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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652 : 조선의 역사 194 (선조실록 59)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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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652 : 조선의 역사 194 (선조실록 59)

두바퀴인생 2012. 7. 20. 04:26

 

 

 

 

한국의 역사 652 : 조선의 역사 194 (선조실록 59)

 

 

 

                                              

                                                                                           임진왜란 경과                                                                                                                    

                                                                                                                                                                                   

 

제14대 선조실록(1552~1608년, 재위: 1567년 7월~1608년 2월, 40년 7개월)            

 

 

 

 

 

 

 

 

 

 

임진왜란 전투목록

 

아래 임진왜란 전투 목록임진왜란 중 있었던 전투 목록이다. 시간 순으로 작성되었으며, 모두 음력으로 날짜순대로 표시했다. 주요 전투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1592년

  • 다대포 전투 : 4월 13일 ~ 4월 15일
  • 부산진 전투 : 4월 14일
  • 동래성 전투 : 4월 15일
  • 경상도 및 충청도 함락 : 4월 17일~4월 28일
  • 상주 전투 : 4월 25일
  • 충주 탄금대 전투 : 4월 28일
  • 한강 전투 : 5월 2일
  • 옥포 해전 : 5월 7일
  • 합포 해전 : 5월 7일
  • 적진포 해전 : 5월 8일
  • 해유령 전투 : 5월 16일
  • 임진강 전투 : 5월 18일
  • 기강 전투 : 5월 18일
  • 사천 해전 : 5월 29일
  • 당포 해전 : 6월 2일
  • 당항포 해전 : 6월 5일
  • 용인 전투 : 6월 5일
  • 무계 전투 : 6월 6일
  • 율포 해전 : 6월 6일
  • 정암진 전투 : 6월 8일
  • 여주 전투 : 6월 10일
  • 제1차 평양 전투 : 6월 15일
  • 웅치 전투 : 7월 7일
  • 이치 전투 : 7월 8일
  • 한산도 대첩 : 7월 8일
  • 제1차 금산 전투 : 7월 9일
  • 안골포 해전 : 7월 10일
  • 우척현 전투 : 7월 10일
  • 제2차 평양 전투 : 7월 17일
  • 영천성 전투 : 7월 24일~7월 27일
  • 지례 전투 : 7월 29일
  • 제3차 평양 전투 : 8월 1일
  • 청주 전투 : 8월 1일
  • 제1차 경주 전투: 8월 2일
  • 제2차 금산 전투 : 8월 18일
  • 영원산성 전투 : 8월 25일
  • 장림포 해전 : 8월 29일
  • 화준구미 해전 : 9월 1일
  • 다대포 해전 : 9월 1일
  • 서평도 해전 : 9월 1일
  • 절영도 해전 : 9월 1일
  • 초량목 해전 : 9월 1일
  • 부산포 해전 : 9월 1일
  • 연안 전투 : 9월 2일
  • 제2차 경주 전투 : 9월 8일
  • 북관대첩 : 1592년 9월 16일~1593년 1월 28일
  • 창원 전투 : 9월 27일
  • 제1차 진주성 전투 : 10월 10일
  • 독성산성 전투 : 12월 11일

 

1593년

  • 제4차 평양 전투 : 1월 9일
  • 성주 전투 : 1월 15일
  • 벽제관 전투 : 1월 27일
  • 웅포 해전 : 2월 10일~3월 6일
  • 행주 대첩 : 2월 12일
  • 제2차 진주성 전투 : 6월 29일

 

1594년

  • 제2차 당항포 해전 : 3월 4일
  • 영등포 해전 : 10월 1일
  • 장문포 해전 : 10월 4일

 

 

1597년

  • 칠천량 해전 : 7월 16일
  • 고령 전투 : 8월 15일
  • 남원 전투 : 8월 16일
  • 황석산성 전투 : 8월 16일
  • 어란포 해전 : 8월 27일
  • 직산 전투 : 9월 7일
  • 벽파진 해전 : 9월 7일
  • 명량 해전 : 9월 16일
  • 제1차 울산성 전투 : 12월 24일

 

1598년

  • 절이도 해전 : 7월 19일
  • 제2차 울산성 전투 : 9월 21일
  • 사천성 전투 : 9월 28일
  • 순천성 전투 : 9월 20일~10월 7일
  • 노량 해전 : 11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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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진주성 전투에 대하여......

