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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645 : 조선의 역사 187 (선조실록 52) 본문
한국의 역사 645 : 조선의 역사 187 (선조실록 52)
임진왜란 경과
제14대 선조실록(1552~1608년, 재위: 1567년 7월~1608년 2월, 40년 7개월)
임진왜란 전투목록
아래 임진왜란 전투 목록은 임진왜란 중 있었던 전투 목록이다. 시간 순으로 작성되었으며, 모두 음력으로 날짜순대로 표시했다. 주요 전투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1592년
- 다대포 전투 : 4월 13일 ~ 4월 15일
- 부산진 전투 : 4월 14일
- 동래성 전투 : 4월 15일
- 경상도 및 충청도 함락 : 4월 17일~4월 28일
- 상주 전투 : 4월 25일
- 충주 탄금대 전투 : 4월 28일
- 한강 전투 : 5월 2일
- 옥포 해전 : 5월 7일
- 합포 해전 : 5월 7일
- 적진포 해전 : 5월 8일
- 해유령 전투 : 5월 16일
- 임진강 전투 : 5월 18일
- 기강 전투 : 5월 18일
- 사천 해전 : 5월 29일
- 당포 해전 : 6월 2일
- 당항포 해전 : 6월 5일
- 용인 전투 : 6월 5일
- 무계 전투 : 6월 6일
- 율포 해전 : 6월 6일
- 정암진 전투 : 6월 8일
- 여주 전투 : 6월 10일
- 제1차 평양 전투 : 6월 15일
- 웅치 전투 : 7월 7일
- 이치 전투 : 7월 8일
- 한산도 대첩 : 7월 8일
- 제1차 금산 전투 : 7월 9일
- 안골포 해전 : 7월 10일
- 우척현 전투 : 7월 10일
- 제2차 평양 전투 : 7월 17일
- 영천성 전투 : 7월 24일~7월 27일
- 지례 전투 : 7월 29일
- 제3차 평양 전투 : 8월 1일
- 청주 전투 : 8월 1일
- 제1차 경주 전투: 8월 2일
- 제2차 금산 전투 : 8월 18일
- 영원산성 전투 : 8월 25일
- 장림포 해전 : 8월 29일
- 화준구미 해전 : 9월 1일
- 다대포 해전 : 9월 1일
- 서평도 해전 : 9월 1일
- 절영도 해전 : 9월 1일
- 초량목 해전 : 9월 1일
- 부산포 해전 : 9월 1일
- 연안 전투 : 9월 2일
- 제2차 경주 전투 : 9월 8일
- 북관대첩 : 1592년 9월 16일~1593년 1월 28일
- 창원 전투 : 9월 27일
- 제1차 진주성 전투 : 10월 10일
- 독성산성 전투 : 12월 11일
1593년
- 제4차 평양 전투 : 1월 9일
- 성주 전투 : 1월 15일
- 벽제관 전투 : 1월 27일
- 웅포 해전 : 2월 10일~3월 6일
- 행주 대첩 : 2월 12일
- 제2차 진주성 전투 : 6월 29일
1594년
- 제2차 당항포 해전 : 3월 4일
- 영등포 해전 : 10월 1일
- 장문포 해전 : 10월 4일
1597년
- 칠천량 해전 : 7월 16일
- 고령 전투 : 8월 15일
- 남원 전투 : 8월 16일
- 황석산성 전투 : 8월 16일
- 어란포 해전 : 8월 27일
- 직산 전투 : 9월 7일
- 벽파진 해전 : 9월 7일
- 명량 해전 : 9월 16일
- 제1차 울산성 전투 : 12월 24일
1598년
- 절이도 해전 : 7월 19일
- 제2차 울산성 전투 : 9월 21일
- 사천성 전투 : 9월 28일
- 순천성 전투 : 9월 20일~10월 7일
- 노량 해전 : 11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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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성산성 전투의 의의
1592년 7월8일, 이치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왜군들이 전라도로 침공하는 것을 막은 권율은 광주목사에서 나주목사로 승진한다. 그런데 나주로 부임하기도 전에 그는 다시 전라도 순찰사가 된다.
