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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637 : 조선의 역사 179 (선조실록 44) 본문
한국의 역사 637 : 조선의 역사 179 (선조실록 44)
임진왜란 경과
제14대 선조실록(1552~1608년, 재위: 1567년 7월~1608년 2월, 40년 7개월)
임진왜란 전투목록
아래 임진왜란 전투 목록은 임진왜란 중 있었던 전투 목록이다. 시간 순으로 작성되었으며, 모두 음력으로 날짜순대로 표시했다. 주요 전투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1592년
- 다대포 전투 : 4월 13일 ~ 4월 15일
- 부산진 전투 : 4월 14일
- 동래성 전투 : 4월 15일
- 경상도 및 충청도 함락 : 4월 17일~4월 28일
- 상주 전투 : 4월 25일
- 충주 탄금대 전투 : 4월 28일
- 한강 전투 : 5월 2일
- 옥포 해전 : 5월 7일
- 합포 해전 : 5월 7일
- 적진포 해전 : 5월 8일
- 해유령 전투 : 5월 16일
- 임진강 전투 : 5월 18일
- 기강 전투 : 5월 18일
- 사천 해전 : 5월 29일
- 당포 해전 : 6월 2일
- 당항포 해전 : 6월 5일
- 용인 전투 : 6월 5일
- 무계 전투 : 6월 6일
- 율포 해전 : 6월 6일
- 정암진 전투 : 6월 8일
- 여주 전투 : 6월 10일
- 제1차 평양 전투 : 6월 15일
- 웅치 전투 : 7월 7일
- 이치 전투 : 7월 8일
- 한산도 대첩 : 7월 8일
- 제1차 금산 전투 : 7월 9일
- 안골포 해전 : 7월 10일
- 우척현 전투 : 7월 10일
- 제2차 평양 전투 : 7월 17일
- 영천성 전투 : 7월 24일~7월 27일
- 지례 전투 : 7월 29일
- 제3차 평양 전투 : 8월 1일
- 청주 전투 : 8월 1일
- 제1차 경주 전투: 8월 2일
- 제2차 금산 전투 : 8월 18일
- 영원산성 전투 : 8월 25일
- 장림포 해전 : 8월 29일
- 화준구미 해전 : 9월 1일
- 다대포 해전 : 9월 1일
- 서평도 해전 : 9월 1일
- 절영도 해전 : 9월 1일
- 초량목 해전 : 9월 1일
- 부산포 해전 : 9월 1일
- 연안 전투 : 9월 2일
- 제2차 경주 전투 : 9월 8일
- 북관대첩 : 1592년 9월 16일~1593년 1월 28일
- 창원 전투 : 9월 27일
- 제1차 진주성 전투 : 10월 10일
- 독성산성 전투 : 12월 11일
1593년
- 제4차 평양 전투 : 1월 9일
- 성주 전투 : 1월 15일
- 벽제관 전투 : 1월 27일
- 웅포 해전 : 2월 10일~3월 6일
- 행주 대첩 : 2월 12일
- 제2차 진주성 전투 : 6월 29일
1594년
- 제2차 당항포 해전 : 3월 4일
- 영등포 해전 : 10월 1일
- 장문포 해전 : 10월 4일
1597년
- 칠천량 해전 : 7월 16일
- 고령 전투 : 8월 15일
- 남원 전투 : 8월 16일
- 황석산성 전투 : 8월 16일
- 어란포 해전 : 8월 27일
- 직산 전투 : 9월 7일
- 벽파진 해전 : 9월 7일
- 명량 해전 : 9월 16일
- 제1차 울산성 전투 : 12월 24일
1598년
- 절이도 해전 : 7월 19일
- 제2차 울산성 전투 : 9월 21일
- 사천성 전투 : 9월 28일
- 순천성 전투 : 9월 20일~10월 7일
- 노량 해전 : 11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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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방어 혈전, 웅치-이치-금산성 전투
웅치 전투와 이치 전투, 금산성 제1,2차 전투는 전라도 방어에 중요한 역활을 하였던 전투였다. 조선 관군, 의병, 승병들의 피해가 극심하였지만 일본군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결국 일본 제6군이 전주성 공격 및 전라도 공격을 포기하고 금산성에서도 철수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조선은 전라도가 안정됨에 따라 육전과 해전에서 전기를 마련하게 되었고 제1,2차 진주성 대첩, 행주 대첩, 북관 대첩, 부산포 해전, 제4차 평양 전투, 명량 대첩, 노량 대첩 등 임진왜란 및 정유재란에서 조선군이 승기를 잡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던 전투이다.
