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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648 : 조선의 역사 190 (선조실록 55)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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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648 : 조선의 역사 190 (선조실록 55)

두바퀴인생 2012. 7. 16. 07:55

 

 

 

 

한국의 역사 648 : 조선의 역사 190 (선조실록 55)

 

 

 

                                              

                                                                                           임진왜란 경과                                                                                                                    

                                                                                                                                                                                   

 

제14대 선조실록(1552~1608년, 재위: 1567년 7월~1608년 2월, 40년 7개월)            

 

 

 

 

 

 

 

 

 

 

임진왜란 전투목록

 

아래 임진왜란 전투 목록임진왜란 중 있었던 전투 목록이다. 시간 순으로 작성되었으며, 모두 음력으로 날짜순대로 표시했다. 주요 전투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1592년

  • 다대포 전투 : 4월 13일 ~ 4월 15일
  • 부산진 전투 : 4월 14일
  • 동래성 전투 : 4월 15일
  • 경상도 및 충청도 함락 : 4월 17일~4월 28일
  • 상주 전투 : 4월 25일
  • 충주 탄금대 전투 : 4월 28일
  • 한강 전투 : 5월 2일
  • 옥포 해전 : 5월 7일
  • 합포 해전 : 5월 7일
  • 적진포 해전 : 5월 8일
  • 해유령 전투 : 5월 16일
  • 임진강 전투 : 5월 18일
  • 기강 전투 : 5월 18일
  • 사천 해전 : 5월 29일
  • 당포 해전 : 6월 2일
  • 당항포 해전 : 6월 5일
  • 용인 전투 : 6월 5일
  • 무계 전투 : 6월 6일
  • 율포 해전 : 6월 6일
  • 정암진 전투 : 6월 8일
  • 여주 전투 : 6월 10일
  • 제1차 평양 전투 : 6월 15일
  • 웅치 전투 : 7월 7일
  • 이치 전투 : 7월 8일
  • 한산도 대첩 : 7월 8일
  • 제1차 금산 전투 : 7월 9일
  • 안골포 해전 : 7월 10일
  • 우척현 전투 : 7월 10일
  • 제2차 평양 전투 : 7월 17일
  • 영천성 전투 : 7월 24일~7월 27일
  • 지례 전투 : 7월 29일
  • 제3차 평양 전투 : 8월 1일
  • 청주 전투 : 8월 1일
  • 제1차 경주 전투: 8월 2일
  • 제2차 금산 전투 : 8월 18일
  • 영원산성 전투 : 8월 25일
  • 장림포 해전 : 8월 29일
  • 화준구미 해전 : 9월 1일
  • 다대포 해전 : 9월 1일
  • 서평도 해전 : 9월 1일
  • 절영도 해전 : 9월 1일
  • 초량목 해전 : 9월 1일
  • 부산포 해전 : 9월 1일
  • 연안 전투 : 9월 2일
  • 제2차 경주 전투 : 9월 8일
  • 북관대첩 : 1592년 9월 16일~1593년 1월 28일
  • 창원 전투 : 9월 27일
  • 제1차 진주성 전투 : 10월 10일
  • 독성산성 전투 : 12월 11일

 

1593년

  • 제4차 평양 전투 : 1월 9일
  • 성주 전투 : 1월 15일
  • 벽제관 전투 : 1월 27일
  • 웅포 해전 : 2월 10일~3월 6일
  • 행주 대첩 : 2월 12일
  • 제2차 진주성 전투 : 6월 29일

 

1594년

  • 제2차 당항포 해전 : 3월 4일
  • 영등포 해전 : 10월 1일
  • 장문포 해전 : 10월 4일

 

 

1597년

  • 칠천량 해전 : 7월 16일
  • 고령 전투 : 8월 15일
  • 남원 전투 : 8월 16일
  • 황석산성 전투 : 8월 16일
  • 어란포 해전 : 8월 27일
  • 직산 전투 : 9월 7일
  • 벽파진 해전 : 9월 7일
  • 명량 해전 : 9월 16일
  • 제1차 울산성 전투 : 12월 24일

 

