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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644 : 조선의 역사 186 (선조실록 51)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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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644 : 조선의 역사 186 (선조실록 51)

두바퀴인생 2012. 7. 12. 03:03

 

 

 

 

 

한국의 역사 644 : 조선의 역사 186 (선조실록 51)

 

 

                                              

                                                                                           임진왜란 경과                                                                                                                    

                                                                                                                                                                                   

 

제14대 선조실록(1552~1608년, 재위: 1567년 7월~1608년 2월, 40년 7개월)            

 

 

 

 

 

 

 

 

 

 

임진왜란 전투목록

 

아래 임진왜란 전투 목록임진왜란 중 있었던 전투 목록이다. 시간 순으로 작성되었으며, 모두 음력으로 날짜순대로 표시했다. 주요 전투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1592년

  • 다대포 전투 : 4월 13일 ~ 4월 15일
  • 부산진 전투 : 4월 14일
  • 동래성 전투 : 4월 15일
  • 경상도 및 충청도 함락 : 4월 17일~4월 28일
  • 상주 전투 : 4월 25일
  • 충주 탄금대 전투 : 4월 28일
  • 한강 전투 : 5월 2일
  • 옥포 해전 : 5월 7일
  • 합포 해전 : 5월 7일
  • 적진포 해전 : 5월 8일
  • 해유령 전투 : 5월 16일
  • 임진강 전투 : 5월 18일
  • 기강 전투 : 5월 18일
  • 사천 해전 : 5월 29일
  • 당포 해전 : 6월 2일
  • 당항포 해전 : 6월 5일
  • 용인 전투 : 6월 5일
  • 무계 전투 : 6월 6일
  • 율포 해전 : 6월 6일
  • 정암진 전투 : 6월 8일
  • 여주 전투 : 6월 10일
  • 제1차 평양 전투 : 6월 15일
  • 웅치 전투 : 7월 7일
  • 이치 전투 : 7월 8일
  • 한산도 대첩 : 7월 8일
  • 제1차 금산 전투 : 7월 9일
  • 안골포 해전 : 7월 10일
  • 우척현 전투 : 7월 10일
  • 제2차 평양 전투 : 7월 17일
  • 영천성 전투 : 7월 24일~7월 27일
  • 지례 전투 : 7월 29일
  • 제3차 평양 전투 : 8월 1일
  • 청주 전투 : 8월 1일
  • 제1차 경주 전투: 8월 2일
  • 제2차 금산 전투 : 8월 18일
  • 영원산성 전투 : 8월 25일
  • 장림포 해전 : 8월 29일
  • 화준구미 해전 : 9월 1일
  • 다대포 해전 : 9월 1일
  • 서평도 해전 : 9월 1일
  • 절영도 해전 : 9월 1일
  • 초량목 해전 : 9월 1일
  • 부산포 해전 : 9월 1일
  • 연안 전투 : 9월 2일
  • 제2차 경주 전투 : 9월 8일
  • 북관대첩 : 1592년 9월 16일~1593년 1월 28일
  • 창원 전투 : 9월 27일
  • 제1차 진주성 전투 : 10월 10일
  • 독성산성 전투 : 12월 11일

 

1593년

  • 제4차 평양 전투 : 1월 9일
  • 성주 전투 : 1월 15일
  • 벽제관 전투 : 1월 27일
  • 웅포 해전 : 2월 10일~3월 6일
  • 행주 대첩 : 2월 12일
  • 제2차 진주성 전투 : 6월 29일

 

1594년

  • 제2차 당항포 해전 : 3월 4일
  • 영등포 해전 : 10월 1일
  • 장문포 해전 : 10월 4일

 

 

1597년

  • 칠천량 해전 : 7월 16일
  • 고령 전투 : 8월 15일
  • 남원 전투 : 8월 16일
  • 황석산성 전투 : 8월 16일
  • 어란포 해전 : 8월 27일
  • 직산 전투 : 9월 7일
  • 벽파진 해전 : 9월 7일
  • 명량 해전 : 9월 16일
  • 제1차 울산성 전투 : 12월 24일

