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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669 : 조선의 역사 211 (선조실록 76) 본문
한국의 역사 669 : 조선의 역사 211 (선조실록 76)
임진왜란 경과
제14대 선조실록(1552~1608년, 재위: 1567년 7월~1608년 2월, 40년 7개월)
임진왜란 전투목록
아래 임진왜란 전투 목록은 임진왜란 중 있었던 전투 목록이다. 시간 순으로 작성되었으며, 모두 음력으로 날짜순대로 표시했다. 주요 전투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1592년
- 다대포 전투 : 4월 13일 ~ 4월 15일
- 부산진 전투 : 4월 14일
- 동래성 전투 : 4월 15일
- 경상도 및 충청도 함락 : 4월 17일~4월 28일
- 상주 전투 : 4월 25일
- 충주 탄금대 전투 : 4월 28일
- 한강 전투 : 5월 2일
- 옥포 해전 : 5월 7일
- 합포 해전 : 5월 7일
- 적진포 해전 : 5월 8일
- 해유령 전투 : 5월 16일
- 임진강 전투 : 5월 18일
- 기강 전투 : 5월 18일
- 사천 해전 : 5월 29일
- 당포 해전 : 6월 2일
- 당항포 해전 : 6월 5일
- 용인 전투 : 6월 5일
- 무계 전투 : 6월 6일
- 율포 해전 : 6월 6일
- 정암진 전투 : 6월 8일
- 여주 전투 : 6월 10일
- 제1차 평양 전투 : 6월 15일
- 웅치 전투 : 7월 7일
- 이치 전투 : 7월 8일
- 한산도 대첩 : 7월 8일
- 제1차 금산 전투 : 7월 9일
- 안골포 해전 : 7월 10일
- 우척현 전투 : 7월 10일
- 제2차 평양 전투 : 7월 17일
- 영천성 전투 : 7월 24일~7월 27일
- 지례 전투 : 7월 29일
- 제3차 평양 전투 : 8월 1일
- 청주 전투 : 8월 1일
- 제1차 경주 전투: 8월 2일
- 제2차 금산 전투 : 8월 18일
- 영원산성 전투 : 8월 25일
- 장림포 해전 : 8월 29일
- 화준구미 해전 : 9월 1일
- 다대포 해전 : 9월 1일
- 서평도 해전 : 9월 1일
- 절영도 해전 : 9월 1일
- 초량목 해전 : 9월 1일
- 부산포 해전 : 9월 1일
- 연안 전투 : 9월 2일
- 제2차 경주 전투 : 9월 8일
- 북관대첩 : 1592년 9월 16일~1593년 1월 28일
- 창원 전투 : 9월 27일
- 제1차 진주성 전투 : 10월 10일
- 독성산성 전투 : 12월 11일
1593년
- 제4차 평양 전투 : 1월 9일
- 성주 전투 : 1월 15일
- 벽제관 전투 : 1월 27일
- 웅포 해전 : 2월 10일~3월 6일
- 행주 대첩 : 2월 12일
- 제2차 진주성 전투 : 6월 29일
1594년
- 제2차 당항포 해전 : 3월 4일
- 영등포 해전 : 10월 1일
- 장문포 해전 : 10월 4일
1597년
- 칠천량 해전 : 7월 16일
- 고령 전투 : 8월 15일
- 남원 전투 : 8월 16일
- 황석산성 전투 : 8월 16일
- 어란포 해전 : 8월 27일
- 직산 전투 : 9월 7일
- 벽파진 해전 : 9월 7일
- 명량 해전 : 9월 16일
- 제1차 울산성 전투 : 12월 24일
1598년
- 절이도 해전 : 7월 19일
- 제2차 울산성 전투 : 9월 21일
- 사천성 전투 : 9월 28일
- 순천성 전투 : 9월 20일~10월 7일
- 노량 해전 : 11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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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해전 목록
아래의 목록은 임진왜란의 해전 목록이다. 정렬 순서는 시간순이다.
날짜 | 해전 | 장소 | 조선군 | 일본군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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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6월 16일 (음력 5월 7일) |
옥포 해전 | 거제시 옥포 | 이순신 | 도도 다카토라 | 조선군의 첫 승리 |
1592년 6월 16일 (음력 5월 7일) |
합포 해전 | 진해시 웅천동 | 이순신 | ||
1592년 6월 17일 (음력 5월 8일) |
적진포 해전 | 고성군 거류면 통영시 광도면 | 이순신 | ||
1592년 (음력 5월 29일) |
사천 해전 | 사천시 용현면 | 이순신 | 구루지마 미치유키 | 처음으로 거북선을 사용 |
1592년 (음력 6월 2일) |
당포 해전 | 통영시 산양읍 | 이순신 | 카메이 코레노리 | |
1592년 (음력 6월 5일) |
당항포 해전 | 경남 고성군 회화면 당항포리 | 이순신 이억기 |
||
1592년 (음력 6월 6일) |
율포 해전 | 거제시 장목면 | 이순신 | ||
1592년 8월 14일 (음력 7월 8일) |
한산도 대첩 | 통영시 한산면 | 이순신 원균 이억기 |
와키사카 야스하루 | |
1592년 8월 16일 (음력 7월 10일) |
안골포 해전 | 진해시 안골동 | 이순신 원균 이억기 |
구키 요시아키 | |
1592년 (음력 8월 29일) |
장림포 해전 | 부산시 사하구 장림동 | 이순신 | ||
1592년 10월 5일 (음력 9월 1일) |
화준구미 해전 | 부산시 사하구 몰운대 인근 | |||
1592년 10월 5일 (음력 9월 1일) |
다대포 해전 | 부산시 사하구 다대동 | 이순신 | ||
1592년 10월 5일 (음력 9월 1일) |
서평포 해전 | 부산시 사하구 구평동 감천항 | 이순신 | ||
1592년 10월 5일 (음력 9월 1일) |
절영도 해전 | 부산시 영도구 | 이순신 | ||
1592년 10월 5일 (음력 9월 1일) |
초량목 해전 | 부산시 동구 초량동 | 이순신 | ||
