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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642 : 조선의 역사 184 (선조실록 49)

두바퀴인생 2012. 7. 10. 03:28

 

 

 

한국의 역사 642 : 조선의 역사 184 (선조실록 49)

 

 

 

                                              

                                                                                           임진왜란 경과                                                                                                                    

                                                                                                                                                                                   

 

제14대 선조실록(1552~1608년, 재위: 1567년 7월~1608년 2월, 40년 7개월)            

 

 

 

 

 

 

 

 

 

 

임진왜란 전투목록

 

아래 임진왜란 전투 목록임진왜란 중 있었던 전투 목록이다. 시간 순으로 작성되었으며, 모두 음력으로 날짜순대로 표시했다. 주요 전투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1592년

  • 다대포 전투 : 4월 13일 ~ 4월 15일
  • 부산진 전투 : 4월 14일
  • 동래성 전투 : 4월 15일
  • 경상도 및 충청도 함락 : 4월 17일~4월 28일
  • 상주 전투 : 4월 25일
  • 충주 탄금대 전투 : 4월 28일
  • 한강 전투 : 5월 2일
  • 옥포 해전 : 5월 7일
  • 합포 해전 : 5월 7일
  • 적진포 해전 : 5월 8일
  • 해유령 전투 : 5월 16일
  • 임진강 전투 : 5월 18일
  • 기강 전투 : 5월 18일
  • 사천 해전 : 5월 29일
  • 당포 해전 : 6월 2일
  • 당항포 해전 : 6월 5일
  • 용인 전투 : 6월 5일
  • 무계 전투 : 6월 6일
  • 율포 해전 : 6월 6일
  • 정암진 전투 : 6월 8일
  • 여주 전투 : 6월 10일
  • 제1차 평양 전투 : 6월 15일
  • 웅치 전투 : 7월 7일
  • 이치 전투 : 7월 8일
  • 한산도 대첩 : 7월 8일
  • 제1차 금산 전투 : 7월 9일
  • 안골포 해전 : 7월 10일
  • 우척현 전투 : 7월 10일
  • 제2차 평양 전투 : 7월 17일
  • 영천성 전투 : 7월 24일~7월 27일
  • 지례 전투 : 7월 29일
  • 제3차 평양 전투 : 8월 1일
  • 청주 전투 : 8월 1일
  • 제1차 경주 전투: 8월 2일
  • 제2차 금산 전투 : 8월 18일
  • 영원산성 전투 : 8월 25일
  • 장림포 해전 : 8월 29일
  • 화준구미 해전 : 9월 1일
  • 다대포 해전 : 9월 1일
  • 서평도 해전 : 9월 1일
  • 절영도 해전 : 9월 1일
  • 초량목 해전 : 9월 1일
  • 부산포 해전 : 9월 1일
  • 연안 전투 : 9월 2일
  • 제2차 경주 전투 : 9월 8일
  • 북관대첩 : 1592년 9월 16일~1593년 1월 28일
  • 창원 전투 : 9월 27일
  • 제1차 진주성 전투 : 10월 10일
  • 독성산성 전투 : 12월 11일

 

1593년

  • 제4차 평양 전투 : 1월 9일
  • 성주 전투 : 1월 15일
  • 벽제관 전투 : 1월 27일
  • 웅포 해전 : 2월 10일~3월 6일
  • 행주 대첩 : 2월 12일
  • 제2차 진주성 전투 : 6월 29일

 

1594년

  • 제2차 당항포 해전 : 3월 4일
  • 영등포 해전 : 10월 1일
  • 장문포 해전 : 10월 4일

 

 

1597년

  • 칠천량 해전 : 7월 16일
  • 고령 전투 : 8월 15일
  • 남원 전투 : 8월 16일
  • 황석산성 전투 : 8월 16일
  • 어란포 해전 : 8월 27일
  • 직산 전투 : 9월 7일
  • 벽파진 해전 : 9월 7일
  • 명량 해전 : 9월 16일
  • 제1차 울산성 전투 : 12월 24일

 

1598년

  • 절이도 해전 : 7월 19일
  • 제2차 울산성 전투 : 9월 21일
  • 사천성 전투 : 9월 28일
  • 순천성 전투 : 9월 20일~10월 7일
  • 노량 해전 : 11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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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산성 전투

 

영원산성 전투(領願山城戰鬪)는 임진왜란 초기 원주 목사 김제갑강원도로 쳐들어오는 왜군에 대항해 영원산성에서 벌인 항전으로 군민 모두가 항전하여 시간을 벌었기 때문에 강원도 지역 중 유일하게 원주 백성들만이 무사히 대피할 수 있었다.