 

한 네티즌의 글을 보면 2차 진주성 전투는 기원후 70년 로마 지배하에 지내던 이스라엘이 로마에 반항하여 일으킨 유대 전쟁에서 로마군과 싸운 '마사다 요새 전투'를 떠올리게 한다고 했다. 마사다 요새 전투는 유대교 원리주의자들인 일부 광신도들이 로마 지배체제에 반발하여 벌인 이스라엘의 반란 전쟁의 마지막으로 사해 남쪽 천혜의 요새에서 저항하였던 전투였다. 3년여에 걸친 항전으로 천여 명의 저항군은 끝까지 저항하다가 전원 옥쇄하였던 전투였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멸망당하고 전 유대민족은 영원히 외지로 추방되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2천여 년이 지난 지금은 그곳에 유대민족은 다시 나라를 세우고 이스라엘 건국을 반대하던 아랍 민족들과 독립전쟁 등 피난는 항전을 벌이며 4차례의 중동전쟁을 승리로 이끌며 지금까지 국체를 유지해오고 있으며 강력한 국방력으로 지금은 아랍국들이 이스라엘의 존재를 더 이상 무력으로 추방하기 힘든 상황이 되고 말았다.

 

마찬가지로 2차 진주성 전투도 비록 패전하였지만 10만 대군을 상대로 처절한 결사항전 전투를 벌여 적에게 막대한 피해를 주어 일본군의 호남진출을 원천적으로 저지하게 된 의미있는 전투였다. 이와같은 결사항전은 정신사적 의미로서 그 중요성과 더불어 전술적 패배에 대한 솔직한 인정도 필요하다.

 

패전의 근본적인 원인은 조선군과 일본군의 병력과 무기체계상에서 나타난 엄청난 전력차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조선 조정과 조명연합군, 그리고 주변의 의병들과 관군들이 그냥 바라보는 가운데 4천여 명의 저항군과 6~7만의 진주성민들이 끝까지 저항함으로써 전원 결사항전하다 옥쇄한 점은 역사적인 의미에서 그 의의를 과소 평가할 수 없다.

 

 

 

1차적인 패인은 일본군의 계략과 외교 전략에 있었다.

 

평양에서 철수한 이후 일본군은 벽제관 전투에서 명군을 대파함으로써 명군이 전선을 이탈하여 일본군과 직접적인 전투를 회피하였다. 한편으로 명군은 일본군과 강화회담을 진행하였고 일본군도 병참 및 의병의 봉기 등으로 전술상 어려움에 봉착하자 스스로 물러나게 되었고 일본군의 철수를 조선군이 방해하지 못하도록 요구하면서 일본군의 철수를 보장하고 있었다. 그래서 강화회담을 진행하면서 일본군은 명군이 전선에서 이탈하도록 하는 한편 경상도 지역 주둔 일본군 주력 일부를 본국으로 철수하는 등 확전에 대한 의지가 없슴을 보이기도 하였다.

 

또한 강화회담의 여파로 조선군 내에 명군의 지휘를 받는 도원수체제의 군부와 조정의 강경노선의 지시를 받는 의병을 포함한 기타 저항 세력 간에 분열을 조장하였다. 또 일본군은 강화회담에서 자신들의 요구조건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진주성을 공격하겟다고 엄포를 놓기도 했다. 이 결과 조명연합군은 피해를 최소화하는 쪽으로 전선을 물러나는 방향으로 수세적인 태도로 일관하였다. 그래서 진주성 사수 전략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보였고 대규모의 일본군과 전투는 막대한 피해만 유발할 것이라는 생각에 2차 진주성 전투에는 조명연합군이나 일부 의병조차도 어떠한 지원이나 참전을 꺼려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일부 의병들은 성리학적 사수론을 내세워 적극적으로 진주성에 들어가 결전을 준비하였다.

 

 

 

 

두 번째로 관군과 의병의 지휘계통 혼란이었다.

