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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655 : 조선의 역사 197 (선조실록 62) 본문
한국의 역사 655 : 조선의 역사 197 (선조실록 62)
임진왜란 경과
제14대 선조실록(1552~1608년, 재위: 1567년 7월~1608년 2월, 40년 7개월)
임진왜란 전투목록
아래 임진왜란 전투 목록은 임진왜란 중 있었던 전투 목록이다. 시간 순으로 작성되었으며, 모두 음력으로 날짜순대로 표시했다. 주요 전투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1592년
- 다대포 전투 : 4월 13일 ~ 4월 15일
- 부산진 전투 : 4월 14일
- 동래성 전투 : 4월 15일
- 경상도 및 충청도 함락 : 4월 17일~4월 28일
- 상주 전투 : 4월 25일
- 충주 탄금대 전투 : 4월 28일
- 한강 전투 : 5월 2일
- 옥포 해전 : 5월 7일
- 합포 해전 : 5월 7일
- 적진포 해전 : 5월 8일
- 해유령 전투 : 5월 16일
- 임진강 전투 : 5월 18일
- 기강 전투 : 5월 18일
- 사천 해전 : 5월 29일
- 당포 해전 : 6월 2일
- 당항포 해전 : 6월 5일
- 용인 전투 : 6월 5일
- 무계 전투 : 6월 6일
- 율포 해전 : 6월 6일
- 정암진 전투 : 6월 8일
- 여주 전투 : 6월 10일
- 제1차 평양 전투 : 6월 15일
- 웅치 전투 : 7월 7일
- 이치 전투 : 7월 8일
- 한산도 대첩 : 7월 8일
- 제1차 금산 전투 : 7월 9일
- 안골포 해전 : 7월 10일
- 우척현 전투 : 7월 10일
- 제2차 평양 전투 : 7월 17일
- 영천성 전투 : 7월 24일~7월 27일
- 지례 전투 : 7월 29일
- 제3차 평양 전투 : 8월 1일
- 청주 전투 : 8월 1일
- 제1차 경주 전투: 8월 2일
- 제2차 금산 전투 : 8월 18일
- 영원산성 전투 : 8월 25일
- 장림포 해전 : 8월 29일
- 화준구미 해전 : 9월 1일
- 다대포 해전 : 9월 1일
- 서평도 해전 : 9월 1일
- 절영도 해전 : 9월 1일
- 초량목 해전 : 9월 1일
- 부산포 해전 : 9월 1일
- 연안 전투 : 9월 2일
- 제2차 경주 전투 : 9월 8일
- 북관대첩 : 1592년 9월 16일~1593년 1월 28일
- 창원 전투 : 9월 27일
- 제1차 진주성 전투 : 10월 10일
- 독성산성 전투 : 12월 11일
1593년
- 제4차 평양 전투 : 1월 9일
- 성주 전투 : 1월 15일
- 벽제관 전투 : 1월 27일
- 웅포 해전 : 2월 10일~3월 6일
- 행주 대첩 : 2월 12일
- 제2차 진주성 전투 : 6월 29일
1594년
- 제2차 당항포 해전 : 3월 4일
- 영등포 해전 : 10월 1일
- 장문포 해전 : 10월 4일
1597년
- 칠천량 해전 : 7월 16일
- 고령 전투 : 8월 15일
- 남원 전투 : 8월 16일
- 황석산성 전투 : 8월 16일
- 어란포 해전 : 8월 27일
- 직산 전투 : 9월 7일
- 벽파진 해전 : 9월 7일
- 명량 해전 : 9월 16일
- 제1차 울산성 전투 : 12월 24일
1598년
- 절이도 해전 : 7월 19일
- 제2차 울산성 전투 : 9월 21일
- 사천성 전투 : 9월 28일
- 순천성 전투 : 9월 20일~10월 7일
- 노량 해전 : 11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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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 해전 | 장소 | 조선군 | 일본군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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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6월 16일 (음력 5월 7일) |