 

1598년

  • 절이도 해전 : 7월 19일
  • 제2차 울산성 전투 : 9월 21일
  • 사천성 전투 : 9월 28일
  • 순천성 전투 : 9월 20일~10월 7일
  • 노량 해전 : 11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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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은 임진왜란 발발 당해 년도 부산포에 상륙하여 파죽지세로 한양을 점령하고 이어 평양까지 무혈 점령한 상태에서 함경도까지 진출하여 조선 반도 전체를 거의 삼킬 단계까지 간 상태였다. 선조와 조선 조정은 의주까지 피난하여 유사시 요동으로 망명까지 생각하고 있던 시기였다.

 

그러나 이순신의 옥포대첩을 시작으로 연이은 해전 승리로 서해 해상 병참선이 차단되고, 내륙에서는 의병들이 각지에서 일어나 무력한 관군을 대신하여  이치 전투, 웅치 전투, 정암진 전투, 우척현 전투, 청주 전투, 금산 1, 2차 전투, 영원산성 전투, 북관 대첩 등으로 일본군의 전라도 진입을 차단하고, 관 대첩으로 함경도까지 진출한 왜군이 의병에게 밀철수하고 있던 시기에 남쪽으로 철수한 일본군이 전라도로 진출하기 위해 벌어진 진주성 전투는 임진왜란의 변곡점을 가져온 전투였다.

 

진주 목사 김시민과 예하 군졸 및 진주 성민들의 목숨을 건 처절한 항전, 그리고 외곽에서 진주성을 지원하던 의병과 관군들의 합동 작전으로 싸움을 치른 전투였다. 이 전투로 왜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고 철수하게 되고 더 이상의 공격력을 상실하고 방어 위주로 전환하게 된다.

 

 

 

 

 

 

제1차 진주성 전투

 

제1차 진주성 전투(혹은 진주대첩)는 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에 일어난 전투이다. 이 전투는 권율행주대첩이순신한산도 대첩과 함께 3대 대첩이라고 불린다.

 

 

제1차 진주성 전투
(임진왜란의 일부)
Kim Si-min.jpg
충무공 김시민 장군상(진주성)
날짜 1592년 음력 10월 6일
장소 조선 경상도 진주목 진주성
(현재 경상남도 진주시)
결과 조선군의 승리
조선군의 진주성 방어 성공
교전국
조선 일본
지휘관
김시민† 진주 목사
김성일 초유사
이광악 곤양 군수
성수경 진주 판관
최덕량
곽재우 의병장
심대승 의병장
김준민 거제 현령
정기룡 상주 판관
조경형
최경회 의병장
임계영 의병장
호소카와 다다오키
하세가와 히데카즈
기무라 시게코레
신조 나오사다
가스야 다케노리
오타 가즈요시
모토시마 마타사부로†
다구치 야스케†
병력
3,800여 명 30,000여 명
피해 규모
김시민 포함,
1,000여 명 사상
총 10,300여 명 사상

 

 

 

 

1592년 음력 6월 이후 전국에서 봉기한 의병들의 맹활약으로 기세가 꺾인 일본군은 병력을 집중하여 어떻게든지 하삼도의 관문인 경상도를 손아귀에 넣으려 했지만 전란 이래 진주성만은 공략하지 못하였다. 진주성은 앞은 남강이 흐르고 후방 삼면은 험준한 형세로 석벽을 높이 쌓아 올린 매우 견고한 성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남도를 장악할 수 있는 본거지이자 전라도 침입의 교두보 역할을 해낼 수 있는 요충지가 바로 진주성이라 여기고 공략을 명령하였다.