1592년 10월 5일 (음력 9월 1일) |
부산포 해전 | 부산시 동구 좌천동 | 이순신 | ||
1593년 3월 6일 (음력 2월 10일) |
웅포 해전 | 경남 진해시 웅천동 | 이순신 | ||
1594년 (음력 3월 4일) |
제2차 당항포 해전 | 경남 고성군 회화면 당항포리 | 어영담 | ||
1594년 (음력 10월 4일) |
장문포 해전 | 경남 거제시 장목면 장목리 | 이순신 | ||
1597년 8월 28일 (음력 7월 16일) |
칠천량 해전 | 거제도 인근 칠천량 | 원균 이억기 배설 |
도도 다카토라 와키사카 야스하루 고니시 유키나가 |
조선군의 유일한 패배. 원균, 이억기 전사 |
1597년 (음력 8월 27일) |
어란포 해전 | 전남 해남군 송지면 어란포 | 이순신 | ||
1597년 10월 16일 (음력 9월 7일) |
벽파진 해전 | 전남 진도군 고군면 벽파진 | 이순신 | ||
1597년 10월 25일 (음력 9월 16일) |
명량 해전 | 전남 해남군 문내면, 진도군 녹진리 | 이순신 | 도도 다카토라 구루시마 미치후사 가토 요시아키 와키사카 야스하루 |
|
1598년 (음력 7월 19일) |
절이도 해전 | 전남 고흥군 금산면 거금도 | 이순신 | ||
1598년 10월 19일 - 11월 6일 |
장도 해전 | 전남 순천시 장도 | 이순신 진린 |
고니시 유키나가 | |
1598년 12월 16일 (음력 11월 19일) |
노량 해전 | 경남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 | 이순신 진린 |
고니시 유키나가 시마즈 요시히로 와키사카 야스하루 소오 요시토시 가토 기요마사 |
이순신 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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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량 해전 : 임진왜란 마지막 전투
노량해전 (임진왜란의 일부) | |||
![]() 노량 해전을 그린 그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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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 | |||
조선, 명나라 | 일본 | ||
지휘관 | |||
이순신(충무공)† 진린 등자룡† 이영남† 권준 이순신(무의공) 송희립 김완 우치적 나대용 이언량† 이완 고득장† 방덕룡† 손문욱 |
고니시 유키나가(순천) 소 요시토시(사천) 다치바나 무네시게(고성) 데라자와 마사시게(부산) 시마즈 요시히로(남해) 와키사카 야스하루남해) | ||
병력 | |||
조선 전선 83척 명나라 전선 63척 |
전선 500여 척 | ||
피해 규모 | |||
이순신 및 조선군 300명 사상, 명군 500여 명 사상 | 전선 200여 척 침몰, 100여 척 연합 수군에게 나포, 150여 척 파손 |
행주산성에서의 패배와 수군의 잇다른 패배 그리고 명나라의 참전으로 전세가 불리해진 일본군은 휴전을 제의하고 자국으로 철군했다가 휴전 협상이 결렬되자 1597년에 15만 대군을 동원하여 조선을 다시 침공했다. 이것이 정유재란(丁酉再亂)이다.
그러나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에 다시 임명하여 전세를 가다듬은 조선 수군이 명량 대첩에서 일본 수군을 격파하고, 도독 유정과 진린이 이끄는 명나라 수군의 참전으로 남부 해상권이 조선-명나라 연합군에게 다시 넘어가게 되자, 해상 보급로를 완전히 차단당한 일본군은 고전을 면치 못하였다. 그러다 이듬해인 1598년 음력 8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까지 급사하고, 뒤늦게 이 소식을 접한 조선 주둔 일본군의 수뇌부는 난관에 빠지게 된다.
계속되는 패전으로 병사들의 사기는 계속 저하되어 가고 있었고, 조선 수군에게 해상 보급로를 차단당한 채 겨울을 맞이해야 하는 최악의 상황이었으며, 고니시 유키나가 등 조선에 출병했던 일본군 장수들 대부분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이었으므로 히데요시가 죽은 후 정권을 잡게 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신경쓰지 않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일본군은 서둘러 전쟁을 끝내고 자국으로의 철군을 결정하고 순천, 사천, 울산 등지로 집결하며 철수를 서둘렀다.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의 조선 수군은 일본군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명나라의 병력과 함께 순천왜성에 주둔한 고니시 유키나카의 부대를 공격한다. 이것이 순천왜교 전투이다. 6차례에 걸친 전투에서 큰 전과를 세운 조선 수군은 일단 고금도로 귀환한 후, 고니시 유키나가의 퇴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고니시의 병력은 더욱 궁지에 몰리게 되었고, 사천의 선진리성에 주둔 중이던 시마즈 요시히로와 고성에 주둔 중이던 다치바나, 남해의 소씨 등은 고니시 유키나카의 부대를 구출하고 본국으로의 퇴로를 확보하기 위해 그해 음력 11월 18일 수군 6만여 명과 500여 척의 함선을 이끌고 노량으로 향했다.
그러나 시마즈 요시히로의 함대가 노량을 통과할 것을 예측한 이순신은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으로 하여금 남해도 서북쪽 죽도 뒷편에서 일본 수군의 퇴로를 차단해줄 것을 요청하고, 자신의 조선 수군은 일단 봉쇄망을 푼 후, 음력 11월 18일 오후 10시경 남해도 서북단인 관음포(觀音浦)에 매복시켰다.