권율이 진중에서 전라감사 임명을 받자, 그는 머리를 조아리며 임금이 피난해 있는 서쪽을 향해 울음을 터트리니 온 군중이 슬퍼했다.
권율은 방어사로 하여금 이치를 대신 지키게 하고, 친히 전주에 이르러 기율(紀律)을 일신시켰다. 그리고 모든 장수를 불러 의논해 말하기를, “지금 평양 이남이 모두 적의 진지가 돼 버렸지만 서울은 근본이 되는 곳이니 먼저 서울을 수복해야 한다” 하고 군사 2만명을 일으켜 북으로 올라갔다.
권율의 군사들 중에는 각지의 장수들과 승장(僧將) 처영(處英)도 있었다. 처영은 지리산에서 수도하다가 승병을 일으켰는데 호는 뇌묵으로 서산대사의 제자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는 서산대사의 격문을 받고 1천여명의 승병들을 이끌고 권율의 부대가 됐다.
처영은 독성산성 전투, 행주대첩에서 큰 활약을 했는데 서산대사 휴정(休靜), 사명당 유정(惟政)과 함께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이끈 승장으로 알려져 있다. 임진왜란 당시 승병은 평안도 묘향산에 있던 휴정이 팔도 승병 도총섭이고, 유정은 부총섭이었다. 해남 대흥사의 표충사에는 서산대사 휴정, 사명대사 유정과 함께 뇌묵대사 처영의 영정이 같이 모셔져 있다.
북진을 하던 권율은 10월에 양호체찰사 정철을 아산(牙山)에서 만났다. 정철은 권율에게 “행재소는 길이 멀어 도달하기가 쉽지 않고 또 임금의 기체가 평안하시며, 명나라 군사가 도착해 군사는 많고 먹을 것은 적어 군량 마련 등에 어려움이 있으니, 경솔하게 진격하지 말고 돌아가서 전라도를 지키라”고 했다. 이 명령에 권율은 직산에 머물면서 이 사정을 조정에 보고했다.
권율은 장계에서, “체찰사 정철이 신에게 명하기를, ‘신에게 호남의 도적을 방어하도록 명하고, 근왕은 다른 장수를 시켜 올려 보내겠다’고 했으나 신이 스스로 군사를 거느리고 북상했더니 군사들의 마음이 호남을 지키라는 체찰사의 말을 기쁘게 생각하고 호남으로 도망간 자가 1천여 명이나 됩니다”했다. 이에 조정에서는 정철의 처사에 대해 심히 불쾌해 했고, 임금도 크게 화를 냈다.
조정에서는 권율에게 명령을 내려 북진을 계속하도록 했다. 그리고 선조 임금은 차고 있던 칼을 풀어 주며 말을 급히 달려 권율에게 주라고 하면서 “모든 장수중에 명령을 듣지 않은 자가 있거든 이 칼로 처단하라”고 어명을 내려 권율에게 힘을 실어 줬다.
드디어 12월에 권율은 경기도 오산에 있는 독성산성(禿城山城)에 들어가 진지를 구축했다. 권율이 계속 전진하지 않은 이유는 지난날 광주목사 시절에 전라 관찰사 이광을 따라 북상하다 용인에서 무리한 공격으로 참패한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였다.
드디어 12월에 권율은 경기도 오산에 있는 독성산성(禿城山城)에 들어가 진지를 구축했다. 권율이 계속 전진하지 않은 이유는 지난날 광주목사 시절에 전라 관찰사 이광을 따라 북상하다 용인에서 무리한 공격으로 참패한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였다.
한편 서울에 주둔하고 있던 왜군 총사령관 우키타(宇喜多秀家)는 권율이 호남에서 대군을 이끌고 북진해 독성산성에 주둔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후방과의 연락 및 보급선이 단절될 것을 염려해 도성에 주둔한 왜군 수만 명을 이끌고 쳐들어 왔다.