1598년

  • 절이도 해전 : 7월 19일
  • 제2차 울산성 전투 : 9월 21일
  • 사천성 전투 : 9월 28일
  • 순천성 전투 : 9월 20일~10월 7일
  • 노량 해전 : 11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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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주 대첩 승전의 의의

 

명나라 부총병 사대수(査大受)가 임진강 일대를 순시 중에 행주산성의 대승 소식을 듣고 다음날 그의 비장을 행주산성에 보내어 전투지역을 확인토록 하였습니다. 권율의 승전을 확인한 사대수는 예물을 보내어 승전을 축하하였습니다. 사대수는 권율 진영을 방문해서 자기의 부장들에게 말하기를 “권감사의 군사는 다른 군보다 특별히 뛰어난 군사이다. 참으로 외국에 진정한 장수가 있도다.”하고 감탄하였다고 합니다. 그 뒤 3월에 경략 송응창(宋應昌)은 명나라 조정에 행주대첩을 보고하기를 “전라도관찰사 권율이 외로운 군을 이끌고 요충지를 지키면서 백성을 불러 모아 뛰어난 계책으로 강적을 물리쳤으니, 이는 국가의 위급을 구한 충신이요 중흥의 명장입니다. 이제 홍비단 4필과 은 50냥을 그에게 상으로 내리시어 충성과 용맹을 권장하게 하소서.”하였습니다. 3월에 병부상서 석성(石星)은 명나라 신종(神宗) 황제의 성지(聖旨)를 받아왔습니다. 이 칙서에 이르기를 “조선국은 본래부터 강한 나라로 알려져 왔는데, 전라도 관찰사가 많은 왜적의 목을 베고 사로잡았다고 하니, 그것이 사실임을 알겠노라. 이는 조선국 인민의 사기를 진작시킬 수 있는 것이라. 관원을 보내어 선유하는 바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이후로 명나라의 관원들은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권율의 이름을 들을 때마다 “그 분은 지난날 행주산성에서 대승을 거둔 분이 아닌가?”라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합니다. 천자국의 위세를 내세워서는 조선국 문무대신들을 멸시했던 그들까지도 권율 장군의 업적만은 인정했던 것입니다. 조정에서는 권율에게 자헌대부를, 조경에게는 가선대부를, 승장 처영에게는 절충장군을 수여하였습니다. 선조도 권율을 칭찬하기를 “경이 아니었으면 국가를 어찌 얻을 수 있었으리요.”하였습니다. 이 행주대첩으로 말미암아 명나라 경략 송응창은 명예를 얻었고 권율은 조선을 중흥시킨 명장이 되었습니다

 

한편, 행주산성에서 크게 패한 일본군은 조선군의 반격과 의병의 유격전, 명군의 남진 등으로 사기가 크게 위축되었고 여기에 군량미는 거의 바닥나고 도망자까지 속출되는 어려운 지경에 이르자 더 이상 한성 점령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3월 13일 용산에 쌓아 두었던 군량미 수만석이 조선군 정찰조에 의해 불타자 군량미 사정은 더욱 악화되어 한양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죠. 일본군은 조선군의 추격을 염려하여 조선측을 배제시키고 명측과 단독 강화협상을 벌였습니다. 명측은 4월 18일 이를 수락해서 다음 날인 l9일 일본군은 한성을 퇴각하였습니다. 조선군은 끝까지 강화 협상을 반대하였습니다. 당일에 권율이 파주로부터 군사를 인솔해서 입성한 다음 도강하여 적을 추격하려 하였으나 이여송이 유격장 척금을 보내 노량진의 나룻배를 거두어 한강 도하작전을 방해하였습니다. 퇴각한 일본군은 본국으로 철수하지도 못한 채 경상도 연해지역인 울산 서생포에서 거제도에 이르는 요충지에 성을 쌓고 한편으로는 강화협상을 벌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장기전에 대비하는 이중적인 작전을 취하게 되었습니다.