웅치 전투
웅치 전투는 임진왜란 초기의 전투 중의 하나이다. 1592년(선조 25년) 음력 7월 7일 전라도 웅치 방어선에서 벌인 전투로 김제 군수 정담(鄭湛)과 휘하 방정영과 박석 등이 이끄는 관군과, 의병장 황박, 이광 등의 의병이 합류하였고 나주 판관 이복남(李福男), 해남군가 변응정(邊應井) 등이 나섰으나 혼성군으로 훈련이 되지 않아 제대로 군령이 서지 못하고 밍본군의 기습과 매복에 걸려 4명의 장군들과 군사 수백이 전사하고 패배했다.
웅치 전투 (임진왜란의 일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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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 | |||
조선 | 일본 | ||
지휘관 | |||
권율 정담† 방정영 박석 황박 이복남 변응정 이봉 강운† 박형길† 이광 이정란 |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안코쿠지 에케이 | ||
병력 | |||
총병력 7000명 | 1만 명 | ||
피해 규모 | |||
정담, 강운, 박형길 장군 등 군사 수백 전사 | 불명 |
당시 왜군 6부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가 이끄는 왜군은 1592년 음력 6월 23일 충청도 금산을 점령하고 진지를 구축했다.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부장 안코쿠지 에케이(安国寺恵瓊)는 1만 군사를 이끌고 웅치로 거쳐 전주성으로 진격하려 하였고 이에 전라도의 모든 관군과 의병 1000명이 모여 웅치에서 전투를 벌이게 된다.
7월 초순에 들어 일본군은 전라도로 진격할 준비를 서둘렀다. 일본군은 별군(別軍)을 편성해 안코쿠지 에케이(安國寺惠瑗)에게 지휘를 맡겼다. 이 사람은 안국사를 창건한 승려인데 절 이름을 성으로 삼았다. 그는 스스로 전라감사라 하면서 여러 고을에 격문을 뿌려댔다. 그는 창원에서 남원을 거쳐 전주를 점령한다는 계획을 세웠으나 중간 지점인 의령에서 곽재우(郭再祐) 의병부대의 저지를 뚫지 못하고 방향을 틀어 성주로 올라왔다.
안코쿠지의 상사인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는 한성에 있다가 안코쿠지의 진로에 차질이 생겼다는 보고를 받고 지례, 무주를 경유해 금산을 거쳐서 안코쿠지와 합류했다.
금산에서 전주로 들어가려면 진안에서 전주 사이에 놓여 있는 가파른 웅치(곰티재)를 넘어야 한다. 또 다른 길로 금산에서 전주로 들어가려면 진산의 이치(배재)를 넘어야 한다. 이때 광주목사 권율이 광주 지방에서 모집한 군사 1,500여 명을 직접 이끌고 이치를 지켰다. 이 부대에는 일본에 가서 기개를 떨친 동복현감 황진도 가담하고 있었다. 김제군수 정담(鄭湛)이 웅치를 막는 임무를 맡았으며 나주판관 이복남(李福男)군이 선발대에 배치되었다. 황박(黃璞) 등 의병도 다수 가담했다.