이튿날인 음력 11월 19일 새벽 4시경, 시마즈 등이 이끄는 일본 함선 500여 척이 노량에 진입하자 매복해 있던 이순신의 조선 함선들이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순신의 함대가 적선 50여 척을 격파하고 200여 명을 죽이니 적은 이순신을 포위하려 했고, 이후 순천왜성 포구를 나선 고니시의 일본 수군과 진린의 명나라 수군이 합세하여 4시간여 동안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같은 날 오전 8시경, 전투는 막바지에 이르고 이미 200여 척 이상이 분파되고 150여 척이 파손돼서 패색이 짙어진 일본 수군은 잔선 150여 척을 이끌고 퇴각하기 시작했으며, 조선-명나라 연합함대는 오후 12시경까지 잔적을 소탕하며 추격을 계속하였다. 도주하는 일본 함대를 추격하던 이순신은 관음포에서 일본군의 총탄을 맞고 쓰러지면서, “싸움이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라는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으며, 가리포첨사 이영남 · 낙안군수 방덕룡·흥양현감 고득장 등과 명나라 수군 부총병 등자룡 역시 추격 도중 적탄에 맞아서 전사하였다. 이 때 도주하던 150여 척의 일본 함선 중 100여 척을 나포하니 겨우 50여 척의 패전선만이 도주했다고 한다.
결국 왜교에서 봉쇄당하고 있던 고니시의 군사들은 노량해전의 혼란을 틈타 남해도 남쪽을 지나 퇴각하여 시마즈의 왜군과 함께 부산에 집결, 퇴각하였으며 이 노량 해전을 끝으로 정유재란이 막을 내리고, 7년간의 긴 전쟁도 끝이 났다.
평가
조명 연합군은 이순신(李舜臣)과 진린(陳璘)이 이끌었고, 일본군은 순천왜성에서 탈출하려는 고니시군과 진린의 어처구니 없는 뇌물매수로 인해 발생하게 된 사천의 일본 구원병과 함께 서로 전투에 임하였다. 이 전투에서 조명 연합군은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순천의 일본군이 일본으로 탈출하는 것을 막으려 했으나, 전투 초기 진린은 여전히 멀찍이서 관망만 하다 조선 수군의 분투를 보고 마침내 참전하였으나 오히려 일본군에 포위되어 이순신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을 정도로 조명연합군의 공조가 여전히 좋지 않았다.
이 전투에서 450여척의 배를 격파하였으며 일본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반의 반도 안되는 숫자의 군사로(몇명의 군사였는지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없으므로 현재는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다) 대승리를 거두었지만 고니시는 조선군이 주변에서 달려온 일본군 구원 병력과 싸우는 틈을 타서 도망치는 데 성공하였기 때문에 아쉬운 느낌이 있다.
조명 연합함대
정유재란이 일어나면서 명나라는 육군은 물론 수군까지 파병한다. 먼저 도착한 것은 계금이 거느린 선발대 3천2백 명. 이들은 해상활동보다는 순천 왜교성의 고니시 유키나카가 다른 일본군을 구원하지 못하게 견제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어서 도독첨사 진린이 이끄는 명나라 절강 수군이 1598년 6월 무렵 조선에 도착한다. 도독은 정1품, 도독첨사는 정2품의 명나라 벼슬인데, 조선에서는 진린을 높여서 도독으로 불렀다. 진린의 벼슬의 정식명칭은 ‘흠차통령수병 어왜총병관 전도독부도독첨사(欽差總領水兵禦倭總兵官前都督府都督僉使)’였다.
그럼 명나라 수군이 전력에 도움이 되었을까? 명나라는 해금정책을 취하기는 하였지만 정화의 대원정도 한 나라이다. 그런 원양항해를 위해서는 당연히 대형 선박을 건조할 조선술이 필수적이다. 당연히 명나라 배는 컸다. 단, 그건 수송선 얘기다. 수군 전선인 사선이나 호선은 조선 판옥선에 비해 턱없이 작은 크기로 불랑기 같은 명나라 화포도 싣지 못할 정도로 실제 전력에 보탬이 되기 어려웠다. 이는 명나라는 왜구에 대한 토벌을 주로 육지에서 진행한 것에 기인한다. 하지만 전력에 도움이 안 될 것 같아도 상국 군대라고 군량미도 대줘야 하니, 이순신에게는 골칫덩어리만 늘어난 셈이다.
명 수군을 지휘하는 진린은 광동성 출신으로 명 세종 가정 말년(1566)에 지휘첨사가 되었고, 신종이 즉위한 만력 초기에는 부총병서동안참장으로 있다가 탄핵을 당하였다. 그러다가 임진왜란 때 부총병으로 발탁되었다가 병부상서 석성의 탄핵으로 다시 파직된 후, 정유재란 때 재기용되었다.
조선으로 온 진린은 조선 수군 진영으로 내려가기 전에 있은 선조 등 대신들의 환영식 자리에서 행패를 부리는 모습이 <징비록>에 전하고 있다.
