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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634 : 조선의 역사 176 (선조실록 41) 본문
한국의 역사 634 : 조선의 역사 176 (선조실록 41)
임진왜란 경과
제14대 선조실록(1552~1608년, 재위: 1567년 7월~1608년 2월, 40년 7개월)
임진왜란 전투목록
아래 임진왜란 전투 목록은 임진왜란 중 있었던 전투 목록이다. 시간 순으로 작성되었으며, 모두 음력으로 날짜순대로 표시했다. 주요 전투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1592년
- 다대포 전투 : 4월 13일 ~ 4월 15일
- 부산진 전투 : 4월 14일
- 동래성 전투 : 4월 15일
- 경상도 및 충청도 함락 : 4월 17일~4월 28일
- 상주 전투 : 4월 25일
- 충주 탄금대 전투 : 4월 28일
- 한강 전투 : 5월 2일
- 옥포 해전 : 5월 7일
- 합포 해전 : 5월 7일
- 적진포 해전 : 5월 8일
- 해유령 전투 : 5월 16일
- 임진강 전투 : 5월 18일
- 기강 전투 : 5월 18일
- 사천 해전 : 5월 29일
- 당포 해전 : 6월 2일
- 당항포 해전 : 6월 5일
- 용인 전투 : 6월 5일
- 무계 전투 : 6월 6일
- 율포 해전 : 6월 6일
- 정암진 전투 : 6월 8일
- 여주 전투 : 6월 10일
- 제1차 평양 전투 : 6월 15일
- 웅치 전투 : 7월 7일
- 이치 전투 : 7월 8일
- 한산도 대첩 : 7월 8일
- 제1차 금산 전투 : 7월 9일
- 안골포 해전 : 7월 10일
- 우척현 전투 : 7월 10일
- 제2차 평양 전투 : 7월 17일
- 영천성 전투 : 7월 24일~7월 27일
- 지례 전투 : 7월 29일
- 제3차 평양 전투 : 8월 1일
- 청주 전투 : 8월 1일
- 제1차 경주 전투: 8월 2일
- 제2차 금산 전투 : 8월 18일
- 영원산성 전투 : 8월 25일
- 장림포 해전 : 8월 29일
- 화준구미 해전 : 9월 1일
- 다대포 해전 : 9월 1일
- 서평도 해전 : 9월 1일
- 절영도 해전 : 9월 1일
- 초량목 해전 : 9월 1일
- 부산포 해전 : 9월 1일
- 연안 전투 : 9월 2일
- 제2차 경주 전투 : 9월 8일
- 북관대첩 : 1592년 9월 16일~1593년 1월 28일
- 창원 전투 : 9월 27일
- 제1차 진주성 전투 : 10월 10일
- 독성산성 전투 : 12월 11일
1593년
- 제4차 평양 전투 : 1월 9일
- 성주 전투 : 1월 15일
- 벽제관 전투 : 1월 27일
- 웅포 해전 : 2월 10일~3월 6일
- 행주 대첩 : 2월 12일
- 제2차 진주성 전투 : 6월 29일
1594년
- 제2차 당항포 해전 : 3월 4일
- 영등포 해전 : 10월 1일
- 장문포 해전 : 10월 4일
1597년
- 칠천량 해전 : 7월 16일
- 고령 전투 : 8월 15일
- 남원 전투 : 8월 16일
- 황석산성 전투 : 8월 16일
- 어란포 해전 : 8월 27일
- 직산 전투 : 9월 7일
- 벽파진 해전 : 9월 7일
- 명량 해전 : 9월 16일
- 제1차 울산성 전투 : 12월 24일
1598년
- 절이도 해전 : 7월 19일
- 제2차 울산성 전투 : 9월 21일
- 사천성 전투 : 9월 28일
- 순천성 전투 : 9월 20일~10월 7일
- 노량 해전 : 11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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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암진 전투
정암진 전투는 1592년 음력 5월 24일 최초로 의병이 일본군과 싸워 승리한 전투로 이 승리로 일본군의 전라도 진격을 막고 곽재우(郭再祐)의 의병을 중심으로 의병들이 규합되었다.
정암진 전투 (임진왜란의 일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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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 | |||
조선 | 일본 | ||
지휘관 | |||
곽재우 | 안코쿠지 에케이 | ||
병력 | |||
의병 50명 | 병력 2000명 |
임진왜란 초기 일본군에게 크게 밀린 조선 조정은 3대 곡창 지대 중 경상도와 충청도를 잃고 남은 전라도는 쌀이 가장 많이 나는 지역이기에 필수적으로 꼭 필요한 지역이었다. 이에 일본군은 전라도 진격 작전을 개시하여 일본군 6부대의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가 전라도 진격 작전을 지휘하고 고바야카와의 휘하 부하 안코쿠지 에케이(安国寺恵瓊)는 2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전라도로 통하는 길목인 경상도 의령으로 진격한다. 한편 선비 출신이었던 곽재우가 의령에서 최초로 의병 50명은 조직하여 거병하고 곽재우는 안코쿠지에 대항해 남강 북안의 정암진에 군사들을 매복시켰다.
