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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651 : 조선의 역사 193 (선조실록 58) 본문
한국의 역사 651 : 조선의 역사 193 (선조실록 58)
임진왜란 경과
제14대 선조실록(1552~1608년, 재위: 1567년 7월~1608년 2월, 40년 7개월)
임진왜란 전투목록
아래 임진왜란 전투 목록은 임진왜란 중 있었던 전투 목록이다. 시간 순으로 작성되었으며, 모두 음력으로 날짜순대로 표시했다. 주요 전투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1592년
- 다대포 전투 : 4월 13일 ~ 4월 15일
- 부산진 전투 : 4월 14일
- 동래성 전투 : 4월 15일
- 경상도 및 충청도 함락 : 4월 17일~4월 28일
- 상주 전투 : 4월 25일
- 충주 탄금대 전투 : 4월 28일
- 한강 전투 : 5월 2일
- 옥포 해전 : 5월 7일
- 합포 해전 : 5월 7일
- 적진포 해전 : 5월 8일
- 해유령 전투 : 5월 16일
- 임진강 전투 : 5월 18일
- 기강 전투 : 5월 18일
- 사천 해전 : 5월 29일
- 당포 해전 : 6월 2일
- 당항포 해전 : 6월 5일
- 용인 전투 : 6월 5일
- 무계 전투 : 6월 6일
- 율포 해전 : 6월 6일
- 정암진 전투 : 6월 8일
- 여주 전투 : 6월 10일
- 제1차 평양 전투 : 6월 15일
- 웅치 전투 : 7월 7일
- 이치 전투 : 7월 8일
- 한산도 대첩 : 7월 8일
- 제1차 금산 전투 : 7월 9일
- 안골포 해전 : 7월 10일
- 우척현 전투 : 7월 10일
- 제2차 평양 전투 : 7월 17일
- 영천성 전투 : 7월 24일~7월 27일
- 지례 전투 : 7월 29일
- 제3차 평양 전투 : 8월 1일
- 청주 전투 : 8월 1일
- 제1차 경주 전투: 8월 2일
- 제2차 금산 전투 : 8월 18일
- 영원산성 전투 : 8월 25일
- 장림포 해전 : 8월 29일
- 화준구미 해전 : 9월 1일
- 다대포 해전 : 9월 1일
- 서평도 해전 : 9월 1일
- 절영도 해전 : 9월 1일
- 초량목 해전 : 9월 1일
- 부산포 해전 : 9월 1일
- 연안 전투 : 9월 2일
- 제2차 경주 전투 : 9월 8일
- 북관대첩 : 1592년 9월 16일~1593년 1월 28일
- 창원 전투 : 9월 27일
- 제1차 진주성 전투 : 10월 10일
- 독성산성 전투 : 12월 11일
1593년
- 제4차 평양 전투 : 1월 9일
- 성주 전투 : 1월 15일
- 벽제관 전투 : 1월 27일
- 웅포 해전 : 2월 10일~3월 6일
- 행주 대첩 : 2월 12일
- 제2차 진주성 전투 : 6월 29일
1594년
- 제2차 당항포 해전 : 3월 4일
- 영등포 해전 : 10월 1일
- 장문포 해전 : 10월 4일
1597년
- 칠천량 해전 : 7월 16일
- 고령 전투 : 8월 15일
- 남원 전투 : 8월 16일
- 황석산성 전투 : 8월 16일
- 어란포 해전 : 8월 27일
- 직산 전투 : 9월 7일
- 벽파진 해전 : 9월 7일
- 명량 해전 : 9월 16일
- 제1차 울산성 전투 : 12월 24일
1598년
- 절이도 해전 : 7월 19일
- 제2차 울산성 전투 : 9월 21일
- 사천성 전투 : 9월 28일
- 순천성 전투 : 9월 20일~10월 7일
- 노량 해전 : 11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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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진주성 전투
제2차 진주성 전투는 1593년 음력 6월 22일부터 같은 달 29일까지 진주성에서 3천여 명의 조선군과 6만여 명의 민간인 그리고 10만여 명의 일본군과의 벌어진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진주성이 함락되고, 진주목사 서예원을 비롯하여, 김천일, 최경회 등 대부분의 지도부가 남강에 투신하거나 전사를 하였다.
