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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656 : 조선의 역사 198 (선조실록 63) 본문
한국의 역사 656 : 조선의 역사 198 (선조실록 63)
임진왜란 경과
제14대 선조실록(1552~1608년, 재위: 1567년 7월~1608년 2월, 40년 7개월)
임진왜란 전투목록
아래 임진왜란 전투 목록은 임진왜란 중 있었던 전투 목록이다. 시간 순으로 작성되었으며, 모두 음력으로 날짜순대로 표시했다. 주요 전투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1592년
- 다대포 전투 : 4월 13일 ~ 4월 15일
- 부산진 전투 : 4월 14일
- 동래성 전투 : 4월 15일
- 경상도 및 충청도 함락 : 4월 17일~4월 28일
- 상주 전투 : 4월 25일
- 충주 탄금대 전투 : 4월 28일
- 한강 전투 : 5월 2일
- 옥포 해전 : 5월 7일
- 합포 해전 : 5월 7일
- 적진포 해전 : 5월 8일
- 해유령 전투 : 5월 16일
- 임진강 전투 : 5월 18일
- 기강 전투 : 5월 18일
- 사천 해전 : 5월 29일
- 당포 해전 : 6월 2일
- 당항포 해전 : 6월 5일
- 용인 전투 : 6월 5일
- 무계 전투 : 6월 6일
- 율포 해전 : 6월 6일
- 정암진 전투 : 6월 8일
- 여주 전투 : 6월 10일
- 제1차 평양 전투 : 6월 15일
- 웅치 전투 : 7월 7일
- 이치 전투 : 7월 8일
- 한산도 대첩 : 7월 8일
- 제1차 금산 전투 : 7월 9일
- 안골포 해전 : 7월 10일
- 우척현 전투 : 7월 10일
- 제2차 평양 전투 : 7월 17일
- 영천성 전투 : 7월 24일~7월 27일
- 지례 전투 : 7월 29일
- 제3차 평양 전투 : 8월 1일
- 청주 전투 : 8월 1일
- 제1차 경주 전투: 8월 2일
- 제2차 금산 전투 : 8월 18일
- 영원산성 전투 : 8월 25일
- 장림포 해전 : 8월 29일
- 화준구미 해전 : 9월 1일
- 다대포 해전 : 9월 1일
- 서평도 해전 : 9월 1일
- 절영도 해전 : 9월 1일
- 초량목 해전 : 9월 1일
- 부산포 해전 : 9월 1일
- 연안 전투 : 9월 2일
- 제2차 경주 전투 : 9월 8일
- 북관대첩 : 1592년 9월 16일~1593년 1월 28일
- 창원 전투 : 9월 27일
- 제1차 진주성 전투 : 10월 10일
- 독성산성 전투 : 12월 11일
1593년
- 제4차 평양 전투 : 1월 9일
- 성주 전투 : 1월 15일
- 벽제관 전투 : 1월 27일
- 웅포 해전 : 2월 10일~3월 6일
- 행주 대첩 : 2월 12일
- 제2차 진주성 전투 : 6월 29일
1594년
- 제2차 당항포 해전 : 3월 4일
- 영등포 해전 : 10월 1일
- 장문포 해전 : 10월 4일
1597년
- 칠천량 해전 : 7월 16일
- 고령 전투 : 8월 15일
- 남원 전투 : 8월 16일
- 황석산성 전투 : 8월 16일
- 어란포 해전 : 8월 27일
- 직산 전투 : 9월 7일
- 벽파진 해전 : 9월 7일
- 명량 해전 : 9월 16일
- 제1차 울산성 전투 : 12월 24일
1598년
- 절이도 해전 : 7월 19일
- 제2차 울산성 전투 : 9월 21일
- 사천성 전투 : 9월 28일
- 순천성 전투 : 9월 20일~10월 7일
- 노량 해전 : 11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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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 해전 | 장소 | 조선군 | 일본군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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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6월 16일 (음력 5월 7일) |