음력 5월 24일 안코쿠지의 2000명 병력은 정암진 대안에 도착해 지역 주민을 동원해 도하 지점을 설정하고 정찰대를 보내 통과할 지점에 나무 푯말을 꽂아 표시를 해두고 뗏목을 만들어 도하 준비를 했다. 이에 밤 사이에 곽재우는 군사들을 동원해 나무 푯말을 늪지대에 꽂아두고 정암진 요소요소와 숲에 군사들을 매복시켜두었다. 날이 밝자 안코쿠지의 일본군 선봉대가 도하를 시작했으나 늪지대로 잘못 들어가 곽재우의 의병군에게 선멸되었고 안코쿠지의 주력군이 남강을 도하했으나 미리 대기하던 곽재우 군의 기습 공격을 받아 크게 패하고 말았다.
이 전투의 패배로 일본군 6부대는 전라도 진격을 포기하여 임진왜란 참전 일본군 부대 중 유일하게 전라도에 진출하지 못한 부대가 되었다. 최초로 의병을 일으켜 승리를 거둔 곽재우 의병 부대는 경상우도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의 도움으로 의령과 삼가 두 현을 곽재우의 지휘 아래에 편입시켜 병력이 1000명이나 되었고 전 목사 오운과 박사제의 3000명의 병력까지 합세해 총 4000명의 병력으로 불어났다.
홍의장군 魂 살아 숨쉬는 '의령 정암진' 망우당, 홍의장군으로 잘 알려져 있는 곽재우는 의령에서 출생했다. 그는 문무에 뛰어났으나 관직없이 초야에서 지냈다. 그러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자발적으로 부대를 조직, 나라에 대한 충의를 내걸고 싸웠다. 그는 임진왜란 최초의 의병 지휘관으로 뛰어난 전략과 용병술로 불패 신화를 남겼다. 곽재우를 홍의장군이라고 부른 것은 홍의에 백마를 타고 활약하면서 유명해졌기 때문이다. 곽재우는 휘하에 수천의 의병을 거느리면서 낙동강 지역의 현풍에서 남강 유역의 진주에 이르기까지 방어선을 구축하여 육로로 이동하는 왜병의 전라도 진격을 저지했다.
충익사에서 나서서 남강으로 향하면 정암진이 나온다. 남강이 의령을 지나 흐르면서 범람원인 정암들을 만들었다. 굽이치는 남강이 깎아놓은 절벽 위에 있는 정암루에 올라서면 넓은 정암들을 굽어볼 수 있다. 또 남강을 내려다보면 물 위로 솥을 닮은 바위인 솥바위(정암·鼎岩)가 솟아 있다. 정암진은 남강의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할 수 있는 곳이자, 임진왜란 당시 왜군을 맞아 대승을 거둔 곽재우의 혼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정암진이 왜 임진왜란의 격전장이 되었을까. 그것은 왜군이 부산에서 진주를 거쳐 호남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곳을 거쳐야 했기 때문이다. 곽재우는 이때 남강을 건너는 왜군을 늪지대로 유인하여 격멸시킨 것이다.
지금 정암루에 올라 이곳을 바라보면 예전의 늪은 사라지고 없다. 대신 제방을 쌓아 개간해 농경지로 이용하고 있다. 또 정암교가 놓이면서 이곳이 의령의 관문이 되었다. 이렇듯 남강과 정암진의 많은 변화로 임진왜란 당시의 현장감은 다소 떨어지지만, 눈을 감고 홍의장군과 의병들의 통쾌한 활약상을 상상해 보면 어떨까.
백승진(대구서부고 교사)
▷곽재우가 정암진에서 왜군을 격멸한 전략은?
곽재우가 정암진에서 2만의 왜군을 물리친 것은 바로 그가 정암진의 지리적 특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왜군 정찰대는 정암진 일대가 늪지이기 때문에 부대의 통행이 곤란하다는 것을 알고, 그들이 통과할 수 있는 지점에 나무를 꽂아 도로 표시를 해 두고 돌아갔다. 곽재우는 왜군 정찰대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다가 밤에 표지목을 늪지로 옮겨 꽂았다. 다음날 왜군이 잘못 표시된 표지목을 따라 늪지에 빠지자 곽재우가 기습 공격을 가해 왜군을 격멸한 것이다. 이것이 곽재우의 의병활동 중 가장 빛나는 승리로 꼽히는 정암진 전투다.
▷정암진의 지리적 특성은?
