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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671 : 조선의 역사 213 (선조실록 78) 본문
한국의 역사 671 : 조선의 역사 213 (선조실록 78)
임진왜란 경과
제14대 선조실록(1552~1608년, 재위: 1567년 7월~1608년 2월, 40년 7개월)
임진왜란(조일전쟁)이 삼국에 끼친 영향
약 7년 간에 걸친 전쟁은 끝났으나 이 전쟁의 휴유증은 그후 오랫동안 계속되면서 조선, 명, 일본에 막대한 영향을 끼쳐 각국은 각각 크다란 변화를 겪게 된다.
조선은 연산군 이후 문란을 거듭하던 사회가 이 난을 계기로 완전히 붕괴되어 경제적인 파탄과 관료기구의 부패가 극심해진다. 전화에 따른 인명피해는 물론이고 전국적으로 농경지가 황폐화되어 170만 결이던 농토가 54만 결로 줄어들었다.
그래서 이 난 중에서 국가 재정의 마련책의 일환으로 남속책을 시행하게 되었다. 이 남속책은 소정의 곡물이나 돈을 받고 특전을 부여하는 것인데, 이것의 시행으로 임진왜란 동안 많은 향리, 서얼, 천민, 노비 등이 신분 상승의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게다가 전공을 세운 사람에게는 신분에 상관없이 특전을 주거나 면천의 혜택을 주었기에 조선 사회는 신분 제약이 해이해질 수밖에 없었다.
전란을 전후해서 민간의 생활은 처참해져 심지어는 인육을 먹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고, 전란 중에 조정에 불만을 품고 내란을 획책하는 사례도 있었다. 1594년 송유진의 난, 1596년 이몽학의 난이 당시에 일어났던 대표적인 반란사건으로 일반 민중에게 대단한 영향을 끼쳤다.
문화재의 소실도 엄청났다.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등을 위시한 많은 건축물이 소실되고 사적, 미술품 등이 없어지거나 약탈당하엿다. 또 역대 실록을 보관하던 사고도 전주 사고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불에 타고 말았다.
하지만 전란이 꼭 악영향만 끼친 것은 아니었다. 전란의 영향으로 그동안 소홀하게 다루어졌던 국방 분야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타민족과의 갈등을 통해 애국심이 고취되기도 했다. 또한 병제를 재편하고 무기의 개량이 착수되었으며 병술도 개혁했다. 1594년에는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무예를 조련하게 했으며, 지방에도 예비군 개념인 속오군을 두어 교관을 파견하고 무예를 가르쳤다. 무기로는 종래의 주무기인 활, 창, 검 등의 무기와 총통, 완구, 화전 등의 화기 외에 난 중에 비격진천뢰와 화차가 발명되었고, 일본과의 전투에서 습득한 조총을 제조하여 실전용으로 배치하기도 했다.
또한 전란 때 명군이 지원한 데 대한 숭명사상이 더욱 높아지고, 그들에 의해 관우 숭배사상이 전래되어 한양을 비롯한 여러 곳에 관우묘가 세워지는 등 민간 신앙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하였다.
한편 일본도 전란으로 인해 많은 변화를 겪어야 했다. 오랫동안의 무리한 전쟁으로 국민 생활은 피폐해졌으며, 봉건 제후의 세력이 급격히 약화되어 코쿠카와 막부가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그러나 조선에서 끌고간 도공들에 의해 도자기 제도업이 크게 발전하엿고 약탈해간 조선활자의 영향으로 활자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거기에다 포로로 끌고 간 조선 학자로부터 성리학을 배워 새로운 지도이념을 수립하는 밑거름을 마련하였다. 특히 퇴게집 등 중요한 저서들을 가져가 일본 문화의 발전에 획기적인 계기를 이루기도 했다.
명나라 역시 큰 변활 겪었다. 조선의 요청으로 대규모 원군을 파병했던 명은 엄청난 국력이 소모되었고, 그 때문에 국가 재정이 문란해져 국방에 어려움이 초래되었다. 그러한 명의 국방력 약화는 여진족의 세력 팽창을 방치하는 결과를 낳아 결국 여진족에 의해 명이 망하게 되는 원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이처럼 임진왜란은 17세기 동아시아 국제 정세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중요한 사건이엇다. 조선은 비록 일본의 침략을 받아 엄청난 피해를 입고 그 후유증으로 한동안 고통이 지속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민간의 힘이 커지고 양반 중심의 정부의 힘이 약회되는 현상을 낳았다.
아래는 한민족연구소의 덕광님이라는 분이 작성한 글이다. 참고하시길......
