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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646 : 조선의 역사 188 (선조실록 53)

두바퀴인생 2012. 7. 14. 04:42

 

 

 

 

한국의 역사 646 : 조선의 역사 188 (선조실록 53)

 

 

                                              

                                                                                           임진왜란 경과                                                                                                                    

                                                                                                                                                                                   

 

제14대 선조실록(1552~1608년, 재위: 1567년 7월~1608년 2월, 40년 7개월)            

 

 

 

 

 

 

 

 

 

 

임진왜란 전투목록

 

아래 임진왜란 전투 목록임진왜란 중 있었던 전투 목록이다. 시간 순으로 작성되었으며, 모두 음력으로 날짜순대로 표시했다. 주요 전투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1592년

  • 다대포 전투 : 4월 13일 ~ 4월 15일
  • 부산진 전투 : 4월 14일
  • 동래성 전투 : 4월 15일
  • 경상도 및 충청도 함락 : 4월 17일~4월 28일
  • 상주 전투 : 4월 25일
  • 충주 탄금대 전투 : 4월 28일
  • 한강 전투 : 5월 2일
  • 옥포 해전 : 5월 7일
  • 합포 해전 : 5월 7일
  • 적진포 해전 : 5월 8일
  • 해유령 전투 : 5월 16일
  • 임진강 전투 : 5월 18일
  • 기강 전투 : 5월 18일
  • 사천 해전 : 5월 29일
  • 당포 해전 : 6월 2일
  • 당항포 해전 : 6월 5일
  • 용인 전투 : 6월 5일
  • 무계 전투 : 6월 6일
  • 율포 해전 : 6월 6일
  • 정암진 전투 : 6월 8일
  • 여주 전투 : 6월 10일
  • 제1차 평양 전투 : 6월 15일
  • 웅치 전투 : 7월 7일
  • 이치 전투 : 7월 8일
  • 한산도 대첩 : 7월 8일
  • 제1차 금산 전투 : 7월 9일
  • 안골포 해전 : 7월 10일
  • 우척현 전투 : 7월 10일
  • 제2차 평양 전투 : 7월 17일
  • 영천성 전투 : 7월 24일~7월 27일
  • 지례 전투 : 7월 29일
  • 제3차 평양 전투 : 8월 1일
  • 청주 전투 : 8월 1일
  • 제1차 경주 전투: 8월 2일
  • 제2차 금산 전투 : 8월 18일
  • 영원산성 전투 : 8월 25일
  • 장림포 해전 : 8월 29일
  • 화준구미 해전 : 9월 1일
  • 다대포 해전 : 9월 1일
  • 서평도 해전 : 9월 1일
  • 절영도 해전 : 9월 1일
  • 초량목 해전 : 9월 1일
  • 부산포 해전 : 9월 1일
  • 연안 전투 : 9월 2일
  • 제2차 경주 전투 : 9월 8일
  • 북관대첩 : 1592년 9월 16일~1593년 1월 28일
  • 창원 전투 : 9월 27일
  • 제1차 진주성 전투 : 10월 10일
  • 독성산성 전투 : 12월 11일

 

1593년

  • 제4차 평양 전투 : 1월 9일
  • 성주 전투 : 1월 15일
  • 벽제관 전투 : 1월 27일
  • 웅포 해전 : 2월 10일~3월 6일
  • 행주 대첩 : 2월 12일
  • 제2차 진주성 전투 : 6월 29일

 

1594년

  • 제2차 당항포 해전 : 3월 4일
  • 영등포 해전 : 10월 1일
  • 장문포 해전 : 10월 4일

 

 

1597년

  • 칠천량 해전 : 7월 16일
  • 고령 전투 : 8월 15일
  • 남원 전투 : 8월 16일
  • 황석산성 전투 : 8월 16일
  • 어란포 해전 : 8월 27일
  • 직산 전투 : 9월 7일
  • 벽파진 해전 : 9월 7일
  • 명량 해전 : 9월 16일
  • 제1차 울산성 전투 : 12월 24일

 

