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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659 : 조선의 역사 201 (선조실록 66) 본문
한국의 역사 659 : 조선의 역사 201 (선조실록 66)
임진왜란 경과
제14대 선조실록(1552~1608년, 재위: 1567년 7월~1608년 2월, 40년 7개월)
임진왜란 전투목록
아래 임진왜란 전투 목록은 임진왜란 중 있었던 전투 목록이다. 시간 순으로 작성되었으며, 모두 음력으로 날짜순대로 표시했다. 주요 전투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1592년
- 다대포 전투 : 4월 13일 ~ 4월 15일
- 부산진 전투 : 4월 14일
- 동래성 전투 : 4월 15일
- 경상도 및 충청도 함락 : 4월 17일~4월 28일
- 상주 전투 : 4월 25일
- 충주 탄금대 전투 : 4월 28일
- 한강 전투 : 5월 2일
- 옥포 해전 : 5월 7일
- 합포 해전 : 5월 7일
- 적진포 해전 : 5월 8일
- 해유령 전투 : 5월 16일
- 임진강 전투 : 5월 18일
- 기강 전투 : 5월 18일
- 사천 해전 : 5월 29일
- 당포 해전 : 6월 2일
- 당항포 해전 : 6월 5일
- 용인 전투 : 6월 5일
- 무계 전투 : 6월 6일
- 율포 해전 : 6월 6일
- 정암진 전투 : 6월 8일
- 여주 전투 : 6월 10일
- 제1차 평양 전투 : 6월 15일
- 웅치 전투 : 7월 7일
- 이치 전투 : 7월 8일
- 한산도 대첩 : 7월 8일
- 제1차 금산 전투 : 7월 9일
- 안골포 해전 : 7월 10일
- 우척현 전투 : 7월 10일
- 제2차 평양 전투 : 7월 17일
- 영천성 전투 : 7월 24일~7월 27일
- 지례 전투 : 7월 29일
- 제3차 평양 전투 : 8월 1일
- 청주 전투 : 8월 1일
- 제1차 경주 전투: 8월 2일
- 제2차 금산 전투 : 8월 18일
- 영원산성 전투 : 8월 25일
- 장림포 해전 : 8월 29일
- 화준구미 해전 : 9월 1일
- 다대포 해전 : 9월 1일
- 서평도 해전 : 9월 1일
- 절영도 해전 : 9월 1일
- 초량목 해전 : 9월 1일
- 부산포 해전 : 9월 1일
- 연안 전투 : 9월 2일
- 제2차 경주 전투 : 9월 8일
- 북관대첩 : 1592년 9월 16일~1593년 1월 28일
- 창원 전투 : 9월 27일
- 제1차 진주성 전투 : 10월 10일
- 독성산성 전투 : 12월 11일
1593년
- 제4차 평양 전투 : 1월 9일
- 성주 전투 : 1월 15일
- 벽제관 전투 : 1월 27일
- 웅포 해전 : 2월 10일~3월 6일
- 행주 대첩 : 2월 12일
- 제2차 진주성 전투 : 6월 29일
1594년
- 제2차 당항포 해전 : 3월 4일
- 영등포 해전 : 10월 1일
- 장문포 해전 : 10월 4일
1597년
- 칠천량 해전 : 7월 16일
- 고령 전투 : 8월 15일
- 남원 전투 : 8월 16일
- 황석산성 전투 : 8월 16일
- 어란포 해전 : 8월 27일
- 직산 전투 : 9월 7일
- 벽파진 해전 : 9월 7일
- 명량 해전 : 9월 16일
- 제1차 울산성 전투 : 12월 24일
1598년
- 절이도 해전 : 7월 19일
- 제2차 울산성 전투 : 9월 21일
- 사천성 전투 : 9월 28일
- 순천성 전투 : 9월 20일~10월 7일
- 노량 해전 : 11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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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 해전 | 장소 | 조선군 | 일본군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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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6월 16일 (음력 5월 7일) |