웅치 방어선에는 정담, 방정영, 박석, 황박, 이복남, 변응정 등이 모였는데 3개로 방어선을 나누어 구축했다. 제1방어선은 산 아래 의병장 황박이, 제2방어선은 산 중턱 나주 판관 이복남이, 제3방어선 산 정상에는 김제 군수 정담이 배치되었다. 음력 7월 7일 안코쿠지 에케이는 군대를 이끌고 총공격하여 제1방어선과 제2방어선이 무너지고 정담이 지키는 제3방어선이 전투를 치르고 있었다. 그러나 왜군의 희생도 커 날이 저물자 전투를 중단하고 후퇴했다.
7월 7일 일본군 선봉대가 조총을 쏘아대며 웅치로 올라왔으나 완강한 저항에 부딛쳐 일단 후퇴했다. 다음날 늦은 아침, 일본군은 병력을 총동원해 진격했다. 1선을 맡은 황박군이 저지하다가 밀려나자 2선을 맡은 이복남군이 나섰다. 적은 2선까지 제치고 밀고 올라와 정상에 이르렀다. 정상에는 정담 군이 포진하고 있었다.
정담은 백마를 타고 올라오는 적의 장수를 쏘아 죽였으며, 적이 계속 밀어붙여도 후퇴하지 않고 선두에서 공격을 퍼부어댔다. 날이 저물고 화살이 떨어져 군사가 흩어지기 시작했으나, 그는 끝까지 백병전을 벌이다가 마침내 장렬한 죽음을 맞이했다.
그러나 조선군이 화살이 떨어지자 왜군은 철수를 취소하고 다시 재공격하여 이 과정에서 조선군이 밀리게 되었다. 이복남이 이끄는 나주관군은 안덕원까지 퇴각했고, 피하지 못한 정담과 강운, 박형길 등이 전사했고 웅치에서는 조선군이 패했으나 왜군의 손실도 무척 컸다고 한다.
전투 후에 웅치의 긴 고갯길은 조선군의 시체로 덮였다.
웅치에서 관군과 의병이 패하자 전 성균관 정6품을 지냈던 이정란(李廷鸞)이 전주성 안으로 들어가 백성들을 수습하고 전라감사 이광도 성을 굳게 지켰다. 전주성까지 진출한 일본군이 갑자기 철수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고경명의 의병 7000천이 금산성을 북쪽에서 공격하려 접근한다는 보고를 받은 일본군 제6군 금산 본대에서 급히 철수를 명령했기 때문이었다. 만약 금산성을 빼악기면 일본군은 퇴로가 막혀 전멸할 상황이었다.
결국 안코쿠지 에케이는 금산으로 후퇴하고 안코쿠지는 후퇴 도중 웅치에서 전사한 조선군의 시체를 모아 큰 무덤을 만들어주고 조 조선국 충간의담(弔朝鮮國忠肝義膽)이라는 비석을 세워주어 그들의 충절을 기렸다고 한다.
웅치 전투, 이치 전투
이치 전투
이치 전투는 1592년 음력 7월 8일 전라도 진산군과 고산현 경계의 이치(배고개)에서 임시 도절제사 권율(權慄)과 동복현감 황진(黃進)이 이끄는 1천여명의 조선군이 왜장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가 이끄는 2천여명의 대군과 맞서 싸워 승리를 거둔 전투로 일본의 전라도 진격작전을 궤멸시켰다.
이치 전투 (임진왜란의 일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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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 | |||
조선 | 일본 | ||
지휘관 | |||
권율 황진 |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
당시 일본은 전라도를 점령하기 위해 도요토미가 제6군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에게 명령하여 전라도의 중심인 전주성을 점령하라고 지시한다. 그리하여 서울에 있던 고바야카와는 창원에 주둔하던 별군 2000 여명을 의령을 거쳐 산청-함양-남원-전주 또는 광주로 가는 길로 가게 하였으나, 의령에서 홍의장군 곽재우에게 정암진 전투에서 패전하여 별군은 물러나게 된다. 이에 고바야카와는 서울에서 전라도로 내려와 직접 전라도 점령을 지휘하기로 한다.
