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마을
한국의 역사 643 : 조선의 역사 185 (선조실록 50) 본문
한국의 역사 643 : 조선의 역사 185 (선조실록 50)
임진왜란 경과
제14대 선조실록(1552~1608년, 재위: 1567년 7월~1608년 2월, 40년 7개월)
임진왜란 전투목록
아래 임진왜란 전투 목록은 임진왜란 중 있었던 전투 목록이다. 시간 순으로 작성되었으며, 모두 음력으로 날짜순대로 표시했다. 주요 전투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1592년
- 다대포 전투 : 4월 13일 ~ 4월 15일
- 부산진 전투 : 4월 14일
- 동래성 전투 : 4월 15일
- 경상도 및 충청도 함락 : 4월 17일~4월 28일
- 상주 전투 : 4월 25일
- 충주 탄금대 전투 : 4월 28일
- 한강 전투 : 5월 2일
- 옥포 해전 : 5월 7일
- 합포 해전 : 5월 7일
- 적진포 해전 : 5월 8일
- 해유령 전투 : 5월 16일
- 임진강 전투 : 5월 18일
- 기강 전투 : 5월 18일
- 사천 해전 : 5월 29일
- 당포 해전 : 6월 2일
- 당항포 해전 : 6월 5일
- 용인 전투 : 6월 5일
- 무계 전투 : 6월 6일
- 율포 해전 : 6월 6일
- 정암진 전투 : 6월 8일
- 여주 전투 : 6월 10일
- 제1차 평양 전투 : 6월 15일
- 웅치 전투 : 7월 7일
- 이치 전투 : 7월 8일
- 한산도 대첩 : 7월 8일
- 제1차 금산 전투 : 7월 9일
- 안골포 해전 : 7월 10일
- 우척현 전투 : 7월 10일
- 제2차 평양 전투 : 7월 17일
- 영천성 전투 : 7월 24일~7월 27일
- 지례 전투 : 7월 29일
- 제3차 평양 전투 : 8월 1일
- 청주 전투 : 8월 1일
- 제1차 경주 전투: 8월 2일
- 제2차 금산 전투 : 8월 18일
- 영원산성 전투 : 8월 25일
- 장림포 해전 : 8월 29일
- 화준구미 해전 : 9월 1일
- 다대포 해전 : 9월 1일
- 서평도 해전 : 9월 1일
- 절영도 해전 : 9월 1일
- 초량목 해전 : 9월 1일
- 부산포 해전 : 9월 1일
- 연안 전투 : 9월 2일
- 제2차 경주 전투 : 9월 8일
- 북관대첩 : 1592년 9월 16일~1593년 1월 28일
- 창원 전투 : 9월 27일
- 제1차 진주성 전투 : 10월 10일
- 독성산성 전투 : 12월 11일
1593년
- 제4차 평양 전투 : 1월 9일
- 성주 전투 : 1월 15일
- 벽제관 전투 : 1월 27일
- 웅포 해전 : 2월 10일~3월 6일
- 행주 대첩 : 2월 12일
- 제2차 진주성 전투 : 6월 29일
1594년
- 제2차 당항포 해전 : 3월 4일
- 영등포 해전 : 10월 1일
- 장문포 해전 : 10월 4일
1597년
- 칠천량 해전 : 7월 16일
- 고령 전투 : 8월 15일
- 남원 전투 : 8월 16일
- 황석산성 전투 : 8월 16일
- 어란포 해전 : 8월 27일
- 직산 전투 : 9월 7일
- 벽파진 해전 : 9월 7일
- 명량 해전 : 9월 16일
- 제1차 울산성 전투 : 12월 24일
1598년
- 절이도 해전 : 7월 19일
- 제2차 울산성 전투 : 9월 21일
- 사천성 전투 : 9월 28일
- 순천성 전투 : 9월 20일~10월 7일
- 노량 해전 : 11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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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관대첩
북관대첩은 1592년~1593년 함경도에서 의병장 정문부가 경성과 길주 등지에서 일본의 가토 기요마사의 군대와 반란을 일으킨 국경인과 여진족들을 모두 무찌르고 함경도를 탈환한 전투이다.