          

 

 

 

행주대첩

 

행주대첩(幸州大捷)은 임진왜란행주산성에서 권율이 지휘하는 조선군과 백성들이 일본군을 싸워 크게 이긴 전투이다. 행주대첩은 진주대첩, 한산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大捷, 크게 이긴 전투)으로 불리고, 진주대첩, 연안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육전 3대첩으로 불리며, 살수대첩, 구주대첩, 한산대첩과 함께 한민족 4대첩의 하나로 불린다.

 

 
행주대첩
(임진왜란의 일부)
날짜 1593년 2월 12일
장소 조선 경기도 행주산성
(현재 고양시 덕양구 행주내동)
결과 조선군의 승리,
교전국
조선 일본
지휘관
조선

권율
선거이 병사
김천일 창의사
조경 조방장
허욱 충청감사/
정걸 수군

일본
우키타 히데이에
이시다 미쓰나리
킷카와 히로이에
고니시 유키나가
구로다 나가마사
나가오카 다다오키
가토 기요마사
나카야 센시로†
아카시 요에몬†
도자키 히코에몬노조†
병력
행주 대첩 수비군 총 2,800명 3만여 명
피해 규모
130여 명 사상 20,000여명 사상
우키타 히데이에 중상 이시다 미쓰나리, 킷카와 히로이에 부상

 

 

 

권율은 임진왜란 초에 광주 목사(光州牧使)로 있으면서 이치 전투독성산성 전투 등 전공을 세워 전라도 순찰사가 되었다. 권율은 행주산성에 웅거하며 명군과 합세해서 한양을 탈환하려다 명군이 벽제관에서 대패하여 평양으로 돌아감으로써 고립 상태에 빠졌다.

 

한편 일본군은 총퇴각을 하던 중 벽제관 전투에서 명군을 대파하고 한양에 머물게 되었다.

 

권율은 1593년 음력 2월에는 병력을 나누어 부사령관 선거이에게 시흥 금주산(衿州山)에 진을 치게 한 후 병력을 이끌고 한강을 건너 행주산성에 주둔하였다. 이때 의병장 김천일과 승병장 처영의 병사들도 합세하여 총병력은 2,800여명에 이르렀다.

 

행주산성의 지형은 전방만 뚫려 있으며 후방에 한강이 흐르고 있었으므로 배수진이 되었다. 왜군은 오직 전방에서만 공격이 가능했다. 행주산성의 군민들은 3만 명의 대군으로 공격해 온 우키다 히데이에의 일본군을 맞아 바위, 화살, 불덩이, 끓는 물을 퍼부어 1만여명의 사상자를 내게 하고 적장 우키타 및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오른팔이라 불리던 이시다 미츠나리, 킷카와 히로이에게 모두 부상을 입히고 격퇴하였다. 특히 우키타 히데이에는 중상을 입고 죽을 위기에 몰렸으나 부하 병사들이 우키타 히데이에를 업고 뛰어서 도망친 덕택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또한 와키사카 야스하루한산도 대첩 때처럼 화살을 온몸에 맞은 채로 목숨만 붙어 달아났다.

 

이때 성내의 아녀자들이 치마 위에 짧은 덧치마를 대어 적군들에게 던질 돌덩이를 운반한 것이 행주치마의 유래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1527년(중종 12년) 최세진이 편찬한 사성통해(四聲通解)에 의하면 임진왜란 전부터 행주치마라는 단어가 존재했다는 점으로 볼때 이는 잘못되었다. 또한 이때 조선군의 신무기인 화차비격진천뢰도 맹활약한 바 있다.

 

행주대첩은 이순신한산대첩, 김시민진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로 빛난다. 권율은 이 전공으로 도원수에 올랐다가 탈영병을 즉결 처분한 죄로 해직되었으나, 한성부판윤으로 재기용되어 비변사당상(備邊司堂上)을 겸직하였고, 1596년 충청도 순찰사에 이어 다시 도원수가 되어 어마(御馬)까지 하사받았다.