임금이 청파들까지 나와 전라도로 내려가는 진린을 전송했다. 나는 진린의 군사가 우리 수령을 때리고 욕보이기를 함부로 하며, 노끈으로 찰방 이상규의 목을 매어 끌어서 얼굴이 피투성이가 된 것을 보고, 통역관을 시켜 말렸으나, 듣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같이 앉았던 대신들에게 말하되, “아깝게도 이순의 군사마저 또 패하겠구나. 저러한 진린과 군중에 같이 있으면, 견제를 당하고 의견이 서로 틀려서 반드시 장수의 권한을 빼앗고, 우리 군사들을 학대할 것이다. 제 뜻을 거스르면 성을 더 낼 것이요, 그대로 따르다가는 함정이 있을 것인즉, 어찌 이순신의 군사가 안전하겠는가?” 했더니 모두들 그렇다 하고 서로 탄식할 따름이었다. 진린은 고금도로 떠나면서도 전별하는 자리에서 선조에게 “배신들 중에 혹 명을 어기는 자가 있으면 일체 군법으로 다스려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이는 진린이 지휘권을 강력히 행사겠다는 의사표시인 것이다. 여기에 선조는 “이 말은 매우 중요한 일이니 비변사에 일러서 의논하여 조처하게 하라.”라고 지시한다. 비변사 역시 피난민들을 모아 어렵게 재건된 수군이 명군 때문에 붕괴될 가능성과 진린의 지휘권 행사로 이순신이 군사 없는 장수가 될 수 있다는 우려를 나타내고, 이순신에게 진린의 성품을 알려서 그의 지시대로 따를 것과 접대를 잘해줄 것 등을 당부하도록 하였다.
이순신은 수군을 재건하고 적들과 소규모의 해전도 벌이면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도움이 안 되는 명수군 선발대 계금에 이어 본진을 이끄는 진린까지 오게 되었으니, 이는 일본 수군 함대 500척이 접근하는 것보다 더 큰 위기였다. 일본 수군이야 다 죽여 버리면 되지만, 명나라 군사들이 육지에서처럼 행패를 부리면 조선 수군은 안 그래도 간신히 자급자족으로 보급을 안정시킨 마당에 이 모든 게 무너져버리기 때문이었다. 안 그래도 계금의 존재만으로도 비변사에서 그 문제를 논할 정도로 충분히 곤란함을 느끼는 조선 수군이었다. 진린의 군대까지 그런다면, 수군은 사실상 붕괴하고 만다.
진린이 고금도로 도착한 것은 7월 16일이었다. 진린의 도착에 순신은 정중하게 예의를 갖추며 성대한 잔치를 열어주었다. 여기에 진린 이하 명나라 수군장수들은 이구동성으로 이순신을 찬양하며 따랐다. 이것으로 진린이 이순신에게 좋은 인상을 가졌다고 한다.
진린이 고금도로 도착한 직후, 환영연회를 하는 도중에 일본 군선들이 오고 있다는 보고가 도착한다. 이순신은 즉시 연회를 중단하고 휘하 장수들에게 방비를 강화하고 망을 볼 것을 지시하는 등 전투에 대비한다. 7월 18일 동이 틀 무렵, 적선들이 나타나면서 본격적인 전투는 시작된다. 전투를 위해 조명 연합함대가 출동한다. 물론 주력은 조선군이고 명군은 참관수준이었다. 진린은 직접 배에 타지 않고 높은 언덕에서 전투를 참관한다.
전투 결과는 당연히 조선 수군의 승리였다. 조선군은 이 전투에서 적의 수급 71개를 취한다. 명군은 한 것이 없었다. 당연히 얻은 수급도 없었다. 하지만 공은 탐이 났다. 이순신으로서는 공을 진린에게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수급 71개 중 40개는 진린에게, 5개는 계금에게 양보하였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진린이 보고한 수급이 조선군의 전과를 뺏은 것이라는 사실이 명나라에도 알려진 것이다. 명 조정은 확실한 증거는 얻지 못하였기에 진상을 조사할 관리를 보낸다. 자칫하면 진린이 처벌을 받고 그 여파는 조명관계에도 미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이런 상황을 예견이라도 한 듯 전투 보고 장계를 적을 때 두 통의 장계를 올렸다. 한 통은 진린이 적 40명의 머리를 베었다는 장계, 다른 하나는 진린에게 공을 양보한 일을 사실대로 적은 장계였다. 조선 조정은 명 사신이 이순신의 장계를 요구하자 전자의 장계를 보여주면서 일을 무마하였다. 결국 이순신은 공을 진린에게 양보하면서도 자신의 공도 묻히지 않는 동시에 미묘한 외교문제까지 해결할 방책을 마련한 셈이었다. 이렇게 후하게 대접 받고 공까지 양보 받으면서 진린은 이순신에게 큰 호감을 품고, 명 수군은 조선 수군에 비교적 협조적으로 대한다.
김경진의 <임진왜란> 등에서는 바로 명량대첩의 공으로 이순신이 명 황제 신종으로부터 도독 관직을 제수받았기 때문에 진린이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통영 충렬사에는 이순신이 받은 도독인이 남아있는데, 도독인은 도독 벼슬을 상징하는 것이다. <정조실록>에도 정조가 “어제 황단에 공손히 절한 것은 신종 황제(神宗皇帝)의 기신(忌辰)이기 때문이었다. 그날 충신의 후예를 소견하고 유생은 시제(試製)하고 무사(武士)는 시사(試射)하였다. 그리고 나라를 다시 세워준 황제의 은혜를 길이 생각하고 우리 나라 충신에게 미치게 하여 전수(篆首)로 써서 충무공 이순신의 공렬(功烈)을 표창하고자 하였다. 이를 인하여 생각하니,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은 대의(大義)를 창명(倡明)하였으므로 그의 자손을 망배례의 반열에 참여하도록 허락하여 이미 정식을 삼았는데, 더구나 충무공은 황조(皇朝)의 도독(都督)이란 고인(誥印)을 받았음에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하략)”라고 말한 것이 남아 있는 등 여러 사료를 통해서도 이순신이 도독 벼슬을 받았음이 확인된다. 앞서 기술한 바와 같이 도독은 명나라의 정1품 벼슬, 진린의 정식관직인 도독첨사는 정2품이다. 하지만 <명사>나 <명 실록> 등에서는 이에 대한 기록이 나오지 않는다는 점에서 실제 이순신이 생전에 도독 벼슬을 받았을지 의문을 제기하는 반론도 존재한다.