임진왜란 때 한양을 함락시킨 일본 육군 제2군인 가토 기요마사의 2만 2000 군대는 곧바로 함경도로 진격했다. 곳곳에서 조선군이 속수무책으로 대응했기 때문에 함경도도 곧바로 무너지고 왕자 임해군과 순화군이 붙잡혔으며 국토의 끝 온성까지 일본군이 진격할 정도였다. 게다가 이 틈을 타 북쪽의 여진족이 침입하고 정말수, 국경인, 국세필 등이 반란까지 일으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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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부의 거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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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북평사로 있던 정문부는 1592년 음력 9월 16일 이붕수, 지달원, 강문우, 최배천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정문부는 먼저 강문우에게 기병을 몇을 주어 국세필 반란군이 있는 경성과 길주 간의 소식통이 끊기게 하였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거병하여 정문부는 창의대장, 종성 부사 정현룡은 부장, 이붕수는 창의별장, 강문우는 척후장이 되었다.
경성 전투
먼저 정문부는 의병 300명을 이끌고 반란군 대장 국세필이 있는 경성으로 갔다. 정문부는 국세필의 권한을 인정하고 회유하여 경성에 입성할 수 있었다. 일본군의 순찰병 40명이 성 근처로 왔으나 강문우의 20명 기병대에 의해 모두 죽임을 당했다.
정문부는 경성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의병들을 훈련시켰으나 그를 받아들인 국세필은 정문부를 자주 의심해 죽음의 위협까지 주었으나 정문부는 절대 내색하지 않았다. 한편 경성과의 연락이 끊긴 것을 눈치 챈 길주의 가토 우마노조는 휘하 장수에게 92명의 군사를 주어 경성으로 가게 하였다.
그러나 국세필과 그의 아들 국생이 일본 장수를 죽였고 김범과 이희당이 화살을 쏘아 일본군 다수를 사살하고 도망가던 일본군은 강문우의 기병대가 모두 쓸어버렸다.
회령-명천 전투
1592년 10월 회령에서 반란을 일으켰던 국경인이 신세준과 그의 유생들에 의해 살해당하자 정문부는 남은 반란자인 정말수를 치기 위해 명천으로 군사를 몰았다. 명천에서는 정말수를 몰아내려는 농민 봉기가 일어났으나 정말수가 화포를 동원해 막아 실패하였다.
그러자 정문부는 오촌권관 구황과 강문우에게 각각 30명의 기병과 몇몇의 제장들을 주어 총 60명의 기병대로 명천을 습격하라 명했다. 갑작스런 공격에 정말수는 성을 빠져나와 산에 숨었는데 경성 토병 진덕인에 의해 붙잡혀 그의 부장으로 함께 처형당했다.
정말수의 반란을 평정한 정문부는 그 동안 경성을 지배하던 국세필과 그의 일당들을 처형하여 함경도의 반란군들을 모두 진압하였고 백성들이 경성으로 모여들어 함경북도가 일본군의 지배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되었다. 1592년 10월 20일까지 약 3,000여 명의 군사를 확보하게 되었다.
길주성 포위
정문부는 일본군이 지키는 길주성으로 가기 위해 군사 1000명을 이끌고 명천성으로 나아갔다. 몇몇 사람들이 말렸으나 정문부는 일본군과의 정면전으로 주장하며 진격했다. 이 무렵 길주성에는 약 1000명, 성 남쪽 영동에는 300명이 주둔하며 서로 의지하고 있었다.
정문부는 군사를 3개로 나누어 경성 이북 출신 군사 1000명은 자신과 정현룡이 맡고 길주 출신 군사 1000명은 고령 첨사 유경천에게 주어 갯마을에 진을 쳐 일본군을 감시하게 하고 경원 부사 오응태에게 길주 양리와 서북보의 토병을 관리하게 하고 정병을 징병해 복병을 두었다.