임진년 1592년 음력 10월 5일부터 그달 10일까지 6일간에 걸쳐 약 3만의 병력으로 총공세를 펼쳤다가 실패한 일본군은 호남으로 통하는 관문을 확보하고 진주대첩의 보복을 위하여 집요하게 진주성 공략을 준비하였다. 이듬해 계사년 1593년 거의 모든 일본군을 동원한 10만과 800척의 선박을 동원하여, 함안, 반성, 의령을 차례로 점령하고 진주성 공격에 다시 나섰다. 조정과 야전지휘관들은 일본군이 이처럼 왜군의 모든 전력을 진주성 하나에 투입하는 전략적 모험을 하리라고 단정할 수가 없어 명확한 판단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때 명나라와 일본군이 화의를 교섭하고 있었는데 일본군과의 전면전을 통하여 전쟁을 속히 종결하기를 원하던 조선은 협상에서 사실상 배제되었고 조명연합군군의 추격도 멈추었다. 일본은 이 때를 노렸다. 진주성 안에는 수천 명의 병사만이 있었고, 사실상의 전투력은 부족했다. 게다가 조정에서는 명군에게 요청한 진주성으로의 원군 투입이 거절되자 방어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수성을 포기하라는 명을 내렸다. 도원수 권율과 곽재우조차도 진주성에서 10만의 일본군을 상대하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하여 방어전을 반대하였다. 그러므로 진주성 이외의 명·조선군은 방관 상태에 있어 성은 완전히 고립된 상태였다. 하지만 방어사 황진 및 의병장들은 권고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진주에 남아 싸울것을 결의했다.
조선군
사태가 급박해지자, 창의사 김천일이 군사 3백 명을 거느리고 진주로 왔고, 충청병사 황진이 7백 명, 경상우병사 최경회가 5백 명을, 의병 복수장 고종후가 4백 명, 부장 장윤이 3백 명, 의병장 이계련이 1백 명, 의병장 변사정의 부장이 3백 명, 의병장 민여운이 2백여 명을 거느리고 와서 목사 서예원과 김준민, 이종인 등과 수성을 논의했다.
전투
음력 6월 21일 일본군 기마병 2백여 기가 출몰하여 진주성을 살피고 돌아갔다.
음력 6월 22일에는 처음 교전이 일어나 일본군 30여 명을 쏘아 죽이니 퇴각을 하였다가, 초저녁과 2경, 3경에 다시 공격을 해왔다가 퇴각을 하였다. 조선군은 남쪽에는 남강이 흐르기 때문에, 침입이 예상되는 서북쪽에 해자를 파고, 물을 흘려 호를 만들었으나, 일본군은 해자에 흙을 메워 길을 만들었다.
음력 6월 23일 낮에 3회, 밤에 4회를 공격을 하였고, 24일에는 적의 증원군 1천여 명이 동서로 진을 쳐서 포위하였다.
음력 6월 25일 일본군은 동문 밖에 흙을 쌓아 언덕을 만들고, 흙으로 만든 대를 세워 성안으로 사격을 퍼부었다. 이에 충청병사 황진도 성안에 다시 높은 언덕을 쌓아 대처를 하였으며, 낮의 세 차례 공격과 밤의 네 차례 공격을 모두 격퇴하였다.
음력 6월 26일 일본군은 방책을 만들어, 탄환과 화살을 막으면서 화전 공격을 하여 성내의 초옥을 불태우면서,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고 다시 전서를 보내 항복을 독촉한다. 이 날도 밤낮으로 일곱 차례를 싸워 적을 격퇴하였다.
음력 6월 27일 일본군은 동문과 서문 밖에 다섯 군데의 언덕을 축조하고 거기에 공성용 대나무 대를 세워 하향 조준으로 사격을 하여 조선군 300여 명을 죽였고, 철갑을 입고 사륜거라는 장갑차를 끌고 와, 철추로 성문을 뚫으려 했다. 장사였던 김해부사 이종인이 연거푸 적을 베어 물리치고, 조선군은 기름과 햇불을 던져 일본군에 대항하여 격퇴시켰다.
음력 6월 28일 야간 경비가 소홀하여 적이 몰래와서 성을 뚫으려하는 것을 힘들게 방어를 했으며, 1천여 명의 적이 죽었는데 황진도 적이 쏜 탄환을 맞고, 전사를 하였다.