어쨌거나 다른 곳과는 달리 좀 고분고분해지는 가 싶던 명 수군이지만, 이분의 <행록>에 따르자면 시일이 지나자 이들도 여전히 행패를 부렸다고 한다. 결국 이순신은 어느 날 명군 진영과 가까운 민가와 시설에 대한 철거령을 내리며 진영을 이동할 준비를 한다. 진린이 갑작스런 일에 이순신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유를 물어보자 이순신은“ 우리 나라의 군사와 백성들은 귀국의 대장이 온다는 말을 듣고, 마치 부모가 찾아나 온 것처럼 우러러 보았다. 그런데 이제 귀국의 군사들이 행패를 부리고 약탈하는 것으로만 일삼기 때문에 백성들이 살 수가 없어서 모두 다른 곳으로 피하려고 한다. 그래서 나도 대장으로서 혼자만 여기에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같이 배를 타고 다른 곳으로 옮기려 한다. 그렇게 여쭈어라.”고 답하니, 놀란 진린은 이순신을 찾아와서 이를 만류하니, 이순신은 이를 기회로 명군 군사들에 대해 제재 권한을 받는다. 이렇게 하여 명군의 범죄를 조선군이 처벌할 수 있게 됐으니, 수군 진영에서는 명군의 행패가 없어졌다.
진린은 그렇게 이순신 옆에서 지내면서 그의 성품에 감복하여 훗날 선조에게 올린 글에서 이순신을 가리켜 ‘경천위지지재 보천욕일지공 (經天緯地之才 補天浴日之功)’라면서 극찬하는데 경천위지지재란 하늘을 날로 삼고 땅을 씨로 삼아 베를 차는 재주, 즉 천하를 경륜할 재능이 있다는 말이고 보천욕일지공은 중국 신화에서 여와가 하늘의 뚫어진 곳을 메우고 의화가 해 10개를 낳아 감천에서 목욕시켰다는 이야기를 의미하니, 이순신의 공이 무너진 하늘을 메울 만큼 크다는 뜻이 된다. 물론 노량해전 후에도 자기 공을 챙길 거 다 챙기긴 했지만, 그래도 원균보다야.
노량 해전 전개 과정
순천 왜교성 전투에서 서로군과 수로군의 합동작전은 서로군의 무능력과 무의지로 실패하였지만, 고니시 유키나카는 여전히 속이 탔다. 일본으로의 철군 명령은 떨어졌고, 고향으로 가려면 당연히 일단 순천부터 떠야한다. 하지만 아무리 서로군이 전투력이 형편없다지만, 그 병세를 무시할 수는 없으므로 수많은 병력이 육지로 이동한다는 것은 이리저리 무리한 일이었다. 남는 방법은 배타고 바다는 건너는 것. 그러나 이 방법에는 치명적인 하자가 있었으니 바다에는 무수무시하기 짝이 없는 이순신이 있는 수로군이 버티고 있다는 사실이다. 조선 수군은 이순신이 지휘할 때는 한번도 패한 적이 없고, 명 수군은 조선 수군에 방해만 되어 보이지만 적어도 그 숫자는 일본군을 압박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이런 바다로 무턱대고 나간다는 것은 자살행위였다.
그래도 고니시에게 한 가지 희망적인 일은 명군은 싸울 의지가 없다는 점이었다. 이 전쟁에서 종말리 다가오니, 명군이 적극적으로 싸울 만한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일본군은 명군과 화의를 추진해가면서 철군을 준비하고, 고니시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고니시는 이를 위해 서로군의 유정과 협상을 꾀한다. 이러한 결과 유정은 고니시의 철수를 묵인하는 대신 왜교성을 넘겨받기로 약속하며, 고니시 진영에 인질 40여명을 보내기까지 한다.
그러나 문제는 육군이 아니라 수군이었다. 조명연합수군은 순천 왜교성 전투 후 전열을 재정비하여 고니시군을 강하게 압박하고 있었다. 고니시와 협상을 한 유정은 진린에게 “행장이 군사를 거두어 본국으로 돌아가고자 하니, 풀어 보냄이 좋겠소.”라고 전하지만, 진린은 “수군과 육군은 각각 책임이 다르니 각자 행동하는 것이 옳겠소.”라고 말하면서 유정의 제안을 거부한다. 진린은 유정에 대한 이전의 전투에서의 불만에 전공 다툼, 그리고 이순신이란 걸출한 장군의 영향으로 명나라 장수답지 않게 전투에 적극 나설 의사를 보이는 거 같았다. 심지어 11월 8일에는 이순신에게 적이 11월 10일 전후로 철수하려한다는 정보가 왔으니 이를 막자는 제안까지 하게 된다. 결국 조명연합함대는 출동하여 순천 앞의 유도에 정박한다.
11월 12일, 고니시는 선발대 10척을 내보내지만 조명연합함대에 의해 여지없이 궤멸당하고 만다. 그러자 고니시는 분노하여 자신의 진영에 있던 명군 인질 40명을 구속하고, 그 중 두 명의 팔을 잘라 유정에게 보내면서 “제독이 나를 속이기를 전후에 이와 같이 하니 나는 가지 아니하겠소.”라고 전한다.
