 노량 해전 : 11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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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량대첩도

임진왜란 해전 목록

 

아래의 목록은 임진왜란의 해전 목록이다. 정렬 순서는 시간순이다.

 

날짜 해전 장소 조선군 일본군 비고
1592년 6월 16일
(음력 5월 7일)
옥포 해전 거제시 옥포 이순신 도도 다카토라 조선군의 첫 승리
1592년 6월 16일
(음력 5월 7일)
합포 해전 진해시 웅천동 이순신
1592년 6월 17일
(음력 5월 8일)
적진포 해전 고성군 거류면 통영시 광도면 이순신
1592년
(음력 5월 29일)
사천 해전 사천시 용현면 이순신 구루지마 미치유키 처음으로 거북선을 사용
1592년
(음력 6월 2일)
당포 해전 통영시 산양읍 이순신 카메이 코레노리
1592년
(음력 6월 5일)
당항포 해전 경남 고성군 회화면 당항포리 이순신
이억기
1592년
(음력 6월 6일)
율포 해전 거제시 장목면 이순신
1592년 8월 14일
(음력 7월 8일)
한산도 대첩 통영시 한산면 이순신
원균
이억기
와키사카 야스하루
1592년 8월 16일
(음력 7월 10일)
안골포 해전 진해시 안골동 이순신
원균
이억기
구키 요시아키
1592년
(음력 8월 29일)
장림포 해전 부산시 사하구 장림동 이순신
1592년 10월 5일
(음력 9월 1일)
화준구미 해전 부산시 사하구 몰운대 인근
1592년 10월 5일
(음력 9월 1일)
다대포 해전 부산시 사하구 다대동 이순신
1592년 10월 5일
(음력 9월 1일)
서평포 해전 부산시 사하구 구평동 감천항 이순신
1592년 10월 5일
(음력 9월 1일)
절영도 해전 부산시 영도구 이순신
1592년 10월 5일
(음력 9월 1일)
초량목 해전 부산시 동구 초량동 이순신
1592년 10월 5일
(음력 9월 1일)
부산포 해전 부산시 동구 좌천동 이순신
1593년 3월 6일
(음력 2월 10일)
웅포 해전 경남 진해시 웅천동 이순신
1594년
(음력 3월 4일)
제2차 당항포 해전 경남 고성군 회화면 당항포리 어영담
1594년
(음력 10월 4일)
장문포 해전 경남 거제시 장목면 장목리 이순신
1597년 8월 28일
(음력 7월 16일)
칠천량 해전 거제도 인근 칠천량 원균
이억기
배설
도도 다카토라
와키사카 야스하루
고니시 유키나가
조선군의 유일한 패배.
원균, 이억기 전사
1597년
(음력 8월 27일)
어란포 해전 전남 해남군 송지면 어란포 이순신
1597년 10월 16일
(음력 9월 7일)
벽파진 해전 전남 진도군 고군면 벽파진 이순신
1597년 10월 25일
(음력 9월 16일)
명량 해전 전남 해남군 문내면, 진도군 녹진리 이순신 도도 다카토라
구루시마 미치후사
가토 요시아키
와키사카 야스하루
1598년
(음력 7월 19일)
절이도 해전 전남 고흥군 금산면 거금도 이순신
1598년 10월 19일 -
11월 6일
장도 해전 전남 순천시 장도 이순신
진린
고니시 유키나가
1598년 12월 16일
(음력 11월 19일)
노량 해전 경남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 이순신
진린
고니시 유키나가
시마즈 요시히로
와키사카 야스하루
소오 요시토시
가토 기요마사
이순신 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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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 왜교성 전투와 장도 해전

 

왜교성 전투(倭橋城 戰鬪)는 1598년 9월 20일 ~ 10월 7일. 참전국 3국의 수륙연합군이 얽혀 싸운 격전이다. 이때 바다에서 벌어진 전투가 장도 해전이다. 이 해전에서 명나라 전선 30여 척이 격침 또는 파손되었으며 2천여 명이 전사하고 조선 수군도 130여 명이 전사상 당하였다. 일본군은 전함 30여 척이 격침 되고 10여 척이 나포되었으며 3천여 명이 전사하였다.