 

행주대첩 참패 이후 남쪽으로 철수한 일본군의 가장 큰 애로는 광정면 전투 지역과 고정된 전선이 없는 불확실한 전선, 그리고 다양한 군대와의 전투였다. 각지의 의병들이 일본군의 소수부대 및 병참선을 기습하는 등 피해가 속출하고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알수 없는 비정규전투력에 대하여 방비책을 강구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진주성이라는 목표를 정하여 공격함으로써 조명연합군, 의병 등 조선군의 대부분을 유인하여 진주성에서 괴멸시킬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당시 풍신수길이 진주성 함락 지시 성화가 수차에 불같이 하달되었던 상태라 전 주력을 진주성으로 투입하여 1차전의 패전에 대한 원한도 갚을 겸 진주성을 점령함으로써 호남으로의 진출을 모색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미 전쟁 초기부터 의병이 일어나서 관군과 같이 전투를 벌이는 과정에서 지휘계통의 혼란이 야기되었다. 조정에서는 관군과 의병 간에 명확한 지휘계통 수립을 위한 방안을 사전 하달하였지만 스스로 호국의 명분을 내세우고 전재산을 털어 일어난 지방의 선비들인 의병장들은 임란 초기 연전연패하였던 무능한 관군의 지휘관과 장수들을 무시하기 일쑤였고 그래서 관군 장수들의 지휘통제를 받기를 꺼려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조정에서도 지휘계통을 확립하기가 쉽지가 않았다. 예를 들어 조헌의 청주성 전투에서는 합심하여 청주성을 함락시키는 등 승리하였으나, 금산성 전투에서 보았듯이 관군 지휘관들과 갈등으로 관군을 배제한채 의병과 승군만이 무리한 2차 금산성 전투를 벌여 전원 전멸하는 비극을 초래하기도 하였고, 전쟁 초기 용인 전투처럼 5만 근왕군이 소수의 일본군에게 어이없이 대패하여 전병력이 붕괴되어 소멸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일부 의병장들은 패전 이력이 있는 조선 관군의 장수들을 처형해야 한다는 강경파도 많았다. 이에 조정은 불안해하였고 '이몽학의 난'을 통해 김덕령 같은 의병장을 잡아다 죽이는 망국적인 행동까지 벌이기도 하였다.

 

유성룡의 징비록에 의하면, 진주성 전투 당시에는 대부분의 군사가 김천일, 고종후 휘하의 관군들과 전라도 지역의 일부 의병들이었으나, 나머지는 일부 지원병들이었다. 즉 당시 전투에 참가한 전력의 대부분이 타 지역 출신들로 작전을 수행하는 데 지리적으로 작전을 수행하는 데 차질이 있었을 것이라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즉 정예화 되지 않은 군사, 의병장 일부는 병법에 대한 지식의 부족과 포용력의 부족, 지휘체계상의 이원화 등을 직접적인 패인으로 지적했다. 당시 성안에는 김천일과 서예원의 대립과 갈등이 첨예하였고, 패배의 원인은 김천일 때문이었다고도 파악했던 것이다.

 

당시 조선군의 구성은 전라도 출신 소수 의병, 경상도를 포함한 전국 각지의 관군들이었다. 이것은 조정의 경상우도 지역에 대한 군사적 운영과 통제 때문이었다. 당시 선조는 즉위 이후 유교의 이상적인 붕당정치를 꿈꾸고 있었는데, 그 당시는 붕당정치 성립기로 붕당의 대결을 통해 왕권의 유지와 강화를 추구하였다. 그러한 모습은 전쟁 중에도 지속되었고 명군이 참전하여 전쟁이 다소 진정 국면으로 접어들자, 지역적 기반을 강력하게 구축한 남인과 북인보다는 서인을 등용하여 권력 집중을 분산시키고자 하였다.  때문에 경상우병사에 지역 실정에 밝은 경상우도 출신들을 임명하지 않고, 1593년 경상우병사 김면이 사망하자 이광약을 후임으로 임명하였지만 곧 전라도 출신의 의병장 최경희로 교체되었다. 이처럼 경상우도 의병장이던 곽재우나 정인홍은 배제되었고 전쟁 수행에서 효율적인 대응이 되지 못하였던 것이다.

 

한편, 진주 목사로 서예원이 임명되었는데, 그것은 초유사 김성일에 의해서였다. 김성일은 유성룡과 같은 남인이었는데, 서예원도 남인으로 볼 수 있는 인물이었다. 서예원은 전란초 김해부사로 재직중이었는데, 적이 침공하자 도망을 쳤다.  그러나 1차 진주성 전투를 전후하여 경상도 일대에서 활동하던 인물이었다. 때문에 전쟁 중의 비상관리권을 위임받은 김성일이 서예원을 임명하였던 것이다.

 

"곽재우를 성주 목사로, 이종인을 김해 부사로, 서예원을 진주 목사에 제수하였다."  (선조실록 26년 4월 15일)

 

 

 

 

셋째로, 전술적인 패인이다.