정문부는 인의지방 사람 원충서에게 군사 200명을 주어 길주 북쪽 야간창에 진을 치게 하고 또한 명천에서 400명의 군사를 중요 고참 지방에 배치시켰다.
석성령 전투
1592년 음력 10월 30일 일본군 1000명은 명천 갯마을 가파리를 약탈하고 돌아오던 중 석성령에서 원충서의 200명 군대와 맞닥드렸다. 이에 일본군은 후퇴하고 원충서는 추격하기 시작했고 일본군의 수가 많아 잠시 병사를 물리고 방어하던 중 고참에 매복하던 방원 만호 한인제의 기병 300명이 원충서와 합류했다.
한인제 외에 여러 복병들이 원충서와 합류하자 일본군 장수 5명이 400명의 정예 군사를 이끌고 돌격한다. 그러나 조선군의 기병을 중심으로 평지 돌격전을 펼쳐 일본군은 퇴각하기 시작했고 퇴각 도중 곳곳에서 등장하는 조선군 복병들을 당해내지 못하고 장덕산 위에서 괴멸당하고 말았다.
정문부는 남은 잔당들을 토벌하기 위해 산에 불을 질렀고 이 전투에서 깃발 20개, 갑옷 50벌, 투구 8벌, 창 16자루, 조총 26자루, 탄환 646개, 화약통 15개, 말 118필, 수많은 일본도 등을 노획했다.
길주 전투
1592년 음력 11월 1일 정문부는 드디어 길주성을 치기 위해 군사를 3개로 나눠 성을 포위했다. 하지만 2차례에 걸쳐 성을 공격했으나 피해만 늘어갔다. 이에 정문부는 군대를 길주성 주변에 매복시키고 정예 병력들만 데리고 영동에 주둔하던 일본군을 공격한다.
그 무렵 영동에서는 일본군이 분탕질을 하고 있었고 이를 본 길주 토병 김국신이 정문부에게 보고하자 정문부는 자신의 3개 부대를 이끌고 영동을 공격해 괴멸시키고 주검을 10여리 걸쳐 늘어놓았으며 일본군 장수에게 서신을 보내 희롱하였다.
윤탁연의 모함
1593년 음력 1월 1일 의병장 신분으로 활약한 정문부를 순찰사 윤탁연이 조정에 정문부의 공을 반대로 고했기 때문에 크게 포상받지 못했고, 영흥부사에 제수된다. 윤탁연은 조정에서 실사를 보낸 사신에게도 뇌물을 주어 진상 조사를 무마시켰다.
1615년 부총관에 임명되고 다시 병조참판으로 임명되지만, 북인의 횡포에 관직을 고사하고 야인으로 돌아간다.
북관대첩에 대하여......
아래 글은 선조수정실록, 북관대첩비 비문, 기재사초(하)등을 참고하여 작성한 비교적 자세한 내용으로 한 네티즌의 글을 참고로 싣는다.
의병장 '정문부'의 '북관대첩'은 수개월에 걸쳐,수많은 크고,작은 전투 모두를 일컫는 대첩이다. 아쉽게도 필자가 정문부의 '농포집'을 구하지 못하여, 다소 부족하지만, 선조수정실록, 북관대첩비 비문등을 참고하여 작성하였다.(소장하고 있는 서적에 일부 '농포집'의 몇몇 구절이 단편적으로나마 나오기에 부분 참고하였다.)
