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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657 : 조선의 역사 199 (선조실록 64) 본문
한국의 역사 657 : 조선의 역사 199 (선조실록 64)
임진왜란 경과
제14대 선조실록(1552~1608년, 재위: 1567년 7월~1608년 2월, 40년 7개월)
임진왜란 전투목록
아래 임진왜란 전투 목록은 임진왜란 중 있었던 전투 목록이다. 시간 순으로 작성되었으며, 모두 음력으로 날짜순대로 표시했다. 주요 전투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1592년
- 다대포 전투 : 4월 13일 ~ 4월 15일
- 부산진 전투 : 4월 14일
- 동래성 전투 : 4월 15일
- 경상도 및 충청도 함락 : 4월 17일~4월 28일
- 상주 전투 : 4월 25일
- 충주 탄금대 전투 : 4월 28일
- 한강 전투 : 5월 2일
- 옥포 해전 : 5월 7일
- 합포 해전 : 5월 7일
- 적진포 해전 : 5월 8일
- 해유령 전투 : 5월 16일
- 임진강 전투 : 5월 18일
- 기강 전투 : 5월 18일
- 사천 해전 : 5월 29일
- 당포 해전 : 6월 2일
- 당항포 해전 : 6월 5일
- 용인 전투 : 6월 5일
- 무계 전투 : 6월 6일
- 율포 해전 : 6월 6일
- 정암진 전투 : 6월 8일
- 여주 전투 : 6월 10일
- 제1차 평양 전투 : 6월 15일
- 웅치 전투 : 7월 7일
- 이치 전투 : 7월 8일
- 한산도 대첩 : 7월 8일
- 제1차 금산 전투 : 7월 9일
- 안골포 해전 : 7월 10일
- 우척현 전투 : 7월 10일
- 제2차 평양 전투 : 7월 17일
- 영천성 전투 : 7월 24일~7월 27일
- 지례 전투 : 7월 29일
- 제3차 평양 전투 : 8월 1일
- 청주 전투 : 8월 1일
- 제1차 경주 전투: 8월 2일
- 제2차 금산 전투 : 8월 18일
- 영원산성 전투 : 8월 25일
- 장림포 해전 : 8월 29일
- 화준구미 해전 : 9월 1일
- 다대포 해전 : 9월 1일
- 서평도 해전 : 9월 1일
- 절영도 해전 : 9월 1일
- 초량목 해전 : 9월 1일
- 부산포 해전 : 9월 1일
- 연안 전투 : 9월 2일
- 제2차 경주 전투 : 9월 8일
- 북관대첩 : 1592년 9월 16일~1593년 1월 28일
- 창원 전투 : 9월 27일
- 제1차 진주성 전투 : 10월 10일
- 독성산성 전투 : 12월 11일
1593년
- 제4차 평양 전투 : 1월 9일
- 성주 전투 : 1월 15일
- 벽제관 전투 : 1월 27일
- 웅포 해전 : 2월 10일~3월 6일
- 행주 대첩 : 2월 12일
- 제2차 진주성 전투 : 6월 29일
1594년
- 제2차 당항포 해전 : 3월 4일
- 영등포 해전 : 10월 1일
- 장문포 해전 : 10월 4일
1597년
- 칠천량 해전 : 7월 16일
- 고령 전투 : 8월 15일
- 남원 전투 : 8월 16일
- 황석산성 전투 : 8월 16일
- 어란포 해전 : 8월 27일
- 직산 전투 : 9월 7일
- 벽파진 해전 : 9월 7일
- 명량 해전 : 9월 16일
- 제1차 울산성 전투 : 12월 24일
1598년
- 절이도 해전 : 7월 19일
- 제2차 울산성 전투 : 9월 21일
- 사천성 전투 : 9월 28일
- 순천성 전투 : 9월 20일~10월 7일
- 노량 해전 : 11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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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 해전 | 장소 | 조선군 | 일본군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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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6월 16일 (음력 5월 7일) |