 

 

 

 

권율 장군

 

권율(權慄, 1537년~1599년)은 조선 중기의 무신(武臣), 군인, 정치인이다. 본관은 안동, 는 언신(彦愼), 는 만취당(晩翠堂)·모악(暮嶽), 시호는 충장(忠莊)이다. 영의정 권철(權轍)의 막내 아들이자 이항복(李恒福)의 장인이다. 임진왜란의 조선군 장수로, 왜란 당시 조선군 총사령관인 도원수로서 왜군의 침략을 성공적으로 막아내는데 기여했으며 임진왜란 3대 대첩 가운데 하나인 행주대첩을 이끈 장군으로 특히 잘 알려져 있다. 사후 선무공신 1등에 녹훈되었다.

 

권율(權慄)
출생 1537년
강화도
사망 1599년
국적 조선
별칭 자는 언신(彦愼), 호는 만취당(晩翠堂)·모악(暮嶽), 시호는 충장(忠莊)
학력 1582년(선조 15년)에 식년문과 병과
직업 문신 겸 군인.
부모 영의정 권철

 

 

 

 

 

1537년 후일 영의정을 지내는 권철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가계는 상당히 유복한 가정이었다. 그는 나이가 들어도 관직에 나아갈 생각은 않고 오로지 공부에만 매진했다. 가족들의 권고에 뒤늦게 그가 46살이 되던 1582년(선조 15년)에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응시하여 병과로 급제를 하여 승문원증자(承文院正字)가 되었다. 이어 예조정랑·호조정랑·의주목사(義州牧使) 등을 역임하였다.

 

1592년 그의 나이 56살 때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한양이 함락되고 왕실이 북쪽으로 피난길을 떠났다. 국내 사정이 시시각각으로 위태로워져서 전라도 순찰사 이광(李洸)과 방어사 곽영(郭嶸)이 4만여 명의 군사를 모집할 때, 광주목사(光州牧使)로서 곽영의 휘하에 들어가 중위장(中衛將)이 되어 북진하다가 용인에서 일본군과 싸웠으나 병사들이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한 오합지졸이라 패전하고 말았다.

 

 

이치 전투

그 뒤 권율은 남원에 주둔하여 1천여 명의 의용군을 모집하였다. 광주(光州)로 가서 군병을 모집하고 남원으로 이동했다는 설도 있다. 권율은 전라도 금산에서 전주로 진격하는 왜군을 막기 위해 진산 인근 이치(배고개)에 진을 쳤다. 임시 도절제사 권율(權慄)과 동복현감 황진(黃進)이 이끄는 1천여명의 조선군이 왜장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가 이끄는 2천여명의 대군과 맞서 싸워 승리를 거둔 전투로 일본의 전라도 진격작전을 궤멸시켰다. 이 승리로 일본군은 그 후 다시는 전라도를 넘보지 못하게 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권율은 전라감사로 승진하였다.

 

 

독왕산성 싸움과 세마대

권율은 때마침 명나라에서 원군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한양을 탈환할 목적으로 2,300명의 관군과 500명의 승병을 이끌고 한양으로 향했다. 한양으로 향해 북상하던 도중 오산 독산(禿山)의 독왕산성(禿旺山城)에 주둔하였다. 독왕산성은 물이 귀한 곳이었으며 우키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가 이끄는 일본군은 그 기미를 알고 한달간 성을 포위했다. 이때 권율은 산성 위에 군마들을 세워놓고 병사들로 하여금 말에게 쌀을 쏟아붓고 씻기게 하였다. 성 아래서 볼 때는 마치 풍부한 물로 말들을 씻기는 것 같이 보였다. 이에 일본군은 의기소침하여 포위를 풀고 서울로 후퇴하였으며, 권율의 병사들은 이를 추격하여 일본군에 3천명 이상의 전사자를 내게 만들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선조는 권율의 병법을 높이 치하하여 독왕산성 정상에 세마대(洗馬臺, 말을 씻긴 곳)를 짓게 하여 오늘에 이른다.

