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마을

한국의 역사 640 : 조선의 역사 182 (선조실록 47) 본문

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한국의 역사 640 : 조선의 역사 182 (선조실록 47)

두바퀴인생 2012. 7. 8. 04:04

 

 

 

 

한국의 역사 640 : 조선의 역사 182 (선조실록 47)

 

  

                                              

                                                                                           임진왜란 경과                                                                                                                    

                                                                                                                                                                                   

 

제14대 선조실록(1552~1608년, 재위: 1567년 7월~1608년 2월, 40년 7개월)            

 

 

 

 

 

 

 

 

 

 

임진왜란 전투목록

 

아래 임진왜란 전투 목록임진왜란 중 있었던 전투 목록이다. 시간 순으로 작성되었으며, 모두 음력으로 날짜순대로 표시했다. 주요 전투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1592년

  • 다대포 전투 : 4월 13일 ~ 4월 15일
  • 부산진 전투 : 4월 14일
  • 동래성 전투 : 4월 15일
  • 경상도 및 충청도 함락 : 4월 17일~4월 28일
  • 상주 전투 : 4월 25일
  • 충주 탄금대 전투 : 4월 28일
  • 한강 전투 : 5월 2일
  • 옥포 해전 : 5월 7일
  • 합포 해전 : 5월 7일
  • 적진포 해전 : 5월 8일
  • 해유령 전투 : 5월 16일
  • 임진강 전투 : 5월 18일
  • 기강 전투 : 5월 18일
  • 사천 해전 : 5월 29일
  • 당포 해전 : 6월 2일
  • 당항포 해전 : 6월 5일
  • 용인 전투 : 6월 5일
  • 무계 전투 : 6월 6일
  • 율포 해전 : 6월 6일
  • 정암진 전투 : 6월 8일
  • 여주 전투 : 6월 10일
  • 제1차 평양 전투 : 6월 15일
  • 웅치 전투 : 7월 7일
  • 이치 전투 : 7월 8일
  • 한산도 대첩 : 7월 8일
  • 제1차 금산 전투 : 7월 9일
  • 안골포 해전 : 7월 10일
  • 우척현 전투 : 7월 10일
  • 제2차 평양 전투 : 7월 17일
  • 영천성 전투 : 7월 24일~7월 27일
  • 지례 전투 : 7월 29일
  • 제3차 평양 전투 : 8월 1일
  • 청주 전투 : 8월 1일
  • 제1차 경주 전투: 8월 2일
  • 제2차 금산 전투 : 8월 18일
  • 영원산성 전투 : 8월 25일
  • 장림포 해전 : 8월 29일
  • 화준구미 해전 : 9월 1일
  • 다대포 해전 : 9월 1일
  • 서평도 해전 : 9월 1일
  • 절영도 해전 : 9월 1일
  • 초량목 해전 : 9월 1일
  • 부산포 해전 : 9월 1일
  • 연안 전투 : 9월 2일
  • 제2차 경주 전투 : 9월 8일
  • 북관대첩 : 1592년 9월 16일~1593년 1월 28일
  • 창원 전투 : 9월 27일
  • 제1차 진주성 전투 : 10월 10일
  • 독성산성 전투 : 12월 11일

 

1593년

  • 제4차 평양 전투 : 1월 9일
  • 성주 전투 : 1월 15일
  • 벽제관 전투 : 1월 27일
  • 웅포 해전 : 2월 10일~3월 6일
  • 행주 대첩 : 2월 12일
  • 제2차 진주성 전투 : 6월 29일

 

1594년

  • 제2차 당항포 해전 : 3월 4일
  • 영등포 해전 : 10월 1일
  • 장문포 해전 : 10월 4일

 

 

1597년

  • 칠천량 해전 : 7월 16일
  • 고령 전투 : 8월 15일
  • 남원 전투 : 8월 16일
  • 황석산성 전투 : 8월 16일
  • 어란포 해전 : 8월 27일
  • 직산 전투 : 9월 7일
  • 벽파진 해전 : 9월 7일
  • 명량 해전 : 9월 16일
  • 제1차 울산성 전투 : 12월 24일

 

1598년

  • 절이도 해전 : 7월 19일
  • 제2차 울산성 전투 : 9월 21일
  • 사천성 전투 : 9월 28일
  • 순천성 전투 : 9월 20일~10월 7일
  • 노량 해전 : 11월 19일

--------------------------------------------------------------------------------------------------------------------------------

 

 

 

제2차 평양 전투

제2차 평양 전투
(임진왜란의 일부)

2차 평양성 전투.jpg

일본의 《회본태합기》에 수록된 2차 평양성 전투 중 일본군의 집중 사격을 받아 후퇴하는 명나라 군대의 모습

 

날짜

 

1592년 음력 7월 17일
장소 평안도 평양성
결과 일본군의 승리, 조명 연합군 최초 패배
교전국
조선
명나라
일본
지휘관
조선
김명원 도원수
황원 순안 군수
명나라
조승훈 명 우군 부총병
사유† 선봉장
천총
장국충
고니시 유키나가
병력
조선군 3000명
명 원군 3000명
총병력 6000명
1만 8700명
피해 규모
거의 전멸함. 불명

 

 

평양성이 함락된 후 의주에 피란하던 선조는 여러 차례 명나라에 사신을 파견해 원군을 요청하였고 명 황제 만력제요동 부총병이자 당시 중국에서 이름난 장수였던 조승훈을 우군 부총병으로 임명하고 3000명의 군사를 주어 조선명나라 1차 원군으로 파견되게 한다.