옥포 해전 | 거제시 옥포 | 이순신 | 도도 다카토라 | 조선군의 첫 승리 |
1592년 6월 16일 (음력 5월 7일) |
합포 해전 | 진해시 웅천동 | 이순신 | ||
1592년 6월 17일 (음력 5월 8일) |
적진포 해전 | 고성군 거류면 통영시 광도면 | 이순신 | ||
1592년 (음력 5월 29일) |
사천 해전 | 사천시 용현면 | 이순신 | 구루지마 미치유키 | 처음으로 거북선을 사용 |
1592년 (음력 6월 2일) |
당포 해전 | 통영시 산양읍 | 이순신 | 카메이 코레노리 | |
1592년 (음력 6월 5일) |
당항포 해전 | 경남 고성군 회화면 당항포리 | 이순신 이억기 |
||
1592년 (음력 6월 6일) |
율포 해전 | 거제시 장목면 | 이순신 | ||
1592년 8월 14일 (음력 7월 8일) |
한산도 대첩 | 통영시 한산면 | 이순신 원균 이억기 |
와키사카 야스하루 | |
1592년 8월 16일 (음력 7월 10일) |
안골포 해전 | 진해시 안골동 | 이순신 원균 이억기 |
구키 요시아키 | |
1592년 (음력 8월 29일) |
장림포 해전 | 부산시 사하구 장림동 | 이순신 | 명량대첩도 | |
1592년 10월 5일 (음력 9월 1일) |
화준구미 해전 | 부산시 사하구 몰운대 인근 | |||
1592년 10월 5일 (음력 9월 1일) |
다대포 해전 | 부산시 사하구 다대동 | 이순신 | ||
1592년 10월 5일 (음력 9월 1일) |
서평포 해전 | 부산시 사하구 구평동 감천항 | 이순신 | ||
1592년 10월 5일 (음력 9월 1일) |
절영도 해전 | 부산시 영도구 | 이순신 | ||
1592년 10월 5일 (음력 9월 1일) |
초량목 해전 | 부산시 동구 초량동 | 이순신 | ||
1592년 10월 5일 (음력 9월 1일) |
부산포 해전 | 부산시 동구 좌천동 | 이순신 | ||
1593년 3월 6일 (음력 2월 10일) |
웅포 해전 | 경남 진해시 웅천동 | 이순신 | ||
1594년 (음력 3월 4일) |
제2차 당항포 해전 | 경남 고성군 회화면 당항포리 | 어영담 | ||
1594년 (음력 10월 4일) |
장문포 해전 | 경남 거제시 장목면 장목리 | 이순신 | ||
1597년 8월 28일 (음력 7월 16일) |
칠천량 해전 | 거제도 인근 칠천량 | 원균 이억기 배설 |
도도 다카토라 와키사카 야스하루 고니시 유키나가 |
조선군의 유일한 패배. 원균, 이억기 전사 |
1597년 (음력 8월 27일) |
어란포 해전 | 전남 해남군 송지면 어란포 | 이순신 | ||
1597년 10월 16일 (음력 9월 7일) |
벽파진 해전 | 전남 진도군 고군면 벽파진 | 이순신 | ||
1597년 10월 25일 (음력 9월 16일) |
명량 해전 | 전남 해남군 문내면, 진도군 녹진리 | 이순신 | 도도 다카토라 구루시마 미치후사 가토 요시아키 와키사카 야스하루 |
|
1598년 (음력 7월 19일) |
절이도 해전 | 전남 고흥군 금산면 거금도 | 이순신 | ||
1598년 10월 19일 - 11월 6일 |
장도 해전 | 전남 순천시 장도 | 이순신 진린 |
고니시 유키나가 | |
1598년 12월 16일 (음력 11월 19일) |
노량 해전 | 경남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 | 이순신 진린 |
고니시 유키나가 시마즈 요시히로 와키사카 야스하루 소오 요시토시 가토 기요마사 |
이순신 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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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전량 해전 패전 책임에 대한 고찰
개요
칠전량 해전은 1957년 7월 16일 전후로 벌어진 전투로 적의 간계에 놀아난 임금 선조와 조정, 그리고 선조의 닥달에 그 지휘 선상에 있던 상급자 및 장수들, 그리고 그들의 강압에 의해 부산포를 공격하기 위해 무리한 출동을 감행하였던 원균, 등이 칠전량 패전의 주인공들이다.