 

왜교성 전투
(임진왜란의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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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교성 전투를 그린 정왜기공도권
날짜 1598년 9월 20일 ~ 1598년 10월 7일
장소 순천왜성
결과 연합군에 의해 일본의 해상 병력은 막대한 손실을 입었으나, 성의 방어에서는 일본이 성과를 거둠.
교전국
조선,
명나라
일본
지휘관
조선:

이순신,
권율
황세득

권준
무의공 이순신
김완
이영남
이청일†
우치적
송희립
명나라:
유정,
진린

등자룡

일본:

고니시 유키나가
마쓰라 시게노부,
아리마 하루노부,
고토 하루마사,
오무라 요시아키

병력
육군 3만 6,000여 명
수군 1만 5,000여 명
총병력 5만 1,000명
1만 4,000여 명
피해 규모
조선군 130여 명 사상
명나라 전선 30척 격침 및 파손
명 수군 2,000명 전사
전선 30척 격침 및 파손, 11척 나포.(41척 손실)
3,000명 사상

 

 

 

 

1598년 8월 18일 후시미 성(伏見城)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 직후에 5봉행(奉行)과 5대로(大老)는 일본군의 철병을 결정하였다. 이것이 조선에 알려지면서 조·명 연합군은 철병하는 침략군을 추격하는 것으로 전략을 전환하였다.

 

1598년 7월 경략(經略) 형개(邢驚)가 한성으로 당도하면서, 명군은 조선군과 함께 울산왜성에 주둔한 가토 기요마사 군을 공격목표로 한 동로군과, 사천왜성의 시마즈 요시히로 군을 공격 목표로 한 중로군, 순천 왜교성고니시 유키나가 군을 공격목표로 한 서로군을 편성하여 동시에 남진하였다.

 

이와 아울러, 진린의 명수군과 이순신의 조선수군을 하나로 묶어서 수로군을 따로 편성한 다음 순천의 왜교성을 함께 공격하도록 하는 작전계획을 수립하였다.

 

즉, 육상의 삼로군과 수로군을 동시에 병진하게 하여 일본군을 공격한다는 '사로병진작전(四路竝進作戰)'을 세웠다. 9월부터는 일본군의 상호간의 구원전략을 근본적으로 차단하면서 남해안 일대의 적군에 대한 공격을 일제히 개시하였다. 그러나 울산왜성의 일본군 저항이 의외로 완강하여, 그 목적을 달성하기 어려웠고, 사천왜성 공격 또한 명나라 장수 동일원(董一元)의 조급한 작전으로 패퇴함으로써 결국 사로병진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때 서로군의 제독 유정은 8월에 들어와 대군을 거느리고 한성을 출발하여 수원을 경유, 전주로 내려온 다음, 순천 왜교성의 적을 치기로 하였다. 그는 9월 19일 도원수 권율과 전라병사 이병악 등이 이끄는 1만여명의 조선군을 포함, 3만 6,000의 병력으로 왜교성 공격을 서두르고 있었다.

 

 

장도 해전

수로군은 1598년 7월 16일 고금도에서 명나라진린이 이끄는 수군과 합세한 이순신 휘하의 조선 수군이 합세하였다. 그리고 7월 24일 조명연합 함대를 편성하여 흥양의 절이도 해전(折爾島海戰)에서 승리 후, 9월 하순에 이르러 마침내 조-명연합육상군과 연합 전선을 구축함으로써 정유재란의 최후의 총격전을 펼치게 되었다.

 

그러나 음력 10월 3일 고니시 유키나가의 뇌물에 매수된 유정이 군사를 움직이지 않고 결국 이순신진린의 수군만이 단독으로 왜교성을 공격했다.

 

이 전투에서 30여 척의 왜선을 격침시키고, 11척을 나포하였으며, 왜군 3,000명을 무찔렀다.(장도해전) 그러나 조명 연합군의 피해도 커 명나라 전선 30척이 격침당하고, 명 수군 2,000명이 전사했으며, 왜군에게 포위된 명군을 구하러 가던 사도 첨사 황세득과 군관 이청일, 휘하의 조선군 130명도 전사했다.