옥포 해전 | 거제시 옥포 | 이순신 | 도도 다카토라 | 조선군의 첫 승리 |
1592년 6월 16일 (음력 5월 7일) |
합포 해전 | 진해시 웅천동 | 이순신 | ||
1592년 6월 17일 (음력 5월 8일) |
적진포 해전 | 고성군 거류면 통영시 광도면 | 이순신 | ||
1592년 (음력 5월 29일) |
사천 해전 | 사천시 용현면 | 이순신 | 구루지마 미치유키 | 처음으로 거북선을 사용 |
1592년 (음력 6월 2일) |
당포 해전 | 통영시 산양읍 | 이순신 | 카메이 코레노리 | |
1592년 (음력 6월 5일) |
당항포 해전 | 경남 고성군 회화면 당항포리 | 이순신 이억기 |
||
1592년 (음력 6월 6일) |
율포 해전 | 거제시 장목면 | 이순신 | ||
1592년 8월 14일 (음력 7월 8일) |
한산도 대첩 | 통영시 한산면 | 이순신 원균 이억기 |
와키사카 야스하루 | |
1592년 8월 16일 (음력 7월 10일) |
안골포 해전 | 진해시 안골동 | 이순신 원균 이억기 |
구키 요시아키 | |
1592년 (음력 8월 29일) |
장림포 해전 | 부산시 사하구 장림동 | 이순신 | 명량대첩도 | |
1592년 10월 5일 (음력 9월 1일) |
화준구미 해전 | 부산시 사하구 몰운대 인근 | |||
1592년 10월 5일 (음력 9월 1일) |
다대포 해전 | 부산시 사하구 다대동 | 이순신 | ||
1592년 10월 5일 (음력 9월 1일) |
서평포 해전 | 부산시 사하구 구평동 감천항 | 이순신 | ||
1592년 10월 5일 (음력 9월 1일) |
절영도 해전 | 부산시 영도구 | 이순신 | ||
1592년 10월 5일 (음력 9월 1일) |
초량목 해전 | 부산시 동구 초량동 | 이순신 | ||
1592년 10월 5일 (음력 9월 1일) |
부산포 해전 | 부산시 동구 좌천동 | 이순신 | ||
1593년 3월 6일 (음력 2월 10일) |
웅포 해전 | 경남 진해시 웅천동 | 이순신 | ||
1594년 (음력 3월 4일) |
제2차 당항포 해전 | 경남 고성군 회화면 당항포리 | 어영담 | ||
1594년 (음력 10월 4일) |
장문포 해전 | 경남 거제시 장목면 장목리 | 이순신 | ||
1597년 8월 28일 (음력 7월 16일) |
칠천량 해전 | 거제도 인근 칠천량 | 원균 이억기 배설 |
도도 다카토라 와키사카 야스하루 고니시 유키나가 |
조선군의 유일한 패배. 원균, 이억기 전사 |
1597년 (음력 8월 27일) |
어란포 해전 | 전남 해남군 송지면 어란포 | 이순신 | ||
1597년 10월 16일 (음력 9월 7일) |
벽파진 해전 | 전남 진도군 고군면 벽파진 | 이순신 | ||
1597년 10월 25일 (음력 9월 16일) |
명량 해전 | 전남 해남군 문내면, 진도군 녹진리 | 이순신 | 도도 다카토라 구루시마 미치후사 가토 요시아키 와키사카 야스하루 |
|
1598년 (음력 7월 19일) |
절이도 해전 | 전남 고흥군 금산면 거금도 | 이순신 | ||
1598년 10월 19일 - 11월 6일 |
장도 해전 | 전남 순천시 장도 | 이순신 진린 |
고니시 유키나가 | |
1598년 12월 16일 (음력 11월 19일) |
노량 해전 | 경남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 | 이순신 진린 |
고니시 유키나가 시마즈 요시히로 와키사카 야스하루 소오 요시토시 가토 기요마사 |
이순신 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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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전량 해전 패전 책임에 대한 고찰(계속)
2월 7일 금부도사 이결은 선전관과 함께 남쪽으로 길을 떠난다. 이결은 가는 길에 먼저 경주에 있는 이순신과 권율의 상관인 도체찰사 이원익을 만나러 간다. 이원익을 먼저 만나 이순신에 대한 선조의 어명을 전하자 펄쩍 이원익은 뛰면서 일단 금부도사를 그 곳에 잡아두고 사람을 보내 조정에 장계를 올렸다.