강압에 의해 부산포까지 출전했던 원균의 조선 수군이 적 수숭선단 1천여 척과 절영도 앞바다에서 갑자기 조우하게 된다. 왜선단은 도주하기 시작하엿고 조선 수군은 포격을 하며 대마도 근방까지 추격하였으나 적을 한 척도 잡지 못하고 기상 악화와 느린 속도로 실패하고 장거리 항해로 지친 상태에서 돌아오다 거제도 동북방 영등포, 칠전량 일대에서 매복하고 있던 일본 수군 500여 척의 공격을 받고 지리멸렬되어 조선 수군 대부분이 괴멸되는 치욕스런 전투였다.
이 패전으로 인해 일본군은 전라도 지역으로 공격해 들어가서 전주와 남원을 점령하는 등 전라도와 충청도를 유린하고 직산까지 올라갔다가 직산 전투로 조명연합군에 의해 저지되었고 조선 전역으로 확대되기 직전에 다시 삼도수군 통제사에 복귀한 이순신에 의해 일본 수군이 명량 해전에서 대파됨으로써 서해로의 진출이 무산되자 일본 육군은 해상보급로가 막혀 더 이상 전투가 어려워지자 조명연합군의 반격으로 다시 남해안 일대로 물러난 이후 지리한 공방전을 벌이다가 일본군이 풍신수길의 사망으로 전면철수하면서 마지막 노량 해전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이순신도 정렬하게 전사함으로써 정유재란은 그 막을 내리게 된다.
칠전량 패전의 책임 문제를 따지는 것은 정유재란이 발발하기 전까지 초대 삼도수군 통제사에 임명된 이순신에 의해 수 년에 걸쳐 공들여 양성했던 조선 수군 주력 대부분을 상실하였기 때문이며, 그로 말미암아 일본군이 수륙병진으로 전라도로 진출하여 남원과 전주를 점령하는 등 전쟁을 확대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기 때문이며 고령 전투, 남원 전투, 함석산성 전투, 직산 전투, 1,2차 울산성 전투, 사천성 전투, 순천성 전투 등 막대한 인명 피해를 유발하게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 임진왜란 해전 중 조선 수군의 유일한 패전이기도 하다.
이 패전으로 이순신은 백의종군에서 다시 삼도수군 통제사에 복직되었다. 삼도수군 통제사에 다시 임명된 이순신은 절치부심하여 살아 남은 수군과 전선 12척 등 중.소 함선을 끌어모아 수군을 다시 재건하면서 이어지는 명량 해전, 절이도 해전에서 일본군를 괴멸시킴으로써 재해권을 다시 되찿게 되었고 일본군의 서해로의 진출을 차단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전라도까지 진출하였던 일본군을 다시 남해안 일대로 내몰아 더 이상 확전을 방지하고 철수를 강요하는 중요한 역활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칠전량 패전은 명량 해전을 빛나게 하였고 이순신을 더욱 조선의 영웅으로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한 지휘관의 기지와 전략.전술이 전쟁의 승패를 좌우한다는 실증적인 사례를 보인 셈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중과부적이며 불가항력으로 생각되던 이순신이 명량 해전처럼 이순신의 전승이 거듭될수록 임금인 선조에게는 기쁨보다는 불안감을 증폭시켰고 정치적인 정통성마저 방계승통이라는 취약점을 안고 있던 선조의 입장에서 국난까지 당하여 나라가 절단나는 결과를 초래한 자신과 비교할 때 민심은 이순신에게 돌아가 있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또 실제로 그랬다. 만약 이순신이 극단적인 불순한 마음만 먹는다면 수만의 수군을 이끌고 서해의 해로를 따라 한강으로 거슬러 올라와서 도성인 한양을 불시에 친다면 선조 자신은 물론 조선 조정은 한순간에 이순신에게 당할 수 있다는 극단적인 상황까지 가상하게 되자 선조의 심중은 전쟁의 영웅인 이순신을 제거하지 않으면 자신의 입지까지 흔들릴 수 있다는 판단까지 하게 된다.