 

 

 

 

 

순천 왜교성 전투 전개 과정

 

1598년 2월에는 도요토미가 죽었다는 첩보가 조정에 도착한다. 그러나 선조는 도요토미가 정말 죽었다면 적들은 이를 숨기려할 것인데 그렇지 않았다는 점을 보아 이는 적들의 계책일 것으로 판단한다. 나라의 안위, 백성과 군사보다 자신의 안위에 더 집중하였고, 시기심과 질투심, ㅏ인에 대한 불신과 조석으로 변하는 신념, 후첩과 간신들의 말에 현혹되는 얇은 귀, 앞뒤 안 가리는 급한 성격 등 인간성은 더럽지만 머리는 좋았던 임금이라 그런지 도요토미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는 판단은 정확하였다. 이런 소문이 도는 것도 무리가 아닌 것이 도요토미는 이미 병들어 서서히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강항의 <간양록>에는 도요토미가 7월에 죽었다는 말이 있다. 또한 8월 5일자의 <선조실록>에도 도요토미가 이미 죽었다는 포로의 증언을 말하고 있는 의병장 임환의 보고가 첨부된 전라병사 이광악의 장계가 실려 있다. 이외에도 입부 이순신이 도요토미가 7월초에 죽었다는 보고를 하는 등 조선군은 여기저기서 귀환포로 등을 통해 도요토미 사망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였다. 다만 도오툐미의 사망일자에 대한 정설은 8월 18일이니, 포로들의 증언과는 다소 어긋난다.

도요토미의 죽음은 곧 극비리에 일본군에 알려짐과 함께 철수명령도 내려진다. 하지만 조명연합군도 도요토미의 죽음을 인지하고, 이런 가운데 대대적인 반격작전을 계획한다. 그것은 1차 울산성 전투 직후 경리 양호가 입안한 사로병진이었다. 이 작전은 조선의 지형적 조건 상 군사들을 한 곳에 모으는 것은 작전을 성공하기가 어려우므로 군사들을 나누어 각 지역을 책임지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본래는 육군을 동로군, 중로군, 서로군으로 나누고 수군은 각 육군에 배속하는 형태였다. 하지만 1차 울산성 전투에서 조선군과 연합한 명군이 오래만에 제대로 싸워 가토군을 궁지로 몰아넣었으면서도  결국 섬멸하는데 실패하고 후퇴한 후, 수군의 지원 필요성을 느끼면서 수군을 수로군으로 독립시켜서 사로군을 이루었다.

각군의 대장은 모두 명나라 장수가 맡아서 동로군의 대장은 마귀, 중로군은 이여송의 동생 이여매, 서로군은 유정이 맡았으며 수로군 대장은 진린이었다. 이 중 중로군 대장은 이여송이 여진족과의 전투에서 전사한 후 동생 이여매가 형을 대신하게 되었으나 이내 동일원이 후임으로 중로군의 대장이 된다. 이 사로군이 각지의 일본군에게 공격을 감행하는 것이 사로(四路)병진이다.

사로의 대장 중 진린이 가장 먼저 내려가 이순신의 조선 수군과 합류한 것에 이어서 8월 18일에는 육군의 대장들이 한양을 출발한다. 마귀의 동로군은 경상좌병사 김응서와 함께 9월 중순 가토 기요마사가 있는 울산의 도산성을 포위한다. 이것이 '제2차 울산성 전투'이다. 9월 하순부터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지만, 울산성의 가토군은 동로군의 유인작전에도 넘어가지 않고 성곽에 의지하며 수성전을 계속한다. 일본군이 해안가에 축조한 왜성은 종전 후 조선 조정에서도 그 양식을 본받아 축성을 하자 할 정도로 견고하고 수성에 효율적이기에 함락은 쉽지 않았다.  여기에 부산에서 일본 구원군이 올 것이라는 소문이 돌자 마귀는 동로군을 이끌고 경주로 철수하였다. 1차 울산성 전투가 가토를 죽음의 위기로 몰아붙인 것과는 다르게 2차 울산성 전투는 이렇게 맥없이 막을 내리고 말았다.

동일원의 중로군은 경상우도 지역으로 진출하여 사천 등지의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사천성의 일본군을 지휘하는 무장은 시마즈 요시히로였다. 어느 드라마에서는 와키자카 야스하루보다 딸리는 무장에 한낱 도자기 도둑으로 비쳐지지만, 실제 역사의 시마즈는 전국시대의 이름난 무장으로 훗날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자신이 가담한 서군이 도쿠가와의 동군에 의해 패배에 직면하자, 도쿠가와군의 본진을 정면으로 가르면서 자신의 영지로 돌아간 ‘시마즈의 후퇴’를 감행한 맹장이었다. 물론 우리 입장에서야 조선에 침입한 장수이며 그 후예들이 메이지 유신 후 정한론을 주장한다는 걸 생각하면 원수로 분류되겠지만, 그 능력까지 폄하할 이유는 없다.