'왜군이 꺼려하는 것은 수군이며, 이순신을 바꿔서도 안되고 원균을 보내셔도 안된다.'는 이런 요지의 내용이었다. 그러나 선조는 '내가 알아서 할 일이다. 도체찰사는 잠자코 있으라' 는 회답이었다.
그래서 이원익은 결국 이결을 보내고 한탄만 하게 된다. 길을 떠난 이결은 먼저 장흥에 가서 원균을 만나 같이 한산도로 간다. 한산도 통제사에 도착하여 원균이 삼도수군 통제사에 취임하고 이순신은 바로 잡혀 포박되어 한양으로 압송되며 당시 이순신의 인계인수 품목은 아래와 같다.
각종 선박 250척에 장착된 장비, 무기를 제외하고, 군량미 9천 9백 14섬, 화약 4천 근, 각종 총통 3백 정 등 대단한 물자였다. 이 모두가 이순신이 임진년 이후 그동안 전쟁에 대비하여 심혈을 기울여 마련하여 비축해둔 물자들이었다.
이순신이 한양으로 압송되자 대궐 앞에는 이순신의 휘하장수 송희립 등 수십 명이 거적을 깔고 임금에게 탄원하며 드나드는 대신들을 붙잡고 통사정을 하였다.
"우리 장군을 살려주시옵소서~~~!"
그러나 그들의 애원에 귀를 기울이는 대신은 아무도 없었다.
이순신은 갖은 고문과 문초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결백함을 주장하였고 시간이 지나자 몸은 만신창이가 된 채 이제 죽을날 만 기다리고 있는 형편이 되었다. 그동안의 수많은 공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러한 공이 모두 이제는 그의 허물이 되었으며 갖가지 모함이 추가되어 살아날 가망성은 전혀 없었다. 백성들의 신망이 높은 만큼 선조의 시기심과 질투, 그리고 미움은 증폭되었고 자신의 명령을 거부하고 오만에 빠진 전쟁의 영웅에 대한 불쾌감이 극도로 치달은 상태였던 임금 선조였다. 나중에 여러 의병장들이 승전을 거듭하고 임전난초기 패전하고 도망친 장수들에게 반발하거나 처벌을 주장하기도 하였는데 선조는 그것도 불안하였고 때마참 터진 '이몽학의 난'을 빌미로 가장 위험 인물인 의병장 김덕령을 잡아다가 죽인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때 뜻하지 않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신임 통제사 원균이 적선 3척을 나포하고 왜군 수급 4개를 조정에 보내온 것이었다. 선조는 보고를 받고 기분이 좋아 마음껏 치하하고 상을 내리려는 데 경상우방사 김응서로부터 또 다른 보고가 올라왔다.
원균이 잡은 왜군은 전투 병력이 아니고 거제도에 나무를 베러 나온 병사들이었던 것이다. 당시에는 심유경과 소서행장 사이에 화평회담을 할 때 서로 자체적인 군사활동을 할 경우에는 미리 공문을 보내 상대편에게 통보하고 상대편은 공문을 받으면 상대편의 자체 군사활동이기에 적대행위를 하지 않기로 약조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일본측이 조선측에 미리 공문을 보냈는데도 조선 수군이 이들을 참살하였으니 일본은 군대를 풀어 조선 백성들에게 분풀이를 하겠다고 선포해온 것이다.
김응서의 장계를 보고난 선조는 조금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3월 30일 드디어 의금부에서 선조에게 이순신의 사형을 건의한다. 하지만 선조는 심각한 고민끝에 결국 이순신을 사형대신 백의종군토록 결정한다. 그래서 이순신은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원균의 본의아닌 도움으로 목숨을 부지하여 일개 병사로 권율 막하에서 종군하게 된다.
그러다가 칠전량 해전에서 원균의 조선 수군이 대패하게 되고 원균까지 전사하게 된다. 그러자 이 패전의 책임이 누구의 잘못이냐를 두고 인책론이 대두하게 되었던 것이다.