옥포 해전 | 거제시 옥포 | 이순신 | 도도 다카토라 | 조선군의 첫 승리 |
1592년 6월 16일 (음력 5월 7일) |
합포 해전 | 진해시 웅천동 | 이순신 | ||
1592년 6월 17일 (음력 5월 8일) |
적진포 해전 | 고성군 거류면 통영시 광도면 | 이순신 | ||
1592년 (음력 5월 29일) |
사천 해전 | 사천시 용현면 | 이순신 | 구루지마 미치유키 | 처음으로 거북선을 사용 |
1592년 (음력 6월 2일) |
당포 해전 | 통영시 산양읍 | 이순신 | 카메이 코레노리 | |
1592년 (음력 6월 5일) |
당항포 해전 | 경남 고성군 회화면 당항포리 | 이순신 이억기 |
||
1592년 (음력 6월 6일) |
율포 해전 | 거제시 장목면 | 이순신 | ||
1592년 8월 14일 (음력 7월 8일) |
한산도 대첩 | 통영시 한산면 | 이순신 원균 이억기 |
와키사카 야스하루 | |
1592년 8월 16일 (음력 7월 10일) |
안골포 해전 | 진해시 안골동 | 이순신 원균 이억기 |
구키 요시아키 | |
1592년 (음력 8월 29일) |
장림포 해전 | 부산시 사하구 장림동 | 이순신 | 명량대첩도 | |
1592년 10월 5일 (음력 9월 1일) |
화준구미 해전 | 부산시 사하구 몰운대 인근 | |||
1592년 10월 5일 (음력 9월 1일) |
다대포 해전 | 부산시 사하구 다대동 | 이순신 | ||
1592년 10월 5일 (음력 9월 1일) |
서평포 해전 | 부산시 사하구 구평동 감천항 | 이순신 | ||
1592년 10월 5일 (음력 9월 1일) |
절영도 해전 | 부산시 영도구 | 이순신 | ||
1592년 10월 5일 (음력 9월 1일) |
초량목 해전 | 부산시 동구 초량동 | 이순신 | ||
1592년 10월 5일 (음력 9월 1일) |
부산포 해전 | 부산시 동구 좌천동 | 이순신 | ||
1593년 3월 6일 (음력 2월 10일) |
웅포 해전 | 경남 진해시 웅천동 | 이순신 | ||
1594년 (음력 3월 4일) |
제2차 당항포 해전 | 경남 고성군 회화면 당항포리 | 어영담 | ||
1594년 (음력 10월 4일) |
장문포 해전 | 경남 거제시 장목면 장목리 | 이순신 | ||
1597년 8월 28일 (음력 7월 16일) |
칠천량 해전 | 거제도 인근 칠천량 | 원균 이억기 배설 |
도도 다카토라 와키사카 야스하루 고니시 유키나가 |
조선군의 유일한 패배. 원균, 이억기 전사 |
1597년 (음력 8월 27일) |
어란포 해전 | 전남 해남군 송지면 어란포 | 이순신 | ||
1597년 10월 16일 (음력 9월 7일) |
벽파진 해전 | 전남 진도군 고군면 벽파진 | 이순신 | ||
1597년 10월 25일 (음력 9월 16일) |
명량 해전 | 전남 해남군 문내면, 진도군 녹진리 | 이순신 | 도도 다카토라 구루시마 미치후사 가토 요시아키 와키사카 야스하루 |
|
1598년 (음력 7월 19일) |
절이도 해전 | 전남 고흥군 금산면 거금도 | 이순신 | ||
1598년 10월 19일 - 11월 6일 |
장도 해전 | 전남 순천시 장도 | 이순신 진린 |
고니시 유키나가 | |
1598년 12월 16일 (음력 11월 19일) |
노량 해전 | 경남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 | 이순신 진린 |
고니시 유키나가 시마즈 요시히로 와키사카 야스하루 소오 요시토시 가토 기요마사 |
이순신 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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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전량 해전 패전 책임에 대한 고찰(계속)
원균의 조선 수군이 절영도(현재 부산 영도 태종대)를 돌자마자 마침 대마도에서 오던 적수송선단 1천여 척과 갑자기 조우하게 된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이는 적정에 대한 탐색작전을 소홀히 한 결과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적정을 제대로 살피지도 않은채 무작정 부산포로 진격한 것이었다.
