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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635 : 조선의 역사 177 (선조실록 42) 본문
한국의 역사 635 : 조선의 역사 177 (선조실록 42)
임진왜란 경과
제14대 선조실록(1552~1608년, 재위: 1567년 7월~1608년 2월, 40년 7개월)
선조의 평양 탈출기
유성룡 풍원부원군에 제수
6월 1일 선조는 유성룡에게 풍원 부원군을 제수했다. 이는 명나라 사신과 장수들을 접대하라는 뜻이었다. 전뱅 발발 소식을 듣고 명나라는 최세신과 임세록을 특별한 임무를 띤 임시관원으로 삼아 평양으로 보냈다.
명나라에서는 조선의 전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한 달도 안되어 한양 도성이 함락되고 임금이 평양까지 피난을 갔다는 것이 의심이 갔던 것이다. 조선이 일본의 앞잡이가 되어 명나라를 칠 것으로 오해한 것이다.
유성룡이 만나보니 임세록이 알고자 하는 진짜 정보는 바로 그것이었다. 일본군이 그렇게 빨리 북상할 수 있는 것은 조선이 길잡이 노릇을 하지 않는 한 그렇게 빨리 올라올 수가 없다는 명나라 조정의 중론이었다.
유성룡은 임세록을 데리고 대동강이 보이는 연광정에 올랐다. 일본 군 한 명이 대동강 동쪽 숲속애서 나와서 이리저리 살피더니 잠시 후 두 세명이 나와 주위를 살피는 것이엇다.
"저것이 왜병의 척후 입니다."
유성룡이 가리키는 곳을 본 임새록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왜병의 숫자가 어찌 저렇게 적을 수 있겠소."
"많은 군사는 뒤에 있고 몇 명만 먼저 와서 정탐하는 것입니다. 척후병 숫자만 보고서 왜병을 깔본다면 반드시 적군의 꾀에 빠질 것입니다."
그제서야 유성룡의 말을 사실로 믿은 임세록은 빨리 공문서를 써 달라고 요청해 가지고 돌아갔다. 공문서는 물론 구원병을 요청한다는 조선 임금의 요청이었다. 일본군의 대동강 출현을 목격한 임세록의 보고는 힘을 받을 것이며 구원병을 보내지 않으면 자칫 명나라가 싸움터로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평양에서 겨우 안정을 되찿았던 선조는 임진강이 무너지면서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가자 선조는 다시 흔들리기 시작했다. 선조는 다시 평양을 버리고 다시 도주할 계획을 세우라고 조신들에게 명했다. 그러나 유성룡이 또 다시 반대했다.
" 오늘날 사세는 먼젓번 한양에 있을 때와는 다릅니다. 한양은 군사와 백성이 모두 무너져서 지키려야 지킬 수 없었지만, 평양성은 앞에 강물에 막혀 있고 민심도 자못 안정되어 있으며, 또 중원과도 가깝습니다. 만약 며칠만 더 굳게 지킨다면 반드시 명나라 군사가 와서 구원할 것입니다. 그 힘을 빌어서 적군을 물리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면 이곳으로부터 의주까지 다시 지킬 만한 땅이 없으니, 형세가 반드시 나라가 망하는 지경에 이를 것입니다."
유성룡이 말에 선조는 기가 약간 죽는 듯 했으나 이내 유성룡의 말이 그토록 얄미울 수가 없었고 속으로는 분노가 치밀었다. 임금인 자신보고 적이 눈앞에 와 있는데 평양에 며칠 더 머물라고 하지 않는가! 만약 며칠 더 버티다가 명군은 오지않고 일본군에게 평양이 함락되어 자신이 포로가 된다면 치욕적인 항복을 해야할 판이었고 자신의 목숨도 부지할지 알 수가 없었다.
서인 좌상 윤두수도 유성룡의 사수론을 지지했다. 신하눔들이란 일본군을 막을 대책 하나 제대로 내지 못하면서 자신의 피난길을 막고 있다. 그래도 한시라도 빨리 평양을 빠져 나가 요동으로 갈 생각에 빠져 있었다. 자신보다 나라를 이 지경으로 만든 신하들이 더 얄미웠다. 믿었던 장수들도 모조리 연전연패에다 도망칠 궁리만 하는 꼴이 참으로 한심스러운 나라꼴이었다. 조상들에게 부끄러운 이 참담한 현실을 어떻게던지 자신이 살아남아야만 해결이 가능하다고 생각되었다. 그런데 뚜렸한 대책도 없는 신하들이 자신을 평양에 남아 있어야 한다면서 이구동성으로 혀를 내밀고 있다.