 

조승훈의 3000명 명군은 1592년 7월 초순 압록강을 건너 조선의 도원수 김명원 휘하의 3000명 군사와 합류해 평양 북방 순안군에 집결하였다. 조선 조정에서는 명군을 지원하였고 조승훈평양에 도착하였다.

 

당시 평양성에는 1만 8700명의 고니시 유키나가와 1만 1000명의 구로다 나가마사가 있었는데 구로다 나가마사의 병력은 황해도로 옮겨갔는데 이를 본 척후장 순안 군수 황원이 적의 주력 부대가 빠져 나가는 것으로 잘못 보고하여 음력 7월 17일 아침 조명 연합군평양성으로 진격했다.

 

 

                            

                                                                                   명군의 평양 진격장면

 

 

평양성의 문이 열려 있고 적들이 보이지 않자 명군의 선봉장 사유는 공을 세우고 싶은 마음에 성 내의 정적을 제대로 살피지도 않고 병력을 모두 평양성 안으로 진격시켰다. 그러나 은밀히 길 양편에 매복하고 있던 일본군이 조총으로 명군에 대해 집중 사격을 가하자 명군이 혼란에 빠지면서 크게 패해 명군 선봉장 사유가 일본군의 집중 사격을 받아 전사하고 그의 부장 천총장국충 등도 전사하였다.

 

결국 부상까지 입은 조승훈은 수십 기의 남은 병력만 이끌고 철수하여 다음날 요동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렇게 지원군인 명군이 최초로 참여한 조명연합군의 평양 탈환전은 잘못된 정보와 성급한 공명심에 눈이 멀어 적정을 제대로 살피지도 않은채 성급하게 평양성 내로 진군하다가 일본군의 매복작전에 걸려 명군 대부분이 전멸하고 어이없이 패배하고 말았다. 이렇게 조명 연합군 최초의 전투이자 평양탈환전은 최초의 패배로 끝났다.

 

 

제3차 평양 전투

제3차 평양 전투
(임진왜란의 일부)
날짜 1592년 음력 8월 1일
장소 평안도 평양성
결과 일본군의 승리, 평양성 탈환 실패
교전국
조선 일본
지휘관
이일 순변사
김응서 조방장
이원익 순찰사
고니시 유키나가
병력
이일 5000명
이원익 5000명
김응서 1만 명
총병력 2만 명
1만 8700명
피해 규모
300명 전사, 450명 부상 100명 전사

 

 

제2차 평양 전투에서 조명 연합군의 첫 패전 이후 일본군들을 견제하기 위해 의병들이 나서 중화군임중량윤봉, 차은진차은로 형제 등이 의병을 이끌고 진지를 세우고 일본군들과 싸웠으나 고니시 유키나가는 중화군을 집중공격하여 의병이 대부분 전멸하고 윤봉이 전사하였다.

 

한편 평양성의 일본군 병력이 약화되었다고 생각한 조선 조정에서는 총 2만 명의 일본군보다 더 많은 병력을 모아 단독으로 평양성을 탈환하기로 결정했다.

 

순변사 이일이 동쪽에서, 조방장 김응서가 서쪽에서, 순찰사 이원익이 북쪽에서 공격하기로 했으며, 음력 8월 1일 평양성 보통문 밖에 조선군이 이르자 일본군 50명이 공격을 해왔다. 이에 조선군도 활을 쏘아 20명을 사살했다. 조선군은 사기가 올라 성문을 향해 돌격을 감행했으나 이때 성안에서 갑자기 일본군 수천 명이 쏟아져 나오면서 조총을 쏘며 공격하자 결국 조선군은 둘로 갈라져 지휘가 마비되고 훈련 한번 제대로 받아보지 못한 군사들이라 흩여져 버리고 말았고 조선군은 일본군의 맹공격에 패전하고 말았다. 남은 병력은 간신히 부산원 서쪽으로 후퇴했고 재빨리 후퇴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사상자를 줄였으나 임진왜란 전투 중 최초로 같은 장소에서 3번째로 전투에서 패한 기록을 남겼다.

 

 

                               

 

 

조선군은 제2차 평양 전투에서 명군이 어이없이 패배하여 돌아가자 평양 탈환에 마음이 급해 적정을 제대로 살피지도 않은채 성문에 접근하다가 왜군 50여 명의 적군이 튀어나와 조선군을 공격하다가 피해를 입고 일부러 도망치자 사기가 오른 조선군 본대가 앞뒤도 살피지 않은채 성을 공격하였다. 이것이 적군의 유인작전이었는데도 그것을 감지하지 못하고 무모한 공격을 감행하였던 것이다. 그러자 조선군의 전력이 적에게 노출되었고 결국 적의 유인작전에 걸려 전략.전술이 무지하고 군대의 용병술에 미숙하던 문관 출신의 무능한 지휘관들의 치밀하지 못한 공격으로 결국 대패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일은 이미 상주 전투, 탄금대 전투에서 패배한 장수였고, 이원익은 평양 방어에서 성을 버리고 도망친 이력이 있던 사람이었다. 그들은 도망치기에 바빴으나 조선군 지휘관 중 김응서만이 적진으로 돌격해 일본군의 목을 베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