동일원의 중로군은 초반에는 승전보를 올리며 진격하였다. 성주와 고령을 거쳐서 9월 18일에는 진주로 진격하였고, 20일에는 남강을 넘어서 일본 진영을 점령하였다. 9월 28일에는 조선의 정기룡을 선봉으로 삼아 시마즈군이 주둔한 사천성을 포위하였다.

시마즈는 적들의 병력 규모가 큰 것을 보고 자신의 휘하 병력들을 사천 신성으로 후퇴시켰다. 여기서 동일원은 작은 승리에 취하여 시미즈군에 대해 공격을 감행하지만, 이는 시마즈의 유인에 넘어간 결과였다. 결국 중로군은 시마즈군은 반격에 큰 피해를 입고 대패하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중로군의 피해는 일본 기록은 3만8천여 명, 명나라 기록은 3~4천명, <선조실록>에 나온 기록은 7~8천명이다. 사천성 전투로 시마즈 요시히로는 무장으로서의 위엄을 떨쳤지만, 명나라는 막대한 피해를 입고 체면도 구기고 말았다.

유정의 서로군은 순천 왜교성의 고니시군을 치기 위하여 9월 중순 전주에서 군대를 정비하고 남하하였다. 서로군에는 2만의 명군과 6천의 도원수 권율 휘하 조선군이 포함되었다. 그리고 동로군, 중로군과 다른 점은 조명연합함대로 구성된 수로군이 왜교성 앞바다에 있는 유도에 주둔하면서 대기하고 있었다. 전쟁 기간 중 최초이자 최후인 조명 연합 수륙합동 작전이 실시되는 것이었다.

조명연합함대가 유도에 이른 것은 9월 20일, 유정의 서로군은 이미 도착해 있었다. 여기서 한 가지 집고 넘어갈 점은 어느 드라마에서는 조선 수군의 지휘권을 유정에게 주려고 하자 이순신의 수군이 반발하는 장면이 방영되었는데,  실상은 그 반대였다. 이순신이 진린 때문에 작전을 못 한다고 하니 조정에서는 유정에게 지휘권을 주는 것이 수군을 위해서도 좋다고 생각하고 시행하려 했으나, 진린 측이 눈치 채면서 무산된 것이다. 물론 싸울 생각이 없는 건 유정도 마찬가지라서 결국 제대로 싸울 의지와 능력이 있는 고위지휘관은 이순신 뿐이었다.

유정은 전투를 시작하기 전에 강화회담을 미끼로 하여 고니시 유키나카를 유인하여 생포할 계획을 세웠다. 그래서 명나라 중군을 유정으로, 도원수 군관으로 권율로 구미서 군사 수백을 거느리게 하고 적군도 안면을 알고 있는 전라도 순찰사 황신은 가짜를 꾸미지 않고 고니시를 맞이하게 하였다. 그리고 비둘기 20마리를 숨겨두었다가 고니시가 막사로 들어오면 날려 보내면, 이를 신호로 적을 공격하고 고니시를 생포하기로 계획하였다. 그러나 고니시는 멀리서 군사의 형세가 강해보임을 보고 의심을 하여 쉽게 접근하지를 않았고, 잠시 후 비둘기가 날아가고 명나라 군대가 실수로 포를 쏘니 고니시가 함정을 눈치 채고 달아나면서 이 계획은 실패하였다. 

 

유정은 곧 서로군을 움직여 적들을 추적하였으나 고니시는 잡지 못 하고 미처 성에 들어가지 못한 적 병사들의 목을 베었다. 그렇게 거둔 수급이 98개였으며, 명군의 피해도 많았다. 이렇게 하면서 육지에서 서로군이 순천 왜교성을 포위하자 바다의 수군도 움직여서 바다에서 성을 봉쇄하였다. 수군은 검은 베로 돛을 만들고 여러 가지 모양의 깃발을 그 사이사이에 세워두니 매우 웅장해 보였다.
 