그래서 일본군의 철수를 방조하지 못하고 괴멸시키려는 이순신과 철수를 허용하여 조선 반도에서 전쟁을 빨리 종식시키려는 선조와 조정 간의 갈등에서 선조는 이순신을 옥죄게 되었고 결국 이순신은 마지막 해전인 노량 해전에서 스스로 장렬하게 전사함으로써 자신의 입지를 최상의 상태로 유지한채 한 시대를 마감하고 국가의 국난을 극복한 성웅으로 길이 우리 역사에 남게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만약 칠전량 해전에서 조선 수군이 괴멸되지만 않았다면 정유재란은 발발내지 확전되지도 못하고 전쟁은 종료되었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조선 수군 전력 대부분을 괴멸당한 원균의 칠전량 해전의 패전 책임에 대하여 고찰해 보기로 하겠다.
칠전량 해전 패전 배경
칠전량 해전 패전 책임 대상자
칠전량 해전의 패전 책임을 묻는다면 누구에게 물어야 할지 좀 난감한 부분이 있다. 당사자들인 임금 선조, 도원수 권율, 해전 지휘관인 원균을 불러 놓고 직위와 계급을 떠나서 당시의 법정이나 지금의 법정에서 가린다고해도 과연 명확하게 가릴 수 있을 지도 의문이다.
먼저, 1차적으로 해전을 지휘한 원균에게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원균 입장에서는 자기는 가고 싶지 않았는데 도원수 권율이 강압적으로 볼기까지 치면서 명령하였고 그래서 어쩔수 없이 떼밀려서 나갔으니 원균 자기만의 책임은 아니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장수의 입장에서 전쟁을 수행함에 있어 승리를 위한 아무런 전술.전략도 없이 그냥 수군 대부분을 이끌고 무작정 부산으로 갔다는 점이다. 조정의 강압에 어쩔수 없이 무리한 진군을 감행한 셈이다.
문제는 안골포, 가덕도 등 측후방의 적을 그대로 둔채 중간 기착지도 확보하지 않은채 없이 기상이 극히 악화된 상태에서 적정을 확인도 하지 않은채 장거리를 항해하여 부산으로 직행하였고, 절영도 근방에서 적 수송선단 1천여 척을 발견하자 일본 함선보다 속도도 느린 판옥선을 이끌고 바람이 거세고 파도가 심하였던 현해탄을 건너 대마도까지 추격하는 등 무리한 추격전을 감행하였던 점, 그리고 결국 추격을 포기하고 돌아오다 거제도 주변에서 주변 경계나 탐색선을 띄우지도 않는 등 적정의 상황도 제대로 확인하지도 않은채 휴식을 취하는 등 장수로써 용병의 기본을 망각한 조치 등으로 인하여 적의 급습을 받고 전체 조선 수군이 괴멸되었던 점 등 패전의 일차적인 책임은 해전 지휘관인 원균에게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두 번째로 책임을 묻는다면 도원수 권율에게 있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권율 입장에서는 중간 지휘관 입장에서 선조와 조정에서 억지로 나가라고 명령하자 원균에게 출동을 지시하엿으나 출동하지 않았고, 나중에 할 수 없이 출동하여 가제도 주변만 항해하다가 적선 몇 척만 파괴하는 전과를 올리고 그냥 돌아온 점, 그리고 원균이 위계질서를 어기고 자신의 전략.전술에 대해 건의하는 등 함부로 조정에 장계를 올려 문제가 된 것이고 원균을 호출하여 복기를 치면서 출전을 독려하는 등 원균을 칠전량 해전으로 내몰은 책임을 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세 번째로 최고의 책임자인 선조와 조정 비변사 신하들에게 있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선조와 조정은 적이 온다는 분명한 정보를 전해주엇고 적이 육지에 상륙하기 전에 해상에서 수군으로 무력화시키려는 조정의 전략.