 

 

영원산성 전투
(임진왜란의 일부)
날짜 1592년 음력 8월 23일~음력 8월 25일
장소 강원도 원주 영원산성
결과 일본의 승리
교전국
조선 일본
지휘관
김제갑† 원주 목사
김시백
박종남
모리 요시나리
병력
군민 4000명 3000명

 

 

원주 목사 김제갑1591년 음력 11월 19일 68세의 늙은 나이로 부임하여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충주 탄금대 전투에 무기와 병력을 많이 지원하여 병력과 무기가 부족한 상태였다. 이때 왜 제4진 모리 요시나리는 3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동해안을 따라 북상해 삼척을 거쳐 태백산맥을 넘어 강원도 정선, 영월, 영주, 단양, 홍천, 평창 등지를 거쳐 8월 중순 원주를 향하고 있었다. 이에 김제갑원주에서 동쪽으로 30리 떨어진 치악산 남쪽 기슭 영원산성으로 군민 4000명과 식량과 무기 한 달분을 가지고 들어갔다.

 

음력 8월 23일 일본군이 침입해오자 김제갑은 휘하 장수 박종남에게 군사를 주어 가리평이란 곳에 매복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박종남은 명령을 듣지 않고 냇가에서 잠시 쉬어 목욕을 하다가 정찰을 나온 모리 요시나리의 군사들의 기습 공격을 받아 옷 한 벌도 챙기지 못하고 군사들만 잃고 돌아왔다. 모리는 주를 점령하고 영원산성을 공격하기로 결정하여 총병력 3000명을 모두 이끌고 영원산성을 공격했다. 김제갑이 혈전을 벌여 활을 쏘다가 한 왜군의 총에 맞자 부장 중 오항이라는 선비가 달려와 김제갑을 부축하려하자 김제갑은 이를 거부하고 계속 활을 날리며 싸우다가 가까이 접근한 왜군의 총을 맞아 전사했다. 이어 둘째 아들 김시백이 후퇴 도중 아버지 김제갑의 시신을 거두려다가 똑같이 총에 맞아 전사했고 김제갑의 처 이씨도 남편과 아들의 전사 소식을 듣고 자살했다.

 

이 전투로 원주강원도의 다른 지역과는 달리 유일하게 백성을 무사히 피난시키는 데 성공했으며 적은 이 전투로 위력이 반으로 줄어 강원도에서 왜군이 합류하는 데 시간이 걸리게 되었다.

 

 

 

 

장림포 해전

 

장림포 해전은 조선 수군의 4차 출정(8월 24일 ~ 9월 2일) 기간 중의 첫 번째 전투다.

 

부산포에 주둔한 일본군을 격멸하기 위한 목적으로 한 출정이었으며, 이 전투는 양산강쪽에서 치른 소규모 접전이었다.


장림포 해전
(임진왜란의 일부)
날짜 1597년 음력 8월 29일
장소 조선 경상도 장림포
(현재 경상남도 부산광역시 사하구 장림동)
결과 조선군의 승리
조선군 출진 계속
교전국
조선 일본
지휘관
이순신
이억기
원균
무의공 이순신
병력
전선 166척
(협선 92척 포함)
전선 6척
병력 30명
피해 규모
불명 6척 격파, 30명 도주
 

 

 

 

 

화준구미 해전

 

화준구미 해전1592년 9월 1일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일본 전투선과 벌인 소규모 해전이다. 이 싸움은 1592년 8월 29일부터 9월 2일까지 있었던 이순신의 4차 출정 중 부산포로 접근하던 과정에서 일어났다. 조선 수군은 이 전투에서 일본 전투선 5척을 침몰시켰다.

 

 

 

                          

 

 

 

 

부산포 해전

 

부산포 해전(부산 해전)(釜山浦 海戰)은 1592년 9월 1일, 부산포에 정박한 일본군 함대를 기습하여 대파한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녹도만호 정운이 전사하였고, 일본군은 100여 척의 함선을 잃었다. 이 전투 후 일본군은 더 이상 적극적인 해상 작전에 나서지 않았다.

 

 

부산포 해전(부산 해전)
(임진왜란의 일부)
날짜 1592년 9월 1일
장소 조선 경상도 부산포
(현재 부산광역시)
결과 조선군의 승리
일본 재해권 완전 상실, 일본군 피해 심각.
교전국
조선 일본
지휘관
이순신
원균
이억기
정운
권준
송희립
무의공 이순신
김완
이영남
어영담
이언량
와키사카 야스하루
구키 요시타카
도도 다카토라
가토 요시아키
병력
전선 170여 척 (판옥선 74척, 협선 92척 등) 전선 470여 척
병력 7만 명
피해 규모
정운 등 6명 전사, 25명 부상, 소수 판옥선 파손 전투에는 지장 없음. 전선 128척 격침, 5000여 명 사상

 

 

 

                     

 

 

왜 수군은 한산도에서 참패를 당한 7월 중순 이후 약 1개월간 남해안 일대에서 이렇다 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은 채 침묵을 유지했다. 그러던 중, 8월 중순에 이르러 일본군은 한성에 주둔하고 있던 가토, 기무라, 오카모토 등의 부대를 경상도 지방으로 이동하여 주요 지역마다 왜성을 구축하는 등 장기전에 대비하기 시작하였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일본군은 대부분의 병력을 김해 일대에 집결시키는 한편, 군수 물자를 부산으로 운반하였다. 당시 부산포에서는 하시바군 주력부대와 본국에서 증원된 수군 8,000여명과 함선 430여 척이 부산포 일대에 산재하여 해안 요충지를 지키고 있었다.