다음날인 21일에는 서로군은 목책을 설치하고 해자를 파려했으나 적이 막아 싸워서 성에 접근하지는 못했다. 일본군은 성위에 포루를 설치하면서 짤막한 목채를 같이 두어 그 안에 허수아비를 세우면서 발포하여 서로군의 접근을 막았다. 수군은 아침부터 진격하여 활과 포를 쏘며 하루 종일 싸웠지만 물이 얕아서 적군을 추적할 수는 없었다. 한번은 적군 경쾌선이 정찰을 위해 접근하자 이를 바로 추격, 적군은 배를 버리고 육지로 도망갔다. 배와 배에 있던 물건들은 진린에게 바쳐졌다. 이날 밤, 유정은 횃불을 들고 공격할 듯 진격하다가 불을 끄고 다시 진으로 돌아오는 폼만 잡고 싸우지는 않는 행위를 지속하였다. 적은 여기에 연달아 포를 쏘아 불이 성 밖으로 번졌다가 한참 후에 꺼졌다.

다음날 수군이 다시 진격하여 왜교성을 공격하니, 일본군은 죽기를 각오하면서 물 가운데로 나아가 수군을 포위하였으나, 수군은 많은 수급을 거두고 조수에 맞추어 물러났다. 그러나 이 날의 전투에서는 유격 계금이 왼쪽 어깨에 총을 맞아 부상을 당하고 명군 11명이 전사하였다. 조선군도 옥포 만호와 지세포 만호가 부상을 당하였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다음날인 23일, 진린은 명군의 전사와 부상에 화를 내면서  천만호 및 홍주 대장과 한산 대장을 각각 곤장 7대를, 금갑도, 제포, 회령포 만호에게 15대씩을 때렸다. 진린의 이런 행동은 명군의 피해에 대한 분풀이 외에도 유정에게 수군 지휘권이 넘기려는 논의도 있은 점을 감안한 지휘권 확립도 목적을 둔 듯하다.

그 후 며칠간은 유정이 공성무기를 준비한다며 전투를 중지하였기에, 수군도 유도에서 대기한다. 계절은 늦가을로 접어들면서 강한 바람이 불었기에 며칠간 배를 움직이기도 힘든 날씨도 이어졌지만, 수군은 묵묵히 다음 전투를 대비하였다.

10월 1일, 유정은 여러 장수들과 의논하여 다음날 전투를 재개하기로 하였다. <난중일기>에 이 날 새벽 진린이 유정에게로 가서 잠깐 얘기하고 왔다는 걸로 보아 진린과도 협의가 된 것으로 보인다.

다음날인 10월 2일, 육지에서는 유정이 동틀 무렵부터 서로군을 지휘하여 진격하였고, 수군 역시 병력을 출동시켰다. 그러나 육지의 서로군의 공격은 그다지 신통치가 않았다. 적 성안에 진입을 하기는 커녕 오히려 일본군의 공격으로 전사하거나 성안으로 끌려가는 명라나 군사들이 속출하고, 방위를 해야 할 군사들이 밤에 자지를 못해서 졸다가 습격을 받기도 하니 이날 죽은 명군이 8백 명이었다. 수군은 진격하여 적극적인 공격을 감행, 많은 적을 죽였지만  사도 첨사 황세득과  이청일 등이 탄환에 맞아 전사하고 제포 만호 주의수와 사량 만호 김성옥, 해남 현감 유형, 진도 군수 선의문, 강진 현감 송상보 등이 부상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3일에는 유정이 진린에게 비밀서신을 보내어 조수를 틈타 수력협공을 할 것을 계획하였다. 그래서 초저녁에 출동한 수군은 조수를 타고 적군의 수채에 육박하여  포탄이 막사까지 맞추자, 일본군은 당황하여 동쪽으로 몰리니 서쪽은 자연히 비게 되었다. 그러나 좋은 기회가 왔음에도 육지의 서로군은 별다른 공격을 취하지 않아 성을 함락시키지 못 하였다.