1598년

  • 절이도 해전 : 7월 19일
  • 제2차 울산성 전투 : 9월 21일
  • 사천성 전투 : 9월 28일
  • 순천성 전투 : 9월 20일~10월 7일
  • 노량 해전 : 11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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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차 평양 전투는 이여송이 이끄는 명나라 군이 본격적으로 참가하여 조명연합군이 벌인 평양 수복 전쟁이었다. 이여송이 이끈 명나라 군과 조선군은 각기 성문을 담당하여 공격하였는데 당시 일본군은 게속된 수군의 패전과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들과 전투에서 전력이 급감하고 있는 상태였고 수로를 이용한 보급이 불가하여 전방의 일본군은 극심한 보급품 부족에 시달리며 혹독한 추위를 견디어내며 풍신수실의 차후 지시를 기다리며 주요 지점과 그 지점을 잇는 정도의 병참선을 겨우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런 상태에서 고니시 군은 지원군을 기다리며 혹독한 추위와 보급품 부족 상태에서 평양에서 버티고 있다가 이미 병력이 거의 반감된 상태로 조명연합군이 공성전을 벌이면서 압박하자, 승산이 없슴을 판단한 고니시는 상방 간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스스로 철군할 터이니 길을 비켜달라'며 명군과 협상하여 함경도 쪽으로 철수하게 되었 조명연합군은 결국 평양을 수복하게 된다.

 

당시 길거리의 널부러진 일본군 시체의 태반은 조선 사람들로 일본군에 강제 징용되어 피해를 당한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조명연합군의 대대적인 대승도 아니오 다만 일본 군이 스스로 물러남으로써 평양이 수복되었고 평양 수복은 임진왜란의 전반적인 전세를 역전시키는 심리적인 효과가 큰 전투였다. 

 

  

  

 

제4차 평양 전투

제4차 평양 전투
(임진왜란의 일부)
회본태합기 - 평양성 전투.jpg
평양성을 함락시키는 명나라 군의 모습.
날짜 1593년 음력 1월 6일 ~ 음력 1월 9일
장소 평안도 평양성
결과 조명 연합군의 승리, 평양성 탈환
교전국
조선
명나라
일본
지휘관
조선
김명원 도원수
김응서 우측 방어사
정희현 좌측 방어사
이시언 황해도 방어사
정화 황주 판관
사명대사 금강상 승병장
서산대사 묘향산 승병장
명나라
이여송 총사령관
이여백 중군 부총병
양호 좌군 부총병
장세작 우군 부총병
오유충 부총병
이녕 참장
조승훈 부총병
고니시 유키나가
병력
조선군 8000명
승병 2200명
명 원군 4만 3000명
총병력 5만 3200명
1만 8700명
피해 규모
240여 명 사상 1200명 전사, 5000여 명 부상

 

 

 

             

 

 

4차례의 평양 전투 중 가장 규모가 큰 대전투이다.

 

조승훈의 1차 원병군의 패전으로 인해 명나라 조정에서는 경략 송응창과 제독 이여송을 총사령관으로 삼아 4만 3000명의 군사를 주어 2차 원병으로 보냈다. 명나라에서는 그 동안 시간을 끌기 위해 유격장군 심유경을 보내 휴전 협상으로 시간을 끌게 하였다.

 

1592년 음력 12월 13일 명나라의 첫 선봉부대가 압록강을 건너고 음력 12월 25일 이여송의 주력 부대가 압록강을 건너 선조가 있던 의주 용만관으로 진출하였다. 조선에서도 명군에게 식량과 물자를 대주고 도원수 김명원과 우측 방어사 김응서, 좌측 방어사 정희현 등 총 8000명의 군사를 주고 서산대사사명대사도 승병 2200명을 이끌고 참전했다.

 

한편 고니시 유키나가조명 연합군평양성을 공격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자 5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황해도 봉산에 주둔한 구로다 나가마사의 휘하 장수 오토모 요시무네에게 구원을 요청하였으나 오토모는 이를 거절하고 한양 방면으로 철수하여 일본군의 사기가 크게 저하되었다.

 

1593년 음력 1월 6일부터 공격을 시작하여 일본군은 성 방어를 위한 시설을 만들어 평양성을 난공불락 요새로 바꾸고 모란봉에는 2000명의 조총 부대를 배치시켰다.