 

1592년 음력 10월 4일 일본군은 3만의 군사를 이끌고 진주성을 포위하였다. 성안에는 진주목사 김시민을 위시한 3천 8백여 명의 병력과 백성들이 합세하여 결전 준비를 갖추었고, 성밖에서는 경상도 의병이 일본군을 배후에서 견제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군은 섣불리 공격하지 못하다가 마침내 주위의 민가를 모조리 불지르고 총탄과 화살을 마구 쏘아대며 공격을 시작하였다. 일본군에 맞서 성안의 군사들은 현자총통을 비롯한 총포와 화살로, 백성들은 돌과 뜨거운 물로 대항하였다. 게다가 임계영, 최경회가 이끄는 전라도 의병 2천여 명이 성밖에서 왜군의 후방을 기습 공격하였다. 그러나 음력 10월 9일 진주 목사 김시민이 전투 후반부, 왜군의 총탄에 맞아 전사하고 말았다. 진주성을 공격한 지 이레 만인 음력 10월 10일 일본군은 퇴각하였고, 마침내 민관군(民官軍) 할 것 없이 단결하여 항전하였던 조선은 진주성을 방어해냈다.

 

이 제1차 진주성 전투는 진주대첩으로 한산대첩, 행주대첩과 더불어 임진왜란 삼대대첩의 하나로 일본군이 호남으로 진출하려던 계획을 좌절시킨 전략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승리였다.

 

의의

 

 

진주성 전투 기록화

 

 

 

진주대첩은 임진왜란 최초로 성을 지켜낸 전투이다. 진주대첩은 목사인 김시민의 전술과 민간인들의 합심 그리고 효율적인 무기 사용의 조화로 최신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을 이긴 전쟁이다. 진주성 전투 당시 일본군의 사망자는 지휘관급이 3백 명, 병사가 1만 여 명에 달했다. 또한 병력 손실 외에도 패배가 주는 여파는 대단했다.

 
패배자 일본의 분노와 치욕 
일본은 진주전 참패에 분노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2차전을 지시하고, 진주대첩 승리의 주역인 김시민 목사의 목을 베어 오도록 명령하였다. 그러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진주성 전투에 오슈의 패자로 악명이 높으며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비롯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맞상대가 가능한 몇 안되는 대다이묘 중 하나인 다테 마사무네를 출전시켰다. 이후 일본에서는 김시민 목사를 빗댄 인물을 일본 문학에 등장시키면서 진주대첩에 패배한 그들의 치욕을 풀고 있다.
 
조총과 승자총통 
진주성 전투에서 일본은 위력적인 신식 무기 조총을 사용했다. 이에 비해 조선군의 주무기는 창과 활이었다. 하지만 조선군에게는 조총에 대응할 만한 승자총통이 있었다.
 
진주성의 무기 
일본군은 전투 4일째부터 새로운 장비를 동원하여 진주성을 공격했다. 하지만 당시 진주성 안에는 일본군의 뛰어난 장비에 대응할 만한 무기가 준비되어 있었다. 대형 화포인 현자총통과 독창적인 시한 폭탄인 비격진천뢰도 등의 무기는 진주성을 지키는 일등 공신이었다.
 
조선의 요새 진주성 
진주성은 그 남쪽에는 남강이, 서쪽에는 깎아지른 절벽이 있었다. 그리고 성의 북쪽에는 적의 침입을 막는 연못이 있었다고 한다.
 
고도의 심리전 
전쟁에는 전투뿐만이 아니라 심리전도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일본군들은 다양한 심리전으로 조선군을 동요시키려 했지만 먹히지 않았고, 오히려 조선군이 김시민을 중심으로 고도의 심리전을 펼쳐 일본군을 혼란시켰다. 김시민은 보잘 것 없을 것 같은 피리 소리도 동원하였다.
 
승리의 주역 김시민과 민간인 
전투의 마지막 날 새벽에 위장퇴각을 한 일본군은 곧바로 돌아와 총공격을 가했다. 성안의 민간인들은 김시민의 지휘 하에 일본군을 향해 돌을 던지고 끓는 물을 쏟아 붓는 등 사력을 다했고, 성안의 기와나 돌, 우물의 물까지도 거의 바닥이 났다고 한다.

 

 

기념물

 

 

김시민장군 전공비

 

경상남도 시도유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된 김시민 장군 전공비는 1619년(광해군 11년) 음력 7월에 진주성에 세워졌으며, 성여신이 비문을 짓고, 한몽인이 글씨를 썼다. 진주전상각적비(晉州全成却敵碑)라고도 하며, 시도유형문화재 제2호인 촉석정충단비와 나란히 서 있다. 1987년 당시 전투에서 숨진 이들을 위로하기 위해, 비의 뒷편에 계사순의단을 건립했다.