1.의병장 '정문부'(1565~1624)의 의병 궐기
'정문부'는 1588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1591년 '함경북도 병마평사'에 임명되어, 행영에서 근무중에 임진왜란을 맞게 된다.(병마평사-정6품.병마절도사의 보좌직으로 임기 2년직.평안도,함경도에만 있었던 관직)
임진왜란 당시, 함경도 지역은 왜군 2번대'가토 기요마사'가 진군하여, 무혈입성하게 된다. (임진왜란 13-해정창 전투 참고)
이후 '가토 기요마사'는 일부 병력을 길주에 주둔시키고(대략 1천 명), 길주 이북 지역의 각 고을은 현지인(반란민, 또는 항복한 조선 관료들)에게 맡겨 지역을 다스리게 한다.
당시 북평사(함경북도 병마평사)'정문부'는 제자 '지달원'의 도움으로 경성의 한적한 해변가 집에 숨어 지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만호 고경민(高敬民)이 행조(조정)에서 와서 소식을 전하면서, "곧 명나라 군사가 오게 되는데, 조정에서는 이미 함경도를 역적의 소굴로 판단하고 있으니, 왜적을 평정한 뒤에는 맨 먼저 함경도 지역을 토벌할 것이다." 라고 전한다. 실제로 당시 기록에 의하면 조정에서는 왜란이 끝나는대로 함경도를 대대적으로 토벌하려는 계획을 세워두고
있었다. 이로 인하여 함경도 지역민들이 서로 이 사실을 전하며 마음 속으로 두려워하게 됩니다.
곧이어 유생 '
당시 경성에는 반란민 '국세필'(반란민 '국경인'의 숙부)이 장악하고 있었는데, 국세필의 권한을 인정하고, 회유를 해서 경성에 입성하게 됩니다.
북관대첩비 비문 기록에 의하면, "북쪽의 여진족 토벌을 빌미 삼아 힘을 합치자"고 회유한다.
당시 '가토 기요마사'가 두만강 건너 여진족 마을까지 갔으나, 여진족에게 패배하고, 긴급히 두만강을 건너 도망쳐 오게 된다....이후 여진족은 조선과 왜국이 전쟁중이란 것을 알고, 동북 6진 일대에서 맘껏 활개를 쳐서 왜군과, 반란군 사이에서도 골칫거리였다.
2.경성 전투와 역적 '국세필'을 참수하다
함경북도 경성에 무사히 입성한 정문부와 의병들은 각 고을에 격문을 보내어 추가로 의병을 모집한다. 당시 선조수정 실록에는 "종성 부사 '
북평사'
정상이다)
기재사초(하권)에서는 다음과 같이 그 이유를 기록하고 있다.
"왜군이 쳐들어오자 종성부사'정현룡'이 글을 써서 왜군을 맞이하여 항복하고자 하면서, "나를 사랑하면 임금이고, 나를 학대하면 원수다. 누구를 부린들 신하가 아니며, 누구를 섬긴들 임금이 아니겠는가(撫我則后 虐我則? 何使非臣 何事非君)"하며 판관 '임순'과 함께 항복하였다.(또는 그 글을 내던지고 도망을 가려고 했다)"라고 기록 되어 있다.(기재사초는 임진왜란 당시 사관출신 문신'박동량'의 일기로 박동량-선조 의주 호종, 도승지, 형조판서, 의금부판사 역임했다.)
그리하여 도합 3천여 명의 군사가 모집 된다.(의병과 관군 포함)
총대장-정문부(북평사)
부장-종성부사 '정현룡', 경원부사 '오응태'
선봉장-고령첨사 '유경천'(용맹스런 말과 군인을 뽑아 선봉으로 삼아
척후장-만호 '강문우'
창의별장-이붕수(선비)
길주(吉州)에 주둔중인 왜군이 이 소식을 듣고 군사 백여 명을 보내어 경성에 와서 탐지하게 하였는데, 왜장은 성문밖에 군사를 배치하고, 성문을 아무렇지 않게 들어오게 된다. 기록에 의하면, 이때 경성안에 들어온 왜장을 '국세필'과 그의 아들 '국생'이 직접 죽였다.(참수 했다고 함)
이후 밖에 있던 왜군들을 향해 활을 쏘고, '강문우' 등이 성문을 열고 기마병으로 추격, 공격하여 수십 명의 머리를 베니 일부 남은 적들이 도망을 갔다.