 

조명 연합군평양성 서쪽 외성에서 공격을 시작하여 모란봉, 칠성문, 보통문을 공격하고 이일김응서함구문을 공격하기로 했다. 명나라의 부총병 오유충조선의 승병 부대가 처음으로 공격을 시작해 거짓으로 패한 척 후퇴하다가 다시 반격하여 승리했다. 하지만 조선군 8000명이 남쪽 함구문에서 일본군의 매복에 걸려 상당한 손실을 입었다.

 

음력 1월 7일 새벽 일본군 3000명이 명나라양호, 이여백, 장세작 등의 진지에 기습 공격을 가했으나 명군의 이를 물리쳤고 조명 연합군은 본진을 보통문 앞에 전진 배치하고 정희현김응서의 기병대가 일본군을 유인하게 했으나 일본군은 속지 않았다.

 

이후 조명 연합군은 2일 동안 탐색전을 하여 일본군을 관찰하다가 음력 1월 8일 대공세를 가했다. 명군의 대장군포, 위원포, 자모포, 연주포, 불랑기포 등 수많은 대포들을 평양성에 집중사격하고 외성 서남쪽 함구문은 명군의 조승훈조선이일, 김응서의 8000명 군사가, 칠성문장세작이, 보통문양호가, 모란봉오유충사명대사의 승병 2200명이 공격에 나섰다. 양측의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고 오유충은 적의 탄환에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군사들을 독려하고 이여송도 타고 있던 말이 적의 탄환에 맞아 죽자 다른 말로 갈아타 군사를 지휘해 사기를 올렸다.

 

조명 연합군이 외성과 읍성을 함락시키고 중성으로 돌입해 일본군을 만수대을밀대로 압박했고 일본군은 풍월정 아래에 굴을 파 최후의 공격을 가했다. 격렬한 전투로 양측의 사상자가 늘어나자 이여송은 더이상 공격하지 않고 철수했다. 그리고 고니시 유키나가와 협상을 맺어 추격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한 뒤 이날 밤 평양성에서 철수했다.

 

그러나 명군의 참장 이녕의 3000명 군사가 추격에 나서 358명을 사살했고 조선군도 추격에 나서 황해도 방어사 이시언이 60명을, 황주 판관 정화가 120명 등 총 538명을 사살했다. 이리하여 평양성을 7개월만인 음력 1월 9일 조명 연합군에 의해 탈환되었다.

 

평양성에서 후퇴하던 일본군은 봉산-용천-배천을 거쳐 한양으로 철수했으나 그 과정에서 1만 8700명에 달하는 병력이 6600명으로 감소될 정도로 피해가 컸다.

 

그러나 이후 평양성 탈환에 가장 큰 역할을 한 명나라군의 남병들이 이여송이 약속한 5000냥의 은을 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반란을 일으켰다. 이여송은 후방 의주에 남병 1300명을 유인해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한편 황해도 방어사 이시언은 공을 세우지 못하자 자기 휘하의 군사들 중 허약한 군사들 60명을 모두 죽였다. 그리고 선조평양성이 탈환되자 음력 1월 18일 의주를 떠나 남하를 시작했다.

 

 

 

 

평양 전투의 실상

 

아래는 한명기씨의 글이다. 참고~

 

» 1593년 1월6일부터 벌어진 평양성 전투를 묘사한 그림. 이 전투에서 명군은 남병과 그들의 장기인 화포, 화기를 이용하여 일본군에게 대승을 거두었다. 이 전투를 계기로 조선은 일방적인 수세에서 벗어나 반격의 실마리를 마련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새롭게 다시 보는 임진왜란>(진주박물관 간행)에서 전재

1592년 7월 조승훈(祖承訓)이 지휘했던 명군이 평양전투에서 참패하자 명 조정은 충격에 휩싸였다. 명은 일본군이 예상보다 훨씬 강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요동도 이제 안전하지 않다는 위기감이 높아졌다. 1592년 8월 명은 병부우시랑 송응창(宋應昌)을 비왜경략(備倭經略)에 임명하여 북경 주변과 요동의 방어태세를 점검하도록 했다.