그러나 말은 그렇게 해도 순천에 영원히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결국 수군의 위협을 어떻게든 처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한 고니시는 유정에게 사람을 보내서 “수병이 화해하지 아니하니 마땅히 급히 약속을 정합시다.”라고 전한다. 이는 유정이 수군을 설득시켜주길 원한 것이지만 진린과의 사이가 껄끄러운 유정은 “화해를 빌면 진린 장군을 이해시킬 수 있을 것이오.”라며 진린에게 알아서 뇌물을 바칠 것을 시사한다.
고니시는 이에 따라 진린에게 은 백냥과 보검 50구를 바치면서 “전쟁에는 피를 보지 않는 것을 귀하게 여깁니다. 길을 빌려 주어 환국하게 해 주기를 원합니다.”라고 청한다. 이와 함게 고니시는 유정에게는 수급 2천을, 진린에게는 수급 1천을 주겠다는 제안을 하였는데 진린은 결국 뇌물에 마음이 넘어가서 수급 2천을 주면 길을 열어주겠다 말한다. 그러자 고니시는 연일 뇌물을 바치면서 “남해(南海)에 사위가 있는데 그와 만나 의논해야 하므로 사람을 보내어 불러오려고 하니 이곳의 배를 내보내주기 바란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를 전해들은 이순신은 “속임수의 말을 믿어서는 안 된다. 사위를 불러 온다는 것은 구원병을 청하려는 것이니 결코 허락할 수 없는 일이다.”라고 고니시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걸 반대하였으나, 진린은 듣지 않고 끝내 14일 일본군 8명이 탄 배의 통과를 허용하고 만다. 이에 대한 보답인지 고니시는 14일 저녁에는 돼지 2마리와 술 2통을 바치고 15일과 16일에도 꾸준히 진린 진영을 오가며 뇌물을 바친다.
그리고 고니시는 16일에 다시 군량을 가득 실은 중선을 출항시켰으나 소비포 만호 소계남과 당진포 만호 조효열의 추격을 받아 결국 한산도 앞바다에 이르러 배를 버리고 도망간다. 조선 수군이 노획한 배와 군량은 명군에게 뺏기고, 소계남과 조효열은 빈손으로 이 사실을 이순신에게 보고 한다.
고니시는 진린에게 왜 강화하기로 해 놓고 공격하는 것이냐며 항의하지만, 진린은 그 공격은 자신이 아니라 이순신이 한 것이기에 자신은 알 바 아니라고 대답한다.
하지만 이미 14일에 순천 왜교성을 빠져나간 배가 있다. 이는 일본군 구원 병력을 불러올 게 분명하니, 곧 도착할 것이었다. 이에 대해 이순신은 휘하 장수들과의 논의 끝에 고니시를 구원하러 올 일본군을 먼저 공격하기로 결정한다. 순천 앞바다에서 머물 경우 순천의 고니시군과 후방에서 오는 구원군을 상대로 앞뒤의 적에게 포위당할 우려가 있기에, 수군은 노량 해협 인근으로 함대를 이동시키기로 한다. 그리고 이 사실은 진린에게도 통보된다. 진린은 고니시에게 소소한 뇌물을 받은 외에는 타협에서 별 진전도 없거니와, 이순신이 출전하는데 자신은 가만있으면 상국의 장수로서의 위신이 떨어질 것을 걱정했는 지 이순신을 따라 출전을 결정하게 된다.
전투를 앞두고 진린은 불길한 징조를 느끼고, 그 우려를 담은 편지를 이순신에게 보냈다고도 한다.
「내가 밤이면 천문을 보고 낮이면 인사를 살피는바, 동방에 대장별이 희미해 가니 머지않아 공에게 화가 미치리이다. 공이 어찌 이를 모르리요. 어찌하여 무후(=제갈량)의 기도로 예방하는 법을 쓰지 않습니까?」
진린은 삼국지에서 제갈량이 자신의 수명이 다 했음을 알고 하늘에 기도를 하여 이를 연장했다는 고사를 들어 이순신도 이를 따를 것을 제안하였지만, 이순신은 답장을 보내면서 이를 정중히 거절한다.
「나는 충성이 무후만 못하고, 덕망이 무후만 못하고, 재주가 무후만 못하여 세 가지가 모두다 무후만 못하매, 비록 무후의 기도법(祈禱法)을 쓴다 한들 하늘이 어찌 들어줄 리가 있으리까?」
고니시의 구원 요청을 받은 일본군은 사천성에 있던 시마즈 요시히로, 고니시의 사위인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와 그와 함께 남해에 있던 다치바나 무네시게, 그리고 부산에 있던 데리자와 마사나리와 다카하시 무네마스 등의 무장들이 고니시 구하기에 나선다. 그 병력은 배 500여 척에 이르렀다.
조명연합수군은 조선의 판옥선 80여척에 9월말 합류한 유격 왕원주의 배 100여척을 포함한 명나라 수군 300여척이었다. 하지만 크기가 작은 명나라 군선은 사실상 숫적인 압박을 가하는 게 전부였고, 주력은 조선의 판옥선인 게 당연했다. 이 때 진린과 그의 부장 등자룡은 조선 수군으로부터 판옥선을 각각 한 척씩 받아서 이것을 타고 전투에 참가하였다. 이들의 출발은 경상우수사 입부 이순신에 의하여 보고 되어 조명연합수군은 전투체제로 들어간다.
구원군이 순천으로 향하자면 반드시 노량해협을 지나야만 했다. 이순신은 바로 이 곳을 전투의 적지로 보고, 조선 수군은 남해 관음포에 주둔하고 명군은 곤양 죽도에서 매복한다. 조명연합군인 어둠 속에서 작은 소리도 새어 나가지 않도록 입에는 방어래를 물고 조용히 이동하여 대기하고 있었다.