한중일의 임진왜란에 대한 평가
올해는 임진년으로 (壬辰年)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420년째 되는 해이다. 임진왜란은 조선과 일본, 명나라가 대규모로 충돌한 동북아시아의 국제 질서를 재편한 이들 삼국의 국제 전쟁이었다. 임진왜란 7년이라는 오랜 전쟁 기간만큼이나 전쟁이 남긴 상처와 여파는 우리에게 아주 컸다. 또한 임진왜란의 전쟁 후 중국과 일본에서는 바로 임진왜란의 후유증으로 정권이 교체되는 비운을 역사를 그대로 맞는다.
중국에서는 조선에 대한 무리한 군사 지원으로 국력이 쇠약해진 명나라가 임진왜란 후 50여년 뒤 멸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섰으며, 일본에선 전쟁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정권이 무너지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새로운 정권이 수립된다. 조선은 비록 일본을 한반도에서 몰아냈지만, 최대 100만 명 이상의 아까운 조선 백성들이 목숨을 잃었고, 전 국토의 70%가 황폐해졌으며 조정은 급격히 보수화되었다.
지금 전쟁의 주요 당사자인 3국은 임진왜란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한마디로 임진왜란은 동북아시아를 포괄한 국제전이었다고 강조할 수 있다. 그러하기 때문에 임진왜란은 당시와 지금 동북아시아의 국제정세를 바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일본인들은 임진왜란은 일본을 침략한 중국 등에 대한 복수라며 임진왜란의 전쟁을 철저하게 정당화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옛 부터 중국은 일본을 여러 번 침략했으나 일본이 외국을 징벌한 일은 진구코고(신공황후)가 서쪽 삼한을 정벌한 이래 천 년 동안 없었다."며 중국을 침략하기 위한 명분으로 조선 침략을 합리화한다. 이미 일본은 14세기 후반부터 중국의 정치적 약점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일본은 중국 동남 해안지대인 석강(淅江), 복건(福建), 광동(廣東) 등을 중심으로 잦은 침략과 약탈을 일삼으며 중국에 대한 전쟁 정보력을 얻는다. 더구나 명나라 말기 16세기에는 요동마저 정치적으로 불안한 지역으로 등장한다.
일본은 이 불안한 요동지역을 발판으로 중국으로 진출하기 위한 임진왜란을 일으킨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동북아시아는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책봉 - 조공의 국제외교관계를 중시하는 관계였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에 대해서 중국 명나라의 병부상서 석성(石星)은 결정을 내린다. 만일 일본이 조선을 빼앗아 차지하여 요동을 엿본다면 1년도 안되어 요동을 잃고 바로 중국의 수도인 북경마저 위험해질 것이다. 따라서 조선을 지켜야만 요동과 중국을 지킬 수 있을 것이다.
중국은 조선을 구원하기 위해 임진왜란에 참전한 것이 아니라, 명나라 자체의 국가적 안보를 확보하기 위해 임진왜란에 참전한 것이다. 당시 중국이 부득이 일본과 전쟁을 할 것이라면, 조선에 나아가 싸우는 것이 훨씬 전략적으로 유리했다. 요컨대 명은 자국의 안보를 위해 전략적인 차원에서 조선 임진왜란에 참전했으며 그 과정에서 지형적인 조건과 경제적인 이해관계까지 모두 세심하게 고려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중국의 전략은 1620년 명나라의 신료 이징의(李徵儀)가 솔직히 고백한 바 있다. 나아가 조선의 신료들 또한 북경(北京)에서 요동으로 이어지는 일대가 조선과 잇닿아 있다는 현실과 조선을 보전하는 것이 명의 보전을 위해 중요하다는 인식 때문에 명군의 참전이 이루어져야한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한중일의 임진왜란 속에서 우리는 새로운 배움의 장을 열어야만 한다.
일본 전국시대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정치적 야망과 자국의 안보를 지키기 위한 명의 태도, 임진왜란의 전운이 감도는 전쟁 정보력이 있음에도 당파싸움에만 전념했던 조선 조정의 무기력함, 이는 모두 동북아시아 국제전이 나은 승리 없는 패배의 전쟁이었다. 현재 중국, 일본, 대한민국은 여전히 동북공정과 독도문제로 역사전쟁을 하고 있으며, 중국과 북한은 여전히 21세기 문명사회에서도 책봉-조공으로 이어지는 전근대적인 역사적 관계를 또한 지속하고 있다. 우리는 모두 이 패배의 국제전을 통해 새로운 동북아시아 국제질서와 우리의 나아갈 바를 바로 찾아야만 할 것이다.