 

명은 논란 끝에 조선에 다시 대군을 보내기로 했지만 상황은 여의치 않았다. 당시 영하(寧夏), 섬서(陝西) 일대에서는 몽골 귀화인 출신 장수 보바이가 반란을 일으켰다. 명은 이여송(李如松) 등을 보내 진압에 안간힘을 쓰고 있는 형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에 들여보낼 병력과 군수물자를 동원하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명은 평양 패전을 계기로 포병과 화기수(火器手)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기병만으로는 조총을 가진 일본군을 당해낼 수 없었다. 그런데 포병과 화기수들은 주로 복건, 절강 등 남방 지역에 배치되어 있었다. 남병(南兵)이라 불렸던 그들을 조선까지 파견하려면 최소 몇 달의 시간이 필요했다. 만일 남병을 이동시키는 동안 일본군이 요동으로 진입해 온다면? 명의 입장에서는 끔찍한 시나리오였다.

 

 

 

 

고니시 “명과 일본이 조선을 나눠갖자”

 

병부상서 석성(石星)은 응급조치를 취했다. 무뢰배 출신의 책사 심유경(沈惟敬)에게 유격장군(遊擊將軍)의 직함을 주어 조선으로 들여보냈다. 심유경은 1592년 8월 17일 선조를 만난 자리에서 허풍을 늘어놓았다. “황제께서 조선이 지성으로 사대한 것을 가상히 여겨 70만의 대군을 뽑아 곧 들여보낼 준비를 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조선은 예의의 나라라 병법을 모르기 때문에 직접 평양으로 들어가 일본군을 정탐한 뒤에 거사하겠다”고 강조했다. 선조는 반신반의하면서도 그에게 명군을 속히 보내달라고 간청했다.

 

9월1일 심유경은 평양 강복산(降福山) 근처 부산원(釜山院)이란 곳에서 고니시 유키나가와 회담했다. 심유경은 고니시에게 조선에서 물러나라고 촉구했다. 그러자 고니시는 “저희가 조선에서 길을 빌려 조공을 바치려 했음에도 조선이 병력을 동원하여 항거함으로써 문제가 생겼다”며 침략을 조선 탓으로 돌렸다. 심유경은 다시 “이곳은 천조(天朝)의 지방이니 너희는 물러가서 천조의 명령을 기다리는 것이 좋겠다”고 응수했다. 깜짝 놀란 고니시가 지도를 꺼내 보이며 “이곳은 분명 조선 땅”이라고 하자 심유경은 “조선은 항상 이곳에서 황제의 조칙을 맞이한다. 비록 조선 땅이지만 상국과의 경계이니 너희들은 이곳에 머물 수 없다”고 반박했다. 논란 끝에 두 사람은 향후 50일 동안 휴전하기로 합의한다.

심유경은 11월26일 평양성으로 들어가 고니시와 다시 만났다. 포로로 잡힌 임해군 등을 석방하고 철수하라고 심유경이 다시 요구하자 고니시는 할지(割地) 문제를 들고나왔다. 대동강을 경계로 명과 일본이 조선을 분할하자는 내용이었다. 양자의 회담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조선은 할지 문제가 거론되자 바짝 긴장했다. “일본이 서울과 평양 일대를 명에 넘기려 한다”는 풍문까지 떠도는 와중에 조선은 심유경의 일거수일투족을 미심쩍은 눈으로 주시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할지는 실행되지 않았다. 유세객 심유경의 활동이 남긴 성과는 컸다. 기만적인 협상을 통해 휴전을 이끌어내고 일본군을 평양에 묶어놓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명은 심유경의 활약 덕분에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조선 또한 최악의 위기상황을 피할 수 있었다.