 

 

행주대첩

이러한 기지로 일본군의 서진(西進)을 막은 권율은 1593년 음력 2월에는 병력을 나누어 부사령관 선거이(宣居怡)에게 시흥 금주산(衿州山)에 진을 치게 한 후 의병장 김천일(金千鎰)과 승병장 처영(處英)의 병력을 합쳐 3,800명의 병사를 이끌고 한강을 건너 행주산성에 주둔하였다. 행주산성의 군민들은 3만 명의 대군으로 공격해 온 우키다 히데이에의 일본군을 맞아 바위, 화살, 불덩이, 끓는 물을 퍼부어 1만여명의 사상자를 내게 하고 적장 우키다 및 토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의 오른팔이라 불리던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 킷카와 히로이에에게 모두 부상을 입히고 격퇴하였다. 이때 성내의 아녀자들이 치마 위에 짧은 덧치마를 대어 적군들에게 던질 돌덩이를 운반한 것이 행주치마의 유래가 되었다는 설이 있으나, 임진왜란 전부터 행주치마라는 단어가 존재했다는 점으로 볼 때 이는 맞지 않다. 또한 이때 조선군의 신무기인 화차(火車)와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도 맹활약한 바 있다. 행주대첩은 이순신(李舜臣)의 한산대첩, 김시민(金時敏)의 진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로 빛난다. 권율은 이 전공으로 도원수에 올랐다가 탈영병을 즉결 처분한 죄로 해직되었으나, 한성부판윤으로 재기용되어 비변사당상(備邊司堂上)을 겸직하였고, 1596년 충청도 순찰사에 이어 다시 도원수가 되어 어마(御馬)까지 하사받았다.

 

 

정유재란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도원수 권율은 일본군의 북상을 막기 위해 명나라 제독 마귀와 함께 울산에서 대진했으나, 명나라 군대 사령관 양호의 돌연한 퇴각령으로 철수하였다. 이어 순천예교(順天曳橋)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하려고 했으나, 전쟁의 확대를 꺼리던 명나라 장수들의 비협조로 실패하였다.

 

 

왜란 이후

임진왜란이 끝나고 1599년 그의 나이 63세 때 그는 노환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에 돌아갔으나, 그해 사망하였다. 선조는 그의 죽음을 슬퍼하여 이틀이나 정사(政事)를 폐지하였다고 한다.

 

 

사후 관작(官爵)

그가 죽은 뒤 전공으로 영의정에 추증되고, 1604년 이순신, 원균(元均)과 함께 임진왜란중 전공을 세운 장군들에게 내려진 최고의 영예인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에 봉해졌으며,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으로 추봉되고, 충장사(忠莊祠)에 배향되었다. 충장(忠莊)의 시호가 내려져 충장공(忠莊公)이 되었다.

 

 

평가와 비판

권율은 비록 늦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과거에 급제한 데다가 그 연령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 7년간 조선 육군을 총지휘한 장군으로 바다의 이순신과 더불어 전공을 세웠다. 하지만 행주대첩 이후 눈에 띄는 큰 전공은 세우지 못하여 〈선조실록〉에서 사관에게 '행주(幸州)에서 한 차례 승첩을 거두자 갑자기 중명(重名)을 얻게 되어 도원수에 제수되고 곤외(閫外)를 전제하였다.'는 혹평을 듣기도 했다.

 

 

이항복과의 관계

오성 이항복 집의 감나무 가지가 권율의 아버지 권철의 집(영역)으로 휘어 들어갔는데 이 가지에 열린 감을 권철 집의 하인들이 따먹자, 소년 이항복이 이 사실을 알고 꾸짖었으나 하인들은 오히려 감이 자신의 소유라고 우겼다. 어느날 이항복은 권철이 있는 방문에 주먹을 찔러 넣고 "이 주먹이 누구의 주먹입니까?" 하고 물었다. 하인들이 이항복의 감을 훔쳐먹은 사실을 인지한 권철은 하인들을 단속하였고, 이항복의 영특함을 깨달아 아들인 권율에게 장차 이항복을 사위로 삼으라는 조언을 해주었다.