이후, 정문부는 국세필과 그의 주동자등 13명을 체포하여 참수하고, 단순 가담자는 모두 용서를 한다. 기재사초에는 '단순 반란민들도 지난 일을 용서하고 후하게 대우하자 와서 따르는 자가 많았고, 사람들이 모두 기꺼이 그를 따랐다'라고 기록이 되어 있다.
3.역적 '국경인''과 '정말수'를 참수하다
'국경인'은 임해군, 순화군을 포박, 왜장 '가토 기요마사'에게 넘겨 준 인물로 '가토 기요마사'에 의하여 판형사제북로(判刑使制北路)에 임명되어 회령을 통치하면서 이언우(李彦祐)·전언국(田彦國)등과 함께 횡포를 자행하다가, '정문부'의 격문을 받은 회령유생 신세준(申世俊)과 오윤적(吳允迪)의 유인책에 넘어가 붙잡혀 참살된다. (밤에 '국경인'의 집에 불을 질러, 밖으로 뛰쳐 나오는 '국경인'을 잡아 참수)
명천을 장악한 반란군 대장 '정말수'는 의병장 '정문부'가 '강문우', '구황'에게 60명의 기병대로 명천을 습격하게 하여, 정말수가 산 속으로 도망을 갔으나, 경성 토병 '진덕인'의 도움으로 정말수와 그의 부장들을 함께 잡아 참수한다.
결국 함경도 지역의 반란군 주동자들을 토벌한 의병장'정문부'는 본격적으로 길주성에 주둔한 왜군을 공격하려고 계획을 수립하게 된다.
*함경북도 명천-세조13년(1467년) 길주의 호족 '이시애의 난'때문에, 이후에 길주의 북쪽을 따로 떼어 새로 만든 작은 마을.
4.북관대첩(왜군을 토벌하다)
함경북도의 반란군 수장들을 참수한 의병들은 북평사'정문부'를 총대장으로, 본격적으로 왜군과의 전투를 준비하는데, 1592년 음력 10월 30일 기준으로 관군과 의병을 합쳐 대략 3천여 명 정도의 병력을 구성하게 된다. 이에 정문부는 길주성 외곽을 은밀히 포위하고 계속 감시하며 공격 시기를 노리고 있었다.
음력 10월30일, 길주의 왜군이 마침내 성에서 나와 노략질을 하는데, 명천의 해창(海倉-미곡 창고)을 노략질하자, '
우리 군사가 먼저 장덕산 정상을 점거하여 적을 유인하니, 왜군이 다투어 오르면서 총을 쏘는데, 고령첨사'유경천'이 기병을 몰고 내려가 적병을 크게 격파하게 된다. '고경민'은 미리 군사를 서쪽 산 밑에 잠복시켰다가 즉각 포(砲)를 쏘며 차단하니 적이 퇴각하여 계곡으로 들어갔으므로 관군이 사방에서 모여 왜군을 포위하게 된다.
적의 한 부대가 마천령(摩天嶺) 아래 영동관 책성(嶺東館柵城)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임명촌(臨溟村)을 불태우고 노략질하므로, 의병장'
1591년 함경북도 병마평사(북평사-정6품). 북관대첩 이후, 길주부사, 안변부사, 영흥부사, 온성부사, 공주목사 역임, 1599년 호조참의, 1601년 예조참판, 1611년 남원부사 역임.
정문부는 옥사하기 전에 두 아들에게 "벼슬할 생각은 하지 말고, 경상도 진주에 내려가서 은거하며 살아라"라는 유언을 남기고 결국 옥사하였다. 향년 59세. 창원부사 시절 진주의 인심이 좋고, 살기 좋은곳으로 생각하여 이렇게 후손들에게 유언하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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