 

 

 

 

 

 

 

김시민과 진주성 전투

 

김시민은 1554년 충청도 천안에서 태어났다. 어린시절부터 총명하고 기골이 장대하였으며 병정놀이를 좋아했다. 여덟 살 때 병정놀이를 하고 있는데 마침 원님 행차가 있어 수행원이 길을 비키라고 하자 소년 김시민은 거리낌 없이, “한 고을 사또라고 감히 진중을 통과할 수 있느냐”고 소리쳤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원님은 말에서 내려 김시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큰 재목이로구나”라고 칭찬하고 길을 비켜 지나갔다고 한다.


김시민은 25세 때에 무과에 급제하였고 훈련원 판관이 되었다. 판관으로 근무하던 중, 무기가 녹슬고 기강이 해이하여 유사시에 쓸만한 병기와 군인이 없음을 개탄하여 병조판서에게 군기보수와 훈련강화를 수차례 건의하였는데 오히려 질타만 당하였다. 이에 김시민은 미련 없이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그 후 여진족 토벌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고 1591년에 진주 판관에 임명되었다.


그 다음 해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왜군이 경상도 남부를 휩쓸자 놀란 진주목사 이경은 부하들을 데리고 지리산으로 도망갔다. 상부에서 이경에게 사람을 보내어 성으로 돌아가 성을 지키라고 명령하였는데 그가 산중에서 병사하여 판관 김시민이 목사를 대신하게 되었다. 왜군이 이순신 함대에 의해 격파 당함으로써 진주의 위기가 해소되었다.

 

왜군은 남해안을 따라 수륙병진을 기도하였으나 한산도에서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이에 7월 하순 육로로만 서진하여 진해 고성을 점령하고 8월 초에 진주를 위협하였다. 김시민은 각지에 구원병을 요청하며 진주성 방어태세을 강화하였다. 왜군은 남강 남안까지는 진출하였으나 강을 건너 진주성을 공격하기가 쉽지 않다고 판단하고 사천으로 물러나 거기에 거점을 확보하려 했다. 김시민은 과감하게 1천명 군사를 동원하여 사천성 왜군을 공격하여 격파하고 추격해 고성과 진해도 탈환하였다. 조정에서는 그의 공을 치하하고 목사로 승진시켰다.


 김시민은 목사 취임 후 민심을 추스르며 진주성을 수호할 방책을 강구하였다. 수성군에 맹훈련을 실시하고 병기를 제작하였다. 화학 무기의 중요성을 깨닫고 화약 오백여 근을 제조하였는데 이는 왜군의 제조 방법을 입수하여 모방해 만든 것이었다. 새로이 대포 7십여 문을 제작하여 부하들에게 대포 사용법을 연마시켰다.


 왜군은 8월 중순 경부터 진주성 공격준비에 나섰다. 서울 쪽의 정예군이 김해로 집결하기 시작했다. 9월 24일 왜군이 김해성을 출발하여 진주성으로 향하였다. 총대장은 우키다로 2~3만 명의 병력이었다. 왜군은 삽시간에 노현, 창원, 함안 등지에서 조선군을 격파하였다. 조선군은 사망자가 8천여 명에 이르러 전의를 상실하고 백성들은 겁에 질리었다. 진주성으로 진군하는 왜군의 기세는 회오리바람 같았다.

 

적의 진주성 공략작전개시를 보고 받은 김시민은 성 방어 준비에 나섰다. 그러나 부하장수들은 성을 버리고 달아날 궁리만 하였다. 김시민은 광장에 군민을 모아 놓고 끝까지 싸울 것을 호소하고 ‘성을 떠나겠다고 말하는 자가 있으면 목을 베겠다’고 호령하였다. 그리고 전라 의병장 최경회, 경상 의병장 곽재우 등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김시민 휘하 군대는 3,800여 명이었다. 적은 수만 대군인데 수비군 삼천명은 너무 적었다. 김시민은 적이 이 사실을 알아차리는 것을 우려해 성중의 남녀노소를 모두 모아 남자 옷을 입혀서 밖에서 보면 군사들로 보이게 하였다.