선조가 피난길에 나선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평양은 이미 혼란에 빠져 들고 있었다. 평양 사람들이 너도 나도 도주해 성 안이 텅 비었다. 보고를 받은 선조는 당황한 상태에서 세자 광해군에게 백성들을 설득하라고 명했다. 광해군이 대동관의 문에 나가서 나이든 사람들에게 평양성을 굳게 지키겠다고 말했으나 그들은 선조의 직접적인 육성을 요구했다.
"동궁마마의 말씀만 듣고는 백성들이 마음으로 믿지 않으니 반드시 성상께서 친히 타이르는 말씀을 들어야겠습니다."
이튼날 선조는 하는 수 없이 같은 장소에 나가서 평양의 부로와 군민들을 소집하여 죽음으로서 평양을 지키겠다는 이야기를 했다. <징비록>에 의하면 "이 말을 전해들은 부로들은 달아난 사람들을 불러오게 하여 산골에 숨어 있던 늙은이, 어린이와 남녀 자제들을 불러 모아 성에 들어오게 하니 성 안이 가득찼다."고 전하고 있다. 선조의 평양성 사수 발언에 백성들이 모여든 것이었다.
그러나 6월 8일 일본군 선봉이 대동강 가의 재송정 앞에 병사를 주둔시키자 다시 선조가 도주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재신들이 선왕의 위판을 모시고 성문을 빠져 나가는 것이 목도되면서 상황은 더욱 급속히 악화되었다. 신주를 옮기는 것은 국왕 파천의 신호였기 때문이었다. 성 안에 있던 이속과 백성들이 들고 일어나 벼슬아치들을 꾸짖었다.
"너희들이 평소에는 나라의 녹을 도적질해 먹다가 나라 일을 그르치더니, 이제 백성들을 이렇게 속인단 말이냐?"고 하면서 성난 군중들이 모여들었다.
백성들은 길을 가로막고 재신들을 걷어찼다. <징비록>은 "이때 신주가 땅바닥에 떨어졌다" 라고 적고 있다. 선왕의 신주가 길바닥에 내동댕이쳐진 것이었다. 배신감에 치를 떨고 있던 백성들에게 신주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던 것이다. 길가에 모인 장정들은 물론 부녀자와 어린 아이들까지 분기가 탱전해 머리털을 곤두세우고 외쳐댔다.
"성을 버리고 도망칠 것 같으면, 왜 우리들을 속여 성안으로 불러들여 적의 손에 어육이 되게 한단 말인가?"
선조는 신주를 따라 나가려고 했으나 백성들이 난을 일으켰다는 소식에 떠나지 못했다. 연광정에 있던 유성룡이 선조가 있는 행궁인 대동관으로 달려갔다. <징비록>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궁문에 이르니 난민들이 거리에 가득한데, 모두 팔뚝을 걷어 붙이고, 칼이나 몽둥이를 가지고 만나는 사람마다 후려침이 몹시 소란스럽고 북적거려서 제지할 수 없었다. 뮨 안의 조당에 있던 재신들은 모두 얼굴빛이 변하여 뜰 가운데 서 있었다. 나는 난민들이 궁문으로 들어올까 걱정이 되어 문 밖 층계 위에 나가 서서 나이 많고 수염 많은 사람을 손짓하여 부르니 그가 곧 다가왔다." <징비록>
그는 평양 지방의 관리였다. 유성룡은 그 사람을 타일렀다.
"그대들이 힘을 다하여 이 성을 지키면서 임금이 성 밖으로 나가지 않기를 원하고 있으니 바라를 위하는 충성이 가득하다. 그런데 난을 일으켜 궁문을 소란스럽게 하다니 대단히 놀랄 만한 일이다. 조정에서도 지금껏 이 성을 굳게 지키기로 계청했고 임금께서도 이미 허락하셨는데 무슨 까닭으로 이렇게 야단스러운가? 그대의 모양을 보건대 식견있는 사람 같으니 여러 사람들에게 타일러 물러가게 하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들은 장차 중한 죄를 범하게 될 테니 그대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라고 유성룡이 말했다.