옥포 해전 | 거제시 옥포 | 이순신 | 도도 다카토라 | 조선군의 첫 승리 |
1592년 6월 16일 (음력 5월 7일) |
합포 해전 | 진해시 웅천동 | 이순신 | ||
1592년 6월 17일 (음력 5월 8일) |
적진포 해전 | 고성군 거류면 통영시 광도면 | 이순신 | ||
1592년 (음력 5월 29일) |
사천 해전 | 사천시 용현면 | 이순신 | 구루지마 미치유키 | 처음으로 거북선을 사용 |
1592년 (음력 6월 2일) |
당포 해전 | 통영시 산양읍 | 이순신 | 카메이 코레노리 | |
1592년 (음력 6월 5일) |
당항포 해전 | 경남 고성군 회화면 당항포리 | 이순신 이억기 |
||
1592년 (음력 6월 6일) |
율포 해전 | 거제시 장목면 | 이순신 | ||
1592년 8월 14일 (음력 7월 8일) |
한산도 대첩 | 통영시 한산면 | 이순신 원균 이억기 |
와키사카 야스하루 | |
1592년 8월 16일 (음력 7월 10일) |
안골포 해전 | 진해시 안골동 | 이순신 원균 이억기 |
구키 요시아키 | |
1592년 (음력 8월 29일) |
장림포 해전 | 부산시 사하구 장림동 | 이순신 | 명량대첩도 | |
1592년 10월 5일 (음력 9월 1일) |
화준구미 해전 | 부산시 사하구 몰운대 인근 | |||
1592년 10월 5일 (음력 9월 1일) |
다대포 해전 | 부산시 사하구 다대동 | 이순신 | ||
1592년 10월 5일 (음력 9월 1일) |
서평포 해전 | 부산시 사하구 구평동 감천항 | 이순신 | ||
1592년 10월 5일 (음력 9월 1일) |
절영도 해전 | 부산시 영도구 | 이순신 | ||
1592년 10월 5일 (음력 9월 1일) |
초량목 해전 | 부산시 동구 초량동 | 이순신 | ||
1592년 10월 5일 (음력 9월 1일) |
부산포 해전 | 부산시 동구 좌천동 | 이순신 | ||
1593년 3월 6일 (음력 2월 10일) |
웅포 해전 | 경남 진해시 웅천동 | 이순신 | ||
1594년 (음력 3월 4일) |
제2차 당항포 해전 | 경남 고성군 회화면 당항포리 | 어영담 | ||
1594년 (음력 10월 4일) |
장문포 해전 | 경남 거제시 장목면 장목리 | 이순신 | ||
1597년 8월 28일 (음력 7월 16일) |
칠천량 해전 | 거제도 인근 칠천량 | 원균 이억기 배설 |
도도 다카토라 와키사카 야스하루 고니시 유키나가 |
조선군의 유일한 패배. 원균, 이억기 전사 |
1597년 (음력 8월 27일) |
어란포 해전 | 전남 해남군 송지면 어란포 | 이순신 | ||
1597년 10월 16일 (음력 9월 7일) |
벽파진 해전 | 전남 진도군 고군면 벽파진 | 이순신 | ||
1597년 10월 25일 (음력 9월 16일) |
명량 해전 | 전남 해남군 문내면, 진도군 녹진리 | 이순신 | 도도 다카토라 구루시마 미치후사 가토 요시아키 와키사카 야스하루 |
|
1598년 (음력 7월 19일) |
절이도 해전 | 전남 고흥군 금산면 거금도 | 이순신 | ||
1598년 10월 19일 - 11월 6일 |
장도 해전 | 전남 순천시 장도 | 이순신 진린 |
고니시 유키나가 | |
1598년 12월 16일 (음력 11월 19일) |
노량 해전 | 경남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 | 이순신 진린 |
고니시 유키나가 시마즈 요시히로 와키사카 야스하루 소오 요시토시 가토 기요마사 |
이순신 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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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전량 해전 전투 개요
칠전량 해전은 원균이 이순신을 대신하여 삼도수군 통제사에 임명된 이후 벌어진 해전으로,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에게 대부분이 괴멸되어 대패한 치욕적인 전투이다. 이 패전으로 조선 수군은 대부분이 수장되었고 원균 자신도 전사하고 말았다.