 

조선은 일본군의 이런 움직임을 본국으로 철수하려는 것으로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경상우도순찰사 김수가 전라좌도수군절도사(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위로 침범한 적도들이 낮에는 숨고 밤에 행군하여 양산(梁山), 김해강 등지로 잇달아 내려오는데, 짐짝을 가득 실은 것으로 보아 도망치는 낌새가 현저하다." 라고 하여 해상도주통로를 차단해 줄 것을 요청했고, 이순신은 전라우도수군절도사(전라우수사) 이억기, 경상우도수군절도사(경상우수사) 원균 (8월 25일 합류)의 함대와 합류하여 판옥선 74척, 협선 92척 등 총 166척으로 통합 함대를 편성하여 출진하였다. 이순신은 부산포로 향하던 중 서평포(西平浦), 다대포(多大浦), 절영도(絶影島) 등에서 일본군 전선 24척을 격파했다.

 

부산포 앞바다의 절영도 부근으로 진출한 조선 수군은 부산포 동쪽 산기슭 해안에 일본 수군 선단 400여 척이 집결해 있는 가운데, 다수의 육군이 해안선에 진지를 구축하여 조선군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음을 탐지하였다. 조선군은 장사진을 펼치면서 종대 대형으로 부산진 포구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조선 수군에 압도된 일본 수군은 배를 버리고 육지로 달아나 육군 병력이 방어하고 있는 해안진지에 뛰어들어 필사적인 저항을 시도하였다. 이에 조선 수군은 해안진지에서 저항하는 일본군에게 포와 활을 쏘아 견제하는 가운데, 포구에 방치된 일본군 전함을 향해 각종 총통 사격을 집중하였다.

 

양 함대의 전선수를 비교하면 약 3대 1의 비율로 조선 수군이 열세이었고 지리 조건도 일본군들은 언덕을 의지하여 높은 곳에서 낮은 곳을 향하여 공격하지만 조선 수군은 해상에서 완전히 노출되어 공격하는 입장에서 매우 불리한 여건이었으나, 일본군이 조선 수군(특히 이순신)에 겁을 먹고 사기가 떨어졌다는 점이 이런 불리한 면을 보완하였다. 일본군이 사기가 높았다면, 옥포 해전 당시 도도 다카토라한산도 대첩 당시 와키사카 야스하루처럼 전 함대를 동원해서 조선 수군을 공격해왔을 것이다. 그러나 상당수 병력이 해안과 산 언덕에 숨어서 바다로 나오지 않고 조총과 활 공격을 했다는 것은 그들이 해전을 두려워했다는 증거이다. 이미 앞서 소규모 해전에서도 일본군은 조선 수군과 맞닥드리자 배를 버리고 섬으로 도망가기 바빴던 것이다.

 

부산포 해안에서 적선 100여 척을 격침시키는 등 큰 전과를 올렸으나, 이순신은 육지로 일본군을 추격하지는 않았다. 이른바 "단병접전", 즉 현대어로 표현하자면 "근접 백병전"에서 조선군의 기량이 일본군에 비해 불리했으며, 많이 지쳤고, 병력 수도 육전을 하기에는 너무 열세였다(이순신과 조선 수군은 병력 수로 싸운 것이 아니라 판옥선과 화포로 지금까지 싸웠다. 병력의 적음을 화력으로 보충했던 것이다). 또 육상전에 핵심 타격력인 기병을 조선 수군은 갖지 못한데 반면, 일본군은 경험이 풍부한 기병을 보유한 것도 이유였다. 대신 의병들이 왜군에 맞서 왜군 3,800명을 죽였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이순신은 아끼던 부하였던 정운을 잃었다.

 

이 해전으로 일본군의 수군 활동은 잠잠해졌고 조선 수군은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평양에 주둔한 고니시 유키나가가 그대로 평양에 주저 앉아 있다가 조명연합군에 밀린 것도 이순신에 의해 해상 보급로를 차단당한 때문이었다. 또 호남 역시 일본군의 침입으로부터 안전할 수가 있었다(이 교훈을 일본군은 진지하게 받아들여 정유재란 때에는 전혀 다른 전략을 세우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