전술은 당연한 것이라며 그러한 명령을 따르지 않은 원균의 책임이 더 크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조정에서 강요하더라도 현지 지휘관이 정확한 상황판단과 적정을 살펴 적의 매복이나 공격에 대비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며 무리한 추격으로 수군이 지쳐 적이 매복하고 잇는 사지로 들어간 점, 그리고 항로를 안전한 남방을 두고 거제도 북방으로 선택한 점, 그리고 지휘관이 경게를 소홀히 한 점 등이 패전의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최고 명령권자인 선조와 조정은 적의 간계에 속았고 그래서 무리한 명령에 반발한 이순신을 파직시켜 백의종군 시키는 우를 범하였으며, 후방의 적을 방치한채 무리한 부산포 공격을 강요한 점은 등은 선조와 조정의 실책으로 그 책임을 면하기가 힘들 것이다.
칠전량 해전 배경
적의 기막힌 간계
이 부분을 조명해 보자면 먼저 이순신의 투옥 배경부터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이순신이 투옥된 때는 어러가지 죄목이 추가되었으며 우리는 원균의 모함으로 투옥된 것으로 알고 있으나 사실은 다르다.
먼저 일본군 소서행장이 평안도 도병마사 김응서에게 보낸 서신이 문제의 발단이 된다. 소서행장이 보낸 편지 내용은 대략 아래와 같다.
'자기는 전쟁읋 하고 싶지 않으나 가등청정이 풍신수길에게 바람을 집어 넣어 확전을 하고자 한다. 전쟁을 빨리 끝내려면 가등청정이 대마도에서 울산 서생포 쪽으로 상륙 예정인바, 일정을 알려주면 이순신의 수군을 동원하여 가등청정을 제거하면 된다'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김응서가 조정에 보고하자, 조정에서는 적이 제공한 정보에 대한 충분한 분석과 판단도 없이 바로 도원수 권율에게 명령을 내리고 권율은 이순신에게 가등청정을 잡도록 지시한다.
그러나 서생포는 울산 근방으로 우리 수군이 부산을 지나서 서생포까지 가서 가등청정을 잡는다 해도 다시 돌아온다는 보장이 없다. 그것은 기막힌 정보이면서도 조선 수군을 괴멸시킬 수 있는 기막힌 계략일 수도 있었다.
따라서 이순신은 권율이 지시하자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그러자 권율은 부산포의 왜군을 치는 것은 어떠냐고 이순신에게 의향을 묻는다. 그러나 이순신은 그것도 반대한다. 이순신은 안골포, 가덕도 등 후방의 적을 두고 지금 부산으로 간다는 자체가 사지로 간다고 판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순신은 부산포 해전 이후 그 다음해 수군을 이끌고 근 한 달동안 다섯 차례나 웅천을 봉쇄하고 공격을 5차례나 거듭했지만 왜군들은 옥포만 깊숙히 배를 숨기고 협곡 사이에서 응전할 뿐 도대체 싸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순신은 부산포를 치기 위해서는 웅천을 교두보로 확보할 필요성이 있었고 그래야만 부산포 공격이 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순신은 수륙병진책을 건의하여 논하지만 육군의 여력이 미흡하여 그 방안은 허지부지되고 말았다. 그 후로도 조정에서는 이순신에게 부산 진격과 봉쇄를 요구를 하였다. 그러나 이순신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 원균이 충청병사를 거쳐 전라병사로 있으면서 문제의 장계를 조정에 올리게 된다. 그 전에도 원균은 수록병진책을 써야 한다고 장계를 올린바가 있었다. 당시 이순신의 상관인 도원수 권율도 이순신이 부산포 공격을 일언지하에 거절하자 내심 불편한 심기를 가지고 있던차였다.