이에 권율은 성벽을 굳게 지키고 움직이지 아니했다. 왜군은 세 개의 진채(陳寨)를 오산 등지에 만들어 놓고 날마다 와서 싸움을 돋웠다. 그런데 권율은 직접적인 교전을 피하고 성곽을 견고하게 방어했다. 간혹 정예부대를 매복시켰다가 소수의 적과 진지를 공격해 적의 예봉을 꺾었다.
권율은 한 때 왜적의 거센 공격으로 위기를 맞기도 했다. 권율은 날마다 체찰사에게 보고해 위급상황을 알리고 원군을 요청했다. 체찰사 정철은 전라 도사에게 급히 글을 보내서 “흉한 적이 수원 땅에 가득해 오산의 들판에 적진이 퍼져 있고, 독성산성 밑에는 날마다 싸우지 않을 때가 없다. 한 도의 주장이 바야흐로 적병의 포위 속에 있는데 사방을 돌아봐도 응원이 없으므로 날마다 3번씩이나 급히 보고하니, 본도의 관군과 의병을 성화(星火)같이 보내 독산성의 군사를 구하라”했다. 그래서 도사 최철견과 의병장 변사정·임희진 등 의병이 독산성으로 달려갔다.
왜군은 조선군이 지구전을 계속 벌이자 예리함이 차츰 꺾이고 공격에 따른 소득도 별달리 없어 마침내 진영을 불사르고 한성으로 철수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권율은 1천 여 명의 정예기병으로 퇴각하는 왜군을 기습해 수많은 적병을 살상하기도 하였다.
결국 독성산성 전투에서 조선군은 왜군의 대규모 군사를 동원한 포위전술과 유인전술을 지구전과 유격전으로 막아낼 수 있었다.
특히 독성산성 내에는 샘이 없어 물이 부족했는데, 왜군이 첩자를 통해 이런 사정을 탐지한 후 산성으로 흘러들어가는 냇물을 차단해 극심한 급수난에 허덕이게끔 하려했다. 그런데 왜군의 계획을 미리 간파한 권율은 며칠 동안 지탱할 수 있는 물을 비축하도록 한 다음, 서장대에 장막을 치고 연회를 크게 벌이고 군마 몇 마리도 데려다가 물로 씻기는 장면을 연출했다.
이 장면을 본 왜군은 성안에 말을 씻길 정도로 많은 물이 있음을 확인하고 스스로 냇물 차단을 포기했다. 그런데 권율이 서장대에서 말을 씻긴 물은 진짜 물이 아니고 흰 쌀이었으며, 말 위에 뿌렸던 쌀이 햇빛에 반사돼 멀리서 보면 맑은 물처럼 보였던 것이다. 이때부터 서장대는 세마대(洗馬臺)라 불렸다고 하는데 권율 장군의 고도의 심리전술을 엿볼 수 있는 일화이다. 행주산성의 대첩기념관에 있는 독성산성 기록화는 바로 이 장면이 그려져 있다.
독산성 전투의 승리로 경기도의 왜군들은 한성으로 몰리는 형국이 됐고, 이때부터 의주에서 호남에 이르는 서쪽길이 확보됐으며 한성 수복의 가능성도 엿보이게 됐다. 이 전투에서 승리를 기회로 권율은 후일 행주대첩의 쾌거를 이루게 되는데 바로 행주대첩의 승리가 독성산성의 수성전에서 비롯되엇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선조수정실록에는 권율의 독성산성 진출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선조수정실록 26권, 25년(1592) 12월 1일
전라 순찰사 권율이 수원의 독성(禿城)으로 군사를 진출시켰다. 권율이 직산에 이르자 체찰사 정철이 경솔하게 진격하지 말도록 경계하므로 권율이 그대로 군사를 머물게 하면서 보고했다. 조정이 전지를 내려 정철을 책망하고 권율을 재촉해 경성으로 진출하여 도모하도록 청했다. 권율이 지난날 평야의 전투에서 군사가 패한 것을 징계해 독성으로 진출해 머물렀다. 상이 차고 있던 칼을 풀어 달려가 내려주게 하면서 ‘여러 장수들 중에 명을 따르지 않는 자가 있거든 이 칼로 처단하라’고 했다.