 

 

 

» 조선을 원조하는데 적극적이었던 석성(위)은 조승훈의 패전 이후 일본군의 요동 진입을 몹시 우려했다. 그는 일본과의 협상을 위해 책사 심유경을 들여보냈는데 심유경은 평양에서 고니시 유키나가와 담판을 벌여 잠정적인 휴전을 이끌어냈다. 제독 이여송(아래)은 임진왜란 당시 명군의 야전군사령관이었다. 철령 출신으로 조선족이었던 그는 평양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조선으로부터 존경과 숭앙의 대상이 되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새롭게 다시 보는 임진왜란> (진주박물관 간행)에서 전재
명 심유경과 일 고니시의 담판
50일 휴전으로 시간을 버는 동안
이여송은 5만대군을 이끌고
평양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조선은 위기를 벗어났지만
명에게 주도권을 넘겨주었다
알력다툼을 벌이던 명 지휘부는
자신의 공로를 뽐내기 위해
조선인을 죽이고 머리칼을 잘라
일본군으로 둔갑시켰다

 

 

 

 

승전보에 들뜬 선조는 명을 향해 큰절

 

1592년 11월 보바이의 반란이 진압되었다. 명 조정은 이여송을 제독(提督) 겸 어왜총병관(禦倭摠兵官)으로 임명하여 조선으로 출전하라고 명령했다. 같은 해 12월 이여송이 요양(遼陽)에 도착하자 조선은 사신을 보내 속히 진격해 달라고 간청했다. 이여송은 조선 사신들을 만난 자리에서 “조선을 침범한 왜노(倭奴)들을 쓸어버리고 필요하다면 일본까지 진격하겠다”고 기염을 토했다.

이여송은 12월25일 5만1000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조선에 들어왔다. 조승훈이 이끌었던 병력에 비하면 거의 15배나 많은 대군이었다. 요동, 광녕(廣寧), 선부(宣府), 대동(大同) 출신의 기마병인 북병(北兵) 이외에 상당수의 남병들도 함께 들어왔다. 선조를 만난 자리에서도 이여송은 여전히 자신만만했다.

 

1593년 1월6일부터 벌어진 평양전투에서 이여송은 조선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는 평양성을 공격하기 직전 기만전술을 사용하여 일본군을 교란시키려고 시도했다. 1월5일 이여송은 부총병 사대수(査大受)를 일본군 진영에 보내 “황제가 강화를 허락했고 심유경도 곧 올 것”이라며 일본군 장수와 만나고 싶다고 통고했다. 고니시가 기뻐하며 부하 20여명을 보내자 사대수는 이들을 유인하여 사로잡았다. 그날 밤 생포된 일본군 몇 명이 탈주하여 명군의 진격 사실이 누설되자 이여송은 바로 공격에 나섰다.

 

평양전투는 화포와 조총의 대결장이었다. 명군은 불랑기포(佛狼機砲), 멸로포(滅虜砲), 호준포(虎

 

砲) 등 화포를 발사하여 평양성을 타격했다. 화포의 위력은 대단했다. 류성룡은<징비록>에서 “대포 소리에 땅이 진동하고 수십리 사이의 크고 작은 산들도 요동쳤다”고 회고한 바 있다.

 

이여송은 성 아래로 바짝 다가가 싸움을 진두지휘했다. 낙상지(駱尙志), 오유충(吳惟忠), 이여백(李如栢) 등 부하 장수들도 분전했다. 명군에게 밀려 성문이 뚫리자 일본군은 내성(內城)의 토굴로 숨어들어 조총을 쏘며 격렬하게 저항했다. 이여송은 명군의 인명 손실을 우려하여 고니시군에게 퇴로를 열어주었다. 일본군은 결국 1월8일 밤 얼어붙은 대동강을 건너 남쪽으로 도주한다.

 

명군은 일본군 1200여명의 목을 베고 전마 2900여필 등을 노획했다. 평양전투 승리를 계기로 전세는 역전되었다. 고니시 군이 평양에서 쫓겨나자 함경도에 머물던 가토 기요마사 휘하의 일본군도 고립되는 것을 우려하여 서울 쪽으로 철수 길에 오른다. 개전 이후 일방적으로 수세에 처했던 육전의 형세가 단번에 뒤바뀐 것이다.