그러자 그는 뭉둥이를 버리고 두 손을 마주 잡고 말했다.
"저희들은 나라에서 이 성을 버리려 한다는 말만 듣고 분개해 이렇게 망동한 것인데, 지금 이런 말씀을 듣고보니 소인의 가슴속이 시원해집니다."라고 말하고는 난을 일으킨 무리들을 손을 휘둘러 해쳐버렸다.
이 무렵 일본군은 대동강까지 진출했으나 더 이상 북상하지는 못했다.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연전연승하면서 재해권을 장악해 나갔기 때문이었다. 선조가 평양에 도착한 5월 6일 이후만 해도 옥포 대첩에 이어 조선 수군은 6월 2일 당포, 6월 5일 당항포 해전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당항포 해전에서만 적선 26척을 격침시키는 승리를 거두었다. 조선이 재해권을 장악하면서 군수품 보급에 문제가 생긴 일본군이 북상을 주저한 것이었다.
그러나 선조는 중전 의인왕후 박씨를 먼저 함경도로 보냈다. 그리고 자신도 따라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중전의 피난길은 순조롭지 못했는데 역시 난민들이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중전이 함흥으로 가기 위하여 궁속(궁의 일을 보는 사람)들이 먼저 나가자, 평양 군민들이 난을 일으켜 몽둥이로 궁비를 쳐 말 아래로 떨어뜨렸으며, 호조판서 홍여순은 길에서 난병에게 맞아 등을 다쳐 부축을 받고 돌아왔다. 거리마다 칼과 창이 삼엄하게 벌여 있고, 고함이 땅에 진동하였는데 모두 대가가 성을 나가지 못하게 했다. 풍원 부원군 유성룡이 전에도 성을 지키자는 계책을 고수하여 삼사와 서로 다투었는데 이때에도 신하들과 상 앞으로 바로 들어갔다. 상이 궁전(활)을 차고 뜰 가운데에서 산보하며 승여(가마)가 준비되었다는 보고를 기다리다가, 유성룡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전상으로 올라가 앉으니, 유성룡과 승지 이곽, 봉교 기자헌 등이 입시하였다." <선조실록. 1592.6.10>
이때 유성룡이 선조에게 "원하옵건데 상께서는 이곳에 머물러 계시고 서쪽으로 행행하지 마소서"라고 만류했다. 서쪽이란 요동을 말한다.
그러나 선조의 마음은 이미 조선을 떠나 있었다. 그는 좌상 윤두수와 순찰사를 겸임하고 있는 이조판서 이원익에게 평양성 사수를 명하고 난민들을 피해서 6월 11일 영변을 향해 떠났다. 여차하면 요동으로 도주하려는 심산이었다.
11일 밤 숙천에서 보낸 선조는 다음 날 안주를 거쳐 영변에 들어갈 예정이었는데 비가 내렸다. 선조는 비가 내리는 가운데 영변으로 향했다. 북도로 향하던 왕비 일행은 가등청정 군이 함경도까지 진출하여 함경도로 가지 못하고 되돌아왔다.
선조는 세자 광해군을 영변에 남겨 국사를 다스리게 하겠다고 명하고 회의를 주재했다. 선조가 참석하는 어전회의에서는 적을 물리칠 방안이 논의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모든 논의의 초점은 어디로 도망갈 것인가에 맞춰졌다. 선조의 목적지는 초지일관 요동이었다.
"당초에 일찍이 요동으로 갔더라면 좋았을 텐데, 의논이 일치하지 않아 이런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나는 처음부터 항상 왜적이 앞에서 나타난 뒤에는 피해가기 어렵다고 말하곤 하였다." <선조실록. 1592.6.13>
이 말은 자신이 선견지명이 있었다는 투였다. 영의정 최홍원이 "요동으로 들어갔다가 명에서 허락하지 않으면 이떻게 하느냐?"고 반대하자 이렇게 말했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나는 반드시 압록강을 건너갈 것이다. 요동으로 건너가는 것은 피난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안남국(현 베트남)이 멸망당한 후에 중국에 입조하자 병사를 보내 안남국을 회복시킨 적이 있다. 나도 이와같은 것을 생각하였기 때문에 요동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것이다."