함락
음력 6월 29일 전사한 황진을 대신하여 목사 서예원이 경비대장을 맡았으나, 겁을 먹고 사기를 떨어뜨리는 행동을 하자 경상우병사 최경회가 직을 파하고, 장윤에게 그 직을 맡겼으나 장윤도 탄환에 맞아 죽게 된다. 오후에 비가 내려 동문의 성이 무너지자 일본군은 노도와 같이 밀려왔는데, 활과 화살로 대응을 하지 못하므로 창과 칼로 육박전이 일어나게 되고, 이종인도 일본군의 탄환을 맞고 죽게 된다. 김천일도 촉석루로 모여 항전을 하다가 아들과 함께 끌어안고 남강에 몸을 던져 죽는다. 이때 최경회와 여러 장군도 남강에 투신하여 죽게 된다.
성에 진입한 일본군은 모든 거주민과 살아있는 동물을 모두 학살하고 주변을 약탈했다. 그러나 전투에서 심한 손실을 입어 전라도로의 진출은 좌절되었고, 조선군이 부산으로 이동하자 진주성을 포기하고 퇴각하였으며, 이후 진주성은 왜군의 방어선에서도 제외된다.
경상도관찰사 정사호는 진주성에 순국한 사람들을 기리기 위해 창렬사를 건립하여 1607년 선조 40년에 사액을 받는다. 1868년 고종 5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김시민 장군을 모신 충민사가 철폐되자, 이곳에 모시게 된다. 창렬사에는 충무공 김시민 장군의 신위를 맨 윗자리에 모셔두었고, 창의사 김천일과 충청도 병마사 황진, 경상우도 병마사 최경회 등의 임진왜란 순국 선열 39인의 신위를 모시고, 매년 음력 3월 초정일에 제향을 올리고 있다.
논개
논개는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최경회의 후처였는데, 1593년 최경회가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제수되어, 제2차 진주성 전투를 할 때 성안에서 전투의 뒷수발을 들었다. 진주성이 함락되고 최경회가 순국하자, 논개는 일본 장수들이 촉석루에서 잔치를 벌이고 있을 때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유인해 끌어안아 함께 남강에 떨어져 죽었다.
1625년 논개가 순국한 지 32년 뒤 논개가 떨어져 죽은 바위에는 진주의 백성들의 뜻에 따라 정대융이 의암(義巖)이라는 글씨를 써서 바위에 새겼다. 의암 바로 위쪽으로는 의암사적비가 서 있다.
1739년(영조 16년)에 논개를 추모하는 의기사가 세워지고, 의기로 추모받게 되었다.
유적
진주성에는 1592년 임진란의 3대 대첩 중의 하나인 진주대첩을 높이 받들고, 이듬해 1593년 계사년에 순국한 7만 민관군의 충혼을 위령하기 위해, 1686년(숙종 12년)에 촉석정충단비(矗石旌忠檀碑)를 세웠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삼장사(三壯士)라는 기록이 종종 눈에 보이는데, 김천일, 황진, 최경회를 일컫는다. (실록에는 이노 등도 언급됨) 비문에는 이들과 순국한 민관군 7만의 영령을 위로 하기 위해 촉석루 동쪽에 정충단을 세우고, 정충단비를 같이 세웠다.
1987년에 임진대첩계사순의단을 만들어 설치를 하였다. 촉석루 맞은 편에 설치된 임진대첩계사순의단 아래에는 호국의 종을 비롯하여, 경상남도 유형문화제 제2호인 촉석정충단비와 제1호인 김시민장군 전공비가 나란히 서 있다.
제2차 진주성 전투 패인
진주성은 왜 함락되었나? 1592년 10월의 제1차 진주성 싸움에서는 큰 승리를 하였는데, 1593년 6월 싸움에는 왜 패했나?
그 원인은 다음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중과부적(衆寡不敵), 고립무원(孤立無援), 단결부족이 그것이다.
첫 번째 패전 원인은 중과부적이다. 왜군은 1차 싸움 때는 2만 명 이었는데 2차 싸움에는 10만 명이 쳐들어왔다. 조선군은 1차 때는 3천800명 2차의 경우는 6천명 정도였다. 이러한 현저한 병력차이는 처음부터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었다.