정암진은 함안과 의령의 경계를 흐르는 남강에 위치한 나루터가 있던 곳이다. 남강이 흐르면서 깎아낸 하천 절벽인 하식애와 침식되다 남은 강물 속에 솥을 닮은 바위인 정암이 있어 경치가 매우 아름답다. 지금은 정암교가 놓여 남강을 쉽게 건널 수 있다. 정암루에 올라서면 남강이 범람하면서 퇴적물을 쌓아 만들어 놓은 범람원인 정암들을 볼 수 있다. 정암들은 현재 제방을 쌓아 개간하여 논으로 이용하고 있지만, 임진왜란 당시는 질퍽한 늪지대였다. 곽재우가 정암진에서 왜군을 크게 물리친 것은 바로 이런 남강과 주변의 절벽, 그리고 넓은 범람원 지형을 이용했기에 가능했다.
의병장 곽재우, 그는 누구인가?
![](http://www.segye.com/content/image/2009/04/14/20090414000206_0.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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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의장군 곽재우 상상도. |
1592년 4월 13일 일본의 함대가 부산포 앞바다를 까맣게 메우고 있었다. 이어진 조선군과의 혈전. 부산포 첨사 정발이 전사하였고, 동래부사 송상현의 장렬한 전사와 함께 동래성도 무너졌다. 왜적의 진군에는 거칠 것이 없었다. 그러나 전란 초기 관군의 거듭되는 패전 속에서 국왕이 국경선 지역까지 피난 가는 치욕을 맛보는 수모를 당하는 가운데서도 반격의 물꼬를 틔우는 움직임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바로 지방 사림들이 중심이 되어 의병을 조직하여 저항한 것이다. 의병은 자발적으로 봉기한 군사들로서 전직관료, 유생, 일반 백성, 노비, 승려까지 의병에 참여하면서 조선 최대 위기의 순간을 극복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중에서 곽재우는 가장 먼저 사재(私財)를 털어 의병을 일으켰다.
임진왜란 직후 의병이 전국에서 일어난 상황은 ‘선조수정실록’의 아래 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다.
“각 도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이때에 삼도의 신하들은 모두 인심을 잃고 있었다. 때문에 왜란이 일어난 뒤에 병기와 군량을 독촉하니 백성들은 모두 질시하여 왜적을 만나면 피신하였다. 마침내 도내의 거족(巨族)으로 명망 있는 사림과 유생 등이 조정의 명을 받들어 의(義)를 부르짖고 일어나니, 소문을 들은 자는 격동하여 원근에서 응모하였다. 크게 성취하지는 못했으나 인심을 얻었으므로 국가의 명맥은 이에 힘입어 유지되었다. 호남의 고경명, 김천일, 영남의 곽재우, 정인홍, 호서의 조헌이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켰다.”(‘선조수정실록’ 선조 25년 6월 1일)
위의 기록에서 보듯이 관군이 패전을 거듭하고 조정의 신하들이 인심을 잃고 있었던 것과는 달리, 지방의 명망 사족들은 백성들이 주축이 된 의병들을 조직하여 적극적인 저항에 나섰다. 이 중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인물은 곽재우(1552?1617)였다.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킨 곽재우는 자신의 재산을 모두 털어 의병을 모집했다. 당시 그의 휘하에 모인 군사가 1000여명에 이를 정도였다고 하니 평소에 그가 닦아 놓은 기반이 만만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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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의령 곽재우 생가. |
40세가 넘은 나이에 의병운동을 하는 그를 보고 미친 사람이라거나 도적 노릇을 한다는 비아냥도 있었지만 곽재우는 민첩한 첩보활동과 신출귀몰한 게릴라전을 통해 가는 곳마다 승리를 거두었다. 남강의 나루터 정암진(鼎巖津)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둔 후, 의령?삼가?합천 등을 수복하였고, 이어 현풍?창녕?영산의 왜군까지 섬멸하여 경상우도 지역을 평정하였다. 적지 않은 나이에 전 재산을 털어 항전에 나선 곽재우. 그는 위기의 시기에 사회 지도층이 해야 할 책임과 역할을 몸소 보여주었다. 최근 다시 회자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용어가 곽재우에게 무척이나 어울려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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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의장군 곽재우 등이 진주목사 김시민 장군이 지휘하는 관군과 연합해 1592년 왜적을 대패시킨 진주성의 17세기 지도. |
의병장들은 대부분이 지역의 명망가로서, 이들을 따르는 농민과 천민이 자발적으로 합세함으로써 의병의 전투력은 향상될 수 있었으며, 자신의 지역을 거점으로 게릴라전과 유격전을 수행하였기 때문에 지리에 어두운 왜적들을 후방에서 교란시키면서 이들을 격퇴하는 데 선봉이 될 수 있었다. 의병에는 불법을 닦는 승려들도 참여하였다. 서산대사로 더 잘 알려진 휴정은 선조의 명을 받들어 팔도의 사찰에 격문을 보내 승병 결성을 독려하였다. 금강산 표훈사에 있던 휴정의 제자 사명당 유정은 휴정의 격문을 받고 다시 사방에 글을 띄워 무리를 모아 평양에 도착하였는데 거의 1000여명이나 되었다. 이들 승병들은 직접 전투에 참여하기보다는 경비나 무너진 성의 보수와 같은 임무에 투입되었는데 전열이 흐트러지지 않아 여러 곳에서 이들의 지원을 받았다.