요동으로 도망가려는 선조에게도 논리는 있었다.
선조 자신이 전쟁 수행의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평양성은 사수가 가능한 성이기 때문에 신하들은 선조가 평양성을 떠난 것이 큰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평양성에 남은 신하들은 성을 사수하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선조가 도주한 날 그날 평양성에 남은 윤두수와 이원익은 밤중에 평안도 출신 김진에게 토병인 평안도 군사 백여 명을 인솔하여 대동강을 건너가서 공격하라고 명했다. 그래서 김진이 군사를 이끌고 도강했을 때 왜군들은 한참 자고 있었다. 일본군은 조선군이 기습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하고 경계병도 세워 놓지 않은채 잠을 자고 있었다. 김진이 급습하자 일본군은 손쓸틈이 없이 당하였는데, 조선군은 일본군 수백여 명을 사살하고 말 133필을 빼앗았다. 그런데 귀환하는 데 배가 빨리 도착하지 않아 추격하는 일본 군에게 공격당하여 군사 30여 명이 전사하고 말았다. 비록 아군의 손실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는 큰 승전이었다. 조선군에게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평양성에 남아 있던 유성룡이 명나라에서 파견된 도지휘 동양정을 만난 결과를 보고한 것도 평양성 사수의 희망을 크게 하였다.
"명나라 사람이 한참 동안 바라보고서, '만약 이 정도라면 우리 군사가 한번 오면 왜적들을 섬멸할 수 잇다.'라고 말했습니다. 신이 역관을 통해 다시 그들에게, '왜적들은 온갖 간사한 꾀를 다 내는데 강의 상류와 하류에는 건널 수 있는 얕은 여울이 없지 않으므로 병사들을 나누어 수비하다 보니 힘이 분산되는 것이 걱정이다. 명나라 군사가 오는 것이야 말로 한 시각이 급하니, 대인은 급히 귀국하여 출병할 시기를 앞당기라.'고 하였습니다.... 만약 수일 만 지탱하여 명나라 군사가 들어오면 왜적을 물리칠 가능성이 없지 않습니다." <선조실록. 1592. 6.11>
6월 14일 명나라 차관 동양정의 패문 내용이 알려지면서 평양성에 남은 사람들은 성을 사수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다. 명나라 군이 내일 압록강에 도착해서 모래는 강을 건널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며칠만 더 버티면 명군이 평양성에 합류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도주 중인 조정은 전혀 다른 문제로 시끄러웠다. 선조가 전날 밤 비망기를 내려 광해군에게 내선(왕위를 물려줌)하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이었다.
선조의 비망기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 하나는 신하들의 충성심을 시험하기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책임을 세자에게 맡기고 자신은 요동으로 도주하겠다는 의도였다. 나라가 망하기 직전의 풍전등화인데 한 나라의 군주치고는 영악하기 그지없는 졸부같은 생각으로 가득차 있었다.
신하들은 평양성 사수 대책 힘쏟는 대신 선조를 청대해 전교의 명을 거두어달라고 요청하는 데 힘써야 했다. 영의정 최홍원이 청대해 전교를 거두어 달라고 요청한 그날 <선조실록>은 "상이 마침내 요동으로 건너갈 계획을 결정하고 선전관을 보내 중전을 맞아 돌아오도록 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그리고 그날 밤 제1차 평양성 전투가 있었다.
한강 방어전에서 일본군이 나타나기도 전에 도망친 이력이 있고 당시 부원수 신각이 자신을 따르지 않았다 하여 그를 모함하여 목숨을 앗은 김명원이 방어 책임을 맡았다. 평양성의 도원수 김명원은 야음을 틈타 기습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고언백에게 날쌘 군사를 거느리고 강을 건너 공격하라고 명했다. 고언백은 부벽루 아래 능라도 나루로 강을 건넜다. 그런데 공격 시간에 차질이 생겼다. 원래의 공격 시간은 삼경(우후 11시~오전1시)이었으나 강을 건널 무렵 이미 먼동이 트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군이 아직 장막 속에서 자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급습했다. 평안도 토병 임욱경이 앞장서서 싸우다 전사하기도 했으나 조선군은 적병 여럿을 죽이고 2백여 필의 말도 빼앗았다.