경성의 적이 진을 나눠 군사를 출동시켜 왕래하면서 도전(挑戰)했으나 권율은 성곽을 튼튼히 지키고 응하지 않으니 적이 군영을 태우고 퇴각했다. 권율이 가끔 날랜 군사를 출동시켜 낙후한 적을 습격하자 기내(畿內)에 주둔했던 적이 모두 경성으로 들어갔다. 이로부터 서로(西路)에 행인이 다닐 수 있게 돼 여러 의병들이 차례로 경기 지역에 진출해 주둔하면서 중국 군사를 기다렸다.
독성산성 전투
독성산성 전투는 경기도 오산의 독성산성에서 권율이 벌인 전투로 이치 전투 이후 승리를 거둔 전투이다. 경기도 지역의 일본군들을 궤멸시켰다.
독성산성 전투 (임진왜란의 일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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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 | |||
조선 | 일본 | ||
지휘관 | |||
권율 전라 감사 겸 순찰사 선거이 변이중 소모사 조경 조방장 임희진 의병장 변사정 처영 승병장 |
우키타 히데이에 | ||
병력 | |||
1만 명 | 2~3만 명 | ||
피해 규모 | |||
불명 | 불명 |
임진왜란 초기 용인 전투에서 5만 명의 남도근왕근이 궤멸당한 후 용인 전투 참전 장수 중 유일하게 피해를 입지 않았던 권율은 이치 전투에서 승리한 후 임진년 말경에 휘하 장수 선거이, 소모사 변이중, 조방장 조경, 의병장 임희진과 변사정, 승병장 처영과 1만 명의 군사들을 이끌고 북상한다. 권율은 용인 전투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수원의 독성산성으로 들어갔다.
당시 한양에는 6만 명의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한양 주둔 일본군 총사령관이자 제8진 우키타 히데이에는 권율이 독성산성에 있으면 한양의 후방 연락망과 보급 추진로의 어려움을 겪게 될 것으로 예상해 2만 명의 군사를 뽑아 수원에서 오산, 관천, 용인 등지로 들어가는 길을 차단하고 공격을 개시했다.
독성산성이 공격을 받자 권율군은 소수 병력을 타격조로 편성해 수시로 일본군의 측방을 교란했고 야간 기습 공격 등으로 일본군은 본격적인 작전을 펼치지 못하고 성 안으로 가는 물줄기를 막아 독성산성을 고립시키려 했다.
그러나 권율군이 야간에 제방을 막고 있던 일본군을 기습하여 급수원을 재개시켰고 이에 우키다는 계속되었던 권율군의 급습의 피해와 장기전의 부담감을 크게 가졌다. 그리고 전라도 도사 최철견이 의병을 모집해 권율을 구원하기 위해 오자 일본군은 전의를 상실하고 산성에서 철수했다. 이로써 경기도 일부가 수복되었고 명나라 원군이 오고 곳곳에서 의병이 일어나는 가운데 1593년이 가까워 갔다.
독성산성의 식수가 부족한걸 안 왜군은 지구전으로 펼치려 하였지만, 권율은 적이보는 앞에서 말을 씻기며 왜군을 조롱하였다. 왜군들은 이걸보고 식수가 아직있는줄 알고 퇴각하였다. (이때 말을 씻긴것은 물이 아니라 쌀이였다.)
권율은 누구인가?