의병들은 관군과의 연합전도 전개하였다. 진주성 전투가 대표적으로 1차 진주성 전투(1592년 10월)에서는 진주목사 김시민이 지휘하는 관군과 곽재우, 최경회, 임계영의 의병 부대가 합류하여 왜적을 대패시키는 전과를 올렸으며, 2차 진주성 전투(1593년 6월) 또한 관군과 의병의 합작으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2차 진주성 전투에서는 적장을 껴안고 투신한 의기(義妓) 논개의 활약이 두드러졌는데, 8000여명의 병력으로 3만의 왜적을 물리쳤다. 이외에 서산대사, 사명당, 처영, 영규 등 승려들도 의병장이 되어 승군을 조직하여 전투에 적극 참여하여 승리에 크게 기여하였다.
전국에서 의병의 봉기가 활발히 이루어진 것은 지방의 수령과 무장들의 무능에 대한 비판과 함께 ‘내 고장은 내가 지킨다’는 자발적 향토방위 조직이 사림을 중심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의 국시로 채택된 성리학 이념의 충의(忠義) 정신 또한 한몫하였다. 의병 활동은 경상우도 지역에서 가장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는 이 지역이 왜적의 주요 침입로가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조선중기 칼을 차고 다니면서 의(義)의 중요성을 강조한 남명 조식의 사상적 영향력도 큰 작용을 하였다. 곽재우, 김면, 정인홍, 조종도, 이대기 등 조식의 문하에서 최대의 의병장이 배출된 것은 이러한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조식의 실천중시 사상은 이 지역 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어 국난의 시기에 힘을 발휘할 수 있게 하였던 것이다. 합천의 정인홍, 의령의 곽재우, 고령의 김면 등은 이 지역에서 배출한 대표적인 의병장이자 조식의 문인이었다. 곽재우는 조식의 외손녀 사위로서 조식에게 직접 병법을 배우기도 했다. 경상우도 지역 의병의 활약은 곡창지대인 호남지방을 보호하고 일본군의 보급로를 차단함으로써 임진왜란에서 승리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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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차례에 걸쳐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경남 진주성의 모습. |
곽재우를 비롯한 의병장들의 활약은 전국 곳곳에서 조선이 승리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지만 대부분의 의병장은 활약만큼의 대우를 받지 못하였다. 의병들의 공이 컸다는 것은 관군의 역할이 미미하였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인데 그것은 정권 담당자들에게 큰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또 백성들의 신망을 받고 있던 이들이 혹시 어수선한 시국과 전란으로 인한 불만을 틈타 모반을 꾸미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도 있었다. 실제로 전란 중에 곳곳에서 도적이 일어나고 모반사건도 발생했는데 이들은 세력 규합을 위해 이름난 의병장의 이름을 파는 경우가 있어 정부는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의병장 김덕령은 대표적인 희생자였다. 김덕령은 전라도 광주 석저촌 출신으로, 유학을 익힌 데다 무예에도 뛰어나 ‘지혜는 제갈공명과 같고 용맹은 관우보다 낫다’는 평가를 받았다. 무게가 100근이나 나가는 큰 철퇴 두 개를 허리 아래 좌우에 차고 다녀 ‘신장(神將)’이라고 불렸던 그는 1593년 겨울 어머니 상중임에도 담양에서 의병 수천 명을 규합하여 의병전쟁에 뛰어들었다. 가는 곳마다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어 그 이름만으로도 왜병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는 김덕령이었지만, 그의 활약을 견제하는 세력들의 집요한 모함을 받았다. 1596년 7월 전쟁의 와중에서 이몽학의 역모 사건이 일어났고, 관련자들의 공초(供招?죄인이 범죄 사실을 진술하던 일)에 장수가 김덕령이 함께 거병을 모의했다는 등의 진술이 나오면서 김덕령은 체포되었다. 결국 김덕령은 고문으로 정강이뼈가 부러지는 고통을 당하면서 숨을 거두었다.