소란에 잠을 깬 일본군이 반격에 나서자 조선군은 강 쪽으로 퇴각했는데, 후송을 맡은 뱃사람들이 적군이 쫓아오는 것을 보고 강가에 배를대지 않았다. 많은 군사들은 강물에 빠져 죽었고, 이 지역 지리를 잘 아는 토병들은 물이 얕은 왕성탄으로 건넜다. 그런데 이를 본 일본군은 왕성탄을 걸어서 건널 수 있는 깊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날 저녁 일본군 본대가 드디어 대동강을 건넜다. 김명원의 치밀하지 못한 기습 작전은 결국 일본군에게 대동강 도섭지점을 알려준 꼴이 되고 말았다. 조선에는 김명원 이상가는 장수가 그렇게도 없었다.
일본군 본대의 대동강 도하를 목격한 장수들이 술렁이더니 평양성 사수를 포기하게 된다. 싸워보지도 않고 목숨이 아까운 윤두수와 김명원은 성안 사람들을 모두 내보내고 병기와 화포를 풍월루 연못 속으로 가라앉혔다. 이튼 날 일본군은 모란봉에 올라 성이 텅 빈 것을 확인하고 무혈입성했다. 6월 15일이었다.
평양성을 빼앗긴 것도 문제거니와 평양성 결전에 대비하여 여러 고을에서 모아다 놓은 10만 석의 곡식이 일본군 수중으로 들어간 것도 큰 문제였다. 보급품 부족에 허덕이던 일본군으로서는 이외의 큰 소득이었다.
6월 중순 들어 명나라 장수들이 몇백 명씩 군사를 거느리고 압록강을 넘어왔다. 기디리고 기다리던 원군이었다. 명군 또한 백성들에게는 큰 고통이었다. 조도사 홍세공의 6월 20일자 치계에 '장수들의 기율이 엄중하지 않고, 또 군마들이 민가에 마구 뛰어드니 백성들이 놀라 흩어져 성안이 온통 비었습니다.'라고 쓴 것이 이를 말해준다. 명나라 군사들의 접대를 맡은 유성룡은 군량 마련이 큰 걱정이엇다. 고렇잖아도 행패가 심한 명군이 식량까지 재때 공급받지 못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다. 무슨 수를 써더라도 명군에게 식량을 공급해야 했다.
유성룡이 징비록에 "임금의 행차가 평양을 떠나온 후로는 인심이 무너져서 가는 곳 마다 난민들이 곧바로 창고에 들어가서 곡물을 약탈하니 순안, 숙천, 인주, 영변, 박천 등의 고을 창고가 차례로 약탈당했다.'라고 쓴 것처럼 대부분의 창고는 약탈당한 뒤였다. 심지어 '박천에서 출발할 때 조신들의 짐바리를 노략질한 마을 도적들이 있었다."는 내용이 실록에 기록될 정도였다.
선조는 6월 15일 박천을 떠나 이튼날 가산에 도착했다. 선조는 가산에서 정주를 거쳐 요동으로 북상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유성룡은 가산이 승부처라고 생각했다. 평양 아래 대동강이 흐르는 것처럼 가산 아래 청천강이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6월 16일 유성룡은 선조에게 가산을 결전 장소로 삼자고 아뢰었다.
유성룡이 아뢰었다.
"청천강 가에서 한번 결전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가산 군수 심신겸은 본군에는 군량이 5백~6백 석이 있으나 정주에는 전혀 없습니다.'고 말했습니다."
"오늘에 와서야 비로소 정주에 군량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의주에는 홍세공을 보냈는데 준비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2천 군사가 왕래하는 군량도 준비할 수 없단 말인가?"
정찰 등이 이뢰었다.
"박찬과 영변에는 저축된 군량이 조금 있다고 합니다.
상이 일렀다.
"말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군신들이 일을 해보려는 뜻이 없기 때문에 이와 같은 지경에 으른 것이다."
유성룡과 정철이 아뢰엇다.
"여러 장수들로 하여금 이곳에 모이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선조실록. 1592.6.16>
가산에서 결전하자는 신하들에게 자신이 도주할 정주에 양식을 미리 마련해놓지 않았다고 '일을 해보려는 뜻이 없다'고 비판한 것이다.