그런데 가등청정이 서생포에 상륙한 것이 사실로 드러나자 김응서는 이순신을 탓하고 권율도 이순신이 명령에 불복하고 적의 상륙을 방조한 것을 힐책하는 장계를 조정에 올린다. 모두 책임을 면하기 위해 제빨리 움직였다. 원균, 김응서, 권율 등이 이순신을 직접적으로 모함하지느 않았으나 모두 자신들의 입장에서 장계를 올린 것이고 이들의 장계 내용이 선조와 조정이 이순신을 옭아매는 빌미가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사헌부, 사간원에서 들고 일어났다. 이순신이 지난번 부산포 공격시 조정을 속이고 남의 공을 가로챈 것은 물론 지금 명령에 불복하는 불경스런 사악한 장수라며 탄핵하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순신의 죄는 이 두 가지 사건으로 인한 것이지 원균의 공을 빼앗았다는 내용은 나타나지 않았다.
적의 간계에 놀아난 선조와 조정
부산 진격 문제로 기분이 나빠진 선조가 신하들을 불러모아 이순신의 처리문제를 논의하였다.
윤두수는 이순신을 바꾸자고 하였으나 정탁은 반대하였다. 선조 자신은 '이순신의 사람됨은 잘 모른다며 임진년 이후 싸우지 않았고 이번 일은 하늘이 내린 것인데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하면서 '법을 어긴자는 용서할 수 없으니 원균으로 바꾸는게 좋겠다'고 했다. 또 '지난번 부산의 적진을 불사른 것도 마치 순신 자신이 계획을 세워 실현한 것처럼 말하고 있으나 이는 아주 못마땅하다'면서 '이런 사람이 가등청정의 머리를 가져 온다고 해도 결코 용서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산해는 '임진년에 이순신보다 원균이 공이 많았다'고 말하였고, 유성룡은 '이순신이 어떤 사람인지 자신은 잘 알고 있다'면서 선조에게 말하였다. 그러자 선조는 '이순신이 한양 사람인지' 물으니 유성룡이 '이순신과 같은 동네에서 살았으며 이순신이 거제도에 들어가지 않고 한산도에 있으면서 하는 일 없이 가등청정도 치지 않았다며 죄가 없지는 않다'면서 다만 '장수를 지금 바꾸는 것은 반대한다'고 하며 이순신을 옹호하였다. 그러자 선조는 '이순신을 털끝만큼도 용서할 수 없다'면서 '무신이 조정을 경시하는 이러한 행위는 다스리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라고 강하게 말하였다.
이때 이정형이 말하였다.
이정형 : 이순신은 거제도에 들어가 지키는 것이 좋은 줄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산도는 배를 감추어 두어도 그 깊이를 알지 못합니다. 반면에 거제도는 넓기는 해도 배를 감출데가 없고 또 안골포의 적과 서로 대치하게 되기 때문에 들어가 지키기가 어렵다 합니다.
선 조 : 지키기 어렵다는 뜻은 무엇인가?
이정형 : 신도 자세히는 모르오나 그가 그렇게 말했다는 뜻입니다. 원균은 강개하여 전쟁에서 공을 세웠으나 병사들은 돌보지 않아 인심을 잃었다고 합니다.
선 조 : 그의 성질이 포악하오?
이정형 : 경상도가 온통 절단 난 것은 원균 때문입니다.
선 조 : 우상 이원익이 원균은 적과 싸울 때만 쓸 수 있는 장수라고 하더니 이제 짐작할 만하오.
김응남 : 인심을 잃었다는 것은 잠시 접어두고 수군에는 쓸만합니다.