 

 10월 6일 왜군의 대부대가 진주성으로 쳐들어 왔다. 조선의 성은 중국이나 일본의 높고 견고한 성에 비하면 담장에 불과했다. 일부 산성을 제외하면 평야지대에 위치하여 성벽으로 넓게 마을을 둘러싼, 소극적인 방어용일 뿐이었다. 백년 전쟁 공성전에 이골이 난 왜군이다. 그들은 담장 같은 진주성 쯤은 단숨에 함락시켜 버릴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구름같이 몰려온 적군이 성을 겹겹으로 포위하였다. 김시민은 아내와 함께 친히 주식을 가지고 성을 돌아다니며 군사들에게 먹이면서 격려하였다. 이에 군사들은 감격하여 죽기로 싸울 것을 맹세하였다. 왜군은 진주성 동, 서, 북 삼면을 포위하였다. 남쪽 절벽으로 남강이 흐르고 있었다.


성을 포위한 왜군은 성 외곽의 조선 의병부대가 배후를 위협하고 있어서 바로 공격하지 못하였다. 김시민은 부하들에게 화살 한 대, 총알 한 방을 함부로 못쓰게 하였다. 밖에서 잘 보이는 곳에 큰 깃발을 세우고 장막을 친 다음 군사 복장을 한 남녀노소 백성들을 배치하였다. 그래서 왜군은 수만 조선 군사들이 성 수비에 임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하였다. 진주성을 응원하러 온 성 외곽의 곽재우 등의 조선군은 왜군의 배후에서 횃불을 들고 뛰어다니며 피리를 불었다. 심리전을 전개하여 왜군은 교란시키고 성내의 조선군에게는 힘을 실어주기 위함이었다. 왜군도 심리전을 구사하였다. 군사들이 머리를 풀어헤치고 뿔이 있는 금색 가면을 쓰고 잡색 기를 짊어지거나 붉은 해가리개 또는 흰 칼날을 들고 성을 돌았다. 그 기괴한 형상에 성안 사람들은 크게 놀랐다.


이윽고 왜군이 성 공격을 시작해 조총수 일천여 명이 일제히 사격을 퍼부었다. 총탄이 비 오듯 성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조총병들은 민가의 대문짝을 떼어다가 방패로 삼아 성으로 접근하며 연속 사격을 가하고, 대포도 성을 향해 쏘았다. 그러나 성안에는 전혀 동요가 없어서 사람이 없는 성같이 고요하였다. 성 밖 왜병들의 공격이 뜸해지자 성안에서 일제히 소리 지르고 북을 두드리며 대포를 쏘기 시작했다. 일본 군사들이 흩어져 민가로 들어가서 마루판까지 뜯어 가지고 와서 방패로 삼고 총을 쏘며 다시 성으로 접근했다. 공방전은 해가 지고도 계속되었다. 밤새도록 총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성 밖 왜군 막사 곳곳에 피워놓은 모닥불들이 사방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곽재우 군사 200여 명이 뒷산에 올라가 호각을 불고 횃불을 흔들어 성안을 응원하자 성안 사람들도 호각을 불어 응하였다. 그러자 당황한 일본 군사들이 우왕좌왕하며 소란을 피웠다.


7일 하루 종일 왜군이 조총과 활을 쏘며 공격했으나 수비군은 잘 막아냈다. 왜군은 진주성 주변 십여 리 안팎의 민가를 약탈하고 불태워 재로 만들었다. 날이 어두워져 전투가 일단 끝났다. 공격 측이 피해가 더 많고 지치는 법이다. 왜군은 이날은 야간 공격을 해오지 않았다.