그러는 동안 해안 가까이 접근한 명 수군은 곧 바닷물이 빠지면서 갯벌에 갇히게 되었다. 그러자 일본군이 이 배들을 공격하여 불을 지르니, 사선 19척과 호선 20여척이 불타게 되었다. 명나라 수군들은 꼼짝도 못 하고 적군을 상관(上官)이라 부르며 살려달라고 외치는 소리가 육지에까지 들렸다. 조선 지형에 어두운 명 수군의 실책으로 이들이 위기에 빠진 것이지만, 이 상황에서 이순신은 명군만 피해를 입으면 나중에 문제가 될 것을 생각하여 조선 판옥선도 7척을 일부러 갯벌에 갇히게 한다. 판옥선은 배가 높고 견고하고 활과 포를 쏘며 대항하니 적군이 접근하지를 못하였다. 판옥선이 성벽 같은 역할을 한 셈이었으니 그 덕분에 조선 판옥선은 무사히 다음 조수를 타고 빠져나올 수 있었다.

다음날인 4일, 수군은 분노한 진린이 수군을 다시 출동시킨다. 그러나 육지에서의 서로군의 공격이 없어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 하였다. 이에 진린은 소극적으로 전투에 임한 서로군에 대하여 분노해 육지에 올라 유정의 막사에 가서 손으로 유정의 수자기(帥字旗)를 찢으면서, “마음속 심사가 좋지 못하다.”고 책망하고, 곧 사유를 갖추어서 급히 군문에 알리니 유정은 얼굴빛이 흙빛과 같이 되어 가슴을 치고 통곡하면서, “장관 중에 능한 사람이 없는데 내가 홀로 어찌하겠소.” 라며 변명하였다. 아마도 진린도 적군보다도 더 도움 안 되는 아군의 행태에 분노했을테니, 이순신의 심정을 조금이라도 이해하지는 않았을까? 이리하여 두 명나라 장수들은 깊은 불화에 빠지게 된다.

수군의 공격은 왜교성을 위협하였지만 서로군의 소극적인 대응으로 별 효과를 거두지 못한 상황에서 6일에는 권율이 이순신에게 유정이 달아나려 한다는 편지를 보낸다. 과연 다음날인 7일 서로군은 유정의 명령에 의해 군량과 병장기도 내버려 둔 채 퇴각한다. 군량을 불태우라는 지시가 있기는 했지만 미처 타지 못한 것은 고스란히 일본군에게 넘어가니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이렇게 하여 7년간의 전쟁 중 처음으로 이루어진 대규모 수륙협공 작전은 명군의 무성의로 별 효과 없이 끝나고 말았다. 수군은 해안에서 싸우느라 육지의 포와 조총사거리에 노출되면서도 적군을 크게 위협해가면서 용감히 싸웠지만, 서로군이 대응을 하지 않으니 계사년부터 소강기에 있은 다른 해전들처럼 바닷가에서 위협을 하는 정도 밖에 할 수 없었다.

이 전투를 어느 누구는 "거 봐. 이순신도 패배한 적 있다니까."라고 말하는 근거로 든다. 물론 고니시군을 잡는데는 실패했지만, 수군은 왜교성의 막사에까지 포탄을 날릴 정도로 큰 위협을 가했다. 수군이 이 정도 했으면 육군인 서로군이 성을 점령하든가 해줘야 하는데, 그걸 못 했다. 이렇게 이순신의 발목을 잡는 건 대개는 적군이 아니라 명군이었고 아군이었다.

 

 

 

 

사천 전투

 

사천 전투(泗川 戰鬪)는 1598년 10월, 한반도의 사천 선진리성에서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가 인솔하는 시마즈군 7천 명이 약 4만 명의 조·명 연합군과 싸워 승리한 전투이다.

 

 

사천 전투
(임진왜란의 일부)
임진왜란사천전투도.jpg
날짜 1598년 10월 1일
장소 한국 사천 선진리왜성
결과 조·명 연합군의 패배
교전국
조선, 명나라 일본
지휘관
동일원
정기룡
시마즈 요시히로
병력
명나라 3만 6,800명
조선 2,215명
총병력 약 4만 명
7,000명~10,000명
피해 규모
3만 명 전후 불명

 

 

 

 

1598년 9월 말부터 10월 초에 걸쳐 조·명 연합군은 서로군·중로군·동로군을 편성하여 서쪽에서 순천왜성(고니시군), 사천 선진리왜성(시마즈군), 울산왜성(가토군)에 대해서 동시에 남진하였고, 육상의 삼로군과 수로군을 동시에 병진하게 하여 일본군을 공격한다는 '사로병진작전(四路竝進作戰)'에 돌입했다.