곽재우가 의병장으로 크게 활약한 후 산으로 들어간 것도 현실 정치에 대한 회의 때문이었다. 전후에 전공(戰功)은 왕을 호위했던 공신들의 손에 넘어가고 의병장에 대한 대접은 취약하였기 때문이었다. 조정에서도 전쟁 초기 경상감사까지 죽이려고 했던 곽재우를 매우 위험한 인물로 인식하였다. 전란이 끝나자 조정에서는 은밀히 감시인을 파견하여 곽재우의 동정을 살피면서 그를 압박해 나갔다. 이에 곽재우는 관직에 뜻을 잃고 현풍의 비슬산으로 들어갔다. “고양이를 기른 것은 쥐를 잡기 위함이니, 이제 적이 이미 평정되었으니 나는 할 일이 없다. 이제 돌아갈 것이다”는 말을 남기고 산으로 들어간 곽재우는 이곳에서 도가(道家) 사상에 심취하여 단곡(斷穀?곡식을 끊는 도가의 수련법)에 심취하면서 말년을 보냈다.
전란 후에 선조는 전쟁의 최고 공로를 조선을 도와준 명나라 군대의 공으로 돌렸고, 이 과정에서 선조와 함께 피난길에 오른 대신들이 전쟁의 최고 공로자로 보상을 받는 해프닝이 일어났다. 실제 임진왜란 유공자에 대한 논공행상 과정에서 선조를 수행한 호성공신(扈聖功臣)은 86명이나 책봉한 데 비하여, 전공(戰功)이 있는 사람에게 준 선무공신(宣武功臣)은 18명에 지나지 않았다. 곽재우는 추천을 받았지만 생존해 있다는 이유로 공신에 책봉되지 못했다. 공신의 책봉 과정에서도 전쟁 영웅들에 대한 격하 작업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위기의 순간 자신의 책무를 다했던 김덕령, 곽재우 등 전쟁 영웅들의 비참한 말로는 일제 치하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인물들과 그들의 후손이 별다른 평가를 받지 못했던 우리 현대사를 떠올리게도 한다.
대구 망우당 공원에 있는 곽재우의 상. 곽재우는 임진왜란 당시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의 서진을 차단하여 궁극에는 전라도를 지켜내는 데 커다란 공을 세웠다. 신출귀몰한 작전을 통해 연승을 거둠으로써 당시 조선 사람들에게 퍼져 있던 일본군에 대한 공포심을 불식하는 데도 큰 역할을 했다. 충의당 제공 |
한명기의 -420 임진왜란
의병의 봉기
“여러 도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당시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의 수신(帥臣)들이 모두 인심을 잃은데다 군사와 식량을 징발하자 사람들이 모두 밉게 보아 적을 만나기만 하면 전부 달아났다. 그러다가 도내의 거족(巨族)과 명인(名人)들이 유생들과 함께 조정의 명을 받들어 의를 떨쳐 일어나자 듣는 사람들이 격동하여 원근에서 응모했다. 크게 성취하지는 못했으나 인심과 국가의 명맥이 그들 덕분에 유지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이 일어나게 된 전말을 기록한 <국조보감>의 내용이다. 국가의 입장, 재조(在朝) 관인의 입장에서 의병의 봉기를 바라보는 이중적인 시각이 잘 드러나 있다. ‘의병 덕분에 인심과 국가의 명맥이 유지되었다’고 하면서도 ‘조정의 명령을 받았다’, ‘크게 성취하지는 못했다’고 하여 의병의 자발성을 부정하고 역할을 평가절하하려는 속내도 동시에 드러내고 있다.
이광·윤선각·김수 6만 대군의 용인 패전
개전 직후 육지 전투에서 일본군에 일방적으로 밀리고 선조와 조정이 서울을 버리고 의주까지 내몰리면서 조선 조야의 사기는 저하되고 백성들의 위기감은 높아졌다. 특히 1592년 6월, 전라도 순찰사 이광(李洸), 충청도 순찰사 윤선각(尹先覺), 경상도 순찰사 김수 등이 이끌던 6만 가까운 대군이 용인에서 패전했던 것은 조선 관군의 실상을 보여주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이광은 애초 수만의 군사를 이끌고 서울로 들어오려다 금강 부근에서 선조 일행이 이미 파천했다는 소식을 듣고 전주로 귀환했다. 지역 민심은 들끓었다. “관찰사가 싸우지도 않고 돌아올 수 있느냐?”는 비난과 질책이 이어졌다. 심기가 불편해진 이광은 다시 북상했다. 그리고 그 대열에 윤선각의 충청도 병력과 경상도에서 이동해 온 김수의 병력이 합류했다.
이광의 부대는 병력은 많았지만 질서와 기율이 없었다. 행군 장면을 두고 “선두와 후미가 서로 응하지 않아서 양을 몰고 목장으로 나가는 것 같았다”는 비아냥이 나올 정도였다. 용인에 이르러 선봉 백광언 등이 “다수의 오합지졸로 싸우면 위험하니 부대를 쪼개 진을 나누자”고 건의했으나 이광은 듣지 않았다. 병법을 알지 못했던 문관의 한계였다.