먼저 기막힌 적의 간계에 놀아난 조정의 신료, 비변사와 선조에게 책임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적장이 제공한 정보는 사실이었지만 울산 서생포에 상륙하는 가등청정을 잡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었고 후방에 적을 남겨둔채 부산을 지나 울산 앞바다까지 조선 수군이 간다면 비록 가등청정을 잡았다고 할지라도 무사히 돌아 온다는 보장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순신은 조정의 명령을 거부하였고 그것이 명령 불복종으로 간주되어 잡혀 압송되어 죽음 직전까지 갔다가 백의종군으로 묵숨을 부지한 것이었다.
또 지휘계통에 있는 자들로 조정의 명령에 따라 출전을 독려한 도체찰사 이원익과 도원수 권율이 있다. 그러나 이들 중 누구도 책임질 사람은 없었고 나중에는 누가 책임을 지게 되었는가 하면 엉뚱하게도 일본측 정보를 듣고 조정에 제공한 경상우병사 김응서였다. 그 죄목은 '적이 속이는 허멍한 말을 듣고 조정에 보고함으로써 조정의 판단을 흐리게 하여 수군의 일을 그르치게 하였다'는 것이었다.
졸지에 날벼락을 맞은 김응서도 도병마사에서 삭탈관직되어 백의종군을 당하게 된다. 그래서 이순신을 명령불복종으로 잡아들이고 원균을 주장에 임명하여 패전한 책임을 선조 및 조정이나 명령계통의 지휘관이 아닌 만만한 도병마사 김응서가 책임자로 희생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적장이 제공한 정보를 전달한 것밖에 없던 깅응서였다.
하지만 나중에 김응서는 백의종군을 하면서 항복한 일본군 즉 항왜들을 부하로 거느리면서 많은 전공을 세워 다시 도병마사로 복직하게 된다. 과연 대단한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지금까지 칠전량 해전 패전 배경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칠전량 해전 패전 책임
그러면 칠전량 해전 패전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 것인지를 알아보자.
먼저 1차적으로 조정 대신들과 최고 통수권자인 선조이다.
그들은 한양에 들어앉아 현지 장수들의 의견은 무시하고 자기들의 입으로만 군사를 이래라 저래라 할 뿐 아니라,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여 멀쩡한 수군대장을 말로 몰매를 주어 갈아 치우는 것은 물론 명령을 듣지 않는다 하여 잡아다가 아예 패죽이려다가 겨우 묵숨을 부지시켜 주었고, 갖은 고문에 살아남은 게 기적이었다.
바뀐 대장도 말로 몰매를 주어 기상이 악화된 상태에서 측후방의 적을 그대로 남겨둔채 중간기작지를 확보도 않은채 장거리인 부산포를 공격토록 강요하다가 결국 칠전량으로 내몰아 조선 수군 전체를 괴멸당하도록 한 점 등을 고려할 때 뭐라해도 1차적으로 선조를 비롯한 조정의 책임이 제일 크다고 볼 수 있겠다.
또 적의 계략을 믿고 수군 출동을 강요하였을 뿐 아니라 이순신을 제거하기 위한 적의 묘략에 빠지고 말았던 것이다. 현지 사정을 고려하지 않은 정치권의 강압적인 부대 운용 지시는 군 지휘관의 운신의 폭을 제한할 뿐 아니라 전쟁의 승패에도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망각한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2차적으로 도원수 권율의 책임이다.
그는 이순신에게 가등청정을 잡는 정보에 대해서 의논하였는데, 이때 이순신은 후방의 적을 그대로 둔채 부산포를 지나 울산 서생포까지 수군이 출동한다는 자체에 반대하였고 수륙병진작전을 요구하였으나 이루지지 않았다. 그는 조정의 명령에 따라 이순신에게 지시하자 이순신이 도원수인 자신의 명령을 일언지하에 거절한 점에 대해서도 마음 속으로 심한 불쾌감을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순신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변호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적당히 이순신에게 책임을 미루어 자신의 몸보신을 도모하였고 1차적으로 수군통제사가 바뀌는데도 도체찰사 이원익은 조정에 장계를 올려 반대 의견을 올렸으나 권율은 아무런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지 않았다.