 

왜군들이 삼삼오오 땅바닥에 드러누워 피로를 풀고 있었다. 달빛 아래 진주성은 낮에 본 성곽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담장이 아니라 천 길 철벽처럼 보였다. 고향에 두고 온 처자식 생각이 간절한 데 어디선가 거문고 소리와 퉁소 소리가 바람결에 실려 왔다. 왜군들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소리 나는 쪽을 주목했다. 분명히 진주성 안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였다.

 

김시민이 악공을 불러 거문고를 타고 퉁소를 불게 한 것이었다. 수비군에게는 마음의 안정을 찾게 하고 적군에게는 여유를 보이려 함이었다. 일본 군사들에게 김시민은 도술을 부리는 신인 같아 보였다.


 8일 아침 왜군은 드디어 대대적인 진주성 공격을 감행하였다. 사다리를 성벽에 걸치고는 필사적으로 기어올랐다. 성안에서는 그들을 향하여 돌을 던지고 끓는 물을 끼얹었다. 왜군들이 성보다 더 높은 삼층 누각의 수레를 성 앞으로 끌고 와서 그위에서 성안을 향하여 조총사격을 가했다. 성안에서는 군민들이 대포와 화살을 쏘았다. 대포를 맞은 누각 수레가 박살나며 왜군들이 무더기로 쓰러졌다. 그래도 왜군은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그들은 불화살에 대비하여 소나무와 짚더미를 물에 적신 다음 성 앞에 높이 쌓고 성위로 기어오르려고 했다. 성안에서는 그것들을 태우기가 어려워지자 화약봉지를 속에 넣고 묶은 장작더미에 불을 붙여 아래로 던졌다. 화약이 터지면서 불붙은 장작개비가 사방으로 날아가 성 아래에 왜군이 갖다 놓은 물젖은 소나무 가지와 짚 더미에도 마침내 불이 옮겨 붙었다. 왜병들이 수없이 타 죽었다. 그러나 왜군들은 자꾸만 늘어나는데 구원군은 오지 않았다. 화살이 바닥나기 시작했다. 밥을 먹을 시간도 없었다. 김시민은 물통과 미음을 가지고 다니면서 배고프고 목마른 병사들에게 먹였다. 총탄과 화살이 비처럼 쏟아져도 꼼짝 않고 선두에 서서 부하들을 격려하는 한 편, 부하들로 하여금 짚풀로 인형을 만들어서 성위로 올렸다 내렸다를 반복하게 하였다. 왜병들이 군사들인 줄 알고 조총을 쏘아대니 총알만 허비할 뿐이었다. 김시민은 왜병들이 접근하면 돌을 던지게 하였다. 화살을 아끼기 위함이었다. 날이 다시 어두워져 전투가 멈추었다. 조선 의병부대가 남강 건너편에 나타나 횃불을 올리며 수비군을 응원하였다. 왜군 지휘부는 진주성 외곽에 분산되어 있는 지원부대부터 치기로 결정하였다.


 9일 왜군은 주력부대를 여러 소부대로 나누어 진주성 외곽에 있는 조선군 지원부대 공격에 나섰다. 그러나 이러한 병력분산 작전은 의병들에게 유리한 결과만 가져돠 주어서 왜군 부대는 의병장 김준민 등의 부대에게 격퇴되어 큰 손실을 입었다. 전라도 의병장 최경회 등 부대도 성 멀리 나타나서 성안 수비군과 호응하고 왜군을 압박하였다.

 

 왜군은 공성작전을 바꾸었다. 대나무 다발과 연결사다리를 많이 준비한 다음, 토성을 쌓고 누대를 세워 한 부대가 그 위에서 성안으로 총을 쏘아대는 동안 나머지 부대가 대나무 다발을 방패삼아 사다리를 들고 성벽으로 접근하였다. 성위에서는 대포로 응수하여 수많은 왜병들을 죽였다. 왜군들은 또다시 큰 피해만 입고 철수하였다.


왜군 장수들은 공성에 계속 실패하자 계략을 써서 성안의 수비군을 밖으로 유인해 내기로 하였다. 밤에 모닥불을 환하게 피워 놓고는 군막을 철거하고 모든 자재들을 수레에 실었다. 거짓으로 철수하는 것처럼 꾸며서 조선군을 성 밖으로 끌어내려는 것이었다.