드디어 11월 19일 새벽 2시경, 이순신의 예측대로 왜군의 구원군이 노량 해협을 조심스럽게 통과하면서 접근하였다. 어둠 속에서 적이 나타났다는 것을 알게 된 이순신 함대는 적선단이 사정거리 안에 도달하자 신호와 함께 양측 함대가 노량 해구에서 맞닥뜨리면서 전투는 시작되었다. 이른 새벽인데다가 달빛도 없었기에 전투는 어둠 속에서 혼전의 양상을 띄었다. 조선 수군은 어둠 속에서 시야 확보를 위해 화포 사거리보다 더 가까이 적군에게 접근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 수군은 화포 사격은 물론 불붙은 섶을 마구 적선에 던져가며 맹공을 가하였다. 바람도 조명연합수군에 유리한 북서풍으로 불어서 이 화공은 더욱 효과적이었다.
고니시 목숨 구하러 왔다가 자기들 목숨 부지하기도 어렵게 된 일본 수군은 형세를 지탱할 수가 없는 와중에 조명연합수군의 포위망 너머의 넓은 바다를 발견하고 그 방향으로 필사적으로 탈출한다. 그러나 그 곳은 구원의 길이 아니라 지옥이었다. 일본 수군은 넓은 바다가 아닌 남해도 관음포 안으로 들어간 것이었다. 관음포는 지금은 간척사업의 영향으로 바다가 깊지 않으나 과거에는 포구 입구에서 안쪽까지 거리가 멀어서 잘못 보면 수평선과 지평선을 혼동할 지경이었다. 일본군은 어둠 속에서 이를 혼동하고 스스로 포구 안에 갇히고 만 것이었다.
뒤늦게야 자신들이 지옥으로 들어온 걸 안 일본군은 일부는 남해도로 상륙하여 도주하였지만 그렇지 않은 병력들은 목숨을 걸고 싸워야 했다. 안 그래도 어둠 속의 전투에 이런 필사적인 싸움으로 전투는 이전의 해전에서 보기 어려운 혼전으로 전개되었다. 그래서 전투 중에 한 때는 진린의 배가 포위당하여 일본군이 배 위에 까지 올라와 진린을 노렸지만 아들 진구경이 몸으로 막으면서 부상까지 당하였다. 진린은 당장의 위기는 면하였지만 배는 여전히 위험하였다.
이런 전투 중에 진린의 부장 등자룡이 탄 배는 일본군의 집중공격에 의하여 결국 등자룡은 전사하고 그 배는 완전히 불태워졌다. 이전에 육지 가까이 접근한 판옥선에 일본군이 불을 던진 적이야 있었지만, 이순신이 참전한 해전에서 적군의 공격으로 판옥선이 완전히 불타 버린 건 이것이 처음이었다.
포위된 진린의 배를 구하려 나선 이순신은 적선 중에 다른 배보다 높고 위에는 붉은 천이 있으며, 금 갑옷을 입은 무장이 전투를 감독하는 배를 발견하고, 그 배를 공격하여, 장대 위에 있던 적장수 세 명 중 한 명이 쓰려졌다. 그러자 진린의 배를 포위한 적선들이 포위를 풀고 이순신이 공격하는 배를 구원하러 나서니, 덕분에 진린은 무사할 수 있었다.
전투가 계속되는 중에 서서히 날이 밝았다. 이순신은 혼전 중이었다지만 조선 수군의 최고위 장수임에도 직접 북채를 들고 독려하면서 앞에서 전투를 지휘하였다. 당연히 이순신의 좌선도 위험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배 위로 탄환이 날아오면서 군관 송희립이 이에 맞아 부상을 당하고 쓰러졌다.
탄환이 노린 건 송희립만이 아니었다. 경황없는 전투의 와중에 적 조총수가 쏜 탄환에 이순신이 맞아 쓰러지고 말았다. 그러나 이순신은 그 와중에도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이순신은 즉시 주위에 방패로 신체를 가리게 명령하였다. 그리고 그 유명한 마지막 한마디를 남긴다.
“싸움이 바야흐로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
이 유언을 끝으로 위대한 영웅은 눈을 감는다. 하지만 이순신의 유언을 받은 큰 아들 이회와 조카 이완이 전투를 독려하고, 쓰려졌던 송희립이 부상에도 불구하고 다시 일어나서 전투에 임하였다. 전투는 여전히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결국 11월 19일 정오경, 간신히 살아남은 일본 군선들이 물러나고 전투는 조명연합함대의 대승으로 끝났다. 순천 왜교성의 고니시는 자신을 구하러 온 구원군이 몰살당하는 와중에 묘도 서쪽 수로를 은밀히 통과하여 남해도 남쪽으로 크게 우회하여 부산으로 탈출하였다. 고니시는 자신이 살아남는 데 크게 기여한 유정에게 감사해야 할 것이다. 순천 왜교성 전투에서 서로군이 잘 싸웠으면 고니시는 전사나 할복 혹은 항복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을 테니까. 고니시의 생명의 은인 유정은 텅 빈 예교성을 접수하고 큰소리치지만, 서로군에 종군 중이던 이덕형을 통해 모든 사실을 파악하던 선조와 조정에서 보자면 뭐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웃기는 일이었다. 물론 대놓고 말은 못 했지만.
고니시를 구하러 온 시마즈 요시히로와 소 요시토시 등은 수많은 부하와 배들을 잃은 채 간신히 목숨을 건지고 달아났다. 이순신이 금 갑옷을 입은 적장이 있는 큰 배를 공격하려 했다는 점을 보면 시마즈 요시히로나 적어도 그에 버금가는 무장이 이순신에 의해 죽음의 위기에 처했을 것이다. 일본 입장에서는 천만다행히도, 조선 입장에서는 아쉽게도 살아 돌아갔지만.