물론 그가 정성 집안 출신이라 정치라는 것의 생리를 어느정도 잘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고 한편으로 몸보신을 위해 기회주의적인 태도로 일관한 측면이 다분하였다. 그런데 특히 적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 명색이 수군 총사령관인 원균을 불러 볼기를 침으로써 원균 자신은 물론 수군 전체의 사기에 막대한 영향을 초래하였으며, 조정의 명령에 무조건적인 수행을 앞세워 강압적으로 조선 수군을 사지로 내몰아 괴멸당하게 한 촉매제 역활을 하였다. 또 한편으로 당시 그동안의 승전과 위민정책을 펼침으로 인해 심지어 왜군 장수들 뿐 아니라 백성들과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던 이순신에 대한 보이지 않는 시기심이 작용하였는지도 모른다.
다음으로 실질적인 작전 사령관인 원균의 책임이다.
정유년 6월부터 일본군이 본격적으로 다시 바다를 건너오기 시작한다. 조정에서는 다시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하면서도 은근히 믿는 바가 있었는데 바로 이순신의 강력한 조선 수군이었다. 그러나 이순신이 가등청정을 잡기 위해 부산포를 치라는 명령을 잘 듣지 않고 백성들의 신망이 두터운 이순신을 빨리 갈아치우고 용감무쌍한 원균으로 바꾼 상태에서 기대가 컸을 것이다.
정유년 5월초, 권율은 모든 수군을 한산도로 집결 지시를 내린다. 주력함인 판옥선 180여 척, 작은 협선 및 포작선을 합쳐 400여 척, 총 600여 척 정도의 대함대였다.
권율이 조정에 올린 장계에서 그의 작전 전략은 보자.
"원균에게 명을 내려 적의 형세를 살피며 거제.옥포 등지에 진주하여 대마도와 부산을 잇는 뱃길을 감시하고 차단하려 합니다. 수군을 3교대로 편성하여 교대로 절영도 앞 바다에 진출, 부산과 울산 서생포의 적들이 양로가 끓어질까 걱정하며 건너오는 배들도 두려워 꺼릴 것입니다. 그래서 적의 형국은 꼬리만 짤린 형국이 될 것입니다."
이상이 권율의 전략개념이었고 원균도 근본적으로 동의하였으나 안골포, 가덕도의 적은 고립되므로 육군이 이를 쫓아버리면 수군이 쉽게 적을 섬멸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원균은 장계를 올려 "10만 정병을 동원하여 4~5월이 지나기 전에 수륙양공으로 적을 섬멸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사실 육군은 그럴만한 능력이 없는데도 원균은 무리한 주장을 편 것이다.
원균은 이순신과 마찬가지로 권율이 부산으로 출격하라는 명령에 불복하고 6월초 다시 조정에 장계를 올린다.
"안골포, 거제도, 김해, 죽도 등지의 적이 요지를 점령하고 서로 호응하여 부산으로 가는 뱃길을 차단하고 있어 부산의 적을 칠 도리가 없습니다. 부산까지 간다해도 배를 댈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안골포의 적을 먼저 반드시 쳐부순 후라야 적을 차단하고 양분할 길이 열릴 것입니다."
그러자 선조와 조정에서는 대노하여 "이순신이 못 간다는 것을 원균이 갈 수 있다기에 이순신을 잡아서 고문을 하고 죽음 직전에 겨우 백의종군을 시켰던 당사자들이 원균을 통제사에 임명하였는데 이제와서 못 간다니 말이 되는 소리냐? 그리고 원균이 조정에 장계를 올려 직접 전략을 건의함은 위계질서 문란이다." 원균은 도원수-도체찰사가 있는데 이를 무시하고 직접 조정에 건의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이원익, 권율에게 위계질서를 바로잡도록 강력한 경고를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권율이 바짝 화가난 상태가 되었다. 개인감정까지 작용한 권율은 한산도의 원균에게 당장 출전 명령을 내리겠다고 경주의 이원익에게 군관을 보내 처분을 요청했다. 이에 이원익도 불쾌하여 종사관 남이공을 불러 원균을 끌고 한산도를 떠나 출격하라고 명령한다. 못나간다 나간다며 거의 한 달반을 끌어 온 권율과 원균의 입씨름은 끝이나고 결국 원균은 남이공과 같이 전함 1백여 척을 거느리고 드디어 출정하게 된다.