일본군은 매복하여 기만전술을 폈는데 이광의 병력은 소소한 승리를 거두자 오만해졌다. 6월6일 아침, 이광은 광교산에 진을 치고 병사들에게 아침 식사를 명했다. 취사를 위해 연기가 피어오르자 일본군 기마대가 돌격해 왔다. 몇 명 되지도 않는 일본군이 칼을 휘두르며 달려들자 수만의 대군이 속절없이 무너졌다. 적에 대한 기본적인 경계조차 제대로 하지 않아 비롯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숫자만 많은 오합지졸과 전장 경험이 풍부한 ‘베테랑’과의 싸움이 빚은 결과였다. 어마어마한 군세에 기대를 걸고 이광 군의 진영 근처로 모여들었던 경기도와 충청도 피난민들도 조선군이 패주하자 기겁을 하고 달아났다. 기대가 다시 실망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이광 군의 경우에서 보이듯 관군이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는 상황이 이어지면서 나라가 망할 것이라는 체념의 분위기가 번져갔다. 그에 맞물려 전국 곳곳에서 불온한 움직임이 감지되었다. 전란 초기에 일본군에게 유린되었던데다 지역의 수령들마저 대거 도주했던 경상좌도에서는 부일배(附日輩)들이 속출했다. “김해와 동래 등지의 백성들은 모두 왜적에 붙어서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하며 여인들을 더럽히는 것이 왜적보다 심하였다”는 기록이 나올 정도였다.
대표적인 의병장 고경명의 사당. 1592년 5월 담양에서 의병대장으로 추대된 고경명은 수천명의 병력을 이끌고 근왕하기 위해 행재소로 향하던 중 금산에서 일본군과 결전을 벌여 장렬하게 순절했다. 광주 광산구 소재.(위) 함경도 의병장 정문부의 문집 (農圃集). 경성에서 의병을 일으킨 정문부는 회령 지역의 반민(叛民) 국경인 등을 처단하고 길주 등지에서 일본군을 격파함으로써 중앙정부에 대한 반감이 깊었던 함경도의 민심을 수습하는 데 공을 세웠다. <새롭게 다시 보는 임진왜란>(1999)에서 전재. |
잇단 패전, 망국의 그림자에
일본 앞잡이가 된 백성이 속출
급기야 조선 왕자들을 잡아다가
왜군에 바치는 일까지 생겼다
마침 곽재우 등이 의병을 일으켜
불온한 민심을 돌려놓으니
선조는 이를 극찬해 벼슬을 내렸다
그러나 의병장들이 관인들의
무능을 질타하면서 갈등이 번졌고
관인들의 정점에 선조가 있었다
부하들 공포심 없애려는 곽재우의 연출
주목되는 것은 김해 지역 주민들 가운데 조선인과 일본인의 경계를 넘나들며 생존을 도모하는 자들도 있었던 점이다. 평소 보따리 속에 일본인의 옷과 신발을 싸 갖고 다니다가 위기 상황이 닥치면 일본인 모습으로 변장하는 자들도 나타나고 있었다.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위험한 현실에서 목숨을 보전하기 위한 안간힘이었다.
지방관의 장정 동원과 물자 징발에 시달리던 전라도에서는 폭동이 일어났다. 순창과 옥과에서는 수령의 징발 명령에 불만을 품은 군사들이 관아를 습격하여 옥사를 파괴하는 난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함경도의 상황은 특히 심각했다. 지역 주민들이 일본군이 들어오기도 전에 난동을 일으켜 수령이나 지휘관들을 공격하는 일이 일어났다. 실제로 함경병사 한극함이 경원 백성들에 의해 일본군에 넘겨졌다. 함흥의 생원 진대유(陳大猷)는 자신들의 딸을 일본군에게 바친 뒤 밀정이 되어 저항을 꾀하는 조선인들을 신고하여 처단하도록 했다.
함경도는 여진족의 거주 지역과 가까운데다 일찍부터 중앙정부에 대한 반감이 강했던 곳이다. 또 과거 등을 통해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이 여의치 않았고 전국의 범죄자들이 귀양 오는 중심지이기도 했다. 이런 배경 속에서 일본군이 함경도에 진입하게 되자 토착민들은 중앙정부에 대한 반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급기야 회령에서는 귀양살이하던 아전 국경인(鞠景仁) 등이 왕자 임해군과 순화군을 포박하여 가토 기요마사에게 넘겨주는 충격적인 사건마저 일어났다. 함경도의 지역 정서를 제대로 헤아리지 못한 채, 두 왕자와 그를 수행하던 관속들이 지역민들에게 자행했던 민폐에 반발하여 일어난 사건이었다.
일본군의 앞잡이가 되는 백성들이 속출하고 왕자들까지 사로잡혀 일본군에게 넘겨지는 일이 벌어지면서 조정의 고민은 깊어갈 수밖에 없었다. 일본군을 막아내는 것 못지않게 민심을 수습하는 것이 전란의 극복 여부를 가늠하는 중요한 과제로 떠오르고 있었다.