이날 유성룡은 홍진과 함께
"흩어진 병졸 수천여 명을 가두어 명나라 병사와 함께 결전하여 다행히 승전하면 종묘사직이 다시 보전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재차 결전을 촉구했다.
그러나 선조의 대답은 엉뚱했다.
"요동에 자문(공문)을 가지고 갈 사신을 미리 정하는 것이 좋겠다."
요동으로 건너 간 이후에 자신의 처우 문제 등을 논의할 사신을 보내야 한다는 뜻이엇다. 6월 16일 선조는 가산을 떠나 정주에 도착했는데, 궁인들은 대부분 걸어서 가는 등 비참한 피난길이었다. 선조의 뇌리에는 오로지 빨리 조선을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차 있었다. 요동으로 가는 길만이 자신이 살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선조는 정주를 떠나 선천으로 가면서 미운 유성룡에게 정주에 머물러 있으라고 명했다. 이 상황을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나는 길가에 엎드려 임금의 행차가 성 밖으로 나가시는 것을 전송한 다음, 연훈루 아래에서 울고 있었다."라고 적고 있다. 한 명이라도 더 데려가기 위해 분주하던 선조가 막상 유성룡은 요동 망명을 반대한다는 이유로 정주에 떨어뜨린 것이었다. 그래서 선조는 요동 망명의 장애물을 제거한 셈이 되었다.
곽산을 떠나 선천으로 가면서 곽산 군수 이경준이 호종하겠다고 주청하자 즉시 받아들이고, 대신 선전관 고희를 곽산 군수로 삼았다. 고희도 선조에게 미움을 받았던 모양이다. 고희가 눈물을 흘리면서 사양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선조가 곽산을 떠나면 곽산은 곧 백성들에 의해 무정부상태가 될 것이기 때문에 이경준은 호종하겠다고 자청한 것이었고, 고희는 눈물을 흘리면서 사양한 것이다.
<선조실록> 1592년 6월 18일자는 "이때에 도로에 떠도는 말에, 왜젹들이 반드시 대가(임금의 수레)를 뒤쫓아오고야 말 것이라고 하니, 대가가 지나간 여러 고을이 일제히 비고 난민들이 관아 창고를 불사르며 약탈해갔다."고 적고 있다. 국난 극복의 가장 큰 장애요소는 다름아닌 선조 자신이었다. 도망가는 선조와 약탈자로 변한 백성 사이에서 유성룡은 울 수밖에 없었다.
이때 유성룡 휘하에는 군관 6명과 중도에 모은 패잔병 19명이 있었다. 이들은 모두 유성룡과 생사를 같이 하기로 약속한 사이였다. 선조가 버리고 떠난 정주는 치안 부재상태로 빠져들었다. 유성룡은 약한 고리를 쳐서 기선을 잡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때 난민 10여 명이 성문으로 몰려들자 유성룡은 군관에게 난민들을 모두 잡아오라고 명령했다. 10여 명의 난민들은 병사들이 잡으려 달려오자 도주했으나 9명이 붙잡히고 말았다. 유성룡은 이들의 상투를 풀어 흩뜨리고 두 손을 뒤로 묶은 다음 창고 옆 길가로 끌고가 군사들에게 소리치게 했다.
"창고를 약탈하는 도적은 사로잡아 목을 매달겠다!"
그제서야 창고를 털려던 난민들이 서문으로 달아났다. 그러나 유성룡은 이들의 목은 베지 읺았다. 백성들의 마음을 안정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무인인 정주 판관 김영일은 평양에서 도주해 처자를 바닷가에 옮겨두고 창고 곡식을 훔쳐 가족들에게 보내려고 했다. 유성룡은 그를 체포한 다음 꾸짖었다.
"너는 무장의 몸으로 싸움에 지고도 죽지 않았으니 그 죄가 목을 벨 만한데, 또 감히 관청 곡식을 훔쳐내는가?"
유성룡은 곤장 60대를 치게 했다. 그러나 그는 사람을 죽이는 것으로 균율을 세우지 않았다. 유성룡의 이런 조치 때문에 정주뿐만 아니라 용천, 선천, 철산 지역의 관청 곡식이 안전할 수 있었다. 유성룡의 처절한 애국충정이 눈물로 변하여 흘러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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