이즈음 조정과 주변에서는 원균에 대한 평은 아주 좋지 않았다. 잦은 술과 주벽, 제멋대로 형벌, 수군 토론장인 운주당을 폐하여 자신의 소실에게 주는 등 평소 행실에 대한 소문이 좋지 않게 유포되었고, 전쟁이 터지면 도망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여론도 비등하였다.
한산도를 출발한 원균은 날지 저물자 장문포에 도착하여 닻을 내리고 밤을 지낸 후 함대를 나누어 학익진을 펼쳤다. 그리고 안골포의 적진을 향해 공격하였다. 안골포의 좁고 긴 수로에서 학익진의 진형도 문제거니와 겨우 두 척을 나포하고 일부는 파괴한 다음 철수하였다. 가덕도를 지나 돌아오는 길에 왜선단을 조우하였다. 원균은 이를 추격하자 왜군들이 배를 버리고 산으로 도망치자 섬을 포위하고 포격하였다. 결국 적선 3~4척을 탈취하여 돌아나오는데 안골포 적선들이 나와서 조선 수군을 공격하였다. 그래서 접전이 벌어졌고 날이 저물자 퇴각하여 장문포를 거쳐 한산도로 철수하였다.
그 당시 도원수 권율은 경남 사천까지 내려와서 원균의 승전 소식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만약 부산포 공격의 성과가 좋으면 남원에 주둔중인 명나라 군대 장수 양원에게 지원요청하여 수륙양공병진작전을 구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전달된 보고는 원균이 안골포, 가덕도 일대의 적과 조우전만 벌이다가 돌아왔다는 허망한 보고였다. 이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은 권율이 원균을 긴급 호출하여 수군 최고 사령관인 통제사를 곤장치는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 벌어지게 된다.
아래는 당시 원균과 권율의 대화 내용이다.
권율 : 내가 부산포로 출격을 명령한 것이 지난 5월이었다. 그런데 두 달이 지난 지금도 부산포로 출격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가?
원균 : 안골포와 가덕도는 물길로 부산에 이르는 관문이라 수군만으로는 여기를 뚫기가 어렵소이다. 무사히 통과하여 부산으로 간다고해도 사면으로 적에게 퇴로를 차단당하여 우리 수군은 독안에 든 쥐 신세가 될 것이오.
권율 : 그것은 전에 이순신이 주장했던 바와 무엇이 다른가?
여기서 권율은 과거 원균이 전라병사 시절 조정에 보냈던 장계 필사본을 꺼내서 관원에게 큰 소리로 읽도록 하였다. 이미 권율은 단단히 준비하여 온 모양이었다.
"......가벼운 배들을 택하여 삼삼오오 절영도 밖에서 시위하며 1백여 척 때로는 2백여 척으로 대해에서 위엄을 보이면 가등청정은 수전에서 불리한 것을 겁내어 반드시 군을 걷어가지고 돌아갈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데 조정에서는 수군으로 바다에서 맞아 싸워 적으로 하여금 육지에 오르지 못하도록 하면 반드시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
권율 : 이것이 지난 정월에 조정에 올린 장계인데 틀림없소?
원균 : 틀림없소이다.
권율 : 그렇다면 이순신이 못간다고 할 때 그대는 무슨 심사로 나갈 수 있다고 이런 글을 올렸는가?
원균 : ......
권율 : 나갈 수 없다기에 이순신을 가두고 공을 그 자리에 앉힌 것이다. 온 나라가 공이 부산으로 출격하여 왜군을 쳐부수기를 학수고대하고 있거늘 지금와서 못간다면 기가막힌 일이아닌가?