일본의 피해는 <선조실록>에 실린 좌의정 이덕형의 보고로는 '적선 200척 격침에 전사자 수천 명', 명나라 군문이 통보한 내용은 '100척 포획에 200척 분멸, 수급 500여급 참수에 물에 빠져 죽은 자는 수를 알 수 없다' 하였고, 조경남의 <난중잡록>에는 '적선 50여척만이 살아 돌아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기록이 엇갈리는 면이 있지만, 이덕형은 서로군에 종군 중이었기에 자세한 전과를 확인할 수 있는 위치이며, 조경남은 의병장으로 순천 왜교성 전투에 참전하였기에 역시 단순히 소문만 듣고 노량 해전에 대한 기록을 남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확인된 전과 200척 격침에 피해 없이 온전히 살아 돌아간 배가 50척'이라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조명연합군의 피해는 명나라는 등자룡 등 세 명의 장수의 전사가 확인되고, 이 외에 등자룡과 동승한 군사들이 전사하였을 것이다. 조선군은 30여명이 전사하였는데 그 중 10여명이 가리포 첨사 이영남, 낙안 군수 방덕룡 등 장수급 인물이었으며, 좌선에 동승한 송희립, 탄환을 여섯 발이나 맞고도 분전한 유형 등의 군관 중에서 부상자도 있었다. 배의 피해는 등자룡의 판옥선 소실을 제외하고는 거의 없었지만, 가장 큰 손실은 통제사 이순신의 전사였다.
전투가 끝난 후 진린은 이순신에게 구해준 것에 대하여 사례를 하려 하였으나, 전사 소식을 전해 듣고는 세 번이나 쓰러지면서 “나는 노야(老爺 이순신을 지칭)가 살아와서 나를 구원한 것으로 생각했는데, 어찌하여 죽었는가?”라 말하면서 통곡하였다.
군사들도 이순신의 전사 사실을 알고 바다가 떠나가도록 통곡하였고, 백성들도 이순신의 전사 소식에 노인에서 어린 아이에 이르기까지 골목을 메우고 통곡하였다. 시장에 나간 자들은 이순신을 기리기 위해 술자리를 피하였으며, 명나라 병사들까지도 고기를 물리고 먹지 않았다. 이순신의 상여가 들어오자 호남의 선비들은 글을 지어 제사를 지냈으며 관을 운반하려 하면 백성들이 수레를 잡으면서 “공이 실로 우리를 살렸는데, 이제 공이 우리를 버리고 어디로 가시오.”라며 말하면서 우니, 관을 실은 수레가 나갈 수가 없었다.
명나라 군문 형개는 “바다 위에 사당을 세워 충혼을 표창하여야 할 것이다.”하였으나 이루어지지 않자, 바닷가 백성들이 스스로 사당을 지으니 이것이 현재 전남 여수에 있는 '충민사'이다. 백성들이 죽음에 통곡하고 백성들이 사당을 지은 영웅, 이순신은 요즘 일부에서 우기고 있는 것처럼 지배층의 정치적 필요에 의하여 ‘위에서 만들어진 영웅’이 아니라, 지배층인 사대부들이나 피지배층인 백성, 상국인 명나라까지 누구나 인정하는 진정한 영웅이었다.
명량 대첩 이후로는 서인이나 북인들도 이순신을 공격하는 일이 없었으며, 조선을 지배하는 사대부들도 이순신을 비판할 수 없었다. 명나라 장수들도 종전 후 선조가 찾아가서 명군 덕분에 위기를 넘겼다고 하니, 그 오만한 명나라 장수들이 자신들을 낮추고 이순신을 더 칭송하였다. 선조는 이런 명나라 장수들의 말에도 이순신을 인정하는 말은 하지 않고 명군만 높이거나 화제를 돌렸지만, 사실 선조가 그토록 이순신을 시기하고 괴롭힌 것도 이순신의 능력과 업적, 그리고 백성들의 존경이 자신이 따라갈 수 없는 경지임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전투 종료 후 경상우수사 입부 이순신이 임시로 함대를 지휘하여 귀환하였고 충청병사로 있던 이시언이 일단 통제사로 임명되었다. 아직 경상도 해안에는 수많은 적이 남아 있었지만 이순신이 없는 이상 더 이상의 전투는 이어지지 않았고, 일본군이 자국으로 모두 철수하면서 7년간의 전란은 막을 내렸다.
항간에는 노량해전을 이순신이 도망가는 적을 공 좀 세우려고 쫓으려다 죽은 것으로 폄하하는 이들도 있는데, 아무것도 모르고 하는 헛소리이다. 이 전투는 엄연히 고니시 구원군을 맞아 불가피하게 이루어진 전투였다. 이순신이 일본군을 끝까지 위협한 것은 복수의 의미도 있지만, 언제 재침할지 모르니 조금이라도 적 전력을 감소시킬 필요가 있은 것이었다. 실제로 전후에도 몇 년간 명군이 조선에 주둔하였으며, 강항 같은 귀환 포로들의 보고를 보면 일본 내에 조선재침을 주장하는 무리도 있었음이 확인된다. 물론 포로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내분을 빚는 일본 내의 정치상황으로 보아 재침 가능성은 낮다고 판단했으며 실제 역사를 돌아보면 그 판단이 정확했지만, 종전 직전 시점에서는 일본의 재침 가능성은 무시할 수 없는 위협이었다. 결국 마지막 전투에서 승리를 거둠으로 이순신과 조선 수군은 끝까지 일본군에게 악몽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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