선 조 : 이억기는 전에 본 적이 있는데 쓸만한 사람이더군. (이억기는 덕흥대원군 후손으로 친근감을 드러냄)
이정형 : 원균만 못합니다.
선 조 : 이순신은 비교적 복종하는 편이나 원균은 자기 마음대로 하는 사람으로 굽히는 법이 없고 체찰사가 타일러도 듣지 않는 모양이오. 이런 성격이 그 공을 가려버린 연유가 아닐까? 원균에게 좌도의 수군을 맡기고 다른 사람으로 두 사람을 통제하도록 하면 어떨까?
이정현 : 원균과 순신은 서로 용납 못합니다.
김 수 : 원균은 순신이 자기의 공을 가렸다고 매양 신에게 말하였습니다.
선 조 : 수군을 갈라 원균이 통솔하도록 함에 대해서 병판은 어찌 생각하오?
이덕형 : 그 사람도 하고자 하는 의욕이 있고 신의 생각도 합당한듯 함니다.
이렇게 정유년 1월 27일 조정은 이순신을 잡기 위한 회의를 하지만 결론을 내지 못하고 끝이 났다. 그래서 원균을 경상도 통제사, 이순신을 전라도.충청도 통제사로 임명하기로 하고 선조는 승지 유영실에게 비망록을 내린다.
이순신에게
"통제사 이순신은 나라의 중임을 맡고 있으면서 오직 기망을 일삼고 방자한 적을 치지 아니하여 가등청정은 바다를 건너왔다. 마땅히 잡아다가 국문을 하고 용서가 없으리로되 바야흐로 적과 대진할 터인즉 우선 공을 세워 죄값을 갚도록 하라."
원 균에게
"내 평소 경의 충용함을 알고 있는 바 이제 경으로 경상우도 수군 절도사겸 경상도 통제사로 삼는바이니 경은 더욱 채찍질하고 가다듬어 나라를 위해 힘쓰라. 우선 이순신과 협력하에 원한을 풀고 바다의 도둑을 멸하여 나라를 구하고 이름을 역사에 남기고 그 공을 종정에 기록하도록 하라. 삼가 경은 이를 받들라."
이와같이 결론이 났으나 한가지 불행한 것은 선조가 이순신을 미워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러자 눈치빠른 사헌부 관원들이 선조에게 아래와 같이 건의하였다.
"이순신은 조정을 속이고 명령에 불복하였나이다. 이러고도 무사하다면 나라의 법도를 아찌 세우겠습니까? 마땅히 잡아다가 그 죄를 물어야 합니다."
선조는 이 글을 보고 비변사에 보내 의논토록 했다. 그러자 결국 비변사도 사헌부와 같은 결론을 냈다.
그러자 비변사의 글을 본 선조가 드디어 하명하였다.
"원균을 삼도수군 통제사로 삼고 이순신을 당장 잡아 올리라!"
이렇게 하여 삼도수군 통제사가 바뀌게 되었다. 어차피 잡아서 죽이기로 했으니 죄목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이순신을 시기하는 무리를 포함하여 우너균을 두둔하는 무리, 그리고 선조의 의향을 짐작하여 임금의 마음에 맞게 모두들 맞장구를 치면서 이순신을 모함하기 시작하였다. 또 '이순신이 수만의 수군을 이끌고 바다로 올라와 도성을 친다면 어찌될 것인가?' 하면서 이순신의 역모설까지 들먹이며 시중에는 '이순신이 백성들의 신망을 임금보다 더 많이 받고 있다'면서 선조의 심중에 불을 댕기는 이도 있었다.
임란초 이순신이 원균의 지원 요청에 바로 출전하지 않았던 것부터 시시콜콜 갖가지 모함이 총집결되면서 이렇게 이순신은 졸지에 잡혀오고 영락없이 고문을 당하여 죽을 일만 남았는데, 이때 원균의 본의아닌 도움으로 이순신은 살아나 백의종군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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