두 번째 요인은 고립무원이다. 1차 싸움 때는 진주성 안의 병력뿐만 아니라 성 밖에도 지원군이 많았다. 최경회, 임계영 등 호남의병도 경상우도 관찰사 김성일의 요청으로 진주로 달려왔고 김면, 정인홍, 곽재우 등 경상의병장도 상당한 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2차 싸움 때는 진주성 근처까지 온 조선 관군과 의병은 왜군의 위세에 눌리어 아예 후퇴했고, 명나라 군사도 관망으로 일관하였다.
용맹스럽다던 경상의병장 곽재우마저 사지에서 부하를 죽일 수 없다고 물러났다. 전투 중에 김천일등이 조선군과 명군에 지원을 요청하였어도 이들은 냉담하였다.
세 번째는 단결부족이다. 창의사 김천일과 진주목사 서예원은 수시 마찰하였고, 여러 부대가 모여 있어 통솔이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또한 1차 싸움 때는 진주목사 김시민과 경상우도 관찰사 김성일이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단결하였는데 2차 싸움에는 경상우도 관찰사 김늑은 전혀 역할을 하지 못하였다.
임진왜란을 총지휘한 서애 유성룡(1542-1607)도 진주성 함락의 원인은 1차적으로 왜군 병력이 많은 것에 있다 하면서, 우리 쪽 대응에도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1593년 7월21일자 선조실록을 읽어보자.
풍원 부원군 유성룡이 진주성 싸움의 패전 원인을 보고하다.
풍원부원군 유성룡이 치계하였다.
“진주의 함락이 비록 강대한 적병(賊兵) 때문이기는 하지만 우리 쪽 대응의 잘못도 개탄스럽습니다. 신이 서울에 있을 적에 목사 서예원이 명군 지대 차사원(明軍支待差使員)으로 함창(咸昌, 현 상주시 함창읍)에 와서 있기에 즉시 글을 보내 ‘진주가 곧 왜적의 공격을 받게 되었는데 성을 지키는 관원이 어찌 멀리 나와 있어서야 되겠는가.’ 하고, 속히 돌아가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체하고 돌아가지 않다가 적이 가까이 왔다는 것을 들은 뒤에 겨우 입성하여 방비 등의 일을 미리 조처하지 못한 것이 잘못의 첫째이고, 또 제장(諸將)들이 객병(客兵)을 거느리고 한 성 안에 많이 모였는데 통제하는 사람이 없어 각각 제 주장만 고집하여 분란을 면치 못했던 것이 잘못의 둘째이며, 제장들이 당초에 사세를 헤아리지 못하고 경솔히 함안으로 나아가서 진을 치고 있다가 적병이 크게 이르자 낭패하고 도망해 돌아와서 적으로 하여금 승세를 타게 한 것이 잘못의 셋째이며, 정진(鼎津)에 군사를 진열시키고 굳게 지켰다면 적이 사면에서 함께 진격하여 오지는 못했을 것인데, 모두 버리고 떠났으므로 적병이 수륙으로 함께 진격하였고 진주가 함락되기 전에 의령·삼가·단성·진해·고성·사천 등지에 적이 구름처럼 모여 원병의 길이 막힌 것이 잘못의 넷째 입니다.
최원·선거이 이하 장수가 거느린 군사가 모두 도피하고서 한 사람도 나오지 않았으므로 진주 사람들이 밤낮으로 구원병을 갈망하며 하늘에 호소하고 빌었으나 끝내 한 명의 구원병도 오는 자가 없어 드디어 함몰되었고, 온 성안이 도륙된 참상은 차마 말할 수 없습니다.
유성룡은 진주성 패전의 내부 요인으로 (1) 진주 목사 서예원의 대응 미흡 (2) 지도력 부재 (3) 조선군의 후퇴 (4) 지원군의 전무를 들고 있다.
한편 유성룡은 임진왜란이 끝나자마자 파직되어 안동으로 낙향한다. 1604년에 그는 7년간의 전쟁을 반성하면서 다시 이런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징계하려는 의도로 '징비록'을 쓴다. 그런데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진주성 전투의 패인으로 창의사 김천일의 잘못을 상당부분 거론하고 있다. 징비록의 관련 부분을 살펴보자.