그러나 원균은 적수송선단을 보자 바로 전 함대에 공격명령을 내렸다. 그런데 조선 수군을 만난 왜선단은 공격을 감행하자 숫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다시 대마도 방향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에 원균은 전 함대에 추격 명령을 내렸다. 바람은 거세고 파도는 높았다. 조선 함대의 격군들이 죽을 힘을 다해 노를 저어 적을 추격하면서 각종 화포를 사격했다. 그러나 거리는 멀었고 파도가 높은데다 도망가는 적선의 속도는 빨랐기에 명중하는 포탄은 거의 없었다. 조선 수군은 계속 추격하여 대마도 근방까지 추격하였다. 결국 적선을 한 척도 잡지 못하고 파도가 거센 현해탄을 헤치고 가다보니 격군들은 피로에 지쳐 거의 실신 상태에 이르렀다. 주위는 벌써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였고 파도는 더욱 높아졌다.
그때서야 원균은 사지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깨닫고 퇴각 명령을 내렸다. 배를 돌려 다시 거센 파도와 불어오는 바람을 헤치고 항해하다 전라좌수영 소속 배 7척이 파도에 밀려 동해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으나 원균은 아무런 대책을 강구하지도 못하였다. 결국 이 7척은 파도에 떠밀려 울산 서생포 앞바다에서 가까운 뭍에 올랐으나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왜군에게 모두 잡혀 죽고 이순신의 종이었다가 격군이 되어 참전햇던 세남 만이 홀로 살아 도망와서 이순신에게 그 동안의 소식을 전하게 되었다.
그 후로부터 여러 낮과 밤을 조선 수군은 거제도를 목표로 높은 파도와 싸우면서 후퇴와 전진을 거듭하여 생쌀을 씹고 물이 부족하여 다툼이 벌어지면서 가까스로 가덕도 남방 해역에 이르자, 그동안 대기하고 있던 왜선단 5백여 척이 벌떼같이 공격해 들어왔다.
그러나 조선 수군은 싸울 힘도 없고 이미 주도권을 상실한 상태라 싸움을 하지도 못하고 후퇴를 거듭하여 거제도 옥포까지 겨우 빠져 나왔다. 옥포에 도착했지만 비축해 놓은 식량이 없어 거의 굶으면서 그곳에서 이틀을 버티다가 다시 바다로 나와서 북상하여 거제도 동북단 영등포에 도착한 것이 7월 15일이었다.
여기서 거제도 남방 해로를 이용하지 않고 북방으로 해로를 선택한 것 자체가 엄청난 비극이 시작이었다. 한마디로 적이 우굴거리는 견내량 수로를 이용하여 한산도로 돌아갈 예정이었던 모양이다. 원균은 병사들이 지친 상태였고 보급품이 부족한 상태라 빨리 기지로 복귀하고픈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싸울 마음도 없고 적을 피해 간다고 선택한 길이 영등포-칠전량-견내량-한산도의 단거리 길을 선택하였던 모양이다.