어쩌면 원균은 이순신이라는 출충한 난세의 영웅을 잘못 만난 불운한 장수였는지도 모른다. 드라마에서 보면 원균은 류성룡과 이순신과 같이 자란 사람이다. 그러나 태어난 곳을 다르나 나중에 한양에서 만나 자란 모양이다. 성격이 우직하고 용맹스러우며 장수다운 기질이 다분히 농후하였던 인물로 추정된다. 그래서 당시 선조와 조정에서는 원균을 이순신에 버금가는 장수로 인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순신을 대신하여 통제사에 오른 원균은 도원수 권율로부터 선조와 조정에서 지시한 부산포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이순신은 안골포와 가덕도에서 만 깊숙히 숨어서 버티고 있는 왜군을 공격하였으나 좌우 협곡에서 공격하는 적의 조총과 화포에 의해 조선 수군이 공격해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곳의 왜군을 쳐부순 뒤에야 부산포 공격이 가능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들이 측후방에 버티고 있는 한 장거리 부산포 공격은 조선 수군이 자멸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군으로만 공격이 불가한 실정이므로 수륙병진 공격을 요청하였으나 이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래서 이순신은 부산포 공격 명령에 불복하며 버티다가 선조의 분노를 사 잡혀들어가서 숱한 고문을 당하다가 사형 직전에 원균의 본의 아닌 도움으로 선조의 마음이 흔들려 백의종군을 하게 된다.
한편, 통제사에 임명된 원균도 부산포 공격 명령받고도 한동안 움직이지 않자, 도원수 권율이 조바심이 났다. 그래서 원균에게 독촉한 결과 원균은 하는 수없이 전선을 이끌고 나갔다가 별 소득도 없이 되돌아오고 말았다. 소식을 기다리다가 회군 소식을 접한 권율이 분노하여 원균을 호출하여 질책하면서 곤장을 쳤다. 이는 전레에 없던 엄청난 일이었고 수군의 사기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으며 원균은 이러한 치욕을 당하고 한산도로 돌아온다. 진퇴양난의 상황이었다. 그때 선조가 보낸 선전관이 한산도에 도착하여 '부산포를 즉시 공격하라'는 선조의 어명을 전하면서 부산포 공격을 독촉하였다.
원균은 치욕은 치욕대로 당하고 처참한 심정으로 하는 수 없이 전함대를 출전시킨다. 날씨는 비가 내리고 파도가 높았다. 250여 길을 파도를 헤치며 전진한 조선 수군은 부산 절영도 앞바다에서 적 수송함대 1천여 척과 갑자기 조우하게 되자, 왜선단이 도망치자 추격전을 벌인다. 대마도 근방까지 추격하던 조선 수군은 더 이상 추격을 포기하고 기진맥진하여 되돌아와서 거제도 영등포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던 중 육지에 매복하고 있던 적에게 피해를 당하고 다시 칠전량 앞바다 근방으로 철수하여 정박한다.
피로에 지친 조선 수군이 깊은 잠에 골아 떨어진 틈을 타서 안개 짙은 주변 바다에서 은밀히 매복하고 있던 왜선단 500여 척이 이중삼중으로 조선 수군을 포위한다. 기습공격을 감행한 왜군은 무방비 상태의 조선 수군을 일방적으로 공격하자 조선 수군을 지리멸렬되어 밀리면서 흩어지고 결국 대부분 함선이 불타고 수장되었고 육지로 도망쳤던 원균을 비롯한 대부분의 조선 수군 모두가 참살당하는 비극적인 패전을 당하게 된 것이다.