연이은 패전과 불온한 민심 때문에 고민하던 조정의 입장에서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들의 활약은 분명 한 줄기 ‘복음’이었다.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킨 이는 경상도 의령의 유생 곽재우였다. 그는 일본군이 침략한 직후인 1592년 4월24일, 사재를 털고 집안의 가동들을 이끌고 봉기했다. 곽재우는 신출귀몰한 유격전을 구사하면서 정암진(鼎巖津) 전투를 비롯한 여러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의 활약 덕분에 일본군은 쉽사리 경상우도로 들어오지 못했고, 궁극에는 전라도의 안전까지도 상당 기간 확보되었다. 또 주목해야 할 것은 그의 활약을 통해 ‘일본군은 무적’이라는 선입견과 패배의식이 깨졌다는 점이다.
<선조실록>에 보면 “곽재우가 일본군의 심장을 구워 먹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일견 엽기적으로 보이는 이러한 내용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그것은 필시 곽재우의 의도된 행동으로 여겨진다. 초전에 경상좌도 지역이 철저히 유린되고 “일본군은 감당하기 어렵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우도의 각 고을들 또한 줄줄이 무너질 형편에 처해 있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곽재우는 일본군의 심장을 구워 먹는 행동을 통해 ‘일본군도 조선인과 똑같은 오장육부를 가진 존재’이고 ‘칼이나 화살을 맞으면 죽는다’는 사실을 환기시키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일본 정규군에 비하면 ‘오합지졸’일 수밖에 없었던 부하들의 공포심을 없애기 위한 연출이 아니었을까?
의병장이 경상감사의 목을 치겠다고?
곽재우의 거병 이후 경상도에서는 정인홍, 김면, 박성 등 조식의 제자들을 비롯하여 권응수 등이 줄줄이 의병을 일으켰다. 비슷한 시기 전라도의 고경명과 유팽로, 김천일 등도 봉기했고 충청도의 조헌, 경기도의 우성전, 황해도의 이정암 등도 잇따라 들고일어났다. 민심이 가장 흉흉했던 함경도에서도 정문부가 거병함으로써 분위기가 바뀌었다. 그는 의병을 일으킨 직후, 왕자들을 일본군에게 넘긴 국경인 등을 처단하는 한편 부일의 정도가 경미한 자들을 풀어주어 지역의 민심을 수습했다.
곳곳에서 예기치 못한 의병들의 저항을 받는 바람에 일본군은 적지 않은 타격을 받고 전체적인 작전 계획에 차질을 빚었다. 연이은 패전과 파천, 그리고 적대적인 민심 때문에 고민하던 선조와 조정은 의병들의 활약에 고무되었다. “의병 덕분에 망해 가던 나라가 다시 살아나게 되었다”는 상찬 속에 곽재우를 비롯한 의병장들에게는 벼슬이 내려졌다.
막다른 위기 국면에서 나타난 활약을 통해 의병과 의병장들에 대한 조정의 평가는 높아졌지만, 그러한 분위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의병장들과 관군 지휘관들 사이에 갈등이 빚어졌기 때문이다.
곽재우를 비롯한 의병장들은 전란 초반 적과의 싸움을 회피하고 도주했던 지방관들의 비겁함을 성토했다. 특히 곽재우는, 전란 직후 도주했던 경상감사 김수를 직접 처단하려고 시도했다. 그는 거병 직후 의병들에게 보낸 통문에서 김수를 통박했다. “김수는 나라를 망하게 하려는 큰 반역자이다. 옛 법도에 따르면 누구든지 그의 목을 베어야 한다. 왜적을 맞아들이고 서울까지 내줘 임금에게 피난 가게 했으니 그를 어찌 감사라 하겠는가? … 그의 목을 베어 바친다면 그 공적은 풍신수길의 목을 바치는 것보다 몇 배나 더 클 것이다.”
김수, 아니 재조 관인들이 보면 곽재우의 격문 내용은 섬뜩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권위가 땅에 떨어졌다고 하더라도 경상감사는 종2품의 고관이다. 그런데 일개 유생 신분에 불과한 곽재우가 그를 처단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곽재우만큼 과격하지는 않지만 고경명과 조헌의 입장도 비슷했다. 고경명은 각 고을에 돌린 통문에서 우물쭈물하는 지방관들을 ‘나라를 완전히 저버린 자’들이라고 성토했다. 또 순찰사 이광에게도 각성하라고 촉구했다. 조헌도 거병을 촉구하는 격문에서, 달아나 버린 관인들을 준열하게 질타했다. “왜적을 치는 데 협조하지 않는 사람들은 도망친 지방관들과 같은 자이므로 전쟁이 끝난 뒤 중형에 처할 것”이라고 공언했다.