 

장난기 많은 오성대감 이항복은 종종 고지식한 장인인 권율을 놀린 일이 있다고 한다. 청렴결백한 권율은 조복과 의관을 갖춰입으면서도 제대로 된 내의를 입지 못하고 늘 베잠방이 차림이었다고 한다. 왜란이 끝난 후 병조판서인 이항복과 도원수 권율이 선조 임금 앞에 대궐조회에 참석한 어느 무더운 여름날, 이항복은 선조에게 날씨가 너무 무더우니 모두들 관복을 벗고 조회를 하자고 제의하였다. 선조는 쾌히 승락하고 신하들이 모두 관복을 벗었으나 관복 아래 베잠방이 차림인 권율은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임금의 명령을 받고 마지못해 관복을 벗고 베잠방이 차림을 드러내어 망신을 당한 권율에게 선조는 파안대소하며 비단과 무명을 하사했다고 한다.

 

 

원균과의 관계

이순신과 경쟁심을 가지고 있던 원균이 수시로 수군통제사인 이순신과 마찰을 일으키곤 하였다. 이에 원균은 수군이 아닌 육군으로 전출되기도 한다. 그러나 냉철하게 전황을 읽고있던 이순신과는 다르게 수군 단독으로 왜를 격파할 수 있다고 수차례 조정에 장계를 하였고, 이순신을 견제하려는 선조의 심중과 맞아 떨어져 이순신의 후임으로 통제사직에 임명된다.

 

하지만 원균은 부임 이후 이순신의 수군 단독출병 불가의 판단이 옳았음을 알고 말을 바꿔 수륙 병진을 주장하였다. 이 과정에서 원균은 조선의 군사동원력이 17만명을 모은 임진년보다 크게 떨어진 상황인데도 30만은 동원할 수 있다고 하고, 섬인 가덕도까지 육군이 몰아치면 된다는 현실을 무시한 주장을 했다.

 

이에 권율은 비밀 장계를 올려 원균의 주장대로 육군을 움직이긴 어려움을 전하였다. 한편 조정에서 수군에게 원하는 것은 수군의 전면적인 부산포 진격이 아닌, 무력시위를 전개하여 일본이 보급선 유지에 불안감을 가지게 하는 것이었으나 원균은 이조차도 하지 못하다가 원균이 부임전과는 달리 이런저런 핑계로 칠천량으로 출동하지 않자 원균을 곤장으로 다스렸다. 사실 권율이 원균을 곤장으로 다스린 이유는 따로 있었다. 칠천량으로 출동하지 않았다는 사유는 표면적인 사유일 뿐이며 권율은 그 정도로 생각없는 위인이 아니였다. 권율이 원균에게 곤장을 내린 실제 사유는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 시절에는 윤근수, 윤두수 형제의 의견을 옹호하며 이순신의 주장을 반박하더니 막상 그렇게 해서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에서 몰아내고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자 원균은 돌변하여 이순신이 주장했던 의견을 그대로 주장하게 된 것이다. 권율은 삼도수군통제사라는 관직에 욕심이 난 나머지 조정을 기망하고 임금을 갖고 논 원균을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권율에게 곤장을 맞은 후 원균은 전 병력을 끌고 출전하여 칠전량 해전에서 참패를 당하고 그 전투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충무공유사에서 본 권율

1595년 4월 30일

아침에 원수의 계본과 기(奇)·이(李)씨 등 두 사람의 공초(供招·죄인의 진술)한 초안을 보니 원수가 근거 없이 망령되게 고한 일들이 매우 많았다.
반드시 실수에 대한 문책이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데도 원수의 지위에 둘 수 있는 것인가. 괴이하다.

朝見元帥啓本及奇李兩人供草, 則元師多有無根妄啓之事, 必有失宜之責. 如是而可置元帥之任乎! 可怪.

 
— 《충무공유사》 중.

 

 

부정적 평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원균의 갈등은 누가 옳은지에 관한 논의와 상관없이 조선 수군 지휘부의 분열을 의미했다. 국난의 위기에서 극심한 갈등을 빚은 두 사람 역시 이러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또한 당시 두 사람의 갈등을 해결하기보다는 오히려 이를 더욱 심화하는데 일조한 권율은 조선군 총사령관으로서 책임을 져야만 한다.

 

 

가족

  • 아버지 : 권철, 영의정 역임
  • 사촌 : 권종(權悰), 임진왜란 때 전사
  • 사위 : 이항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