적정도 제대로 살피지 않은채 거제도 북방으로 이동한 원균의 조선 함대는 영등포에 잠시 기착하여 병사들이 뭍에 올라 나무를 찍고 물을 길러기 위해 올라갔는데 이미 그곳에서 매복하고 있던 일본군의 기습을 받고 조선 수군 400여 명이 살상되자 가까스로 도주하여 다시 배를 타고 서쪽으로 항진하여 겨우 온라도에 닻을 내렸지만 사방에서 적의 함대가 속속 모여 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조선 수군이 부산포 공격에 실패하고 살 길을 찿아 파도와 싸우며 돌아오는 동안 일본군은 육군과 수군이 합세하여 거제도와 본토 사이의 해역과 섬마다 포진하고 매복한채 기진맥진하여 돌아오는 조선 수군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이순신이 부산포 공격을 반대하며 안골포와 가덕도의 일본군을 소탕하지 않은채 부산포 공격은 불가하다며 선조와 조정, 도원수 권율의 명령을 단호하게 거부한 것이 바로 이러한 패착이 우려되었기 때문이다. 일본군 장수의 역정보에 현혹되어 울산 서생포를 공격하라고 독촉한 선조를 비롯한 지휘라인의 모든 사람들이 명령 불복종이라며 선동하여 이순신을 잡아다가 갖은 고문과 참형으로 죽이기 직전에 겨우 목숨만은 부지하여 백의종군시켰고, 이제는 원균과 조선 수군 전체를 사지로 몰아넣은 꼴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조선 수군이 온라도에서 닻을 내리고 휴식을 취하자 그때 쯤 날이 어두워지고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대강 요기가 끝나자 원균은 장수들을 모두 사령선으로 불러 집합시켰다.
"적의 형세가 이에 이르렀으니 어쩔 도리가 없소. 하늘이 우리를 돕지 않으니 죽어서 나라에 목숨을 바치는 수밖에 없소."
그때 배설이 나사서 후퇴를 건의한다.
그러나 원균은
" 폐 일언하고 끝까지 싸우는 것이고 죽음이 있을 뿐이다. 너는 말이 많다. 입을 다물라!" 라며 자신의 고집대로 싸울 것을 주장했다.
무안을 당한 배설이 자신의 배로 돌아와 자신의 휘하 전선 12척의 장수들을 불러놓고 명령을 내린다.
"지금 돌아가는 꼴을 보니 다 틀렸다. 일이 벌어지면 우리는 후퇴한다."
어쩌면 배설은 군인으로서는 적전에서 전선을 이탈했으니 군법상 참형감이다. 그러나 결과론적으로 이 12척의 배가 후일 이순신이 명량대첩 때 조선 수군의 주력함으로 꺼져가던 조선 수군을 되살리는 초석이 되었다는 점이다.
일본측 기록에 의하면 보름인데도 비가 오는지라 어두운 바다에 적선 10여 척이 조선 수군 배들 사이로 침투하였으나 눈치채지 못했다고 한다. 적은 조선 수군을 모두 정찰한 다음 소리없이 접근하여 완전히 포위한다. 지칠대로 지친 조선 수군은 아무런 낌새를 알아채지 못했다고 한다.
7월 16일 먼동이 터자 조선 수군에게 복병선이 다가가 불을 지르고 옆에 정박해 있던 다른 배 3척에도 불을 질렀다. 이것이 공격 신호였고 이 화염을 보자 일본 함대가 일제히 공격해 덤벼들었다. 원균은 비로소 놀라 북을 치고 소라를 불면서 신기전을 쏘아 비상 사태를 알린다.
피아간에 싸움이 붙었으나 이미 적에게 기선을 제압당하였고 포위된 상태라 조선 수군이 밀리기 시작하면서 고성의 추원포까지 밀린다. 여기서 일단 반격을 시도하지만 실패하자 조선 수군 전체가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결국 조선 수군들이 배를 버리고 뭍으로 올라가자 안골포의 왜군들이 미리 대기하고 있다가 조선 수군을 도륙낸다.
이리하여 결국 조선 수군 전체가 괴멸당하는데, 끝까지 싸운 전라우수사 이억기, 충청수가 최후, 조방장 배홍립, 안세희, 가리포 첨사 이응표, 함평 현감 손경지 등 뛰어난 장수들과 군사들이 전멸당하고 나머지 1만여 명 이상의 조선 수군 병사들은 형체도 없이 연기차람 사라져버렸다. 아마 나머지 장수들과 군사들이 배를 버리고 대부분 뭍에 올라 도망친 것으로 파악되엇다..