 

조선 조정은 감격할 수밖에 없었다. 선조는 승전 소식을 들은 직후 북경의 황궁을 향해 다섯번 큰절을 올렸다. 명군의 작전참모 격인 찬획(贊劃) 원황(袁黃)과 유황상(劉黃裳)에게도 두번 절을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신료들은 이여송을 모시는 사당을 짓고 그의 화상을 그려 봉안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생사당(生祠堂), 즉 아직 살아있는 인물을 모시는 사당을 세우자는 파격적인 주장이었다. “평양대첩 덕분에 나라가 재조(再造)되고 억만년 동안 이어질 기반이 마련되었다”는 극찬이 이어졌다. 이여송은 이제 ‘조선을 다시 살린 영웅’이자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은인’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이여송과 송응창, 기마병과 포병의 분열

 

평양전투 승리를 계기로 조선은 최악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부작용 또한 만만치 않았다.

 

우선 명군이 전쟁을 주도하게 되면서 조선군은 작전권을 상실하고 명군 지휘부의 명령에 휘둘릴 수밖에 없었다. 평양전투 시작 직전 류성룡 등은 일본군이 패퇴하는 상황을 염두에 두고 그들이 도주할 것으로 예상되는 길목에 복병을 배치했다. 일본군을 요격하려는 깜냥이었다. 그런데 이여송은 고니시가 퇴로를 열어달라고 요청하자 중화(中和) 등지에 배치된 조선군에게 철수하라고 지시했다. 이일(李鎰) 휘하의 조선군은 길을 열어줄 수밖에 없었다.

 

다음으로 평양전투 당시 명군 지휘부 내부의 알력 때문에 무고한 조선 백성들이 희생된 사실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 명군의 최고사령관은 명목상으로는 제독 이여송이었다. 하지만 그는 경략 송응창으로부터 절제를 받아야 하는 입장이었다. 철령 출신의 이여송은 본래 조선족으로 요동의 군벌 이성량(李成梁)의 아들이었다. 부친의 후광을 업은데다 영하의 반란을 평정하는 공까지 세운 터라 이여송의 위세는 대단했다.

 

송응창은 절강 출신의 양명학자였다. 그의 수하인 원황과 유황상은 진사 출신의 문관이었다. 두 사람은 참모 신분이었지만 무관 이여송을 얕보며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결국 평양 승전 이후 논공행상을 둘러싸고 이여송과 송응창 사이에 갈등이 빚어졌다. 그것은 이여송이 지휘하는 북병과 송응창이 이끄는 남병 사이의 갈등이었다. 이여송은 평양전투 승리의 공로를 북병들에게 돌리려고 했고 남병들의 활약을 깎아내렸다. 남병들은 반발했다. 자신들이 화포 등을 이용하여 일본군을 흔들어 놓았기 때문에 승리할 수 있었다고 자부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남병과 북병이 일본군의 수급(首級-머리)을 서로 많이 얻으려고 다투는 과정에서 무고한 조선 백성들이 희생되었다. 전투가 끝난 뒤 산동도어사 주유한(周維翰)과 이과급사중 양정란(楊廷蘭)은 ‘이여송이 참획했다고 주장하는 일본군 수급 가운데 절반은 조선 사람의 것이고 불에 타 죽거나 물에 빠져 죽은 1만여명 가운데 절반도 조선 사람’이라고 이여송을 탄핵했다. 당시 명군 가운데는 조선 백성을 붙잡아 목을 벤 뒤 머리칼을 깎아 일본군의 수급인 것처럼 위장하여 바치는 자들이 실제로 있었다. 탄핵이 불거지자 명 조정은 주유한 등을 직접 평양에 보내 사건의 진위를 조사하도록 조처한 바 있다. 조사 과정에서는 수급의 국적을 가리기 위해 망건 자국 등이 있는 조선인의 머리와 머리칼을 빡빡 민 일본군의 머리를 구별하는 논의가 제기되기도 했다.

 

하지만 조선 조정은 사건의 실상을 밝히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명군의 원조에 의지하여 전쟁을 치르는데다 이여송을 이미 ‘재조의 은인’으로 추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진상 규명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평양전투를 통해 역전의 계기는 마련되었지만, 그 이면에는 이렇듯 무고한 조선 백성들의 어이없는 희생이 자리잡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