권율(權慄, 1537년~1599년)은 조선 중기의 무신(武臣), 군인, 정치인이다. 본관은 안동, 자는 언신(彦愼), 호는 만취당(晩翠堂)·모악(暮嶽), 시호는 충장(忠莊)이다. 영의정 권철(權轍)의 막내 아들이자 이항복(李恒福)의 장인이다. 임진왜란의 조선군 장수로, 왜란 당시 조선군 총사령관인 도원수로서 왜군의 침략을 성공적으로 막아내는데 기여했으며 임진왜란 3대 대첩 가운데 하나인 행주대첩을 이끈 장군으로 특히 잘 알려져 있다. 사후 선무공신 1등에 녹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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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율(權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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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537년 강화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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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599년 |
국적 | 조선 |
별칭 | 자는 언신(彦愼), 호는 만취당(晩翠堂)·모악(暮嶽), 시호는 충장(忠莊) |
학력 | 1582년(선조 15년)에 식년문과 병과 |
직업 | 문신 겸 군인. |
부모 | 영의정 권철 |
임진왜란 이전
1537년 후일 영의정을 지내는 권철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가계는 상당히 유복한 가정이었다. 그는 나이가 들어도 관직에 나아갈 생각은 않고 오로지 공부에만 매진했다. 가족들의 권고에 뒤늦게 그가 46살이 되던 1582년(선조 15년)에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응시하여 병과로 급제를 하여 승문원증자(承文院正字)가 되었다. 이어 예조정랑·호조정랑·의주목사(義州牧使) 등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
1592년 그의 나이 56살 때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한양이 함락되고 왕실이 북쪽으로 피난길을 떠났다. 국내 사정이 시시각각으로 위태로워져서 전라도 순찰사 이광(李洸)과 방어사 곽영(郭嶸)이 4만여 명의 군사를 모집할 때, 광주목사(光州牧使)로서 곽영의 휘하에 들어가 중위장(中衛將)이 되어 북진하다가 용인에서 일본군과 싸웠으나 병사들이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한 오합지졸이라 패전하고 말았다.
이치 전투
그 뒤 권율은 남원에 주둔하여 1천여 명의 의용군을 모집하였다. 광주(光州)로 가서 군병을 모집하고 남원으로 이동했다는 설도 있다. 권율은 전라도 금산에서 전주로 진격하는 왜군을 막기 위해 진산 인근 이치(배고개)에 진을 쳤다. 임시 도절제사 권율(權慄)과 동복현감 황진(黃進)이 이끄는 1천여명의 조선군이 왜장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가 이끄는 2천여명의 대군과 맞서 싸워 승리를 거둔 전투로 일본의 전라도 진격작전을 궤멸시켰다. 이 승리로 일본군은 그 후 다시는 전라도를 넘보지 못하게 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권율은 전라감사로 승진하였다.
독왕산성 싸움과 세마대
권율은 때마침 명나라에서 원군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한양을 탈환할 목적으로 2,300명의 관군과 500명의 승병을 이끌고 한양으로 향했다. 한양으로 향해 북상하던 도중 오산 독산(禿山)의 독왕산성(禿旺山城)에 주둔하였다. 독왕산성은 물이 귀한 곳이었으며 우키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가 이끄는 일본군은 그 기미를 알고 한달간 성을 포위했다. 이때 권율은 산성 위에 군마들을 세워놓고 병사들로 하여금 말에게 쌀을 쏟아붓고 씻기게 하였다. 성 아래서 볼 때는 마치 풍부한 물로 말들을 씻기는 것 같이 보였다.
이에 일본군은 의기소침하여 포위를 풀고 서울로 후퇴하였으며, 권율의 병사들은 이를 추격하여 일본군에 3천명 이상의 전사자를 내게 만들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선조는 권율의 병법을 높이 치하하여 독왕산성 정상에 세마대(洗馬臺, 말을 씻긴 곳)를 짓게 하여 오늘에 이른다.