 

대표적으로 곽재우를 비롯한 경상우도 의병장들은 1차 전투때와는 달리 2차 전투시에는 소극적이었으며, 성을 비우자는 공성론을 주장했다. 이것은 관군과 전라도 의병들이 주장한 수성론과 비교가 된다. 당시 공성론을 주장한 사람은 도원수 김명원, 순찰사 권율, 곽재우였으며, 수성전을 주장한 사람은 국왕 선조, 우도절제사 김천일, 우병사 최경희, 충청병사 황진 등이었다. 더욱이 2차 진주성 전투의 주력 부대는 김천일의 호남 지방 군사와 의병, 관군이었으며, 서인 계열의 인물들이었다.

 

다음으로  2차 진주성 전투에서 활약한 의병장의 활동을 붕당정치와 연관하여 이해할 경우 호남지방의 대표적인 의병장 김천일의 활동을 주목해보자.  당시의 의병운동은 일차적으로 사람들의 학연과 지연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모습은 의병 지도부의 면면에서 드러나는데 대표적인 경우가 침략을 직접 당하지 않은 전라도 지역의 의병이었다. 호남지방에서는 초기부터 붕당적인 연계 속에서 의병이 조직되었다. 직접 침략을 받고 있던 영남지방에서도 의병이 초기에는 일본군에 대한 항병의 성격이었으나, 전국이 안정되자 영남지방에서 활동하고 있던 중앙정치 세력의 지원 등으로 차츰 붕당 사이의 연계가 뚜렸해지기 시작하였다.

 

김천일은 호남 지방의 재지사족이었다. 당시에 호남지방에서 활동한 사족들은 인맥과 학연에서 다섯 부류로 나눈다. 김굉필, 최부, 송흠, 박상, 이향을 중심으로 학문전수 관계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이들 중에서 이향은 기묘.울사사화 때 화를 입은 사람들과 교유했던 인물이다. 이후 그는 화를 피하여 전북 정읍의 태안에서 은거하면서 많은 인재들을 길러냈다. 대표적인 인물이 김천일, 변사정 등이며, 이들은 대부분 서인들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호남지방의 의병들이 붕당정치의 영향아래 조직되면서 당색의 영향이 강하게 작용하였다.이것은 학연과 당색에서 구별되는 사람들의 성향이 의병 결집시 주요한 요인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천일이 2차 진주성 전투 당시 인사를 보면 지역의 실정을 고려하지 않고 학연과 당색에 따라 편향된 인사를 하게 된다. 예를 들어 진주성에는 원래 김성일이 임명한 서예원 진누 목사가 있었다. 그런데 김천일이 도절제사 임무를 맡고 나서는 서에원을 대신하여 장윤을 임시목사로 임명하였던 것이다. 물론 서예원이 작전상 다소 문제가 있어 발단이 되긴했지만 멀쩡한 목사를 두고 갑자기 자신의 사람으로 바꾼다는 자체가 서로간에 일체감을 상실하고 갈등을 유발한 요인이 되고 말있던 것이다. 두 사람의 불화설은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인식을 토대로 경상우도에서 의병과 당색의 관련성을 2차 진주성 전투와 관련하여 살펴보자.

진주성에서 수성군의 도절제사에 호남 출신 김천일이 임명되자, 휘하의 지원부대도 호남의 의병부대가 다수 참여하였다는 점이다. 지역적 기반을 무시한 타도의 군사가 진주성 방어전에 주력부대로 자리메김하게 된 것이 취약점으로 잠재되어 있었다.

 

반면에 곽재우는 2차 진주성 전투에 대해서 부정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그는 충청병사 황진이 진주성 전투에 참여하려 하자 만류하기도 했다. 또 곽재우는 일본군이 한양에서 철수하자 순변사로 임명되어 추격에 나섰던 이반의 지원 요청도 거절하였다. 그것은 적이 대군이니 적을 분산하여 숫적으로 불리한 아군이 대응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곽재우는 경상우감사 김륵의 노여움을 사지만 끝내 응하지 않으면서 정양진만 지켰다. 이처럼 곽재우는 진주성 전투에 참가하지 않은 것은 절대 우세한 적을 맞아 군량도 부족한 상태에서 오합지졸의 열세한 군대로 맞서 싸울 수는 없다는 논리였다.