이상이 칠전량 해전의 개요이다. 그럼 자세한 전개 상황을 보자.
칠전량 해전
칠천량 해전(漆川梁海戰) 또는 칠천 해전은 1597년(선조 30년) 음력 7월 16일 칠천도 부근에서 벌어진 해전이다. 이 전투에서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이 전사한다.
정유재란의 발발
1597년 정유년 음력 1월 14일 임진왜란을 종결시키기 위한 명나라와 일본 간의 강화교섭이 결렬되자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일본군 선봉대가 조선의 부산을 재침하였다. 이것이 바로 정유재란이다. 이어 고니시 유키나가의 제2군이 웅천으로 상륙하여 북진하였다. 같은 해 음력 7월 8일 일본의 후속부대가 경상도 남해안 지역에 상륙하였다.
재침을 명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서에는 적국(전라도)을 비롯한 조선의 하삼도를 점령하라 명령하였다. 그러나 하삼도를 점령하려면 보급이 원활해야 하는데 조선은 의도적으로 도로를 놓지 않아 수송은 전적으로 강과 바다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을 이행하려면 이순신의 조선 수군을 무너뜨려야만 가능했는데, 일본군은 뜻하지 않은 곳에서 조선 수군의 핵심인 이순신을 제거하게 되었다.
종교 문제와 일본내의 무단파와 문치파의 대립으로 인해 서로 불화하였던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는 임진왜란 당시에도 공을 두고 경쟁할만큼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리고 재침이 명령되자 임진년과는 달리 가토 기요마사가 제 1진으로 건너가게 되었고, 그러자 고니시 유키나가는 요시라를 경상우병사 김응서에게 보내어 가토의 도해 정보를 보내주었다. 하지만 조정에서 다시 공격 명령을 내렸을 때는 이미 가토군이 부산에 상륙한 뒤였기에 이순신은 공격 명령을 수행할 수 없었지만 돌연 조정은 꼬투리를 잡아 이순신을 파면하고 대신 원균을 삼도수군통제사의 자리에 앉혔다.
이순신의 후임으로 임명된 원균도 통제사 제직전에 자신의 주장과 달리 사태의 불리함을 깨닫고,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출전하지 않는다. 특히 육군의 엄호 없이는 출전할 수 없다며 3월 29일 장계를 통해 30만 대군으로 안골포, 가덕도 등지의 적을 몰아내야 한다는 비현실적인 장계를 올린다. 이후에도 적과 싸울 생각없이 소수의 적을 보고도 바로 도주하는 등 문제를 일으키다 보다못한 도원수 권율이 원균에게 엄한 곤장을 쳐서 억지로 출전시켰다.
칠천량 해전
1597년 음력 7월 4일 100척이 훨씬 넘는 판옥선, 거북선과 1만여명에 달하는 조선수군을 총동원한 원균은 부산 인근에서 바람과 파도를 고려하지 않고 적을 추격하다가 12 척의 판옥선을 표류하게 해 잃어버리고, 9일에는 오히려 적의 반격을 받아 역시 많은 전선을 잃게 된다. 실록에서는 이 때 아군이 활 한 번 제대로 쏘지 못 한 채 패했다고 하면서 아군의 대응을 문제삼았고, 케이넨의 조선일일기에는 이 때 반격한 병력이 일본 수군이 아닌 육군 수송함대 병력인 것이 확인된다.
7월 5일 정오쯤에 통제영을 출항하여 견내량을 통과하여 그 날 밤 칠천량 외줄포에서 숙영한 뒤 다시 6일 낮에 거제도 북단을 돌아 옥포에 도착 숙영했다.
7일 새벽 옥포를 출항한 조선수군함대는 다대포에서 일본수군 8척과 조우하여 이를 격침시키고 부산 입구 절영도에 도착하였을때는 이미 날이 저문 다음이었다.