출처 :한민족역사연구소 글쓴이 : 덕광님
난중일기
《이충무공 난중일기 부서간첩 임진장초》는 이순신이 임진왜란의 7년(1592 ~ 1598년) 동안 쓴 군중일기(軍中日記)로 전란의 구체적인 기록이 담겨 있다. 일기 7책과 서간첩 1책, 임진장초 1책까지 총 9권이 대한민국의 국보 제76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한민국의 국보 | |
지정번호 | 국보 제76호 |
소재지 | 충남 아산시 염치읍 백암리 현츙사 |
제작시기 | 조선 선조 |
1962년 12월 20일 지정 |
1592년(선조 25년) 음력 5월 1일부터 1598년(선조 31년) 음력 9월 17일까지, 즉 임진왜란이 일어난 다음 달부터 시작하여 충무공이 전사하기 전달까지의 것으로,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에 전해진 난중일기의 자필 초본이다.
내용은 시취(時趣)에 넘치는 일상생활, 동료·친척과의 왕래 교섭, 사가(私家)의 일, 수군의 통제에 관한 비책(秘策), 충성과 강개의 기사 등이 수록되어 있다.
임진왜란 연구에 없어서는 안 될 사료(史料)이다.
징비록(懲毖錄)
징비록(懲毖錄)은 조선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서애(西厓) 류성룡이 쓴 임진왜란에 대한 1592년(선조 25)에서 1598년(선조 31)까지 7년 동안의 일을 수기(手記)한 책으로, 저자가 벼슬에서 물러나 한거(閑居)할 때 저술하였고 1604년(선조 37년) 저술을 마쳤다. 대한민국의 국보 제132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한민국의 국보 | |
지정번호 | 국보 제132호 |
소재지 | 경상북도 안동시 |
제작시기 | 조선시대 |
1969년 11월 7일 지정 |
징비란 《시경(詩經)》의 소비편(小毖篇)의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豫其懲而毖役患)”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왜란을 겪은 후 류성룡은 후세에 길이 남길 쓰라린 반성의 기록으로 이 책을 저술하게 된다. 이책의 내용에는 임진왜란의 원인과 결과 그리고 자신의 잘못과 조정의 실책, 백성들의 임금과 조정에 대한 원망 등을 담고 있다. 《징비록》은 이후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의 공과를 평하기 위한 주요 기록으로 활용되었다.
《징비록》은 〈징비록〉 상·하의 두 권과 〈녹후잡기〉, 〈근포록〉(芹曝錄) 2권, 〈진사록〉(辰巳錄) 9권, 〈군문등록〉(軍門謄錄) 2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쟁 전의 조선과 일본의 상황과 관계, 일본의 침략에 따른 조선 사회의 붕괴와 의병 봉기, 이순신의 승전, 전선 교착, 강화 교섭과 정유재란, 수군의 최후 공격, 일본군의 패퇴 등이 편년체로 기록되어 있다.
근포록은 저자가 올린 차(箚) 및 계사(啓辭)를 모은 것이고, 진사록은 임진년(1592년)으로부터 계사년(1593년)까지 종군하는 동안의 장계를 수록하고 있다.
군문등록은 1595년(선조 28)부터 1598년(선조 31)까지 저자가 도체찰사로 재임 중의 문이류(文移類)를 모은 것으로 여기에 자서(自敍)와 자발(自跋)이 들어 있다. 이 책의 처음 간행은 1633년(인조 11) 저자의 아들 류진이 《서애집(西厓集)》을 간행, 이후 원본의 체재를 갖추었다는 그 전본도 간행되었다. 1695년(숙종 21년 : 일본 겐로쿠 8년) 일본 교토(京都) 야마토야에서 중간하였으며, 1712년(숙종 38) 조정에서 《징비록》의 일본 수출을 엄금할 것을 명령한 일이 있다.
- 1604년(선조 37년) 저술을 끝냄.
- 1633년(인조 11년) 류성룡의 아들 류진(柳袗)이 《서애집(西厓集)》과 함께 내었으며 기록에 따르면 널리 읽혀졌다고 한다.
- 1647년 다시 독립된 16권 7책으로 간행했다.
- 1695년 일본 교토의 야마토야(大和屋)에서 간행되었다.
- 1712년 숙종 때 《징비록》이 일본에서 간행된 것을 경계하여 금단하였다.
- 1936년 조선사편수회에서 경상북도 안동군 풍산면 하회리 종가(宗家)의 소장본인 저자 자필의 필사본(筆寫本)을 《조선사료총간(朝鮮史料叢刊)》 11집에 《초본징비록(草本懲毖錄)》이라 하여 300부를 영인하여 출간하였다.
- 1958년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에서 영인한 《서애집(西厓集)》 끝에도 영인되어 있다. 《광사(廣史)》 3집에도 《징비록》과 《녹후잡기》가 합쳐 수록되어 있다.
- 2003년 영역본 《The Book of Corrections》을 최병현 교수가 캘리포니아대 버클리 동아시아 연구소에서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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