통제사 원균도 배를 버리고 뭍에 올라갔다. 선전관 김식도 같이 뭍에 올라 원균과 끝까지 있다가 가까스로 도망쳐 한양으로 돌아온 후 선조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닭이 울 무렵 왜선이 부지기수로 밀려와서 삼중사중으로 포위하니싸우며 물러서며 우리는 도저히 대적할 수가 없었읍니다. 고성땅 추원포까지 밀리니 적은 하늘까지 뒤덮을 기세였습니다. 우리 전선들이 모두 타거나 침몰되고 장수들과 병사들은 물에 빠져 죽거나 불에 타서 죽었습니다. 신은 통제사 원균, 순천부사 우치적과 함께 몸을 빼어 육지로 올랐습니다. 원균은 늙어서 걷지 못했습니다. 웃통을 벗어버리고 칼을 짚고 소나무 밑에 앉아 있었습니다. 신은 뛰면서 뒤돌아보니 왜눔 6~7명이 칼을 휘두르며 원균이 있는 곳으로 다가들었습니다. 이후 원균의 생사는 상세히 알 길이 없었습니다. 이상이 칠전량 해전의 진상이었습니다."
김식의 표현대로라면 원균은 늙어서 걷지 못해서 끝까지 도망치지 못했다고 했다.
이상의 내용으로 일단 원균이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수군을 이끌고 부산으로 진격한 이유와 이떻게 수군을 지휘했는지 알 수 있다. 이와 비교하여 이순신이 지휘했던 과거의 부산 해전과 비교해 보면 자연스럽게 원균과 이순신의 지휘역량에 대해서 비교평가가 가능할 것이다.
과연 누구의 책임인가?
일부 원균옹호론자들은 수적 열세였기 때문에 바다에서는 싸우는데 한계에 부딪혀서 육지에서 싸우려 했는데 이순신과의 관계로 원균에 불만이 많은 수군이 오해하고 도망쳤다는 말도 하는데 모두 괴변이다. 수적 열세를 논하기 이전에 포로들의 증언에 따르자면 조선 수군은 경계도 안 하다가 겨우 정찰 부대가 조총 두 발 쏜 것에도 놀라서 우왕좌왕했다. 이게 정상적인 군대인가? 그것도 최강의 전력을 가진 조선 수군이? 바다에서도 싸우려든 건 김완과 이억기, 최호 정도이면 몰라도 원균은 싸우지도 않고 도망쳤다.
그리고 육지에서 싸우긴 뭘 싸우나? 육군도 진주성전투나 행주대첩 같은 수성전에서는 대승해도 야전에서 승리한 예는 드물다. 그만큼 야전에서의 작전 능력은 일본에 비해 조선이 떨어졌다. 육군도 그럴 진데, 수군을 이끌고 지상전을 한다? 바다에서는 싸우지도 않았는데? 정상적인 인간이 할 생각이 아니다. 거기에 이순신을 들먹거리는 건 원균을 띄우려고 이순신을 폄하하려는 치졸한 술책에 불과하다.