갈등은 재야 의병장과 재조 관인의 자존심 싸움으로 비화되었다. 스스로 떨쳐 일어나 목숨을 걸고 싸운 의병장들이 보기에 김수 같은 인물은 ‘처단해야 할 대상’이었다. 하지만 재조 관인들이 보기에 곽재우 등의 행위는 권력에 대한 도전이었다. ‘재야’의 도전을 방치하는 것은 결국 국왕 선조의 권위를 갉아먹는 행위였다. 선조는 곧 의병 손봐주기에 나선다. 의병장들에게 수난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선조는 자신은 무능한 군주로, 이순신과 의병장들을 만고에 충신으로 만든 장본인
조선의 임금 선조는 붕당정치를 통한 성리학적 이상적인 사회를 꿈꾸었으나 임진왜란이라는 초유의 환란을 당하자, 연전연패하는 조선군을 보고 도성과 백성을 버리고 도망치기에 급급하였고 요동으로 망명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적과 싸우겠다는 비장한 각오도 없이 오로지 자신의 목숨을 유지하는 데 전념하였다. 신하를 시험하고 바른말하는 미운 신하는 자신이 떠나면서 남아 고을을 지키도록 명령했다. 주변 간신과 무능한 문무관들의 청을 들으면 마음이 급변하여 사실을 확인도 않은 채 장수들의 목숨을 파리처럼 처형했다. 임란초 성을 버리고 군사들을 흩어버린 다음 도망만 다니던 장수와 관리들을 옹호하고 국난의 위기에서 나라를 위해 분연히 일어섰던 의병장들을 의심했다. 명령체계도 엉성할 뿐 아니라 기강도 무너졌고 충과 효를 달달 외우던 선비 출신들이 자신의 책임과 본분을 제대로 수행한 사람이 드물었다.
그러나 명군의 지원으로 다시 국토와 한양을 회복하고 일본군이 남쪽으로 물러가고 조정이 기능을 되찿게 되자 자만심이 되살아나기 시작한 선조는 이순신의 승리도 달갑지가 않았다. 점점 백성들의 민심을 이순신에게 향하고 있었던 것이며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의병장들의 관리들에 대한 질타도 모두 자신에게 향하고 있다는 사실에 불안해했다. 유사시에는 의병장들과 이순신이 자신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순신이 판옥선 한 척당 150여 명의 태운 판옥선 100척에 수군 1만 5천 명을 태우고 서해를 통해 한강을 거슬러 올라와 한양을 급습한다면 도성은 속수무책이라는 간신들의 이야기에 불안함을 감출수가 없었던 것이다. 또 백성들도 이순신을 자신보다 더 위대한 인물로 생각하고 있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순신의 연전연승에 백성들의 환호와 관심이 쏠리면서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된 이순신이 한산도에 본영을 설치하고 둔전을 일구고 식량을 비축하며 병장기를 정비하고 전함을 건조하는 등 일본의 재침에 대비하여 전력 강화에 힘쓰고 있었다.
백성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으면서 점점 세력이 비대해지는 이순신에 대해서 위기감을 느낀 선조는 간신들의 모함으로 결국 이순신을 파직하여 백의종군토록 하고 대신 자신이 총애하던 원균을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했다. 그러다가 정유재란이 터졌다. 그러나 원균은 칠전량 해전에서 이순신이 그토록 몇 년에 걸쳐 키워 놓은 조선 수군 대부분을 잃고 대패하고 자신도 목숨을 잃고 말았다. 다시 선조는 여론에 떠밀려 이순신을 통제사에 임명했다. 다시 통제사에 임명된 이순신은 남은 전선 12척으로 일본의 대함대 133척을 맞아 명량 대첩에서 크게 승리하여 다시 재해권을 되찿았다. 이제는 그의 승첩 보고도 그리 달갑지가 않았다. 그래서 이순신은 선조로부터 점점 더 옥죄임을 당하고 있던 차 마지막 전투 노량 해전이 벌어졌다. 선조는 더 이상 희생을 줄이기를 원했고 또 이순신의 승리를 더이상 보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철수하려는 일본군을 그냥 순순히 돌려 보내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이순신의 단호함에 자신의 명령을 어기는 일에 초점을 맞추어 항명으로 간주하고 이순신을 체포하기 위해 선전관을 내려 보냈다. 그러나 이순신은 이미 선조의 속내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노량 해전에서 스스로(?) 장렬하게 전사하면서 임진왜란은 종국을 맞는다.
마지막 승리와 영웅의 죽음으로 이순신은 영원한 민족의 충신이 되었고 선조는 우리 역사에서 영원히 무능한 군주로 남게 되었던 것이다. 선조의 무능함이 그들을 더욱 만고에 충신들로 빛나게 했는지 모른다. 이렇듯 질투심 많고 눈과 귀가 얇고 자신의 영달에만 열중하던 무능했던 선조는 조선이 당한 국난의 중심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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