 

조선군의 추격이 없자 왜군들은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진주성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진주성은 쥐죽은 듯 고요하였다. 깊은 잠에 곯아 떨어졌다고 생각한 왜군들이 ‘기회는 이 때다’ 하고 성벽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갑자기 함성이 진동하며 수비군의  화살과 돌 세례가 퍼부어졌다. 왜병들 태반이 성 아래로 떨어져 죽었다. 그러나 왜군 지휘부는 이제 사생결판을 내려는지 2진, 3진, 4진 부대를 계속 출동시켰다. 성벽을 사이에 두고 아비규환의 사투가 밤새도록 벌어졌다.


사투 중에 한 떼의 일본 군사들이 긴 사다리를 타고 성벽을 넘었다. 놀라고 당황하여 수비군 전열이 무너졌다. 전 만호 최덕양, 군관 이납과 윤총복 등이 나서서 죽음을 무릅쓰고 막아 싸웠다. 그러자 달아나던 병사들이 다시 돌아와 싸웠다. 남녀노소 백성들도 모두 나서서 돌을 던지고 지붕위에서 기왓장을 던졌다. 성안으로 들어온 왜군들이 마침내 당해내지 못하고 성 밖으로 달아났다.


새벽이 열리고 있었다. 왜군의 사상자는 헤아릴 수가 없었다. 일본군 수뇌부는 더 이상의 공격은 전군의 몰살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여 철수 명령을 내렸다. 아침이 되었는데도 짙은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어 밤처럼 어두웠다. 천둥과 번개가 치더니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오전 열한시 쯤 왜병들은 썰물같이 빠져나가고 진주성 안팎은 지옥의 참상이 되어 있었다. 김시민은 진두지휘하다가 적탄을 이마에 맞아 정신을 잃고 있었다. 황망히 철수하는 왜군들을 추격하면 크게 무찌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주장 김시민이 정신을 잃고 있어서 추격전을 벌일 수가 없었다.

 

김시민은 상처가 낫지 않아 결국 일어나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김시민은 마지막 순간까지 나라일 만을 생각하며 때때로 머리를 들고 북쪽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는 이제 왜군에게 공포의 인물이었다. 성안에서는 김목사의 죽음을 적이 알까 겁이 나서 상을 치르지 않았다. 그러나 성 안팎 사람들은 부모상을 당한 것처럼 며칠을 땅을 치고 울었으며 일년이 넘도록 술과 고기를 입에 대지 않았다.


이 전투는 임진왜란 조선군의 첫 대첩이었다. 이순신의 한산도 전투는 히데요시의 대륙정복 기도를 무산시켰다. 한산대첩과 진주성 대첩은 행부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첩으로 역사에 길이남을 전투로 기록되고 있다. 왜군은 칠년전쟁 중 삼천여 척의 배를 동원하였다. 

 

진주성 전투의 왜군 희생자 수는 얼마나 될까. 후일 일본은 명과 강화회담 때 “진주성 전투에서 장수의 사망자가 삼백 명, 군병의 사망자가 삼만명이었다”고 말하였다. 어느 정도 과장된 표현이지만 그 전투의 피해와 충격이 얼마나 컸는지를 짐작할 수가 있다.


히데요시의 대륙정복 야망을 무너뜨린 전투는 진주성 양차 전투였다. 왜군 수뇌부는 이순신 수군에게 연전연패하면서도 진정으로 패했다고 여기지 않았다. 왜군은 조선 수군, 의병들의 활약으로 인력과 군수품 보급이 여의치 않아 전력이 급속히 약화되었지만 여전히 우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혹자는 왜군이 개전 초기 몇 달간만 우세했고 내내 수세로 몰렸다고도 한다. 그러나 그들의 수세는 전술적인 것이었을 뿐이다. 왜군이 진정으로 수세로 몰린 것은 바로 이 진주성 패전 뒤부터였다. 진주성 전투 이후 전세의 흐름이 바뀌었다. 이 전투는 실로 임진왜란 승패의 분기점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