원균 : 소인이 경상수영을 떠난 것이 을미년 2월이오. 그 당시 화평을 한다하여 명나라 책봉사는 요동까지 왔고 왜군은 철수하기 시작한 때였소. 안골포와 가덕도의 적도 소수 병력만 남고 다 가벼렸소이다. 그 글을 올릴 당시 소인은 장흥부사로 있었고 순신이 바다로 출격하지 않는다고 온 세상이 떠들썩할 때고 보니 그래서 소인도 격분하여 그러한 글을 올렸소이다.
권율 : 그것은 설명이 아니오.
원균 : 장흥은 한산도에서 육백리 길이 올시다. 그 외에 2년이란 세월이 흘러서 바다의 사정에 소원해질 수밖에 없었소. 소인이 떠날 때의 상황을 생각하고 그 글을 올렸소이다. 지금 가덕도에는 도진의홍이 1만 명, 안골포에는 삼길성이 4천 5백 명의 적군을 거느리고 있소이다. 쉬운 상대들이 아니올시다.
권율 : 그래서 싸우는 시늉만 하다가 돌아왔는가?
원균 : 패전이 아니올시다. 그리고 시늉이란 말은 과하오이다. 도원수 대감, 지난 5월초부터 세상의 모든 비난이 소인에게 집중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소이다. 또 소인에게 어느정도 과실도 있음도 사실이오이다. 하지만 비난이 두렵다고 혹은 과거의 잘못 때문에 또는 체면 때문에 숱한 부하들과 함정들을 사지로 몰아 넣을 수는 없소이다. 보잘 것 없지만 소인은 그래도 이 나라의 장수올시다. 대감! 수군의 일은 수군에게 맡겨주시지요.
권율 : 이 권율은 수군을 모른다. 그러니 참견하지 말라는 뜻이오?
원균 : ......
권율 : 여봐라! 저 눔을 형틀에 묶고 곤장을 매우쳐라!
위의 대화 내용을 보면 원균은 원균나름대로 할 말을 다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말이 틀린 말도 아니다. 문제는 과거 장계를 올려 큰 소리 친 것이 화근이었고 그것이 이순신을 백의종군토록 만든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그가 통제사 자리를 꾀차게 되었다는 점도 미움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또 위계질서를 지키지 않고 장수가 바로 조정에 전략 문제를 언급한 점이다. 그러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조정의 부산포 출격 성화에 권율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이고 원균은 원균 나름대로 부산포 출격은 자멸의 길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수군의 입장에서 후방의 적을 그대로 둔채 부산포로 간다는 것은 수군의 괴멸밖에 없다는 점도 틀린말은 아니다. 그러나 원균을 곤장친 사건은 자신의 몸보신을 위해 조정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권율의 고심책이었다고 밖에 보이지 않는다.
권율의 이런 극단적인 군기강 확립 차원의 곤장 사건은 원균과 조선 수군에게 엄청난 사기 침체를 볼러오게 된다. 현직 삼도수군통제사를 잡아다가 곤장을 친 것은 선례가 없던 일로 권율의 실수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한때 이순신의 경우 이억기 전라우수사가 고집을 피우자 부하 군관을 불러 곤장을 친 경우는 있었다. 오늘날로 치면 국방장관이 해군참모총장을 불러다 곤장을 친 것이나 진배없을 것이다.
결국 부하 장수들과 남이공이 말리고 하는 바람에 매는 흐지부지 되고 그 사태는 끝이 났다. 이러한 강압적인 출전 독려로 인해 그것은 어쩌면 원균이 자포자기 상태에서 부산포 공격을 감행하게 만들었고 결국에는 거친 파도와 장거리 항해로 인해 기진맥진하여 지친 상태에서 돌아오다 안골포와 가덕도의 왜군에게 칠전량 일대 앞바다에서 조선 수군이 포위되어 전멸되는 비극을 초래하게 되는 단초가 되기도 하였다.
이어서 권율은 3명의 수사에게 명령을 내린다.
'세 사람은 속히 의논하여 바다로 나가라. 나는 이제부터 통제사는 없는 것으로 알 터이니 그리 알라."
권율은 그렇게 해놓고 사천을 떠나고 원균은 한산도로 돌아온 후 치욕을 참지 못해 울분을 술로 달래고 있던 중, 조정에서 선조의 어명을 전하려 선전관 김식이 한산도에 도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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