원균이 통제사로 부임한 이후 이순신의 부하였던 자들이 원균을 따르지 않는 걸 패인으로도 꼽는데, 어느 나라든지 청렴하고 유능한 지휘관 밀어내고 부패하고 무능한 지휘관이 부임한다면, 그 지휘관을 진심으로 따를 사람이 없는 건 당연하다. 더군다나 원균이 경상우수사였을 때부터 우치적이나 이운룡, 이영남 같은 경상우수영 장수들도 원균보다 이순신을 더 따랐으니, 원균이 부하들의 신망을 얻는 능력이 부족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적의 역정보에 놀아난 선조와 조정의 강압적인 명령이 기장 큰 원인이지만 그 정보는 사실 시간적으로 시기를 놓친 소용없는 정보였다.그 정보가 조선 조정에서 이순신에게 명령이 도달한 즈음에 이미 가등청정은 조선에 상륙한 뒤였기 때문이다. 결국 적의 계략에 통제사 이순신이 파직되어 백의종군하게 되었고 대신 큰 소리치던 원균이 통제사가 되었던 것이다. 원균은 권율과 선조의 강압적인 명령에 어쩔 수 없이 부산포로 출전하게 되었고 결국 돌아오다 칠전량에서 일본군에게 대패하게 된다. 이 모두가 일본에 의해 작성된 시나리오에 따라 조선이 움직인 꼴이 되고 말앗던 것이다. 결국 이러한 모든 상황이 일본이 의도하던 대로 이루어졌으며 결국 칠전량 해전에서 조선 수군 전체가 괴멸로 이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같은 함선과 무기, 수군을 거느리고 이순신은 이전까지 연전연승 하였으나 원균은 단 한 번의 싸움으로 대패하고 말았다. 이것은 조선 수군이 함선, 무기, 수군의 능력이 뛰어난 것이 해전 승리의 원인이 아니라 전술지휘관의 역량이 전쟁의 승패를 좌우한다는 것을 단 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부산포의 적 본거지 공격은 이순신이 임진왜란 초기에 이미 올린 장계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이순신은 적이 육지에 상륙하기 전에 수군이 부산포 앞바다에서 적과 싸워 피해를 주던가 아니면 적극적인 저지작전을 폈더라면 그렇게 쉽게 상륙하여 병화가 전 나라에 미치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그 당시 경상좌우도 수사였던 박홍과 원균은 해상 초계활동은 물론 적의 상륙이 예상되는 지점 해상에서 적을 맞을 작전은 커녕 적이 오는 것 자체도 탐지하지 못하고 있었고, 적이 부산포 앞바다에 나타나자 적의 위세에 놀라 박홍은 대적 한 번 못하고 스스로 모든 배를 침몰시키고 무기를 버린 다음 군사들을 헤쳐버리고 도망을 쳤고, 이 소식을 들은 우수사 원균도 배와 무기, 물자를 바다에 빠뜨리고 군사들은 헤쳐버린 다음 도망쳤던 위인들이었다. 초기에 전술적인 실패를 하여 국난을 초래하였던 것을 그제서야 깨닫고 부산포 공격을 강요했으나 상황은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무능한 선조와 조정은 이제와서 적이 우굴거리는 안골포와 가덕도의 적을 방치한채 장거리 부산포를 공격한다는 것은 전술.전략적인 사고가 전무한 문관들이 입으로만 군사를 통솔하였기 때문에 선조아 조정도 그 책임을 면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원균도 나름대로 당시에는 인정받던 장수였다. 어쩌면 원균은 삼도수군 통제사라는 자리에 연연해서 끝까지 불복하지 못했고 목숨을 걸고 반대하지 못했던 것 같다. 도원수 권율에게 통제사인 자신이 곤장까지 맞은 입장에서 일종의 정신적 공황상태나 자포자기 형태의 출전을 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주도면밀하지 못했고 적정을 제대로 살피지도 않았다. 군사들이 피로에 지칠 것을 뻔히 알면서도 무리한 장거리 항해를 했고 적함대를 추격하여 대마도 근해까지 갔다는 사실이 이이 사지로 들어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일본군 장수가 전한 역정보는 선조와 조정을 혼란에 빠뜨렸으며 전술 지휘관의 의견을 무시하고 강압적인 명령으로 사지로 내몬 꼴이 되고 말았다. 또 돌아오는 길에 거제도 남방 해로를 선택하지 않고 거제도 북방의 좁은 수로를 선택함으로써 적의 함정에 스스로 빠져들어간 꼴이 되고 말았다. 이러한 모든 정황이 전술지휘관으로서 적절한 조치를 제대로 못한 원균의 무능함이 패인의 가장 크고 근본적인 원인으로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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