 

남인들은 곽재우의 공성전에 동조하였고 선조는 1차전과는 달리 대군이 몰려왔기 때문이라고 김천일을 옹호하였다. 그렇지만 2차 진주성 전투는 일본군의 보복전이었기 때문에 대군이 공격해 올 것을 미리 예견하여 사전에 충분히 피할 수도 있었을지 모른다. 하여튼 이러한 선조의 정국운영은 붕당이 정파로 굳어지기 전에 국왕이 정국운영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여지가 컸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성혼의 제자이며 정철 등 서인과 가까웠던 안병준은 유성룡이 징비록에서 지적한 김천일의 책임론에 대하여 반대 입장을 제기하고 있다. 그것은 2차 진주성 전투가 있었기에 호남 침략을 막을 수가 있었다고 평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체찰사로 진주성 함락 원인을 조정에 보고했던 이항복의 견해는 김천일을 '삼난의 공'을 이룬 사람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여기서 '삼난'이란, 진주성이 위급할 때 가장 먼저 입성한 것, 홍계남 등 관군들이 도망할 때 사수 결의를 다진 것, 함락 당시 피하지 않고 순절한 점을 말하였다. 이처럼 이항복은 김천일의 패인 책임을 직접 언급하지 않고 대신 그이 공적만을 언급했다. 그는 중도적 입장을 취한 서인계 인물이었다. 

 

 

 

마지막으로 부차적인 요인 하나가 전투 시기였다.

일본군은 동계작전보다 하계작전에 적응된 군대였다. 북으로 진군하엿던 일본군이 조선의 겨울철에 혹독한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전투력이 급감되엇던 함경도 북관대첩이나 평양전투에서 패배한 것도 이러한 게절의 영향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진주성 공격은 음력 10월 초순경 준동계에 실시하여 패배하였던 1차전 패배를 교훈삼아 하계작전을 선택하였다.

 

2차전은 장마가 한창이던 시기로 양군 모두에게 전투외적 장애로 작용하였다. 장마는 일본군보다 조선군에게 더 불리하게 작용되었다. 6월 한 달동안 장마가 계속되었고, 조선군의 주무기인 화약은 물론 궁시류 사용이 어렵게 되었고, 결정적으로 창검전에 유리한 일본군이 우월한 위치에서 조선군을 무력화시켰다. 또 26일에는 폭우로 인해 진주성 동쪽 성벽이 붕괴되엇던 것이다. 결정적으로 취약지역이었던 이곳으로 일본군이 물밀듯이 밀려들어오자 진주성은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결국 진주성은 함락되고 관군 및 의병은 진주성민들과 같이 모두 도륙되거나 남강에 투신하여 장렬하게 전사함으로써  이렇게 2차 진주성 전투는 조선군의 패배로 막을 내린다.

 

 

 

결론적으로, 1차 진주성 전투는 경상우도 의병운동이 김성일의 지원으로 관군과 의병의 입장이 조정될 수 있어 소기의 성과를 거두엇지만, 한편으로 의병장들이 관직을 제수받음으로써 의병의 성격이 변화되면서 가능하였던 것이다. 반면에 2차 진주성 전투는 의병의 관군화가 일어난 이후에 전투의 주도권과 방법론이 중요한 문제였음으로 보여주는 전투였으며, 전쟁 이후 각 정파의 정국 장악 요인이 되었던 중요한 전투였다. 따라서 붕당정치를 시도하려던 선조의 입장에서는 파당을 조성한 꼴이 되고 말았다. 훈척신들이 물러나고 사림들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동.서로 분리되어 주도권 장악을 위해서 유교 성리학에서 제시한 이상적인 붕당론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군자의 당'이 아닌 '소인의 당'으로 전락하였던 것이다. 국가의 존망이 달린 상황에서도 오로지 당리당략에 따라 권력추구에만 적극적인 오늘날의 정당정치와 아무런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주희가 성리학에서 주창한 인간의 본성을 무시하고 제시한 붕당정치에서 '군자의 당'은 결국 이상론에 불과하며 과거의 붕당정치나 현대의 정당정치나 대부분 '소인의 당'을 만들어 정권 탈취에만 여념이 없는 반복된 역사를 이어오고 있는 실정이다. 국난을 당하여 국가 존망이 풍전등화인 상황에서도 붕당정치나 정당정치는 민주정치의 이상적인 정치형태임에도 불구하고 권력탐욕에만 여념이 없는 소인의 당이 대부분이며 그로인한 군사들과 백성들의 희생은 아무런 가치를 발하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