행주대첩
이러한 기지로 일본군의 서진(西進)을 막은 권율은 1593년 음력 2월에는 병력을 나누어 부사령관 선거이(宣居怡)에게 시흥 금주산(衿州山)에 진을 치게 한 후 의병장 김천일(金千鎰)과 승병장 처영(處英)의 병력을 합쳐 3,800명의 병사를 이끌고 한강을 건너 행주산성에 주둔하였다. 행주산성의 군민들은 3만 명의 대군으로 공격해 온 우키다 히데이에의 일본군을 맞아 바위, 화살, 불덩이, 끓는 물을 퍼부어 1만여명의 사상자를 내게 하고 적장 우키다 및 토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의 오른팔이라 불리던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 킷카와 히로이에에게 모두 부상을 입히고 격퇴하였다.
이때 성내의 아녀자들이 치마 위에 짧은 덧치마를 대어 적군들에게 던질 돌덩이를 운반한 것이 행주치마의 유래가 되었다는 설이 있으나, 임진왜란 전부터 행주치마라는 단어가 존재했다는 점으로 볼 때 이는 맞지 않다. 또한 이때 조선군의 신무기인 화차(火車)와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도 맹활약한 바 있다. 행주대첩은 이순신(李舜臣)의 한산대첩, 김시민(金時敏)의 진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로 빛난다. 권율은 이 전공으로 도원수에 올랐다가 탈영병을 즉결 처분한 죄로 해직되었으나, 한성부판윤으로 재기용되어 비변사당상(備邊司堂上)을 겸직하였고, 1596년 충청도 순찰사에 이어 다시 도원수가 되어 어마(御馬)까지 하사받았다.
정유재란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도원수 권율은 일본군의 북상을 막기 위해 명나라 제독 마귀와 함께 울산에서 대진했으나, 명나라 군대 사령관 양호의 돌연한 퇴각령으로 철수하였다. 이어 순천예교(順天曳橋)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하려고 했으나, 전쟁의 확대를 꺼리던 명나라 장수들의 비협조로 실패하였다.왜란 이후
임진왜란이 끝나고 1599년 그의 나이 63세 때 그는 노환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에 돌아갔으나, 그해 사망하였다. 선조는 그의 죽음을 슬퍼하여 이틀이나 정사(政事)를 폐지하였다고 한다.사후 관작(官爵)
그가 죽은 뒤 전공으로 영의정에 추증되고, 1604년 이순신, 원균(元均)과 함께 임진왜란중 전공을 세운 장군들에게 내려진 최고의 영예인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에 봉해졌으며,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으로 추봉되고, 충장사(忠莊祠)에 배향되었다. 충장(忠莊)의 시호가 내려져 충장공(忠莊公)이 되었다.
평가와 비판
권율은 비록 늦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과거에 급제한 데다가 그 연령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 7년간 조선 육군을 총지휘한 장군으로 바다의 이순신과 더불어 전공을 세웠다. 하지만 행주대첩 이후 눈에 띄는 큰 전공은 세우지 못하여 〈선조실록〉에서 사관에게 '행주(幸州)에서 한 차례 승첩을 거두자 갑자기 중명(重名)을 얻게 되어 도원수에 제수되고 곤외(閫外)를 전제하였다.'는 혹평을 듣기도 했다.이항복과의 관계
오성 이항복 집의 감나무 가지가 권율의 아버지 권철의 집(영역)으로 휘어 들어갔는데 이 가지에 열린 감을 권철 집의 하인들이 따먹자, 소년 이항복이 이 사실을 알고 꾸짖었으나 하인들은 오히려 감이 자신의 소유라고 우겼다. 어느날 이항복은 권철이 있는 방문에 주먹을 찔러 넣고 "이 주먹이 누구의 주먹입니까?" 하고 물었다. 하인들이 이항복의 감을 훔쳐먹은 사실을 인지한 권철은 하인들을 단속하였고, 이항복의 영특함을 깨달아 아들인 권율에게 장차 이항복을 사위로 삼으라는 조언을 해주었다.