"김천일이 거느린 군사들은 모두가 한양 백성들 중에서 모집한 자들이었다. 게다가 김천일 자신도 전쟁에 대해 아는 게 없으면서도 자기 고집대로 하는 인물이었다. 또 그는 평소부터 서예원과 사이가 좋지 않아 서로 의견이 어긋나기 일쑤여서 명령이 통일될 수도 없었다. (중략)북문을 지키던 김천일의 군사는 성이 함락되었다고 지레 짐작하고는 싸움을 포기하고 뿔뿔이 흩어졌다.(중략) 이 때 촉석루에 가 있던 김천일과 최경회는 서로 손을 잡고 통곡하던 끝에 남강에 투신하여 죽고 말았다."
이러한 유성룡의 비판에 대하여 보성출신 우산 안방준(1573∼1654)은 '진주서사'에서 창의사 김천일을 변호한다. 먼저 그는 진주서사가 이항복이 지은 오성일기와 부합됨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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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일이 진주성에서 죽은 것을 두고 헛되이 사람 목숨을 죽였다 하니 아! 슬프다. (중략) 더구나 공이 진주를 지키지 않아 적의 예봉을 꺾지 못했다면 호남의 50여성이 어육을 당함은 진주성 보다 훨씬 심하였을 것이다. (중략)또 이 싸움에서 왜적은 너무나 많이 죽었기 때문에 강을 건너서 서쪽으로 진격할 수 없었으니 왜적이 호남으로 가지 못하도록 차단한 공은 어찌 당나라의 장순과 허원의 짝이 아니겠는가? "
장순과 허원은 당나라 현종 시절 안녹산의 난 때 외부의 지원도 끊긴 상태에서 여러 달 동안 수양성을 홀로 지키다가 순절한 당나라 장수이다.
아무튼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도 진주성 싸움 패인에 대한 책임 논란은 끊이지 않았다. 효종 때 다시 작성된 선조수정실록에도 이 논의가 실려 있다.
선조수정실록은 북인 위주로 써진 선조실록을 바로잡기 위한 것인 만큼 임진왜란 기록도 재평가되었다. 1593년 6월1일자 기록을 보자.
"김천일 등이 충의만을 가지고도 사중(士衆)을 격려하였던 것인데 황진·이종인·장윤·김준민 등이 모두 군사 중에 으뜸가는 용무(勇武)를 가졌던 관계로 왜적을 꺾어 상당수를 살상하면서 9일이 지나서야 힘이 다하였으니, 전투 방어를 잘못한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서예원은 처음부터 성을 버리려고 하였으나 원수(元帥)에게 눌려 감히 움직이지 못하였고, 밖의 장수들도 모두 군문(軍門)의 명을 받고 반드시 패할 땅에 들어가 있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이때 나가서 피해야 한다는 의논이 갑자기 일어났던 것인데, 김천일이 항언하여 그 의논을 중지시켰다. (중략) 그때에 김천일 등이 아니었더라면 겁많고 미련한 서예원으로서는 필시 하루 이틀도 막아내지 못하였을 것이니, 따라서 성안의 사민 남녀 6, 7만 명이 모두 죽게 되고 허다한 식량과 기계가 죄다 적에게 넘겨졌을 것인데, 무슨 이익이 있었겠는가. 서예원의 형 서인원은 의논을 좋아하는 것으로 명사가 되었으나 간사스럽고 거슬렸다."
일찍이 김천일을 교묘하게 비방하면서 서예원을 신원하려고 하였던 까닭에 사대부들 사이에 간혹 이론(異論)이 있게 되었고, 심지어는 임금 앞에서 폄하하여 ‘김천일의 뜻은 숭상할 만하나, 재주가 졸렬하여 일을 그르쳤다’고까지 하였다.
그러나 김천일이 국사를 그르친 것이 뭐가 있는지 모르겠다. 과연 사람들의 말과 같다면, 진주의 유민(遺民)들은 김천일과 서로 친한 경우가 아닌데도 그를 숭앙하여 제사까지 지내면서 오래갈수록 더욱 독실하게 하는 데 반해, 서예원에 대해서는 몹시 업신여기면서 심지어는 ‘서예원은 온 집안이 적에게 투항했다’고 하여 한마디도 애석해 하는 말이 없었으니, 인심을 속일 수 없는 것이 이와 같다.
역사적 평가는 한두 가지 기록에만 의존할 일이 아니다. 여러 사료를 두루 살필 일이다. 그래야만 형평감각을 가질 수 있다. 역사는 누가 어떤 역사관에 따라 평가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다를 수 있으니까.
김세곤 (역사인물기행작가, 한국폴리텍대학 강릉캠퍼스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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