서울에서 내려온 고바야카와는 영동을 통해 무주를 거쳐 1592년 6월 23일, 금산성을 함락시키고, 제6군 군사령부를 설치했다. 이 때 전주성 점령작전에서 양동 작전을 쓰는데, 제1대는 1만 여명의 병력으로 승려 부장 안코쿠지 에케이가 지휘를 하며, 제2대는 고바야카와 자신이 직접 지휘하고, 병력은 약 2000 여명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리고 남은 1만 여명은 금산성 본대에 배치했다.
제 1대은 금산-무주-진안-전주 루트를, 제 2대은 금산-진산-전주 루트를 사용했다. 이 때 금산에서 전주로 가려면 웅치, 이치라는 두 고갯길을 넘어야 했는데 그 길이 매우 험했다. 조선군은 바로 이 두 곳을 지키기로 한다. 제 1대은 웅치를 넘어야 했는데 그곳에서는 김제 군수 정담, 의병장 황박, 나주 판관 이복남이 지키고 있었고, 제 2대는 이치를 넘어야 했는데, 이 곳은 임시 도절제사 권율과 동복현감 황진이 지키고 있었다.
당시 조선군의 작전은 우선 이 두 곳에서 1차 방어를 한뒤, 방어를 실패하게 되면 후퇴하여 전주성에서 모여 최후의 2차 방어를 하기로 되있었다. 또 일본군의 허를 찌르는 작전을 구사하는데 바로 북상하던 의병장 고경명이 이끄는 의병대를 금산성으로 진격하게 한 것이다. 만약 금산성이 넘어가게 된다면 일본군은 후퇴하는 진로를 잃어 앞뒤로 조선군의 공세를 받는 진퇴양난의 처지가 될 것이라는 것을 이용한 것이다.
전투는 1592년 7월 7일, 제 1대가 웅치골짜기를 에워싸며 시작되었다. 최외곽(제1전선)에는 의병장 황박, 산 중턱(제2전선)에는 나주 판관 이복남을, 그리고 마지막 저지선인 고갯마루는 정담이 지키고 있었다. 첫 날은 잘 막았으나 다음날, 7월 8일에 적의 파상공세에 제1,2전선이 무너졌다. 마지막 방어선을 지키고 있던 정담은 군사들의 후퇴 권유를 뿌리치면서까지 싸웠으나 이 날 전사하게 된다. 이 때 살아남은 병력은 전주성으로 후퇴했다. 한 편, 같은 날 8일에 이치에서도 피비린내 나는 혈전이 시작되었다.
권율은 병사들을 독려하면서 전투에 임했는데, 비겁한 병사가 눈에 보이면, 그 병사의 벙거지에 칼로 표시를 해두었다가 전투가 소강상태에 빠지게 되면 그 병사를 즉결처분하여 군기를 바로 세웠다. 황진은 적이 사정거리에 들어오면 화살을 날렸다. 이 때 황진은 적탄에 이마를 맞고 후방으로 후송된다.
그 사이에 웅치를 돌파한 제 1대는 전주성 앞까지 왔었다. 그런데 돌연히 제 1대는 방향을 바꾸더니 후퇴를 하기 시작하였다. 거의 동시에 이치의 일본군들도 후퇴를 하기 시작했다. 금산성 본대에서 고경명이 이끄는 의병군 7000 여명이 지금 금산성으로 온다는 보고를 받은 것이다. 조선군의 작전이 적중한 것이다.
7월 9일, 금산에 거의 접근한 고경명의 의병군은 전라도 방어사 곽영의 관군과 합류하고 금산성을 에워싼다. 바로 제1차 금산성 전투이다. 마침내, 7월 10일, 고경명이 이끄는 의병군은 1만의 일본군이 지키는 금산성을 공격했다. 또 이 날, 위기에 처한 금산성을 구하기 위해 제 6군 소속 병력 1500 여명이 전라도로 가다가 경상도 거창의 우석현에 매복해 있던 의병장 김면에 의해 막혀 전라도 진입을 실패한다. 바로 우석현 전투였다.