이날은 바람이 몹시 불고 파도가 높게 일어 정박할 곳도 마땅치 않았다. 조선수군은 연일 무리한 항해로 노군들이 모두 지쳐있었고, 오는 도중에도 수시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적함을 뒤쫓느라 더욱 피로가 쌓여 있는 상태였다.(판옥선의 정원은 원래 164명이었나 이 당시에는 정원에 훨씬 못 미치는 90여 명으로 줄어 있었는게 더욱 큰 원인이었다)
날이 어두워지며 파도가 더욱 높아져 결국은 강풍을 이기지 못한 전함 20여척이 파도에 떠내려가는 사고도 발생했다(이 배들의 일부는 일본군에게 나포되어 군사들은 죽임을 당했다)
일본수군은 조선수군함대가 출항한 뒤부터 줄곧 움직임을 정찰하여 조선수군의 공격목표가 부산임을 미리 알고 전함 1,000 여 척이 전투태세를 갖추고 기다리고 있었으나 이날 밤 파도가 높이 일었던 탓인지 공격을 감행하지는 않았다.
조선수군의 남은 배들은 밤을 새워 후퇴하여 8일 낮 가덕도에 도착하여 물을 구하기 위해 육지로 올랐으나, 숲속에 매복하고 있던 일본군의 습격으로 400여 명의 사상자를 남긴채 다시 황급히 후퇴하여 9일 새벽 칠천량 외줄포에 도착하였다. (원균은 다시 도원수부로 소환되어 도원수 권율로부터 패전책임을 물어 곤장을 받은 후 즉각적인 부산공격을 명령받고 돌아옴.)
7월 15일 저녁 사기와 기강이 극도로 저하되어 있던 조선수군함대를 일본쾌속선 5,6척이 기습해와 전함 4척에 불을 지르고 도주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 날 원균에게 안전지대로 함대를 이동하자고 건의해오던 배설이 자신의 의견이 묵살되자 그의 휘하전함 12척만을 거느린채 함대를 이탈하는 사건이 발생했다.(이 12척이 뒷날 명량해전의 12척)
7월 16일 조선수군의 최후의 날이 밝았다. 일본군은 새벽이 되면서 본격적인 총공격을 감행했다. 일본수군사령관은 토도 다카토라(1차출동시 패전한 일본수군대장), 와키자카 야스하루(한산도해전시 일본수군대장),카토 요시아키등이 지난 날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모두 참전했다.
일본수군은 1,000여 척의 대함대를 구성 조선수군을 3,4겹 포위하고 일제히 조총을 쏘며 공격해 왔다. 전라우수사 이억기,충청수사 최호등이 적의 대함대에 포위된 상태에서도 침착하게 주력함대를 지휘하며 물러나 견내량으로 이동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견내량은 이미 적함들에 의해 철저히 봉쇄되어 있었다.
원균이 배를 육지에 대고 도망치자 수많은 배들이 뒤를 따라 도망쳤다. 육지로 도망간 원균과 이하 대부분의 군사들은 매복하고 있던 일본군에 의해 전원 전사했다.
수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한 조선수군은 결국 점차 지휘체계마저 와해되어 일본군에 의해 각개 격파 당하는 상황으로 몰리게 되었다. 적함의 접근을 막지 못하게 되자 일본군은 조선전함으로 뛰어들어 백병전을 벌어지기도 했다.
거제도 서쪽의 작은 섬 칠천도 남쪽에 정박했던 조선 수군은 일본 수군에 야습을 당한 이후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계속 퇴각한다. 원균은 제대로 된 지휘를 하지 않은 채ㅡ기록에 의하면 선상에서 폭음을 하였다고도 한다ㅡ견내량 혹은 춘원포에서 삼도수군을 상륙하게 한 뒤 반격하지도 않은 채 도주했다. 격전 속에 사투를 벌이며 포위망을 뚫을려고 했지만, 계속해서 뒤로 밀리고 밀린 조선수군은 적진포에서 다시 고성땅 춘원포까지 밀려 여기서 최후를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