장난기 많은 오성대감 이항복은 종종 고지식한 장인인 권율을 놀린 일이 있다고 한다. 청렴결백한 권율은 조복과 의관을 갖춰입으면서도 제대로 된 내의를 입지 못하고 늘 베잠방이 차림이었다고 한다. 왜란이 끝난 후 병조판서인 이항복과 도원수 권율이 선조 임금 앞에 대궐조회에 참석한 어느 무더운 여름날, 이항복은 선조에게 날씨가 너무 무더우니 모두들 관복을 벗고 조회를 하자고 제의하였다. 선조는 쾌히 승락하고 신하들이 모두 관복을 벗었으나 관복 아래 베잠방이 차림인 권율은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임금의 명령을 받고 마지못해 관복을 벗고 베잠방이 차림을 드러내어 망신을 당한 권율에게 선조는 파안대소하며 비단과 무명을 하사했다고 한다.
원균과의 관계
이순신과 경쟁심을 가지고 있던 원균이 수시로 수군통제사인 이순신과 마찰을 일으키곤 하였다. 이에 원균은 수군이 아닌 육군으로 전출되기도 한다. 그러나 냉철하게 전황을 읽고있던 이순신과는 다르게 수군 단독으로 왜를 격파할 수 있다고 수차례 조정에 장계를 하였고, 이순신을 견제하려는 선조의 심중과 맞아 떨어져 이순신의 후임으로 통제사직에 임명된다.
하지만 원균은 부임 이후 이순신의 수군 단독출병 불가의 판단이 옳았음을 알고 말을 바꿔 수륙 병진을 주장하였다. 이 과정에서 원균은 조선의 군사동원력이 17만명을 모은 임진년보다 크게 떨어진 상황인데도 30만은 동원할 수 있다고 하고, 섬인 가덕도까지 육군이 몰아치면 된다는 현실을 무시한 주장을 했다.
이에 권율은 비밀 장계를 올려 원균의 주장대로 육군을 움직이긴 어려움을 전하였다. 한편 조정에서 수군에게 원하는 것은 수군의 전면적인 부산포 진격이 아닌, 무력시위를 전개하여 일본이 보급선 유지에 불안감을 가지게 하는 것이었으나 원균은 이조차도 하지 못하다가 원균이 부임전과는 달리 이런저런 핑계로 칠천량으로 출동하지 않자 원균을 곤장으로 다스렸다.
사실 권율이 원균을 곤장으로 다스린 이유는 따로 있었다. 칠천량으로 출동하지 않았다는 사유는 표면적인 사유일 뿐이며 권율은 그 정도로 생각없는 위인이 아니였다. 권율이 원균에게 곤장을 내린 실제 사유는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 시절에는 윤근수, 윤두수 형제의 의견을 옹호하며 이순신의 주장을 반박하더니 막상 그렇게 해서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에서 몰아내고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자 원균은 돌변하여 이순신이 주장했던 의견을 그대로 주장하게 된 것이다.
권율은 삼도수군통제사라는 관직에 욕심이 난 나머지 조정을 기망하고 임금을 갖고 논 원균을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권율에게 곤장을 맞은 후 원균은 전 병력을 끌고 출전하여 칠전량 해전에서 참패를 당하고 그 전투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충무공유사에서 본 권율
“ | 1595년 4월 30일 아침에 원수의 계본과 기(奇)·이(李)씨 등 두 사람의 공초(供招·죄인의 진술)한 초안을 보니 원수가 근거 없이 망령되게 고한 일들이 매우 많았다. 朝見元帥啓本及奇李兩人供草, 則元師多有無根妄啓之事, 必有失宜之責. 如是而可置元帥之任乎! 可怪. |
” |
— 《충무공유사》 중 - |
부정적 평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과 원균의 갈등은 누가 옳은지에 관한 논의와 상관없이 조선 수군 지휘부의 분열을 의미했다. 국난의 위기에서 극심한 갈등을 빚은 두 사람 역시 이러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또한 당시 두 사람의 갈등을 해결하기보다는 오히려 이를 더욱 심화하는데 일조한 권율은 조선군 총사령관으로서 책임을 져야만 한다.
가족
- 아버지 : 권철, 영의정 역임
- 사촌 : 권종(權悰), 임진왜란 때 전사
- 사위 : 이항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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