우선 고경명이 기병 100 여기를 이끌고 서문을 공격했는데 성안에 있던 일본군이 갑자기 성문을 열고 돌격해 허술해 보이던 관군을 집중공격했다. 이로 인해 일본군은 곽영이 도망치고 관군이 무너지자, 의병군을 공격해 궤멸시킨다. 이 전투로 고경명과 둘째 아들 고인후가 전사하고 장남 고종후가 가까스로 살아서 아버지와 동생의 시신을 수습하고 후퇴한다.(훗날 고종후는 제 2차 진주성 전투에서 끝까지 전투에 임하다 전사한다.) 금산성 일대는 의병들의 시체로 산을 이루었고 7,000천 의병들의 장렬한 최후였다.
약 한 달 후인 8월 18일, 의병장 조헌이 이끄는 700여 명의 의병들과 승려 영규가 이끄는 600 여명의 승군들이 금산성을 공격하나 전원 전멸한다. 바로 제2차 금산성 전투이다. 앞서 조헌과 영규는 청주성 전투에서 청주성을 탈환하는 등 기세를 떨쳤는데, 주변 관군과 의병들이 금산성 공격은 무모하고 희생만 초래할 위험한 작전이라고 극구 만류하였으나, 의병장 조헌과 승병장 영규는 청주성 전투에서 맺은 인연으로 같이 군사를 이끌고 금산으로 향했던 것이다. 결국 이 전투로 1300여 명의 의병과 승병들, 그리고 의병장 조헌, 승병장 영규가 죽고 조헌의 아들 조완기도 죽는다. 그 뒤로 제 6군은 힘겹게 금산성을 지키다가 9월 17일, 경상도 성주 방면으로 퇴각한다. 제 6군의 퇴각은 고결한 희생을 한 의병들과 승병, 관군들의 고귀한 희생덕이었다.
임진왜란에서 이치, 웅치, 금산성 1, 2차 전투, 우석현 전투 등은 수많은 조선 의병, 승병, 관군 등의 피와 뼈를 뿌리고 묻으면서 싸운 결과 전라도를 지킬 수 있었던 대단히 중요한 전투였다. 조선군이 패배하기도 하고 한편에서는 승리하는 등 우여곡절이 있었으나 권율, 황박, 황진, 이복남, 정담, 고경명, 고인후, 조헌, 조완기, 영규 등의 의병장과 승병장, 그리고 의병과 승병, 관군들의 고귀한 희생을 덕분에 일본군도 막대한 피해를 입고 철수함으로써 전라도 진입을 차단하게 한 의미있는 전투였던 것이다.
이러한 여러 전투에서 패인은 여러가지가 될 것이나, 조선 조정에서 통합적인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관군, 의병, 승병들 간 지휘.통제.명령체계를 제대로 세우지 못해 관복을 입은 관리들의 전투의지와 책임감이 부족하였고, 급조된 관군들이 항상 취약한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래서 일본군은 항상 허술한 조선 관군을 집중공격하여 전열을 흐뜨려 놓는 바람에 대부분의 의병, 승병들까지도 막대한 희생을 당하였다. 그리고 관군과 의병, 승병들이 서로 혼성 편성되다보니 지휘체계가 바로 서지 못하였고 싸움을 주도해야할 관리들조차 용병술에 미숙하였으며 협조체계, 명령체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해 전투역량을 발휘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또 대부분의 의병과 관군들이 보급과 훈련이 미흡하고 군기가 제대로 서지 못한 탓에 왜군의 강력한 공격에 직면하게 되면 대부분 도망치거나 전선이 뚫리는 경우가 많아 전투에서 조직적인 방어 통제가 이루어지지 못하여 승리를 기대할 수가 없었다. 특히 조정의 관리들과 의병장들 간에 지휘.통제.명령체계로 인해 갈등이 심하여 전투명령체계가 바로 서지 못했고, 의병과 의병, 의병과 승병, 이들과 관군 등 간에도 협조체계가 제대로 긴밀하게 이루어지지 못해 전투간 독자적인 용병 운용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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