 

이 삼로군 중 명나라 장수 동일원이 인솔하는 중로군 4만 명의 조·명 연합군이 시마즈군이 주둔하는 사천으로 남진해 들어갔다. 사천은 일본군의 근원지인 부산과 일본군 왼쪽 끝의 순천왜성남해왜성의 중간에 있기 때문에, 이곳을 함락시키면 서쪽으로 있는 일본군과의 연락이 분단될 위험이 있었다.

 

당시 사천일대의 일본군은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를 주축으로 한 시마즈 가문의 5개 부대가 다소 느슨한 지휘체계로 결합해 있었다. 1597년 시마즈 요시히로는 모리 가쓰노부가 축성한 사천 선진리왜성에 주둔하며 사천에서 진주에 이르는 요해(要害)에 진영을 설치하는 한편, 진주성에 미하라 시게다네(三原重鍾)를 주둔시키고 망진왜성에는 중로군이 남강을 건너 남진하는 것을 막기 위해 데라야마 히사가네(寺山久兼)로 하여금 수비를 담당시켰다.

 

또한, 영춘과 사천에 성을 축조·보수하여 영춘왜성사천고성에는 가와카미 히사토모(三上久智)와 가와카미 다다노리(川上忠實)로 하여금 각각 수비하게 하여 진주 남강을 최전 방위선으로 삼고 또 망진왜성·영춘왜성·사천구성의 3성을 사천 선진리왜성의 전진 방어진지로 삼고 있었다. 시마즈군의 병력은 시마즈 요시히로와 요시히로의 아들 시마즈 다다쓰네(島津忠恒)가 인솔하는 7천 명뿐이었다.

 

(宗)군이나 타치바나(立花)군이 원군을 신청하였지만, 요시히로는 이 제의를 거절해, 시마즈 가의 군세만으로 조·명의 대군을 맞아 싸우게 되었다.

 

조·명 연합군의 중로군 본대는 1598년 9월 20일 시마즈군이 주둔하고 있는 진주의 망진왜성영춘왜성을 점령하고, 사천고성과 사천 선진리왜성으로 육박하여 공세를 취하였다. 이 상황을 보고받은 시마즈 요시히로는 망진왜성, 영춘왜성, 곤양왜성에 주둔하던 병력을 철수시켜 사천고성과 사천 선진리왜성에 투입하였다. 시마즈 요시히로가와카미 다다노리(川上忠実)에게 수백의 군사를 주어 사천고성을 지키게 해 대략 1 만석의 식량을 두었다. 이 시마즈군은 소수이면서도 완강하게 저항해, 연합군을 도발했다. 그 후 동정군(東征軍)이 사천고성과 사천 선진리왜성에 압박을 가하자 시마즈는 사천고성을 포기하더라도 병력을 한곳에 집중시켜 조명연합군의 공세를 막기 위해 병력을 사천 선진리왜성으로 이동시키려 했다.

 

사천고성에서의 철수 준비를 하고 있던 9월 28일 밤에, 경상우병사 정기룡의 조선군이 사천고성을 포위하고 야습을 감행했다. 일본군은 성문을 열고 포위망을 돌파하려다가 많은 병력손실을 입고 사천 선진리왜성으로 철수했다. 조·명 연합군은 사천고성을 점령하고 10월 1일 선진리왜성 공격을 시작했다.

 

전쟁 도중, 가와카미 다다노리세토구치 시게하루(瀬戸口重治)에 명하여 적의 식량고를 불태웠다. 대군사력의 연합군은 식량이 부족했지만, 식햘고가 불타는 바람에 한층 더 궁지에 빠져, 단기 결전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시마즈 요시히로는 사천 선진리왜성의 뒤에 굳세고 튼튼한 진을 쳐, 복병을 배치했다. 연합군의 공격에 대해, 요시히로는 대량의 총을 사용하거나 지뢰를 묻는 등 대항해, 연합군의 공격을 잘 방어했다. 또, 쇳조각이나 철정을 포탄 대신에 장전 한 대포도 사용했다. 연합군이 공격하다 지쳤을 때, 요시히로는 복병을 출동시켜 적의 대열을 끊어 교란시켜, 요시히로 본대도 공세로 변했다. 조명연합군은 양식에 고민하고 있었고, 요시히로군의 공세에 지쳐 결국 3만여 병력을 잃고 철수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